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697화
“사숙!”
무진을 둘러업은 백천을, 그리고 그런 그를 따라 재빨리 무당의 제자들을 어깨에 들쳐 멘 화산 제자들을 보며 조걸이 외쳤다.
‘정말 이들을 데리고?’
조걸의 두 눈이 흔들렸다. 이 선택이 ‘옳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감당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지금 당장 절벽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마당에 부상자들까지 대동한 채 빠져나간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그러다가 빠져나가기 전에 절벽이 터지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모두 죽는 게 아닌가?
“사숙! 지금 이게…….”
“떠들어 댈 시간에 빨리 부상자나 챙겨, 인마!”
“아오! 빌어먹을!”
하지만 역시나 저 인간은 말이 통하질 않는다. 악을 쓰듯 욕지거리를 뱉은 조걸이 가장 가까이 있는 부상자를 번쩍 들어다 둘러업었다. 진현이었다.
“조, 조걸 도…….”
“입 닫고 있어요! 속 터지니까!”
조걸이 이를 악물었다. 전방의 빽빽한 적들 너머, 정상으로 향하는 비탈이 보인다. 경사가 상당해 보이나, 분명 저곳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저기까지만 도달하면…….’
그가 각오를 다지려는 순간이었다.
“어?”
차분해졌던 그의 눈이 다시 흔들렸다.
“사, 사숙, 저기!”
“음?”
“저기! 놈들이 충원됩니다!”
“뭐?”
무진을 챙겨 앞으로 나아가려던 백천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과연, 그들이 목적지로 삼았던 비탈 쪽에서 일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천의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저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는 게 한눈에 보아도 느껴졌다.
혜연이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아무래도 사패련은 어떻게든 우리를 이곳에 묻어 버릴 작정인 것 같습니다, 장문대리.”
“어떻게 합니까, 사숙?”
윤종의 물음에 백천은 침묵하며 앞을 응시했다. 잠시 흔들리던 눈빛이 빠르게 차분해졌다.
“뭘 물어?”
백천의 검이 희미한 검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저기가 길이라면 열어야지.”
“하, 하지만 시간이…….”
이번에는 윤종도 그리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물론 백천의 말엔 틀린 구석이 없다. 저기가 유일한 생로라면 어떻게든 열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냐를 따지기 이전에 이 절벽이 무너질 것을 고려해야 하지 않는가?
“가자!”
하지만 윤종이 무어라 더 말하기도 전에 백천이 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빌어먹을, 사숙을 따라라!”
선두에 선 백천을 보며 윤종이 다급히 외쳤다.
땅을 박차다 보니 어느새 백천의 앞으로 치고 나가는 조걸의 모습이 보였다. 저 망할 놈은 이제 무슨 소리만 들려도 본능적으로 선두로 뛰쳐나간다.
빠르게 백천을 따라잡으며 윤종이 물었다.
“사숙! 정말 괜찮습니까? 지금이라도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믿는다!”
“예?”
윤종의 얼굴에 의문이 스쳤다. 돌아온 대답이 상황에 영 맞지 않는 듯해서였다.
백천은 제 어깨에 짊어진 무진을 슬쩍 일별하곤 시선을 돌렸다. 이제는 꽤 멀게 느껴지는 절벽 끄트머리로.
“화산이 특별한 게 아니다.”
“…….”
“그러니 우리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다. 나는 믿는다. 반드시 우릴 도울 사람이 있을 거라고!”
“그게 무슨 말……”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앙!
절벽 끄트머리 쪽에서 커다란 폭음이 울려 퍼졌다.
“또 폭발인가?!”
“아악!”
“아, 아니야! 아까보다 훨씬 약한데?”
산발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모두가 금세 알아챘다. 이번 폭발은 아까 절벽을 뒤흔들었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위력의 문제가 아니다. 괴이하게 들릴지 모르나, 폭발에서 알 수 없는 익숙함이 느껴졌다.
순간 윤종의 등을 타고 소름이 내달렸다. 조금 전 폭발의 정체를 깨닫고 만 것이다.
“남궁…… 소가주?”
