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50화
1750화. 화풀이라고 해도 좋아. (5)
“뭘 멍청하게 굴고 있어?”
“아, 아니……. 이럴 리가 없는데?”
조걸이 맹한 표정을 지으며 제 검과 윤종의 검을 번갈아 보았다.
이 양반이 그사이 어디서 좋은 검을 새로 구했을 리는 없다. 그럼 대체 무슨 방법을 썼길래 그와 유이설이 하나씩 처리하는 데도 개고생을 한 저 괴물 놈들을 저리 슥슥 썰어 버렸단 말인가.
“뭘 어떻게 한 겁니까?”
“설명하기 어렵다.”
“허, 가르쳐 주기 싫으면 그냥 가르쳐 주기 싫다고 하지!”
“아니, 정말 설명하기 어렵다니까. 그리고 이건 너도 할 수 있는 거다.”
윤종의 말에 조걸이 눈을 한껏 가늘게 떴다.
“이 양반…… 요새 성격 많이 꼬였다 싶었는데, 이제는 기어코 선을 넘으시네?”
“진짜라니까!”
윤종이 벌컥 화를 냈다가 아차 하고는 고개를 앞으로 획 돌렸다. 조걸의 장단에 맞춰 주며 말장난하기에는 아직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놈들이 선기에 약한 모양이더라.”
“선기(仙氣)요?”
“그래.”
“……그러니까, 지금 사형이 선기를 다룰 수 있다는 말입니까?”
“조금은 그런 모양인데, 아직은 나도 정확하게 어찌 쓰는지는…….”
“아이고, 세상에나. 화산에서 신선이 나셨네. 선기를 쓰신단다, 선기를.”
“…….”
윤종의 이마에 굵은 핏대가 불거졌다. 지금이 이리 깝죽댈 상황인가? 애초부터 되바라진 놈이니 청명이 놈을 만나고도 그리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여겼거늘, 아무래도 그의 판단이 틀렸던 모양이다.
그때, 잠자코 듣던 유이설이 물었다.
“선기?”
“예.”
“어떻게 쓰는 거지?”
“정확하게 풀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진 걸 끌어내는 느낌입니다. 도문의 생활을 해 온 우리에게 선기란 이미 쌓여 있는 기운과도 같으니까요.”
그 말에 유이설이 대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어.”
윤종은 조걸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유이설을 보았다. 사실 속세에 미련을 두지 않고 도가의 생활을 우선시한다는 면에서 보자면 유이설만큼 도에 가까운 사람도 없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윤종의 말을 쉬이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럼 이렇게.”
짧은 말과 함께 유이설의 몸이 퍽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러더니 이내 당황한 기색을 여태 숨기지 못한 혈교도의 코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파앗!
그녀의 검이 섬전처럼 한차례 번뜩이고, 혈교도의 목이 단번에 그어졌다. 목젖 부근이 갈라지며 새빨간 혈선이 피어났다.
쩌억.
지켜보던 윤종이 막 주먹을 움켜쥐려는 순간.
쉬이이익!
갈라진 목에서 다시 촉수 수십 다발이 뿜어져 나오며 상처를 수복하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유심히 본 유이설이 몸을 뒤로 살짝 돌려 윤종을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안 되는데?”
“으아아아아! 이 미친 사고야! 앞을 봐야……!”
콰아아앙!
유이설이 서 있던 자리에 흙먼지가 비산했다.
혈교도가 손을 내리친 순간 가까스로 유이설을 잡아 빼낸 조걸이 숨을 헐떡였다. 그만큼 전력을 다해 움직였던 것이다. 그가 유이설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댔다.
“아니, 거기서 고개를 돌리는 미친 인간이 세상에 또 어딨냐고요!”
“안 돼.”
“도대체 왜 그게 된다고 생각한 겁니까? 예?”
“음.”
유이설이 평소와는 조금 다른 눈빛으로 제 검을 바라보았다.
“다를 게 없는데.”
“다를 게 없긴 뭐가 다를 게 없습니까. 저 양반은 윤종 사형이라고요! 신선이니, 도기니 이런 건 우리하고 별 관련이 없어요. 저 양반이니까 되는 거지!”
조걸이 울화를 담아 삿대질해 댔다.
전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촌극이 펼쳐지고 있지만, 정작 혈교도들은 이 광경을 보면서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교의 축복이…….’
묘하게 샌님처럼 단정한 놈의 검이 교의 축복을 끊어 내는 걸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딱히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 놈이 감히!’
혈교도가 입술을 깨물었다.
