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26화
1726화. 잃지 않을 수는 없어. (6)
말문이 절로 막히고 말았다.
‘허공진인…….’
그새 확연히 수척해진 허공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어려 있는 걸 본 순간, 백천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이런…….’
분명 소식을 들었다. 허공이 그를 살리기 위해 힘든 결정을 내렸다고.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에둘러 말해 주었겠지만, 백천쯤 되는 이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리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걸 알면서도 백천은 허공을 찾아가 감사를 표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닌 척했지만 결국은 제 상황에 매몰되어 기본적인 예의조차 잊은 것이다.
이를 깨닫는 순간 백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죄, 죄송…….”
아차 하는 마음에 황급히 움직이려던 백천이 순간 균형을 잃고 휘청했다. 그러자 허공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붙들어 주었다.
“조심하게.”
“아…….”
“자네가 이런 곳에서 추락사라도 한다면…… 같이 있던 내게 의심의 눈초리가 오지 않겠는가? 나는 화산의 분노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네.”
농이 섞인 부드러운 말투였다. 말속에 여유가 묻어났다. 백천의 눈에 어린 당황이 조금 더 짙어졌다.
“그렇지 않은가?”
허공이 웃으며 다시 묻고서야 겨우 진정한 백천이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조금 늦었지만 허공을 향해 정중히 고개 숙였다.
“목숨을 구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미욱하여 감사의 인사가 늦었습니다. 부디 너른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라…….”
허공은 나직이 되뇌더니 빙그레 웃었다.
“우리는 도인이 아닌가?”
“……예?”
“내 마음이 가는 대로 두었을 뿐이네. 애초에 감사를 받을 일이 아니란 말이지. 그런데 용서가 어찌 필요하겠는가?”
“…….”
“앉게. 오늘 특별히 내 명당을 자네에게 양보하지.”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곧이어 허공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가슴속에 죄책감을 품은 백천으로서는 무슨 말도 선뜻 꺼내기 어려웠다.
그렇게 한참 이어진 정적에, 어색함을 견디다 못한 백천이 무작정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허공이 말을 꺼낸 것이 더 빨랐다.
“꽤 괜찮은 풍경 아닌가?”
“예?”
백천이 떨떠름하게 새삼 앞을 다시 보았다.
……글쎄. 며칠 전이었다면 허공의 말에 공감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좀 기이한 표현이라 느껴졌다. 시커멓게 타 버린 산자락을 두고 괜찮은 풍경이라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허공이 재차 물어오자 백천의 입꼬리에 어색한 웃음이 걸렸다.
“그렇긴 합니다만…….”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군.”
백천이 결국 쓴웃음을 머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네. 서로 보는 눈이 다른 것뿐이니.”
“…….”
“물론 겉은 꽤 흉물스러워졌지만……. 글쎄. 저 타 버린 나무들과 풀이 이 산의 본질은 아니잖은가?”
백천의 눈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 그 표정을 본 허공이 짧게 미소 지었다.
“이 산의 나무들이 다른 나무로 바뀐다면, 더는 무당이 아닌가?”
“예?”
“혹은 어느 날 갑자기 이 산의 나무들이 모두 사라진다고 치세. 그럼 이 산은 더는 무당산이 아니게 되는 건가?”
“…….”
“그렇지는 않을 것일세.”
허공의 목소리는 그저 담담했다.
“결국 무당은 이 산세를 칭하는 것이니까. 그렇기에 세상 사람들은 봄과 여름이 다르고, 가을과 겨울이 또 다른 이 산을 두고 그저 무당이라 부르는 것 아니겠는가.”
백천은 그런 허공을 잠시 멍하니 응시했다.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가 기억하는 허공은 더 딱딱하고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남들이 쉬이 말을 붙일 수 있기는커녕, 밤에 잠을 잘 때도 검을 품고 잘 듯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가 알던 허공과는 너무도 다르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얼굴만 비슷한, 전혀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것만 같다.
“도장…….”
그 변화의 연유를 대강이나마 추측한 백천의 입에서 길고도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했던 말을 또 하게 하는군. 좋지 않은 버릇일세.”
“하나…….”
“나는 이곳을 좋아하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좋아했었지. 이곳에 오르면 가슴이 좀 뚫리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알 것 같았다. 그렇기에 백천도 반쯤 본능적으로 이곳까지 오른 게 아닌가.
허공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산과 들을 넘어, 저 높은 하늘로.
“한때는 말일세. 나는 내가 세상 가장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다고 믿었네.”
“…….”
“아니, 정확히는 올라야 한다고 여겼네. 그리고 내게는 그만한 재능이 충분하다 확신했지.”
백천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문께서도 항상 말씀하셨다네. 허공은 무당을 천하제일의 문파로 이끌어야 하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천하제일검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능히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말일세.”
소림의 혜연만큼은 아닐지라도, 허공 역시 무당의 모든 기대를 한 몸에 받던 기재였다. 천하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노리는 게 당연했을 사람이다.
“나 역시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어 왔네. 그래, 자네의 사질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일세.”
순간 백천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건…….”
“오해하지 말게. 원망하고자 함이 아닐세. 그저…… 깨닫게 된 것이었지. 나는 저곳에 오를 수 없음을.”
백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해하겠는가?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그저 저곳에 오르기 위해서 살아왔네. 내 삶의 가치는 그게 전부였지. 그런데…… 그날 불현듯 알게 된 걸세. 나는 천하제일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도장…….”
