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화산귀환-1729화


1729화. 잃지 않을 수는 없어. (9)

침묵 속, 현종이 말없이 앞에 앉은 이를 응시했다.

소매가 상처는 가려 줄 수 있을지언정, 팔의 앙상함까지 숨겨 줄 순 없었다. 얼굴은 핏기없이 퍼석하고, 입술은 바짝 말라붙었으며 두 눈 아래가 검게 퀭했다.

익숙한 이의 낯선 모습은 가슴을 칼로 저미는 듯 아프게만 다가왔다. 현종을 더욱 서글프게 만드는 건, 마주 앉은 백천의 표정이 아무 일도 없는 듯 평온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속내는 안 그럴지 모르지만……. 아니, 분명 그렇지 않겠지만 어쨌든 지금 마주 앉은 백천은 필사적으로 담담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응당 무너지고 흐트러질 만한데도 말이다.

그 성숙하고 훌륭한 모습이 아팠다. 늘 제자들이 더없이 훌륭히 성장하기를 바랐던 현종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르고야 완성되는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차가 식습니다, 태상장문인.”

백천이 조용히 말했다. 현종이 슬쩍 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따르지도 않아 비어 있었다.

평소라면 앉자마자 찻잔부터 채웠겠으나, 지금은 차마 그럴 수 없어서였다.

현종이 잠시 망설이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몸은…… 좀 어떻더냐?”

“좋습니다.”

백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했다.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렇구나.”

현종은 이렇다 할 대답을 찾지 못하고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마중을 나갔어야 할 일인데.”

“그런 말 하지 말거라.”

결국 참지 못하고 현종은 깊게 탄식했다. 급한 마음에 대책도 없이 이 방에 들어와 버린 자신을 속으로 책망했다.

어떤 말이 위로가 될까. 어떤 말이어야 희망을 줄 수 있을까.

그 답을 도저히 알 수 없다.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이해’라는 말로 적당히 면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듯했다.

현종이 어렵사리 다시 입을 뗐다.

“백천아…….”

“잠시.”

백천이 돌연 현종의 말허리를 끊었다.

무례한 행동이나, 이는 사실 현종을 위한 배려일지 모른다. 적어도 현종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위로의 말을 짜내는 걸 막아 주었으니까.

“먼저 태상장문인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백천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침상으로 걸어가 덮여 있던 하얀 천을 어렵사리 잡아 걷었다.

그 얇은 천을 쥐고 걷는 간단한 일조차 지금의 그에겐 몇 번의 시도 끝에야 겨우겨우 해낼 수 있는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현종의 눈에, 순간 천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물건이 턱 걸렸다.

“이젠 그만 이것을 태상장문인께 돌려드리려 합니다.”

현종은 망연하여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천 아래 놓인 건 자하신검이었다. 과거 현종이 백천에게 장문대리위(位)를 내리며 하사했던 화산의 신물.

이를 현종에게 돌려준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백천아.”

“태상장문인, 저는…….”

잠시 머뭇거린 것도 잠시, 백천은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담담히 말을 이었다.

“제 부족함을 절감하여, 태상장문인께서 임명해 주신 화산의 장문대리 자리에서 물러나려 합니다.”

“…….”

“또한 저는 화산의 대제자 자리 역시 내려놓으려 합니다. 감히 태상장문인께서 하사한 자리에서 물러나려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변명하자면, 지금 화산에는 장문대리가 필요하지 않을 듯합니다. 만일 굳이 그 자리에 또 다른 이를 앉히셔야 한다면…….”

“백천아.”

현종이 백천의 말을 끊었다.

오래도록 침묵이 흘렀다. 깊은 눈으로 지그시 백천을 응시하던 현종이 자하신검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의미더냐. 저것은 내가 너에게…….”

“태상장문인.”

백천이 겸연쩍게 미소를 지었다.

“많이 생각해 보고 내린 결정입니다. 지금은 이리하는 게 순리인 것 같습니다.”

“순리?”

순간적으로 현종의 두 눈에 노화가 치밀었다.

“지금 순리라고 했느냐?”

“…….”

“무엇이 순리더냐? 그래! 장문대리 자리를 내려놓음은 그럴 수 있다 치자! 그 자리야 어차피 임시직이나 마찬가지니! 한데 대제자 자리를……! 장문제자 자리를 내려놓겠다는 말은 무슨 가당찮은 소리냐!”

