화산귀환-1665화
1665화. 그곳이 어디든. (5)
콰득!
잘 닦은 동경처럼 매끈한 백색 벽면으로 인간 떼가 오른다.
“올라가라! 올라가!”
누군가의 악다구니가 고막을 파고든다. 목이 터지도록 울리는 외침은 흡사 전장의 북소리처럼 심장을 뒤흔들어 놓았다.
“후욱! 후욱!”
벽면에 손을 박아 넣고 절벽을 타오르던 이가 문득 반사적으로 밑을 내려다보았다. 오금이 저릴 만큼 까마득하다.
“아⋯⋯.”
그 순간, 그의 눈에 공포가 깃들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그리고 이를 타고 오르는 인간의 무리. 그 기괴한 광경은 숱한 생사의 기로에 서 왔던 사패련 무인의 심장조차 오그라지게 했다.
“올라가!”
“미, 밀지⋯⋯. 아, 아아아아아악!”
아래에서 밀고 올라오는 힘에 일순 균형을 잃은 이가 절벽 면에서 미끄러지며 아래로 추락했다.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악!”
비슷한 비명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무기를 쓸 수 있는 자라면 누구든 긁어모으는 곳이 사파다.
제각기 무공의 수위가 다른 이들이 절벽 타는 속도를 맞춘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비켜!”
“아아아아아아악!”
심지어 목숨을 걸고 절벽을 오르는 이상, 주위의 사정을 하나하나 헤아리고 봐줄 여유 따윈 없다. 뒤처지는 이는 잡아끌어 내리고, 오를 능력이 없는 이는 걷어차 밀쳐 낸다. 그저 위만 바라보며 절벽을 오르고 또 오른다.
그들이 그렇게 절벽을 오르는 이유는 오직 하나.
“오, 온다!”
화르르륵!
한번 밀려났던 불길이 바람을 타고 다시 쏟아지듯 절벽을 뒤덮는다.
그나마 불길을 내력으로 밀어낼 수 있는 이들은 목숨을 보전했지만, 그럴 능력이 없는 이들이 맞이할 결말이야 뻔했다.
“아아아아아아악!”
누군가가 불이 옮겨붙은 얼굴을 감싸 쥐며 절벽 아래로 분분히 떨어져 내린다.
무당의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이미 희생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무의미한 희생을 감수한, 대책 없는 돌격. 병법적으로는 악수 중 악수라 불러야 할 전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전략이 무당에게 주는 압박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옵니다!”
펼쳐진 불지옥과 그로부터 밀려드는 사람 떼.
지옥 밑바닥에서 악귀들이 지상으로 오르는 광경을 보는 것만 같다. 저들의 악의가 확연히 무당에게만 향해 있다는 점에서는 어쩌면 악귀보다 더 끔찍할지도 모른다.
“침착해라!”
하지만 무당에도 확연히 유리한 점이 존재한다. 그건 이미 무당이 저 절벽 오르기를 한번 경험해 봤다는 사실이다.
“쏟아라!”
“예!”
콰르르르르르!
절벽 끝에 붙은 이들이 미리 쌓아 둔 커다란 돌무더기를 연이어 걷어차 아래로 굴렸다.
무인이 쓴다고 하기엔 믿기 힘들 만큼 단순한 공격 방식이다.
그러나 이미 한차례 몸으로 겪은 무당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절벽을 타는 이에겐 이 방식이 천하의 어떤 명검보다 더 위험한 공격이 된단 것을.
콰르르르르르!
쏟아진 바위가 절벽 면에 부딪히며 날카롭게 쪼개지고, 또 튀어나온 돌부리들을 마구잡이로 때려 부순다. 그렇게 억수같이 몸집을 불린 돌의 비가 절벽에 붙은 사파인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으아아아아아악!”
절벽을 탄다는 건, 한 손은 반드시 그 면에 붙여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력으로 몸을 보호할 경지에 오르지 못한 이들이 믿을 거라고는 그나마 단련한 몸뚱어리뿐이었지만, 한낱 인간의 몸뚱이는 수십 장을 낙하해 가속도를 붙인 바윗덩어리를 감당하기에 너무도 연약했다.
퍼억! 퍼어어억!
“아아아아아악!”
“아아악!”
단번에 살이 터져 나가고 뼈가 으스러진다.
속도가 붙은 바윗덩어리는 한 사람의 희생자로 만족하지 않고 그 아래에 있는 이들까지 모조리 휩쓸 기세로 굴러떨어졌다.
“이⋯⋯!”
콰아아아앙!
누군가가 황급히 날린 권력에 사람만 한 바윗덩어리가 분쇄되었다. 동시에 분노에 찬 목소리가 울렸다.
“등신 새끼들, 비명만 질러 댈 시간에 부수고 깨란 말이다! 비명 처지른다고 돌이 피해 가기라도 하냐! 이 빌어먹을 것들!”
