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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733화


1733화. 무엇이 옳은 건지. (3)

사람은 때로 술을 마신다.

누군가는 즐거워서, 누군가는 서글퍼서, 그리고 누군가는 쓰라려서. 짙은 주향은 그 모든 것을 묻지 않고 어루만져 주니까.

하지만 밝은 달빛이 소매 끝에 내려앉는 오늘 같은 날은, 술이 사람을 마신다.

쪼르륵.

청명이 손을 뻗어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낡은 처마 위. 오래된 기와의 향이 흘러들어 오는 곳. 수많은 이들이 함께 있지만, 세상에 오직 둘만 있는 것 같은 그런 곳에서.

쪼륵.

다 채워진 잔이 허공으로 절로 둥실 떠올랐다. 하나 그 순간 앙상한 손이 뻗어 와 술잔을 가볍게 내리누른다.

“놔둬.”

“…….”

술잔이 다시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아졌다. 그러자 백천이 두 손을 뻗어 술잔을 움켜잡는다.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그 손은 저 작은 잔 하나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는 것이 지금의 백천에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백천은 용케도 술잔을 제 입으로 가져간다. 반이 넘는 술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짧은 사이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나면서도 말이다.

“음…….”

술을 들이켠 백천이 소리가 나지 않게 술잔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좋군.”

“…….”

“무공을 잃어서 좋은 점도 있네. 술이 불처럼 느껴지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그 말에 청명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럼 진작에 좀 퍼마시든가.”

“무리지.”

백천이 앙상해진 어깨를 으쓱한다.

“잔을 들 수는 있는데, 병은 들기 어렵거든. 술을 따라 줄 놈이 하나는 있어야 해.”

“손가락 하나로 부릴 놈이 저기 백 명이 넘을 텐데.”

“그렇지. 그런데.”

백천이 살짝 씁쓸하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이 무섭거든.”

“…….”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를 보는 눈이 말이야.”

백천이 짧게 웃는다.

여기서 입을 연다면 이어질 말들이 너무도 무거웠기에, 청명은 그저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채워진 잔 안에 달이 뜬다.

과거에도 보았던 달. 지금도 다를 바 없는 달. 하지만 이제는 다를 수밖에 없는 달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상이 달라져 보이는 것은 세상을 보는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이겠지. 지금의 백천에게 보이는 세상은 어떠할까. 그 세상은 과연 그가 알던 세상과 같을까.

“용케도 찾았네.”

“뭘?”

“내가 거기 있는 것 말이야. 기척도 못 느끼는 인간이.”

그 말에 백천이 픽 웃고는 다시 술잔을 잡는다.

여전히 앙상한 그 손으로.

“찾은 게 아냐.”

“…….”

“그냥 그럴 거라 생각한 거지. 거기 있을 거라고.”

술잔의 술이 백천의 입속으로 비워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명도 제 잔을 잡아 가득 찬 술을 제 입으로 털어 넣었다.

혀끝에 작은 뜨거움이 맴돈다.

하지만 이건 청명이 느끼는 술맛일 뿐, 지금 백천이 느끼고 있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같은 곳에 있고 같은 술을 나눠 마시고 있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술을 마셔야 했다.

청명의 시선이 슬쩍 처마 아래로 향한다. 그의 눈에는 보인다. 아니, 그의 감각에는 느껴진다. 축객령을 듣고 쫓겨났음에도 차마 백천의 처소에서 멀어지지 못하고 서성이기만 하는 인기척들이.

“답도 없는 놈들이지.”

“…….”

“호들갑은 어찌나 떨어 대는지, 원.”

그리고 백천 역시 그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굳이 눈으로 보고, 기감으로 느끼지 않아도 말이다.

하지만 청명은 말없이 그런 백천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없는 무감정한 눈으로.

“비었어.”

“음.”

청명이 술병을 들어 빈 백천의 잔에 다시 술을 따른다.

쪼르륵.

술이 다시금 가득 차올랐지만, 백천은 이번에는 술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들어 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보았다.

“네 생각은?”

“…….”

“너도 나를 설득할 거냐?”

그 말에 청명이 또다시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술 먹자고 부른 건 사숙이야. 내가 아니라.”

“그래. 그건 그렇지.”

백천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선후가 바뀌었다고 마음이 바뀌는 건 아니잖냐.”

“글쎄.”

청명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딱히 대단한 이유나 깊은 혜안 같은 건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아는 것이다. 어떠한 종류의 선택은 오직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어떤 조언도, 어떤 도움도 무의미하다.

