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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738화


1738화. 버텨 낼 수 있을까? (3)

모든 이가 그 손을 주시했다.

이제는 무엇도 할 수 없을 테지만, 한때는 분명히 화산을 이끌었던 그 손.

활짝 펴졌던 손은 이내 허공의 무언가를 그러쥐었다.

알 수 있었다. 손에 잡힌 건 아무것도 없지만, 분명 잡고 있었다.

검(劍). 그 손이 평생 놓지 않았던 것. 이 순간조차도 잡혀 있는 게 자연스레 느껴지는 그것.

지켜보던 이들의 가슴에 큰 파문이 일었다.

보고 있자니 새삼 실감이 났다. 저 청년의 손에 검이 쥐여 있지 않음이 얼마나 어색한지. 그가 잡은 게 진짜 검이 아니라 그저 상상 속 검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지도. 그들이 무엇을 잃고 말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또 몇몇은 백천의 몸짓에서 전혀 다른 걸 보았다.

적을 벨 수 없다. 더는 매화를 그려 낼 수 없다. 더는 그 검에 자신의 이상을 담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천은 여전히 검을 쥐고 있다.

백천의 입이 열렸다.

“강해지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그의 나직한 말에 사로잡혔다.

“세상 누구보다 더. 그 어떤 이보다 더욱더 강해져서 저란 사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단순히 백천의 말에 진심이 실려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말은 모든 이들을 대변하고 있다. 강호라는 세상에서 위태한 칼끝에 몸을 싣고, 언제 목숨이 끊긴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어째서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지, 어째서 그 손에 검을 들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과거였다면 영광을 좇는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을 쉽사리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영광을 좇다가 아무것도 쥐지 못한 채 산화해 버린 이들을 이미 모두 보지 않았나.

그들은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생각했을까.

강호라는 대지에서 영광이라는 허상을 좇던 이들은 결국 무엇 하나 쥐지 못한 채 힘이 빠져나가는 제 손을 보았을 것이다. 그때 과연 무엇을 떠올렸을까.

그들이 맞이한 운명은 어쩌면 이곳에 있는 이들에게도 곧 찾아올지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어째서 모두 이곳에 있는가. 더는 영광을 바랄 수 없는 상황에도 손에 쥔 검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알게 되었습니다.”

백천이 가만히 손을 앞으로 펼쳐 현종에게 내밀어 보였다.

“기억하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현종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백천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앙상한 손가락 사이로 형형하게 빛나는 그의 눈을.

“이 손에 넣어야 할 건 강함이다. 하지만 무란 그저 강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란 의지와 함께해야 하는 법. 뜻을 잃은 무는 그저 무뢰배의 힘(力)에 불과하다.”

“…….”

“기억하십니까?”

백천의 눈은 변함없이 또렷하게 빛을 뿜고 있었다. 현종은 안다. 저 눈빛에 담긴 건 불신도, 적대감도 아니다.

오히려 여전히 짙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현종을 바라보는 백천의 눈은 올곧도록 변하지 않았다.

“태상장문인께서 제게 해 주신 말씀이십니다.”

현종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랬지. 그래, 그랬었다.

그가 했던 말이다. 아직 얼굴에 치기가 가득하던 시절의 백천에게, 자신의 뜻을 한껏 담아서 전했다. 언제고 이 소년이 화산의 뜻을 천하 만방에 알릴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뜻과 힘. 그중 어느 하나만 부족해도 무(武)는 완성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주저 말고 힘을 포기해라. 힘이 없는 의지는 비참하지만, 의지가 없는 힘은 위험하다. 이 또한 태상장문인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현종은 눈을 감은 채 그저 들었다. 목소리가 귀에 깊게 울렸다.

그러다 마침내 눈을 떴을 때, 활짝 펼쳐진 백천의 앙상한 손이 시야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니 묻겠습니다. 이 손에 무엇을 쥐라 하십니까?”

“…….”

“무엇을!”

현종의 입이 살짝 열린다. 하지만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하고 다시 닫혔다.

“검과 내공이요? 예, 얻을 수 있겠지요. 태상장문인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서 몸을 고치고, 다시 검을 잡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백천이 다른 이들을 둘러보았다. 모두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의지는 무엇으로 채워야 합니까?”

현종이 다시 한번 머뭇거렸다.

해야 하는 말이지만 차마 그의 입으로는 뱉고 싶지 않은 말이 맴돌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혀끝의 살점을 떼어 내는 심정으로 가시 같은 말을 뱉었다.

