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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688화


1688화. 조소로 빛바랠지라도. (3)

백천은 물론, 웬만해서는 침착을 잃는 일이 없던 유이설의 눈까지 커다래졌다.

시야를 가득 메워 오는 손그림자의 향연. 그 압도적인 광경에 단련될 대로 단련된 육신마저 순간 긴장으로 굳어졌다.

“사…….”

백천의 입이 열린 건 거의 본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본능보다도 유이설의 검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파아아아앗!

구름 사이로 드러난 달빛만큼 희고 흰 검이 쾌속하게 장영에 맞섰다. 그녀의 검이 순간적으로 분열하며 수십, 수백으로 쪼개져 날아드는 장영을 삽시간에 파훼하기 시작했다.

콰득! 콰득! 콰득!

날카로운 검 끝이 장영을 부수고 깨뜨린다.

순간적으로 펼쳤다기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정확하고 신속한 검격에, 포말처럼 피어났던 장영이 일순 힘을 잃었다.

하지만…….

화아아아악!

주춤하던 장영이 갑자기 배로, 또다시 배로 불어났다. 검으로는 뒤쫓는 것마저 불가능해 보일 만큼 무수하게. 그 모습은 흡사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터엉!

터엉! 터엉!

기세를 늦추지 않고 날아든 장영이 연이어 유이설을 두들겼다. 장영이 몸에 닿을 때마다 몸이 속절없이 뒤로 밀렸다.

“사매!”

절벽 끝까지 몰려 끝내 떨어지려는 유이설을 백천이 황급히 붙잡았다.

“큭!”

빠르게 검을 뻗어 절벽 면에 검 끝을 박아 넣었다. 완벽하게 고정하지는 못하여 주르륵 아래로 떨어졌지만, 어쨌든 육신이 절벽 저 멀리 튕겨 나가는 것만은 어찌어찌 저지했다.

백천은 유이설을 움켜잡은 채 절벽 중간에 다시 들러붙었다.

“사매! 괜찮아?”

“……네.”

유이설이 입가에 흐른 피를 닦았다.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우뚝 솟아오른 절벽 끝으로 향했다.

달이 뜬 하늘과 맞닿은 절벽. 그곳에서 한 사람이 느릿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백천도 유이설도 그가 누구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모습은 분명 낯설지언정, 무학만은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천면…….”

천면수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긋지긋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로군.”

신물이 난다는 듯 중얼거린 그는 아직 절벽을 오르고 있는 화산의 검수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저 빌어먹을 검은 무복.

이제는 너무 익숙하다 못해 반가움마저 느껴질 지경이다.

“찰거머리 같은 근성만큼은 높이 사 주지. 하지만 그리 쉽게 절벽을 오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이쪽도 입장이라는 게 있어서 말이야.”

백천의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좋지 않다.

화산이 아무리 이런 지형에 익숙하다 하나, 절벽을 오르는 이들이 정상에서 지키는 이들에 비해 불리함을 안고 시작한다는 사실 자체는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하필 천면수사 같은 절대강자가 앞을 막아선다?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저만한 강자를 쓰러트리고 지나가기 위해서는 동등한 힘을 가진 이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화산에는…….

파앗!

“사매!”

그런 백천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유이설이 단숨에 절벽을 박차며 올랐다.

채앵!

앞으로 쭉 뻗어진 검이 독사의 독니처럼 천면수사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이내 천면수사의 전면에서 화르륵 불어난 장영들이 마치 하나의 벽처럼 유이설의 검을 막아섰다.

카아아앙!

장영과 검이 충돌하는 순간 거대한 쇳덩어리를 후려친 듯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카가가가각!

유이설의 검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그 벽을 뚫고야 말겠다는 듯 내력을 끌어 올렸다.

천면수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허튼짓하는군.”

파아아앗!

순간, 배는 더 불어난 장영이 유이설의 검격을 모조리 뒤덮어 버리더니 이내 유이설의 육신까지 작렬했다.

“윽……!”

다른 수가 없으니 유이설은 이를 악물며 허공에서 몸을 틀어 사정권에서 벗어났다.

다행히도 저 무수한 장영이 더 추격해 오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그녀의 몸은 절벽 아래로 삼 장은 더 밀려난 뒤였다.

장영이 흩어지며 모습을 드러낸 천면수사가 제 손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

하얀 손에 채찍에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날카롭군, 확실히.”

베인 건 아니나, 충격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적어도 지금은.”

한편 백천은 아랫입술을 짓깨물었다.

조금 전의 충돌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유이설은 강하다. 하지만 절벽 위를 점거한 채 방어에 전념하는 천면수사를 뚫기 위해선, 최소한 그와 동등한 강자가 나서야 한다.

아무리 유이설이 화산 내에서는 강자라 해도, 수십 년 전부터 천하를 호령해 온 천면수사 앞에서는 손색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백천의 눈에 다급한 기색이 스몄다.

