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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1756화


1756화.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1)

불길한 암적색 눈이 어둠 속에서 미세한 빛을 흘렸다.

저 위쪽에서 느껴진다.

무척 희미하지만, 그가 찾던 향이 풍겨 오고 있다.

붉은 눈에 득의양양한 기색이 얼핏 스쳤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이내 신중하게 가라앉았다. 슬쩍 입술을 열고 나온 혀가 단단하게 감긴 붕대를 확인했다.

스르륵.

혈교주의 육신이 어둠으로 녹아들었다.

이 산은 적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지(死地), 혹은 지옥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하지만 온 산에 짙게 깔린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혈교주에겐 일말의 거리낌이나 망설임도 없었다.

스슷.

검게 잠긴 산을 천천히 훑어보던 그의 시선이 이윽고 한곳에 고정되었다.

한 산봉우리였다.

그리 특별하진 않다. 가장 높지도, 가장 날카롭지도, 가장 은밀하지도 않았다. 여기저기 수없이 솟은 봉우리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하다.

그러나 혈교주의 시선은 오로지 그곳에만 고정되었다.

“……거기로군.”

붕대로 덮인 혈교주의 입가가 천천히 비틀렸다.

어둠에 완전히 스며든 그의 몸은 산을 타고 오르는 바람처럼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명확한 목표를 향해서.

까드득.

마찬가지로 붕대에 감긴 그의 손에선 소름 끼치는 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리 냉정해지려 해도 결국 마인(魔人)이다. 마성에 물든 육신은 살인이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가 들끓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혈교주의 발이 그대로 멈춰 섰다.

밤에 잠겨 있던 그의 몸이 서서히 밖으로 드러났다. 몸을 가려 주던 은형술(隱形術)이 어느새 풀리고 있지만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살심보다 더 큰 충격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핏빛으로 물든 그의 눈이 잘게 떨렸다.

‘이건…….’

그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더 가면 죽는다.

이성과 논리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저 지금껏 수없이 그를 구해 온 본능이 날을 세운 채 자지러지듯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동시에 섬뜩한 살기가 피부를 찔러 왔다. 본능적으로 손을 들며 공격 태세를 취하려던 혈교주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아직 들킨 건 아니다. 설령 존재를 들켰다고 해도, 정확한 위치까지 파악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한 발을 더 내디디는 순간부터는 달라지겠지. 이토록 지독한 기운을 흘리고 있는 이가 곧장 알아차릴 테니까.

혈교주는 어둡게 가라앉은 눈길을 제 발치에 던졌다.

한 치……. 아니, 불과 반 치.

그것만으로도 적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다. 어쩌면 그 길이 그가 바라 온 시산혈해를 이루기에 더 빠른 방법일지 모른다.

그러나 혈교주는 그 생각을 금세 떨쳐 버렸다.

‘아니겠지.’

패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번에 저지른 일만으로도 그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혈교주는 내밀었던 발을 천천히 거두어들였다.

욕심을 부리다간 목이 달아나고 말 것이다. 애초에 적은 이렇게나 대단한 기운을 사방에 퍼뜨려 적의 침입을 감지하고 있다. 그리고 혈교주는 이게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조차 알지 못한다.

어설프게 따라 하려 들다간 일각도 지나지 않아 탈진해 쓰러지고 말 것이다. 상대가 기운을 퍼트려 놓은 영역의 절반 범위 정도를 감지하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그런데 이런 짓을 밤새 지속한다?

‘사람이 아니다.’

단순히 강하다고 될 만한 일이 아니다.

동일한 양의 내공이라 해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그 능력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 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망을 펼친 이의 능력은 일반적인 상식을 아득히 초월했다고 봐야 한다.

적들 가운데 이만한 짓을 할 수 있는 이라고는…….

뿌득.

잠시 이를 갈아붙인 혈교주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기회는 반드시 또 올 것이다. 전쟁 내내 이런 짓거리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다시 말해, 잠시 물러난다 해서 굳이 굴욕감씩이나 느낄 필요는 없다는 소리다.

