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45화
1745화. 보이지 않습니다. (5)
저벅.
천막을 나선 복면인의 발길이 진지 밖으로 향했다.
사패련에 소속된 모든 무인은 상부가 규정한 영역을 벗어날 수 없게 되어 있다. 하지만 복면인에게는 딱히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진지의 경계로 다가가는 그에게로 몇몇 시선이 쏘아졌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의 행색을 확인한 시선들은 모였던 만큼이나 빠르게 흩어졌다.
이를 모두 느끼면서도 복면인은 작은 반응 하나 보이지 않았다. 무시하는 것도, 무감(無感)한 것도 아니다. 그저 무의미하게 느껴질 뿐이다.
복면인의 걸음은 너른 평원을 가로질러 작게 솟아 있는 산으로 향했다. 한참 산의 깊은 곳까지 들어간 그의 앞에 천막 몇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패련이 차린 진지와는 무척이나 동떨어진 곳. 어쩌면 사패련의 무인 중 대다수는 이런 숙영지가 주변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것이다.
어두운 눈으로 천막을 응시하던 복면인이 가장 앞에 있는 천막의 입구를 열고 들어섰다.
얼굴을 안으로 들이밀기 무섭게 쾨쾨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인간의 해묵은 악취, 썩은 피가 말라붙어 가는 냄새, 잘 관리되지 않은 쇠에 내려앉은 녹 냄새까지 제멋대로 뒤섞여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시간이지만, 천막 안은 어두침침했다.
복면인의 시야는 아주 천천히 어둠에 익숙해졌다.
곳곳에 대충 깔린 거적때기와 그 위에 몸을 누인 이들이 보인다. 인기척을 이미 느꼈을 텐데도 누구 하나 시선조차 보내지 않는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나직한 숨소리만이 그들이 살아 있음을 알렸다.
이 광경을 본 대부분은 패잔병의 막사, 혹은 포로가 갇힌 뇌옥 따위를 떠올릴 것이다. 심지어는 복면인조차 그렇게 생각하므로.
저벅.
복면인이 탁한 공기를 느끼며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시선도 주지 않는 이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잠시.”
잠깐 주목해 달란 뜻이었건만, 그 말에 호응하는 이는 없었다.
“……전서가 도착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는 확실히 반응이 있었다. 시체인지 산 사람인지 구분도 안 될 만큼 미동 없던 이들이 천천히 복면인에게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그들은 더러운 무복 차림에 저마다 시커먼 복면을 얼굴에 뒤집어썼고, 복면에 뚫린 구멍을 통해 텅 비어 버린 듯한 눈이 드러나 있었다.
복면인이 품에서 꺼낸 전서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에게로 던졌다.
“딱히 문제는 없더군.”
“…….”
전서를 받아 든 자가 말없이 그 내용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무심한 손길로 다음 사람에게 전서를 넘겼다.
느릿한 손동작이었다.
전서를 넘기는 이에게도, 받아 드는 이에게도 흥미로운 기색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전서를 읽고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이 과정은 끊길 듯 끊기지 않았다.
모든 이가 전서를 확인하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으로 전서를 읽은 자가 전서를 다시 접어 처음의 복면인에게 건넨다.
전서를 돌려받아 갈무리한 중앙의 복면인은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몸을 돌렸다. 다른 천막에 있는 이들에게도 이 전서를 보여야 할 의무가 있으니 말이다.
그런 복면인의 발길을 잡은 것은 누군가가 흘린 작은 소리였다.
“쿡.”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돌아본 복면인이 얼핏 차가운 시선을 던졌으나, 정작 웃음을 흘린 이는 동요하지 않았다.
“모르겠군요.”
다만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생기 없는 목소리라는 표현이 조금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아니면…….”
뒷말은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올 말이 무엇이었을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이 하고 싶나?”
“아니요. 그저 웃음이 나왔을 뿐입니다. 이걸로 또…… 한동안은 저놈들의 개 노릇을 이어 가야 할 테니 말입니다.”