윤종이 두 눈을 부릅뜬 채 절벽 끝을 망연히 보았다.
“……남궁도위.”
* * *
“허억! 허억!”
남궁도위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저 아래에서부터 단번에 절벽을 뛰어올랐고, 적들의 움직임을 막기 위해 전력을 실어 검기를 발출했다. 내력을 급격하게 뽑은 탓에 육신이 비명을 질러 대고 있다.
“저 애송이 놈이!”
하지만 숨을 고를 틈 따윈 없다.
남궁도위의 눈엔 선명하게 보였다. 적들이 절벽에 뚫어 놓은 시커먼 구멍들이. 그 안에서 폭약이 터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도 뻔하다!
‘절대 그렇게 두지 않는다.’
빙글.
남궁도위가 검을 돌려 역수로 잡았다. 더는 전과 같은 검기를 뿜어낼 내력이 육체에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싸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몸을 붉은 열양기공으로 이글이글 뒤덮은 남해태양궁의 적들이 남궁도위의 정면으로 강하하고 있었다.
파앗!
남궁도위가 다리에 힘을 주어 단숨에 박차고 올랐다.
“와라!”
쾅!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그의 검과 태양궁도가 뿜어낸 장력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폐를 까맣게 태울 듯한 지독한 열기가 남궁도위를 휩쌌다.
머리카락 끝이 열기에 타들어 가며 매캐한 냄새가 코를 스쳤다. 피부가 모조리 녹는 듯한 고통도 느껴졌다. 열기를 이기지 못한 검 끝이 금세 새빨갛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남궁도위는 오히려 세차게 힘을 끌어 올렸다.
‘별것 아니야.’
이딴 건 고통도 아니다. 매화도에서 죽음만 기다리던 때 느꼈던 절망에 비한다면, 고통이라 할 수도 없다.
우우우웅!
백색 검기를 뿜어낸 남궁도위의 검이 주황빛으로 작열하는 태양궁도의 장력을 밀어 냈다.
이윽고 사방에서 그를 향해 장력이 쏟아졌다.
남궁의 검이 일반적인 검에 비해서는 크고 두껍다고 하나, 그래 봐야 검이다. 저 많은 장력을 모두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이럴 때 상식적인 대처를 하자면 당연히 뒤로……. 아니, 아래로 물러나는 게 옳다.
하지만 남궁도위가 지금 진정으로 상대해야 할 건 공격을 퍼붓는 놈들이 아니다. 이 순간에도 저 위에서 이 폭약을 설치하고 있는 놈들이다.
“으아아아아압!”
남궁도위는 물러나는 대신 고개를 숙이며 더욱더 절벽 면을 거세게 박찼다.
터엉! 터어어엉!
날아든 장력이 등을 스치고, 미처 피해 내지 못한 공격이 그의 육신을 두들겼다.
입과 코에서 질척한 피가 퍽 터지는 감각, 거기에 어마어마한 열기까지 그를 몸속부터 모조리 태울 듯 파고들며 휩쓸었다.
“아아아아!”
그러나 이번에도 남궁도위는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위로 나아갔다. 더욱더 폭발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쯤 되니 태양궁도들은 그 검에 죽어 가면서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파아아아앗!
적의 목이 절벽에서 솟구쳤다. 연이어 검을 휘두른 남궁도위가 앞을 막아서는 이들의 육신을 단번에 참하고, 좌수로 절벽을 움켜잡아 당겼다.
투웅!
그의 육신이 마치 튕기듯 위로 솟았다.
흐릿해진 시야에 절벽에 매달린 태양궁도들의 모습이 보였다. 선명하진 않지만 확실하다!
‘막아야 해.’
으득.
이 절벽이 무너지면, 그가 막아 내지 못하면 정상에 있는 화산파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 그 꼴은 절대 못 본다. 숨이 붙어 있는 한은 막아 낸다. 설령 대가가 그의 목숨이라 할지라도.
“하아아아아압! 멈춰라아아아아!”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남궁도위가 사자처럼 포효하니 주위의 공기가 우렁우렁 울렸다.
