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57화
1757화.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2)
“흐음.”
나직이 울리는 비음에 호가명이 희미하게 몸을 떨었다. 딱히 불편한 기색이 실리지 않은, 작은 소리임에도 말이다.
‘빌어먹을 놈들.’
다시 생각해 봐도 혈궁의 이탈을 장일소에게 즉시 알리지 않았던 건 틀린 판단이 아니다. 그의 선에서 수습할 수 있다면 최대한 소란 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군사로서의 소임이었다.
미친 혈궁 놈들이 무당산을 직접 공격하는, 겉으로 보기엔 그저 ‘전면전’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황당무계한 짓거리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아무리 사패련의 모든 정보를 호가명이 총괄한다고 해도, 천우맹과의 전투라는 가장 중차대한 사안이 장일소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란 불가능하다. 아니, 설령 가능하다 해도 그런 짓거리는 해선 안 된다.
장일소의 권위를 호가명이 부정하는 꼴이 될 테니까.
“가명아.”
“예, 련주님.”
“넌 알고 있었니?”
“……이탈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놈들이 설마 거기로 향할 줄은…….”
“알고 있었다고…….”
장일소가 작게 되뇌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굳이 내겐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구나.”
“…….”
“응?”
호가명의 관자놀이를 타고 굵은 땀방울이 흘렀다.
그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판단의 근거는 장일소의 장악력이 예전에 미치지 못한다는 현재 상황이었다. 이를 장일소가 어찌 받아들일까. 호가명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련주님, 그건…….”
“잘했다.”
놀란 호가명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장일소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사소한 일까지 내가 일일이 알 필요는 없지 않겠니. 네 선에서 처리하렴.”
호가명이 장일소를 멍하니 응시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엇을 의심하며 주저했던가. 장일소가 여전히 장일소임을 그저 믿으면 되는 것을.
“……그리하겠습니다, 련주님.”
“그럼 혈궁주는 지금 어디에 있지?”
“궁은 복귀했으나, 그는 아직…….”
“그래?”
장일소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굳이 이런 식으로 확인시켜 줄 필요는 없었는데. 생각보다는 조금 빨랐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아, 내가 또 뜬구름 잡는 소릴 했구나. 괜찮다. 너는 굳이 지금 알지 않아도 된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태연하고 나긋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이 모든 게 그저 흔하디흔한 일상인 것만 같다.
그러나 호가명은 입 안 살을 꾹 깨물었다. 그냥 이렇게 넘어갈 순 없었다.
“련주님. 그럼 저들에 대한 처벌은…….”
“흐응?”
장일소가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 호가명을 돌아보았다.
“저들은 련주님의 명을 무시하고 무단으로 진영을 이탈하여 적과 교전을 벌였습니다. 이에 따른 처벌을 하지 않는다면 군기가 흐트러지는 걸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 저들이 이탈에 그치고 무당산을 습격하지 않았다면 적당히 덮은 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물론 호가명은 신상필벌이 반드시 엄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시기가 반드시 즉각적이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이는 또 아니므로.
상황에 따라서는 적당히 덮어 두고 넘어가는 편이 전체에 이로울 때도 있다. 그러나 이번 사안은 그리 쉬이 넘어갈 수 없었다.
혈궁이 천우맹을 습격했다는 사실이 이미 사패련 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이런 상황에 처벌을 미룬다면, 안 그래도 넘치는 불만을 억누르고 있던 이들에게 명분을 쥐여 주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처벌이라…….”
잠시 침묵하던 장일소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뭐, 내버려두렴. 딱히 그럴 필요 없단다.”
“려, 련주님.”
호가명은 전혀 이해 못 하겠단 표정으로 장일소를 응시했다. 장일소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내가 그놈들을 건드리기가 껄끄러워 이러는 것 같으니?”
“제가 감히 어찌 그런 생각을 품겠습니까.”
“그래, 그렇겠지.”
장일소가 빙긋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다면 내버려두려무나.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될 일이니까.”
“…….”
“살아 보겠다고 아우성치는 것들을 발끝으로 슬쩍 밀어 떨어뜨리기가 어렵지는 않겠다마는…… 딱히 즐거운 일은 또 아니니 말이다.”
호가명이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의미인지 명확히 파악하기 어려웠다.
‘저들에겐 그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단 건가?’
아니면 살기 위해 저럴 수밖에 없었단 건가?
