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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719화


1719화. 네 목을 걸고 말이야. (4)

털썩.

엉덩방아를 찧듯 주저앉아 버린 백상의 입에서 맥이 탁 풀린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살았……구나.”

그가 침상에 누운 백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내 뭐라 표현하기 힘든 안도감이 몸을 휘감으며,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져 왔다.

“가주님, 사숙은 어떻습니까?”

“으음.”

당군악이 조심스레 백천의 단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신중한 얼굴로 한참을 살피던 당군악이 마침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안정되었군. 의학적으로 볼 때 쾌유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이상의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 같네.”

“그 말씀은?”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걸세.”

당군악도 말을 하며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당군악까지 이리 말하니, 그제야 신중한 윤종도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놀란 마음을 여실히 담은 당군악의 시선이 청명에게로 향한다.

‘뭘 어떻게 한 거지?’

분명 서로 다른 기운이 날뛰는 상황이었다. 심지어는 양의(兩儀)의 이치를 터득한 허공조차도 그것을 다스리는 데 거의 실패하지 않았던가.

그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건만, 대체 청명은 어떻게 그 두 기운의 충돌을 한순간에 잠재워 버렸단 말인가. 무슨 신묘한 조화를 부렸기에?

하지만 당군악의 의문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장로님!”

이 놀라운 현상 때문에 허공을 잊고 있었던 게 퍼뜩 머릿속을 스쳤다. 무당의 검수들은 쓰러진 허공을 붙든 채 안타까이 목소리를 높였다.

당군악은 아차 하여 그 모습을 보았다. 이곳에 환자가 백천만은 아니거늘.

“비켜 보게.”

그가 무당 제자들을 밀치고 급히 허공의 맥을 잡았다. 그렇게 상태를 살핀 당군악의 얼굴에 대단히 복잡하고 안타까운 표정이 스쳤다.

온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은 무진이 가만히 물어 왔다.

“가주님. 장로님은…….”

당군악은 잠시 망설이다 나직이 탄식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걸세. 다만…….”

백천의 상태를 말하던 때와 말은 비슷하나, 당군악의 표정은 더없이 침중할 수밖에 없었다.

“기운이 흐트러졌네. 아마 무인으로서는 더 이상…….”

말을 채 마무리 짓지 못하였지만, 무진은 그 뒤에 이어질 말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혹시나 품었던 기대도 여지없이 무너졌다. 하지만 무진은 짧은 한숨을 내쉰 뒤 이내 담담한 신색을 되찾았다.

“괜찮습니다. 그런 표정 마십시오.”

무진이 의식을 잃은 허공을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장로님께서 스스로 원하신 일입니다. 아마…… 본인도 그리 개의치 않으실 겁니다.”

“자네…….”

“무당은 허공이라는 무인을 잃었을지 모르나, 허공이라는 도인을 얻었습니다. 어찌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적다 할 수 있겠습니까.”

무진이 나직이 도호를 외었다. 그리고 우울한 얼굴로 선 다른 무당의 제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게다가 이에 연연하기엔 지금의 무당은 잃은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무당의 제자들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 사패련을 상대하기 위해 나섰던 이들 중 이곳에 남은 건 고작 백 명도 되지 않는다. 무진의 말이 잠시 잊었던 그 참담한 현실을 다시금 직면하게 했다.

화산의 제자들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는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무진은 그런 화산의 제자들을 향해 정중히 고개 숙였다.

“제가 감히 무당을 대표할 수는 없겠으나, 이곳에 남은 이들을 대표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아, 아니…….”

“덕분에 무당이 명맥을 이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저…… 그저 감사합니다.”

화산의 제자들은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조걸이 구시렁거리듯 말했다.

“거, 이러시면 조금 전에 칼 뽑아 들고 싸울 뻔했던 게 너무 민망해지는데요.”

“……제발 입 좀, 걸아.”

“아니, 사실이잖습니까?”

“그 사실을 굳이 안 내뱉고 입 다물 줄 알아야 어른이다.”

그리고 너는 평생 어른은 못 되겠지, 아마. 윤종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윤종이 그러거나 말거나 조걸은 화산의 제자들과 무당의 제자들을 둘러보더니 무당의 산문 너머로 힐끗 시선을 주었다.

“그럼…… 이제 끝난 겁니까?”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그걸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윤종은 말없이 허공을 주시하는 청명을 불렀다.

“청명아. 장일소는?”

“…….”

“놈은 어떻게 된 거냐?”

그제야 청명이 윤종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군사!”

달려온 부관들이 호가명 앞에 고개를 숙였다.

“분부하신 대로 무당산에 진입했던 이들을 모두 후퇴시켰습니다.”

호가명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보니 불타 버린 무당산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커멓게 변한 산의 정상 부근만이 처음의 푸르름을 가까스로 간직하고 있었다.

어찌 평해야 할까.

산 대부분을 불태웠음을 상찬할 것인가? 아주 오래도록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짓밟았다고.

아니면 저 정상마저 숯으로 만들어 버리지 못했음에 비통해하고 안타까워할 것인가? 이토록 철저히 짓밟았을지라도, 언젠가는 이 산이 또 다른 푸르름으로 뒤덮일 거라고.

다른 이들의 평가야 이처럼 모두 다를 수 있겠으나, 호가명이 내려야 할 평가는 하나뿐이었다.

“남해태양궁은?”

“지금 무당산에서 이탈했다고 전령을 보내왔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아무래도 태양궁주의 상태가 심각한 모양입니다.”

호가명의 입가에 옅은 조소가 스쳤다.

“정상에 오른 건 고작해야 화산파뿐이었는데, 그들을 상대하면서 심한 부상을 입었다는 건가?”

“…….”

