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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 1771화


1771화. 지금 누구라고 했습니까? (6)

이틀 전.

“어떻게 됐습니까?”

윤종의 물음에 남궁도위가 대답 없이 안색만 굳혔다. 이를 본 윤종도 더 묻지 않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마찬가지인가?’

양민들을 습격한 사패련을 응징하기 위해 나섰던 천우맹도들이 하나같이 허탕을 쳤다. 그나마 화산은 적들을 잠시 쫓기라도 했지, 다른 쪽은 그림자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치미는 분노에 남궁도위가 이를 갈아붙였다.

그때였다.

쾅!

굉음이 들리고,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획 돌렸다. 커다랗게 솟아 있던 아름드리 거목이 쩌적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뭐 하는 거냐, 걸아.”

“망할!”

검집째 나무를 후려쳐서 쓰러뜨려 버리고도 화가 안 풀리는지, 조걸은 아예 쓰러진 나무를 연신 짓밟고 걷어차기 시작했다.

“개 같은 자식! 반드시 죽일 테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으아악!”

“걸아!”

“으…….”

조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양민들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차갑게 조소하던 호가명의 얼굴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듯했다.

당연한 일이다. 아직 윤종도 그 얼굴이 불쑥불쑥 떠올라 이를 갈아붙이고 화를 내리누르는 마당에, 조걸의 성정이라면 당장 사패련의 본거지로 뛰어들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오히려 잘 참았다고 칭찬해 주어야 할 일이었다.

‘호가명…….’

윤종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놈들이 양민을 인질로 삼을 수 있음은 당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설마 인질들을 그런 식으로 다룰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상상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같은 사람을 어찌 그렇게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정말 그가 윤종과 같이 붉은 피 흐르는 사람이 맞는가?

“그쪽의 피해는 어떻습니까?”

윤종이 묻자 이번에도 남궁도위가 말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생존자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리라.

내내 끓던 분노가 훅 넘치려는 느낌에, 윤종은 질끈 눈을 감았다.

‘사패련.’

안일했다. 아니, 어쩌면 무심했다. 잠깐의 방심이 이런 참상을 불러일으켰다. 불과 반나절 사이에 죽어 간 이들의 수를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다.

그 피에 대한 책임을 대체 누가 져야 하는가.

“사패…….”

“아미타불.”

분위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거워진 상황에, 혜연이 맑은 목소리로 불호를 외었다.

“모두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시주들의 탓이 아닙니다.”

“……저도 그리 생각할 수 있으면 참 좋겠네요.”

조걸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위로에 대한 대답으론 적절치 못했다. 그러나 조걸로서는 그나마 상대가 혜연이기에 최대한 자제하고 정제한 대답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면 그 자리에서 험한 소리를 쏟아내고 말았을 거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합니까? 설마 이대로 참을 생각은 아니죠, 사형?”

“…….”

“당장 복수하러 가야 할 거 아닙니까!”

“진정해라.”

“사형!”

“그건 우리가 정하는 게 아니다.”

윤종이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 끝엔 임시로 세워진 막사가 자리해 있었다.

“우리보다 현명하신 분들이 있으니까.”

“피해는?”

“냉정히 보자면 그리 큰 규모는 아닙니다.”

당군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다른 누군가가 말을 얹었다.

“하지만 상황은 최악이죠.”

처음 대답한 이는 제갈자인이었고, 두 번째 말을 한 이는 임소병이었다.

당군악은 입을 꾹 닫은 채 긴 숨을 내쉬었다.

누가 옳은지 굳이 따져볼 필요는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딱히 반발이 없는 것으로 보아 둘 다 옳은 말일 테니까.

“무슨 의미입니까?”

“피해를 입은 쪽은 양민들입니다. 희생된 수가 적다고 할 수 없지만, 맹에 대단한 손실이 있었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전력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양민들의 피해는 피해라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실로 냉정한 말이었다. 오대세가 중 하나인 제갈세가의 가주가 입에 담았다기에는 믿기지 않을 만큼.

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상황은 끔찍하다고 볼 수 있지요. 놈들이 언제 다시 양민들을 노릴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임소병이 덧붙였다.