지금이야 기세를 올려 단번에 뚫고 있지만, 이 절벽에서 지지부진하게 시간을 지체하게 된다면 결국 좌우와 위에서 합공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는 유리하게 활용했던 이 지형이 오히려 독이 되어 목을 조여 올 것이다.

‘어떻게 하지? 이럴 때…….’

백천이 제 검을 부러져라 움켜잡았다. 없는 사람을 백날 생각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물론 지금 이곳에 청명이 있었다면 이런 고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천이 고민에 빠지기도 전에 청명이 천면수사의 목에 검을 쑤셔 박고 있었을 테니.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청명이 없다. 그러니 여기 있는 이들끼리 해결해야 한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그때였다.

“왜 그러지?”

머리를 바삐 굴리는 백천의 귀에 조소 어린 천면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산이라는 문파는 고민 따위는 하지 않는 곳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화산을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

“아니면…… 너희가 내가 알던 화산이 아닌 건가?”

백천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이……!”

화를 억누르며 그가 한마디를 뱉으려는데, 천면수사의 나직한 목소리가 먼저 귀로 파고들었다.

“군사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는군.”

백천의 눈이 살짝 커졌다.

군사? 호가명? 그의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는가?

“그가 그러더군. 화산이 강한 게 아니다. 화산검협이 강한 거다. 화산이 지금껏 해 온 말도 안 되는 짓거리는 화산검협이라는 상식을 벗어난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천면수사가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백천을 비롯한 화산 검수들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화산검협만 떼어 놓을 수 있다면, 화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제가 호가호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여우들은 알아서 자멸하게 될 거다. 등 뒤에 호랑이가 없는 것도 모르는 채 위세나 떨어 대다가.”

천면수사의 시선이 절벽에 매달린 백천에게로 정확히 꽂혔다.

“어때? 이렇게 보니 꽤 맞는 말 같은데, 너는 어찌 생각하지?”

백천의 등골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자멸? 화산이?

“헛소리!”

백천이 이를 악물고 외친 순간이었다.

“아―미―타―불!”

커다란 불호가 터져 나왔다.

우우우우우웅!

동시에 백천의 등 뒤로 커다란 황금빛의 수인(手印)이 솟아올랐다.

“소림의 신승인가?”

피식 조소한 천면수사가 양손을 활짝 벌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번져 나온 구름 같은 장영이 황금빛 수인을 뒤덮으며 내리눌렀다.

쿠우우우우웅!

기와 기가 충돌하며 발생한 충격이 절벽을 뒤흔들었다. 황금빛 수인이 산산이 깨어지며 어두운 밤하늘로 비산했다.

“아무리 대단한 기재라고 해도 소림의 장로에겐 비견할 수도 없군. 나를 상대하려면 법계 정도는 데리고 와라.”

“이 새끼가!”

탓! 타타탓!

흥분한 조걸이 절벽을 박차고 오르며 천면수사에게 돌진했다. 앞으로 쭉 뻗어진 검이 수십으로 분열하며 절벽 끝에 화려한 매화를 피워 냈다.

쿠웅!

하지만 그 매화가 채 흐드러지게 피기도 전에, 가공할 속도로 날아든 천면수사의 장영이 검 끝을 정확하게 후려쳤다.

“큭!”

끌어 올린 내력을 다 뻗어 내지 못한 조걸의 입에서 울컥 피가 터져 나왔다.

파아아앗!

동시에 천면수사의 장영이 조걸이 피우려던 매화 대신 화려하게 자리했다. 이는 더 볼 것도 없는 명백한 조롱이었다.

“이 새끼! 죽여 버린다!”

조걸이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지르고, 장영은 태풍에 실린 듯 휘몰아치며 조걸을 덮쳐 왔다.

조걸이 두 눈을 부릅뜬 그 순간, 늦지 않게 앞으로 끼어든 윤종의 검이 허공에 검벽을 세웠다. 실로 철벽같은 방어였다.

쿠우우우우웅!

이윽고 장영과 검기가 정면으로 충돌하며 윤종의 몸이 뒤로 화살처럼 튕겨 나갔다.

“사형!”

조걸이 기겁하며 윤종의 등을 받쳤지만, 그 여력은 절벽에 발을 붙인 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은 결국 빙벽 위에 서기라도 한 것처럼 밀려나 점차 아래로 미끄러졌다.

“사형! 괜찮으십니까?”

겨우 멈춘 조걸이 윤종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제길.”

윤종의 입에서 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아무리 그들의 내력이 정순하다고 하나, 정면에서 힘 대 힘으로 충돌하게 되면 저 수십 년을 살아온 노괴를 이길 도리가 없었다.

이를 갈아붙인 윤종이 정상을 노려보니 천면수사가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로군, 화산. 확실히 화산검협이 없으면 그래 봐야 혈기 넘치는 애송이들에 불과한 것을. 나조차도 너희를 과대평가하고 있었구나.”