협곡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친 털북숭이 장한은 씩씩거리며 앞서 있던 이의 발목을 낚아챘다.
“길 막지 말고 비켜라! 쓸모없는 놈!”
“아아아아악!”
걸리적거리는 이를 가차 없이 집어 던져 버린 장한은 위로, 또 위로 올랐다. 그리고 쏟아지는 돌의 비를 향해 무수한 권력을 내쏘았다.
콰콰콰콰콰콰!
쏟아지던 돌 비가 솟구치는 권력에 부딪히는 족족 분쇄되었다. 장한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선두로 치고 나온 이들이 각자의 병장기를 휘두르며 돌을 쳐 내기 시작했다.
“올라라! 이 틈에 오르란 말이다! 어차피 너희에게 퇴로는 없다! 여기 들러붙어 불에 타 죽을 때만 기다릴 게 아니라면 올라가서 살아남으란 말이다!”
“기어 올라가! 당장!”
확실히 빠르고 현명한 대처였다.
무학의 수준은 명문정파에 미치지 못할지 모르나, 숱한 전투를 치러 온 사패련의 무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빠르게 판단할 줄 알았다. 그랬던 이들만이 살아남아 왔으니까.
이는 변칙적인 전장에서 발휘되는 사패련의 가장 커다란 힘 중 하나였다.
“쏟아라!”
또다시 돌무더기가 무자비하게 절벽을 타고 쏟아져 내린다.
콰르르르르르르!
“깨 부숴라아아아아아아!”
하나 이번에 쏟아진 바위는 사패련 악도들의 몸을 쓸어 내지 못하고 미리 쏘아진 경기에 모조리 튕겨 나갔다.
마침내 이 공격에 적응하며 익숙해지고 만 것이다.
“사숙!”
준비한 게 통하지 않자 무당의 제자들이 조금 당황하여 허공을 돌아보았다. 허공이 짧게 혀를 찼다.
만일 과거의 사패련이 그랬던 것처럼 달군 기름과 화약을 준비할 수 있었다면 저런 놈들쯤은 단번에 정리해 버릴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무당에게는 과거의 장일소처럼 이 상황을 대비할 시간도, 여건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돌무더기 따위로 줄 수 있는 피해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이제 와 더 쓸 수 있는 수라고 해 봐야 통나무나 잘라 던지는 정도겠지만, 쏟아지는 바위도 부수는 놈들이 그깟 통나무에 당하겠는가?
“사파 주제에 한 수는 있단 건가?”
허공이 새파랗게 살기 어린 눈으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절벽 끄트머리를 떠나 뒤쪽으로 걸어 나왔다.
“다음 수를⋯⋯.”
“그럴 것 없다.”
몸을 돌린 허공이 벼락처럼 검을 뽑았다. 검에서 흰 검기가 솟구치듯 충천했다.
파아아아앗!
반월형의 형상으로 날아간 검기가 땅을 뚫고 들어간다.
카각!
그러더니 절벽 면을 뚫고 나와 허공으로 쏘아졌다. 이를 본 주변 모두가 두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이윽고.
그그그그극.
무언가 거대한 게 마찰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조금 전까지 그들이 딛고 있던 바닥이 서서히 절벽을 향해 밀려가기 시작했다.
“저⋯⋯.”
그그그그그그그극!
잘려 나간 땅, 이제는 거대하디거대한 바윗덩어리라 불러야 할 그것이 점점 더 속도를 높여 절벽을 향해 밀려 나가다 이내 기우뚱 기울어졌다.
장엄하다 못해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무당 제자들의 입이 쩌억 벌어졌다. 그러나 이들이 받은 충격은 감히 아래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는 이들의 충격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
가장 선두에서 절벽을 타고 오르던 털북숭이가 순간 오르던 걸 멈추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눈을 휘둥그레 뜬 그의 얼굴을 거대한 그림자가 가까워지며 뒤덮기 시작했다.
바위라는 말조차 무색한, 거대한 암석 덩어리.
절벽의 끝에서 기우뚱 기울어지는 저것은, 쏟아지는 돌의 비를 간단하게 쳐 내던 장한조차 절망하게 했다.
“저, 저거⋯⋯.”
쿠릉.
암석 덩어리가 절벽 끝을 부수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쿠르르르르르르릉!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절벽 전체를 모조리 부숴 버릴 기세로 바위가 낙하한다.
“피, 피해애애애애애애애애애앳!”
저항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상황에, 절벽에 매달려 있던 이들이 제각각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날렸다.
쿠웅! 쿠우우웅!
절벽이 부서지며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리고, 그 가운데로 ‘공포’라는 이름으로 명명해야 할 바윗덩어리가 구르며 절벽을 기어오르던 사파인들을 벌레처럼 짓이기고 터뜨렸다.
콰아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아앙!