당군악은 문득 이 상황이 우습다 생각했다.

피해 입은 게 양민이라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하는 제갈세가의 가주와, 다시 양민들이 공격받을지 모르니 최악이라 하는 녹림의 왕.

물론 말에 담긴 속내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누가 정파 출신이고, 사파 출신인지 모를 판이었다.

“왜 놈들이 갑자기 양민들을 습격했다고 보십니까?”

“우리가 이곳에 있음이 그 대답이 되지 않겠습니까.”

당군악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우릴 무당산에서 끌어내려 했다는 의미입니까?”

“그럴 것입니다.”

제갈자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노리고 그런 일을 벌인단 말입니까?”

그 대답은 임소병이 대신했다.

“그 자체에 의미가 있지요. 무당산이 험하든 험하지 않든, 높은 산 위를 점거하고 있단 사실만으로도 천우맹에 이점이 있으니까.”

“…….”

“상대가 산 밑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쓸 수 있는 전략의 가짓수가 달라집니다. 그러니 앞으로 정확히 뭘 노리고 들든, 일단은 천우맹을 끌어내려 놓으면 저쪽에겐 좋은 일이겠지요.”

당군악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 갔다.

“고작…… 그만한 이점을 얻기 위해서 저렇게나 많은 양민을 주살했다고…….”

“아직도 꿈같은 소리를 하고 계십니다.”

“뭐라?”

“사파를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말문이 막힌 당군악을 보며 임소병이 차게 웃었다.

“고작 그만한 이득이 아니라, 그 십분지 일도 되지 않는 이득을 위해서라도 지금의 몇 곱절이든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으니 사파인 겁니다. 마음이 없어서 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능력이 없었으니 못했던 것뿐이죠.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당군악의 손끝이 짧게 떨렸다. 치미는 분노에 울컥 말이 나가고 말았다.

“본인이 사파라 잘 안다는 건가?”

“그럼요.”

내뱉고도 당군악 스스로 아차 싶을 만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임소병은 개의치 않고 능구렁이처럼 태연하게 답했다.

“여기서 사파를 가장 잘 아는 이는 저겠지요. 그러니 말씀드리죠. 우리가 왜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지.”

임소병의 눈빛이 서늘했다.

“이번 전투를 통해 적들은 두 가지를 확인했습니다. 양민들을 건드리면 천우맹이 달려온다. 그리고 천우맹의 기동성이 놈들의 발을 잡을 만큼 뛰어나지 않다.”

“…….”

“그럼 이제 뭘 하겠습니까?”

“……노리겠지, 지속적으로. 그것만으로 우릴 엉망진창으로 흔들어 놓을 수 있을 테니까.”

“옳으신 말씀.”

임소병이 부채를 쫙 펼치곤 제 얼굴을 향해 살랑살랑 부쳤다.

“문제는 놈들의 움직임을 예상해도 대처가 어렵다는 사실이죠. 망할 양민들은 천하 각지에 널려 있으니, 놈들은 그냥 마음에 드는 곳을 들쑤시면 됩니다. 그럼 우리는 놈들이 원하는 곳으로 달려가야만 하는 거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사패련이 맹의 움직임을 유도할 수 있다는 건가.”

“그렇죠. 그때부터는 저놈들 마음대로 아니겠습니까. 함정을 팔 수도 있고, 뒤를 끊을 수도 있고, 빈 본진을 털어먹을 수도 있고.”

듣고 있던 모두의 얼굴이 점점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당군악은 되레 냉정해졌다.

“대처법은?”

“없습니다. 아니, 뭐 굳이 따지자면 완벽한 대처법이 하나 있긴 한데.”

“그게 뭔가?”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일시에 탁 접힌 임소병의 부채가 천막 바깥쪽을 가리켰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건, 누가 죽어 나가건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그럴 수 있다면 오히려 사방으로 움직여야 하는 저들의 뒤를 우리가 찌를 수도 있겠죠. 병법으로만 따지자면 이게 가장 완벽한 대처법입니다.”

“방법이 없다는 뜻이로군.”

