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27화
1727화. 잃지 않을 수는 없어. (7)
무당의 접객청.
중앙의 태상노군상이 굽어보는 너른 객청 한중간에, 평소에는 없던 너른 원탁이 놓여 있었다.
평소 위계를 중시하는 무당에서 원탁이란 보기 드문 물건이었으나, 누가 보더라도 그 원탁에 신기함을 느낄 틈 따윈 없을 것이다.
그 주위로 둘러앉은 이들의 면면에 눈을 빼앗길 테니까 말이다.
하나같이 무시할 수 없는 이들이다.
구파일방이 유명무실해진 지금, 명실상부 천하의 정파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문파의 수장들이 무당 접객청의 원탁에 둘러앉아 있었다.
맹주 현종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관계로, 현재 천우맹의 지휘권을 지닌 건 냉정히 말해 총사인 청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의외로 이 회의를 주관하는 이는 부맹주의 자리를 내려놓고 일개 조장의 자리를 맡은 독왕 당군악이었다.
“다들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군악이 우선 의례적인 인사로 말문을 열었다.
일차적으로 상황을 수습한 후이니만큼, 본디 승전을 축하하고 공을 세운 이들을 치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 터.
그러나 회의를 주관하는 당군악의 목소리는 밝지 않았다.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선 자리를 내어주신 무당에 감사를 먼저 전해야 하겠습니다만…….”
당군악의 시선이 맞은편으로 향했다.
지금 그의 자리를 가장 상석으로 본다면, 맞은편은 응당 이 문파의 주인에게 주어진 자리이다. 그런데 지금 그곳에 앉은 건 다른 이였다.
“전대 장문인과 현 장문인께서 부상이 깊어 이 자리에 함께하시지 못함을 사죄드리라 하셨습니다.”
“……으음.”
당군악은 맞은편에 앉은 허공을 보다 길게 탄식했다.
“무어라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네.”
“괘념치 마십시오.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리 말하는 허공조차 무학을 잃었다.
이번 전투로 무당이 입은 피해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예전의 세를 회복하기가 과연 가능할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물론 화산의 경우를 생각하면 마냥 불가능하다 할 수도 없겠지만…….
‘화산 같은 문파가 세상에 다시 있을는지는…….’
무당도 이를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허공은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이 단정하고 꼿꼿했다. 이는 당군악에게 꽤 인상 깊게 느껴졌다.
무학을 잃지 않았다면 천하를 다툴 인재가 되었을 텐데…….
“태상장문……. 아니, 전대 장문인의 환후는 좀 어떠신지……?”
“족히 몇 달은 요양하셔야 할 것입니다.”
당군악의 얼굴에 겸연쩍은 기색이 스쳤다.
그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한 이가 있다면 당연히 그가 나서서 손을 써야 했을진대, 백천의 부상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허도진인의 상태까지 살필 정신이 없었다.
“으음. 제가 조금…….”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익히 짐작한 허공이 고개를 내저었다.
“전대 장문인께서 크게 다친 곳은 육신이 아니니 그리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분한 그 말은, 짧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당군악도 더는 물어 살필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알고 있다.
허도진인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장일소를 암살하겠다고 나섰던 무당 장로들의 대다수가 살아 돌아오지 못했음을. 물론 수 없는 사패련의 정예들을 쓰러뜨렸으니 가치 없는 죽음이라 할 순 없겠으나…….
“감히 맹주님을 대신해 약조 드립니다. 천우맹은 무당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허공을 보며 당군악이 몰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자리가 아니었거늘…….’
분명 승전했다. 저 사패련의 의도를 완벽히 꺾었으니, 승전이 아닌 다른 말을 갖다 붙이는 건 만부당하다.
지금껏 천우맹과 구파가 저 사패련에 연전연패해 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무당산에서의 승전은 기념비적인 일에 가깝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누구도 그 대단한 전공에 기뻐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 그건 무당이 입은 피해가 크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선을 돌린 당군악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윤종.
그가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는 그리 어색하지 않다. 이전에도 화산오검은 종종 암묵적 동의하에 지위와 배분을 넘어 중진들의 회의에 참여해 왔다.
그러나 오로지 윤종만 이곳에 자리한 것은 오랜 세월 함께한 당군악에게도 익숙지 않은 광경이었다. 본디 저 자리를 채워야 했을 사람 대신 윤종이 와 있는 것이니.
“장문대리. 화산의 장문대리께서는…….”
자신의 말투나 시선이 살짝 어색했으리란 걸 깨달은 당군악이 눈을 피했다. 그때 윤종이 말했다.
“몸이 좋지 않은 관계로, 제가 대신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미욱하겠지만…… 모쪼록 선배님들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누구도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떤 말도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서였다.
쉬쉬하며 속닥속닥 전해진 이야기로, 때로는 공식적인 인정으로 백천의 상황에 대해 전해 들은 이들은 더없이 안타까워하면서도 쉬이 위로를 전할 엄두를 못 내었다.
