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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730화


1730화. 잃지 않을 수는 없어. (10)

쪼르륵.

빈 찻잔에 차가 가득 차올랐다.

현종은 채워진 잔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찻물을 내려다보는 마음이 평소와 사뭇 달랐다.

“드시지요.”

잠시 침묵하던 현종이 건너편의 종리곡에게 찻잔을 정중히 내밀었다. 종리곡이 예를 다해 찻잔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태상장문인.”

그러나 그 역시 잔을 앞에 가만히 내려놓았을 뿐, 입에 가져다 대지 않았다. 모락모락 피어오른 김이 입을 꾹 다문 두 사람 사이에 부질없이 피어났다.

현종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먼저, 무례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씀이 정녕 사실인지…….”

“무례랄 것 없습니다, 태상장문인.”

종리곡이 고개를 내저었다.

“엄중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민감한 사안이지요. 당연히 확인해야 할 일입니다.”

“하면…….”

종리곡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능합니다.”

“…….”

“‘완벽하게’라는 말은 감히 할 수 없겠으나…… 그 아이가 다시 검을 잡고, 제 길을 걷는 게 가능하게끔은 만들어 줄 수 있을 겁니다. 칠 할 정도의 가능성으로.”

“칠 할…….”

현종의 눈두덩이가 희미하게 떨렸다. 저 정도면 가능성이 작지 않다.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당가주께서도 가능성이 없다 하셨거늘…….”

종리곡의 입가에 쓴웃음이 드리웠다.

“태상장문인께서는 장차 강호가 어찌 되리라 보십니까?”

“예?”

이 상황에 꺼내기엔 뜬금없는 이야기다.

혹시 이 급박한 시기에 제자 하나를 붙들고 신음하는 자신을 탓함인가. 아니면 정말로 정세를 논하고자 함인가.

현종이 속뜻을 가늠해 보는 그때, 종리곡이 또다시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저는 언제고 강호가 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무학은 진보는커녕 외려 퇴보했습니다. 그건 태상장문인께서도 아시잖습니까?”

현종의 눈이 슬그머니 가늘어졌다. 종리곡이 이런 말을 꺼낸 이유를 파악하기 어려워서였다.

“이미 각 문의 무고에는 선조들이 통달했던 무서가 쌓여 있거늘, 당금의 제자들은 선조의 발자취를 좇는 것조차 버거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누차 이어진다면 결국 무학은 세상에서 도태되겠지요.”

“장문인, 그게…….”

갑갑함을 견디다 못한 현종이 끼어들려는데, 종리곡이 말을 이었다.

“의술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음을 말씀드리고자 함입니다. 세상의 숱한 이들이 의술에 대해 논하지만, 여전히 과거의 화타나 편작의 경지를 되밟지 못하고 있지요. 결국엔 중원의 의술 역시 언제고 도태되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대체되고 말 것입니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한 법이지요.”

현종은 그제야 종리곡이 하려던 말을 이해했다.

“과거의 의술이 현재보다 훨씬 뛰어났단 말씀이시군요.”

“그러합니다.”

종리곡의 말이 옳은가 여부는 현종에게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저 말을 꺼낸 건, 지금 종리곡에게 백천을 고칠 만한 수단이 있다는 의미이니까. 지금보다 훨씬 과거에 만들어진.

“종남에서도 귀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다만 오히려 그렇기에 잘 사용될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겠군요…….”

그만한 귀보라면 평범한 제자들에게 쓰기는 어려웠을 터. 적어도 장문인이나 그에 준하는 이가 부상 입어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한 위치에 있는 이들이 죽지 않고 몸만 완전히 상해 버리는 상황이 어디 흔할까.

“그 귀물을 백천이에게 내어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러합니다.”

현종은 말없이 입 안 살을 지그시 물었다. 그런 그를 빤히 살피던 종리곡이 짧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백천, 그러니까 진동룡은 종남의 중추나 다름없는 진가 태생이자, 언제고 종남의 장문인이 될 진금룡의 동생입니다. 또한 개인으로는 천하에 이름 높은 화산의 장문대리이자, 그 유명한 화산오검의 수좌이지요.”

