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44화
1744화. 보이지 않습니다. (4)
사라락.
얼기설기 엮인 종이가 빠르게 넘어간다.
임시로 차려진 집무실에서 연신 서류를 뒤적이던 호가명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모자라.’
군량이 부족하다. 보급 역시 마찬가지다.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하고 있지만, 강남에서 이 먼 하남까지 군량을 충분히 조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강호인이 아닌 군이 이만한 원정을 계획했다면, 사실상 전장에 투입되는 수보다 보급에 더 많은 병력을 할애했어야 정상일 상황이다.
호가명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지그시 눌렀다. 제대로 된 보급부대도 없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찌익.
넘기는 손길이 거칠어서인지, 값싼 종이로 만든 보고서 귀퉁이가 길게 찢겨 나갔다. 이를 빤히 보던 그는 보고서를 내려놓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보다 더 나쁜 건, 강남에서 군량 징발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단 점이었다.
그 말인즉, 자리를 비운 순간부터 강남에 대한 사패련의 지배력이 급속도로 사그라들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예상 못 했던 바는 아니나, 생각보다 너무 급하다.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결국 사패련의 근간이 뒤흔들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째서…….’
호가명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사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너무 간단한 방법이 존재한다.
‘약탈.’
인근 양민들에게서 식량을 갈취하는 것만으로도 코앞의 문제는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
이에 껄끄러움을 느낄 만한 자가 사파에 몸담을 리 없다. 장담컨대, 명이 떨어지기만 하면 호가명도 놀랄 정도의 속도로 군량이 쌓일 것이다.
물론 철저하게 관리한다고 해도 다소간의 희생이야 벌어지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할 일이다.
문제는 그 방법을 분명히 알고 있을 장일소가 허락을 안 한다는 점이었다.
‘련주님.’
지금까지는 호가명 역시 장일소의 뜻에 공감했다. 사도가 그간 천하를 손아귀에 넣지 못한 이유는, 지배가 아닌 군림만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무인들도 결국에는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이다.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민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양민들을 보호한 장일소의 조치는 분명 틀리지 않았다. 그 조치가 사패련이 강북으로 진격할 힘의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젠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지금은 힘을 모을 때가 아니라, 모조리 끌어모아 터뜨려야 할 때다. 어느 정도 부작용을 감수하고라도 최고의 전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럴 때마저 약탈을 허락지 않는 것인가.
선의 때문에? 웃기는 소리다.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그간 장일소의 손에 죽어 간 양민이 몇인지 헤아릴 수도 없다. 심지어는 제 아래서 목숨 바쳐 싸우던 수하의 목숨마저도 필요하다면 웃으며 거두는 이가 장일소다.
그의 눈에 세상을 채운 무지렁이들은 벌레나 다름없다. 그리고 평소 개미를 죽이지 않기 위해 걸음을 조심하는 사람도 등 뒤에서 범이 쫓아온다면 발밑을 보지 않고 달리는 게 당연하다.
호가명은 장일소의 단호하던 눈빛을 떠올렸다. 비단처럼 매끄럽고 부드러우면서도 이견을 허락지 않는 차가운 눈을.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한번 말씀을 드려야겠군.’
장일소가 달가워하지 않으리란 건 알지만, 호가명으로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결심을 굳힌 호가명이 몸을 일으킨 참이었다.
“군사!”
돌연 천막 입구가 격하게 젖혀지며, 부관 하나가 다급히 들어왔다. 호가명이 차갑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혀, 혈궁이 진지를 이탈했습니다.”
“……뭐?”
생각지 못한 보고에 호가명의 얼굴에도 의문이 스쳤다.
“혈궁주는 무엇을 하고?”
“그 혈궁을 이끄는 이가 혈궁주인 것으로 보입니다.”
순간적으로 호가명의 눈이 싸늘해졌다.
‘직접?’
이미 진지를 이탈하지 말라는 명이 사패련주의 이름하에 떨어져 있다. 그런데 혈궁주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진지를 이탈했다?