“……그곳에도 의지는 있다.”

“예.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저의 의지가 될 수 있습니까?”

“백천아.”

“감히 제자가 묻겠습니다, 태상장문인.”

“…….”

“태상장문인의 의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현종은 괴로운 심정을 못 이겨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당연히 화산에 있다. 대답을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그리 말할 순 없었다.

내뱉고 싶지 않은 말을 뱉고, 당연히 해야 할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 모든 과정이 상처로 남아 현종을 아리게 했다.

“제 의지는 이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백천은 당당히 입에 담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불변의 진리를 언급하는 것처럼, 그저 담담하게.

“다시 묻겠습니다, 태상장문인. 이 손에 무엇을 쥐어야 합니까?”

모두가 그 손을 바라보았다.

텅 비어 있다. 그렇기에 무엇이라도 쥘 수 있을 것이다.

“무를 쥘 수 있다면 무를 쥘 것이고, 그러지 못한다면 의지를 쥐려 합니다. 그게 태상장문인께서 제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현종은 그의 손에 무를 쥐여 주려 했다.

아니, 모두가 그랬다.

화산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저 손은 단순히 한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저건 화산의 손이다. 화산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바람을 담은 손.

그 손을 든 이가 묻고 있다.

“그 뜻이 이제는 달라졌습니까?”

아프다.

“기어코 제자의 손에 의지 없는 힘을 쥐여 주려 하십니까? 제가 제 손으로 태상장문인의 모든 가르침을 부정해야 합니까? 화산의 모든 것을 부정해야 옳습니까?”

지독하게 아프다.

현종의 뜻이기에 침묵을 지키던 이들도 이 말에는 현종을 바라보았다. 백천의 등 뒤를 지키는 제자들의 눈빛이 이제는 선명하다 못해 날카롭게까지 느껴졌다.

현종은 묵묵히 감내했다.

“그렇게 얻은 힘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힘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사파와 무엇이 다릅니까? 힘으로써 다른 모든 걸 얻어 낼 수 있다는 논리라면, 제가 저 패군과 무엇이 다릅니까?”

백천의 눈빛이 벼락처럼 현종을 내리친다.

“태상장문인께서 논하시는 미래는 틀렸습니다!”

“백천아!”

화산의 태상장로들이 화들짝 놀라 백천을 말렸다. 그도 그럴 게, 조금 전 백천의 말은 현종의 권위를 일체 부정하는 말이다.

하지만 백천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태상장문인의 뜻이 달라졌다면, 저는 그 뜻을 따를 수 없습니다. 따르지 않겠습니다.”

“이, 이 녀석아! 말을 가려…….”

“그건 더 이상 태상장문인의 의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투웅!

백천이 편 손을 쥐어 제 가슴을 두드렸다. 내리치듯이 강하게.

“그 뜻은 여기에 있습니다.”

“…….”

“설령 태상장문인께서 버리셨다 해도, 그 뜻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건 여기에 있습니다. 그 뜻이 제 뜻이 되었고, 이젠 제 의지가 되어 있습니다.”

“백천아…….”

“화산에는 제 모든 것이 있습니다.”

백천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 하나만을 보고 몰려온 제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이상한 일이다.

이럴 때 그는 가장 먼저 청명의 시선을 찾았다. 청명은 어디서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만큼은 청명의 시선이 신경 쓰이지 않는다.

저들 가운데 있다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그는 청명이 아닌 화산의 모두를 보았다.

하나하나의 눈빛이 별처럼 빛나 보였다.

저 빛들이 부담이던 때도 있었다. 너무 버겁게만 느껴져, 아무도 없는 데서 홀로 떨던 때도 있었다.

그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저 눈빛들이 그에게 전해 주고 있었다.

“저는 나약한 놈입니다. 태상장문인께서는 저를 대단하게 보셨을지 모르지만, 전 생각 이상으로 하찮고 모자란 놈입니다. 저만은 그걸 똑똑히 알고 있습니다.”

“…….”

“그렇기에 손에 쥔 것을 놓치지 않도록 함께 잡아 주는 사람이 제게는 꼭 필요했습니다. 가파른 길을 오르다 숨이 가쁠 때면 등을 밀어 주고, 아득함에 질려 있을 때 곁에서 같이 위를 바라봐 줄 그런 사람 말입니다.”

백천의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 모든 게 화산에 있습니다. 그리고…… 제 모든 것도 화산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말만은 여느 때보다 단호하다.

