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40화
1740화. 버텨 낼 수 있을까? (5)
고요하다. 선 이와 앉은 이, 둘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서로가 그곳에 있음을 알면서도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반쯤 드리워진 달빛이 백천의 얼굴을 간질이듯 천천히 옮겨 간다. 그렇게 달빛이 느리게 자취를 감추고, 깊은 어둠이 내려앉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청명은 말없이 그저 서 있었다.
영겁 같은 침묵의 끝, 마침내 굳어 있던 청명의 입이 달싹거렸다.
“원망이라도 하고 있나?”
백천의 눈이 천천히 청명에게로 향했다. 녹슨 경첩이 열리는 듯 삐걱삐걱했다. 그 힘겨운 움직임이 멎고, 텅 비어 버린 눈이 청명을 응시했다.
그 눈빛을 마주한 청명은 조금 낯설다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백천을 마주했을 때, 그의 눈빛이 어땠더라.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새 오래전 일이 되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지금 같은 눈빛은 아니었으리라.
아마 희망과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무모하지만, 또 그렇기에 가질 수 있는 눈부신 자신감으로.
“원망이라…….”
갈라진 목소리가 나직이 새어 나왔다. 그의 눈빛처럼 어딘가 허무한 음성이었다.
백천의 눈이 청명을 넘어 더 먼 어딘가를 본다. 청명은 지금 백천에게서 과거의 제 모습을 겹쳐 보았다.
지금 백천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청명은 주먹을 꽉 쥐었다 풀었다.
백천이 느리게 말했다.
“……해야 한다면 어디서부터일까.”
“…….”
“이런 결정을 내리신 태상장문인일까……. 아니면 나를 이렇게 만든 사패련일까. 그도 아니면 치러야 할 대가도 모른 채 무모하게 살아온 나일까. 그중 무엇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백천이 코웃음을 흘렸다. 아니, 정확히는 웃음이 되려 했지만 결국 되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 찌꺼기 같은 것이었다. 그 허무한 소리가 내리깔린 밤 사이로 번져 간다.
“누굴 원망하면 좋을까? 아니……. 누구부터 원망해야 좋을까.”
백천의 시선이 제 손으로 향했다.
무엇을 쥐어야 한다고 했더라?
글쎄. 이제는 그가 손에 쥐어야 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
어쩌면 이 손으로는 아무것도 쥘 수 없게 된 걸지도 모른다. 모두가 아는 사실을, 그만 혼자 인정하지 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다.”
백천이 다시 청명을 올려다보았다.
“감내할 수 있었다. 비웃음도, 안쓰러운 눈빛도, 내장이 끊기는 것 같은 고통도……. 그리고 비참함도.”
백천의 입가에 작은 조소가 어렸다.
“모든 걸 버티는 한이 있더라도, 그 길이 살아서 지옥을 겪는 것과 다름없다고 해도, 나는 그저 선택하고 싶었을 뿐이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 의지로. 내 손으로.”
눈길이 다시 멍하니 허공으로 향했다. 여전히 텅 빈 듯했지만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눈 안에 작은 빛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도 잠시, 백천의 두 눈은 다시 비어 갔다.
바라볼 곳이 없으므로.
“그런데……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는군. 그것조차도…….”
말이 공허하게 흩어졌다.
알고 있다. 현종의 모든 결정은 오직 백천을 위한 것이었다. 그를 위해 현종은 수많은 것을 내던졌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그를 염려하고 있다. 어쩌면 그는 복에 겨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지. 그렇게 노력하고, 그렇게 애썼는데…… 결국은 제자리야.”
청명의 눈이 조금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결국은 또 내 의지와 다른 삶을 살게 되네.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나를 위한 삶이라는 걸 말이야.”
백천의 눈이 청명에게로 향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니,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내가 바란 게 너무 과분하고 어려운 일이었나? 혹시 내가 너무 주제넘었나? 감히 나 같은 게 바라선 안 될 것이었나?”
“…….”
“대답해 봐.”
백천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대답해.”
어둠에 웅크린 백천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흘러내릴 듯 위태로웠다.
“너는 항상 내게 답을 줬잖아. 내가 갈 길을 알려 줬잖아.”
청명이 눈을 꾹 감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니까 알려 줘 봐.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내가……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는지.”
청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어떤 말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 어떤 말을 하든 그저 공허할 뿐이다.
