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20화
1720화. 네 목을 걸고 말이야. (5)
“끄…….”
천면수사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옆구리를 움켜쥐었다.
몸 전체를 지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일었다. 그러나 그를 진정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육신의 고통이 아닌, 마치 벌레를 보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장일소의 시선이었다.
“으……. 으으!”
천면수사의 잇새로 악에 받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장…일소……!”
“쯧쯧. 이래서야.”
장일소가 과장되게 고개를 젓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니? 사람의 가치는 땅에 처박혔을 때 나오는 법이란다.”
천면수사를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이 요사스럽게 빛났다.
“평소에는 잘난 척 으스대더니, 막상 구석에 몰리니 겁에 질린 개처럼 짖어 대고…….”
“련…….”
“꼴사납기도 해라.”
으드득.
천면수사가 부러트릴 듯 이를 갈아붙였다. 치미는 분노를 참느라 눈의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들었다. 하나 그럼에도 쉽사리 장일소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련주!”
대신 피 끓는 목소리로 장일소에게 쏘아붙였다.
“련주께서도 알고 계셨소이까?”
“흐음?”
“독심나찰 호가명이 나 천면수사를 사지에 몰아넣고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련주께서도 알고 계셨냐 묻는 것입니다!”
순간 호가명을 호위하듯 둘러싼 부관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는 무척 민감하고도 위험한 질문이다. 제아무리 사패련이 장일소의 손에 일통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하나, 결국 체제의 근본은 연합체다.
듣는 귀가 이토록 많은 곳에서 이 부분을 짚고 나오는 건, 천면수사 역시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장일소의 입장에서는 어떤 대답을 꺼내든, 반드시 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대답하십시오, 련주! 이 모든 게 련주의 지시입니까? 나를 포함해 저 절벽 위에 있던 하오문도들을, 사패련도들을 모조리 암석 더미에 파묻어 버리려 한 게 정말 련주의 지시냐 이 말입니다!”
천면수사에게는 책임이 없다. 그건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호가명에게도 책임이 없다면?
과연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련도들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장일소에게로 향한다. 물론 꼭 장일소가 대답을 해야 해서는 아니다. 그저 이 상황에 대한 말을 할 수 있는 게 장일소뿐이기 때문이다.
장일소는 주위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 역시 딱히 압박 따윈 느끼지 않는 기색이었다. 이윽고 그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련주께는 책임이 없습니다.”
“구, 군사!”
움찔한 부관들이 고개를 획 돌렸다. 상체를 일으킨 호가명이 무표정하게 천면수사와 장일소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번 일은…….”
완전히 몸을 일으킨 그가 장일소를 향해 더없이 정중한 예를 갖춰 고개 숙였다.
“모두가 제 불찰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감히 요설(饒舌) 가득한 입으로 성사를 호언장담하고도 그에 걸맞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
“군사로서 제가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부련주의 말씀이 옳습니다. 죄인이 련주께 죄를 청합니다. 제 목숨을 거둬 이곳에서 희생된 이들의 넋을 위로하십시오.”
여기까지 말한 호가명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목을 축 늘어뜨렸다. 그 목 위로 칼날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고요하다. 누군가가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릴 정도였다. 사위를 짓누르는 듯한 긴장감 속, 부관들은 손끝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들 역시 알고 있다.
성패를 떠나, 이번 계책에선 너무도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설사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해도 희생자의 수 때문에 질책이 나올 수밖에 없을 상황이다.
그런데 심지어 결과가 실패로 돌아갔으니, 누군가는 이 모든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천면수사가 으르렁대듯 장일소를 다그쳤다.
“련주! 죄인이 죄를 청하지 않습니까?”
정적만 가득하던 공간에 천면수사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울려 퍼졌다. 온기라고는 없이 삭막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때.
“하하…….”
천면수사 담여해는 살짝 넋을 놓고 말았다.
