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1783화
1783화. 이제 당신이 해야 할 후회입니다. (3)
“스승이여!”
반선라마가 멀리 앞서가는 달뢰라마에게로 재빨리 따라붙었다.
달뢰라마의 걸음이 생각보다 빠르다 한들, 무학을 익힌 반선라마가 따라잡기 어려울 리 없었다. 그러나 수월히 따라붙고도 반선라마는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고개 한번 돌리는 일 없이 앞만 보고 걸어가는 달뢰라마가 오늘따라 더없이 고독해 보였기 때문이다.
달뢰라마에게 고독이라니.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말이 또 있을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독히도 어울렸다.
본디 세상이 바라는 세존(世尊)의 모습은 황금으로 물든 거대한 장한이지만, 실제 세존의 모습은 고목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지 않았던가.
잠시 달뢰라마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반선라마가 무거운 입술을 달싹였다.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지금 말입니까.”
“해야 할 일은 끝냈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야지요.”
달뢰라마의 음성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하고 담담했다.
“……너무도 어둡습니다. 새벽이 오길 기다리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어둠으로 가득한 캄캄한 세상을 보며 반선라마가 우려했다.
“몸이 상하셨습니다. 그리 서두르지 않아도 되지 않겠습니까.”
“달이 차면 결국 기울 듯, 밤이 깊으면 새벽이 오겠지요. 하지만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
“그때는 오지 않는 새벽을 열어야 하는 법이지요.”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우나, 타협의 여지 따위는 조금도 주지 않는 단호함이 그 안에 서려 있었다.
반선라마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달뢰라마가 이미 뜻을 정했다면 그저 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반선라마의 눈에는 무모해 보일지라도 말이다.
달뢰라마의 큰 뜻은 아직 수행의 길을 걷는 반선라마 같은 이에게는 보이지 않을 테니, 이해하려 애쓰는 대신 그저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곳까지 온 목적은 이루셨습니까?”
그 물음에 무심히 걷던 달뢰라마가 처음으로 발을 멈췄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홀로 웅크린 천막으로. 천막에선 여전히 작은 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전해야 할 건 전했습니다.”
“…….”
“그리고 알아야 할 것 역시 알았습니다.”
“……무엇입니까?”
달뢰라마는 대답 대신 고개를 내저었다.
“라마께는 중요치 않은 일입니다.”
반선라마가 나직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그의 시야에도 작은 불빛이 머무는 천막이 담겨 있었다.
“스승께서 바라시던 대로, 무언가 바뀌었습니까?”
달뢰라마는 별빛 가득한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답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반선라마는 적잖이 당황했다.
“스승. 그렇다면 어째서 이 먼 데까지 걸음을 하신 것입니까? 저 화산 도인의 반응이 스승의 예상에서 벗어난 것입니까?”
그 또한 놀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어진 달뢰라마의 대답은 더욱 놀라웠다.
“알고 있었습니다.”
“……예?”
“…….”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임을…… 이미 알고 계셨단 말입니까?”
달뢰라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어찌하여…….”
반선라마가 경악하여 말끝을 흐리자 달뢰라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누군가는 저를 살아 있는 부처라 합니다. 또 누군가는 저를 두고 세상을 미혹하는 마귀라고 하지요.”
“…….”
“하지만 저는 한낱 인간일 뿐입니다.”
“스승이여…….”
“그래서겠지요.”
감긴 달뢰라마의 한쪽 눈에서 투명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아직 오욕칠정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이기에, 그저 지켜보기만 할 수 없었을 뿐입니다.”
반선라마는 달뢰라마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감각을 느낄 뿐이었다.
“헛되다고 해도, 무의미하다고 해도…… 끝까지 소리치고, 안타까워하고, 서글퍼하는 것. 그게 인간일 터이니.”
납득하기 어려웠다. 세상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반선라마도 이것만은 확실히 안다. 그러니 이번 달뢰라마의 중원행 역시 몰려오는 먹구름을 막기 위한 움직임의 일환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의 스승은 그저 저 한 사람의 아해가 가엾고 안타까워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달뢰라마를 스승으로 받드는 반선라마에게도 이는 쉬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스승이여. 부정한 이를 막으시려던 게 아니었습니까? 중원의 뜻을 모아 그를 상대하고자 함이 아니셨습니까?”
