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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66화


1666화. 미래는 있을 테니까. (1)

“뒤처지지 마라!”

“예!”

“너도 말이야, 이 새끼야!”

“끄으으으으응.”

임소병의 입술 새로 병자가 앓는 듯한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아니, 그는 애초에 병자가 맞으니까 그냥 앓는 소리라고 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아니……!”

“뭐?”

“……아닙니다.”

무어라 투덜거리려던 임소병은 조용히 입을 닫았다.

성질 같아서는 ‘내가 왜 그 일면식도 제대로 없는 무당 놈들 때문에 이 개고생을 해야 하냐?’라는 말로 쏘아붙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저 힘줄 꿈틀대는 주먹이 문답무용으로 날아들겠지.

‘산적들도 이렇게 무식하지는 않겠다. 망할 도사 새끼 같으니!’

하긴 따지고 보면 산적이나 도사나 뭐 그렇게 다른가? 둘 다 속세를 떠나 깊은 산중에서 자신들만의 삶을 산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다만 산적은 지나는 이에게 도움을 받고, 도사는 찾아오는 이에게 도움을 받는 게 아주 조금(?) 다를 뿐이다.

“저쪽 처진다!”

“아, 가고 있다고!”

임소병이 부리나케 달려가 뒤처지는 맹도의 엉덩이를 냅다 걷어찼다.

“아악!”

“야, 이 새끼야! 이렇게 아픈 사람도 달리는데 엄살 부리지 말고 뛰어!”

헐떡거리며 처지려는 이를 홧김에 괜히 다시 한번 걷어찬 임소병이 이를 빡빡 갈았다. 그래도 이렇게 보니 다들 죽을 둥 살 둥 낙오자 없이 달리고 있다.

‘그래도 어떻게…….’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전략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원래라면 벌써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고 드러누웠을 녹림도들도 어떻게든 달리고는 있었다.

소속과 무관하게 모두가 옆에서 달리는 이들을 힐끔대며 이를 악문다. 그리고 다시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며 다리에 박차를 가한다.

‘이런 효과가 있었네.’

고작 당을 만들고 사람들을 쪼개 놓은 것만으로 기존의 소속감이 사라질 리는 없다. 당에 대한 소속감이 문파에 대한 소속감을 뛰어넘는 건 앞으로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거꾸로 말하면 저들에게 여전히 타문에 대한 경쟁심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버티지 못하고 뒤처지면 수많은 눈빛이 자신에게 쏘아질 것이다. 주변에서 함께 달리는 게 사형제들이나 사문의 어른들이라면 자신의 모자람으로 끝날 일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좋은 결말을 기대할 수 없다. 자신의 모자람이 당연히 사문에 대한 비웃음으로 이어질 게 분명하니까.

‘그러니 죽는 한이 있어도 뒤처질 수는 없겠지.’

악을 쓰고 달리는 이들을 보고 임소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문의 명예를 두 어깨에 지고 달린다…….”

그 와중에 선두에서 달리는 어린 화산 놈들이 아직 쌩쌩하니 엄살을 부릴 여지도 없을 터다.

“명예가 뭐라고 이렇게 다들 한심하…….”

그 순간, 무언가가 그의 눈에 턱 걸렸다. 임소병이 두 눈을 부릅떴다.

“어디서 뒤처져, 이 염병할 산적 새끼들이 뒈지려고! 가죽을 홀랑 벗겨 줄까?”

“히, 히이이이익!”

“처지는 녹림 새끼들은 발목 힘줄 다 끊어서 개방으로 전직시켜줄 테니까 어디 한번 어떻게 되나 해 봐!”

임소병은 거의 입에서 불을 뿜으며 잔뜩 지친 녹림도의 등을 걷어차고 독려했다. 청명이 이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한심하다더니.”

“아, 녹림은 별개죠, 녹림은! 어디 쪽팔리게. 쯧쯧.”

……청명이 뚱한 얼굴로 바라봤지만, 임소병은 슬쩍 그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리고 입을 삐쭉거렸다.

“거, 그…… 한 푼 가치도 없는 명예 같은 거에 집착하는 게 아니라고요. 녹림은 얕보이면 장사 접어야 한단 말입니다. 알지도 못하시면서.”

“그래, 그래. 그러시겠지. 다 깊은 뜻이 있으시겠지.”