태양궁도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저놈이…….”
저자 하나를 막아 내는 건 어렵지 않다. 강한 자라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그래 봐야 혼자가 아닌가? 이곳에는 수십에 달하는 태양궁도들이 있다.
하지만 아래에서 올라오는 저 애송이에게 다수의 궁도가 달라붙었다가는 절벽을 제때 터뜨리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다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궁주의 진노를 감당할 수 없다.’
그들에게 태양궁주의 진노란 죽음보다 더한 공포였다. 그들만의 목숨이 걸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만 해도 온몸이 떨릴 정도였다.
“제기랄, 망할 놈이!”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흥분할 것 없다.”
“호법?”
조금 위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백발의 노인이 비릿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혈기는 넘치지만, 그래 봐야 애송이지.”
그가 소매에서 구형(球形)의 무언가를 꺼내더니 가볍게 움켜쥐었다. 이 순간에도 시선은 성난 짐승처럼 절벽을 무서운 기세로 타 오르는 남궁도위에게 꽂혀 있었다.
“정 죽고 싶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어야겠지.”
노인의 손이 느리게 펴졌다. 들려 있던 구체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쇄애애액.
아래로, 또 아래로. 그것은 점점 더 속도를 붙여 남궁도위를 향해 낙하했다.
파앗!
적들을 노려보며 빠르게 솟구치던 남궁도위의 눈에도 그것이 보였다.
‘뭐지?’
성인 남성의 주먹만 한 작은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다.
잠시 후, 남궁도위가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눈동자에 붉은 무언가가 비쳤다.
가까이 다가온 그 구체는 거무튀튀한 무언가로 감싸여 있고, 끝부분에 불이 붙어 있었다!
남궁도위는 반사적으로 제 팔과 검을 교차하며 절벽을 향해 내질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노인이 던진 폭약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며 절벽을 강타했다.
쿠르르르르릉!
“으아아아아아악!”
절벽이 크게 흔들리자 위태롭게 상부에 매달려 있던 사패련도들이 도리깨질을 당한 낱알처럼 우수수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붉은 화염이 솟구치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잠시 후, 검은 연기가 걷히는 순간 노인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용케도 아직 절벽 면에 매달린 채 축 늘어져 있는 남궁도위의 모습을 본 것이다.
노인이 절벽에 박혀 있는 남궁도위의 좌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 절벽에 제 손을 박아 몸을 고정한 건가?”
적이지만 대단하다고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그뿐.
“가서 숨통을 끊어 줘라.”
“예!”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태양궁도 중 하나가 절벽에 매달린 남궁도위를 향해 매처럼 강하했다.
남궁도위가 애써 눈을 껌뻑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의식이 반쯤 날아간 상황에서도 본능적인 위기가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제대로 힘이 실리지 못한 검은 열양기공을 한껏 머금은 붉은 손에 속절없이 튕겨 나갔다.
“죽어라아!”
남궁도위의 두 눈에 날아드는 주황빛 손이 비쳤다.
‘나는…….’
카아아아앙!
그리고 그는 또 보았다.
제 얼굴로 날아든 손을 막아 낸 무언가를. 그의 검보다 얇고 가볍지만, 그럼에도 이 순간엔 무엇보다 믿음직스러운 누군가의 검을.
‘누구…….’
“괜찮으십니까?”
남궁도위는 대답 대신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옆에 자리한 이의 얼굴을 확인하며 입을 뗐다.
이자는…….
“이송…….”
그러나 말을 채 다 맺기도 전에 서늘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난 척은 어지간히 하라고 했을 텐데. 정말이지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쇄애애액!
콰득!
벼락처럼 허공을 지른 진금룡의 검이 태양궁도의 목에 꽂혔다.
“끄륵…….”
힘을 잃은 태양궁도의 몸이 추락했다. 남궁도위는 그저 멍하니 진금룡을 바라보았다.
“잘나신 남궁은 거기서 쉬지. 적은 내가 처리할 테니.”
콰앙!
서늘한 살기를 내뿜은 진금룡이 빛살처럼 솟구치며 적과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