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58화
1758화.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3)
“물러가라.”
“예.”
천살의 명에 혈교주가 머리를 땅에 조아린 채 뒤로 기어서 멀어져 갔다.
그 광경을 보는 천살의 두 눈에 얼핏 혐오가 스쳤다.
‘하찮군.’
하지만 저런 놈마저 수족으로 부려야 하는 현재 그의 상황이야말로 하찮을지 모른다. 교의 율법이라는 사슬에 칭칭 묶여, 세상을 뒤흔들 힘을 가졌음에도 그저 멀리서 입만 놀려야 하는 상황이 말이다.
교도들은 중원에 관여할 수 없다.
그렇기에 천살이 생각한 것은 간단했다.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면, 간접적으로 관여하면 된다. 그가 아닌 다른 이가 중원에 혼란을 일으킨다면 그건 율법을 어긴 게 아니다.
얄팍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교리를 엄격히 적용한다면 천살은 교의 가장 큰 죄인 ‘불신’의 잣대를 피할 수 없으리라.
교도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주교만은 그의 행위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를 심판하기 위해 대주교가 보낸 인물이 이미 지척에 다가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살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제 손으로 교리를 어긴 어린 주교를 참살함으로써 굳건한 신앙을 증명했으나, 그 사건은 천살의 가슴에 분명한 상흔을 남겼다.
– 언제까지…….
천살은 그 말에 대답할 수 없었으니까.
‘천마시여.’
믿는다. 마(魔)는 돌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모두를 이끌 것이다. 갈 곳 모르는 이 신앙도 반드시 보상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딱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없었다.
과연 살아남은 자들의 삶이 끝나기 전에 그 강림이 이루어질까?
천살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교는 과거를 잊어 간다. 위대함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전해 듣기만 한 이들은 이미 의혹을 품고 있다.
상황이 이런 만큼, 살아남은 이들의 생이 끝난 뒤에야 강림이 이루어진다면 교는 예전 같을 수 없을 것이다.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지상에 강림한 마(魔)는 세상의 모든 것을 피로 물들이리라.’
오래도록 전해져 온 예언이자, 의심조차 해 본 적 없는 절대적인 사실. 천살은 어느 날 이를 곱씹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마가 세상을 피로 물들인다……. 그렇다면 거꾸로 세상이 피로 물들 때는 반드시 마가 강림해 있지 않을까?
궤변일지 모른다. 하지만 천살은 충분히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 믿었다. 아니, 사실 소용없어도 무방하다. 이대로 무엇도 하지 않은 채 영원한 기다림 속에 갇혀 있기보단 나을 테니.
그러니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눈앞의 저 땅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마의 강림을 위해 준비한 제물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그의 신심과 목숨마저 바칠 것이다. 마가 강림할 세상을 마련하기 위해서.
천살이 입술을 짓깨물고 드넓은 대지를 응시했다.
‘천마시여. 들리시나이까?’
하찮은 자들을 겁박하면서까지 그대를 간절히 바라는…… 이 가련한 자의 처절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시나이까?
들끓는 눈으로 중원의 땅을 보던 천살은 이내 몸을 돌렸다.
‘지금은…….’
그리고 막 발을 내디뎌 이곳에서 멀어지려 할 때였다.
“쿨럭!”
돌연 천살이 급살이라도 맞은 듯 몸을 웅크렸다. 흡사 거대한 손이 강제로 그를 구겨 버리기라도 한 모양새였다.
그의 굽은 등이 격하게 들썩였다.
“우, 우웨에에에에에엑!”
이윽고 입에서 시커먼 피가 한 바가지 쏟아져 나왔다.
‘뭐……?’
천살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무엇이지, 이건?’
마(魔)의 잠식?
그럴 리가 없다.
마공이 익히는 이를 해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검을 어떻게 쓰든 검이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듯이.
하지만 천살은 이미 경지를 뛰어넘은 지 오래다. 극마에 이르렀다. 마(魔)가 그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그가 마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이가 마공의 부작용 따위에 시달리는 건 범이 개미에게 물려 죽는 것만큼이나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건 대체 무엇인가?
