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10화
1710화. 그걸로 됐소. (5)
용암처럼 들끓던 절벽 위로 얼음장 같은 한 줄기 냉기가 흘렀다.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누구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침내 그 적막을 끊어 낸 건, 태양궁 호법들의 비명이었다.
“궁주니이이이임!”
땅에 처박히듯 고꾸라진 진평을 멍하니 보다 퍼뜩 정신을 차린 호법들이 악을 쓰며 다급하게 그쪽으로 달려들었다.
“뭐, 뭣들 하느냐! 궁주님을 보호해라!”
호법들은 독 오른 살쾡이처럼 열양기공을 이글거리며 태양궁주를 둘러쌌다.
“궁주님, 괜찮으십니까? 궁주님!”
“으, 으…….”
기식이 엄엄하나 아직 목숨이 끊기진 않았다. 호법들은 필사적으로 태양궁주의 육신에 기운을 밀어 넣었다. 어떻게든 숨은 붙여야 하지 않겠는가!
한편, 이를 멍하니 보던 조걸은 움찔하며 고개를 획 돌렸다.
“사숙!”
그의 비명이 신호라도 된 듯, 우뚝 서 있던 백천이 그 자리에 허물어졌다.
털썩.
조걸은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두 눈을 치떴다.
의복은 어깨까지 죄 타 버렸고, 훤히 드러난 백천의 양팔은 말 그대로 검붉은 숯처럼 변했다.
“어으…….”
처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조걸은 몸을 떨며 달려가려다 그만 그 자리에서 엎어지고 말았다. 마음은 이미 저만치 달려갔는데, 다리가 도통 말을 듣질 않았다.
“이……!”
조걸이 이를 악물며 땅을 할퀴었다. 손가락을 박아 넣어서라도 몸을 지탱해 보려 했지만, 이젠 힘을 불어넣기는커녕 까딱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이, 이 빌어먹을! 제기랄…….”
다급한 마음에 욕설만 힘없이 뇌까리던 그때, 누군가의 커다란 고함이 울려 퍼졌다.
“사형을 보호해라!”
백상이었다.
“청자 배들은 부상자를 수습하고, 백자 배들은 무당의 제자들을 보호한다! 적의 일축이 무너졌으니 당장 이곳을 탈출할 것이다!”
“예!”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누군가가 조걸을 향해 달려왔다. 쓰러진 채 그 모습을 보던 조걸이 중얼거렸다.
“……곽회.”
“빌어먹을! 사형은 목숨이 세 개쯤 되십니까? 도대체 무슨 정신이냐고!”
곽회가 조걸을 거의 멱살잡이하듯 잡아끌었다. 조걸이 다급하게 말했다.
“나, 나보다 사숙을 먼저…….”
“아, 끝까지 입은 살아서는!”
곽회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조걸을 둘러업었다. 어느새 달려온 다른 청자 배들도 탈진해 쓰러져 있는 윤종과 유이설을 업었다.
“사형!”
가장 먼저 백천을 향해 달려갔던 백상은 백천을 둘러업으려다 말고 움찔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으…….”
차마 손댈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익어 버린 두 팔은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벗겨질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속까지 타 버려 바스러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팔이 아닌 다른 곳이 멀쩡한가? 솔직히 성한 부분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을 듯했다.
이런 꼴이 되었는데도 어떻게 아직 살아 있는지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
으득.
‘망할 인간!’
백상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최대한 조심스럽게 백천을 들어 올렸다. 터질 듯 막막해져 오는 속에 이를 악문 그가 주위를 살폈다.
“백자 배.”
“예, 사형!”
무당의 제자들을 수습하여 어깨에 둘러업은 화산의 백자 배들은 어느새 백상의 좌우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가 부르기도 전에 말이다.
“어느 한 놈도, 어떤 공격도…… 사형의 몸에 닿게 하지 마라.”
엄숙하기까지 한 명에, 화산 백자 배들의 시선이 백상에게 안긴 백천에게로 쏠렸다. 모두를 구하기 위해 이토록 처참한 몰골이 된 백천을 보는 순간, 화산 검수들의 두 눈에 새파란 귀기가 어렸다.
백상의 날카로운 시선은 어느새 길을 막아서고 있던 태양궁도들에게 꽂혀 있었다.
