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46화
1746화. 화풀이라고 해도 좋아. (1)
사천당가의 가주 당군악이 앞에 정좌한 이를 바라보았다.
“맹주님.”
현종. 화산의 태상장문인이자, 천우맹의 맹주.
조금 어색한 건, 둘 사이에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다는 점이다.
현종은 설령 마교의 마두를 만난다 해도 차 한 잔은 권할 거란 말이 농담처럼 돌 정도의 인물이다. 천우맹 내에서는 다정노군(茶情老君)이라는 친애 가득한 호칭도 생겨났다고 하지 않던가.
다정(茶情)이면서, 동시에 다정(多情).
하지만 그런 현종이 당군악에게 차 한 잔 권하지 않고 있다. 지금 현종이 얼마나 깊은 시름에 잠겨 있는지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당군악은 그 마음을 짐작하면서도 맹주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할 참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당군악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더는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수색을 중지해야 합니다.”
침묵하던 현종이 당군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점차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
“안타까운 마음은 당연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장문대리……. 아니, 진가의 진동룡이 마음먹고 모습을 감췄다면 쉽사리 찾아낼 수 없을 겁니다. 그의 능력은 맹주님께서 가장 잘 아시잖습니까?”
말을 하면서도 당군악은 지그시 감정을 눌렀다.
그라고 왜 안타깝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은 이 모든 것을 접어 두어야 할 때다.
“천우맹은 연맹입니다.”
“…….”
“누군가는 장문대리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지만, 누군가는 관심조차 가지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 모두 수색에 내몰리는 건 좋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맹주님에 대한 원성으로 이어질지 모릅니다.”
당군악은 기나긴 한숨과 함께 눌러 왔던 말을 끄집어냈다.
“그러니 이제 결단을…….”
그때, 내내 침묵하던 현종의 입꼬리에 씁쓸한 미소가 얼핏 스쳤다.
“괴이하지요. 자랑은 아니겠으나…… 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그 녀석을 찾으라는 명을 내린 적 없습니다.”
당군악은 순간 입을 닫았다. 확실히 그럴 것이다. 그 증거로 화산은 지금까지도 수색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
“수색을 시작한 건 타문의 장문들 뜻이었습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천우맹은 각 문파가 모인 연맹이고, 그렇기에 맹주가 독단적으로 모든 일에 결정권을 행사할 순 없다.
목숨이 달렸거나 강호의 운명이 걸린 급박한 일이라면 강제권을 행사할 수 있을지 모르나, 사람을 찾는 등의 사소한 일을 하라 마라 강제하기는 어렵다는 소리다.
“그런데…… 저지르지도 않은 일을 수습하는 건 저의 몫이군요.”
당군악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순간만은 직위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 현종을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지금 상황에는 사치다.
“위에 선다는 건 본디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
“맹주님께서 직접 내린 명이 아니라고는 하나, 수색하는 이들은 당연히 맹주님의 명이라 생각할 겁니다. 이 일이 진동룡과 연관되어 있으니 더욱 그렇겠지요.”
당군악이 짧게 탄식했다.
“원치 않는 일을 하는 이들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그저 원망할 대상을 찾기도 하니까요.”
사람으로서는 이 상황이, 현종이 안타까웠다.
적어도 현종은 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이 일로 가장 상처 입었을 이에 대한 수색을 중지하자고 현종이 스스로 말해야 한다니.
심지어 내린 적도 없는 명령을 거두기 위해 고개 숙여야 하는 상황이다.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맹주님.”
“그리하지요.”
생각보다 선뜻 나온 대답에 당군악은 다소 놀라고 말았다.
“……그리하면 될 일이지요.”
현종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그 바람에 당군악은 되묻고 말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우습지만 말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찌하겠습니까. 이제 무엇이 옳은지 스스로 알 수 없으니, 누군가 옳다고 하는 것을 믿을 수밖에.”
당군악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맹주님.”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알고 보니 제가 스스로 무언가를 이룬 적이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 것뿐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모두 아이들이 한 것이었지요. 아이들이……. 백천이 그 아이가 이루었지요.”
당군악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쥘 뿐.
“그런데도 저는 제가 그 아이들보다 나은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 믿었습니다.”
공허한 헛웃음이 현종을 스친다.
“내 무능을 잊었던 거지요. 제가 한 일이라고는 그저 그 아이들이 해낸 일에 기대어 온 것에 불과하거늘. 연륜이란 말이 늙은이의 도피처는 아닐진대, 저는 그 말로 자신을 속여 왔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맹주님.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것뿐입니다.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일입니다.”
얼굴을 굳힌 당군악이 진지하게 말했다. 생각한 이상으로 현종의 상심이 큰 모양이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아직 적이 멀지 않은 곳에서 칼날을 번뜩이고 있는데, 수장이 이래선 곤란하다.
당군악이 무슨 말이라도 하려는데, 현종이 먼저 입을 뗐다.
“가주님. 맹주 자리를 맡아 주십시오.”
“매, 맹주님!”
너무 당황한 나머지 당군악은 벌컥 소리치며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러나 현종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게 맹을 위해서도 옳을 것입니다.”
