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52화
1752화. 나 역시 도리를 지키지 못한 사람이니까. (2)
허도진인이 들은 바를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리되었다더군.”
순간 백천의 고개가 미미하게 수그러들었다. 숨기려 했지만, 미처 다 감추지 못한 동요가 엿보였다.
이에 허도진인이 작게 탄식했다.
“자책이라도 하는 것인가?”
“저는…….”
“광오하군.”
백천이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자네가 맹에 계속 머무르거나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이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인가?”
백천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만일 저들의 목적이 천우맹에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면, 이는 언제고 벌어질 일이었네. 그저 형태만 달랐을 뿐이겠지. 자네의 대처 하나로 막을 수 있었을 거라고 여기는 건 오만에 지나지 않네.”
백천의 마른 입술 새로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빤히 백천을 보던 허도진인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해 못 했군. 그래, 말만으로는 알 수 없는 거겠지.”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옳은 길을 걷는다고 해도, 결국 한 사람이나 한 문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생기게 된다.
그 사실을 조금 더 일찍 알아야 했거늘.
허도진인이 백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여전히 양팔은 앙상하고, 얼굴은 믿기 힘들 만큼 초췌했다. 예전에 보았을 땐 정광 가득했던 두 눈 역시 혼탁하게 흐려졌다.
몰락이라는 말을 써도 될 것인가?
허도진인은 부인했다. 그렇지는 않다.
만일 그랬다면 아무리 동정할 만한 처지라 해도 허도진인이 직접 백천에게 몸 숨길 곳을 내어 주진 않았을 터.
저 혼탁한 눈빛 속에서도 허도진인은 여전히 볼 수 있었다. 과거에 자신이 마주했던, 백천이라는 이를.
그를 이곳까지 옮겨 온 허공과 진현 역시 같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동병상련의 처지인 두 사람이 서로 등이라도 기대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군.’
우습지도 않을, 실없는 생각을 한 허도진인은 작게 헛기침했다.
정말로 만에 하나 그런 의도였다면, 어느 정도는 맞아떨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과거의 허도진인이라면 결코 백천에게 쉴 곳을 내어 주지 않았을 테니까.
이젠 허도진인도 잘 안다.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이의 심정을. 더는 추락할 곳이 없는 이의 절망도.
그런 이에게 작은 둥지 하나 내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그래. 이제 어쩔 셈인가. 언제까지 이곳에 몸을 숨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이제는 물어야 했다.
“이건 그저 도피에 지나지 않음을 자네도 잘 알 텐데.”
목소리가 처음보단 날카로워졌다. 눈앞의 청년을 질책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사실 이는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과도 같았다. 그래서 날이 섰다.
저 청년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는 어땠더라?
성치 않은 몰골로 무릎까지 꿇으며 잠시 쉬어 갈 곳을 내어 달라 하기 전에, 자신은 어땠었지?
두 사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허도진인 역시 사람들의 시선과 제 처지를 피하기 위해 이 금지(禁地) 속 작은 모옥에 몸을 숨긴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자네도 알겠지만, 천우맹에는 뛰어난 이들이 많네. 지금이야 당황하여 자네의 종적을 못 찾았는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음?”
백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당황하여 못 찾은 게 아닙니다. 맹에는 지금 당장에라도 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낼 수 있는 녀석이 있습니다. 그저…… 찾지 않고 있는 것뿐이지요.”
백천을 빤히 응시하던 허도진인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사이 어떤 사정이 있고, 어떠한 말이 오갔는지는 굳이 내가 궁금해할 일은 아니로군.”
“…….”
“하나 그렇다고 해서 내 질문이 달라지지는 않네. 다시 묻겠네. 이제 어쩔 셈인가?”
허도진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사정이 딱하고 마음이 쓰여 직접 거두긴 했지만, 허도진인이 보기에도 백천의 처지는 녹록지 않았다. 세상을 살아갈 의욕을 잃었던 허도진인보다도 어쩌면 더 절망적인 상황이다.
허도진인은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사형제와 제자들을 대거 잃었다.