‘그런데…….’

혈교주의 시선이 다시금 슬쩍 뒤로 향했다.

이 기운은 그의 촉각을 곤두서게 하고 신경을 긁었다. 그런데 또 동시에 커다란 위화감이 들었다.

‘이게 정말 정파 놈의 기운이 맞나?’

정파 놈의 기운이라면, 이 끈적함과 음습함은 뭐지? 이건 마치…….

혈교주의 눈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전방을 뚫어지게 노려보던 그는 다시 어둠 속으로 흔적 없이 스며들었다.

* * *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청명이 느리게 고개를 들어 산 아래쪽의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했다.

눈빛은 텅 빈 것 같았지만, 초점이 없이도 분명히 어딘가를 정확히 보고 있었다.

가야 할까?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일부러 이목을 끌어 청명을 끌어내고 다른 무리가 양동으로 아군의 목을 노리는 작전 따위는 과거 전쟁에서 지긋지긋할 정도로 겪었다.

지금은 이 자리를 지키는 편이 낫다.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무릎에 뺨을 기댔다.

이런 밤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모두가 잠든 후로도, 홀로 한시도 쉬지 못했다. 길고 긴 불면의 밤이었다.

그때는 모든 게 지긋지긋했다. 왜 지켜야 하는지도 모를 이들을, 고마움이 뭔지도 모르는 이들을 지키는 데 환멸을 느꼈다.

그럼에도 청명은 자기 자신을 갉아 가며 모두를 지켰다.

다음 날 아침, 침통한 표정으로 울분을 삼키는 청문의 얼굴이 보기 싫어서. 오직 그 이유만으로.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모두 지켜야 할 이유가 있다. 모두가 고마움을 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청명이 느끼는 부담이 덜어졌는가 하면…….

청명의 입에서 킥, 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넌덜머리가 난다.

다르게 가 보고자 시작했던 일이 결국 같은 결말로 귀결된다는 건. 다른 결과를 위해 발버둥 친 결과가 오히려 더욱 깊은 수렁으로 그를 끌고 간다는 것은.

아니. 아니다.

지금 정신을 좀먹는 이 부정(不正)한 생각들은, 결국 마음을 잠식한 마(魔)가 그를 유혹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사형제들을 지켜 내는 일을 넌덜머리 낼 이유 따위는 추호도 없다.

달은 선뜩할 만큼 창백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청명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며 생각했다.

미쳐 버릴 것 같다고. 아니, 어쩌면 이미 미쳐 있는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지독한 심마(心魔)다.

심마 따위는 몇 번이고 이겨 내 왔다. 심마란 경지를 넘는 곳에 자리한 수문장 같은 것. 나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열어 내야 하는 단단한 철문, 혹은 넘어야 할 까마득한 절벽과도 같다.

하지만 이건…….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

숱한 심마를 이겨 내며 사람으로서는 더 오르기 힘든 경지까지 올랐던 청명조차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지독한 마(魔).

본디 심마는 사람의 마음을 좀먹는다. 경지가 높을수록, 탐구하는 것이 깊을수록 심마는 더욱 지독스레 사람을 유혹한다.

이를 알면서도 청명이 지금 혼란에 빠진 건…….

‘이유가 뭐지?’

아직 그에게 심마가 찾아올 리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의 경지는 아직 과거 매화검존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최근 많은 일을 겪으며 과거의 감각을 거의 되살리긴 했지만, 냉정하게 보아 그 세월을 뛰어넘은 건 결코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과거에서조차 겪지 못했던 이런 심마가 그를 찾아왔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이게 심마이긴 한 건가?

‘언제부터였지?’

장일소를 대면하고부터였나? 아니면 그 전, 무당으로 향할 때부터였나? 아니면 호북의 참상을 목도했을 때부터?

아니, 이것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대체 왜 그가 심마에 시달리고 있느냐는 것. 세상 모든 일에는 합당한 이유가 존재할 터다. 청명의 무위가 높아진 게 원인이 아닌 이상 반드시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청명이 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잘게 떨리고 있다.