전자는 그들의 의식 중 하나라고 여기면 납득할 여지라도 있다. 반면에 후자는 불가능하다. 지금 중원에서 누가 혈궁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단 말인가.
더군다나 혈궁은 지금 사패련과 함께하고 있는데.
장일소가 직접 나서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가명아.”
“……죄송합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호가명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 숙였다. 지금은 연유 따위가 중한 것이 아니다.
“련주님. 저들에게 설사 납득 갈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지켜보는 다른 이들은 이 일을 순순히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흐음. 지켜보는 이들이라…….”
장일소가 재미있다는 듯 요사하게 웃었다.
“누굴 두고 말하는 거니?”
“그건…….”
“어찌 생각하지? 혹 불만이라도 있니?”
호가명이 대답하려다 말고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장일소의 물음이 그에게로 향한 게 아님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급히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하오문의 문주, 천면수사가 뒤에 서 있었다.
호가명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째서 하오문주가 여기에?’
현재 그가 가장 상대하기 불편한 이를 꼽으라면 천면수사다. 가능하다면, 적어도 지금은 굳이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천면수사는 호가명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오로지 장일소만을 응시했다. 천면수사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련주께서 그리 정하셨다면 그저 따르면 될 일. 사소한 불만마저 일일이 해결하려 든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요.”
장일소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호가명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는군.”
“…….”
“어떻지? 우리 군사도 이제는 마음이 놓였을까?”
호가명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현재 가장 큰 불만을 품었을, 동시에 사패련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하오문주가 그리 말한다면 호가명도 이 문제를 더 거론하기 어려워진다.
아니, 생각해 보면 오히려 기꺼워야 할 일이다.
천면수사가 장일소에게 완전히 고개 숙였다는 사실이 조금 전 발언으로 증명되었으니까. 그가 지난 일에 대한 원한을 드러내고 나오지 않는다면 꽤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이번 혈궁 사태가 사소하게 느껴질 만큼.
“가명아.”
장일소가 가볍게 대답을 재촉했다. 호가명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하오문주께서 저리 말씀하신다면, 저 역시 더는 이 일을 거론하지 않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말하면서 호가명은 대놓고 천면수사를 곁눈질했다. 그의 의중을 떠보려는 듯 말이다.
하지만 천면수사는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과거의 모든 일은 묻어두겠다는 것처럼.
화해라는 낯간지러운 말이 오가는 일 따위야 결코 없겠지만, 봉합이라는 말 정도는 쓰일 수 있을 터다.
“그럼 되었군. 자, 그럼…….”
“다만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장일소의 말허리를 자르며 천면수사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 눈빛이 어쩐지 탐색이라도 하는 듯 오묘했다.
장일소가 태연하게 물었다.
“뭐가 궁금하지?”
“조금 전 련주께서 굳이 벌을 내리실 필요가 없다고 하셨는데, 무슨 의미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붉은 입꼬리가 올라가며 쿡, 나지막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말 그대로란다.”
“……예?”
“굳이 내가 벌을 내릴 필요가 없지. 그에게 벌을 내릴 사람은 따로 있을 테니까.”
하오문주의 표정이 슬며시 굳어졌다.
그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 하오문의 정보망마저 벗어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더 파고들 수는 없었다.
장일소가 빙그레 웃으며 하오문주를 응시했다.
“그보다, 왜 불렀는지는 알고 있지?”
“……예.”
“슬슬 준비하렴. 벌은 내 소관이 아니지만, 기껏 만들어 준 기회를 그냥 놓치는 건 즐겁지 않으니까.”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천면수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어떤 의문도, 고민도 없다는 듯 보였다. 그러나 머릿속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엇인가?’
그가 놓치고 있는 것. 장일소는 알지만, 그는 알지 못하는 것.
천면수사의 시선이 빙그레 웃고 있는 장일소에게 고정되었다. 역시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 와중, 차분하고 나른하던 장일소의 눈이 다시금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음이 들끓어서다.
알 수 있다. 세상을 유지하던 둑은 이미 붕괴하고 있다.
이제 곧 모두가 두려워하던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천하의 장일소조차 그저 허우적댈 수밖에 없는 지옥이.
하지만.
‘어차피 잃어야 할 것이라고 해서…… 가지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지.’
얻을 것이다. 설령 껍데기뿐인 전부라고 해도. 이를 위해 모든 걸 버려야 한다고 해도. 그게 장일소가 장일소로서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제 발버둥 칠 시간이란다.”