“우욱!”
천살이 또 한 번 피를 토했다.
이건 마치, 육신이 그를 배반하고 발악해 대는 것 같다.
‘심마(心魔)?’
머릿속에 또 다른 가능성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심마와는 다르다. 극마에 이르기 전, 정공을 익힌 이들보다 수배는 지독하게 겪어야 한다는 마의 관문조차 이렇게 전조 증상 없이 육신을 뒤흔들어 놓지는 않았다.
하면 이것은 대체 무엇 때문이지?
천살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갈 곳 모르는 손이 허공에서 갈피를 못 잡고 벌벌 떨렸다.
‘……설마?’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내가 지금?’
가슴을 파고들어 오는 이 감정이 그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가?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무의미하게 느끼게 된 그가 이미 수십 년 전에 잊어버렸을 그 감각을 되살리고 있는 게 맞는가?
그렇다면…….
‘확인해야 한다. 지금 당장.’
천살이 단숨에 땅을 박찼다. 육신이 검은 유성처럼 쏘아졌다.
북쪽, 그가 떠나온 황량한 대지로.
* * *
“으음.”
황종의의 얼굴에 짙은 수심이 어려 있었다. 아니, 어쩌면 거듭해서 쌓인 피로인지도 모른다.
‘쉽지 않구나.’
화음은 과거에 비할 수 없이 커졌다. 심지어 수많은 난민이 모이며 화음에 적을 두고 살아가는 이들도 헤아릴 엄두가 안 날 만큼 늘어났다.
그들이 화음에 문제없이 뿌리내리고 살 수 있게 하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맹의 도움이 있다고 해도, 황종의와 은하상단이 감당할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이대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습니까, 상단주님. 인력이 너무 부족합니다. 이러다간 다들…….”
“……알고 있네.”
황종의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인력 충원을 요청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상단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황종의가 말했다.
“지금 무당으로 간 맹도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우는소리 해서야 되겠는가?”
“맞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아네. 그래도 조금만 더 애써 보세. 전쟁이 그리 길지는 않을 테니.”
“……예.”
말을 꺼냈던 이가 쓰게 입맛을 다시더니 다시 주판을 굴리기 시작했다. 황종의의 말에 완전히 동의해서는 아니다. 그저, 자신이 불만을 토하기에는 황종의가 맡은 일이 훨씬 많음을 알기 때문이다.
당장 화음을 관리하기도 벅찬데, 무당으로 나간 맹을 지원하고 그들이 소비할 물자를 유통하는 일까지 해야 한다. 몸이 열 개가 아니라 백 개라도 부족할 것이다.
‘전쟁이 승리로 끝나기만 한다면 그만큼 높은 평가를 받을 수야 있겠지마는…….’
중원을 거머쥘 천우맹의 공신으로 남는 건 상상만으로 벅차오르는 커다란 기회다. 어쩌면 상계일통이라는 꿈 같은 일을 정말 이룩하게 될지도 모른다.
전쟁의 끝에 승리하는 쪽은 언제고 상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사람이 살고 나서의 일이지.’
명예를 얻는다 한들, 사람이 살지 못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대로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황종의가 먼저 비명횡사할 판이었다.
“……전쟁이 길어지지 않는 건 확실합니까?”
“그럴 것이네.”
아니, 정확히는 전쟁이 길어질 수가 없다.
전황을 파악하기에 가장 쉬운 방법은 자금과 물자의 유동을 파악하는 것이다. 천우맹과 사패련 양쪽 모두 이 대치를 이어 갈 여력이 없다.
양측이 한계까지 짜내어 대치를 이어 가는 상황이니, 한쪽이 바닥을 드러낸다면 어쩔 수 없이 뒤 없는 전면전에 돌입해야 할 것이다. 터전을 벗어나 대치 중인 두 세력에게 본거지까지 후퇴한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럼…….”
또 무언가 말하려던 이가 그 질문을 억지로 삼켰다. 황종의는 듣지 않고도 질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길 수 있는가.
