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17화
1717화. 네 목을 걸고 말이야. (2)
“아으…….”
조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온다.
생각 같아서는 환호든 욕설이든 목이 터지도록 외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백천을 감싸고 있는 기운이 흐트러질 테니 그저 소리 없이 앓아 댈 수밖에 없었다.
‘저 망할 새끼!’
그러나 이 순간 그의 전신 중 유일하게 자유로운 두 눈만은 마음껏 요동치고 있었다.
“처, 청명아!”
멍하니 청명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백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안도감과 원망으로 점철되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너……. 너 이 새끼. 너…….”
백상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청명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왜……. 왜 이제야…… 이 새끼야!”
이유는 자신도 모른다.
분명 환호하고 반가워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청명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백상의 마음에 떠오른 감정은 설명하기 힘든 설움과 억울함이었다.
화산 검수들의 눈빛이 살짝 흔들린다. 백상의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지금 저 행동은 분명 과했다. 특히나 이런 긴박한 상황에 적을 앞에 두고 할 만한 행위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청명은 그런 백상의 과한 행동에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검을 든 화산과 무당의 검수들을 넘어, 백천과 그를 둘러싼 이들을.
“…….”
청명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는다.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오싹함에 무당의 검수들이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나고 말 정도였다. 그 눈빛의 적의가 결코 자신들에게 향해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 이해하고 있음에도.
“청명…….”
“물러나 있어요, 사숙.”
청명의 손이 백상의 어깨를 턱하고 두드린다.
“…….”
“일단은.”
얼음장처럼 차게 굳은 그의 얼굴이 천천히 앞으로 돌아왔다.
“저 새끼들부터 처리하죠.”
백상의 손에서 힘이 풀린다.
그제야 자신이 지금 무슨 행동을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백천을 위협하는 적은 여전히 그들의 앞에 있다. 그럼에도 말도 안 되는 추태를 보이고 만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건 청명에 대한 원망 때문이 아니라 청명의 등장과 동시에 그의 머릿속을 채워 버린 안도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청명이 검을 한 번 돌려 제 어깨에 걸치고는 턱짓으로 혈궁주를 가리켰다.
“좀 전까지는 잘도 지껄여 대던 것 같던데. 갑자기 왜 입을 다무셨나?”
“…….”
붕대로 감긴 혈궁주의 얼굴이 꿈틀대며 일그러진다. 얼굴을 감싼 손 사이로 잘린 붕대가 올올이 풀려 흘러내리며 그의 모습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네놈…….”
욱신.
말라붙어 검붉어진 피 위로, 마르지 않은 뜨거운 피가 주륵 흘러내린다. 턱 끝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바닥에 투둑 떨어지는 순간, 혈궁주의 두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흐…….”
붕대로 가려진 혈궁주의 혀가 붕대를 적시고 있는 피를 천천히 핥았다. 마른 피의 역겨움과 신선한 피에서 전해져 오는 비릿함이 혀끝에서 전해지자 그의 전신이 짧게 경련을 일으킨다.
“화산……검협?”
고목나무를 긁어 대는 듯한 거친 음성.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청명은 경계하기는커녕 되레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요즘 새외 것들은 중원에 관심이 많네. 얼굴도 못 본 사람의 별호까지 챙기고 말이야.”
“쿡쿡.”
혈궁주의 두 눈이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
“기고만장하시군.”
그의 얼굴이 진한 살심으로 물들었다.
지금 일검은 확실히 대단했다. 아무리 생각 못 한 공격이라 한들, 그가 안면에 일격을 허용했다는 건 저자의 검술이 신기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하나 주제를 모르는구나. 얌전히 숨어 있었다면 목이 날아가지는 않았을 텐데.”
까드득.
혈궁주가 살심을 터뜨리며 천천히 청명을 향해 다가왔다.
그와 동시에 퍼져 나간 지독한 살기에 무당의 검수들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숨이 틀어 막힌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다르다. 하지만 다르지 않다.
그들의 앞을 막아섰던 태양궁주의 태산 같은 기운과는 확연히 다르지만, 이 음습하고 진득한 기운이 주는 공포감은 어떤 면에서는 태양궁주조차 뛰어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더욱 두렵게 만든 것은 그가 뿜어내는 기운이 아니었다.