일단 진정하라는 말을 하려던 당군악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진정하라고? 저 말이 정말로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한 말일까? 저 가라앉은 눈에 조금의 흥분이라도 엿보이는가?
“……맹주님. 우선은…….”
“분에 넘치는 자리였단 건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괜찮다 하니 그런 줄만 알았지요. 나 자신을 속여서는 안 되었는데.”
“…….”
“그리해 주십시오. 지금이라도 그리해야 합니다.”
당군악이 깊게 탄식하는 찰나였다.
갑자기 밖이 어수선하게 소란스러워졌다. 당군악은 슬쩍 눈살을 찌푸리다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멈칫했다.
혹시 백천의 자취라도 발견한 것일까?
“잠시.”
당군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너른 연무장에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의 안색만 보아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무슨 일…….”
“당주님! 스, 습격입니다!”
당군악이 질문을 채 끝맺기도 전에 비명 같은 소리가 날아들었다. 순간 눈을 부릅뜬 당군악은 날카롭게 물었다.
“습격이라니?”
“수색을 나갔던 이들이 지금 습격당하고 있습니다. 빠, 빨리 지원을……!”
사패련이 습격을 해 왔다고? 그들이, 이런 상황에서?
“적의 수는! 파악했느냐?”
“당장은 습격당하고 있다는 연락만 왔습니다. 상대의 수와 정체 모두 불명(不明)입니다!”
당군악의 얼굴색이 급변했다.
‘전면전인가? 아니면…….’
적의 수를 파악하지 못했으니 벌어질 전투의 규모를 짐작할 수 없다.
‘아니, 전체가 움직였다면 몰랐을 리 없다. 전면전은 아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가?
“당주님! 명을 내려 주십시오!”
당군악이 얼어붙은 듯 고심하던 그때였다.
“빌어먹을, 다들 따라와!”
“어쩌려고?”
“뭘 물어? 일단 지원하러 간다! 서둘러!”
“적이…….”
“먼저 갑니다!”
“야, 이 새끼야!”
소란이 벌어지는 곳을 향해 당군악이 획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보이는 건 뒷모습뿐이었다.
‘조걸?’
하지만 그 소란의 주인공이 조걸이라는 것쯤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산 아래로 쏘아지는 그의 뒤로 화산의 검수들이 따라붙어 있었다.
‘……그래.’
중요한 건 공격을 당하는 맹도들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천우맹의 전력 다수가 무당산을 수색하느라 곳곳에 흩어져 있다. 그런 마당에 적의 전력이 난입하게 된다면?
오싹.
상상만으로도 등줄기에 한기가 흘렀다. 어쩌면 지금껏 화산이 저 사패련을 상대로 했던 일을 거꾸로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안 돼!’
파멸과도 같은 일이다. 그도 그럴 게, 천우맹은 현재 보이지 않는 균열이 여기저기 생긴 상태다. 커다란 망치질 한 번이면 통째로 내려앉을지도 모른다.
“어디냐?”
“방현(房县) 쪽입니다!”
“무당 내 모든 당에 동원령을 내려라. 그리고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모두 습격받은 곳을 지원한다. 가라!”
“예!”
파앗.
당군악이 섬전처럼 산 아래 방향으로 쏘아졌다.
“먼저 가겠다! 지원을 서둘러라!”
“예!”
몸을 날린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일이 맹주님의 책임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암녹색 옷자락이 뿜어져 나온 경기로 거칠게 펄럭였다.
* * *
“습격이다!”
“사패련의 습격이다!”
제갈관외(諸葛觀外)의 얼굴은 새파랗게 굳어져 있었다. 땅을 박차 몸을 물리는 와중에도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어째서 여기에 사패련이?’
저들은 이미 한참 물러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갑자기 이곳에서 나타났단 말인가. 지난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아직 수습하기도 전일 텐데!
‘그럼 앞에 있던 녀석들은 어떻게 됐지?’
제갈관외는 이미 무당산의 영역에 들어서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제갈세가의 다른 식솔들은 그때까지도 산 아래의 마을 곳곳에 흩어져 수색을 벌이고 있었다.
적들이 여기까지 왔다면, 마을에 있던 식솔들의 목숨은 어찌 되었단 말인가.
제갈관외가 으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의 생사를 짐작할 때가 아니다. 당장 눈앞에 벌어진 일조차 대응하기 어려웠다.
“무, 물러나라, 물러나!”
제갈관외는 본래 쉽사리 후퇴를 입에 담는 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현재 그와 함께 있는 제갈세가의 인원은 불과 십여 명. 반면 달려들어 오는 저 섬뜩한 놈들의 수는 얼핏 보아도 이쪽의 세 배가 넘었다.
심지어 하나하나 풍기는 기세가 범상치 않다. 어설프게 맞서려다가는 버티지 못하고 모두 개죽음만 당할 것이다.
“물러나라! 지원이 올 것이다! 뒤로!”
제갈관외가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
하지만 평생 무학에 매진해 온 이들이라 해도, 견제하며 뒤로 물러나는 게 앞으로 무작정 달려드는 것보다 빠를 수는 없다.