“화산검협조차 없는 화산을 상대로?”

“예.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호가명의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이는 태양궁주를 향한 게 아니었다. 분명 호가명 그 자신을 향한 비웃음이었다.

“화산검협이 없는 화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

“그런 말을 지껄여 댄 멍청이가 하나 있었지. 숨 쉬는 공기가 아까울 지경이야.”

“군사…….”

호가명이 고개를 내젓고 웃음기를 지웠다.

“되었다. 남해태양궁에게 미리 말해 둔 집결지로 향하라 전갈을 보내라.”

“예, 군사.”

이어서 무언가를 더 말하려던 호가명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집결지라…….’

반드시 성공할 일이었다면 일이 실패했을 때 모일 집결지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집결지를 안배해 두었다. 이는 호가명 특유의 철두철미함 때문일까, 아니면 그 역시 이 일이 실패할 가능성을 은연중에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니, 이제 와 이런 게 무슨 의미를 가지겠는가.

“남은 이들도 후퇴를 서둘러라.”

“예, 군사.”

호가명의 눈빛이 어둑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그가 막 다시 발을 떼려던 순간.

“호가며어어어어어어엉!”

별안간 상처 입은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커다란 사자후가 호가명의 귀를 쩌렁쩌렁 파고들었다.

호가명이 슬쩍 돌아보니…….

천면수사 담여해. 그가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악귀 같은 형상으로 쇄도해 오고 있었다.

“자, 잠시!”

당황한 사패련도들이 본능적으로 천면수사의 앞을 막아섰다. 본디 감히 천면수사의 진로를 방해하는 일은 있을 수 없으나,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도 지금 천면수사가 호가명을 향해 뿜어내는 살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하오문주님! 지, 진정…….”

“비켜라아아아!”

콰아앙!

막아섰던 이들이 일격에 피를 뿌리며 사방으로 나가떨어졌다. 상대의 사정을 일절 봐주지 않는 살수였다. 천면수사가 전력으로 날린 장력을 감당하기엔 호가명의 호위들은 너무도 나약했다.

“호가며어어어어어엉!”

천면수사의 두 눈에서 핏빛 살기가 솟구쳤다.

“마, 막아!”

콰아아앙!

천면수사는 막아서는 이들을 인정사정없이 죽였다. 단번에 호가명을 에워싼 인의 장막을 돌파한 그는 호가명의 면전으로 들이닥쳤다.

그 순간까지도 호가명은 눈빛조차 흔들리는 일 없이 무표정하게 천면수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콰득!

천면수사가 호가명의 목을 그대로 잡아채었다.

쿠우우웅!

목을 짓누르며 호가명을 바닥에 처박은 천면수사는 호가명의 얼굴에 제 얼굴을 바짝 들이댄 채 으르렁댔다. 눈빛이 흡사 용암처럼 들끓고 있었다.

“구, 군사!”

“무슨 짓을!”

호가명의 부관들은 기겁하면서도 차마 천면수사에게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목을 잡지 않은 천면수사의 다른 손에 맹렬한 경기가 어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 손은 금방이라도 호가명의 머리를 내리칠 듯했다.

저 손이 움직여 호가명을 내리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 못 할 이가 있을까.

“무, 문주님! 진정하셔야 합니다!”

“이러시면 반드시 문제가…….”

어떻게든 설득하려 안간힘을 쓰는 이들에게 천면수사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듯이 호가명을 노려보며 일갈했다.

“해명해라.”

“…….”

“나까지 죽일 셈이었나?”

목이 죄어들수록 호가명의 낯빛이 점점 희게 질린다. 그러나 표정만큼은 여전히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제 숨통이 곧 끊길 판임에도.

“해명해 봐라. 왜 내게 일언반구도 없이 절벽을 터뜨렸는지. 왜 나를 그 지옥의 한중간으로 밀어 넣었는지. 납득될 만한 대답을 듣지 못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네 대가리를 부숴 놓겠다.”

이성을 잃은 천면수사의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눈빛만 보아도 그의 말이 결코 협박에 그치지는 않을 거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실낱같은 이성은 유지하고 있었던 것인지, 호가명의 목을 옥죄던 손이 느슨하게 풀렸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이.

“쿨럭.”

잔기침을 뱉은 호가명이 자신을 덮쳐 누른 천면수사를 무심히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그래서, 죽기라도 했소?”

“……뭐?”

천면수사 담여해가 순간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살아 있지 않소?”

천면수사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이…….”

“당신이라면 살아 나와야지. 천면수사라면.”

호가명은 여전히 태연했다. 그런 그의 목을 움켜쥔 천면수사의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억제하지 못한 분노가 육신을 뚫고 나온 것이다.

“그걸…….”

으드드득!

이를 갈아붙인 천면수사의 두 눈에 흉악한 살기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냐!”

천면수사가 끝내 손을 맹렬히 내리쳤다.

콰앙!

그러나, 짧고 강한 타격음과 함께 천면수사의 몸이 무언가에 걷어차이기라도 한 듯 튕겨 나갔다.

터엉!

땅에 처박혔다 다시 튀어 오른 천면수사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뿜어져 나왔다.

콰당.

“끅…….”

천면수사의 두 눈에 어마어마한 노기가 치솟았다.

“이런, 이런. 화가 많이 난 모양이로구나.”

그때, 급박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말이다.”

천면수사가 이를 악문 채 그쪽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역시나 붉은 장포를 전신에 휘감고 흰 만면에 묘한 미소를 그린 사내가 서 있었다.

“그래도 내 소중한 군사에게 손을 댄 건 과했지. 그렇지 않니?”

땅을 짚은 천면수사가 손을 움찔 떨었다.

패군 장일소의 한없이 가벼운 조소가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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