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72화
1672화. 바라던 상황 아닌가? (2)
조걸의 눈이 일순 확 끓어올랐다.
저 멀리 희미하게 형상만 보이던 무당산이 조금 더 선명해진 순간 알아차린 것이다.
“붉어…….”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주변의 다른 산들과 비교하는 순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솟아오른 무당산이 중턱까지 확연히 붉게 물들어 있다는 것을.
“사형! 저거!”
“화공……인가?”
윤종의 얼굴도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저렇게 커다란 산을 반 넘게 태울 정도의 화공이라니, 상상도 해 본 적 없다. 윤종이 이를 갈아붙였다.
“사람 같지도 않은 짓을!”
멀리서 저 산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금 무당이 겪고 있을 위기가 전신으로 체감되었다.
“서두르자, 걸아!”
“예, 사형!”
앞으로 달려 나가며 윤종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버텨!’
곧 도착한다, 곧.
그때까지 무당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남아 있기를, 윤종은 간절히 바랐다.
* * *
우우웅!
벌떼가 날아드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수두룩한 손그림자가 허공을 뒤덮었다.
무수한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형태를 그려 내고 있는 장영들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현란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그야말로 환(幻)의 극치(極致). 어째서 천면수사가 사도제일수(邪道第一手)라 불리는지 증명하는 듯한 한 수였다.
허공 역시 이 현란한 장공(掌功)에는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했는지, 지체 없이 몸을 뒤로 물리고 띄워 냈다.
하나 노련한 천면수사가 허공이 몸을 빼내는 걸 순순히 허락할 리 없다. 비틀린 미소를 흘리며 그는 후퇴하는 허공을 추적해 훅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동시에 사위를 점하는 장영의 수가 더욱 불어났다.
수많은 손이 허공을 향해 뻗어졌다. 이는 경탄을 넘어 섬뜩함마저 느끼게 하는 광경이었다. 흡사 망령들이 살아 있는 이의 생기에 홀려 아귀다툼하며 달려드는 듯한 모습이었다.
파아아아앙!
허공의 검이 장영을 향해 날카롭게 뻗어졌다. 희고 검은 기운을 동시에 머금은 태극의 검은 바다와도 같은 장영을 단숨에 반으로 갈라 냈다.
하나.
우우우웅!
허공이 두 눈을 부릅떴다.
검으로 갈라 내었던 공간이 순식간에 또 다른 장영으로 채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갈라 낸 강이 다시 강물로 채워지듯이.
당황한 허공은 몸을 굴리듯 뒤로 뺐다.
퍼억! 퍽!
그 순간, 가죽 북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허공의 몸이 크게 휘청이며 뒤로 훅 밀려났다.
가까스로 몸을 멈춰 세운 그는 눈동자를 슬쩍 내려 제 몸을 바라보았다.
타격을 입은 곳은 왼쪽 어깨와 오른쪽 옆구리.
두 군데의 의복이 가루가 되어 부스러지며 맨몸이 드러났을 뿐 아니라, 손 모양으로 피부가 시퍼렇게 죽어 있었다. 마치 손그림자가 몸에 선명히 새겨진 것 같았다.
욱신!
장영과 함께 몸속으로 들어온 사기(邪氣)가 생살을 인두로 지지는 듯한 고통을 전해 주었다.
굳은 얼굴로 상흔을 보던 허공은 다시금 천면수사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허공과는 달리 여유 넘쳐 보이는 천면수사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허도는 어디 있느냐?”
그 말에 허공의 얼굴이 더욱 차게 굳어졌다.
“범의 새끼라 해도 새끼는 결국 새끼. 네게는 짐이 무겁다. 허도를 불러와라. 나를 상대하려면 허도 정도는 되어야 격이 맞겠지.”
아래로 늘어져 있던 허공의 검이 살짝 움찔했다.
“아니면?”
천면수사가 쿡쿡 노골적인 비웃음을 흘렸다.
“그 잘난 허도진인은 벌써 달아나기라도 한 건가? 하기야…… 워낙에 셈이 빠른 작자였으니 그러고도 남겠군. 그럼 남은 것은 그저 어리석은 놈들뿐인가?”
