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90화
1690화. 조소로 빛바랠지라도. (5)
피에 젖어 붉게 물든 시야로 들어온다.
목숨을 노려 오는 칼날, 악의와 살기로 점철된 적의 얼굴, 죽어 간 이들의 비명마저 검게 덧칠해 버릴 것 같은 밤의 어둠.
그 너머, 그 절망을 넘어 검은 무복을 입은 훤칠한 청년의 모습이.
“아…….”
무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앓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짙은 탄식이자, 또 어쩌면 더없는 환희일지도 모를 신음이었다.
백천, 그리고 화산이 마침내 이 백안암의 정상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 심정을 대체 뭐라 표현해야 할까?
사람의 말로는 다 설명할 수도 없을 만큼 격한 감정이 버티고 버티던 무당 제자들의 가슴에 커다란 격랑으로 휘몰아쳤다.
그러나 그런 그들을 본 백천은 전혀 다른 것을 느꼈다.
적이 좁은 절벽 위를 가득 채웠고, 무당의 검수들이 그 사이에 포위되어 있다.
‘이들이 다란 말인가?’
백천이 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당은 소림과 함께 천하의 북두를 다투던 문파다. 그런데 지금 눈에 보이는 무당 검수들의 수는 그 위상에 걸맞지 않게 너무도 초라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백천의 시선이 조금 아래로 향했다.
절벽 정상을 진득하게 적신 피가 보였다. 사패련의 흙발에 짓이겨져 검게 더럽혀진 피가.
뽑아 든 검 끝이 잘게 떨렸다.
그를 흉흉하게 노려봐 오는 사패련도들의 발치에 삐죽 튀어나온 손이 있었다.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손바닥은 핏기도 없이 창백하게 질려 있어서 저 손의 주인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를 똑똑히 알려 주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놈들의 칼날 아래 희생되었단 말인가.
물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늦어 버린 건 아니다. 아직 살아 있는 이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화산을 비롯한 천우맹 역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이건…… 이건 너무도…….
치미는 자괴감을 억누르려 애쓰는 백천의 귓가로 증오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어떤가?”
백천이 고개를 돌렸다.
천면수사가 당군악의 비수를 피해 정상의 끝에서 멀찍이 몸을 빼내고는 백천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대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가?”
……백천은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조금 더 살아 있어 주길 바랐다. 그들의 노력이 더 많은 이들을 구할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마주한 현실은 그저 참혹했다.
“때로는 어리석음이 요행히도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어리석은 자가 맞이하는 결말은 뻔한 법이지.”
천면수사는 냉소 어린 시선을 흘끗 옆으로 던졌다. 무당의 제자들이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서 있었다.
“체면을 돌보지 않고 달아났다면 대부분이 살아남았을 거다. 명분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대신 실리를 택했다면, 전각 따위야 언제든지 재건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
“…….”
“이건 하찮은 자존심과 웃기지도 않은 협의지심이 자아낸 결과다. 너희의 고생이 허무하게도 말이지.”
그 신랄한 말에 무당 제자들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남은 것은 절반. 아니, 삼분지 일도 채 되지 않는다. 적의 계략에 빠져, 살아 있는 이들보다 더 많은 이들이 저들의 칼날 아래 죽어 갔다.
물론 이 백안암의 정상, 무당이라는 도가의 영산을 적들의 시체로 가득 채우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무당이 잃은 이들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잖은가.
어쩌면 그들이 그토록 지키려 했던 무당의 명맥을, 그들 스스로 끊어 내 버린 셈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현실이 이토록 끔찍해서 마침내 구원하러 온 백천을 보고도 무당의 제자들은 열렬히 환호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백천도 이들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모두의 악다문 입술과 떨리는 눈빛이 알려 주었다. 자괴감, 서글픔으로 가득한 얼굴을 마주하며 백천 역시 이를 악물었다.
“망상은 달콤해, 그렇지?”
“…….”