태양궁주가 쓰러지고 호법들이 그쪽으로 몰려가다 보니, 철벽같았던 방어선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이리된 이상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다.
콰르르르르릉!
절벽이 무너지는 소리 속에서, 백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빠져나간다! 지금 당장!”
“예!”
화산의 제자들이 일제히 매화검을 들고 앞으로 내달렸다.
“으, 으으!”
“구, 궁주! 우선 궁주님을 보호해라!”
“하지만 그러면 놈들이……. 명령이……!”
“빌어먹을! 궁주님께서 위험하신데 명령은 무슨 명령! 누가 감히 태양궁에 명령을 내린단 말이냐!”
한번 무너진 둑은 무슨 수를 써도 다시 막을 수 없는 법이다.
태양궁주 진평이라는 주춧돌이 빠진 태양궁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수월하게 무너져 내렸다.
태양궁도들은 우왕좌왕하며 뒤로 차츰 물러났다. 저토록 살기를 품은 화산의 검수들을 상대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다.
“비켜! 모조리 죽여 버리기 전에!”
백상이 악을 쓰며 검을 휘둘렀다. 적을 격살하기 위한 검이 아닌, 그저 위협하기 위한 검이다.
뒷골목 왈패가 분에 겨워 휘두르는 듯한 위협에 불과하지만, 지금은 그 하찮은 움직임으로도 충분했다. 태양궁도들 역시 머리를 잃고 혼란에 빠져 있었으므로.
“끄윽…….”
호법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태양궁주 진평이 흐릿한 시야로 그 광경을 보고는 애써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호법들이 기겁하여 만류했다.
“궁주님!”
“궁주님,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내상이 심합니다.”
“노, 놈들을……. 쿠, 쿨럭!”
무어라 명하려던 태양궁주가 검게 죽은 피를 폭포처럼 쏟았다.
“기운을! 기운을 더 불어넣어라! 당장!”
“예!”
태양궁주의 흐릿한 시야에 잡힌 건 백상에게 업힌 백천의 모습이었다. 몰골만 봐선 시체나 다름없지만, 어쨌든 저자는 지금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있다.
물론 이곳을 나가기 무섭게 숨이 끊어질지도 모르지만, 결국 태양궁주가 저들을 이 절벽에 묶어 두지 못했다는 사실만큼은 변치 않는다.
“으, 으으…….”
심지어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패 죽여도 시원찮을 이족(異族) 새끼들!”
“너희가 감히 우릴 죽이려고 해?”
터져 버린 둑으로 어찌 화산만 밀려들었을까.
화산이 연 길을 따라 사패련의 잔당들이 무섭게 치고 들어왔다. 목숨의 위협까지 받았으니 그 어느 때보다 잔뜩 성이 난 채로. 태풍에 거칠어진 탁류가 되어.
“아아아악!”
물러나려던 태양궁도들의 가슴에 사패련의 칼이 깊숙하게 박혔다. 조금 전만 해도 무당을 상대로 함께 싸웠던 이들이 지금은 불공대천의 원수가 된 것처럼 서로의 목을 물어뜯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던 태양궁주의 몸이 뒤틀렸다. 그러고는 경련할 힘조차 없는 것처럼 한차례 크게 펄떡인 후 축 늘어지고 말았다.
기겁한 호법들이 태양궁주를 붙들었다.
“구, 궁주님!”
“호법들을 더 불러와라! 궁주님을 살려야 한다!”
“궁주님!”
그런 태양궁을 뒤로하고 적의 방어선을 돌파한 백상이 다급히 좌우를 둘러보았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어디로 가야 이들을 살릴 수 있을까?
여전히 이 산에는 불길이 날름거리고 있다. 심지어 살아남아 뒤를 쫓을 적들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불길과 적들을 모두 뚫고 안전한 곳을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사이에 백천은 죽을 것이다.
‘안 돼…….’
처음엔 태양궁주만 넘어서면 살길이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무작정 올라가선 안 된다.
지금 당장 안전한 곳을 찾아 백천을 치료해야 한다. 그 외 오검도 치료가 시급하다!
너무 다급해지니 머릿속이 굳어 버린 듯했다. 이 지옥 같은 산속 어디에 치료를 받을 만큼 안전한 곳이 있단 말인가.
