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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708화


1708화. 그걸로 됐소. (3)

쩌렁쩌렁한 고함에 모두가 일순 손을 멈췄다.

태양궁의 정예들을 뚫기 위해 발버둥질하던 화산의 검수들도, 심지어는 이들보다 더 절박한 사패련도들마저.

상처 입은 자존심 때문일까, 아니면 짓밟힌 명예 때문일까. 태양궁주의 고함은 절체절명에 몰린 화산보다 오히려 더 처절해 보였다.

“천한 놈들 주제에! 감히 나를! 너희 따위는 수십이 아니라 수백이 달려든다 해도 날 물러나게 만들 수 없다! 너희는 이곳에서 모조리 죽는다. 감히 내게 대항하고 검을 휘두른 대가로 천 길 낭떠러지에 처박힐 것이다! 그 시신조차 세상에 남기지 못하리라!”

절벽이 무너지고 처절한 비명이 들려오는 가운데, 선언과도 같은 태양궁주의 고함까지 터져 나온다.

“후회하고 또 후회해라! 비천한 너희가 감히 내게 대항하려 했던 무도함을. 주제도 모르고 이 산에 발을 들인 미련함을!”

위에 서 있는 자만이 가지는 위엄과 조금 전까지는 느껴지지 않던 확연한 여유가 그 목소리에 실려 있었다. 우위를 점한 데서 뿜어지는 여유가 화산 제자들의 가슴에 초조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순간, 누군가가 쿡쿡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박하고 절망적인 상황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기에 오히려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대자로 땅에 드러누운 한 곱슬머리 검수가 웃는 소리는 태양궁주의 고함만큼이나 커다란 울림으로 퍼져 나갔다.

“이놈이…….”

태양궁주의 얼굴이 노기로 달아올랐다. 그때, 조걸이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주 신나셨네? 겁먹고 폭약이나 써 대는 주제에.”

“뭐라?”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나?”

입가에 묻은 피를 무심히 훔치며 일어난 조걸은 태양궁주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겁먹은 개새끼처럼 빨리 폭약이나 터뜨리라고 징징대는 꼴을 여기 있는 사람들이 똑똑히 다 봤는데, 이제 와 위엄 있는 척한다고 누가 알아주겠냐? 안 그렇습니까, 사형?”

“확실히…… 좀 모양이 빠지긴 하지. 귀하신 분치고는 말이야.”

“그렇죠?”

맞장구치며 피식 웃은 윤종이 조걸의 곁에 섰다.

그 옆으로 혜연과 유이설까지 다가서니, 태양궁주가 두 눈에서 불을 뿜었다.

“이놈들…… 제 처지가 어떤지도 모를 만큼 멍청한 건가?”

“아니까 이러는 거다, 등신 새끼야. 잘 아니까.”

“뭐?”

조걸이 검을 들어 역수로 잡았다. 그리고 속으로 조소했다.

‘엉망진창이군.’

속이 모조리 뒤집혔다.

저놈의 내력이 얼마나 강대한지, 맞붙는 것만으로도 신체 내부가 온통 익어 버린 것만 같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다리 힘이 절로 풀린다.

그러나 조걸은 주저앉는 대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절벽은 이 순간에도 무너지며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 쓰는 사패련도들을 집어삼키고 있다.

무저갱에 삼켜지는 이들의 처절한 눈빛이 흡사 뇌리에 강제로 새겨지는 듯했다.

‘이제 금방이다.’

저 무시무시한 붕괴는 곧 이곳까지 도달할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악에 받쳐 이곳까지 달려와 화산이 아닌 태양궁에 칼질해 댄 사패련도들마저도 선 자리에서 들썩일 뿐, 차마 달려들지 못한다.

그만큼 태양궁주의 장력은 압도적이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절망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절망이라.’

낯선 감정을 한껏 담은 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여 왔다. 조걸을 아는 이도, 모르는 이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아마도 언젠가 조걸 역시 저런 시선으로 누군가를 바라보았으리라.

콰르르르릉!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등 뒤에서 요란하게 다가온다.

조걸은 짧게 심호흡하고는 태양궁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한 번이겠죠?”

“아마도.”

“두 번이면?”

