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82화
1682화. 그건 내 알 바 아니고요! (2)
“간절함이라…….”
장일소의 손끝이 술잔을 매만진다.
느릿하기 짝이 없는 손길. 딱히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행동이었지만, 어쩐지 그 손끝에서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재미있는 말이구나.”
장일소의 몸이 살짝 뒤로 기울어진다. 등받이가 없는 의자임에도 한껏 등을 기댄 것처럼.
“이상한 일이잖니?”
“……뭐가?”
“간절함이라……. 네 말대로 간절함이 믿음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식이라면 간절함 역시 어떤 말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잖니.”
장일소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바로 욕망 말이야.”
“…….”
장일소의 눈빛이 청명을 꿰뚫는다.
“너무도 간절히 바란다. 너무도 간절히 원한다. 세상은 그런 걸 욕망이라 부르지.”
“그래서?”
“그러니 이상하잖니.”
장일소가 쿡쿡대며 웃었다.
“사파의 떨거지 놈은 책임이란 이름의 의무를 논하고, 정파의 잘나신 협객 나부랭이는 간절함이란 이름의 욕망을 논하고 있으니까.”
“…….”
“뭔가……. 바뀐 것 같지 않니?”
청명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하핫! 그렇게 무서운 얼굴 하지 말렴. 그냥 말 그대로 재미있을 뿐이란다.”
장일소의 두 눈이 요사스레 빛났다.
그 눈은 모든 것을 조롱하고 있었다. 저 산을 지키려는 무당도, 그들을 공격하는 사패련도.
그들을 구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천우맹과 이곳에서 장일소를 저지하고 있는 청명…… 아니, 어쩌면 이곳에 앉아 웃고 있는 그 자신마저도.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단다.”
“무슨 생각?”
“과연 지금 내 자리에 네가 앉아 있다면 너는 어떤 말을 했을까?”
“…….”
“그리고 과연 내가 네 자리에 있었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었을까? 혹여 나도 그 꼴같잖은 협의지심을 논하고 있었을까?”
장일소의 조소가 청명의 귓가를 파고든다.
“어떠니?”
“…….”
“재미있지 않니?”
그 웃음이 청명의 두 눈에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 * *
“뚫었다아아아아!”
조걸이 내뻗은 검을 회수해 재차 내찔렀다. 그의 눈에 선두로 치고 나가는 백천과 그 당원들의 모습이 보인다.
“비키라고!”
파아아아앗!
그의 검기에 놀란 사패련도들이 분분히 좌우로 흩어지는 순간, 조걸의 앞으로도 선명하게 길이 열린다.
“자, 모두 그대로…….”
항상 하던 대로 앞으로 내달리려던 조걸이 움찔하고는 뒤를 획 돌아본다. 그의 뒤를 따라붙는 당원들의 좌우로 밀려났던 사패련도들이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그대로 가세요! 그대로!”
그렇게 소리친 조걸이 발을 멈추고 몸을 돌린다.
지금까지의 그였다면 길이 열린 순간 가장 신나서 앞으로 치고 나갔겠지만, 지금의 조걸은 이제까지의 조걸과 다르다.
“물러서, 이 새끼들아!”
파아아아앗!
그의 검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됐다. 역수로 잡은 검이 횡으로 크게 휘둘러진다. 선명하게 적을 꿰뚫기보다는 위협하여 공간을 만들어 내겠다는 목적에 충실한 검술.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했지만, 그 위력은 장기인 찌르기에 비해 떨어지지 않았다.
‘생각해라! 더!’
이제까지의 그라면 그냥 치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럼 뒤는 알아서 사형제들이 수습해 줄 테니까.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의 뜻을 이해하고 알아서 맞춰 줄 사형제들이 없다. 결국은 조걸이 그들의 역할까지 모두 해내야 한다.
다만.
“어디로 갑니까! 부당주?”
“화산 장문대리를 따라가면 되는 겁니까?”
“어, 어느 쪽을 따릅니까?”
“엑?”
조걸이 퍼뜩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그 대신 선두로 나섰던 이들이 분열하고 있었다. 일부는 백천이 있는 쪽으로 향하고 있고, 일부는 산 정상을 향해 일직선으로 치고 달린다.
그러자 그들을 따르는 이들도 순간 우왕좌왕하며 정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백천 사숙을 따라가시라고! 화산 장문대리를!”
“말을 해 주셔야!”
“아?”