‘어, 얼굴이…….’
그 순간 무당의 제자들은 보았다.
손을 내린 혈궁주의 얼굴. 잘린 붕대 사이로 드러난, 시체처럼 푸르딩딩한 얼굴이 부글부글 끓듯 요동치는 모습을 말이다.
“저, 저…….”
검에 베인 상처.
뼈가 드러날 정도로 깊이 베인 상처가 회복되고 있었다. 사람의 눈에 그 변화가 보일 만큼 빠른 속도로.
‘어떻게?’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그깟 검격 한 번 성공시켰다고……. 뭐가 달라지기라도 할 줄 알았나?”
무당 제자들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든다.
그 몇 걸음을 걸어오는 와중에 갈라진 얼굴 사이로 살이 들어차고, 피부가 요동친다. 그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구역감과 공포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새외의 무학은 중원의 무학과 궤가 다르다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저걸 무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세상에…….’
가능할까?
그 기운만으로도 감당이 어려운데, 입은 상처를 그 자리에서 회복해 버리는 사공(邪功)이라니.
아무리 화산제일검수 화산검협이라 해도, 저런 괴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청명의 등에서 그 대답을 찾지 못한 무당의 검수들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화산의 제자들을 바라본다. 그러고는 놀라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아니…….’
없다.
결코 적지 않은 수의 화산 제자 중 단 한 사람의 얼굴에서조차 의심의 빛을 찾아볼 수 없었다.
믿는 것이다. 흔들림 없이. 상대가 누구이건, 그 얼마나 대단한 자이건. 화산검협 청명이 감당하지 못할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 확고한 믿음을 보는 순간, 아연해진 것은 오히려 무당 쪽이었다.
그들이라면 저런 믿음을 보일 수 있을까? 그 대상이 허도진인이나 허공이라 할지라도, 저토록 완벽한 신뢰를 보낼 수 있을까?
어느 쪽인 걸까. 이들이 어리석을 정도로 맹목적인 걸까, 아니면 저 화산검협이 그만한 신뢰를 받을 자격이 있는 이인 걸까.
이제는 바로 청명이 그 대답을 내놓을 차례였다.
“뭐가 그렇게 놀랍지?”
혈궁주가 비릿하게 웃으며 청명을 향해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교에서는 당연한 일에 불과한 일이다. 하찮은 중원의 무학을 신봉하는 너희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그 말을 들은 청명이 짧게 웃는다. 하지만 정면에서 청명의 얼굴을 마주한 이라면 그 웃음을 결코 ‘웃음’이라 표현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토록 서늘하고 차가운 것을 웃음이라 말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나오는 대로 지껄여 대는군.”
어깨에 올려졌던 청명의 검이 천천히 아래로 늘어진다.
까각.
청명의 검 끝이 느릿하게 바닥을 긁는다. 마치 맹수가 발톱으로 바닥을 긁어 적을 위협하듯.
“이젠 ‘교(敎)’라는 말을 쓰기로 한 건가?”
“……지금 뭐라고 했나?”
그 순간 백상은 보았다.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단 한 번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혈궁주의 얼굴에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이 떠오른 것을.
“말 그대로야. 이젠 교라는 말을 쓰기로 한 모양이지?”
“……네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말 그대로라고 했잖아. 멍청한 새끼야.”
청명이 이죽거리듯 이를 드러냈다.
“천마와 마교가 무서워서 감히 교(敎)라 자칭하지도 못하고 궁이라는 너절한 이름으로 도망친 너희가, 이제는 쥐꼬리만 한 용기라도 내어 다시 혈교(血敎)라는 이름을 쓰기로 했냐고 묻는 거다.”
“네, 네가 어찌…….”
혈궁주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진다.
“감히 그런 망발을!”
“아니면.”
청명이 진득한 조소를 머금었다.
“그들이 없는 곳에서만 비참하게 스스로 교라 지껄여 대는 건가? 어느 쪽이지?”
“이……!”
혈궁주의 얼굴에 어마어마한 노기가 치솟아 올랐다.