복면인의 눈가가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다행이죠. 너무 다행 아닙니까?”
“입 닫아라.”
“왜 그러십니까? 다행이라는데. 아니면 혹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거적 위에 앉아 있던 이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설마 아쉽기라도…….”
“놈!”
파앙!
순간적으로 뽑혀 나온 검이 섬전처럼 허공을 격해 말하던 이의 목 쪽으로 파고들었다. 복면 아래로 드러난 목에 날카로운 검 끝이 닿으며 피 한 방울이 조르륵 흘러나왔다.
그러나 정작 목에 검이 닿은 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배짱이 두둑해서가 아니다. 그저 지금 당장 목이 달아난다고 해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 눈빛에 밴 지독한 허무를 읽어 낸 복면인은 입술을 짓깨물며 검을 회수했다. 그러고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획 몸을 돌리며, 결국 참지 못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따위 말을 지껄여 봐야 바뀌는 건 없다. 선택을 강요한 이는 누구도 없어.”
또다시 나직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비웃음이 아닌 자조 어린 웃음이었다.
“다음 전투는 언제입니까?”
“……아직 모른다.”
“그렇군요.”
더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복면인은 알고 있다. 다음 전투를 묻는 저 말에는, 차라리 전투에서 목숨을 잃는 게 지금보단 나을 거라는 속내가 담겨 있음을.
“죽는다고 해서 끝나는 일이던가? 그리 간단한 일이었다면, 이 복면을 뒤집어쓰지도 않았겠지.”
몇몇이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복면인의 입에서도 끝내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온다.
“우리에겐 떨어질 지옥조차 없다. 알고 있을 텐데.”
“…….”
“아무 생각하지 마라. 머리가 복잡하면 잠이라도 더 자 둬.”
등 뒤로 날 선 시선과 절망의 탄식이 쏟아지는 걸 알면서도, 복면인은 철저히 무시하고 천막을 나섰다.
햇볕이 얼굴로 갑작스레 쏟아졌다.
따가운 볕을 느끼며, 그는 얼굴에 뒤집어쓴 복면을 매만졌다. 빛이 닿지 않았으면 했다. 누구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게.
‘얼마 남지 않았어.’
아니……. 정말 그럴까?
이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끝날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정말 끝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할까?
그는 고개를 숙였다. 굽어보는 하늘을 피하며 다음 천막을 향해 발을 옮겼다.
저 먼 곳에서부터 먹구름이 아주 느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를 하늘에게서 숨겨 주기라도 하려는 듯.
* * *
“여긴 없습니다.”
“그렇겠지.”
딱히 실망한 기색도 없는 대답을 툭 내던진 제갈종효(諸葛從效)의 얼굴에 얼핏 짜증이 어렸다.
이 의미도 없는 수색을 대체 며칠이나 이어 갈 생각인가. 무당산을 모두 뒤졌더니 이제는 주변의 민가를 뒤지라는 명까지 떨어졌다.
이 넓은 세상에서 사람 하나를 정말로 찾아낼 셈인가?
“이만큼 찾아도 없는 걸 보면 이미 멀어지고도 남았겠지.”
“하지만 이상하잖습니까, 형님. 무공을 잃은 사람인데…….”
“그래도 화산의 장문대리였던 사람이다.”
“어차피 무공이 없으면 똑같잖습니까?”
“말조심해라.”
“……죄송합니다.”
차게 일갈하긴 했지만, 내심 제갈종효의 생각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백천이라.’
화산정검 백천. 그토록 명성 높은 화산오검의 수장이자, 화산의 다음 장문인으로 내정되어 있던 이. 어쩌면 이 강호에서 가장 빛나는 미래가 보장되어 있던 검수다.
‘안되긴 했지.’
상부가 이런 무리한 짓을 해 가며 백천을 찾으려 하는 것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건 낭비에 지나지 않아.’
과거에 아무리 대단했다 한들, 이제는 무학을 잃은 한낱 양민에 불과하다. 그런 이를 찾아서 대체 뭘 하겠다는 것인가.