이는 대놓고 항명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호가명은 평소보다도 더 냉정해졌다.
급박한 상황임에도 그가 깊은 침묵에 빠져들자, 불안한 기색으로 기다리던 부관이 슬그머니 재촉했다.
“군사?”
“기다려라.”
혈궁주를 쫓아가는 일이야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작정하고 일을 저지른 이상, 다른 사람의 말 같은 건 의미 없을 것이다.
일전의 실패로 호가명의 위상이 추락한 지금은 더더욱.
위상 따위야 아무래도 좋지만, 혈궁주를 대면하고도 그를 제어하는 데 실패한다면 사패련에 대한 련도들의 불신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이를 뻔히 알고 움직이는 거겠지.’
호가명이 손끝으로 서류 위를 톡 쳤다.
장일소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도 의미 없다. 혈궁이 이미 명령을 어긴 이상, 장일소가 나선다면 반드시 그에 따른 치죄를 해야 한다. 권위란 본디 그렇게 유지되는 것이므로.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혈궁에게 박하게 굴기도 어렵다. 지금의 사패련이 그 뒷일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을 테니.
잠시, 하지만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간 뒤에야 호가명이 입을 열었다.
“……사람을 보내 움직이는 이유를 알아내라 해라.”
“예? 하지만 군사…….”
“……두 번 말해야 하나?”
호가명의 싸늘한 시선에, 부관이 화들짝 놀라 부복했다.
“즉시 이행하겠습니다.”
곧장 밖으로 뛰쳐나가는 뒷모습을 흘끗 본 호가명은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방금 자신의 명령이 아무 의미도 없는 요식행위라는 걸 안다. 그러나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었다.
‘위태롭군.’
제멋대로 움직이는 혈궁, 련주에게 악감정을 품은 태양궁주, 거기에 호가명을 뼛속 깊이 증오하고 있을 하오문주까지…….
사패련의 기틀이나 다름없는 만인방과 별 탈 없이 흡수한 흑귀보의 힘이 아니었다면 당장 사분오열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이런 상황에 호가명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장일소의 대단한 장악력과 혈교 역시 정도에게 추격당해 죽는 결말은 바라지 않을 거란 어설픈 믿음뿐이었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곡예를 하는 기분이 딱 이렇지 않을까.
“후.”
호가명이 숨을 한차례 내뱉으며 이마를 매만졌다. 일단은 련주께 보고부터…….
펄럭.
그런데 불청객이 또 하나 찾아왔다. 누군가가 호가명의 천막을 열며 들어온 것이다. 기척을 느낀 호가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입지가 좁아졌다고는 하나, 그는 여전히 사패련의 군사다. 이렇게 무례한 대우를 감내해야 할 위치는 결단코 아니다.
‘감히.’
혈궁의 일까지 들은 참이라 겹겹이 쌓인 화가 순간적으로 치밀었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선 이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호가명은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
“……무슨 일이지?”
검은 무복과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불청객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허리춤에 걸린 싸구려 철검만이 끼긱끼긱 거슬리는 쇳소리를 흘려 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호가명이 다시 물었다. 복면인은 이번에도 말없이 시선만 던져 왔다. 텅 빈 듯한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호가명은 오랜 세월 장일소를 모셨고, 지금껏 혈로(血路)를 걸으며 사파의 숱한 짐승들을 죽여 왔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 복면인의 시선에서 섬뜩함을 느꼈다. 딱히 대단하거나 노골적인 증오도 담겨 있지 않건만, 호가명의 경험으로도 쉬이 가늠하기 힘들 만큼의 냉기가 흘렀다.
복면인이 마침내 입을 뗐다.
“전서.”
“……뭐?”
“전서가 올 날이 지났다.”
“…….”
호가명이 복면인을 빤히 보다 문득 제 책상 위를 들춰 보았다. 이내 먼지가 앉은 봉투 하나를 찾아 들고 복면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무래도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군.”
