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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 1774화


1774화. 지금 누구라고 했습니까? (9)

천천히 다가오는 청명을 보며 천면수사는 제 손목을 꾹 눌러 쥐었다. 날카로운 검에 베인 손목에서 시큰한 통증이 일었다.

‘매화검귀…….’

섬뜩한 살기다. 정파 놈이 내뿜는 기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아니……. 정사를 막론하고 살아생전 이렇게까지 형태화된 살기를 피부로 느껴 본 적이 있던가?

‘심장이…….’

가슴속 깊은 데 묻어 두었던 ‘두려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이건 패군을 앞에 두었을 때 느끼던 것과는 다소 결이 달랐다.

패군에 대한 두려움은 그가 예측할 수 없다는 점과, 언제 얼마나 잔학해질지 모른단 심리적 압박에서 비롯되는 데 가깝다. 반면 이자는 그저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긴장하게 하고 위축시킨다.

‘……누가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검귀란 말이 지독하게 잘 어울리는군.’

문제는 이제 그 검귀를 그가 직접 상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파아아앗!

청명의 몸이 일그러졌다.

빠르기에 있어서는 천하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하던 천면수사조차 순간 헛바람을 집어삼킬 만큼 대단한 속도였다.

그러나 천면수사는 경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사적으로 수십 개의 장영을 전면에 그려 내었다.

파파파파팟!

소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마치 거대한 깃발이 나부끼듯 울려 퍼졌다. 천면수사의 전면이 삽시간에 새하얀 장영으로 온통 뒤덮였다.

천면수(千面手).

시대에 따라 만화수(萬花手)로도, 소수신장(素手神掌)으로도 일컬어지는, 수많은 이름을 지닌 사파의 절세절학이 달빛 쏟아지는 들판에서 그 신위를 떨쳤다.

수많은 손그림자가 허공에 희게 피어나며 휘몰아치는 광경은 거의 눈보라에 가까워 보일 만큼 대단했다.

천면수사는 확신했다. 우선 이번 공격은 완벽하게 막아 내었음을. 그가 세운 장력의 벽에는 물 샐 틈조차 없었으니까.

하지만.

촤아아아아아악!

거대한 비단을 칼로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장영의 벽 한중간이 세로로 길게 갈라졌다.

‘뭐?’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반듯한 선도 아닌, 불규칙한 선이 생겨났다. 오히려 불규칙하기에 빠를 수 없었을 것이나, 이 공격은 살면서 견식 한 바가 없을 만큼 쾌속했다.

불합리(不合理)라는 말을 구현한 듯한 검격이 그의 장영을 말 그대로 찢어발겼다. 그렇게 열린 공간으로 검귀가 스산한 눈빛을 흘리며 소리도 없이 들이닥쳤다.

콰각!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없었다. 하강해 오는 검을 가까스로 손으로 막아 내었다. 목숨을 건지기 위한 반사적인 움직임이었다.

천면수사의 얼굴이 참혹히 일그러졌다.

대번에 살을 가른 검이 뼈에 틀어박혔다. 공력을 잔뜩 머금어 한철(寒鐵)보다 단단해진 그의 손이 어처구니없을 만큼 수월하게 갈라지고 있었다.

새하얗게 물든 제 손바닥에서 검붉은 피가 튀는 광경을, 천면수사는 똑똑히 보아야 했다. 검 너머로 보이는 검귀의 무정한 눈빛도.

가가각!

검이 비틀리며 뼈를 긁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천면수사가 기함하여 앞으로 삼장을 내뻗었다.

카앙! 카앙! 카앙!

초근거리에서 날린 섬광과 같은 삼장이 모조리 틀어막혔다. 하지만 천면수사 역시 이쯤은 예상했다는 듯 피가 쏟아지는 우수로 재차 장력을 날렸다.

우우우우웅!

장력 위에 장력이 덧씌워지고, 그 위에 다시 장력이 뒤덮였다. 단숨에 중첩을 거듭한 장력은 이내 거대한 하나의 물길로 화해 검을 든 이를 덮쳤다.

동시에 천면수사가 땅을 박차 몸을 뒤로 날렸다.

‘거리를 벌려야…….’

