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화산귀환-1689화


1689화. 조소로 빛바랠지라도. (4)

“타아아아아앗!”

남궁도위의 검에서 백색 검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무겁게 가라앉은 검기.

무학에 대한 감각이 좋은 이라면, 그 검에 실린 기운이 위압을 넘어 패도(覇道)에 이르렀음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몰려오는 적의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무당산을 공략하기 위해 온 산으로 퍼졌던 적들이 지금은 무당이 아닌 천우맹을 노리며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한 발짝도 물러날 수 없었다.

‘내가 버텨내야 한다.’

절벽 위에 있는 이들에게는 남궁도위가 지키는 이곳이 유일한 퇴로다. 만일 그가 이곳을 지켜 내지 못한다면, 천우맹은 말 그대로 사면초가에 몰리게 된다.

그 막중한 책임감이 남궁도위의 검에 더욱 무거운 힘을 불어넣었다. 제왕이란 본디 그 어깨에 누구도 나눌 수 없는 짐을 지고 나아가는 자가 아니던가.

“넘보지 마라! 타아아아아앗!”

남궁도위가 재차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떨치려는 순간이었다.

“날뛰기는.”

“엇?”

누군가가 남궁도위의 앞으로 끼어들듯 나서더니 검을 휘둘렀다. 기다란 장검이 허공에 새하얀 검기의 파편을 흩뿌렸다.

밤하늘을 뒤덮듯 뻗어 나간 검기에, 남궁도위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길을 빼앗겼다.

화려하다. 하지만 화려하지만은 않다.

이율배반적으로 느껴지는 말이지만, 눈송이처럼 흩뿌려지는 화려한 백색 검기에서 그 외양과 다른 엄중함이 느껴졌다.

마치 깊게 뿌리를 내린 천년 거목의 든든함처럼.

“……진금룡?”

남궁도위의 입에서 앞을 가로막은 이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종남의 대사형이자, 언제고 종남의 장문인이 될 게 확실하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칭송하는 자. 한때 그와 함께 천하를 이끌 후기지수 중 하나인 ‘오룡’으로 불렸던 자.

그리고 무엇보다…….

‘백천. 장문대리의 형!’

그 수많은 수식어를 당당히 이름 앞에 새길 수 있는 자가 남궁도위를 흘끗 돌아보았다.

눈은 놀라우리만치 닮았으나 눈빛은 지독하게 다르다. 저리도 닮은 형제가 눈빛 하나만으로 이토록 다르게 느껴지는 게 신기할 정도다.

진금룡이 말했다.

“남궁의 성을 쓰는 이들은 하나같이 오만하다더니, 그 말이 틀린 게 없군.”

“그게…… 무슨 소리요?”

남궁도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게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날뛸 건 없다는 의미요.”

“음?”

“여기에 당신만 있는 건 아니니까.”

우우우우우웅!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곳에서 강한 검기가 솟구쳤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참격이, 불타는 산을 넘어 이곳을 향해 달려들던 적들을 일거에 휩쓸었다.

“아…….”

남궁도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경탄이 흘러나왔다.

저 검기를 뭐라 설명해야 할까?

강하다. 하지만 과하지는 않다. 빠르다. 하지만 또 급하지는 않다.

분명 힘과 속도는 남궁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저 검에는 남궁에 부족한 것들이 빠짐없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중용(中庸)의 근간에 담긴 것은 남궁과는 다른 무게감이었다. 제왕의 무게에서 비롯되는 무거움이 아닌, 검수의 본분을 지키는 이에게서 흘러나오는 무거움.

‘저게 종남의…… 천하삼십육검!’

단 일격에 적의 예봉을 꺾어 낸 종리곡이 검을 회수해 종남의 상징과도 같은 하단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쿠우우우우우웅!

산처럼 거대한 덩치를 지닌 이가 달려드는 사패련도를 가볍게 후려쳐 땅에 처박아 버렸다.

“겁도 없이 감히!”

야수궁주 맹소의 입에서 거대한 곰 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이윽고 비호처럼 달려든 맹소가 사패련도의 옆구리에 발길질을 날리니, 일격에 절명해 버린 적의 시신이 쏘아 낸 포탄처럼 적들 사이로 틀어박혔다.