달뢰라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명쾌하질 않으니 갑갑함이 쌓인 반선라마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더욱 강대해졌을 것입니다. 아니, 더욱 강대해지겠지요.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다면 이번에야말로…….”
“그가 아닙니다.”
“……예?”
반선라마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존재는 뜻에서 기인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존재하기에 뜻이 생기기도 합니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투성이였다. 달뢰라마는 반선라마에게 그 뜻을 세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어쩌면 설명할 수 없는 걸지도 몰랐다.
달뢰라마는 다시 천막을 물끄러미 보았다.
고해의 바다를 헤매는 이들이 고개를 들어도 보이지 않을 먼 곳을 보는 대신, 그들의 손길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곳을.
“그는 이미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그 길은 누군가의 목소리 따위로 흔들리지 않을 겁니다.”
“잘못된 것입니까?”
달뢰라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더할 나위 없이 옳습니다. 하지만 더없이 안타깝습니다.”
“…….”
“가시밭길이니까요. 자신의 영혼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화인을 스스로 끊임없이 새겨 넣는 고난의 길입니다.”
“고난…….”
“그저 바랄 뿐입니다.”
이제 달뢰라마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언제고…… 그가 고난에 지쳐 모든 걸 놓고 싶어질 때가 온다면. 투박한 말이 아닌 그 안에 담긴 간절함이 그의 길에 한줄기 등불이 되어 주기를 그저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모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어쩐지 반선라마는 알 것 같았다.
사사로운 사람의 정만으로 움직이기엔 달뢰라마는 너무도 큰 존재다. 하지만 그는 지금 사사로운 정을 논하고 있다.
그러니 이 말을 그저 곧이곧대로 해석해선 안 될 것이다. 달뢰라마가 하고자 하는 말인즉, 세상에 닥쳐올 고난을 해결할 열쇠가 사사로움에 달려 있단 뜻이리라.
‘다만 그렇다면…….’
반선라마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스승께서는 저 도장이 세상을 구할 열쇠가 되리라 믿고 계십니까.’
그리 생각한다면 이 이상한 행보도 설명이 된다.
하지만…… 이 세상에 닥쳐올 겁난의 크기에 비해 열쇠가 너무도 작고 미약하지 않은가. 이게 정녕 달뢰라마의 뜻이 맞는가?
달뢰라마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담담하고 흔들림 없는 등을 보며, 반선라마는 더는 어떤 것도 들을 수 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하나 달뢰라마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모두 했을지 몰라도, 사람에겐 아직 사람의 일이 남았다.
“하오면 스승이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이까?”
그 순간, 달뢰라마가 반선라마를 돌아보았다.
반선라마는 문득 그에게 느끼는 거리감을 숨길 수 없었다. 닿을 수 없는, 까마득한 간극.
그럼에도 그저 대답을 기다렸다.
“다가올 것에 대비하고, 또한 믿어야 할 것입니다.”
대비해야 한단 말은 곧장 이해했다. 지금부터 해야 할 건, 밀려올 겁난에 대비하기 위함이므로.
그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그리고 세상의 모든 중생을 위해.
하지만 뒷말은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믿어야 한단 말씀은……?”
달뢰라마의 깊은 눈빛이 심유하게 가라앉았다.
“세상에 상처받고, 인연에 흔들리고, 배신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람의 의지는 끝내 굴하지 않음을 믿어야 합니다.”
“청명 도장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달뢰라마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이 먼 하늘을 향하는 듯도, 혹은 그 너머를 향하는 듯도 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또한…….”
호수처럼 잔잔하고 깊은 눈빛이었다.
“방향 잃은 의지에게 해야 하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 * *
촤락.
천막 입구에 늘어진 발을 한 손으로 걷어낸 호가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임시로 꾸려진 데 반해 무척 호화로운 천막 내부가 황당할 만큼 어지럽혀져 있었다. 여기저기 술병이 나뒹굴었고, 독한 술 냄새와 여기저기 피워진 몽혼향(夢魂香)의 연기가 천막 안에 들어차 있었다. 매캐함에 순간적으로 잔기침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호가명에겐 익숙한 광경이나, 오늘은 그 정도가 과했다.