임소병이 낄낄 웃었다.

“네, 네.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다 뒈진다고 해도 뻔히 그리 구실 테니까.”

웃음으로 덮인 목소리였지만, 속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숨어 있었다.

임소병도 안다. 병법상으로 아무리 완벽한 방책이라고 해도, 천우맹은 결코 그 길을 선택할 수 없음을.

극단적으로 예를 들었을 때, 녹림이 살아날 방법이 모두 칼을 버리고 글을 익히는 길뿐이라고 하면 어떨까. 임소병은 그 일을 모두에게 태연히 지시할 수 있을까?

안 된다. 설령 지시한다고 해도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럴 거라면 녹림에 몸담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천우맹도 마찬가지다. 양민을 외면하는 순간, 천우맹은 더는 천우맹이 아니게 된다. 그때부터는 맹에 소속되었던 이들의 이탈을 막지 못하게 될 것이다.

“차선은 뭔가?”

“방비를 단단히 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진영을 꾸려서 저놈들이 뭘 할지 기다리는 거죠.”

“얻어맞는 수밖에 없단 뜻인가?”

“그나마 살살 얻어맞는 방법입니다.”

당군악이 제갈자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제갈자인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단 의미다.

“현재는 그게 최선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당군악은 고민에 잠겼다. 본래 그의 선에서 결정할 만한 일은 아니나, 지금은 맹주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

곧 해가 질 것이다.

“맹의 배치는 제갈가주께 일임하겠습니다. 적의 야습에 흔들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그러면서도 언제고 다른 곳을 지원 갈 수 있도록 하고 말이죠? 이거야 원, 앞도 보고 동시에 등 뒤도 봐야겠군.”

임소병이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당군악은 동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렵겠지만, 그렇게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제갈자인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려는데, 임소병이 입을 열었다.

“하나 알아야 할 것은…….”

모두의 시선이 임소병에게로 모인다.

“지금의 논의와 결론을 저놈들이 이미 짐작하고 있을 거란 사실입니다. 우린 지금 최선을 다해 놈들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녹림왕.”

“아아, 오해 마시길. 잘못되었다는 건 아닙니다. 꼭 적의 의도를 벗어나는 길만이 병법은 아니니까. 다만…… 알고는 계시란 소립니다.”

“……명심하지.”

임소병이 남긴 말은 유난히 당군악의 입 안을 쓰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당군악도 천우맹도 다른 도리가 없었다. 놈들이 언제 양민들을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당으로의 복귀는 해선 안 될 선택이니까.

당군악은 나름대로 각오를 굳혔다.

지휘 체계를 최대한 완벽히 지켜 낸다면, 사방이 습격받는 혼란 속에서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그들이 내려야 할 가장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팽팽한 긴장 속에서 맞이한 밤, 맹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긴장해 잠을 설친 게 무색하도록 다음 날의 태양이 수월히 떠올랐고, 밝은 햇살이 대지를 비추었다.

그리고 그제야 당군악은 알게 되었다.

“……누구인가?”

“어제…… 번을 선 이들입니다.”

당군악이 주먹을 서서히 움켜쥐었다.

십여 명이 누워 있다. 아니, 십여 구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몸 곳곳에 새겨진 흉측한 자상만 보아도 간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 가능했다.

“왜 알아채지 못했는가?”

“그게…….”

당군악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원통하게 눈을 부릅뜬 시신들의 목을 살폈다. 그들의 목에 걸린 호각(號角)이 처연하게 늘어져 있었다. 저 피리를 입에 물고 불기만 해도 습격을 알릴 수 있었을 터.

그러나 간밤은 새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열 명에 가까운 인원 중 누구 하나도 호각을 부는 간단한 동작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가능한가?’

더없이 강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십여 명에 달하는 오대세가의 정예를 소리 하나 없이 모두 처치할 수 있는가? 정말?

당군악의 전신에 소름이 내달렸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어려운 일이나, 그 일이 분명 벌어졌다. 당군악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양민이 아니야.’

그들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적들의 발톱이 노리는 쪽은 명백히, 천우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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