콰아아앙!

사패련도의 육신과 충돌한 이들은 비명도 채 다 지르지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 압도적인 광경에 전장의 흐름이 일순 멈추었다.

“그냥 지켜보려니 좀이 쑤셔서 말이네.”

남궁도위와 눈이 마주친 종리곡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는 지휘라는 게 무의미해진 상황 같기도 하고.”

그의 시선이 절벽으로 향했다.

“이제 와 기껏 짠 당을 내팽개치고 절벽을 기어오른다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렇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요.”

누군가가 답하듯 말하며 종리곡처럼 천우맹의 앞에 천천히 다가와 섰다.

“우리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니.”

“…….”

종리곡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신개께서는 정말 그리 생각하십니까?”

“물론입니다.”

“기책이 항상 정답일 수는 없다는 걸, 신개라면 아실 텐데요.”

“맞습니다. 하지만 항상 정론, 정답만 내어놓아선 안 된다는 것도…….”

풍영신개가 절벽을 공략하는 화산을 슬쩍 바라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압니다.”

종리곡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영문 모를 소리다.

“여하튼 그럼 날뛰어도 된다는 뜻이겠지요.”

그의 검에 짙푸른 검기가 어렸다.

“그럼 사양 않고!”

파아앗!

종리곡의 검기가 무섭게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동시에 그의 뒤에 선 이들도 용기백배하여 적을 몰아쳐 갔다.

남궁도위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조금씩 낮아졌다. 잔뜩 끌어 올렸던 긴장이 살짝 풀린 것이다.

진금룡이 물었다.

“이해했소?”

남궁도위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이곳에 당주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모든 것을 이끌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그게 얼마나 오만한 짓이었는지 새삼 깨닫고 나니 제대로 고개를 들기 어려웠다.

“내가 경솔했소. 당주님들께서도 계신 데서.”

“무슨 소리요?”

“예?”

남궁도위가 눈을 끔뻑였다.

“당주님들이 아니라, 나요. 여기엔 내가 있으니 당신이 그리 날뛸 필요가 없다는 소리요.”

“…….”

“괜히 힘 빼지 말고 뒤나 지키시오. 앞은 내가 설 테니.”

그 말을 남긴 진금룡이 휙 시선을 돌리더니 이내 적들에게 검을 휘두르며 나아갔다.

남겨진 남궁도위는 세상 황당하단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 누군가가 그의 옆을 지나며 슬쩍 고개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사형께서 말투가 영…… 그러셔서.”

“…….”

“하지만 제가 보기에도 남궁의 무학은 소모가 심해 보입니다. 앞은 저희가 맡을 테니 뒤쪽을 잘 부탁드립니다.”

“예?”

“그럼.”

단정하게 생긴 사내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 진금룡의 옆을 차지하고 섰다.

그 광경을 멍하니 보던 남궁도위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저……!”

왜 화산 사람들이 종남이라고 하면 다들 이부터 갈아 대는지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 * *

불과 삼 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선 두 사람 사이로 절벽의 칼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독왕 당군악.’

천면수사의 이마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강호를 대표하는 암기의 명수가 지금 그의 바로 앞을 막고 선 것이다.

눈을 뗄 수가 없다.

어깨에 박힌 비도로부터 전해지는 고통이 지금도 말하고 있다. 저자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고.

평범한 암기술이라면 모를까, 단 일 점에 혼을 실어 꿰뚫는 당군악의 비도는 그의 무학과 상성이 좋지 않았다.

‘빌어먹을.’

저 화산 놈들에게 정신이 팔려 당군악이 이 거리까지 접근하는 걸 알아채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백천에게 했던 말이 그의 본심일 리 없었다. 그건 그저 저들의 의욕을 꺾으려는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설령 화산검협이 없다고 해도, 저 화산이라는 문파는 충분히 위협적이다. 저들이 이 절벽을 오르게 해선 안 된다. 절대로.

하나 대치가 팽팽하게 이어지던 바로 그 순간.

각오나 대책, 그 어느 것 하나도 갖출 시간을 주지 않고 백천이 절벽을 박차고 올랐다.

‘저……!’

