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1762화
1762화. 그렇기에 제가 있는 것입니다. (2)
타앗.
벼락처럼 뻗어 간 주먹이 부드럽게 휘도는 어깨에 닿아 튕겨 올랐다. 주먹을 내질렀던 이의 두 눈에 희미한 경악이 스쳤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어깨로 밀어 내는 힘을 그대로 실은 채 부드럽게 회전한 몸뚱이가 노도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터엉!
가슴에 닿기 직전, 다시 한번 뻗어진 손이 회전 실린 어깨를 밀쳤다.
그 순간, 섬전처럼 움직인 발이 도인의 낭심을 노렸다.
“흠!”
수십 년간 육신에 무학을 켜켜이 쌓아 온 이에게서 흔치 않은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 안에는 작은 감탄마저 어려 있었다.
탓! 타앗!
허도진인이 아래에서부터 솟구쳐 오는 백천의 발을 지그시 내리밟았다.
하나 그 순간.
스슷!
백천의 발이 기묘하게 움직이며 허도진인의 발을 휘감아 아래로 끌어당겼다.
‘엇!’
투우우웅!
다시금 백천이 허도진인의 가슴을 어깨로 들이받았다.
뒤로 두어 발짝 물러선 허도진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눈앞의 청년을 응시했다.
“거기서 흡(吸)이라니…….”
얼굴이 땀으로 잔뜩 젖은 백천은 가쁜 숨을 내쉬며 그를 마주 보았다. 허도진인은 저도 모르게 제 가슴팍을 더듬었다.
‘아무리 내력을 싣지 않은 대련이라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가슴에 공격을 허용했다. 다른 이도 아닌, 천하에 이름 높은 허도진인이 말이다.
물론 변명코자 하면 숱하게 많은 사유가 있다.
애초에 권법은 그의 장기가 아니고, 내력을 사용하지 않은 대련은 그 절박함에 있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더군다나 그는 장일소와의 격전으로 부상을 얻었다. 무인으로서의 생명을 반쯤 잃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허도진인은 이 모든 이유가 무용함을 알고 있다. 상대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잃은 이니까.
이 순간 허도진인이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하나뿐이었다.
“……훌륭하네.”
백천이 호흡을 고르더니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가르침이 뛰어나서입니다.”
허도진인은 한 점 미소조차 없이 그런 그를 응시했다.
‘아쉽군.’
정말 아쉽다.
무당의 전 장문이자,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이런 동량이 빛을 잃었음이 아쉬워 눈시울이 시큰할 정도다.
“자네 말일세…….”
허도진인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러나 백천은 뒷말을 듣지 않고 정중히 포권 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앙상한 손이 희미하게 떨리며 가슴 앞에 모였다. 이를 본 허도진인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말한들 들을 리가 없지.’
지금이라도 종남으로 가 볼 생각은 없는가.
허도진인이 하려던 말이었다. 하지만 이게 무의미할 거란 사실도 역시 잘 알았다. 그럴 사람이었다면 요 며칠 저 몸으로 흙바닥을 구르며 아득바득 달려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설프긴 하지만…… 자네는 이제 사량발천근의 묘리를 익혔네. 더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의미네.”
물론 아직은 숙달되었다고 말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어떤 무학이든 마찬가지다. 원리와 활용을 익혔다면, 완성은 본인의 몫이다.
“그럼 이제 자넨 어쩔 텐가?”
허도진인의 물음에 백천이 빙긋 웃었다. 지켜보는 이가 다 속이 편해질 만큼 시원하고 후련한 웃음이었다.
“산 위에서 할 일을 다 한 사람에게 남은 건 하나뿐이지 않겠습니까? 하산해야지요.”
“……음.”
허도진인이 나직이 침음성을 흘렸다.
이 산에는 허도진인만 머무는 게 아니다. 그러니 저 말인즉, 천우맹에 다시 합류할 마음이 없다는 의미이리라.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주저하던 허도진인은 결국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가 본 백천은, 도인으로서 이미 제 길에 올랐다. 그런 이에게 어설픈 조언이나 지적 따윈 필요치 않으리라.
“결국은 그리할 생각이로군.”
“예. 이미 정한 일입니다.”
“그럼 잠시 기다리게.”
“예?”