검수(劍首)와 권사(拳士)가 근접하여 맞붙는다면 권사가 유리하다. 이는 상식 중 상식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식보다 본능을 믿어야 할 때였다.

콰앙!

마침 천면수사가 혼신을 다해 쏟아 낸 중첩장이 작대기에 세게 얻어맞은 고드름처럼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튀었다.

천면수사는 제 본능이 틀리지 않았음을 즉시 깨달았다.

그러나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깨달음을 수정해야 했다.

파라라라락!

처음엔 무언가 작은 것들이 흔들리는 듯한 소리였다. 이는 곧 수천 마리 새들이 날갯짓하는 듯 요란해졌고, 온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천면수사의 두 눈이 점점 커다래졌다.

화폭에 붉은 물감이 번지는 것처럼, 검은 하늘을 뒤덮으며 붉은 꽃들이 번져 왔다.

‘매화!’

현 화산을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문파로 만들어 낸 화산의 상징. 그 매화가 단숨에 수십을 넘어 수백으로 불어나며 천면수사의 전신을 뒤덮을 듯 쏟아졌다.

수없이 들었다. 직접 두 눈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정면에서 마주하는 화산의 매화는 곁에서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압박을 주었다. 온몸이 짓눌리는 듯했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생생하지 않은가.

저 꽃잎 하나하나가 진짜 꽃처럼 흩날린다. 꽃잎이 온 하늘을 물들이며 휘날렸다. 바람 한 점 없는 이 들판이 봄의 훈풍에 뒤덮여 버린 것 같다.

“으아아압!”

천면수사가 미친 듯이 두 손을 휘저었다. 새하얀 장영이 구름처럼 일었다.

하지만 아무리 벽을 세워도 저 많은 꽃잎을 모조리 막을 수는 없었다.

서걱!

하나의 꽃잎이 허벅지를 스친다.

서걱!

또 하나가 명치에 박힌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셀 수 없이 많은 꽃잎이 천면수사의 육신을 난자했다. 그의 옷은 금세 피로 물들었다. 휘날리고 있는 꽃잎처럼 붉게.

‘빌어먹을.’

모든 무학에는 반드시 약점이 있다.

빠르면서 느릴 수 없고, 강하면서 부드러울 수 없으므로. 무학의 완성도를 극한까지 끌어 올린다고 해도, 근본적인 약점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적을 상대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확실히 우위를 잡을 수 있는 거리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승패를 처음으로 가르는 요소가 된다.

하지만 이자에게는 거리라는 게 의미가 없다. 검을 휘두르지 못할 만큼 근접했을 때도, 검이 닿지 않을 만큼 멀어졌을 때도, 저 지독한 검은 도무지 약점을 드러내질 않았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중과부적(衆寡不敵). 변(變)과 환(幻)으로 적을 농락해 왔던 천면수사 담여해가 지금 그 변과 환으로 상대에게 밀리고 있다. 아니, 짓눌리고 있다.

따지고 보면 상처 하나하나 모두 깊지는 않다. 그러나 이대로는 곧 전신에 성한 구석이 단 한 군데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이걸 어떻게……. 음?’

순간 담여해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혹시?’

그가 양손을 중앙으로 모았다.

서걱!

그 바람에 겨우 막아 내던 꽃잎이 아예 비처럼 쏟아져 그의 육신을 두들겼다. 그러나 담여해는 이를 악물고 전방으로 쌍장을 내뿜었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압!”

콰아아아아아아!

변화를 포기한 정직한 일격.

그러자 세상을 뒤덮을 기세로 흩날리던 꽃잎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콰아아아아앙!

무언가와 충돌하며 뒤틀린 장력이 땅에 처박혔다.

“하아! 하악!”

담여해가 거친 숨을 토해 내었다. 온몸에서 끔찍한 통증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칼날이 몸 곳곳에 수없이 박혀 있는 것만 같다.

피어오른 먼지가 서서히 내려앉으며 청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엉망진창이 된 담여해와는 달리,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다.

겉으로는 격차가 확연히 드러났다.

그러나 그에 반해 양쪽 다 표정이 묘했다. 승리나 패배를 확신하는 이가 없다.