“…….”

“그뿐이겠습니까. 후대의 천하제일인이 될 게 확실한 화산검협의 둘도 없는 친우이자, 강호의 중추가 될 각 문의 후계자들과도 막역한 관계입니다. 허울 좋은 직위를 걷어 내고 보자면, 진동룡의 영향력은 종남의 장문인인 저조차 뛰어넘을 것입니다.”

종리곡의 목소리는 지극히 담담했다. 지금 그가 내리는 평가에 어떠한 사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그러니…… 그만한 이에게 귀물을 내어주는 건 종남의 선조들 역시 크게 탓하실 일이 아니겠지요. 다만.”

종리곡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종남의 귀물인 만큼, 오직 종남의 제자에게만 그 사용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현종이 눈을 감아 버렸다. 종리곡도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과거였다면 꽤 즐거운 마음으로 이 말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적어도 이젠 현종과 화산을 위하는 그의 마음이 거짓이 아니므로.

하지만 안타깝게도 종남의 장문인으로서의 입장과 종리곡 개인의 입장이 꼭 같을 순 없다. 그러니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그래서 대신 숨김없이 모든 걸 풀어놓기로 했다.

“귀물의 본래 이름은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종남 내부에서는 그저 상천약수(上天藥水)라 일컫습니다.”

“상천약수…….”

광오하기까지 한 이름이었다.

“이 약액은 제가 알기로는 적어도 약선 이전에 종남에 전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과거 강호에 크게 명성을 떨쳤던 성수의가(聖手醫家)의 대라성수(大羅聖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성수장의 대라성수라면……!”

현종이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그 역시 들어 본 바 있다.

성수장, 혹은 성수의가.

몇백 년 전 강호에 크게 이름을 떨쳤던 의가다. 그 의술은 잘린 팔다리도 멀쩡히 다시 이어 붙이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려내는 경지에 올랐다고 했다.

그런 성수장에서도 신줏단지처럼 모셨다는 비약이 바로 대라성수다. 성수장이 멸문하면서 함께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확실합니까?”

“모르겠습니다.”

종리곡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와 대라성수의 진품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을 리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겠군요.”

“하지만 이 비약의 약효가 전설상의 대라성수와 그리 다르지 않음은 이미 종남에서 확인했습니다. 이제껏 두 번 사용되었고, 그때마다 곧 죽을 이를 살려내었다 들었습니다.”

현종이 무겁게 탄식했다.

‘대라성수라…….’

만일 종리곡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정말 백천의 몸을 고칠 수 있을지 모른다.

성수장의 대라성수는 내공의 증진을 목표로 하는 영단과 다르다. 말 그대로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 부상을 치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활액(活液)이다.

어쩌면 산산이 부서지고 금이 간 백천의 육체조차 다시 이어 붙일 수 있을지 모른다. 모두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헌앙한 젊은 검수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될 수도 있다.

지금처럼 필사적으로 병마와 싸우며 너덜너덜해진 모습이 아니라. 하지만…….

현종의 입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희망과 절망이 뒤죽박죽 섞이며 현종의 목을 긁었다.

“종남의…… 제자가, 된다면 말입니까.”

종리곡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니까.

“어찌…….”

현종의 얼굴에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알고 있다.

종남의 제자가 되는 조건이 붙었다고 하지만, 백천에게 그 귀한 귀물을 내주는 건 종리곡이 베풀 수 있는 최선의 호의일 것이다. 같은 장문의 입장이었던 현종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호의가 어찌 이토록 달고도 쓰라리단 말인가.

“이 일은…… 이건…….”

현종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종리곡이 현종의 고민을 대신 풀어 주었다.

“죄송합니다, 태상장문인.”

“예?”