백천이 의아하게 되물었지만, 허도진인은 설명해 줄 마음 따윈 없는 듯 빠른 걸음으로 제 모옥에 들어가 버렸다.
홀로 남은 백천은 조금 어색하고 겸연쩍은 마음으로 허도진인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다행히 허도진인은 금세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받게나.”
“이게 무엇입니까?”
백천이 의아한 표정으로 허도진인이 내민 물건을 바라보았다. 딱히 받을 게 없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 물건이 진정 무엇인지 감을 잡지 못해서였다.
“팔을 이리 내 보게.”
허도진인은 설명 대신 백천의 팔을 잡더니, 가지고 온 물건을 쑥 끼워 넣었다.
“이건…….”
“무당에 팔을 크게 다친 어른이 계셨네. 좌수를 익히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라 어떻게든 다친 팔로 검을 쓰기 위해 만들었던 물건일세.”
백천은 눈을 끔뻑이며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어깨부터 손목까지 이어진 보호대는 갑옷이라 불러야 더 적당할 듯싶었다.
“움직여 보게.”
허도진인이 시킨 대로 팔을 움직여 본 백천은 놀라움에 작게 탄성을 흘렸다. 천근만근으로 무거워 온 힘을 다해야만 겨우 움직이던 팔이 생각보다 수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런 물건이…….”
“어깨는 상하지 않은 게 참으로 다행이었네. 어깨까지 상했다면 방법이 없었을 테니.”
백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허도진인을 가만히 보았다.
과거에 무당 사람이 쓰던 물건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상태가 백천과 아주 같았을 리 없다. 심지어 이 물건은 현재의 백천에게 꼭 맞았다.
요 며칠간 수련하지 않는 시간마다 허도진인이 이 물건을 백천에 맞게끔 틈틈이 손봐 왔다는 의미다.
“진인…….”
“잡아 보게.”
“예?”
“어서.”
백천의 동공이 떨렸다.
허도진인이 내민 것은 바로…… 검이었다.
“무당의 검은 받지 않을 셈인가?”
“그런 건 아니…….”
“걱정할 것 없네. 이건 송문고검이 아니니까. 무당의 문장이 없는, 그저 평범한 검일세.”
“…….”
“자네는 이제 화산의 검을 쓸 수 없는 몸이 아닌가? 하지만 몸이 그 모양이니 자신을 지킬 검 한 자루는 있어야지.”
“하지만…….”
“받게.”
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민하던 백천이 이내 손을 뻗었다.
새로 감은 가죽이 손바닥에 선명한 감촉을 전했다. 백천의 눈가가 짧게 떨렸다. 그의 손이 지금, 검을 쥐고 있다.
“음.”
허도진인이 보조구 앞쪽에 달린 고리에 검 손잡이를 끼워 주었다.
“어떤가?”
백천이 본능적으로 손목을 움직여 보았다.
예전처럼 움직여진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작대기를 들고 휘두르는 듯 어색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의 손에 검이 들려 있다는 점이었다.
“과거 같을 수는 없을 걸세. 하지만 자네라면 그 몸으로 익힌 사량발천근의 묘리를 검으로도 펼칠 수 있겠지. 그럼 그 한 몸을 지키기는 어느 정도 수월해질 거라네. 어찌 되었건 자네는 검수이니.”
백천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억지를 부려 시작된 관계다. 허도진인에게는 그를 가르쳐야 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눈물로 빌었다고 해도 냉정하게 내쳤으면 되었다. 그 어떤 것도 문제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허도진인은 하산할 백천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다. 심지어 밤을 지새워 백천이 쓸 물건을 고치고 다듬으며 말이다.
“진인…….”
“그만 가 보게나. 마음을 정한 이가 시간을 끄는 건 좋지 않네.”
허도진인이 몸을 돌렸다. 그 몸짓에서 허허로움이 느껴졌다.
그때, 무언가가 백천에게로 날아왔다.
턱.
날아드는 무언가를 우수로 받아 들었다.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운이 좋아 놓치지 않고 잡아 낸 데 가깝지만, 어쨌든 이 정도도 얼마 전까지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그건 무당이 자네에게 주는 선물일세. 잊지 말게나.”
“진인……?”
반사적으로 받아 든 작은 비단 주머니에서 눈을 뗀 백천이 허도진인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그는 이미 모옥으로 들어가 버린 뒤였다.
