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49화
1749화. 화풀이라고 해도 좋아. (4)
화아아아악!
혈교도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그의 적이 존재했던 곳이 순식간에 붉은 꽃잎들로 뒤덮였다.
‘환술? 아니면 환검?’
어느 쪽이든 경악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잠시 멈칫했던 혈교도의 기형도가 재차 휘둘러졌다. 이전보다 더욱 강렬하게.
괴이하기 짝이 없는 검기다. 하지만 한눈에 보아도 검기에 실린 기운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저 괴이한 검기로 모습을 가린다 한들 그 뒤의 사람이 없어지는 건 아닐 테니, 검기째 베어 버리면 그만이다.
“죽어!”
하지만 그 순간, 윤종을 뒤덮었던 붉은 꽃잎들이 사방으로 휘몰아치듯 터져 나갔다.
파하아아앗!
‘뭐?’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덮쳐든 검기가 혈교도들의 몸을 꿰뚫는다.
서걱! 서걱! 서걱!
혈교도들이 꽃잎의 폭풍에 휩쓸려 뒤로 튕겨 나갔다.
고무처럼 질긴 육신. 검조차 잘 박히지 않는 그 몸뚱이를, 얇디얇은 꽃잎 같은 검기가 너무도 손쉽게 꿰뚫어 냈다.
터엉! 텅!
땅에 처박힌 이들이 바닥을 구른다.
“……후우.”
윤종이 한껏 낮췄던 자세를 다시금 바로잡았다. 호흡은 가쁘지 않았지만, 그의 이마를 타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강렬했다 한들 고작 일검에 불과하거늘, 금방이라도 탈진할 것 같은 탈력감이 육신을 지배했다. 마치 몸 안의 무언가가 통째로 빠져나간 것만 같이.
“흐으…….”
그때, 쓰러졌던 혈교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을 놈이. 잔재주를 부리기는.”
전신에 시커먼 구멍이 숭숭 뚫린 이들이 별것 아니라는 듯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윤종의 두 눈이 순간 암담해진다. 시커멓게 뚫린 구멍 사이로 문제의 그 촉수들이 꿈틀대고 있었다.
‘실패인가?’
알 수가 없다. 그 역시 자신이 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 내릴 수 없었으니까.
“마지막 발악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윤종과 마주 선 혈교도가 소매로 제 입가를 훔친다. 그의 볼에 뚫린 구멍에서 꿈틀대는 촉수들이 윤종의 속을 절로 메스껍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불신자들.”
상처가 채 모두 아물지도 않았건만, 몸을 일으킨 혈교도들이 재차 윤종을 압박하듯 다가가기 시작했다. 육신에 뚫린 구멍들을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그들의 모습이 윤종의 심중을 숨 막히게 조여들어 왔다.
“교의 은혜를 입지 않은 미물들은 우리를 당해 낼 수 없다. 일찍이 교에 귀의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느물대며 무어라 지껄여 대던 혈교도가 갑자기 말을 멈춘다.
“…….”
그만이 아니었다. 그와 보조를 맞춰 윤종을 포위한 채 거리를 좁혀 가던 이들도 일제히 발을 멈춘다.
‘뭐지?’
윤종의 눈이 당혹감을 머금었다. 하지만 혈교도들의 눈에는 그보다 더한 당혹감이 휘돌고 있었다.
“무슨……. 욱! 우웨에에에엑!”
중앙의 혈교도가 제 가슴을 움켜잡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입에서 한 사발은 될 것 같은 시커멓게 죽은 피를 토해 냈다.
“이……. 이게……? 우욱!”
연이어 또 한 번 피를 토한 혈교도가 경악한 눈으로 제 몸을 바라본다. 아물어 가던 육체가 다시금 피를 흘리기 시작한다. 마치 지금까지 그들이 보인 이적을 반대로 되돌리듯, 상처들이 빠른 속도로 악화되어 간다.
“교, 교의 축복이?”
혈교도의 눈이 더 흔들릴 수 없을 만큼 크게 요동쳤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처가 벌어져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보다 그를 보호하던 촉수들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 큰 충격인지, 혈교도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네놈! 무슨 짓을……. 우웨에에엑!”