“이 손에 꼭 하나만 담아야 한다면 그건 제 의지라 하셨지요.”

“……그랬다.”

현종이 아픔을 삼키며 답했다.

“제 의지가 화산에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선인의 뜻을 따르려 합니다. 또한 제 의지를 관철하려 합니다. 뒤따르는 이의 본보기가 되려 합니다.”

어느새 현종은 숨까지 참고 있었다. 정확히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그것이 이어 가는 이가 응당 지켜야 할 의무이고, 검을 쥔 이가 당연히 관철해야 할 의지이니까!”

모두가 알게 되었다.

백천을 잃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얻었다.

무인으로서의 백천은 사라졌을지 모르지만, 저곳에 있는 백천이라는 사람은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이 찬란하다.

그리고 또한 알게 되었다.

저 사람이, 저 나약한 이가 화산에 얼마나 필요한 인물인지. 진정으로 화산의 뜻을 이어 가는 자가 누구인지.

“그렇기에 저는 거부합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곳입니다. 재고하여 주십시오, 태상장문인.”

백천이 깊게 고개 숙였다.

병든 몸임에도 결코 비굴하거나 위태로워 보이지 않는다. 그런 백천과, 그 뒤로 선 숱한 제자들의 얼굴을 현종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훌륭하구나…….’

그가 바랐던 것보다 몇 배는 더……. 아니, 차마 그가 바란 적 없을 정도로 찬란하게 이어졌다.

어쩌면 지금 백천이 딛고 선 자리는, 과거의 선인들조차 닿지 못한 드높은 곳일지도 모른다.

백천이란 존재 하나만으로 화산은 달라질 것이다. 그라는 이를 상징 삼아 세상을 웅비할 화산의 모습을 그릴 수 있었다.

과거 화산의 문을 두드리던 어린 소년이 마침내 이곳까지 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이는 이토록 늙고 초라해졌건만, 소년은 너무도 훌륭히 자라났다.

그렇기에 현종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장문인.”

“……예, 태상장문인.”

“이 결정의 권한을 다시 한번 제게 주실 수 있겠소?”

운암이 말없이 현종을 바라본다. 그렇게 한참을 침묵하던 운암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뜻대로 하십시오.”

“고맙소.”

현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백천을 향해 다가갔다.

백천은 두 눈을 크게 부릅뜨고 그런 현종을 바라보았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과거에는 백천이 현종을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지금은 현종이 백천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모든 것이 다르지만, 단 하나는 다르지 않았다. 걸어가는 이가 닿으려는 곳에서 확신 없는 희망을 본다는 것.

저벅.

이내 현종의 걸음이 백천 앞에서 멈추었다.

정적이 고였다.

정좌한 백천과 그의 앞에 선 현종. 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보았다.

과거의 백천은 그 손으로 화산의 문을 두드렸다.

지금의 현종은 이 손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현종의 손이 천천히 뻗어졌다.

떨리지 않는 단호한 손길에, 백천이 울컥한 듯 입술을 깨물고는 현종을 향해 마주 손을 뻗었다.

제 무게마저 힘겨워하는 나약해진 손이 현종의 두터운 손에 올라갔다. 아니, 올려가려 했다.

그 순간 현종의 손이 조금 더 뻗어 나갔다.

손과 손이 어긋났고, 백천이 망연히 두 눈을 크게 떴다.

탁.

현종의 손이 닿은 곳은 백천의 손도, 그 어깨도 아니었다. 허리춤에 있던 자하신검이었다.

받지 않겠다 직접 밀어 내고 불가하다고 외쳤다. 그랬지만, 이젠 그 자하신검이 현종의 손에 잡혔다.

“태상…….”

주저 없이 백천의 허리춤에서 자하신검을 떼어 낸 현종이 무심하게 백천을 일별하고 몸을 돌렸다.

“이 시간부로 진동룡은 화산의 제자가 아니다. 그를 화산의 도적에서 파(破)한다.”

백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현종의 어깨를 응시했다.

“단! 지금껏 진동룡이 화산에서 세운 공을 감안하여, 단근의 벌은 면책한다.”

무너진다.

“화산의 모든 제자는 이 사실을 명확히 하여 파문의 형(刑)을 받은 이에게 어떠한 온정도 건네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세상이, 그의 모든 것이.

“이행하라.”

낯선 곳에 홀로 떨어진 듯, 소나무 사이로 자라난 붉은 매화 한 그루가 서럽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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