“다 죽겠지.”

“제길……. 말이라도 좋게 해 주지. 늘 냉정하기는.”

방패를 조금씩 갉아 내서 뚫을 순 없다. 일 합. 단 일 합으로 부숴 버려야 한다. 단 한 번의 뒷걸음질도 실패를 의미할 것이고, 그 실패는 조걸뿐 아니라 화산 전체와 무당 전체의 죽음으로 이어질 터였다.

“가능성은요?”

“……희박하지?”

“그럼 이게 우리가 살아생전 나누는 마지막 대화입니까?”

“그럴 확률이 높다 봐야지 않겠느냐.”

“음……. 그럼 꼭 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

“개소리할 거면 그냥 하지 마라.”

“…….”

조걸은 안 하기로 했다. 대신 혀를 쯧 찼다.

바늘구멍을 뚫어내지 못한다면 죽는다라…….

‘새삼스럽지도 않네.’

그들이 지나쳐 온 길은 늘 이런 식이었다. 지금은 앞에 청명이 놈과 백천의 등이 없을 뿐. 이제껏 두 사람이 앞장서서 열었던 길을 이제는 그가, 그리고 그들이 열어야 하는 것뿐이다.

조걸이 묵직하게 자세를 낮추었다. 온몸의 근육이, 신경이 전투 태세에 들어선다.

조걸의 눈이 살짝 감겼다.

‘솔직히 말하면…… 내겐 아직 이르다고.’

매화검이 주인의 속내를 아는 양 우웅 검명을 토했다. 이윽고 붉은 검기가 짙게 어렸다. 참선하는 고승처럼 반개(半開)한 그의 눈이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우우우우우우웅!

조걸의 검이 더 크게 울어 댄다. 그간 익혀 온 모든 것이 한 몸 같은 매화검에 어린다. 평생 갈고닦아 온 모든 것이.

‘나는…….’

검을 쥔 손이 살짝 떨렸다.

모든 것을 담고서도 일말의 주저와 부담이 남았다. 떼어 내기 어려운 감정이 아교처럼 발목을 붙잡았다.

할 수 있을까? 정말로?

숨이 막혀 온다.

언젠가부터 ‘쥐고 있다’는 느낌조차 없을 만큼 익숙하던 검 손잡이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익숙해야만 하는데 돌연 낯선 그 감촉에 손끝이 떨렸다.

할 수 있다고? 정말로 내가…….

조걸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본다. 아니, 돌아보려 했다.

어쩌면 지척에 ‘그’가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항상 이럴 때면 바람처럼 달려와 그들의 앞을 막고 있는 벽을 깨부숴 주곤 했으니까. 그들이 갈 길을, 또한 살길을 열어 주었으니까.

그러나 고개가 채 돌아가기도 전에 귓가로 담담한 목소리가 스쳤다.

“뒤가 아냐. 앞이다.”

“…….”

조걸이 기대하던 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굳이 찾지 않아도 언제고 곁에 있던 사람이다.

“돌아보지 마. 너는 그냥 앞으로 가면 된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조걸에게는 확실하게 닿았다.

“책임은 내가 진다. 반드시 열어 주마. 내 목숨을 던져서라도.”

조걸이 윤종을 보았다.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덤덤했다. 비장한 각오도, 굳은 신념도 내비치지 않은 얼굴이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걸 알면서도, 한 치 흔들림조차 없어 보였다.

조걸의 손에서 가시질 않던 떨림이 서서히 멎었다. 잠시 침묵하던 조걸은 피식 웃고 말았다.

“약해 빠진 양반이.”

“너 그러다 호되게 맞는다.”

굳어 있던 조걸의 얼굴에서도 긴장이 점차 가셨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태양궁주를 주시했다.

꾸욱.

발로 땅을 지그시 눌렀다.

사실 모르겠다.

청명이 말하는 미래도, 백천이 말하는 신념도, 윤종이 말하는 협의도…… 그에게는 조금 멀게만 느껴졌다. 유이설의 맹목도, 혜연의 꿋꿋함도 그저 감탄스럽기만 할 뿐, 마음 깊이 공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그들이 보는 세상은 아마 조걸이 보는 세상보다 훨씬 선명할 것이다. 그들의 세상에 비하면 조걸의 것은 희뿌연 안개에 뒤덮여 모호한 세상에 지나지 않을 터.