‘이렇게나…….’
몽혼향을 너무 지독하게 피워 놓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방탕하다’라는 표현을 몸소 실천하던 귀주에서의 장일소도 몽혼향을 이토록 과하게 쓴 적은 없었다.
심지어 지금은 상황이 더욱 나쁘다.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전장이지 않은가.
한숨을 억누르기 위해 잠시 입술을 깨문 호가명은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걸음마다 무언가가 툭툭 발에 차였다.
워낙에 거대한 천막이라, 방이라 부를 순 없어도 욕실이라 부르기엔 적절한 공간을 만들어 둘 수 있었다.
그곳으로 다가서니 흰 연기가 뭉글뭉글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몽혼향은 아니다. 짧게 헛기침한 호가명이 입을 열었다.
“련주님. 보고드립니다.”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호가명은 꿋꿋하게 제 의무를 다했다.
“적진에 잠입했던 하오문주가 매화……. 화산검협과 맞닥뜨렸고, 고전 끝에 겨우 이탈하여 복귀했습니다.”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충분하진 않아도 저들 사이에 불신의 씨앗을 심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목적은 거의 이루지 못한 바, 전체적으로는 실패라 결론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호가명이 앞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안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문득 눈앞의 발을 걷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기이한 점은 하오문주의 보고 내용인데…… 화산검협 청명이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맞는다면 지금이야말로 저들의 목을 조를 절호의 기회일 것입니다. 다만 하오문주의 말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는…….”
호가명이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핥았다.
입술이 마르고 목이 탔다. 지금 그의 보고가 얼마나 중차대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장일소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련주…….”
더는 참지 못한 호가명이 결국 목소리를 높이려던 그때였다.
촤악!
호가명의 바로 앞에 문처럼 드리워져 있던 발이 걷히며 새하얀 증기가 구름처럼 쏟아져 나왔다.
“흐음…….”
그리고 그 속에서 장일소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물에 젖은 채 길게 흘러내린 머리칼과 세월에 걸쳐 새겨진 숱한 상처가 몸에 드리워져 있었다.
“사실일 거란다.”
“련주님…….”
호가명은 잠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예상과 달리 장일소의 모습이 너무도 평온해 보였기 때문이다. 몽혼향에 취해 나른한 게 아니다.
“담여해의 말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고…….”
저벅. 저벅.
하체에 긴 천을 두르고 걸어 나온 장일소는 호가명을 지나쳐 다탁 위에 놓인 커다란 잔을 잡아 들었다.
“상관없잖니, 가명아.”
“……련주님?”
“사실이건 아니건, 놈이 부상을 입었든 아니든, 그런 건 아무 상관 없단다.”
장일소의 입술이 비틀렸다. 요사스러운 미소를 만면에 드리운 채 술잔을 물끄러미 보았다. 동경처럼 매끈한 잔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누구보다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
“중요한 건 놈이 아니라 바로 나 아니겠니?”
장일소가 손을 휘저었다. 거대한 천막이 일시에 크게 펄럭이며 안을 채우고 있던 매캐한 연기가 화르륵 밖으로 빠져나갔다.
“련주…….”
“기분이 무척 좋구나. 이상하게 내도록 흐리던 머리가 이제야 맑게 갠 느낌이야.”
호가명이 짧게 몸을 떨었다. 저 눈빛과 표정만 보아도 그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장일소가 한 말이 그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꾸며 낸 게 아님을.
어제까지와는 분명 달랐다. 한동안 장일소를 휘감고 있던 희뿌연 무언가가 사라진 것처럼, 지독하게도 선명했다.
“련주님!”
순간 격정에 차오른 호가명이 장일소를 향해 성큼 다가갔다.
“길게 끌어 좋을 게 없잖니.”
단숨에 술을 비워 버린 장일소가 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챙!
동으로 만들어진 술잔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다.
“이 기분이 깨어지기 전에…… 전쟁을 끝내자꾸나. 이제 준비는 모두 끝났으니까.”
모든 것이 선명했다. 설령 그 끝에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 해도 말이다.
온전하게 손에 넣을 수 없다면, 하다못해 부술 권리만큼은 내어주지 않는다. 그 다짐만이 흔들림 없이 장일소의 두 눈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