교의 축복은 교도 모두가 지닐 수 있는 권능이 아니다. 교에서도 그 권능을 하사받은 이는 삼분지 일에 지나지 않는다.
교 내부에서도 귀한 권능인 만큼, ‘이적’의 영역에 이르러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특히 저 어리석은 불신자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이적일 터.
하지만 이는 거꾸로 말하면…… 이적이 효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는, 그들의 능력이 급감한다는 뜻이다.
혈교도가 윤종을 노려보았다.
호들갑을 떠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저 윤종이라는 놈은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다는 뜻이다.
순간 불쾌감과 살기가 치밀었지만, 이를 모조리 터뜨리기에는 윤종의 검 끝에 어린 투명한 기운이 껄끄러웠다. 본능적인 공포에 가까웠다.
혈교도를 보는 다른 이들이 느낄 감정을, 지금은 혈교도들이 몇 배는 더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릴 결론은 오직 하나.
“각자 살아서 귀환해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혈교도들이 땅을 박차며 사방으로 움직였다. 거의 동시에 윤종의 몸이 순간적으로 길게 늘어나며 달아나는 이들을 뒤쫓았다.
서걱! 서걱!
두 명의 혈교도가 미처 윤종의 검을 피하지 못하고 피를 내뿜으며 나뒹굴었다. 그러나 그 틈을 타 다른 놈들은 이미 쫓기 어려울 만큼 거리를 벌렸다.
“저, 저 자존심도 없는 놈들!”
조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혈교도들을 바라보았다.
자신만만하게 공격해 오더니, 세가 불리해지자마자 체면이고 뭐고 죄 내던지고 사방팔방으로 꽁무니를 뺀다. 정파인인 조걸이 보기에는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는 방식이었다.
조걸은 추적을 포기했다. 몇 놈 정도는 쫓을 수 있겠지만, 간다고 해도 놈들을 쉬이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잠깐. 생각해 보니까 저놈들 지금 사형이 무서워서 도망친 거네요?”
“그렇게까지는.”
조걸은 그만 소리 내어 허허 웃어 버렸다. 유이설과 함께 그토록 고생하며 상대하던 놈들을, 윤종은 단순히 쓰러뜨린 것도 아니고 존재만으로 눌러 버린 것 아닌가.
유이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윤종에게 거듭 물었다.
“어떻게 쓰는 거?”
“나중에요. 우선은 다른 데부터 돕죠.”
조걸이 그제야 아차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하기야 지원 간 곳도 고전하고 있을 테니까.”
“그렇지. 하지만 다 그렇지는 않을 거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우린 이렇게 개고생을 했는데?”
“그야 우리가 화산이니까.”
윤종의 말에 조걸이 인상을 구겼다.
“화산파 무시하십니까?”
“아니, 그 말이 아니라…….”
뭔가 설명하려던 윤종은 고개를 저어 버렸다. 조걸에게 설명이라니, 하등 쓸모없는 짓을 할 뻔했다.
“보면 알겠지. 가자.”
“어떻게 쓰는 건데?”
윤종이 달려 나가고, 유이설이 재빠르게 그 뒤로 따라붙었다. 남겨진 조걸이 다시 한번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한 번씩 저렇게 사람 놀랜다니까.”
오늘따라 윤종의 어깨가 넓어 보였다.
* * *
쿠우우우웅!
멀찍이 튕겨 나간 혈교도의 입에서 시커멓게 죽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그가 가슴을 움켜잡고 신음했다.
“으……. 이놈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는 혜연의 얼굴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외상은 쉬이 치료하는 모양이지만…… 내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외다.”
“뚫린 입이라고!”
혈교도가 이를 갈아붙였다.
놈의 말이 맞다. 몸에 자리한 교의 축복은 외상을 빠르게 수복하지만, 흔들린 단전을 다잡아 주거나 들끓는 기혈을 안정시켜 줄 순 없다.
그러니 사람을 속부터 뒤흔드는 내가중수법의 달인과는 상성이 맞지 않는다.
게다가…….
‘저건 단순한 내가중수법이 아니다.’
단순한 내가중수법이라고 보기에는, 저 권력이 남긴 외상조차도 평소보다 더디게 아물고 있다. 혜연의 손에 어린 은은한 황금빛 서기를 보며 혈교도가 날카롭게 물었다.
“소림의 불법인가?”
“…….”
“황포가 아닌 흑의를 입고 있어 몰라뵀군. 소림……. 과연 궁에 커다란 장애가 될 놈들이야.”
중얼거리던 혈교도가 이내 이죽거렸다.