조걸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말을 안 했던가?
아니! 아무리 말을 안 했다고 해도 그렇지. 이 정도는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
“자, 장문대리! 화산 장문대리를 따르십시오! 어서!”
조걸이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전장의 함성에 묻혀 제대로 퍼지지 않고 있었다.
조걸의 얼굴에 순간 갈등이 어렸다.
‘선두로 복귀해야 하나? 그럼 이 뒤쪽은?’
당이 저들을 관통하는 순간 저들은 분명 뒤를 추적해 올 텐데, 후미를 그냥 내버려 두고 달릴 수는 없지 않나?
‘뭘 어떻게…….’
조걸의 검이 멈칫한 찰나, 그 낌새를 눈치챈 사패련도들이 거칠게 조걸을 향해 돌진해 왔다.
“자, 잠깐!”
조걸이 막 검을 휘둘러 그들을 상대하려는데, 누군가 그의 앞으로 나서며 일격을 날린다.
순간 놀라 검을 휘두를 뻔한 조걸이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고 가까스로 검을 멈춰 세운다.
우우우우웅!
황금빛으로 빛나는 권력이 달려들던 사패련도들을 일거에 휩쓸어 뒤로 날려 보냈다. 언제 봐도 경악성이 절로 나오는 강렬한 권격이다.
“아미타불. 조걸 시주, 놀라셨…….”
“아잇! 그렇게 갑자기 끼어드시면 어떻게 합니까? 대머리 못 봤으면 등에다 칼질할 뻔했잖아요!”
“…….”
혜연이 와락 일그러진 얼굴로 조걸을 바라본다.
“……여긴 내가 맡을 테니, 가시지요.”
“예?”
그 순간, 또 하나의 폭음이 조걸의 귀를 파고든다.
콰아아아앙!
뒤쪽에서 날아온 커다란 바위 같은 검기가 추격을 준비하던 이들의 기세를 단번에 꺾어 놓는다.
“설마 조걸 도장이 뒤를 막겠다는 생각을 할 줄이야. 보기엔 답이 없어 보이는 인간도 언젠가는 성장하는 법이라던 아버님의 말씀이 맞았군요.”
“……그거 무슨 의미로 하시는 말씀이시죠?”
“가십시오! 조걸 도장! 조걸 도장은 할 일이 있잖습니까!”
“아, 그렇지!”
조걸이 몸을 돌려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럼 뒤를 부탁합니다!”
“예!”
순식간에 선두를 향해 속도를 높이는 조걸을 보며 남궁도위가 피식 웃었다.
“시주.”
“예, 스님.”
“정말 선친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소?”
그 말에 남궁도위가 고소를 머금는다.
“아니요. 그냥 해 본 말입니다.”
“…….”
“혹시 문제 있습니까?”
“아미타불……. 아니, 아무것도.”
혜연이 빙긋 웃었다. 조걸이면 뭐……. 당해도 싸지.
“나쁜 말은 아니었습니다. 정말 놀란 건 사실이니까요.”
“그건 동감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게 완전히 빈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저 조걸이 뒤를 생각하게 되다니.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조걸이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럼 막아 볼까요?”
“예.”
혜연과 남궁도위가 내력을 끌어올렸다. 일단은 이들의 추적 의지를 꺾는 것. 그게 그들이 당을 이끌고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건 그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숙! 사형!”
“늦잖아! 이 멍청아!”
“왜 이렇게 늦어! 이제는 하던 것도 못 하네!”
조걸이 억울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제 가슴을 쳤다. 그 나름은 생각해서 움직인 건데 이 인간들이 그런 건 몰라 주고.
“앞으로 가!”
“예?”
“선두에서 뚫어 내라!”
“뭘요?”
“뭐긴 뭐야, 이 멍청아!”
백천과 윤종의 손이 동시에 산의 정상. 정확하게는 그 어림에 보이는 백안암을 가리켰다.
“저기지!”
“저기다!”
“…….”
“한 번에 뚫고 올라간다. 질질 끌 시간이 없어.”
“보이는 건 모조리 날려 버려라!”
“아, 아니 제가? 저 양반들이 벌써 날뛰고 있는데?”
조걸의 눈에 선두에서 적을 말 그대로 분쇄하고 있는 유이설과 진금룡의 모습이 보였다. 진금룡이야 그렇다 쳐도, 유이설만 해도 그보다 몇 수는 위의 고수 아닌가.