조소와 광기가 어린 눈길이 북쪽을 향했다.
“모두가 모두의 방식으로 말이지.”
* * *
머리가 땅에 바짝 붙어 있다. 아니, 이런 표현으로는 현재의 꼴을 모두 설명하기에 모자란다.
머리가 바닥을 파고 들어갈 기세로 처박혀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두려워하듯, 전율하듯, 신음하듯.
누군가가 이 광경을 본다면 실로 괴이하다고 여길 것이었다. 아주 크나큰 죄를 청하듯 머리를 조아린 자의 앞에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머리를 조아린 자의 얼굴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붕대는 눈 주변부터 축축하게 젖기 시작했다.
“내리신 명을…… 이행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제 능력이 미천하기 짝이 없어 완수하지 못하였습니다. 부디 가련한 이의 모자람을 이해하시옵고, 그 진노를 풀어 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육신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다.
본디 그는 타인을 보며 공포에 젖는 게 허락되지 않은 이다. 한 교를 이끌어 가야 할 신성한 몸이자, 수많은 것을 짊어져야 할 강단 있는 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행색은 그저 초라한 약자에 지나지 않았다. 비굴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고, 고개를 처박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로 보였다.
혈교주는 이 상황에도 한 점 굴욕감조차 느끼지 못했다.
“모자란 이의 죄를 사하시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신다면, 심혼을 다해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행하겠습니다. 부디…….”
혈교주가 또다시 쿵 소리 나게 이마를 짓찧었다.
그러고는 침묵했다. 비굴함이 약자의 무기임은 사실이나, 과하게 이용하면 오히려 좋지 못한 결과를 불러오곤 한다. 그는 이 사실을 잘 알았다.
시간이 흘렀다.
다른 이들에게는 다소 긴, 그리고 혈교주에게는 억겁과도 같이 느껴지는 시간 동안 혈교주는 이 미쳤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짓을 그저 충실히 이행했다.
그렇게 한참 후에야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쥐새끼쯤은 되는 줄 알았더니.”
혈교주가 전율하듯 몸을 떨었다.
여전히 그의 기감으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지금 이곳에 존재한다. 조아린 머리 바로 앞에.
혈교주의 온몸이 공포에 잠식되었다. 고작 한 걸음 앞에 있는 이의 기척을 느낄 수 없음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저 벌레에 지나지 않는 모양이군.”
혈교주의 숨이 가빠졌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나 그렇다면 책임은 나에게도 있다. 하찮은 벌레에게 어려운 일을 시킨 건 나의 과오이니.”
“저는 그저…….”
뿌드드득!
그 순간, 혈교주의 한쪽 팔이 뒤틀렸다.
뿌득. 뿌드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누구도 손대지 않은 팔이 제멋대로 뒤틀리고 휘돌았다. 그리고 이내 갈기갈기 찢겨 혈교주의 육신에서 떨어져 나와 버렸다.
“끄, 끄으으으…….”
신음은 작았다. 참을 만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격통에 당장이라도 혼절할 것 같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크게 비명을 지를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레조차도 매를 들면 어느 정도는 말을 들을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지?”
“바, 반드시…… 기회를…….”
“주지.”
“…….”
“하지만 기억하라, 길에서 벗어난 이여. 네게 생각 따윈 필요 없다. 다시 한번 나를 실망케 한다면, 너는 물론이고 너의 모든 교도까지 차라리 죽음을 갈구하게 될 것이다.”
“며, 명심…….”
“잊지 말거라. 너희는 나의 제약에서 벗어나 있음을. 너희의 그 무엇도 한 푼의 가치조차 가지지 못함을.”
혈교주가 황급히,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받들겠습니다!”
“가서 이행하라.”
“신심을 다하여.”
혈교주를 내려다보는 이의 눈빛은 소름 끼치도록 무정했다. 그 감정 없는 두 눈에 이윽고 짙은 마기가 들어찼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광기가 휘몰아쳤다.
이를 가까스로 억누른 그가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원이라.”
한없는 갈구와 분노가 동시에 어렸다. 과거 그가 밟았던 대지를 응시하는 두 눈에는 악의만이 넘실거렸다.
“나는 찾아낼 것이다. 이 긴 기다림에 과연 의미가 있었는지.”
홀로 고고히 선 존재.
과거, 세상은 그를 천살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