천면수사가 두 눈을 부릅떴다.

‘저 미친놈이!’

죽었다. 분명 죽었다. 당군악의 도달이 한순간만 늦었어도, 저 백천이란 놈은 이미 머리 잃은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백천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삼도천을 건넜다가 기적적으로 빠져나온 상황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달려들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백천이 움직이는 순간, 멈춰 있던 화산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일제히 다시 절벽을 타기 시작했다. 실로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천면수사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문주님을 도와라아아아아!”

그때, 천면수사의 등 뒤에서 상황을 파악한 하오문도들이 지체 없이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솟구쳐 오르는 화산과 아래로 강하하는 하오문.

천면수사와 당군악이라는 두 거인이 멈춰 있는 세상을 중심으로 그 두 세력이 격렬하게 서로를 향해 내달렸다.

검을 휘두르고 긋는 곳마다 피가 방울져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누군가의 비명이 길게 늘어지며 괴이한 소리로 변해 갔다. 검과 칼이 맞닿는 충격이 피부를 흔들고, 뿜어진 피의 열기가 얼굴을 덮친다.

수십 배는 느려진 듯한 세상.

하지만 그 와중에도 천면수사의 시선은 오롯이 당군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 그의 수하가 끼어들며 마주 보던 당군악과 그의 시선이 차단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움직일 수 없다. 시선은 떨어졌을지 몰라도, 그 존재는 아직 저기에 있으니까.

앞을 가로막았던 하오문도의 목에서 새하얀 검신이 느릿하게 튀어나온다. 그 검 끝에서 뿜어진 핏방울들이 점점이 솟아올라, 천면수사의 얼굴에 부딪혀 깨어진다.

굳어진 채 숨이 끊어져 가는 몸뚱이가 비스듬히 기울어짐과 동시에, 천면수사는 보아야 했다. 피를 뒤집어쓴 백천이 어느새 그의 발치까지 이르러 있는 모습을.

천면수사의 인내심이 끊긴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고함. 아니, 고함을 내지르겠다는 의지가 미처 목에 닿기도 전에 그의 손에서 터져 나온 장력이 백천을 향해 내달렸다.

이건 각오와도 비슷했다. 설령 당군악의 공격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백천의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그때, 천면수사는 분명히 보았다.

이미 한번 경험했을 죽음이 다시 자신을 덮쳐 오는 상황에도, 그 공포를 마주하는 백천이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봐 오는 광경을.

세상의 쓴맛을 질리도록 경험해 본 천면수사마저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콰가각!

뻗어 낸 그의 손에 당군악이 발출한 비도가 박혔다.

하지만 천면수사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이쯤은 예상했다. 설령 손이 완전히 꿰뚫리더라도 이 지독한 놈의 목숨만은 끊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콰앙!

천면수사의 의지를 모조리 실은 손을, 백천의 등 뒤에서 뻗어 나온 한 자루의 검이 막아섰다.

이어 아직 흩어지지 않은 장력을 붉은 검기가 실린 두 자루의 검이 가로막았다. 지금 그의 앞에 있는 이를 결코 해하게 두지 않겠다는 듯.

‘엇……?’

그리고 그 순간 천면수사는 알 수 있었다. 아니, 알고 말았다.

백천의 시선이 그에게 닿아 있지 않음을.

둘의 시선이 어긋났다.

천면수사는 백천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백천의 시선은 천면수사가 아닌 그 너머의 어딘가로 향해 있었다.

천면수사가 그 사실을 깨달은 찰나, 백천의 몸이 그를 넘어 그 위의 높은 하늘로 솟아올랐다.

타악.

기이한 정적 속, 드높은 절벽을 타오르고 마침내 천면수사 담여해마저 뛰어넘어 백안암의 정상에 내려선 백천이 앞을 응시했다. 정상을 채우고 있던 수많은 이들이 움직임을 멈춘 채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기세를 올리던 사패련도,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무당의 무인들도. 진현과 무진, 그리고 한쪽 무릎을 꿇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숨을 헐떡이던 허공마저도.

“……화산 장문대리 백천.”

그 모두의 귓가에 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바로 지금 도착했습니다.”

우웅!

더없이 맑게 울리는 검명과 함께.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