우득.

천면수사가 피 흐르는 손을 가볍게 털었다.

‘뭐였지?’

짙은 위화감이 그를 휩쓸었다.

조금 전에 매화검귀가 보였던 틈이야 사실 대단할 것도 못 된다. 누구라도 항상 완벽할 수는 없다. 설령 실수를 저지른 게 아니라고 해도, 애초에 그만한 검기를 장시간 유지하기가 쉬울 리 없으니.

하지만 천면수사는 심기를 자극해 오는 위화감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았다.

지금 느껴지는 이 감각은 무엇일까.

완벽하게 정렬한 수천 개의 깃발 중 단 하나만 미세하게 어긋난 모습을 본 듯 거슬렸다.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무언가가 그의 신경을 긁는다.

알고 있던 것과 눈으로 본 것이 다르다. 그게 무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대체 그 무언가를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이만한 검격을 쏟아부었음에도 저리 오연하게 선 이를 상대로 그가 무엇을 해 볼 수 있…….

‘음?’

순간 천면수사의 눈빛이 번뜩였다.

찾았다. 알아냈다. 그러나 쉬이 납득하기는 어려웠다. 차가운 머리와 피 흘리는 육신이 서로 다른 답을 내놓았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천면수사가 다시 수십의 장력을 허공에 흩뿌렸다.

목표는 오직 청명. 세상을 모두 내려다보는 듯 서 있는 화산의 검수였다.

파라라라라락!

이전과 결이 다른, 휘날리는 듯한 장영이 청명의 주위를 에워쌌다. 흡사 나비가 날아오르며 춤을 추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이윽고 청명의 손에 들린 검이 수많은 칼날로 화하더니,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장영을 남김없이 꿰뚫었다.

동시에 공간을 접어 버린 양 천면수사의 코앞에 나타난 청명이 천면수사의 명치를 향해 발길질했다.

쿠웅!

천면수사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소맷자락이 삽시간에 먼지가 되어 날리고, 하얀 팔뚝에 선명한 발자국이 새겨졌다. 막아 내기는 했으나 피하진 못한 것이다.

터억!

상처를 얻었음에도, 땅에 다시 내려서는 천면수사의 표정은 낭패를 본 자의 것이라 보기에 어려웠다.

한 줄기 피가 흐르는 천면수사의 입꼬리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그의 육신은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지만…… 결론은 났다.

그간 들어 온 매화검귀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와 사소한 것 하나 놓치지 않고 수집해 온 하오문의 정보. 그 모든 걸 분석해 내렸던 결론이 지금은 어긋나 있었다.

천면수사의 입이 열린다.

“……오연해서 그렇게 서 있는 게 아니야. 그렇지?”

“…….”

“이어 가질 못한 거지. 다른 이라면 몰라도 너라면, 네 성정이라면 잠시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나를 죽여 버리고 싶었을 텐데 말이야.”

“…….”

“그럼에도 달려들지 못하는 걸 보면…… 내력이 달리는 거지. 아니, 들끓는 쪽인가? 뭐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겠지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천면수사조차도 사실은 내심 실소했다. 적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밀리면서도 상대를 가소롭게 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정답은 이것뿐이었다.

계속해서 몰아붙였다면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었을 텐데, 돌연 검기에서 힘이 빠졌다. 기껏 공격해 몰아붙여 놓고도 쉴 틈을 줬다.

얼핏 강자의 여유라고 착각할 수 있겠지만, 저자이기에 그럴 리 없다고 판단했다. 매화검귀는 사파를 상대로 여유를 부리며 시간을 낭비하는 이가 아니므로.

그렇다. 결론은 하나뿐이다.

“너…….”

천면수사가 피에 젖은 이를 드러내었다.

“약해졌구나?”

“…….”

우드득.

천면수사의 손 마디마디에서 뼈 소리가 새어 나왔다.

줄곧 청명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 애쓰던 천면수사가 이젠 청명을 향해 한 발짝을 내디뎠다. 신중히, 하지만 주저 없이.

“그것참…… 안됐군.”

천면수사가 상처 입은 사냥감을 발견한 이리처럼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실로 섬뜩한 환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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