“지독한 현실보다야 꿈속에서 사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제때 꿈에서 깨지 못한 이들은 결국 더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지금 이들처럼, 그리고 지금부터의 너희처럼.”
스릉.
그때, 백천이 돌연 검을 제 검집에 도로 밀어 넣었다. 양손을 비운 채 무당의 제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일순 당황했다.
“음?”
천면수사 역시 의아한 듯 백천을 바라보았다.
백천이 적들에게 포위된 무당의 제자들에게 정중히 포권 했다.
어떤 말도 없이, 단순하고도 간결한 예의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심지어는 이 순간에도 무당을 위협하던 사패련과 백천을 비웃던 천면수사마저도.
천면수사가 비아냥거렸다.
“무슨 의미 없는…….”
“그 입 닫아라.”
백천이 말허리를 끊자 천면수사의 얼굴이 노기로 꿈틀했다. 아무리 그가 사파고 저자가 정파의 후기지수라고는 하나, 그의 반도 살지 않았을 어린놈에게 들을 만한 말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백천은 천면수사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오로지 무당만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 아니, 이해하지 않고 싶겠지. 하지만…… 똑똑히 들어 둬라.”
백천이 무당의 제자들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세상에 무가치한 의지 같은 건 없다.”
순간, 무당 제자들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신념이든, 의무든, 가슴속에 간직한 협의든.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는 싸운다. 설령 희생을 치르더라도, 잃지 말아야 할 것을 잃는다고 해도. 비록!”
지그시 입술을 깨문 백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조소로 빛바랠지라도.”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백천은 확인했다.
절망과 자괴감에 흔들리던 무당 제자들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고, 이내 단단한 의지로 다시 차오르는 것을.
그제야 백천의 눈길이 천면수사에게 향했다. 아까와는 달리, 흡사 벼린 칼날처럼 자비 없고 날카로웠다.
“알아 둬라, 사파.”
“…….”
“우린 살아남기 위해서만 싸우는 게 아니다. 지키기 위해 싸우고, 남기기 위해 싸운다. 살아남기만을 위해 싸운 이의 죽음은 무가치할지 모르나, 남기기 위해 싸운 이의 죽음은 결코 그 가치를 잃지 않는다. 그 목숨으로 지켜 내야 할 것은 지켜 냈으니.”
천면수사가 입가를 비틀며 조소했다.
“지켜야 할 것?”
“그래.”
“하면…… 그 지켜야 할 것마저 짓밟아 버리면, 그때는 정말 개죽음이 되는 건가?”
“아니. 네겐 그럴 기회가 없다.”
스르릉.
백천이 납검했던 검을 다시 뽑아 천면수사를 겨누었다.
“우리가 도착했으니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절벽에서 한 사람이 비조처럼 치솟았다.
타악.
절벽 위까지 높이 뛰어올랐던 이가 깃털처럼 가볍게 백천의 옆에 내려섰다.
“늦었어요.”
“그래, 사매.”
그리고 이어 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절벽 위로 솟구쳐 오르고, 또다시 두 사람이 절벽을 올라 백천의 뒤를 채웠다.
“빌어먹을! 무당 사람들이……!”
“아직 생존자가 있다. 흥분을 가라앉혀.”
“이…….”
조걸이 치솟는 분을 억누르느라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깨문 동안, 윤종 역시 조용히 분노를 곱씹었다.
그 뒤로 걸어온 혜연이 무거운 얼굴로 불호를 외었고, 백천의 뒤에 선 당군악이 진중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천면수사를 노려보았다.
백천이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곧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
말없이 백천을 노려보던 천면수사의 시선이 슬쩍 무당의 제자들에게로 돌아간다. 의지가 꺼져 가던 놈들의 눈이 살아난 게 천면수사에게도 느껴졌다.
‘빌어먹을. 다 죽어 가던 놈들이.’
동태 같은 눈을 간신히 뜨고 죽을 시간만 기다리던 놈들이 이제는 끝까지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반 시진……. 아니.’
