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35화
1735화. 무엇이 옳은 건지. (5)
전투가 벌어진 후의 수습이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 그 전투가 ‘패전’이라는 말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형태로 끝난 경우, 군을 통솔하는 이는 숱한 문제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떨어진 사기, 끊긴 보급, 언제 다시 덮쳐올지 모르는 적…….
그리고 무엇보다 다음 전투가 또다시 패전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 모든 걸 수습한다는 건, 형태가 거의 남지 않은 누더기를 완전한 형태도 되돌리는 것과 진배없었다.
그럼에도 사패련의 총군사를 맡은 독심나찰 호가명은 의외로 그리 어렵지 않게 모든 일을 해내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그 일이 가능하지 않으리란 걸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임시로 올린 천막은 화려하다거나 고급스럽다기엔 다소 조악했다. 차라리 조금 삭막하단 표현이 어울릴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이곳에 발을 들여 본 이는 결코 그 말을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천막의 안쪽 중앙에 놓인 커다란 의자와 그곳에 나른하게 기대앉은 한 사람 때문이었다.
딱히 특별한 기세를 내뿜지도, 대단한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음에도 사내는 존재감만으로 이 커다란 천막 안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너른 의자에 비뚜름하게 기대앉은 장일소가 무심한 눈길을 던지며 물었다.
“난 말을 빙빙 돌리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단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태양궁주 진평이 제 입술을 깨물었다.
욱신.
이전 전투에서 화산의 애송이 놈에게 꿰뚫린 상처가 아직도 욱신거렸다. 자칫했으면 목숨마저 위험했을 부상이다. 물론 그 전투의 상흔은 이제 육신에 남아 있지 않다지만, 그 순간의 기억만큼은 지울 수도, 태울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실질적으로 태양궁주를 신음케 하는 고통은 그 애송이가 남긴 게 아니었다. 태양궁주가 짓씹듯 말했다.
“천면수사……. 그 작자를 어찌할 셈이오?”
분노가 용솟음치는 태양궁주의 눈빛이 장일소를 금세 꿰뚫을 듯했다.
“놈이 나를 공격했단 사실을 궁주는 분명 들었을 터! 그런데 놈이 어째서 멀쩡히 살아 이곳을 활보하는 것이오! 어째서!”
진노한 고함이 천막 안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사실 천면수사가 이곳을 활보하고 다닌다는 말은 거짓이다. 그는 지난 전투 이후로 칩거에 들어간 상태이므로.
하지만 태양궁주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대답해 보시오, 련주! 이게 진정 사패련의 방식이오?”
며칠이나 사경을 헤매며 의식을 잃었다가 간신히 깨어난 태양궁주를 분노하게 한 것은 패전이 아니었다. 궁도들의 사라져 간 목숨도 아니었다.
자신을 습격해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이가 어떤 징죄도 받지 않았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는 이 안일한 대처를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웠다.
“내가 지금 묻고 있지 않소!”
장일소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가늘게 뜬 눈으로 앞에 선 태양궁주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두 번째 말하잖니. 난 말 돌리는 게 싫다고. 결론만 말하지.”
장일소가 뒤로 기대고 있던 몸을 느리게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더니 태양궁주 쪽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은밀히 물었다.
“원하는 게 뭐지? 말해 보렴. 원하는 게 뭐야?”
“……놈의 목.”
“……흐응.”
“최소한 팔. 아니, 다리 하나는 받아야겠소. 그게 아니면 내 분노가 풀리질 않아!”
장일소는 고민된다는 듯 긴 손가락으로 다소 과장되게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만일 이 사안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우리 태양궁은 지금 당장 남해로 돌아가겠소. 이건…….”
“경고? 아니면 협박? 어느 쪽일까?”
태양궁주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턱을 괸 채 웃고 있는 장일소의 눈빛이 더없이 서늘하다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렵지 않은 일이지. 그래, 어렵지 않은 일이야. 죄를 지었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지. 그렇지 않니?”
태양궁주가 얼른 고개를 끄덕이려 할 때였다.
“그런데…… 그럼 조금 불공평하잖니.”
“……불공평?”