“제가 실수를 저질러 이 일이 이미 장문대리에게 전해졌습니다.”

현종의 눈이 삽시간에 커졌다.

“백천이에게 말입니까?”

“예. 그 아이의 형이…… 조바심을 참지 못한 모양입니다.”

현종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덜컥 겁이 났다.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럼에도 억지로 말문을 열었다. 그래야만 한다.

“그 아이는…… 어찌하기로 하였습니까?”

종리곡은 무겁게 고개를 내저으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답을 들은 건 아닙니다만, 아마도 장문대리는…… 종남의 제자가 되기를 거부한 듯합니다.”

“…….”

“설령 무학을 되찾지 못한다 한들 그저 화산의 제자로 살고자 한 모양입니다. 그런…… 상태로도 말입니다.”

현종은 조금 전 마주했던 백천을 떠올렸다. 담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모습 말이다.

예상은 했다. 짙은 고뇌가 속에 자리하고 있으리라고.

하지만 설마 이런 기회조차 내버리며 화산의 제자로 남으려 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백천아……. 이 녀석아.’

현종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화산이 무엇이라고, 그리도…….

현종이 종리곡을 보며 다시 물었다.

“하면 이미 끝난 일이거늘, 굳이 제게 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종리곡이 짧게 탄식했다.

“그저 아셔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

“실수이건 무엇이건, 저희의 과오로 장문대리에게 큰 혼란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알려 드리고 사죄를 드려야 할 일이라 여겼습니다.”

잠시 망설이는 듯 입을 벙긋거리던 종리곡이 말했다.

“그리고, 진동룡. 백천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이대로 스러져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었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

“화산만 양해해 주신다면, 우리는 백천이라는 젊은 검수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는…….”

종리곡이 탄식처럼 말했다.

“이대로 빛을 잃기에 너무도 아까운 이가 아닙니까?”

현종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종리곡 역시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저는 그저 이 말을 드리려 했을 뿐, 모든 결정은 태상장문인께 맡기겠습니다.”

종리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음을 무겁게 해 드려 송구합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럼.”

종리곡이 정중히 포권을 하고 몸을 돌렸다. 현종은 그를 잡지 않았다. 마땅히 건네야 할 인사의 말조차 없었다.

그저 망연히 바라보았을 뿐이다. 다 식어 버린 차로 가득 찬 찻잔을.

‘백천아…….’

잘게 떨리는 손으로 다탁 위 찻잔을 움켜잡았다.

이 간단한 일도 지금의 백천은 혼자 할 수 없다. 평생 그의 손으로 차 한잔조차 즐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가 화산의 제자로 남는 한, 영원히.

현종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처음 화산에 올랐던 백천의 앳된 얼굴이 눈앞에 아직도 선명했다. 지금과는 달리, 희망과 자신감으로 가득 찬 소년이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반짝였던지.

그 기억이 눈부신 만큼, 현종의 가슴은 더욱 쓰라렸다. 아무리 문질러도 가시지 않을 통증이 아릿하게 그를 휘감아 왔다.

* * *

현종의 희미한 탄식이 미처 닿지 못할 벽 너머. 창 아래로 한 남자가 주저앉아 있었다. 얼굴이 한없이 굳은 채였다.

백상이었다.

“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흘린 그는 현종이 듣기라도 할세라 입을 틀어막았다. 물론 여전히 얼이 빠져 있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잠시 멍하니 허공만 보던 그는 기다시피 창문 아래를 빠져나왔다. 몇 발짝 조심스레 발을 뗀 것도 잠시, 이내 정신없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사형이…… 사형이 나을 수 있다고?’

백천에게 가야 한다.

아니, 아니지. 백천은 그를 만나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구에게 말해야 하지?’

자신은 이 일을 감당할 수 없다. 그러니 누구에게라도 전해야 한다, 이 사실을.

그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움켜잡고 내달렸다.

그리고 멀리서 그런 백상의 모습을 지켜보던 종리곡이 짧은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긴 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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