끝까지 버리지 못했던 작은 오만 때문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기회만 온다면 직접 장일소의 목을 베어 내고 모든 걸 이전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오만 말이다.
그 욕심이 일시적으로 눈을 흐리게 했고, 허도진인은 가혹한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허도진인은 여전히 무당의 도사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이들이 곁에 있다. 그러니 어찌 천하에 혈혈단신으로 떨어진 백천에 비하겠는가.
“초야에 묻혀 살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겠네.”
“…….”
“부족하지 않을 만한 재물을 내줄 수도 있네. 먼 타국으로 가 무엇이든 원하는 걸 하며 살 수 있겠지.”
이 제안들이 백천에게 그리 와닿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굳이 제안한 건, 허도진인이 이 모든 걸 상상해 보았고 또 한편으로는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그 길을 택할 수 없었지만, 만일 누군가 등을 떠밀어 주었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라면 달리 원하는 게 있는가?”
허도진인의 물음에, 백천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그 헌앙함에 대한 칭송이 무당까지도 들어올 정도였던, 화산의 그 화산정검이 이젠 초췌하단 말도 무색할 만큼 망가졌다.
하지만 그 눈빛이 돌연 과거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허도진인이 백천에게서 가장 인상 깊게 보았고, 또 유일하게 기억하던 그 ‘눈빛’으로.
“혹…… 제게 한 수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르침?”
본디 가르침이란 수많은 의미로 해석되지만, 무인이 청할 가르침은 오직 하나뿐이다. 백천이 자기 자신을 아직 무인이라 생각하고 있다면 말이다.
“무엇을 말인가?”
“능유제강(能柔制鋼).”
“…….”
“혹은 사량발천근(四兩撥千斤). 무당은 작은 힘으로 더 큰 힘을 제압하는 데 있어 천하제일이라 들었습니다. 제게 그 묘리를 알려 주실 수 있는지요.”
허도진인의 얼굴에 황망한 심정이 드러났다.
“……지금 무학을 알려 달라는 건가? 나는 의원이 아닐세. 그 팔을 고쳐 줄 수는 없네.”
“알고 있습니다.”
“한데?”
“무당의 묘리가 검과 장, 그 둘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
“몸과 다리를 쓰는 법도 있겠지요.”
허도진인이 허,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어려우십니까?”
다시 묻는 백천의 표정은 흔들림 하나 없이 단단하고 평온해 보였다.
‘뭐 이런 자가…….’
제 몸이 어떤 상태인지는 백천 스스로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 싸우겠다는 소리를 한단 말인가.
확실히 백천의 말대로, 무당에는 검술과 장법만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체간과 다리를 쓰는 방법에 있어서는 소림조차 뛰어넘는, 천하제일의 문파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애초에 그 태극권이 무당의 무학 아니던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공도 거의 없고, 팔도 못 쓰게 된 이를 가르쳐 봐야 얼마나 가르칠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군.”
허도진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무당의 묘리를 배운다고 한들, 자네의 실력을 되찾을 수 있을 성싶은가?”
“그럴 리 있겠습니까?”
의외로 대답이 너무 시원스럽게 나왔다. 그래서 더 황당했다. 허도진인이 물었다.
“그런데 대체 무얼 배우겠다는 건가?”
백천이 되레 고개를 갸웃했다.
“어떤 의미이신지요?”
“음?”
“물론 제가 장문인…….”
“도장이라 부르게.”
“예. 도장께 사사한다 한들, 과거에 이루었던 제 무학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거란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꼭 과거와 같이 강해져야만 싸울 수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
“강자에게는 강자의, 강하지 못한 이에게는 강하지 못한 이의 싸움이 있는 법. 저는 그저 제 위치에서 싸울 방법을 찾는 것뿐입니다. 미약하게나마 도움은 될 테니까요.”
허도진인의 두 눈이 흔들렸다.
“화산은 자네의 복귀를 받아들이지 않을 걸세.”
“알고 있습니다.”
“종남 역시 자신들의 제자가 아닌 자네는 원치 않을 걸세.”
“당연한 일입니다.”
“심지어 천우맹의 맹도조차 될 수 없을지 모르네. 소속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도 싸우겠다는 건가?”