혈교도가 다시 진득한 검은 피를 토해 낸다.
“허억! 허억! 허억!”
가쁜 숨을 몰아쉰 혈교도가 윤종을 다시금 바라본다. 그의 눈빛에 이전에는 없었던 두려움이 강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무언가 갈등하는 듯하던 혈교도가 입술을 강하게 짓깨문다.
“물러난다.”
“예? 하지만…….”
“물러난다!”
혈교도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윤종을 증오스러운 눈으로 노려본 이들이 느릿하게 뒷걸음질을 치더니, 이내 몸을 돌려 빠른 속도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거기……!”
반사적으로 그들의 뒤를 쫓으려던 윤종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침착하자.’
놈들이 더 이상 재생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면,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다. 윤종 혼자라 해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저들이 완전히 저 괴이한 능력을 잃었다고 판단하는 건 성급하다.
더구나 그는 지금 적을 쓰러뜨리러 온 게 아니잖은가.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한 윤종이 제 검을 바라본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검. 하지만 그 검에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것이 머물렀었다.
‘아니. 다르지 않다.’
선기가 무엇인지 아직 정확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 힘은 그의 안에 이미 머무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스르릉.
윤종이 검을 검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지금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괜찮으십니까?”
“어……. 아! 예!”
부상으로 전투를 바라보기만 했던 이들이 윤종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도장께서는 괜찮으십니까?”
“괜찮다기에는 좀 꼴이 사납지만……. 큰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천우맹도들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진다.
“부상을 돌봐 드려야 마땅하겠지만, 아쉽게도 지금 그럴 여유까지는 없을 것 같습니다. 힘드시겠지만, 이쪽에는 적이 더 없는 것 같으니 산을 올라 지원대와 합류하십시오.”
“예. 도장……. 아, 아니 부당주님! 부당주님은 그럼?”
“다른 곳을 지원해야죠.”
윤종이 검을 살짝 움켜잡았다.
선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뭐가 크게 달라진 건 아니다. 아직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이상하게 자신감이 좀 더 생겨난 기분이었다. 어쩌면 무언가 남다른 것이 그의 안에 이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
“조심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윤종이 정중하게 포권을 하고는 몸을 날렸다. 그의 모습이 빠르게 사라지자, 남아 있던 이들의 입에서 일제히 한숨이 흘러나왔다.
“괜찮으냐?”
“예. 형님. 그보다…….”
주저앉아 있던 이가 제 어깨에 난 긴 자상을 손으로 누르며 쓴웃음을 흘렸다.
‘우린 열에 가까운 인원으로도 도망치기 바빴는데.’
저 사람은 홀로 홀연히 뛰쳐 들어 모두를 물리쳐 버렸다. 그보다 오히려 어려 보이는 이가.
“화산오검. 윤종이라…….”
모를 수는 없다. 천우맹 내 다섯 당 중 하나의 부당주를 맡고 있는 이. 천우맹도가 그를 모른다면 사패련의 간자로 여겨 목을 베어 버려야 할 정도니까.
하지만 그가 아는, 그리고 세상이 말하는 윤종은 오검 중에서도 무학으로는 딱히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 그저 배분과 학식으로 오검의 명성에 묻어 가는 이였건만.
‘저 사람이?’
헛웃음이 흐른다. 저 사람이 오검에 묻어 가는 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이들이 오검쯤 되니 저런 이가 딱히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이리라.
“세상의 소문이 얼마나 믿을 게 못 되는지 뼈저리게 깨달은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한숨을 내쉰 천우맹도들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혹시 적이 다시 올지 모르니, 우선은 윤종의 말대로 지원 오는 이들과 합류해야 한다.
“올라가자.”
“예.”
발을 떼던 이가 고개를 돌려 윤종이 멀어진 곳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건 뭐였을까?’
그가 보여 준 마지막 일검. 분명 그 검에 기이한 기운이 어려 있었다. 뭔가 따뜻하면서도 맑고, 또…… 상서로운.
“뭐 해?”
“갑니다.”
부상을 수습한 이들이 힘을 짜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제길! 빌어먹을!”
“똑바로.”
“아악! 말처럼 쉽지가 않단 말입니다!”