모옥을 바라보던 백천은 그 자리에서 한 번의 절을 올린 후에야 몸을 돌렸다.
받은 은혜를 지금은 갚을 길이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갚을 날이 올 것이다. 그의 삶이 이어진다면 말이다.
“후.”
산 아래를 보며 길게 숨을 내쉰 백천이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잠시 후, 조용히 밖으로 나와 하산하는 백천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허도진인의 눈빛이 깊어졌다.
‘영광을 되찾는다는 목적이 아니어도, 이전보다 더 나은 경지가 아니어도…… 사람은 노력할 수 있었구나.’
이를 조금 일찍 깨달았다면…… 그의 운명도, 나아가 무당의 운명도 달라질 수 있었을까?
허도진인이 시야에 드넓은 무당산을 담았다.
어쩌면 그도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을는지 몰랐다.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던 백천이 문득 고개를 들어 그가 내려온 산을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조용하네.’
기감이 미약해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선 고생깨나 할 거라고 각오했건만, 막상 무당산에선 천우맹의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스럽긴 하나, 이건 달리 말해 백천을 찾는 수색이 더는 이어지지 않고 있단 뜻이다.
……그래서는 안 됨을 알면서도, 돌연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가슴에 자리했다.
무당산. 이곳에서 무척 많은 일을 겪었다. 지난 몇 주가 마치 몇 년처럼 느껴질 만큼.
잠시 눈을 감았다.
이제 그는 화산의 제자도 아니고, 세상의 주목을 받던 무인도 아니다. 꿈꿔 왔던 찬란한 미래는 사라졌으며, 언제까지고 곁에 있으리라 믿었던 이들 역시 모두 멀어졌다.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이는 바라던 바를 무엇 하나 손에 쥐지 못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그 자신에게 물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대답은 말로도, 마음으로도 할 수 없다.
다시 눈을 뜨고 발을 내디뎠다.
증명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저 스스로 믿고자 함이다.
모든 것을 잃고도 그는 여전히 백천임을.
* * *
호가명의 눈빛은 서릿발 같았다.
그의 눈앞에는 민가들이 놓여 있었다. 밥 짓는 연기가 곳곳에서 올라왔다.
한때는 그도 저들과 같은 삶을 살았다. 날 때부터 무인이었고, 사람 죽이는 걸 처음부터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이들과는 다르다.
‘과거에 내가 당했던 것과 무엇이 다를까?’
대답이야 정해져 있다. 전혀 다를 바 없다. 알고 있다. 호가명도 이제는 저항하는 이가 아닌, 필요에 의해 사람을 짓밟는 이가 되어 버렸다. 아주 오래전부터.
작게나마 죄의식이 들기는 했다.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지금의 호가명은 망설임을 모두 버렸다.
고작 죄의식 때문에 망설이기엔 너무 멀리 왔다. 장일소에게는 잘난 듯이 말했지만, 그 역시 과거의 호가명일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은 그저 책(策)에 집중해야 한다.
‘딱히 대단한 수가 아니야.’
대단한 수는 그가 아닌 장일소가 준비하고 있을 터다.
호가명이 벌일 일은 기껏해야 장일소가 앞으로 피울 불이 더욱 거대한 불꽃이 될 수 있도록 불쏘시개를 넣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별것 아닌 불쏘시개도 큰불을 지필 땐 반드시 필요한 법.
‘이전 혈궁 습격 때, 놈들은 분명 이전과 달리 크게 흔들렸다.’
물론 천우맹 측의 피해가 아주 크지는 않았지만, 호가명은 그 규모가 아닌 저들의 대응을 눈여겨보았다.
그리하여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의 천우맹은 지금껏 내내 사패련과 싸워 오던 때와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이어야 한다.’
망설임이 실기가 되지 않게 하는 것. 그게 군사의 역할이다.
“군사.”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호가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조리 죽여라. 단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뒤로 도열한 이들에게서 삽시간에 살기가 피어올랐다. 눈빛에 흉흉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되도록 화려하게. 이 호북의 모두가 똑똑히 알 수 있도록.”
“존명!”
“가라!”
피에 굶주린 승냥이 떼들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는 호가명의 눈에 음울한 빛이 스몄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과거의 제 모습이 뇌리에 잠시 떠올랐지만, 이내 미련 없이 그 잔영을 지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