백천은 뭔가 알아듣기 힘든 말을 들었다는 듯 허도진인을 빤히 보다 입을 열었다.
“저는 이제 화산의 제자도 아니고, 천우맹의 맹도도 아닙니다. 알량한 검술을 믿고 싸우던 무인조차 아닐지 모릅니다.”
“…….”
“하지만 저는 화산의 제자라서 싸웠던 것이 아니고, 천우맹의 맹도라 싸운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강하기에 싸웠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와 싸우지 않아야 할 이유가 따로 있을는지요?”
허도진인의 손이 살짝 떨렸다. 백천의 마지막 말이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싸우지 않아야 할 이유라…….”
화산의 제자여서 싸운 게 아니고, 천우맹의 맹도라 싸운 것도 아니고, 강하기에 싸운 것도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래, 생각해 보니 딱히 그런 이유는 없군.”
허도진인은 피식 웃어 버렸다. 자꾸 헛웃음이 객쩍게 새어 나왔다.
“허허. 허허허. 그래, 없군. 없었어. 그래…….”
웃음을 멈추지 못하던 그의 눈가에 투명한 게 반짝였다. 자연스레 눈가를 훔친 허도진인이 백천을 응시했다. 그 눈빛이 아까와는 사뭇 달리 부드러웠다.
“싸울 수 있는 법을 알려 달라 했는가?”
“예.”
“자네는 종남의 제자이기를 거부한 사람일세. 당연히 무당의 제자가 될 생각은 없을 터이고.”
“그러합니다.”
“그럼 무당의 전 장문인인 날더러, 무당의 제자가 아닌 자네에게 무당의 묘리를 전해 달라는 뜻이로군. 심지어 우리가 자네에게 특정한 무언가를 요구할 수 없을 만큼 ‘적당히’.”
“…….”
“그런데 또 어디 가서 객사는 하지 않을 만한 수준은 맞춰 주어야 하고…… 상황이 급박하니 그마저도 고작 며칠 내에 해결해야 한다?”
“말하자면……. 예.”
허도진인이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날강도가 따로 없군. 자네는 부끄러움도 모르는가?”
“체면은 제가 잃은 것 중 가장 작은 겁니다. 이제 와 굳이 되찾고자 할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지요.”
“…….”
백천의 담담한 대답에 허도진인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멍한 눈빛이 백천에게 닿아는 있지만, 어딘가 다른 곳을 보는 듯했다.
“도장?”
“……그렇군. 그래, 자네의 말이 맞네.”
“…….”
“굳이 되찾을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라……. 그래, 더 큰 것을 잃은 이에게는 그럴 수도 있군. 세상 모든 건 바라보기 마련이라더니.”
허도진인의 눈길이 하늘로 향했다. 그 눈빛이 헛헛하였다.
한참을 그렇게 빈 허공을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지극히 높은 도는 지극히 괴이하리니……. 사람의 시선으로 보면 엉망진창이라, 더욱 도이리라.”
이제야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허도진인이 돌연 맹렬한 눈빛으로 백천을 획 바라보았다.
“들어라.”
그 목소리가 전에 없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무학은 애초에 약자가 강자에게 대항하기 위한 것. 원한다면 대항할 방법을 알려 줄 수 있다. 하나 사람이 그러하듯, 무학 역시 완전하지는 않은 법. 지금의 네 처지에서 최선을 다한다 해도 세상이 말하는 삼류 무인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
“그럼에도 그 작은 걸 손에 넣기 위해선 지독한 고난을 겪어야 할 터. 이 모든 걸 감수하고도 여전히 싸우길 원하는가?”
“예.”
대단한 결의도 다짐도 없다. 지극히 당연한 것을 논하듯 고개를 끄덕였을 뿐.
웬만해서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 허도진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어쩌면 배우는 쪽은 나일지도 모르겠군.’
허도진인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각오를 다져라. 무당의 도는 화산처럼 너그럽지 않다. 그 몸에 엄격함을 새겨 주마.”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는 무당산의 깊은 심처, 세상을 외면했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