아니, 그건 단순한 분노와는 다른 무언가. 치욕과 분노, 그리고 수많은 지저분한 감정이 뒤섞인 밑바닥의 무엇이었다.
“네 창자로 목을 조여 죽여 주마!”
콰아아아아아!
혈궁주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사기가 뿜어져 나온다. 음습함을 넘어 지독한, 시커먼 탁류 같은 혈기들이 먹물처럼 번져 청명을 뒤덮어 온다.
동시에 혈궁주가 가공할 속도로 청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파아앗!
그 순간 청명의 검이 단숨에 혈궁주를 향해 날아든다. 쾌속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벼락같은 속도로.
콰각!
청명의 매화검이 내뻗은 혈궁주의 손을 단번에 베어 내었다. 붕대로 감긴 혈궁주의 손이 손목까지 단숨에 갈라진다.
“소용없다! 멍청한 놈!”
혈궁주의 두 눈에 혈기가 솟구쳤다.
갈라진 붕대 사이로 드러난 그의 손. 그 손에 새겨진 셀 수도 없이 많은 흉터 자국들이 그의 무학과 그라는 이를 더없이 완벽하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파아앗!
혈궁주의 손이 청명의 머리를 쪼개 버릴 기세로 내리쳐진다.
청명이 뒤로 한 발 물러나 혈궁주의 손을 피해 내는 찰나, 혈궁주의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며 청명의 전신을 뒤덮어 왔다.
“죽어라!”
피할 수 없다.
혈궁주는 확신했다. 이 거리라면 그의 공격은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다. 이 건방진 놈을 이대로 짓뭉개 버리고 그가 말한 대로 배를 갈라 창자를 뽑아내리라. 그리고 그 창자로 이놈의 목을 조르며 죽어 가는 이의 얼굴을 똑똑히 감상해 주리라.
살의가 주는 저열한 쾌감에 몸을 맡기려 하는 바로 그때, 혈궁주의 시선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의 피에 뒤덮여 반만 겨우 드러난 청명의 입가가 기묘하게 뒤틀리는 광경이었다.
콰앙!
청명의 전신을 뒤덮던 피가 일순 터지듯 사방으로 튕겨 나간다.
‘뭐?’
콰드득!
그와 동시에 섬전처럼 뻗어진 청명의 매화검이 그의 어깨를 꿰뚫고, 그의 발이 혈궁주의 아랫배를 단번에 걷어찼다.
쾅!
터엉!
혈궁주가 뒤로 일 장이나 밀려 나가 바닥을 짚는다.
“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왜 그가 물러나게 된 것인지. 방금의 공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욱신!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꿰뚫린 그의 어깨에서 오는 고통뿐이었다.
“흐흐…….”
하지만 혈궁주는 분노하는 대신 비웃음을 흘렸다.
“소용없다고 했을 텐…….”
그때였다.
“큭!”
혈궁주의 눈이 크게 흔들린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꺾어 꿰뚫린 제 어깨를 바라본 혈궁주가 이내 구멍 난 어깨를 움켜잡았다.
“크…… 크아아아아악!”
그러곤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경련을 일으킨다.
“대, 대체……. 대체 이게……. 으…… 으으아아!”
이미 회복을 시작했어야 할 그의 어깨 상처가 회복하기는커녕 더 벌어지고 있었다. 대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 그의 어깨에서 치밀어 올랐다.
“끄……으으…….”
“머저리 같은 네 선대 놈들이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한 모양이로군. 아니, 목이 잘려 뒈지느라 전할 수도 없었나?”
청명이 그런 혈궁주를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며 일갈했다.
“뒈져 버린 네놈의 선대들 대신 내가 가르쳐 주지. 똑똑히 알아 둬라. 선기(仙氣)를 다룰 줄 아는 도사에겐 시비를 거는 게 아냐. 특히나 너처럼 너저분한 사공을 쓰는 놈들은 말이야.”
카각.
바닥을 긁어 대는 청명의 검 끝에, 투명하고 맑은 기운이 어려 있었다.
그 기운을 본 혈궁주의 시퍼런 안색이 이내 흙색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