새하얀 손으로 입을 가린 장일소가 참기 어렵다는 듯 웃음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 하핫. 이거…….”
입을 틀어막고 있던 장일소가 천천히 손을 내리자, 한껏 비틀린 붉은 입술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무슨 말을 지껄여 대는 건지.”
천면수사의 동공이 눈에 띄게 떨렸다.
“련주?”
“죄라니,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거겠지? 응?”
붉은 입술 새로 새하얀 송곳니가 드러난다. 마치 지독하게 흉포한 짐승의 것 같았다.
“가명아, 가명아.”
장일소가 굳건히 무릎 꿇은 호가명을 보며 쿡쿡 웃었다.
“넌 연기에는 영 재능이 없구나. 그런 재미도 없는 짓거리는 그만두렴. 어울리지 않는단다.”
“련주님…….”
이번엔 호가명조차 놀란 얼굴로 장일소를 올려다보았다.
“련주님. 이번 일은…….”
“그래, 안다.”
장일소의 시선이 천천히 무당산 쪽으로 향했다. 검게 탄 무당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기묘한 뒤틀림이 스쳤다.
“창피를 당했지. 여지없이.”
“…….”
“고작 산이나 태우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면 말이다. 쯧쯧. 이래서야 낯이 팔려서 고개나 들겠니? 끄응.”
장일소가 과장되게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무대에 오른 배우 같은 몸짓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저 침묵만 지킬 수 없는 이도 있었다.
“고작……?”
“으음?”
“고작 그것입니까!”
천면수사 담여해의 노기가 끝내 고함으로 터져 나왔다. 그가 핏발 선 눈으로 장일소를 노려보며 외쳤다.
“저 작자의 개 같은 짓거리 때문에 대체 몇이나 죽어 나갔는지 알고 있습니까! 죽지 않아도 될 수백의 목숨이 의미도 없이 개죽음을 당했는데, 고작 한다는 평이 창피하단 말뿐이냔 말입니다!”
“…….”
“갈기갈기 찢어 죽여 생살을 씹어도 시원치 않을 죄를……!”
“죄?”
그 순간, 담담한 장일소의 목소리가 흥분한 목소리를 끊어 냈다.
“아까부터 영 모를 소리만 해 대는군. 이해를 못 하는 건가, 아니면 피가 몰려 머리가 제대로 돌지 않는 건가. 천하의 하오문주쯤 되는 이가 이리 어리석어서 쓰나.”
“련주!”
“말하지 않았니. 죄인 따위는 없다고.”
장일소가 천면수사를 향해 한 발짝 내디뎠다.
“실패하는 건 죄가 아니지.”
“…….”
“실수하는 것도 죄는 아니란다. 능력이 모자란 것도, 적에게 농락당하는 것도 죄는 아니지.”
장일소의 두 눈이 섬뜩한 빛을 뿜었다. 이에 압도당한 천면수사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었다.
“내게 있어 죄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란다. 그런 놈들은 숨 쉬는 공기조차 아깝지. 하지만…… 그보다 더 역겨운 게 뭔지 아니?”
장일소가 천천히 천면수사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리고 헐떡이는 그의 바로 앞에서 눈을 맞췄다.
깊디깊은 곳에서 무언가 서서히 일렁이는 듯한 섬찟한 눈빛에 천면수사가 저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다. 장일소가 물었다.
“정말 그리도 안타까울까? 저 위에서 죽어 간 이들의 목숨이?”
“……려, 련주.”
“정말 그렇게 가슴 아플까? 그들을 잃었다는 게?”
천면수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장일소의 눈빛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는 게 바로 살기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우웅.
손가락마다 자리하고 있던 반지들이 장일소의 손을 벗어나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치 어린애가 노는 것 같은 광경이지만, 사패련의 이름 아래에 있는 이들이라면 이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상황인지 모를 수 없었다.
“어디, 지껄여 보렴. 당위라는 말로 치장한 네 그 너절한 분노를 내가 얼마나 더 받아 주어야 하는지 말이다.”