무작정 이동하면서도 내딛는 걸음마다 푹푹 꺼지는 듯 무거웠다. 아니, 땅이 모조리 꺼져 모두를 무저갱으로 집어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누가…….’
절박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그에게 조언해 줄 사람은 없다.
백천도, 유이설도……. 윤종, 조걸은 물론이고 심지어 혜연마저 이미 의식을 잃어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다.
백상 그가 해야 한다.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다. 이들이 그를 돕는 게 아니라 그가 이들을 살려 내야 한다.
이 순간에도 등에 닿는 백천의 숨은 곧 끊길 듯 점차 가늘어졌다.
“사형, 사형!”
백상은 다급하게 등 뒤의 백천을 불렀다. 가슴에 끝없이 밀려드는 불안함을 꾹 눌러 가며.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형. 제가 반드시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때까지 죽지 마십시오! 사형, 아시겠습니까? 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백상 사형! 일단 어디라도…….”
“알아! 안다고, 이 새끼야!”
백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의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젠 저 산 아래까지 내달리는 수밖에 없다. 그곳이 불지옥이든, 마귀로 가득 찬 아귀 지옥이든 상관없다.
이들을 살릴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지옥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산 아래로…….”
마음을 굳힌 백상이 백천을 업은 손에 힘을 주며 방향을 틀려던 그때였다.
“아래는 위험하네!”
“엇?”
익숙한 목소리에, 백상이 급히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당군악이 곁에 와 있었다. 입가에 말라붙은 피와 곳곳이 찢어진 의복만 보아도 그가 겪었을 악전고투를 짐작할 만했다.
“가주님!”
“그대로!”
짧은 말이었지만 정확히 알아들었다. 백상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군악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망망대해에서 등대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가, 가주님! 사형이! 배, 백천 사형이……!”
당군악은 한껏 굳은 얼굴로 백천을 살폈다. 검붉게 익은 데다 군데군데 시커멓게 굳기까지 했다. 쩍 갈라져 드러난 속살마저도 피를 흘리지 못했다. 늘 굳건했던 두 팔은…… 가망이 없어 보였다. 당군악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심상찮은 표정에 백상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가주님. 사형은…… 사형은 괜찮겠…….”
당군악이 딱 잘랐다.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닐세! 이럴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떼게! 이들을 살리고 싶다면!”
“예, 알겠습니다!”
당군악은 피가 말라붙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 하지만 어디로 갑니까?”
“목숨을 구할 곳.”
“그게 어디입니까?”
당군악이 바삐 머리를 굴리려는 그 순간이었다.
“위……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뭐?”
“위……. 머리…… 위를.”
당군악과 백상의 시선이 격하게 위로 향했다.
앞에 펼쳐져 있는 가파른 산길, 그리고 그 끝에 놓인 정상 가운데에는 낡고 고풍스러운 전각들이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무당의 제자들이 목숨을 걸어 지켜 낸 곳.
“……무당.”
“…….”
“그렇군. 그곳밖에는 없지.”
당군악은 이를 알려 준 이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허공은 화산의 제자에게 업힌 채 여전히 정신이 혼미했으나 손만은 단호히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당산에서 안전한 곳이 무당파 외에 또 있겠는가. 치료하기에는 이 산중에서 가장 제격인 곳이다.
“가세나! 서두르게!”
“예, 가주님!”
당군악이 선두로 치고 나갔다.
“가주님을 따라라!”
“으아아아압!”
대답 대신 포효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화산의 제자들이 가파른 무당산을 산짐승처럼 질주했다.
더 빨리, 남은 모든 힘을 두 발에 실었다.
곧이어.
쩌어어엉!
살면서 단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거대한 소음이 달려 나가는 이들의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이 상황에서도 모두 움찔하여 뒤를 돌아볼 정도였다.
쩌적! 쩌저적!
여전히 빠져나가려 몸부림치는 사패련도들이 있는 절벽.
콰아아아아아아아앙!
끔찍한 천붕지음과 함께 절벽 전체가 갈라지고 으스러지더니 그대로 꺼지기 시작했다. 천신의 창이 산을 꿰뚫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였다.
모두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
인간의 악의가 수천 년간 한 모습을 간직해 온 무당의 지형을 말 그대로 으스러뜨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