그 위로마저도 화산이란 이름을 쓰는 이들에게 얼마나 큰 슬픔이 될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침묵에 눌린 남궁도위가 입을 벙긋거리며 주저하다 마침내 입을 뗐다.
“그, 백천 도장께서는…….”
“사사로운 안부나 묻자고 모인 자리는 아니잖아요.”
하지만 불쑥 끼어든 누군가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은 청명이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모두를 응시하고 있었다.
“바쁜 분들 모아 놓고 이렇게 시간 끄는 것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네요.”
“으음.”
당군악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여유가 넘치는 상황은 아니니 이렇게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될 것이다.
“먼저…… 군사.”
“예.”
“사패련의 현재 위치는 확인되었는가?”
“말씀드렸다시피, 현재 무한 남부에 진을 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천우맹의 군사인 임소병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한…….”
당군악이 앓듯이 읊조렸다.
본디 호북성 무한은 천하를 통틀어 가장 정파의 세가 강한 지역 중 하나로, 사파 따위는 감히 발을 들일 엄두도 내지 못할 곳이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무한이야말로 호북 최대의 도시이자, 호북에서 가장 강대한 두 문파의 영향력이 동시에 미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합비(合肥)의 남궁과 양양(襄阳)의 무당이 모두 세가 꺾여 버린 지금, 무한은 말 그대로 무주공산이나 다름없게 되어 버렸다.
“놈들은 어째서 무한을 점거하지 않는 것입니까? 무한에 그들을 막을 만한 이들이 없다는 사실을 뻔히 알 텐데?”
모용위경의 물음에 임소병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그건 옆에 계신 분을 보면 대답이 나올 테지요. 굳이 제게 묻지 않아도.”
모용위경이 의아한 얼굴로 옆을 보았다. 풍영신개가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그렇군.”
뒤늦게 모용위경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확실히 그랬다. 사패련이 무한을 점거하기야 어렵지 않겠지만, 무한이라는 대도시를 완전히 장악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전각도 사람도 가득한 무한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개방의 눈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임소병은 그 점을 꼬집은 것이다.
“장일소는 상대를 속이기를 즐기는 이입니다. 그런 자가 제 일거수일투족을 노출 시킬 위험이 큰 무한으로 굳이 들어오려 하지는 않겠지요.”
곳곳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천우맹과 무당이 입은 피해의 규모는 작지 않다. 그러나 사패련이 입은 피해는 더욱 극심했다.
그런 와중에도 장일소는 여전히 모든 것을 하나하나 헤아리며 움직이고 있다. 마치 이번 전투에서의 패배가 딱히 대단치도 않다는 듯이.
“빌어먹을 놈…….”
분노가 치밀고, 또 한편으로는 지긋지긋했다. 그리고 내심…… 미세한 경외까지 섞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흘리는 억눌린 탄식이 모두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 순간, 모용위경이 입을 뗐다.
“그리 침울해할 일은 아니잖습니까?”
“음?”
“어쨌거나 우린 승리했습니다.”
“…….”
“물론 압니다. 여러 요인, 그리고 요행이 있었겠지요. 우리가 입은 피해도 적다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걸로 확실해졌습니다. 놈들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모용위경의 목소리가 살짝 들떴다.
그로서는 흥분할 수밖에 없다. 소림과 팽가, 그리고 공동이 겪은 지독한 참패를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이니까.
사패련에게 느낀 두려움이 컸던 만큼, 그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흥분도 큰 것이다.
“그리고 놈들이 입은 피해도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확실히 유리할…….”
“글쎄요. 그럴까요?”
툭 날아든 물음에, 모용위경이 떨떠름하게 시선을 돌렸다.
화산검협 청명이었다.
솔직히 모용위경은 이 청년이 불편했다. 평소라면 상대도 하지 않을 배분의 어린 청년이지만, 이곳에서 그가 가지는 입지는 감히 모용위경이 넘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엔 모용위경도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내 말이 틀렸습니까?”
적어도 이번 전투에선 그나 청명이나 관여한 바가 크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이번 전투에 한해서는 청명이 모용위경보다 알고 있는 게 더 적을지도 모른다.
“‘틀렸다’라…….”
늘어져 있던 청명이 미세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순간 접객청 내의 공기가 다소 팽팽해졌다.
“확실히 놈들은 큰 피해를 입었죠.”
“…….”
“절벽 위의 하오문은 거의 반수가 날아갔고, 새로 영입한 태양궁주도 심각한 부상을 당했어요. 모르긴 몰라도 태양궁도들의 피해 역시 적은 편은 아닐 거예요.”
자리에 앉은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놈들이 무당을 도모하기 위해 준비했던 태양궁의 폭약도 거의 소모했을 거고요. 그것만으로도 무당이 세운 공은 어마어마하다 할 수 있죠. 여기까지만 보면 무당의 큰 희생을 바탕으로 완전한 승전을 거두었다는 게 맞는 말이에요.”