“천면수사는 죄를 지었다. 동료를 공격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그게 팔이 잘릴 만한 죄라면, 그깟 애송이 놈들을 막지 못해서 패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이는 어떤 벌을 받아야 할까?”
그 순간, 태양궁주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련주, 그건…….”
“대답해 보렴. 무슨 벌을 받아야 할지.”
태양궁주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빙글빙글 웃는 장일소의 얼굴에 살기가 차오르는 게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들끓는 분노로 잠시 잊고 있던 장일소에 대한 공포가 태양궁주의 피를 순식간에 식혀 버렸다.
“나는…….”
하지만 그는 쉬이 물러서지 않았다. 분노가 앞섰기 때문이 아니다. 태양궁의 자존심이 곧 태양궁주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라도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었다.
태양궁주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게 련주의 대답이라면…… 우린 남해로 돌아가겠소.”
장일소가 참으로 안타깝다는 듯 탄성을 흘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이런. 왜 이렇게 갈수록 멍청하게 구는지.”
“……련주!”
“아직 모르겠니? 이제 네게 돌아갈 길 따위는 없단다.”
장일소의 이 말을 협박으로 받아들인 진평이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장일소의 말은 조금 달랐다.
“전쟁은 이제 끝날 거란다. 우리도, 저들도 이 전쟁을 지속할 힘이 없으니까. 그럼 그 뒤엔 어떻게 될까?”
순간 진평의 눈이 짧게 흔들렸다.
거듭 말하지만, 진평 역시 결코 우둔한 이는 아니다. 그러니 저 말뜻을 이해 못 할 리 없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된다.
가진 힘을 이미 대부분 동원한 마당에, 서로 적당한 피해만 주고 다시 경계를 긋는 결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한쪽이 완벽히 분쇄되는 결말만이 존재하게 될 터.
그리된다면…….
피와 원한을 있는 대로 집어삼킨 승자가 과연 중원 땅덩어리를 삼킨 포만감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진평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장일소가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진창에 발을 넣은 순간부터 몸을 더럽히지 않고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하단다. 엉망진창이 되어 살아남든가…… 거기서 죽든가, 둘 중 하나만 존재할 뿐이지.”
“이…….”
“그리고 다소 안타깝지만…… 그 진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이용해야 하는 법 아니겠니? 설령 그게 동료의 가슴에 비수를 박아 넣는 개새끼라 해도 말이다.”
진평의 얼굴이 푸들푸들 떨렸다. 분노와 굴욕감을 버티다 못해 막 몸을 뒤틀려는데, 다시 장일소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절반 정도로 하지. 그간 하오문이 모아 둔 재물의 절반. 그 정도면 보상으로 부족함은 없겠지. 그렇지?”
진평이 살짝 놀란 눈으로 장일소를 응시했다.
“부족하다면 나도 조금 보태 주지.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내 탓도 있을 테니. 예전 흑귀보가 모아 둔 재물을 빼놓은 게 있으니 적당히 체면치레 정도는 될 거란다. 어때, 만족했니?”
잠깐의 고민 끝에 태양궁주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보상 따위를 바라고 온 건 아니지만, 지금 장일소가 제시한 재물은 태양궁주조차 아연하게 만들 만한 양이었다. 그 돈이라면 태양궁의 입지를 다지는 건 물론이고, 전쟁 후 그들 손에 떨어지게 될 운남을 순식간에 안정시킬 수 있다.
그만한 돈이라면 분노 따위는 얼마든지 참아 내리라.
“약속은 꼭…….”
“물론이지.”
장일소가 앞에 놓인 술병을 들어 빈 잔을 향해 기울였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약속을 어겨 본 적이 없거든.”
뱀 같은 두 눈이 태양궁주를 꿰뚫듯 주시했다. 여전히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마시렴. 술은 케케묵은 감정을 털어 내어 주는 좋은 약이니까.”
진평이 손을 뻗어 잔을 받아 들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천천히 술을 들이켰다.
장일소는 그런 그를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았다.
진평은 알지 못했다.
곱게 휜 기름한 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장일소의 서늘한 눈빛을.