허공의 눈에서 노기가 피어올랐다.
“하찮은 사파의 무뢰배 따위가 감히 무당의 장문과 마주하겠다는 것인가?”
“흐음?”
“이제 시작일 뿐이다. 너 정도는 나로도 충분하다. 패군의 주구.”
천면수사의 두 눈이 이채를 띠었다.
확실히 정파 놈들은 이런 점이 재밌다. 사파는 본디 힘의 차이에 민감하다. 그렇기에 자신보다 강한 자와는 쉽사리 맞붙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파 놈들은 상대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알고도 웬만해서는 물러나려 들지 않는다. 그게 명을 재촉하는 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정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 목숨으로 주제를 알게 해 줄 수밖에.”
탓.
천면수사의 손이 다시금 현란한 장영을 흩뿌렸다.
백면수(百面手).
천면수사가 자신의 성명절기로 삼기 전에는 소요환희수(逍遙幻戲手)라 불리었던 사도의 절대장공.
숱하게 생겨난 손그림자들이 각기 분열하기라도 하는 듯 점점 불어나고, 겹겹이 허공을 뒤덮었다.
속이고, 희롱하고, 농락한다.
그 형상만으로도 사파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 같은 장공이 무당제일기재의 전신을 노리고 있다. 그 안에 실린 진득한 살기를 숨길 생각도 없이.
세상이 모두 손그림자로 가득 차 버린 것만 같은 끔찍한 광경.
장영(掌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파도가 가로막는 모든 장해물을 쓸어 버릴 것처럼 허공을 덮쳐 왔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지만, 허공은 그 파도에 저항하고 발악하지 않았다. 대신 길게 심호흡하며 정면으로 그것을 주시했다.
‘할 수 있을까?’
아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보지 않았다면. 겪지 못했다면.
하지만…….
스슷.
허공의 검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조금 전처럼 거칠게 장공을 찢고 베려는 검이 아니다. 감싸듯 부드럽게 유영하는 검이다.
허공을 농락하듯 휘감고 쇄도하는 장영들을 향해 검 끝이 느릿하게 뻗어졌다.
빙글.
선명한 원이 생겨난다.
원이란 곧 근원(根源)이자 완전함이지만, 지금 허공이 그려 내는 원의 의미는 조금 달랐다.
선명한 원이 흔들리지 않는 뿌리를 만들어 낸다. 세상 모든 것이 뒤흔들리더라도 결단코 현혹되지 않는, 단단하고 깊은 뿌리.
절벽 위에 자라난 무당의 노송(老松)과도 같은 뿌리를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허공이 섬전처럼 앞으로 질주하며 검을 찔러 넣었다.
카강!
강한 타격음이 터져 나오고,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세상을 뒤덮던 장영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가짜로 위장한 천면수사의 얼굴이지만, 그럼에도 가릴 수 없는 두 눈에 당혹이 스쳤다. 내뻗은 그의 장심 한중간을 허공의 송문고검이 정확하게 찔러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하지만 생각이 채 더 이어지기도 전에 허공의 검이 그의 몸을 갈라 버릴 듯 움직였다. 천면수사가 저도 모르게 경호성을 내지르며 몸을 뒤집었다.
서걱!
볼에서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검 끝이 그의 볼을 가르고, 어깻죽지마저 갈라 낸 것이다.
타앗.
거의 절벽 끄트머리에 가깝도록 물러선 천면수사가 제 볼을 더듬어 보았다.
익숙한 면구의 감촉 아래로, 익숙하지 않은 본래의 피부가 만져진다. 축축한 피의 느낌이 선명했다.
천면수사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어떻게?”
수백의 허초 속에 숨은 단 하나의 실초. 허공은 그 짧은 순간 지금껏 누구도 파악하지 못했던 백면수 안의 실초를 정확하게 찾아낸 것이다.
이는 그보다 더 강했던 이들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다. 애초에 백면수를 파훼하기가 쉬웠다면 사도제일장공으로 불리지도 못했을 터.