“사패련이 소림을 지운 게 참으로 다행이군. 그리 생각하지 않나?”
순간적으로 혜연의 눈에 아픔이 스쳤다. 그러나 그도 잠시, 아픔의 기색은 빠르게 사라졌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궁에는 좋은 일일지 모르나, 당신에게는 딱히 좋을 게 없소. 어차피 당신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
“건방진 중놈이…….”
혈교도의 눈에 혈광이 솟구쳤다.
“그리고 사실 그대들의 궁 역시 그리 좋아할 일은 아니오. 소림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내가 할 테니.”
혜연의 두 눈에 단호한 결의가 어렸다. 혈교도가 조소했다.
“소림의 황포조차 걸치지 않은 놈이?”
“한낱 의복 따위, 뭐가 그리 중하겠소. 중요한 건 내게 소림의 불법이 머물러 있다는 것이지.”
투웅!
혜연이 진각을 밟았다.
“증명은 어렵지 않소. 오시오.”
혈교도가 흉흉한 이를 드러내며 혜연을 향해 쇄도했다. 그 손에 쥔 기형도에 불온한 기운이 모여들었다. 마주하기도 전에 육신을 갉아먹을 듯 음습했다.
하지만 혜연이 뿜어내는 서기는 그 기운을 단번에 정화해 버렸다.
투웅!
부드럽게 내저은 손이 날아드는 기형도를 부드럽게 옆으로 밀어내었다. 과거와는 다르다. 단순히 짓누르는 게 아닌, 그 안에 가벼움을 담은 일수(一手).
쿠우우우웅!
곧이어 허리춤에 머무르던 혜연의 정권이 혈교도의 빈 옆구리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황금빛 권인(拳印)이 새겨진 채, 혈교도는 피를 뿜으며 튕겨 나갔다.
땅에 형편없이 처박히고도 몇 바퀴를 더 구른 혈교도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헐떡이며 혜연을 노려보았다.
“이…… 이놈이!”
경련하며 꿈틀거리던 혈교도가 고개를 푹 떨구었다. 일권에 의식이 끊긴 것이다. 마음이 불편한 듯 혜연이 습관적으로 반장을 취할 때였다.
“죽어라!”
뒤쪽에서 은밀히 상황을 지켜보던 혈교도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혜연에게 달려들어 왔다. 혜연이 또다시 반사적으로 권을 날리려던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
돌연 거대한 흰빛 검기가 날아들어 혈교도를 일거에 휩쓸어 버렸다.
그대로 말없이 굳어 있던 혜연이 큰 눈을 끔뻑이며 뒤를 돌아봤다.
“괜찮으십니까, 스님?”
“……남궁 시주.”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남궁도위가 태연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한 건 아닌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남궁 시주께서는 괜찮으셨습니까? 이들이 사특한 수를 쓰던데.”
“사특한 수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러니까…….”
뭔가 말하려던 혜연이 슬쩍 남궁도위의 검기에 휩쓸린 혈교도를 넘겨다보았다. 말 그대로 곤죽이 된 시신을 보자니 어쩐지 허무해진 혜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음? 하실 말씀이 있으면 시원하게 하십시오, 스님.”
“……정말로 아닙니다.”
그래,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술이고 뭐고 어느 정도 회복할 만한 상흔이어야 어떻게 시도라도 해 보지, 일격에 머리통이 형체도 못 알아볼 만큼 박살 나 버리는데 뭘 할 수 있으랴.
남궁도위의 입장에서는 별다른 능력도 없는 놈들이 대책 없이 달려드는 거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검인데…….’
나풀대는 화산의 검을 쓰는 이들이 이 광경을 보면 얼마나 입에 게거품을 물지 안 봐도 빤했다.
혜연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다른 곳을 도우러 가시지요.”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예?”
“놈들이 물러나는군요.”
남궁도위가 산 아래쪽을 가리켰다. 과연 붉은 옷을 입은 이들이 후퇴하는 광경이 보였다.
“벌써 후퇴하다니.”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확실히 물러나는 것 같습니다.”
아직 천우맹의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니 한동안은 얼마든지 이곳을 더 유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벌써 물러난다니, 상리에 맞지 않았다.
“다른 목적이 있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제 생각에는…….”
남궁도위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향했다. 옅은 매화 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생각과는 좀 다른 일이 벌어진 모양이지요. 항상 그렇듯 말입니다.”
“으음.”
혜연은 피어오르는 매화를 멍하니 응시했다.
저 매화검기는 그가 익히 아는 것이지만, 또 그가 알던 것과 무언가 달랐다. 혜연은 한동안 그 꽃잎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