황종의는 질문을 참아 준 이에게 작은 고마움을 느꼈다. 예전이었다면 당연히 그러하다고 답했겠으나, 지금의 천우맹에는 황종의조차 몰래 의문을 품고 있었다.
어찌하여 이리도 지지부진하고 갑갑한가. 그가 알던 천우맹은 훨씬 발걸음이 가벼웠건만.
답답한 마음을 어쩌지 못한 황종의가 다시 한번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연유야 어느 정도 짐작이 가지만, 지금 화음에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우리는 그저 그들을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예.”
황종의가 다시 눈앞에 산재한 서류에 시선을 고정했다.
어렵지만 집중해야 한다. 중원의 운명을 걸고 싸워야 하는 이들에게 자그마한 짐도 넘기고 싶지 않았다. 그럴 순 없다.
“상단주님.”
“무슨 일이냐?”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뜬금없는 소식에 황종의가 눈살을 찌푸렸다.
“손님? 지금은 객을 받을 상황이 아니니 돌아가시라 전해라.”
“그게, 여의치가 않습니다. 정확히는 상단주님의 손님이 아니라 맹의 손님인지라…….”
맹의 손님?
황종의의 두 눈에 의문이 어렸다. 그 말 자체가 황당하게 느껴져서다.
우선 지금의 중원에는 딱히 천우맹의 ‘객’이라 불릴 만한 이들이 없다. 설사 있다 한들, 중원이 어찌 돌아가는지 최소한의 정보라도 접했다면 화음이 아니라 균현으로 향했을 터.
즉, 중원의 사정에는 무지하면서 맹의 손님이라 불릴 만큼 나름대로 입지가 있는 이들이 화음에 찾아왔다는 소리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누구라고 하시더냐?”
“그게…….”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황종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고하던 이가 자꾸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 ‘객’이 이미 문 앞에 당도해 있는 게 분명했다.
“우선 안으로 모셔라.”
“드, 들어오십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한 사람은 평범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체구가 다소 작았다.
‘소년? 아니면 여인?’
무척 큰 피풍의로 전신을 가리고 있어 쉬이 알아보기 힘들었다. 원래는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이를 황종의의 앞까지 당도하게 해선 안 된다. 이는 문밖을 지키던 자들의 잘못이니, 추후 이 문제를 단단히 문책하리라 황종의가 내심 다짐했다.
어쨌든 두 객을 향해 경계를 거두지 않은 채 침착하게 물었다.
“어찌 방문하셨는지 여쭈어도 결례가 되지 않겠습니까?”
평범한 체구의 사람이 황종의의 언짢은 기색을 눈치챘는지 서둘러 답했다.
“결례를 범했습니다.”
황종의가 순간 흠칫했다. 발음이 어색하다. 중원의 말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 순간 답했던 사내가 제 피풍의를 가볍게 젖혔다.
“어…… 엇?”
황종의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해 눈을 크게 치떴다.
붉은 가사와 파르라니 깎은 머리. 유창하면서도 묘하게 어색한 발음. 이 모든 걸 조합해 봤을 때, 이 두 사람의 정체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저는 포달랍궁의 승려입니다. 궁에서는 저를 반선라마라 부릅니다.”
“바, 반선……!”
황종의가 두 눈을 더욱 크게 부릅떴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포달랍궁의 이인자이자 명실상부 서장의 거인인 반선라마를 떠나, 다른 이에게로 닿았다.
황종의는 분명 보았다. 저 문을 통해 들어오며 반선라마가 저 체구 작은 이를 모시듯이 대하는 광경을.
포달랍궁의 이인자가 모실 사람이 세상에 또 누가 있겠는가.
“그, 그럼 저분께서는…….”
작은 체구를 지닌 이가 천천히 제 얼굴을 가리고 있던 피풍의를 걷어 냈다.
그러자 드러난 아직 앳된 얼굴엔,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이 어려 있었다.
황종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어쩐지 그것이 너무도 온당하게만 느껴졌다.
‘저…분이…….’
그때, 청년의 입이 열렸다.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묵직한 목소리가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청명 도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끝 모를 거대한 존재감이 덮쳐 왔다. 황종의의 의식이 절로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