현종은 백천이 흘리듯 꺼낸 그 말을 놓치지 않았다.

“장문제자가 어떤 의미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더냐? 그게 진정 너의 진심이냐는 말이다!”

“……태상장문인.”

“장문제자는 다음 대 장문인이 될 이를 일컬음이다! 그런데 네가 지금 화산의 장문인이 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냐?”

현종의 목소리가 드물도록 점점 격해졌다. 과연 그가 제자를 상대로 이만한 노기를 내비친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였다.

“안다! 무학을 쓸 수 없게 되었지. 그 팔로는 검을 휘두를 수도, 제자를 가르칠 수도 없을 것이다!”

“…….”

“하지만 그게 뭐 그리 문제냐! 화산의 장문 자리가 무학 성취의 정도로만 정해지는 거였다면 감히 나 따위가 화산의 장문이 될 수 있었겠느냐? 무학은 장문인에게 있어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음이다! 이를 너도 잘 알지 않더냐?”

백천은 아무 말 없이 현종을 마주 보았다. 그 흔들림 없는 시선에는…… 짙은 씁쓸함이 어려 있었다.

“예. 작은 부분입니다, 태상장문인.”

“그를 알면서 어찌……!”

“하지만 동시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지요.”

현종이 저도 모르게 입 안 살을 살짝 깨물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화산의 장문인이 되려 한다 해도 화산의 누구 하나 반대하지 않겠지요.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우려 할 것입니다.”

“그래, 잘 아는구나!”

“하지만 그게 정녕 화산과 그들을 위한 일이겠습니까?”

현종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차마 곧장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장문인은 당연히 도움을 받아야 하는 위치입니다. 사람은 홀로 완전할 수 없고, 장문 자리에 오른 이 역시 마찬가지니까요. 하지만 태상장문인…….”

백천이 작게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도움을 받는 것과, 짐이 되는 건 아예 다릅니다.”

“백천아!”

“지금의 제 몸은 평범한 이만 못합니다. 병자로서 평생을 살아야 할 제게는 화산에서 그저 살아가는 일조차 쉽진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백천의 시선이 문득 창밖으로 향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창을 쭉 열어 두었음에도, 며칠 동안 누구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배려에 고마웠다. 그러나 동시에 그 배려 덕분에 자신의 처지를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만일 저 녀석들이…… 팔 병신이 화산의 장문 자리에 앉는 꼴은 절대 못 본다고 화를 낼 놈들이었다면, 그랬다면 저도 악착같이 장문인이 되려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백천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느리지만 단호했다.

“저놈들은 저리도 바보 같지 않습니까.”

현종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화산에는 제가 아니어도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니, 저보다 훨씬 훌륭한 장문인이 될 만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굳이…….”

그 순간 현종이 참지 못하고 고성을 내질렀다.

“하면 너는 어쩔 셈이냐? 장문인 자리도 포기하고, 대제자 자리도 내려놓고, 하물며 장문대리조차 아니라 한다면, 너는 무엇이 되려 함이더냐?”

“태상장문인.”

백천이 빙긋 웃었다.

“그렇다 한들 저는 화산의 제자입니다. 그걸로 족하지 않겠습니까?”

현종이 입술을 짓깨물었다. 백천이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다시 현종을 또렷하게 보았다.

“무학을 못 쓴다 해도, 제가 화산에서 할 일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애초에 제가 화산에서 받은 것이 무학뿐만은 아니잖습니까?”

이쯤 대화하고 나니 현종도 절절히 알 수밖에 없었다. 백천이 그저 단순한 절망감과 치기로 꺼낸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작은 방 안에서 백천의 고민이 얼마나 깊었을지, 현종은 차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평온한 표정 속에 얼마나 깊은 고뇌가 숨겨져 있겠는가.

그럼에도 현종은 백천이 고통 속에서 내린 이 결론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듣지 않은 걸로 하겠다.”

“…….”

“누가 뭐라고 해도 화산의 다음 장문인은 너다. 설령 네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고 해도, 내가 그리 만들 것이다.”

“태상장문인.”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난 현종이 몸을 돌리려다 멈칫하더니,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화산의 일개 제자로 만족할 수 있다 했더냐?”

“…….”

“그렇다면 네 검은 어째서 저리도 깨끗한 것이냐.”