조걸이 쌍소리를 내뱉으며 검을 맹렬하게 휘둘렀다.
제압이라는 것은 적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게 아니라, 적이 공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놈들은 제 팔다리가 잘리는 건 물론이고, 심장에 검이 박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 놈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조걸의 능력으로는 시도나 겨우 해 볼 수준이다.
그럼에도 이들을 상대할 수 있는 이유는.
서걱!
“잘했어.”
“내가 뭘 했는데요?”
조걸이 아무리 개떡같이 적을 잡아 놓고 있어도, 언제 어떤 자세로도 정확하게 적의 목을 날려 버리는 유이설의 실력 때문일 것이다.
“피해.”
“제기랄!”
이미 늦었음을 직감한 조걸이 바닥으로 몸을 굴렸다. 그가 몸을 빼낸 자리에 수 자루의 기형도들이 틀어박혔다.
‘망할 놈들이!’
적이 하나라면 수월하게 상대할 수 있겠지만, 목을 단번에 잘라 내는 것 말고는 저지할 방법이 없는 놈들이 떼로 움직이고 있었다.
조걸의 등은 이미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지금이야 소규모 교전이니 어찌어찌 대처라도 할 수 있지만, 이런 놈들이 제대로 된 전장에 투입된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끔찍할 정도였다.
“숨이 거칠어.”
“안다고요. 젠장!”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조걸은 필사적으로 숨을 가다듬었다. 호흡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유이설에 비해 그는 지금 지나치게 격해져 있었다.
“……이놈들이 감히!”
혈교도들의 눈에서 새빨간 광망이 솟구친다. 목이 잘려 죽은 동료들의 시신이 그들의 흉성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실력은 별것 없는데.’
아니, 검술이나 도법이 실력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저 괴이한 몸뚱이를 일종의 ‘기공’이라 친다면, 저들의 실력은 대단한 편에 속한다고 평해야 할 것이다.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죽여 주마!”
놈들이 짐승처럼 으르렁대며 다가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성을 잃은 듯 보이지만, 둘을 조여 오는 발길에는 분명 신중함이 배어 있었다.
어설프게 달려들었다가는 목이 베일 테니, 한 번에 달려들 심산인 듯했다.
‘안 좋아.’
조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기형도는 스치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살을 파낸다. 하지만 그들은 오직 검을 휘둘러 적의 목을 일격에 날리는 수밖에 없었다. 적이 한 번에 덮쳐 온다면 처리하지 못하는 이가 생길 수밖에 없고, 그럼 저 기형도가 그들의 몸을 갈가리 찢어 놓을 것이다.
‘한두 사람만 더 있었어도……. 둘이 온 게 실수였어.’
급한 마음에 적의 역량과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게 패착이라면 패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논할 때가 아니었다.
“사고. 되겠습니까?”
“하면 돼. 될 수 있게.”
“……화산에서 제일 속 편한 사람은 난 줄 알았는데.”
요즘은 자꾸 그의 장기를 다른 이들에게 빼앗기는 기분이었다.
“온다.”
“제길!”
조걸이 검에 내력을 잔뜩 불어넣었다. 강검(强劍)은 그의 주력 분야가 아니지만, 저 질긴 목을 단번에 베어 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의 검은 유이설처럼 유려하지 못하니까.
“와 봐! 싹 다 목을 쳐 줄 테니까!”
조걸이 되레 바닥을 박차며 적들을 향해 달려들려 하는 순간.
파하아아앗!
“어?”
“음?”
그들의 머리 위로 수많은 매화 꽃잎들이 휘몰아쳤다.
“사, 사형! 소용없어요! 그런 건 안 통…….”
어느새 그들의 앞으로 뛰쳐 든 윤종을 발견한 조걸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저들에게 이런 검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이미 수없이 확인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때.
“크아아아악!”
“뭐, 뭐냐? 이건!”
잔뜩 기세를 올려 달려들려 하던 적들이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듯 제 몸뚱이를 부여잡는다. 지금껏 저들에게서 들어 본 적 없는 끔찍한 비명을 질러 대며.
“……통하네?”
그들의 육신에서 그 지긋지긋한 촉수가 솟아오르지 않는 걸 본 조걸이 멍청하게 눈을 끔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