딱 반 각만 더 저들을 저지했다면, 지쳐 버린 무당 놈들을 모두 정리해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절벽에 매달린 놈들과 이 정상에 올라 허탈해하는 놈들을 천천히 짓밟아 버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오래 후회하는 건 낭비였다.
천면수사가 가볍게 손을 쥐었다가 펴자 당군악에게 당한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욱신거리는 고통이 그를 점점 더 분노케 했다.
저들을 이곳까지 오르게 한 건 분명 실패라고 일컬어야 할 것이다. 성급히 놈들을 막으려다 부상 입은 것도 어리석은 짓이었다.
하지만 아직 유리한 위치까지 잃은 건 아니다.
‘차라리……. 그래, 잘됐어.’
이곳까지 오른 이상 저들에게도 퇴로는 없을 터. 이곳에서 화산까지 모조리 몰살시켜 버린다면, 무당을 없애는 것 이상의 전과를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절벽을 돌파해 낸 화산의 제자들이 하나하나 정상으로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이 이상 저들이 자리 잡게 둬서는 안 된다.
“고작 그 정도 수로 잘도 지껄여 대는군. 이래서 정파 놈들이란.”
당황해하던 사패련도들의 눈빛이 ‘수’라는 말에 평정을 되찾았다.
그렇다.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고 해도 그들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모조리 죽여라!”
천면수사가 그답지 않게 내력까지 실어 외쳤다.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서, 범의 아가리로 굴러들어왔다는 것을 스스로 똑똑히 알게끔 해 줘라! 오늘 이곳을 놈들의 무덤으로 만들어라!”
“오오오오오오!”
“으아아아아아아앗!”
흥분한 사패련도들이 절벽 끝에 선 화산 제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옵니다, 사숙!”
윤종의 외침에 백천이 검을 앞으로 겨누었다.
눈앞에는 무수한 적과, 그 사이에 여전히 둘러싸여 있는 무당의 제자들이 있다.
구할 수 있는가, 저들을?
‘생각할 필요 없다.’
가능한 것을 행하는 건 간절함이 아니다.
중요한 건 이곳까지 저들을 위해 달려왔다는 것. 그리고 그의 등 뒤에 다름 아닌 사형제들이 있다는 것.
“화산!”
“예!”
절벽 위로 오른 화산의 검수들이 목이 터지도록 우렁차게 대답한다.
“적들을 뚫고 무당을 구해라!”
“타아아아아아압!”
백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종과 조걸이 빛살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그 바로 뒤를 다른 화산의 제자들이 따랐다.
밀려드는 격랑을 향해 섬전이 뻗친다.
땅을 박차고 오르는 당군악의 장포 자락이 펄럭이고, 달려드는 사패련도들의 악귀 같은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서로의 기운이 휘몰아치며 비틀린 공기가 터질 듯 밀려 나간다.
그 격한 공간을 넘어, 백천의 시선이 무진의 시선과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시간이 뒤틀린 듯 느리게 흐르는 세상 속, 하나 남은 무진의 눈이 이 지독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호선을 그렸다.
그 웃음의 의미야 아무래도 좋다.
눈짓이란 형태의 답례를 마음에 새겨 넣은 백천이 검을 겨눈 채 땅을 짓쳐 쇄도했다.
‘그래.’
어째서 싸워야 하는가.
어째서 희생을 자처해야 하는가.
어째서 어리석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물러서지 못하는가.
그 답이 여기에 있다.
살아남는 게 아니다. 비록 무력할지라도, 비록 모자랄지라도.
‘지키는 거다.’
관철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남길 수 있다. 그의 의지를, 그의 삶을. 그의 뒤를 지켜 줄 이들과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에게 전할 수 있다.
“화산의 백천이 여기 있다! 모조리 와라!”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그의 검기가, 그 표정이 하나의 의지로 빛을 내뿜었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