백천이 움찔하며 시선을 돌렸다. 등 뒤의 벽에, 그의 낡은 매화검이 기대어 있었다.

화산의 신물인 자하신검이 아니다. 쭉 고난을 함께해 온, 백천의 검. 옆에 놓인 때 묻은 집기들과는 달리 먼지 한 톨 없이 깨끗이 정비되어 있었다.

백천과 현종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포기하지 말라느니, 다 잘될 거라느니 듣기 좋은 소리는 하지 않겠다.”

“…….”

“방법은 내가 찾을 것이다.”

현종이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태상장문인.”

등 뒤에서 백천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현종이 멈칫했다. 그러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내게 있어 너는 그 이상 훌륭할 수 없는 제자였다. 네가 화산에 와 준 게, 내 힘겨운 삶을 가엾게 여겨 선대들께서 보내 준 선물이라 여겼을 정도란다. 그리고 그 마음은…… 청명이가 화산에 오고도 바뀌지 않았다.”

“…….”

“내가 너를 그토록 아꼈던 건, 당시 힘겨웠던 화산에서 오직 너만이 그 모든 걸 극복해 낼 수 있다고 믿는 이였기 때문이다.”

백천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 일은 조금 더 마음이 정리된 후에 다시 논하자꾸나.”

말을 마친 현종이 방을 빠져나갔다.

닫힌 문을 물끄러미 보던 백천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정확히는 벽에 기대선 매화검을.

이제 더는 휘두를 일이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한사코 정성 들여 닦았다. 백천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잃지 않을 수는 없어.’

무언가는 잃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가 잃을 게 적어도 화산은 아니다. 손끝으로 느껴질 만큼 또렷한 따뜻함을 그는 저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아마도 다들 모르겠지. 때로는 그 온기가 더없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을.

* * *

저벅. 저벅.

현종이 거칠게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만 같았다.

‘멍청하기 짝이 없구나!’

대체 무슨 생각으로 백천을 만났단 말인가. 무슨 말을 해 주려 다짜고짜 얼굴을 들이밀었단 말인가.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이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양팔을 잃은 와중에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는 백천을 보니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

차라리 원망이라도 했다면, 통곡하며 구르기라도 했다면, 그랬다면 지금처럼 숨이 막히도록 갑갑하진 않았을 것이다.

길을 잃은 것처럼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했다.

모든 걸 잃은 제자에게 대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목숨이라도 내어 주어 백천을 고칠 수 있다면 웃고 또 웃으며 기꺼이 그리할 것을!

치미는 슬픔을 어찌하지 못하고 현종이 제 얼굴을 감싸 쥔 그때였다.

“오랜만에 다시 뵙습니다.”

어느새 나타난 한 사람이 앞에 서 있었다.

종리곡이었다.

포권 하며 깊이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서 이젠 현종에 대한 확고한 존중이 느껴졌다.

현종이 작게 헛기침하여 신색을 정비했다.

“예, 장문인. 오랜만에 뵙습니다.”

현종 역시 예를 다해 포권 했다. 종리곡이 고개를 들더니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맹주님. 먼 길 오느라 피곤하실 분께 예가 아닌 것은 알지만, 혹여 제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조심스러운 데다 극진한 예가 실린 말이었다. 평소의 현종이라면 어떠한 상황이라도 이런 말을 거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손톱만 한 마음의 여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제가 경황이 없는지라, 추후 다시…….”

“백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

“화산 장문대리라고 일컬어야 좋을는지요.”

순간 현종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종리곡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맹주님.”

종리곡이 깊게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이제 와 맹주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기 무척 죄스럽지만…….”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백천이에 관한 이야기라니, 그게 무엇입니까?”

현종의 재촉에 종리곡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평소보다 조심하던 참이었다. 두 문파가 날을 세우던 과거였다면 모를까, 지금의 화산은 종남에게 있어 은인 된 문파이므로.

종리곡이 현종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 말씀하시니 저도 차라리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

“만약 우리 종남에 화산의 장문대리를 치료할 방법이 있다면…….”

현종이 두 눈을 부릅뜬다.

“태상장문인께서는 백천을 종남으로 보낼 수 있으시겠습니까?”

소매 속으로 현종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경악으로 흔들리는 그의 두 눈이 흡사 커다란 태풍을 만난 조각배처럼 위태로웠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