모두 자신만의 길을 찾고 열어 내는 와중에 늘 그의 길만이 흐릿했다.

모자라서겠지. 부족해서겠지. 각오가, 신념이, 정의감이, 그리고 따뜻함이.

그렇기에 그는 무엇도 홀로 정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애써 왔을 뿐. 어쩌면 그는 이 화산의 유일한 반편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약속한 겁니다.”

그럼에도 있다. 그의 어두운 길을 조용하게 밝혀 주는 등불이.

조걸은 그저 믿었다. 지금 뒤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비록 자신이 이 흐린 세상에서 옳은 길을 찾지 못할지라도, 이 사람만은 반드시 그가 믿는 ‘옳음’을 찾아낼 거라고.

‘그런 거였나.’

조걸이 중얼거렸다. 언젠가 들었던 말을, 어쩌면 저도 모르게.

“나는…… 검이다.”

나는 내가 옳음을 확신할 수 없다. 내가 걷는 길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나와 함께 서 있는 이들이 옳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다.

그렇기에 나는 검이다. 스스로 무언가를 베지 않는, 하지만 손에 쥐였을 때는 그 무엇보다 날카로울 검.

주저하는 마음을 버린다는 건, 의심 한 점 없는 믿음 아래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런 거였구나.’

부옇게 흩어져서 도통 모이지 않던 조걸의 세상 한가운데에 작은 점이 생겨났다.

미약하고, 보잘것없다. 아직은 그저 작기만 한 무언가다.

그러나 이 작디작은 구심점이 생기는 순간, 조걸이 보는 세상이 같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니, 세상뿐만이 아니다. 육신도, 정신도, 그의 손에 들린 검마저도 이내 같은 색으로 물들어 간다.

“이놈!”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꼈음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일까?

태양궁주의 양손에서 별안간 거대한 장력이 뿜어져 나왔다. 폭풍과도 같은 장력이 조걸을 향해 휘몰아쳤다.

한층 더 끔찍한 열기와 지독한 압력이 느껴졌다. 한낱 검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그 순간, 풀려 있던 조걸의 두 눈에 선명한 빛이 어린다.

콰앙!

땅을 박찼다는 자각조차 없다.

육신과 정신, 그리고 기운이 하나로 합일한 순간이었다. 조걸은 한 자루의 검이 되어 아드는 장력을 향해, 그 너머에 버티고 선 태양궁주를 향해 뻗어 나갔다.

‘나는…….’

나아감이란 맞서는 것, 맞섬이란 직면하는 것.

세상이 더없이 선명해졌지만, 조걸의 의식은 그곳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지금 그의 의식이 좇는 것은 둘뿐이었다.

하나는 이 지독한 불길 뒤에 있을 적.

다른 하나는 바로 뒤에서 올곧게 들려오는 숨소리였다. 그를 믿고 저 지독한 불길을 향해 망설임 없이 뛰어든 사람.

‘검이란…….’

조걸의 두 눈은 모호함과 선명함의 경계에 서서 어딘가를 향해 깊게 침잠했다.

‘그저 베는 것.’

파아아아앗.

그의 검이 휘둘러진다. 손이 휘둘러진다. 아니, 그가 휘둘러진다.

그려 내는 선은 깔끔하지 못했다. 숙련된 검수가 전력을 다해 그었다기에는 거칠고 투박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선은 묵묵히 베고 지나갔다.

그를 막아서고 위협하며 차마 베어 낼 수 없는 벽이었던 것을.

지독하게 끓어오르던 주홍빛 불길 중앙이 마치 흐르던 물이 두 길로 갈라지는 듯 나뉘었다. 너무도 가뿐하여 원래 정해져 있던 수순인 것처럼 보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화염이 갈라진 사이로, 반개한 조걸의 눈과 경악으로 일렁이는 태양궁주의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조걸의 검이…….

아니, 조걸이 꿰뚫었다. 앞을 막아선 절망이란 이름의 벽을.

둔탁하고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드득.

철검이라는 이름하에 조걸이 태양궁주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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