“우물쭈물하지 마!”
백천과 윤종의 손이 조걸의 어깨를 양쪽에서 잡고 밀었다. 그를 선두로 강제로 밀어 올린 백천이 더없이 진지한 어투로 말했다.
“선두를 뚫는 건 네 일이다. 너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
“늦으면 무당이 위험하다. 할 수 있지?”
그 말을 들은 조걸의 얼굴이 묘해진다.
“할 수 있느냐고요?”
“그래!”
“무슨 그런 말씀을 다.”
조걸이 제 매화검을 움켜잡고는 씨익 웃었다.
“뒤처지지나 마십시오, 늙은이들!”
콰앙!
조걸이 바닥을 부서져라 박차고 앞으로 돌진해 들어간다.
“그 앞에 비키십쇼! 느려 터져서는!”
자신감을 머리끝까지 채운 조걸의 검이 타오르는 불길을 받아 붉게 빛났다.
“돌파당했습니다!”
“놈들이 산으로 진입합니다! 군사!”
부관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적에게 등을 잡혔다. 그것까지는 어떻게 수습할 수 있다 해도, 문제는 지금 이 산에 진입한 사패련의 군세가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진영의 재구축?
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 불타는 산에 뿔뿔이 흩어진 이들에게 대체 무슨 수로 명을 전달한다는 말인가.
최단기간에 무당을 전멸시킨다는 한 가지 목표만으로 움직인 이들이 등 뒤에서 공격을 당한다는 건, ‘끔찍’이라는 두 글자로 다 표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혹시 몰라 저지선으로 남겨 둔 이들이 저리 무력하게 돌파당한 이상, 등 뒤를 공격당할 일만 남은 것이다.
“무, 무슨 수라도 써야 합니다!”
“놈들의 목적은 무당입니다! 놈들이 오기 전에 무당을 끝내 버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피해가 크다! 뒷감당은?”
“목적을 잃은 이들은 사시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놈들의 사기를 꺾어야 합니다!”
“놈들이 산에 들어왔다 한들 겁먹을 건 없다! 불타는 산을 평지처럼 탈 수는 없어! 오히려 산에 진입했으니…….”
“조용.”
“…….”
단 한마디가 혼란에 빠져 있던 부관들을 일시에 침묵시킨다.
흥분한 그들과는 달리 호가명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호가명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잠시 주시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우맹답군.”
“예?”
“가능한 이들에게 모두 명령을 하달해라. 놈들의 진격로를 최대한 봉쇄한다.”
“지, 진격로라니요? 그걸 어떻게 알고?”
“고민할 것 없다.”
호가명의 손끝이 천우맹을 가리킨다. 그리고는 그 손을 움직여 제 바로 아래를 가리켰다.
“여기까지 일직선.”
“…….”
“상대는 천우맹. 이런 상황에서 뒤를 돌아볼 이들이 아니다. 반드시 직선으로 온다.”
“그, 그런 무모한 방법으로.”
평범한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방식이지만, 무인들이라면 가능하다. 특히나 호가명이 아는 천우맹이라면 반드시 최선이 아닌, 최단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군사! 명령을 전달하기도 어렵지만, 어떻게 전달한다고 해도 시간 내로 저들의 앞을 막아서는 건 불가능합니다. 어설프게 뒤꽁무니만 뒤쫓게 될 겁니다.”
“상관없다.”
“예?”
그 순간, 호가명이 반문한 부관을 돌아본다.
그 눈빛을 마주한 부관이 즉시 제 실책을 알아채고 재빨리 자세를 낮췄다.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신속하게. 당장.”
“예!”
부관이 부리나케 달려가자 호가명이 그 뒤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기세를 탔군.’
딱 봐도 느껴진다. 저들이 얼마나 흥분해 있고, 얼마나 자신에 차 있는지.
그럴 자격이 있는 이들이다. 호가명 역시 무당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게 손끝이 욱신거리는 느낌이었으니까. 이건 그가 천우맹에게 가진 나쁜 기억들 때문은 아니다. 저들의 힘 그 자체가 호가명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것임이 분명했다.
“지금은 그걸로 좋겠지. 하지만…… 곧 알게 될 거다.”
호가명의 눈빛이 깊게 침잠했다.
호랑이의 힘을 제힘으로 착각한 여우는 비참한 광대가 되어 죽을 뿐이다.
마치 지금의 천우맹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