한없이 차갑고 깊은, 무저갱과도 같은 눈빛이 태양궁주 진평을 아득하게 깊은 곳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태양궁주가 돌아간 후. 천막에 남은 장일소는 술이 가득 찬 잔을 들어 올려, 금방이라도 넘칠 것처럼 찰랑이는 술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용케도 넘치지 않고 잔에 담겨 있다. 마치 지금의 사패련처럼.
“그가 만족했겠습니까?”
호가명의 물음에 장일소는 여전히 잔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단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만족이 아니라 납득이지.”
“납득…….”
“더 풀어서 말하자면, 납득할 만한 명분 아니겠니?”
장일소가 빙그레 웃었다.
“저래 봬도 귀한 몸이시잖니. 그런 작자들은 때로 실리보다 거창한 명분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단다.”
호가명이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물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재물을 하오문의 사죄와 사패련의 보상이라는 이름하에 얻어 냈다는 것이다. 태양궁주로서는 궁도들에게 내세울 충분한 전과가 되어 줄 것이다.
‘구차하군.’
태양궁주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면이 있다는 걸 인정한다. 설령 태양궁주가 호가명의 책임을 물어 그의 목을 치려 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대처는 실로 구차하다. 하오문주에게 원한이 있다면 그를 직접 찾아가면 될 일. 칩거에 들어갔다고는 하나, 전장을 떠난 것도 아니다. 그런 하오문주의 일을 논하는 데 장일소를 찾는다는 건…….
‘애초에 하오문주에게 죄를 물을 의지가 없었다는 뜻일지도.’
아니면 전쟁을 앞두고 그만한 전력을 잃을 순 없다는 계산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걸로 태양궁주는 당분간 입을 다물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
“예?”
“항상 아슬아슬하단 말이야.”
장일소가 넘칠 것 같은 잔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전력을 다한다는 건 안정과 거리가 멀단다. 반드시 문제가 발생하고, 기어이 흔들리기 마련이지. 뒤흔들리다 금방이라도 펑 터져 버릴 것처럼.”
호가명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감당해 낸다는 게 능력이겠지.”
중얼거리던 장일소가 문득 태양궁주가 나섰던 천막 출입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린아이는 차라리 다루기 쉽단다. 입에 당과를 물려 주면 울음을 그치거든.”
“천면수사가 걱정되십니까?”
“늙어 버린 생강도 생각보다 다루기 쉽지. 그 무엇보다 제 목숨을 중히 여기는 이들은 모험하지 않는 법이거든. 아무리 원한이 바다처럼 깊다 해도.”
장일소의 눈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진정으로 다루기 힘든 건…… 원하는 게 뭔지 확실치 않은 것들이야.”
호가명은 장일소가 논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그때, 놈들이 어디에 있었다고?”
“산을 올라 무당에 진입했다 합니다.”
“아니, 아니. 가명아, 내가 묻는 건 그다음이다.”
“……예?”
“그 후 하루 정도 더 종적이 묘연했지. 그러고는 태연하게 다시 련에 합류했고. 그렇잖으냐?”
호가명은 그렇다고 답했다. 하지만 내심 의문이 일었다.
그런 일이야 언제든 벌어질 수 있지 않은가. 특히나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는 말이다.
커다란 패배 직후였다. 놈들이 사패련과 쭉 함께하는 게 맞을지 하루 내내 고민했다 한들, 딱히 책잡을 만한 일은 아니다. 누구나 목숨은 여러 개가 아니니까.
그런데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장일소가 이를 걸고넘어지고 있다.
“련주님. 그들은…….”
“안다, 가명아. 세상에 확실한 건 없지.”
대화가 통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하지만 호가명이 그 괴리의 이유를 미처 헤아리기도 전에 장일소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이다. 확실하게 만들 수는 없어도, 그 목에 칼을 대놓을 수는 있지 않겠니?”
“…….”
“혈궁주를 데리고 오렴.”
장일소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갔다.
“궁금하기도 하거든. 대체 무슨 생각인지 말이야.”
내내 침잠한 듯 고요하던 두 눈 역시 다시 요사하게 들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