이미 봐 왔으니까.

죽음이란 두 글자가 무감각하게 되어 버린 시대. 부상이란 두 글자가 차라리 축복이라 여겨졌던 시대. 그 비정한 세상에서 꺾여진 검을 부여잡고 분루를 흘려야 했던 이들을.

그때의 청명은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 주었던가.

“나는 자격이 없어.”

“…….”

그 말을 들은 백천이 조용히 시선을 내려 제 잔에 채워진 술을 바라보았다.

“자격이라…….”

고목나무의 가지처럼 메마른 백천의 손끝이 술잔을 매만진다.

“우리가 이 전쟁을 시작한 이후로.”

어쩌면 담담하게, 어쩌면 삭막하게, 그도 아니면 씁쓸하게.

백천의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온다.

“몇이나 되는 이들이 죽었을까?”

“…….”

“새삼 알게 되더라고. 그들 역시 하나하나…… 다들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겠지.”

잃지 말아야 할 것들을.

“그런데……. 나는 그들의 죽음을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는 못했어.”

몇 번의 승리와 몇 번의 패배.

전쟁 속에서 죽음의 의미는 그리 바래진다. 그 하나하나가 결코 가벼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입으로 읊어 대는 정언(正言)과는 달리 그 죽음을 하나하나 슬퍼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우습더라고.”

백천이 떨리는 손으로 잔을 잡았다.

“고작 팔을 잃은 게 뭐 대수라고, 고작 무학을 잃은 게 뭐가 그리 대수라고.”

“…….”

“이렇게까지…….”

이어질 말은 무엇이었을까.

이렇게까지 호들갑들인가?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야 하는가?

청명은 그 답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차마 물을 수도 없었다. 그저 잔을 들어 제 입가에 가져가는 백천을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을 뿐이다.

비워진 술잔을 매만지는 백천과 그를 바라보는 청명. 두 사람의 대치 아닌 대치가 꽤 길게 이어졌다.

“청명아.”

“그래.”

“내가 가장 힘이 들 때가 언젠지 알아?”

“…….”

백천의 입가에 씁쓸함이 맺힌다.

“망할 사질 놈들이 찾아와서 종남으로 가라고 떠들어 댈 때도 아니고, 나를 치료한 소소가 문밖에서 소리 없이 오열하는 걸 알았을 때도 아니야. 자랑스레 나를 바라보던 사제 놈들이 차마 내 눈을 보지 못할 때도 아니고, 장문인께서 이제껏 보지 못한 얼굴로 나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실 때도 아니야. 심지어…… 숟가락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해 개처럼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살아 보겠다고 발악할 때도 아니야.”

청명의 눈이 감겼다.

바라보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저 너무 무거워서다. 그가 보고 있는 이가. 그가 마주해야 하는 세상이.

“막 잠에서 깨어났을 때다.”

“…….”

“그때는 잊어버리거든. 모든 것을. 그래서 아무런 생각 없이 손을 들어 얼굴을 주무르려 하지. 그런데…….”

백천이 쿡 하고 자조 어린 소리를 내뱉었다.

“팔이 움직이지가 않아.”

“…….”

“겨우 들어 올린 손은 내 손이 아닌 것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지. 그건 보는 순간 다시 깨닫게 돼. 아, 이게 지금의 나구나.”

백천의 메마른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청명은 그 메마른 웃음에 화답해 주지 못했다. 그저 말없이 빈 잔에 술을 채웠을 뿐.

몇 순배의 술이 돌았을까.

술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심하게 떨려 오는 백천의 손을 한참이나 지켜보던 청명이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사숙.”

“……왜.”

“종남으로 갈 생각은 없어?”

“…….”

백천이 고개를 들어 청명을 바라본다.

그의 눈빛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는 청명조차도 알아낼 수 없었다.

“물론 사숙이 화산에 깊은 애정이…….”

“애정?”

“…….”

“그게 네 생각이냐?”

“사숙. 나는…….”

“백 번.”

어물쩍 흘러나온 청명의 말이 백천의 목소리에 묻혔다.

“아니, 어쩌면 천 번도 넘을 거다. 내가 종남으로 가겠다고 결심한 게.”

“…….”

“그런데 나는 아직 여기에 있다. 어째선 줄 알아?”

“글쎄.”

백천의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무당의 고풍스러운 전각들이었지만,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전각 따위가 아니었다.

“무서워서야.”

“…….”

