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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86화


1686화. 조소로 빛바랠지라도. (1)

섬뜩한 광망을 뿌린 도가 끔찍한 소리와 함께 가슴을 파고들었다.

”커헉…….“

“사제에에에에에!”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다량의 피가 허공으로 튀었다.

차라리 자세히 볼 수 없으면 좋으련만, 단련된 시각은 이 어둠 속에서도 생기를 잃어 가는 두 눈을 똑똑히 알아보게 했다.

“으……. 흐으…….”

쓰러지는 사형제를 본 이들의 얼굴에 비통함이 절절히 묻어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도 함께였다.

“사, 사제…….”

넋이 나가 버린 듯한 무당의 제자 하나가 저 멀리 쓰러진 이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뿌연 눈물이 차오르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가 홀린 듯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듯 잡아채었다.

“정신 안 차려!”

“사…… 사숙?”

“앞을 봐! 적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고!”

“하, 하지만…….”

“멍청한 놈! 너도 죽고 싶으냐?”

“으…….”

전신에 피를 뒤집어쓴 사내, 무진. 그의 하나 남은 눈이 처절하리만치 번뜩였다.

“죽은 이는 죽은 이다! 비통에 잠겨 있을 시간이 있거든 살아남는 데 집중해! 지금은 죽은 이를 위해 흘릴 눈물 같은 건 쓸모없는 사치다!”

도인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도 거칠다. 아니, 너무도 처절하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말이 그것뿐이었다.

“알았어?”

다시 한번 으르니 사질이 겁에 질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무진은 내던지듯 그를 제 뒤로 세운 후 검을 앞으로 겨눴다.

앞에 펼쳐진 전장의 광경이란 실로 일목요연하다.

적과 적. 그리고 또 적. 쓰러뜨리고 또 쓰러뜨려도 영원히 채워질 것 같은 적들뿐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발아래에는 함께 이 산에서 숨 쉬고 살아오던 사형제들의 시신이 짓밟히고 있다.

절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 죽었다.

그 많은 목숨을 희생하여 배가 넘는 적, 어쩌면 배의 배를 넘는 적들을 고혼으로 만들었다 한들…… 그 죽음이 진정 가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어 간 이들에 대한 비통함? 애끓는 죽음에 대한 서글픔?

분명 이런 순간에도 누군가는 그런 감정으로 속을 까맣게 태우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무진의 뇌리에는 이미 죽은 이들에 대한 슬픔 대신, 아직 숨이 붙은 이들을 단 하나라도 더 지켜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 절박함이 무진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었다.

“사숙! 앞!”

별안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무진의 옆구리를 노리며 한 자루의 창이 날아들었다.

무진이 다급하게 검을 휘둘렀지만, 움직임이 평소 같지 않았다. 만전의 상태였다면 가볍게 허공을 가르고 창을 튕겨 내었어야 할 검이 둔중한 움직임으로 겨우겨우 창의 측면을 가격했다.

콰득!

“사숙!”

날아든 창이 끝내 무진의 옆구리를 비스듬히 뚫었다. 이를 악문 무진이 고함을 내지르며 창수의 목을 쳐냈다.

푸우우웃!

잘린 목에서 더운 피가 솟구쳤다. 무진이 흘린 피 위로 적이 쏟은 피가 덮인다. 이곳에서는 흐른 피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 그저 곧 짓밟혀 더러워질 뿐이다.

“사숙!”

“괜찮다!”

무진은 손을 강하게 뻗으며 도우러 오려는 이들을 만류했다.

끔찍한 고통과 그 고통 이상의 공포에 이가 갈릴 지경이지만, 이상하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정신은 이토록 간절하건만, 몸은 그 마음을 채 따라와 주질 않는다. 의지만 잃지 않는다면 마지막까지 싸울 수 있으리라 믿었던 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이었던가.

옆을 돌아보니 마찬가지로 온몸을 피로 적신 무당의 제자들이 마귀의 송곳니 같은 적의 칼날을 힘겹게 받아치고 있었다.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서걱!

“사형!”

심지어 진현의 몸에서도 피가 튀었다.