임소병이 괜스레 부채를 훌쩍 펼쳐 얼굴을 부쳐 댔다. 아니, 괜한 짓은 아니다. 땀이 줄줄 흐르고 있으니 부채질이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잠깐 숨을 길게 내쉰 임소병이 아까와는 달리 진지해진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그런데 의외로…….”

“습격이 없군.”

“그렇죠?”

청명의 눈빛 역시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다는 건, 놈들이 정말 무당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말이 될 수 있겠군요.”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

“물론 그렇지만.”

부채에 반쯤 가려진 임소병의 눈이 서슬 퍼런 빛을 흘렸다.

무당산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일도 속단할 수 없다. 그 어떤 일이든 벌어질 수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여기까지 딱히 함정이랄 게 확인되지 않았다는 건, 사패련의 목표가 이곳은 아니라는 의미가 분명했다.

임소병이 주위에 들리지 않을 만큼 소리를 낮춰 무거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속도를 조금 더 올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안 돼. 무리하다간 낙오한다.”

“그건 압니다만, 정말로 놈들이 무당을 노리는 거라면 아마 지금쯤 총공세에 들어갔을 겁니다.”

“…….”

“무당은 못 버팁니다.”

청명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그러나 잠깐의 침묵 끝에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무당이야.”

“알죠. 압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당이지요. 아시잖습니까? 전쟁은 개개인이 강하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무당에는 장일소나 호가명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순간적으로 허도진인의 모습이 슬쩍 떠오르기는 했으나, 임소병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허도진인으로는 안 된다.

그가 부족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허도진인은 이미 적에게 약점을 노출했다. 장일소와 호가명이라면 허도진인이 보인 약점을 지독하게 파고들어 그에게 어려운 선택만을 강요할 게 분명하다.

비슷한 전력을 지닌 채 치르는 전쟁이라면 어떻게든 버텨 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조차 사패련이 압도하는 상황이 아닌가?

싸울 수 있는가를 따질 때가 아니라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를 따져 보는 것이 옳다.

“그래도 안 돼.”

모든 걸 알고도 청명은 여전히 단호했다. 그의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희미하게 흘렀다.

“우리가 무리하는 순간 놈들이 언제 어떻게 마수를 뻗어 올지 몰라.”

임소병은 힐끔 앞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청명의 말대로, 한계다. 사실 임소병이 기존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기도 하다.

이 이상 속도를 올린다면 낙오자 발생은 물론이고 진형 자체가 붕괴할 수밖에 없다. 그럼 기껏 당을 만든 의미가 완전히 사라진다. 약점이 생기는 건 더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다.

그러잖아도 당에 대한 불신이 남은 가운데, 첫 출진부터 이들에게 그런 기억을 남길 수는 없다.

“하면 무당은…….”

“버틸 거다.”

청명이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하나 그것은 임소병에게 충분한 대답이 되어 주지 못했다. 버틴다고? 그 무당이? 저 사패련을 상대로?

아직 기억에 또렷하다. 장강에서 사패련의 계략에 놀아나며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한 채 박살 났던 곳이 바로 무당이다.

심지어 그때 무당이 섣부르게 패배를 선언하지만 않았어도 지금 강호의 구도가 달라졌을지도 모르는데.

한데 그런 짓을 저지를 만큼 무력했던 무당이 단독으로 사패련을 상대해 버텨 낼 수 있다고?

“허도진인을 믿으시는 겁니까?”

“아니.”

청명은 이번에도 단호했다. 대신 저 멀리,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그 방향에 있을 무당산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른이 굳이 키우려 애쓰지 않아도 아이는 자연히 자라는 법이지. 그리고 막으려 해도 언젠가는 지켜보던 어른보다 훌쩍 더 커 있고.”

“…….”

“상처가 있다면 더더욱 그렇더라고.”

“그게 뭔 말입니까?”

청명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

“거기에도…… 미래는 있을 테니까.”

* * *

파아아아아아앗!

다시 한번 잘려 나간 암석이 절벽으로 밀려들 듯 떨어져 내린다.

쿠르르르르르르릉!

하늘이 부서지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렸다.

“쏟아부어라!”

“예!”

암석을 파내고, 주위에 보이는 바위를 부숴서 만들어 낸 파편들이 절벽 면을 구르며 쏟아진다. 이제 단독으로는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돌덩어리들이지만, 거대한 암석과 함께할 때는 또 다르다.

“피해라아아아아앗!”