“내 말이 그 말이 아닌가?”
“네. 놈들이 전력을 다했다면요.”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모용위경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이자의 말투는 늘 묘하게 사람의 신경을 긁는다. 모용위경이 날카롭게 물었다.
“패군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걸 논함인가?”
“…….”
“아니면, 뒤늦게 온 그…… 혈궁? 그래. 혈궁의 병력이 전장에 합세하지 않았던 걸 말하는 건가?”
“…….”
“답답해 죽겠군! 이보게, 말을 좀……!”
“누가 없었는지는 모용 가주님이 가장 잘 아시지 않나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일그러져 있던 모용위경의 얼굴이 돌연 창백해졌다.
“아…….”
흔들리는 그의 두 눈이 확인이라도 구하는 듯 청명을 보았다. 청명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런……. 그들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모용 가주님?”
종리곡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모용위경이 굳은 얼굴로 답했다.
“이번 전장에선 검을 쓰는 이들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있어 봐야 조악한 수준에 불과했지요.”
“그게 뭐 어쨌다는 것입니까?”
당연한 일 아닌가?
애초에 사파의 무인들은 검을 거의 쓰지 않는다. 병기를 정비하는 게 일상이 아닌 그들은 두께가 얇아 상하기 쉬운 검보다는 두껍고 정비가 간편한 도를 선호하므로.
그러나 모용위경의 표정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호북에서…… 우리 앞을 막아선, 정체 모를 검수들이 있었다고.”
종리곡의 얼굴이 마찬가지로 굳어졌다.
“그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만한 자들이 이 무당산에 투입되었다면…….”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승전이라는 허울에 미약하게나마 들떴던 이들도,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리던 이들도 이제야 겨우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우리가 승리했는가, 그런 건 딱히 중요치 않습니다.”
임소병의 차가운 목소리가 찬물처럼 모두를 일깨웠다.
“중요한 건 저놈들이……. 아니, 그놈이 대체 뭘 노리고 있는가죠.”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왜 그들을 이번 전투에는 투입하지 않았을까?”
임소병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의문은 한두 개가 아닙니다. 확실한 건 하나뿐입니다. 이미 숱한 경험을 통해 증명된 일이지요.”
“…….”
“객관적으로 우리의 전력이 저들을 상회하든 아니든, 두말없이 물러난 패군 장일소가 지금 대체 무엇을 노리는가를 파헤치지 못한다면…… 우린 아마 끔찍한 지옥을 목도하게 될 겁니다.”
차가운 공기가 모두를 훑고 지나간다.
‘패군.’
이 전투에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득한 존재감만큼은 이곳에 있는 이들을 옭아맨 채로 잠시도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 * *
그날 밤.
탁.
다탁 위로 반쯤 식은 찻잔이 놓였다.
“해서…….”
종리곡이 앞에 앉은 진금룡을 무거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백천……. 아니, 네 동생에게 말을 전했다고.”
“그렇습니다.”
진금룡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상의드리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말해 버린 점은…….”
“괜찮다.”
종리곡이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때로는 절차보다 그때의 상황이 중요하기도 하다. 그래서 녀석은 뭐라 하더냐?”
“……당장은…….”
진금룡이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지그시 입을 다물었다. 종리곡이 빙그레 웃었다.
“애썼구나. 수고했다.”
“장문인.”
“그저 두고 보면 된다.”
자리에서 일어난 종리곡이 창가로 향했다. 열린 창문을 통해 하늘 높은 곳에 자리한 달이 커다랗게 보였다.
“상심(傷心)이란 쓰라림과도 같지.”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괜찮다고 할수록 쓰라림은 심해진다. 어느 순간 그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어질 정도로. 결국은 묵묵히 버텨 내지 못하게 될 것이란다.”
“……하지만 녀석은 진동룡, 아니. 백천입니다.”
종리곡이 흘끗 시선을 돌려 진금룡을 보았다.
“놈은…… 녀석은 그 쓰라림을 버티고 말 사람입니다.”
진금룡의 눈에는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동생에 대한 커다란 안타까움, 동시에 확고한 믿음. 종리곡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확실히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 녀석은 대단한 남자다.”
“……예.”
“하지만 너 역시 내 말을 오해했구나.”
“예?”
진금룡의 눈에 의문이 차올랐다. 종리곡이 한숨처럼 말했다.
“그 쓰라림을 버티지 못할 이는 네 동생이 아니다.”
가만히 눈을 감으니 속눈썹이 떨렸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라도 그랬을 테니. 지금 네가 그런 것처럼.”
깊은 밤.
적막에 휩싸인 방 안에서, 너른 마당 위에서, 또는 지붕 위에서 여러 쌍의 눈동자가 밤하늘에 뜬 달을 바라본다. 저마다의 서글픔을 담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