“뭐라도 해 봐. 대답이 아니라도…… 위로든, 질책이든, 욕이든…… 뭐든. 그렇게 서 있지만 말고.”
“…….”
“뭐라도…… 뭐라도 말해 줘, 제발…….”
애원하던 백천이 급기야 허물어졌다. 흘러내리듯 속절없게.
“제발…….”
앙상하게 마른 손이 낡은 마룻바닥을 힘없이 긁었다.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다.
그 모습을 말없이 한참 내려다보던 청명이 입을 열었다.
“잘못된 건 없어.”
“…….”
“원래 상실은 선택할 수 없는 거야. 잃고자 하지 않았음에도 잃는 거. 그게 상실이지.”
수많은 걸 얻는 만큼 또한 숱한 걸 잃어야 한다. 살아간다는 건 그런 것이다.
청명은 진저리가 날 만큼 잘 알았다.
잃어선 안 되는 걸 잃는 고통을. 짙디짙은 상실의 빛깔은 차라리 죽음을 온화하게 만든다는 것 역시 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백천이 지금 어떤 기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백 명의 사람에겐 백 가지의 상실과 그만큼 다른 대처가 있다.
그렇기에 청명은 어설픈 위로를 건네지 않았다. 절망의 끄트머리로 내몰려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백천의 텅 빈 동공에 청명이 담겼다.
“……잘못된 게 없다고.”
“그래.”
백천이 나직이 웃었다.
“그런가? 그럼 나는 이제 뭘 해야 하지?”
허무한 웃음이 청명의 가슴을 깊숙하게 찔렀다. 그러나 청명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대답해 봐.”
다만 빤히 백천을 마주 보았다. 그러자 내내 비어 있던 백천의 눈 안에 돌연 많은 감정이 뒤섞이고 뭉그러졌다.
청명은 어렵사리 말했다.
“나는 사숙에게 답을 준 적이 없어. 그렇게 느꼈다면 그건 사숙의 착각이야.”
실제로 청명은 자신이 옳은 길을 ‘알려 준다’라고 여긴 적은 없다. 그 자신조차 옳은 길을 찾지 못한 사람이니까.
오히려…… 의지한 건 청명이었다.
그는 ‘옳은 길’을 찾아내지 못했지만, 이들이라면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가장 믿어 온 이가 길을 잃었다. 대신 길을 열어 주리라 믿었던 이가 여기에 무너져 있다. 더 나아갈 수 없는 낭떠러지에서.
그런 이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청명도 알지 못했다.
돌아서는 것도, 더 나아가는 것도 허락되지 않은 이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때 백천이 되물었다.
“그래?”
그 순간 청명은 보았다. 수많은 감정의 찌꺼기가 가라앉아 있던 백천의 눈에 한 가지의 감정이 아주 선명하게 피어나는 것을.
“그럼 뭐 하러 왔어?”
원망 같은 게 아니다.
“위로라도 하려고?”
그건…… 질시(嫉視)였다.
“비웃어 주기라도 하러 왔나? 아, 아니면 입바른 말로 설교라도 하려고? 그 대단하신 입으로 또 무슨 말을 지껄이려고?”
알 것 같았다.
눈부시겠지. 차마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백천이 간절히 바라던 그 모든 게 지금 청명에게 있을 테니까. 적어도 백천의 눈에는 그리 보일 테니까.
함께 걷는다고 여길 때는, 궤적을 좇는다 생각할 때는 그저 찬란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더는 그럴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그 빛은 너무도 눈 부시다.
눈이 멀어 버릴 만큼. 한 사람의 마음을 새까맣게 태우고도 남을 만큼.
청명은 저런 눈빛에 익숙했다. 그럼에도 이 순간이 이토록 괴롭고 숨이 막히는 건, 눈앞의 사람이 저런 눈빛과 가장 거리가 멀다고 여겼던 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청명이 잠시 머뭇거렸다. 자조가 흘러나올 것 같아서였다.
백천은 아마 모를 것이다.
“오해하는 모양인데…… 나는 사숙이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인간도, 뛰어난 인간도 아니야.”
이미 몇 번이고 말했다. 어설픈 겸양이 아니다. 진심을 다해 연거푸 말해 왔다.
“그런 내가 사숙에게 해 줄 말 같은 건 없어.”
누군가는 청명에게서 찬란함을 볼지도 모르지만, 그건 가짜에 지나지 않는다. 청명이야말로 백천이 논했던, 의지 없는 힘으로 가득 찬 망망대해의 배일 뿐이다.