“아아아아아아아악!”
그나마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는 이들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미처 몸을 빼내지 못하고 바위에 그대로 맞은 이들은 비명 지를 겨를도 없이 짓뭉개졌다.
콰아아아아아앙!
제 바로 옆을 스쳐 가는 바위의 기세에 휘청인 이가 경악한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 어떻게!’
과거 장강에서 그들은 이만한 바윗덩어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절벽을 화약으로 터뜨려야 했다.
하지만 저 위에 있는 무당 놈들은 화약이 아닌 검으로 절벽을 잘라 냈다.
그럼 저 검기가 수천 관의 화약과 같은 위력을 낸단 말인가?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무, 무당⋯⋯.’
불길과 광기에 휩싸이며 잠시 잊고 있었던 게 새삼 떠올랐다.
‘무당’이라는 이름의 중압감과 무게 말이다.
“올라라!”
살아남은 누군가의 악다구니가 다시 터져 나왔다.
“꾸물대면 다시 바위가 떨어질 거다! 살고 싶으면 더 빨리 올라라, 어서!”
그 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이대로 공포를 곱씹고 있어 봐야 돌아올 결과는 뻔하다. 모두 처음보다 더 악착같이 절벽을 타오르기 시작했다.
“살려면 올라라! 절벽 위로만 가면 저 개 같은 놈들의 목을 물어뜯을 수 있다! 올라라! 더 빨리!”
절망과 공포, 그리고 증오가 뒤섞인 눈이 하늘로⋯⋯. 아니, 하늘과 맞닿은 절벽의 끝으로 향한다.
“사숙!”
그리고 그 끝에 도도히 선 허공은 쏟아지는 살기와 증오의 눈빛을 무표정하게 받아 내었다.
뒤에서 그런 허공의 등을 바라보는 무당 제자들은 새삼 경의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허공이 보여 준 검기는 그들로서는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할 경지에 이르러 있었으니까.
허공이 무당 최고의 기재이자 천재로 불리는 이라고는 하나, 설마 벌써 이런 경지에 올랐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긴 봉문 동안 허공의 검은 과거와 비교할 수도 없이 날카로워진 것이다.
“다시 돌을 굴려라.”
“예, 사숙!”
무당의 제자들이 용기백배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허공과 함께라면 이길 수 있다. 저 증오스러운 적들을 모조리 분쇄할 수 있다.
그런 희망이 모두의 마음속에 차오르는 바로 그때였다.
“올라라! 기어오르란 말이다! 이 개 같은 놈들! 두려워하는 놈들은 내가 직접 목을 잘라 버리겠다! 당장 오르⋯⋯.”
아래에서 목줄기가 검붉어지도록 핏대를 세우며 악을 쓰고 수하들을 독려하던 이가 문득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미 절벽을 오른 이들이야 뒤가 없다지만, 아직 절벽에 들러붙지 않은 이들에게는 선택지가 있다.
조금 전 거대한 암석이 낙하한 이후, 아직 오르지 않은 놈들의 엉덩이가 조금씩 뒤로 빠지고 있다. 본보기 삼아 두엇의 목을 베었음에도 말이다.
이대로는 저들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목이 먼저 날아갈 판이다. 무슨 수라도 내야 하는데, 조금 전 펼쳐졌던 광경이 워낙 충격적이었던지라 그의 말도 칼도 잘 먹히질 않았다.
“당장 움직이라고, 이 개자식들⋯⋯.”
다시 한번 욕지거리를 하려고 윽박지르던 그가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감각에 움찔 뒤를 돌아보았다. 타오르던 불길이 좌우로 가볍게 갈라지고 있었다.
화르르르.
이윽고, 모습을 드러낸 한 사람이 느릿하게 걸어왔다.
“구, 군사!”
“군사를 뵙습니다!”
독심나찰 호가명은 그들의 예 따위엔 관심도 주지 않고 서늘한 눈으로 절벽을 응시했다. 곳곳이 파인 절벽과 그 아래로 보이는 거대한 암석의 흔적까지.
“과연, 한 수는 있다는 거로군.”
“구, 군사! 이대로 절벽을 계속 노리면 희생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예?”
“그래서?”
말을 꺼냈던 부관이 움찔하더니 고개를 재빨리 숙였다. 그로서는 호가명의 온기 없는 눈빛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무심하게 그를 일별한 호가명이 다시 절벽 쪽을 보며 말했다.
“희생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더 밀어 넣어라.”
“예, 군사!”
감정이랄 게 조금도 실리지 않은 호가명의 눈길은 절벽 위에 홀로 선 이에게 닿아 있었다.
그의 눈빛과 허공의 눈빛이 절벽을 사이에 둔 채 충돌했다.
호가명은 흡사 독백하듯 중얼거렸다.
“오늘 우리는 이곳에서⋯⋯ 무당이란 이름을 지운다.”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