평소의 그라면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을 공격이지만, 진현도 이미 한계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이미 한계에 맞닥뜨렸다.

이마를 타고 흐른 피가 자꾸 눈에 들어갔다. 어두운 세상이 붉게 물들어 간다. 이는 지금 그들이 처한 처지와도 닮아 있었다.

“아아아아아아!”

그 순간 무진이 짐승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앞에 선 적에게 달려들었다.

콰득!

검 끝이 적의 목을 정확히, 그리고 매섭게 뚫었다. 검 끝이 살을 가르고 뼈를 끊어 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감각조차 희뿌옇고 흐릿하게만 느껴졌다.

박힌 검을 비틀며 횡으로 검을 휘둘렀다.

단전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다 못해 금방이라도 찢길 듯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무진은 망설임 없이 남은 내력을 모조리 쥐어짰다.

파아아아앗!

뿜어져 나온 검기가 적을 단번에 휩쓸었다.

“이 시체나 다름없는 놈이!”

하지만 적은 더 이상 그의 검기에 속수무책으로 물러서지 않았다. 승냥이 같은 사파 무리는 무진의 상태를 그 누구보다 확실히 파악해 냈다.

한계에 몰린 커다란 사냥감의 목에 노린내 나는 이빨을 박아 넣기 위해 사패련도들이 쇄도했다.

“무진!”

무진의 위기를 보고 움찔한 허공의 얼굴 쪽으로 쾌속한 장력이 날아들었다.

카앙!

일순 그의 검이 뒤로 훅 젖혀졌다.

“아직 한눈팔 여유가 남았나?”

“…….”

무진은 밀려난 검을 끌어당겼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몸은 이미 말 그대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의복은 본래의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넝마가 되었고, 천면수사의 장력에 가격당한 육신 곳곳이 퉁퉁 부어올랐다.

하지만 그보다 더 위중한 건 내상이다.

천면수사의 장력을 통해 몸속으로 파고든 사기(邪氣)는 정순한 무당의 심법으로도 어찌하지 못할 만큼 내부를 헤집어 놓고 있었다.

이와 비교하면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하찮게 여겨질 정도였다.

천면수사가 웃었다.

“조금 전까지의 위세는 어디로 갔지?”

투우웅!

천면수사의 손이 허공을 타격하니 가공할 속도의 장력이 허공이 아닌 그의 옆을 향해 뻗어졌다. 등 뒤를 허공에게 맡기고 전력을 다해 적을 막아 내고 있을 그의 사질들에게로 말이다.

허공은 있는 힘껏 검을 뻗어 천면수사의 장력을 받아쳤다. 하지만 그 틈에 허리가 비틀리며 허공의 등판이 비었고, 그 자리로 곧장 세 줄기의 장력이 파고들었다.

쿠웅! 쿠우우웅!

꾹 다문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비집고 흘러나왔다.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 올렸지만, 마치 거대한 종을 치는 듯한 충격이 육신을 연신 두드려 댔다.

“쿨럭!”

결국 참아 내지 못한 허공이 피 섞인 기침을 왈칵 터뜨렸다. 덜덜 떨리는 좌수로 흘러내리는 피를 부질없이 부여잡았다.

파아아앗!

공격은 기세를 더해 갔다. 천면수사의 장력이 구름처럼 불어나며 허공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번엔 허공도 감히 맞상대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퍼어어어엉!

그가 자리했던 땅거죽이 터져 나갔다.

“큭!”

허공이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옆구리로 무언가가 강하게 파고들었다.

퍼어어어억!

그 충격에 허공이 두 눈을 부릅떴다. 갈비뼈들이 단번에 으스러지며 몸이 공처럼 튀어 올랐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이대로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싶은 충동이 머릿속을 헤집을 정도였다.

그러나 허공은 억지로 그 유혹을 떨치며 몸을 뒤집었다.

쇄애애액!

그러자 몸 바로 옆으로 강맹한 장력 몇 줄기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피하는 게 한순간만 늦었어도 그대로 절명하고 말았으리라.

턱.

거의 엎어지듯 착지한 허공이 다시금 옆으로 굴렀다.

퍼어어엉!