아니, 설령 그가 무학을 잃지 않았다 해도 마찬가지다.
사패련과의 대전(大戰)을 앞둔 상황에 고작 한 사람의 행적을 찾기 위해 사람을 이렇게나 동원하는 건 지나친 낭비다. 그 한 사람으로 전황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후우.”
제갈종효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옆에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왜?”
“이제 슬슬 포기하자고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희야 발언권이 없지만, 가주님도 상황은 이해하고 계실 게 아닙니까?”
제갈종효는 대답하지 않았다.
“말은 안 해도 다들 불만이 적지 않습니다. 굳이…….”
“그럼 계속 입을 다물면 된다.”
“형님.”
“쓸데없는 짓거리 하지 말고 다시 찾아봐라.”
“……예.”
제갈종효는 티 나지 않게 한숨 쉬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멍청한…….’
그런 직언 따위야 벌써 몇 번이고 했다. 가주 역시 알고 있다. 이게 무의미한 짓임을.
그럼에도 강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 소모적인 수색에 가장 적극적인 곳이 바로 화산과 종남이기 때문이다. 당가조차도 은연중에 그들을 지지하고 있고 말이다.
천우맹에서 가장 발언권이 큰 세력들이 한목소리를 내는데, 오대세가의 잔당으로 천우맹에 뒤늦게 합류한 제갈세가의 목소리가 먹힐 리 없다.
“조금만 더 하면 된다.”
“…….”
“하루 이틀만 더 고생하면 저들도 이게 아무짝에도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게 될 테니.”
“그걸 알 만한 사람들이 이러겠습니까?”
“적어도 우리에게 강하게 말할 명분은 생기겠지.”
사촌인 제갈동인(諸葛同因)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예, 예. 알겠습니다. 의미 없는 짓이라도 일단 계속하자는 말씀이시군요.”
“…….”
“솔직히 이게 예전 구파에서 하던 짓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천우맹은 조금 낫다 해서 기대했더니.”
“……입이 화를 부른다.”
“알겠다니까요.”
제갈종효가 짧게 혀를 찼다.
물론 그 말이 영 틀린 건 아니다. 과거의 천우맹은 분명 이렇지 않았다. 구파와 함께하던 때도 내심 천우맹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하지만 지금의 천우맹에서는 과거 같은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비대해진 연맹은 반드시 같은 길을 가게 되는 걸까?
‘아니. 원인은 따로 있겠지.’
과거 천우맹이 천하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을 때는 분명…… 한 사람의 이름이 늘 함께 울렸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이름이 잘 들리지 않는 느낌이다.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천우맹이라는 곳에서 활력이 사라지고, 답답해하는 이들이 늘어난 게.
‘화산검협 청명.’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백천의 일로 가장 날뛰어야 할 이가 그일 텐데, 이상할 만큼 조용하다.
큰 무리를 이끌다 보니 사람이 변한 걸까? 아니면…….
이리저리 생각해 보던 제갈종효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짐작만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선은 맡은 일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그는 머리를 비운 채 묵묵히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붉은 눈동자가 번뜩이고 있었다.
혈교주는 마을에서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고작 둘이서 산 아래를 활보하다니.
“딱히 대단한 경계까지 바란 건 아니지만, 이건 숫제 무시당하는 기분이군.”
사패련이 절대 공격해 오지 않을 거라 여겼나? 그게 아니면 그 백천이라는 놈을 찾는 게 그보다도 중요하단 걸까?
“교주님, 명령을.”
“음.”
혈교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상식적으로 볼 때는 함정일 확률이 높다. 천우맹에도 머리깨나 쓰는 놈들이 제법 있으니까.
하지만…….
“나쁠 것도 없지.”
타초경사(打草驚蛇)라, 풀을 두드리면 뱀이 나오는 법이다.
“이왕 두드릴 거면, 확실히 해야 하지 않겠나.”
혈교주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눈에 띄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라.”
“예!”
그가 끌고 온 교도들이 독 품은 뱀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지켜보는 혈교주의 두 눈이 붉게 이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