그러니 어쩌면 허공이 아니라 허도진인조차 해낼 수 있다 장담할 수 없는 일을 허공이 해낸 것이다.
차분히 검을 회수한 허공이 당혹감과 분노에 떨어 대는 천면수사를 응시했다.
“……할 수 없었겠지.”
“뭐?”
“이번이 처음이었다면, 아마 손도 쓰지 못했을 거요.”
이젠 상황이 바뀌어 허공이 훨씬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난 이미 겪어 본 적이 있소. 이보다 더 현란하고 이보다 더 화려한 무학을. 사패련은 무당에 굴욕을 안겨 주었지만, 나는 그 검에 패배를 배웠지.”
“…….”
“언제고 그 검을 깨뜨릴 날만을 기다려 온 나요. 그런 내가 고작 이런 환공(幻攻)에 당할 수는 없지.”
천면수사의 눈빛이 번들거린다. 그는 얼굴에서 흐르는 피를 소매로 훔치며 씹어뱉듯 물었다.
“더 현란하고, 더 화려하다? 그 말은…… 내 장공이 이류라도 된다는 건가?”
“이류는 아니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검에 미치지 못하는 건 분명하오.”
천면수사의 얼굴에 극심한 굴욕감이 어렸다.
“이…… 천지도 모르는 놈이 감히!”
으드드득.
천면수사가 분기탱천하여 이를 갈아붙이는 소리가 백안암 위에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물론 그도 제 무학이 천하무적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저런 애송이 놈에게 무시당할 수준은 아니었다.
“어차피 죽일 셈이었다만…… 그 말로써 너는 이제 곱게 죽을 기회마저 놓쳤다.”
“바라던 바요.”
허공이 검을 꽉 움켜잡았다.
알고 있다. 반은 요행에 가까웠다는 것을. 천면수사의 장공은 그리 쉬이 파훼할 수 있는 무학이 아니다.
하지만 이를 알고도 허공은 움츠러들지 않았다. 이 장공조차 파훼하지 못한다면, 허초가 대부분인 이 장공에 맞서지 못할 정도라면 허와 실이 그토록 현란하게 교차하는 그 지독한 검을 상대하기란 요원하다. 스스로 이를 잘 알기 때문에 주눅 들지 않았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화산신룡!’
아니, 이제는 화산검협이라 불린다 했었나?
‘무당의 검은 지지 않는다!’
그 한 번의 비무는 그의 자신감을, 검을, 세상을 부수었다.
만일 그가 여기서 움츠러든다면 자신이 그때로부터 단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노라 자인하는 꼴이 되지 않는가.
무당의 검은 태극. 태극은 조화이고 근원이다. 그렇기에 무당의 검은 어떤 미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모르겠느냐? 허도가 이곳에 없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주인에게도 버림받은 개새끼들의 말로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게 해 주마!”
가공할 기세를 내뿜으며 다가오는 천면수사를 보며 허공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장문인!’
그의 검이 커다란 검명을 토해 냈다.
* * *
“흐으음?”
교태로운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새빨간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게 표정은 제법 흥미로운 걸 발견하고 재미있어하는 아이처럼 천진했다.
“이건…… 조금 예상 밖인데?”
광채가 어린, 색 옅은 눈동자가 앞에 선 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검은 무당의 무복을 입은 늙은 도사. 아니, 이 순간만큼은 도사라기보다는 시퍼런 날을 세운 검수라 불러야 마땅할 이.
그런 이가 섬세하게 제련한 칼날 같은 기운을 흘리며 장일소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음, 그래…….”
장일소가 곤란하다는 듯 이마를 가볍게 긁적였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허도진인이었던가?”
무당의 검수, 허도진인의 두 눈이 새파란 살기를 흘렸다.
“여기까지다, 패군.”
스르릉.
허도진인의 검이 천천히 뽑혀 나왔다. 실로 지독한 원독이 어린 그 검에는 살을 에는 듯한 살기가 묻어 있었다.
“이거 영…… 달갑지 않은데.”
장일소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