물러나는 이들의 등 뒤가 가파른 산임을 고려하면 더더욱.
콰득!
“컥!”
“해야아아아!”
미처 적의 칼날을 피하지 못한 제갈해의 목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떠오른 머리가 빙글 돌았다. 그 얼굴에 아직 생생히 맺힌 혼란과 절망이 제갈관외의 두 눈에 새겨졌다.
“물러나! 맞서려 하지 마라! 희생은 어쩔 수 없다!”
가슴에서는 지독한 울분이 치솟았지만, 제갈관외는 생각과는 다른 말을 토했다. 하나라도 더 살려야 하니까.
파앗!
두 명의 혈의인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몸에 두른 의복이 펄럭이며 갈고리 같은 짧은 기형도(奇形刀)가 드러났다. 섬뜩한 빛이 번쩍였다.
카앙!
제갈관외가 얼굴로 쇄도해 오는 기형도를 장검으로 쳐 내었다.
카가가각!
하지만 기형도는 쉽사리 물러나지 않고 순식간에 다시 제갈관외의 검에 달라붙어 섬뜩한 마찰음을 내었다.
“하압!”
투웅!
제갈관외가 내력을 순간적으로 훅 끌어 올려 혈의인을 밀쳤다. 빈틈을 노린다거나 할 생각은 꿈에도 없었다. 지금은 섣불리 맞설 때가 아니라 달아날 때였다.
제갈관외가 다시 뒤로 몸을 날리려는 찰나, 혈의인의 기형도가 한 발 더 빠르게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이익!”
제갈관외가 몸을 뒤틀며 검을 올려 쳤다.
목표는 기형도가 아닌, 그 기형도를 쥔 혈의인의 팔이었다.
콰득.
이내 검이 혈의인의 팔에 박혔다. 하지만 그 순간 제갈관외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뭐?’
사람을 벤 느낌이 아니었다.
굳이 비슷한 걸 찾자면, 질기디질긴 아교에 검을 찔러 넣은 듯했다. 질겅거리고 둔탁했다.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괴이한 감각이었다.
서걱!
제갈관외가 멈칫한 틈을 놓치지 않고 혈의인의 기형도가 그의 옆구리에 박혀 들었다.
“아아악!”
비명이 절로 터져 나온다.
단순히 찔리는 고통과는 달랐다. 불규칙한 날이 상처를 헤집고, 날에 길게 파인 혈조(血漕)로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왔다.
쾅!
제갈관외가 반사적으로 발을 뻗어 적을 걷어찼다. 뒤로 밀어 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반동으로 그 역시 땅에 나뒹굴어야 했다.
“허억! 허억! 으……. 으아…….”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옆구리에 뚫린 상처를 움켜잡았다.
“아아아악!”
“크아악!”
이 순간에도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엎어진 몸을 어떻게든 일으키며 주변을 살폈다.
“아…….”
어느새 친지들이 처참한 꼴로 널브러져 땅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질긴 놈이군.”
“으…….”
제갈관외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심장을 뽑아 갈까?”
“나쁘지 않군. 적당한 제물이 되겠어.”
그의 두 눈에 깊은 절망이 넘실거렸다.
‘혈궁.’
이들이 공격해 올 수 있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서둘러라. 다른 곳에 비해 뒤지면 교주께서 네 목을 뽑아 잔으로 쓰실 거다.”
“그러지.”
혈의인의 기형도가 다시금 섬찟한 혈광을 흘렸다.
“영광으로 알아라.”
쇄애액!
제갈관외가 반사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동시에 알았다.
이건 막을 수 없다.
삶의 끝을 직감한 그는 두 눈을 부릅떴다. 죽더라도 한심하게 죽지는 않겠다는 각오였다.
덕분에 제갈관외는 볼 수 있었다.
그에게 날아들던, 그로서는 떨쳐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괴이한 기형도가 단숨에 반으로 갈라지는 광경을 말이다.
‘……어?’
붉은 검기가 환영처럼 눈앞을 질러 갔다.
적들이 몸에 두른 핏빛과는 다르다. 훨씬 더 선명한 색의 검기가 기형도를 가르고 혈의인의 몸에 박혔다.
콰아아앙!
검기에 실린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적중된 혈궁도의 몸은 말 그대로 터져 나가고 말았다. 육편이 좌우로 포탄처럼 튀었다.
“아…….”
저벅. 저벅.
이윽고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제갈관외는 천천히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리고 뒤에서 다가오는 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제갈관외는 깨달았다.
‘화산…….’
눈앞에 적이 있되, 이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검협?’
저벅.
제갈관외를 스치고 앞으로 나선 청명은 얼음장 같은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숨이 끊긴 이들과 부상으로 신음하는 이들, 그리고 주춤거리며 그를 경계하는…….
“운이 없네.”
카각.
청명의 검 끝이 땅을 거칠게 긁었다.
“내가 지금 기분이 좋지 않거든.”
“매화검귀! 무, 물러…….”
“그러니…… 화풀이라고 해도 좋아.”
두 눈에서 섬뜩한 살기를 뿜어낸 청명이 화살처럼 적들을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