백천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절벽을 오르던 이들의 움직임이 멈춰 있었고, 사기가 눈에 띄도록 떨어진 게 확연히 느껴졌다.

뚫어야 한다. 뚫지 못하면 위험하다.

‘합공?’

아니. 안 된다.

이건 평지에서 흑룡왕을 상대하는 것과는 상황 자체가 다르다. 애초에 아래에서 위로 펼치는 합공 같은 게 성립될 리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꾸욱.

그가 초조함에 검을 콱 움켜잡았다. 방법은 모른다. 아니, 방법이 있다 한들 그 방법을 차분히 찾아낼 시간이 없다.

백천이 이를 악물고 외쳤다.

“사매!”

유이설과 백천의 눈이 마주쳤다. 백천의 눈에 어린 확고한 무언가를 읽은 유이설은 대답도 없이 손을 뻗어 백천의 소매를 잡고 단번에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아아아아아압!”

백천이 커다란 기합을 토했다.

하나씩 달려들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중첩을 시키는 수밖에.

유이설과 백천, 두 사람은 한달음에 절벽을 타고 올랐다.

그리고 천면수사의 발치에 닿기 직전, 백천은 손을 휘둘러 제 소매를 잡고 있던 유이설을 던져 올렸다.

허공으로 가뿐히 떠오른 유이설이 반원을 그리며 천면수사의 위로 쇄도했다. 동시에 아래에서 솟구친 백천이 천면수사의 복부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아직 모르는가?”

화아아아아악!

새하얀 손이 또다시 구름처럼 피어난다.

카가가가가강!

유이설이 날린 필사의 검격이 벽처럼 피어난 장영에 가로막히며 그녀의 몸이 또다시 튕겨 나갔다.

카강!

거의 동시에 뻗어졌던 백천의 검은 희게 물든 천면수사의 손에 그대로 붙잡혔다. 백천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

전력을 다해 내지른 검이었는데,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제압당해 버렸다.

당혹감에 흔들리는 백천의 눈과 비정한 천면수사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건 상대할 가치도 없는 검이군. 고작 이런 자가 화산을 이끌고 있었다고? 발톱마저 뽑힌 여우 새끼 따위가?”

그 순간, 백천의 두 눈에 숨길 수 없는 절망이 떠올랐다. 아니, 어쩌면 그건 절망이 아니라 서글픔일지도 몰랐다.

“주제를 모르고 날뛴 대가는 치러야지. 죽어라.”

투웅!

천면수사의 좌수가 백천을 향해 휘둘러졌다.

백천은 그 모습이 어쩐지 느리게 느껴졌다. 허공에서 일어난 장영이 시야를 뒤덮고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모습이, 아주 또렷하게 보였다.

피할 수 없는 죽음 앞.

백천은 눈을 질끈 감지도, 눈을 홉뜨지도 않았다.

되레 정명한 빛을 흘리며 눈을 똑바로 떴다.

콰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백천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시야에 검은 밤하늘과 그 한중간에 뜬 달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도 잠시.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끌어당겼다. 허공에 떠오른 그의 육체를 누군가가 움켜잡고 지탱한 것이다.

‘이게 무슨…….’

그 순간 백천이 본 건, 절벽에 서 있는 천면수사의 굳은 얼굴과 그 어깨에 삐죽이 튀어나온 무언가였다.

‘저건…….’

소도(小刀). 어린아이 장난감 같은 작은 비수. 그러나 백천에게는 익숙한 물건이었다.

“이들은 감히 그대 따위에게 여우 취급이나 당할 이들이 아니지.”

백천이 멍하니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어깨를 붙잡은 한 남자에게로.

“다, 당가주님?”

“괜찮은가?”

“예? 아…… 예! 저는…….”

“아무래도 여긴 내 차례인 것 같군. 길을 열어 주겠네.”

백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당군악이 절벽을 걸어 올랐다. 말 그대로 느릿하게, 수직에 가까운 절벽 면이 평범한 땅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의 차분한 눈과 일그러진 천면수사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당군악이 말했다.

“‘화산겁협이 없는 화산은 화산이 아니다’라……. 어쩌면 그도 맞는 말일지 모르지.”

“독왕…… 당군악.”

“하지만 화산이 없는 화산검협도 화산검협은 아니다. 화산은 그만큼이나 대단한 곳이다. 그대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적어도 제 얼굴을 드러낼 용기도 없는 사파의 노괴 따위가 함부로 폄훼할 이들은 아니야.”

스릉.

당군악의 손끝에 날카로운 비도가 잡혔다.

“어른에겐 어른의 싸움이 있는 법. 그 목이 얼마나 질긴지 내가 확인해 보지.”

당군악의 두 눈이 차디찬 한기를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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