중앙에서 낙하하는 거대한 암석을 보고 사색이 되어 몸을 날리던 사패련도들에게 돌 비가 쏟아진다. 허공으로 이미 몸을 띄운 이들은 조금 전처럼 낙석에 의연히 대처할 수 없었다.

퍼억! 퍼억!

무시무시한 속도가 더해진 낙석이 허공에서 사패련도들의 육신을 부수어 놓는다. 어찌어찌 막아 낸 이들도 뒤로, 아래로 몸이 밀려 나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아아아아아악!”

추락하거나 아래로 미끄러지는 것. 흡사 동경의 면 같은 매끈한 절벽에서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게 있겠는가.

“저 개 같은 놈들이!”

바짝 약이 오른 사패련도들은 생으로 씹어 먹기라도 하겠다는 듯 절벽 위를 노려보았다. 장강에서 그런 눈빛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던 건 무당이었는데 말이다. 그때는 결국 절벽 위에 있던 이들이 승리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같을 것인가?

“구, 군사!”

한 번의 공격만으로 수십의 사패련도들이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그중 절반 넘게 즉사했을 테고, 제대로 된 시신도 못 남긴 놈들이 태반일 테다.

심지어 더 큰 문제는, 절벽을 오르면 오를수록, 더 많은 이들이 절벽을 타게 될수록 한 번의 공격으로 입는 피해가 늘어날 것이란 점이었다.

“좋은 검격이로군.”

하지만 호가명은 남의 일 보는 듯이 태연했다.

“뭐 하고 있느냐? 계속 련도들을 독려해라. 절벽을 가장 먼저 오르는 이에게는 영원한 부귀영화를 약속한다 전하고.”

“아, 알겠습니다, 군사!”

부관들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호가명은 담담히 절벽 위를 바라보았다. 이렇다 할 감상조차도 느껴지질 않을 만큼 감정 없는 얼굴이었다.

“무당에도 저런 이가 있었군. 하지만…… 어리석어.”

“후욱! 후욱!”

허공의 이마에선 연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절벽을 잘라 낼 만한 검기를 뿜기란 허공에게도 보통 힘이 드는 일이 아니다. 일격을 날릴 때마다 심혼이 깎여 나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멈춰선 안 된다. 해내야 한다.

기이이이잉!

검이 다시 한번 새하얀 빛을 뿜었다.

파아아아아앗!

전력을 다해 날린 검기가 또다시 절벽 면을 가른다. 잘려 나간 암석이 다시금 굉음과 함께 추락하기 시작했다.

무당이라는 산의 지형을 바꿔 버릴 검격이 한 차례도 아니고, 연속하여 거듭 이어지고 있었다.

“사, 사숙!”

“괜찮은가, 사제?”

무당의 검수들도 알고 있다. 지금 허공이 날리는 검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리고 그 대단한 걸 날리기 위해 허공이 얼마나 많은 내력과 심력을 소모하고 있는지.

“사제. 이럴 게 아니라 우선은…….”

“여기는 제가 사수합니다!”

허공을 만류하려던 이들이 그 기세에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결코! 단 한 놈도 이 절벽 위로 오르게 두지는 않겠습니다.”

섬뜩할 만큼의 기백을 온몸으로 느낀 그들은 더 이상 허공을 만류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믿겠습니다, 사숙!”

이 자리에서 허공의 말에 반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배분과 직위를 떠나, 이 순간 허공은 확연히 무당의 중심이었다. 이 자리에 임시 장문을 맡은 허산자가 있음에도 말이다.

그런 허공이 이리 나오니, 그 행동의 의미가 다른 무당의 제자들에게 전하는 바도 작지 않았다.

“장로님!”

“그래!”

허공을 만류하려던 이들이 옷자락이 휘날리도록 빠르게 몸을 돌렸다. 아래를 살펴보니 백안암이 아닌 가파른 산길로 우회하여 이곳을 점거하려는 이들의 행렬이 포착되었다.

챙.

그들이 주저 없이 검을 뽑았다.

“사제에게만 맡겨 둘 수는 없지.”

각각의 검이 낼 수 있는 힘은 다를지 모르나, 담긴 뜻만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허공을 도와라! 사제의 등 뒤로 단 한 놈의 적도들도 접근해선 안 된다!”

“예!”

검을 뽑아 든 무당의 제자들이 분분히 몸을 날려 적들을 겨눠 갔다.

해는 어느새 서쪽으로 기울어 노을이 백안암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마치 이 산의 미래를 보여 주는 듯 선명한 빛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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