그가 있던 자리가 또다시 터져 나갔다. 숨돌릴 틈조차 없는 연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찌어찌 몸을 일으켜 세운 허공은 다시 한번 천면수사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무당의 기수식. 수도 없이 취해 왔던 자세지만, 지금 그의 기수식에서 무당이라는 대문파의 위상을 느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검 끝은 형편없이 떨리고, 그 검을 완전히 받쳐 내야 할 다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덜컥거리고 있었으니까.

그 모습을 감상하듯 지켜보던 천면수사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왜 그러지? 나 정도는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는 것처럼 굴지 않았던가?”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흘러내린 피와 땀이 턱을 타고 툭툭 떨어졌다. 허공은 반쯤 감긴 눈으로도 필사적으로 천면수사를 주시했다.

“애송이들은 그리 생각하지. 강해지기만 하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자신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말이다.”

천면수사의 얼굴이 뒤틀렸다. 그 얼굴을 덮은 인피면구가 떨어지지 않는 게 이상할 만큼.

“그렇게 쉬울 줄 았았나?”

“…….”

“이 세상에 노력하고 갈구하는 이가 오직 너뿐인 줄 알았나? 네 타고난 재능이라면 언제고 남의 위에 설 수 있을 줄 알았어? 아, 혹시 진심을 다한 노력에는 언제나 정당한 대가가 따라올 줄 알았나?”

한마디 한마디가 허공의 마음을 난도질하고 후벼판다.

“그렇게 믿었다면, 네가 살아온 삶이 가짜였던 것뿐이다.”

천면수사가 천천히 뒷짐 진 손을 풀었다.

“진짜는 가장 비참한 곳에 있다. 너희가 이 산에서 신선놀음하는 동안, 누군가는 식은 밥 한 덩이를 얻기 위해 사람의 입에 칼을 쑤셔 박지. 살아남기 위해 누군가의 발을 핥고, 기어 올라가기 위해 믿는 이를 배신해.”

천면수사가 비릿하게 웃었다.

“너 같은 게 이해할 수 있겠…….”

콰아아아!

허공이 날린 흑백색의 검기가 휘몰아치며 천면수사가 서 있던 곳을 휘감았다.

콰아아아아아앙!

커다란 폭발이 일었다. 휩쓸렸다면 제아무리 천면수사라 해도 무사할 수 없었겠지만, 천면수사는 이미 한참 뒤의 절벽 끝으로 물러난 뒤였다.

“후……욱.”

허공이 덜덜 떨리는 검을 힘겹게 회수하며 말했다.

“……변명치곤…… 구차하군.”

천면수사는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 뒷짐을 졌다.

허공은 이미 한계다. 다른 무당의 검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굳이 더 애쓰지 않아도 이들은 이대로 무너질 것이다. 수없이 봐 왔다. 한계에 내몰린 이들의 발악과 그 마지막을.

이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지껄여 대기는.”

파앗!

천면수사의 손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뿜어져 간 장력이 허공의 턱을 강타했다.

콰앙!

실 끊어진 연처럼 튀어 오른 허공이 이내 땅에 처박혔다.

“내 약속했었지. 쉽게 죽지는 못할 거라고. 이제 그 약속을 지킬…….”

태연히 허공을 향해 걸어가려던 천면수사가 순간 흠칫했다.

‘음?’

등이 서늘하다. 무언가가 그를 노리는 것처럼.

하지만 그의 등 뒤에는 창애(蒼崖:아주 높은 절벽)뿐. 대체 누가 감히 그를 노릴 수 있다는 말인가?

아주 짧은 고민 끝에 천면수사는 본능을 믿기로 했다. 절벽을 향해 발을 내디디며 고개를 내밀고 아래를 살핀 것이다.

이윽고 그의 두 눈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커다래졌다.

“……이, 이건?”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은 검은 용 같았다.

검은 용.

날카로운 비늘을 세운 검은 용이 수많은 이들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든 절벽을 타오르고 있었다.

그 날카로운 비늘의 정체가 타오르는 불길에 물든 검이라는 걸 알아챈 순간, 천면수사 담여해의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화산?”

저주받을 이름이 저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담여해의 손에 힘이 콱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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