마치 그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두렵기라도 한 듯, 육체가 그의 의지를 배반한다. 헛웃음을 흘리던 청명이 힘없이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이겨 내면 돼.’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어찌 되는 걸까?

문득 궁금해졌다.

심마를 극복하고 완전한 선(善)을 이뤄 세상에 대한 미련을 끊어 낼 때, 불자는 부처가 되고 도인은 신선이 된다. 그리고 그 길을 따로 바라지 않았던 이들은 신령(神靈)이라 불리며 세상에 머물게 된다.

그런데 극복하지 못한 이는?

사람으로서 가능한 모든 걸 이루고도 마지막 심마를 이겨 내지 못한 이는 어찌 되는가. 그 경지가 너무도 높아 죽지조차 못하고 마를 받아들인……. 아니, 마(魔) 자체와 동화되어 버린 인간은 대체 어떻게 되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는 순간 그의 몸이 눈에 띄게,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알 것 같다. 아니, 알지 못한다. 아니다. 알고 있다. 아니, 나는 결코 모른다. 모른다.

알지만 알아선 안 되고, 짐작이 간다고 해도 결코 엿봐서는 안 되는 길이다. 이는 청명에게 있어 가장 공포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리된다면. 끝내, 그렇게 된다면?

부스럭.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청명이 몸을 웅크린 채 움찔했다.

이렇게까지 가까워지도록 알지 못했다.

당연하다. 그는 지금껏 익숙하지 않은 이의 종적을 찾아내는 데 모든 신경을 집중했으니까. 그렇기에 오히려 익숙한 이들의 움직임은 지척에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사형이에요?”

청명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느리게 돌아보았다.

“뭐 해요, 이런 곳에서?”

당소소가 살짝 놀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청명은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다시 다물었다. 잔뜩 갈라져 쉬어 버린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사형?”

하지만 계속 무시로 일관할 수는 없어 결국 입을 떼었다.

“너야말로.”

다행히 그럴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뭘 하고 있는데?”

“저는…….”

당소소가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청명은 저도 모르게 짧은 한숨을 쉬었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보나 마나 백천의 종적을 찾아다니는 거겠지. 남 앞에서 대놓고 할 순 없으니 다른 이들이 잠든 틈을 타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쉬어.”

“사형이야말로…… 뭐 하는 거예요? 사형도 사숙이 아직 인근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

“그럼 왜?”

당소소의 마지막 말은 원망에 가까웠다.

찾고자 하면 찾을 수 있다. 청명은 언제고 백천을 찾을 수 있다. 그의 능력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 백아를 풀어놓는 것만으로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백천이 있는 곳을 알아낼 테니까.

그런데 왜 찾지 않느냐는 의미다.

이 원망 어린 말에 청명이 돌려줄 대답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질문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청명은 백천을 찾을 필요가 없다.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그저…… 청명은 다시 묻고 싶었다.

찾고 나면? 찾아내고 나면 뭘 할 수 있지?

그를 묶어 두고, 영원히 자신이 원치 않는 삶을 살아가도록 강제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가 원하는 대로 전장에서 처참하게 죽어 가도록 묵인해야 하나?

어느 것이 답이며, 또 정의인가.

청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당소소와의 대화로 기력을 빼선 안 된다. 그녀라면 곧 청명의 몸에 생긴 이상을 알아챌 테니까. 이 불편한 자리를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청명이 당소소를 무심히 지나쳐 우거진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쉬어 둬.”

“사형.”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청명이 잠시 멈추었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요?”

“…….”

“우리가 바랐던 게 이런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씁쓸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청명은 표정 없이 당소소를 흘끗 돌아보았다. 달빛에 반쯤 드러난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잠시 뒤 청명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한참 당소소를 바라보다 조용히 사라져 갔다.

당소소는 걱정 어린 눈으로 멀어지는 청명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방금 그가 읊조리듯 흘렸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서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사형…….”

당소소의 커다란 눈망울이 난파된 조각배처럼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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