누군가가 알려 주지 않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그럼 뭐 하러…….”
“난 사숙에게 해 줄 말이 있어서 온 게 아냐.”
청명이 무심한 목소리로 백천의 말허리를 끊었다.
“내 이야기를 하러 온 거지.”
백천은 깊이 절망하는 와중에도 당황했다. 이런 자신을 앞에 두고 청명이 제 이야기를 하겠다니 그럴 만했다.
“아무도 묻지 않더라고.”
“뭘…….”
“내가 어떻게 사패련의 포위에서 빠져나왔는지. 왜 그놈이 순순히 나를 보내 줬는지 말이야.”
백천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미처 생각지 못했다. 급박한 와중에 청명이 도착해 준 것만으로 다행이었으니까.
그러나 이 말을 듣고 보니 뒤늦은 의문이 피어났다.
장일소는 어째서 청명을 그냥 보내 주었을까.
마음만 먹었다면 죽이지는 못한다 해도, 전장에 개입하지 못할 만큼 몰아붙일 수는 있었을 텐데. 왜 굳이 청명을 순순히 놓아줬을까.
“내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알아?”
“너 설마…….”
청명이 짐작이 간다는 듯 피식 웃었다.
“오해하지 마. 거래 같은 건 없었으니까.”
“…….”
“그냥 보내 주더라고.”
“뭐?”
“그냥 순순히, 아무 조건이나 대가 요구도 없이.”
백천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동시에 청명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지금껏 백천이 보아 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청명이 돌연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귓가에 장일소의 비웃음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 왜 내가 너를 경계한다고 생각하지? 응?
“놈이 그러더라.”
– 어차피 너도 배부른 돼지 새끼에 불과한데 말이야.
청명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 그렇잖니.
“당가를 선택하며 점창의 멸문을 외면한 순간, 나도 어차피 입으로만 떠들어 대는 위선자에 불과하다고.”
장일소의 환한 웃음이 떠오른다. 전신을 옥죄는 것처럼 괴로워졌다.
– 거기서 죽은 이들에게 말해 보렴. 네가 그 잘난 협의를 지키고 있다고. 참 재미있을 것 같지 않니?
장일소는 그 말을 남기고 먼저 물러났다.
하지만 사실상 놈은 물러나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남긴 말이 여전히 청명에게 새겨져 있었으니까.
아니, 사실 이미 화인은 새겨져 있었다. 놈은 아물지 못한 흉터를 귀신같이 파헤치며 소금을 뿌렸을 뿐이다.
“각오했던 일이야.”
그때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선택의 순간이 온다면, 어려워도 절대 주저하지 않겠다고. 그 선택으로 인해 치러야 할 죗값이 있다면 모든 건 홀로 감당하겠다고.
하지만…….
“그 손에 의지를 담고 싶다고 했었지? 좋은 말이야. 그런데, 사숙.”
청명이 피식 웃었다.
“나는 그걸 잡을 수 없는 사람이야.”
“……청명아.”
“나는 말이야. 나만은…….”
자신에게 스스로 떳떳해지고 싶었다. 이번만은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하지만 알게 되었다.
의지 없는 최선은, 무지한 노력은 그저 눈 감고 휘두르는 날붙이와 다름없다.
의지를 관철할 힘을 잃은 이와, 힘을 지녔으되 길을 알지 못하는 이.
서로가 서로에게 맞는 조각이 되어야 할 두 사람은 이제 등을 맞댈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한테 대답하라고 했지. 그런데, 그 전에 먼저 대답해 줘, 사숙.”
“…….”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뭘 해야 할까?”
백천의 손이 움찔 떨렸다.
구름 속에서 달이 다시 고개를 내민다. 하늘로 시선을 고정한 청명의 위로 창백한 달빛이 어렸다.
“모르겠어.”
“…….”
“이젠 나도…… 잘 모르겠어.”
백천은 그제야 알았다. 청명의 작은 어깨가 무너지고 있음을.
차마 보지 못한 백천이 눈을 감았다.
‘기대고 있었구나.’
청명의 강인했던 등이 한없이 위태롭게만 보인다. 그러나 받쳐 주고 싶어도, 이제 백천에겐 힘이 없다.
잃지 말아야 할 걸 잃는 바람에 갈 길을 모르고 멈춘 이는…… 비단 백천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