복면인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용건이 없다면 굳이 호가명과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이다. 얼핏 불쾌감이 드는 행동이지만, 호가명 역시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그가 손에 쥔 봉투를 던지듯 건넸다.
탁.
날아온 봉투를 받아 든 복면인은 그 자리에서 봉투 입구를 찢었다. 그러더니 안에 든 전서를 거의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눈 한 번을 깜빡이지 않고 읽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복면인이 전서를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호가명을 일별하더니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루가 늦었다.”
“착오가 있었다고 말하지 않았…….”
“다음에도 같은 일이 생기면, 그땐 네 목이 제자리에 있을 거란 기대는 버려야 할 거다. 네 주인의 목도 같이 잘라 주지. 명심해라.”
호가명의 두 눈에 시린 냉기와 조소가 흘렀다.
“그래, 받아 주지. 제때 밥을 주지 않는다고 짖는 개를 걷어차는 건 좋은 주인의 역할이 아니니까.”
“…….”
복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멸시 어린 눈길만 잠시 주다 몸을 돌렸다.
그가 천막을 나서기 전, 호가명이 덧붙였다.
“하지만 개에게도 지켜야 할 본분이 있는 법. 밥을 주지 않는다고 화를 낼 수는 있지만, 밥을 먹고 나면 개답게 꼬리를 쳐야지. 같잖은 자존심을 지킬 게 아니라.”
복면인이 느리게 호가명을 돌아보았다. 눈에서 새파란 살기가 흘러나왔다. 들끓는 증오가 얼핏 보아도 범상치 않았다.
하나 호가명은 그 시선을 받으면서도 태연히 입을 열었다.
“잊지 마라. 이건 너희가 원했던 거래다.”
“…….”
“아니던가?”
그 말에 복면인이 완전히 다시 호가명의 정면을 보고 몸을 돌렸다.
삽시간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천막을 가득 메웠다. 당장 누구 하나가 검을 뽑아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팽팽했다.
하지만 잠시 후, 복면인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아주 깊게. 어떠한 트집도 잡히지 않겠다는 듯 과한 움직임이었다.
호가명은 꼿꼿하게 선 채 고개 숙인 복면인의 등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과장된 인사를 끝으로 다시 느리게 몸을 일으킨 복면인은 이내 천막을 휙 빠져나갔다. 팽팽히 당겨졌던 긴장이 한순간에 툭 풀어졌다.
호가명은 하, 짧게 숨을 뱉었다.
놈을 자극하는 건 위험하다. 하지만 이를 감수한 대가로 한 가지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신뢰할 수 있다’라는 것.
어처구니없지만, 저들은 믿을 만하다.
적어도 이 거래가 끝날 때까지는, 완벽한 아군이 되어 줄 것이다. 어떤 일을 겪는다고 해도 말이다. 저들이 이 거래로 얻어 낼 대가가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들이 배신하지 않는 이상, 이 전쟁의 우위는 여전히 그들이 잡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장일소가 알려 주지 않았던가.
위태로운 상황을 수습하는 게 어렵다고 해도 문제 되지 않는다. 적의 상황이 이쪽보다 더 위태롭다면 승리는 결국 이쪽의 차지가 될 테니.
그러기 위해서는…….
호가명의 눈빛이 일변했다.
“혹시 몰라 준비해 둔 것이 설마 이렇게 쓰일 줄은…….”
이래서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다.
도로 자리에 앉은 그가 붓을 잡았다. 하지만 시선은 책상에 펼쳐진 종이가 아닌, 앞으로 뚫린 창 너머로 닿아 있었다.
무당산. 그의 적이 머무르는 곳이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했던 건지도 모르겠군.”
호가명의 두 눈이 완전히 냉정함을 되찾았다.
붓을 쥔 손이 상처를 헤집는 칼처럼 글귀를 써 내려간다. 전서(傳書)라는 이름을 한 비수가 날카롭게 벼려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