“려, 련…….”
콰드드득!
허공으로 떠올랐던 반지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천면수사를 향해 내리꽂혔다.
“으, 으아아아아아악!”
제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천면수사가 잠시 후 제 좌수를 부여잡은 채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반지가 그의 손등을 단번에 꿰뚫고 땅에 박혀 있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천면수사 정도 되는 이가 단순히 손등이 꿰뚫렸단 이유만으로 이리 비명을 질러 댈 리는 없다. 이토록 그가 몸부림칠 만큼 고통을 주는 것은 손등에 난 외상이 아닌, 상처를 통해 육신으로 밀려들어 온 장일소의 짙은 사기(邪氣)였다.
뼛골 시리게 차가우면서도, 끝없이 거칠게 타오르는 듯했다.
천면수사는 그저 바닥을 기며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육신으로는 장일소의 기운을 감당할 수 없었다.
“알아 두렴.”
벌레처럼 꿈틀대는 천면수사를 보며 장일소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괴이할 정도로 그와 잘 어울리는, 한없이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희생 없이 얻어지는 건 없단다.”
“어……. 어으…….”
“배에 기름이 낀 돼지들은 제가 가진 걸 잃고 싶지 않아서 그 값어치를 끝도 없이 논하지. 재물의 값어치, 시간의 값어치, 그리고…….”
우드드득!
장일소의 발이 천면수사의 손을 사정없이 짓밟았다.
“제 하찮은 목숨의 값어치 같은 것을.”
“아아아아아악!”
“쉿, 쉿. 조용히 해야지. 목숨이 그토록 소중하다면서. 응?”
천면수사의 비명이 뚝 끊겼다. 고통에 겨운 와중에도 장일소의 말이 어떤 의미를 품고 있는지 알았으므로.
“후욱. 후욱……. 후욱.”
천면수사가 학질에라도 걸린 것처럼 숨을 몰아쉬고 경련하면서도 필사적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꿈틀대는 그 모습을 보며 장일소는 조금 만족스러운 듯 빙그레 웃었다.
“옳지. 이해한 것 같구나.”
“…….”
“우리가 가지려는 것에 비하면, 이미 가지고 있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게 재물이든, 무학이든, 명성이든, 심지어 목숨이든 마찬가지지.”
“…….”
“모조리 내놓을 각오가 없었다면 저 안온한 강남 땅에서 기름 낀 배나 긁으며 지냈어야지. 여기까지 와서 목숨을 논하고 우는소리라…….”
쿡쿡 웃은 장일소가 천면수사의 뒷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어린아이의 머리를 매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하지만 천면수사는 조금의 굴욕감도 느끼지 못했다. 굴욕도 살아 있는 이나 느낄 수 있다. 그가 지금 느끼는 건 머리에 닿은 장일소의 손이 금방이라도 제 머리를 꿰뚫어 버릴지 모른단 지독한 공포뿐이었다.
“기억하렴.”
장일소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는 가지기 위해 온 것이란다. 지키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
“쯧.”
가볍게 혀를 찬 장일소는 천면수사의 손을 밟고 있던 발을 떼었다. 그러더니 무당산을 향해 무심한 눈길을 던졌다.
정확히는 저 산에 남아 있을 이들을, 그리고 지금쯤 산꼭대기에 올랐을 이들을 향해.
“가명아.”
“예, 련주님.”
호가명이 격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패한 것이더냐?”
“…….”
“대답해 보렴.”
“속하의…… 무능 때문입니다.”
“네가 무능하여 벌어진 일이라면, 네게 기회를 준 나는 더 무능한 인간이겠지.”
“련주님…….”
“오랜만이구나.”
호가명이 고개를 들어 장일소를 응시했다. 그러다 이내 흠칫하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장일소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런…… 더러운 기분은 말이다.”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장일소의 눈은 더 이상 조소를 품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