그 대답은 청명에게도 뜻밖이었다.

“종남으로 가는 게?”

“아니.”

백천의 고개가 작게 저어진다.

“마주하는 게.”

“…….”

“나는 너를 쫓았어.”

“사숙.”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너처럼 되고 싶었다. 꺾이지 않고, 물러나지 않고, 뭐든 해낼 수 있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알아.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그리 여겼다는 거지. 그리고…… 그렇게 되고 싶었다는 거고.”

백천의 입술 사이로 다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도 안다. 청명이라는 인간은 생각만큼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을.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상처받기 싫은 작은 인간이 필사적으로 세운 가시, 그 끝의 날카로움일 뿐이라는 걸.

하지만 그는 그마저도 닮고 싶었다.

“그리고 언제쯤인가 알게 되더라고. 누군가는 나를……. 그래, 내가 너를 보는 것처럼 나를 보고 있다는 걸.”

“…….”

“그래서 무서워.”

백천이 술잔을 잡는다. 그 손길이 처연하리만큼 위태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청명은 보았다. 살짝 숙인 백천의 두 눈이 붉게 물들어 있는 모습을. 그렇기에 청명은 눈을 감아 주었다. 세상에는 보지 않아야 하는 것도 있으니까.

“종남으로 가라고?”

백천이 쿡쿡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로.

“그럼 내가 너를 보듯 나를 보던 이들은 알게 되겠지. 화산에 무학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도, 말도, 모든 것도, 칼 한 번 휘두르는 것만큼의 무게도 없다고.”

“…….”

“무위 같은 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그렇게 지껄여 대던 나를……. 그런 나를 보면서 말이야.”

청명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사숙.”

“살아가야 해.”

“…….”

“종남으로 가서 무학을 되찾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내게 문제는 그다음이야. 나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화산의 쐐기가 될 거다. 입바른 소리로 지껄이는 모든 말이 결국 강한 자의 아량에 불과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로서 살아가게 될 거야.”

충혈된 백천의 눈이 가라앉은 청명의 눈과 마주한다.

“나는……. 나는 그걸 버틸 수가 없다, 청명아. 내가 화산의 족쇄가 되는 걸, 화산이 내 족쇄가 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나는 그 눈들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청명이 먼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어둡기만 한 하늘. 그 하늘에서 누군가들의 눈빛이 청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이해할지는 모르지만.”

알고 있다. 너무 뼈저리게.

그래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썩어 가겠다고?”

백천이 작게 웃었다.

“잃어야 이해하는 것도 있어.”

“…….”

“화산의 선대들이 어떤 마음으로 죽어 갔는지 알 것 같다. 달아나고 싶었겠지. 도망치고 싶었겠지. 당장이라도 모든 걸 내팽개치고 그 압박에서 벗어나 숨 쉬고 싶었겠지.”

청명이 눈을 감았다.

그가 잃었던 이가 다시금 그의 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거야. 그들의 삶이 지켜보는 이들의 이정표가 될 테니까. 제 목숨보다, 제 비참함보다 중요한 게 있었으니까.”

“…….”

알지 못했다.

그 어깨에 얹어진 무게에 짓눌려 죽어 간 이들.

두려워 떨면서도 마지막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이들.

그들의 마음을 이제 와 이해하는 이가 있으리라고는. 청명조차 완전히 알지 못했던, 어쩌면 지금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심정을.

그렇기에 서글프다. 그렇기에 애처롭다.

그들에게는 끝이라는 이름의 해방이 존재했다. 하지만 백천의 고통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벗어날 수 없는 족쇄에 묶인 이. 아니, 스스로의 발목에 족쇄를 채운 이. 그리고 끝없이 신음해야 하는 이.

세상은 그런 것을 망령이라 부른다.

청명은 죽은 자의 눈에 묶인 망령이다.

하지만 백천은 살아 있는 자들의 눈에 묶인 망령이 되려 한다.

무엇이 더 고통스러울까.

“막을 셈이냐?”

청명이 눈을 떠 백천을 보았다.

죽어 망령이 된 이가, 살아서 죽어 갈 이를.

청명이 가만히 백천의 잔에 술을 따랐다.

처음처럼 잔에 술이 채워졌다. 이미 몇 번 술이 채워졌음이 거짓말인 것 같이.

그렇게 둘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하지만 백천은 몰랐다.

그는 스스로의 족쇄를 버텨 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그의 발목에 채워진 족쇄를 견뎌 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백천의 파문이라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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