“그걸 깨닫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 목적을 잃은 내게 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하는.”
허공이 짧게 웃었다.
그러나 백천은 스친 것에 가까운 그 웃음 속에서 아릿한 고통을 엿보았다. 그 감정은 지금 백천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 절망과 닮아 있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는 아니지만 말일세.”
“……아니라고요? 그럼 이제는 연연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순간 백천의 안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감동이나 경탄(驚歎)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었다.
“정말이십니까?”
백천이 되물었다. 선선히 대답하려던 허공이 순간 멈칫하며 백천을 돌아보았다. 그의 목소리가 다소 기이한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무슨 뜻으로 묻는 건가?”
“그저 변명은 아닙니까?”
“장문대리.”
백천이 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이성은 알고 있다. 눈앞의 이 사람은 백천을 위해 무학마저 포기했다. 말 그대로 은인이다.
하물며 목숨을 빚진 것이니 그 은혜가 결코 가벼울 리 없다. 지금 백천의 언행은 도리에서 완전히 어긋나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도장의 깨달음을 폄훼하려는 건 아닙니다. 도장께서는 당연히 큰 깨달음을 얻으셨을 겁니다. 다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묻고 싶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잃지 않았어도 그리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허공은 조금 당혹한 듯 잠시간 말이 없었다.
백천은 애써 제 충동을 짓누르려는 듯 연신 입술을 깨물었지만, 한번 터져 버린 감정의 둑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통제를 벗어나 버린 감정들은 그가 손댈 수 없을 지경으로 넘쳐흘렀다.
“패하기 전에도 그리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까? 아직 희망이 있었다면 어땠겠습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 것 같으십니까? 그저 이미 잃었기에, 다시는 되찾을 수 없기에 탈속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자신을 스스로 속이고 있는 건 아닙니까?”
백천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화가 난 게 아니었다. 환멸이 나서였다. 은인을 향해 이따위 말을 내뱉고 있는 자신에 대한 경멸이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었다.
“가진 자는 황금을 우습게 보지 않습니다. 그 가치를 알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없는 이는 황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 쉽게 말하곤 하지요. 어차피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그 가치를 폄훼하는 게 마음 편하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도장께서는 정말로 아니라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백천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해졌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과 갈 곳 잃은 눈동자는 그가 지금 혼란의 한중간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도장께서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무학을 되찾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도 지금과 똑같이 말씀하시겠습니까? 정말 그러실 수 있습니까? 정말?”
“장문대리…….”
“도인이 대체 뭡니까!”
백천의 눈에 핏발이 섰다. 악에 받친 외침이 무당산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게 도인입니까? 달리다 넘어지면 애초에 나는 여기까지였다고 허허 웃어 버리는 게 도인입니까? 무엇이 어찌 되든 나는 도를 좇고 있다고 지껄이면 다 해결되는 게 도인입니까? 대체……!”
앙상한 백천의 손이 벌벌 떨렸다. 허공은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가쁜 듯 숨을 몰아쉬던 백천이 이내 눈을 감았다. 그의 속눈썹이 애처롭게 떨렸다.
“하늘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적 없습니다.”
“…….”
“그저…….”
백천의 고개가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저는 그저…….”
말끝도 타들어 가는 듯 스러졌다. 말없이 그를 지켜보던 허공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더니 저 먼 하늘에 시선을 둔 채 입을 뗐다.
“도인이 무엇이냐…….”
백천의 질문을 곱씹은 허공이 짧게 한숨을 흘렸다.
“그렇군. 생각해 보니 자네 말이 맞네. 내가 너무 잘난 듯이 굴었어. 서로 아픈 것이 다를진대.”
“…….”
“내가 무례했네. 용서하게나.”
이 말을 마지막으로 허공이 몸을 돌렸다.
백천은 움찔 고개를 들어 봉우리에서 내려가는 허공의 뒷모습을 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무슨 말이라도.
“도장…….”
사죄해야 한다. 조금 전 자신이 저지른 무례한 행동을. 이 머저리 같은 짓에 대해서.
그런데 그때, 허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천에 대한 실망이나 분노 따위는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네의 꿈은 무엇이었나?”
백천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허공의 등을 멍하니 보았다.
“화산을 천하제일문파로 만들고, 훌륭한 장문이 되고, 그리고 작은 명예도 손에 넣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얻은 것을 베푸는 삶이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생각지 못하는 어떤 가치를 추구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말일세.”
고개도 돌리지 않은 허공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백천의 귀에 파고들었다.
“그걸 다 이룬 뒤에는 무엇을 할 생각이었나?”
허공이 걸음을 멈추더니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백천은 깊은 호수처럼 잔잔한 그 눈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외면하고 만 것이다.
“어쩌면 지금 자네에게 필요한 건,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르겠군.”
허공이 다시 발을 옮겨 산에서 내려간다. 미세하게 절뚝이고 있었다. 부상의 잔재가 아직 가시지 않아서다. 그 몸을 이끌고 이곳까지 왔다. 이곳에 백천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백천은 어쩐지 망연하고 아뜩한 느낌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만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가 쉬어 버린 목소리로 조소했다.
‘최악의 인간이다.’
고개를 숙이니 눈꼬리에 탁한 눈물방울이 서글프게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