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1784화
1784화. 이제 당신이 해야 할 후회입니다. (4)
턱.
진송원이 들고 온 그릇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안에 담긴, 반쯤 식어 버린 죽이 잠시 요동치다 잠잠해졌다.
앞에 놓인 죽그릇을 빤히 내려다보던 백천이 진송원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진송원이 퉁명스럽게 툭 내뱉었다.
“먹게.”
“감사합니다.”
정중하게 예를 갖춘 백천이 두 손으로 조심스레 그릇을 들어 올렸다. 부들거리기는 했지만, 용케도 떨어뜨리지 않았다.
죽을 그릇째 마시는 백천을 응시하던 진송원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면박했다.
“경각심이 없군.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쩔 셈인가?”
“…….”
“우린 이제 자네의 적일세.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백천이 마시던 죽을 내려놓았다. 진송원을 보는 얼굴이 지극히 태연했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더 쉬운 방법이 있었을 겁니다. 애초에 구해 주지도 않으셨겠지요.”
“…….”
“이제 와 굳이 저 하나 죽이겠다고 죽에 독을 타는 수고까지 하실 필요야 있겠습니까?”
“말은 잘하는군.”
할 말이 없어진 진송원이 입을 닫았다. 그러자 백천은 다시 그릇을 쥐고 태연하게 들이마셨다.
진송원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왜 떠나지 않았나?”
백천이 그릇을 내리며 답했다.
“떠나라 하시지 않았잖습니까?”
“하지만 남으라 한 적도 없지.”
“…….”
“이제 여기에는 더 볼 일이 없을 텐데.”
진송원이 백천을 구했던 건 단순한 변덕 때문이었다. 아니, 내심을 굳이 꺼내자면, 누구라도 좋으니 그의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을 원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그래서 지금 그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풀어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 나아가 그를 이해해 줄지도 모르는 그런 자를 말이다.
이는 대화가 끝난 순간부터 백천이 이곳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사라졌단 뜻이기도 하다.
누구도 잡지 않고, 누구도 감시하지 않았다. 마음만 먹었다면 언제든 떠날 수 있었을 테다.
백천이 피식 웃었다.
“글쎄요. 그건 제가 정할 일이겠죠.”
그러자 복면에 가려진 진송원의 얼굴이 살짝 꿈틀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와 이곳에 있는 이들은 자네들을 향한 감정이 딱히 좋지 않네. 당장 자네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고 달려드는 이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네.”
“그렇겠죠.”
백천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냉정히 따지면 백천의 잘못은 없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리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특히 궁지에 몰린 이들은 더더욱 그러하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아직 여길 어슬렁거린다는 건, 삶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나?”
진송원의 냉소 어린 말에 백천은 곧장 대답하는 대신 남은 죽을 모조리 마셨다. 그리고 느리게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 생각했던 적은 있지요.”
“……음?”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딱히 아쉽거나 억울할 게 없다고 말입니다. 이제 더는 잃을 게 없다고 여겼으니까.”
“한데 지금은 아니란 말인가?”
백천의 시선이 천막 바깥으로 향했다. 열린 천막 입구를 통해 여기저기 널브러진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생각이 조금 바뀌었을 뿐입니다.”
시선의 방향을 읽은 진송원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아, 자네보다 못한 처지의 것들도 벌레처럼 어찌어찌 연명해 나가는 꼴을 보고 나니 이제 와 죽기는 아까워진 모양이지?”
“글쎄요. 그럴지도 모르죠.”
“……뭐라 했지?”
진송원에게서 옅은 살기가 새어 나왔다. 분노가 미약하기 때문에 살기가 옅은 게 아니다. 미처 다 억누르지 못해 흘러나온 것이다. 이는 실로 위험한 신호였다.
백천은 이를 느끼면서도 낯빛 하나 변치 않고 태연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조금 다릅니다.”
그는 여전히 바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아직 잃지 않은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죠.”
진송원이 말없이 백천을 내려다보았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살기가 어느새 느슨하게 풀렸다.
“할 일 없는 인생이로군.”
“그렇게 됐습니다.”
진송원이 희미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천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다르다고…….’
다른 의미로 진송원 역시 백천에게서 ‘다름’을 느꼈다.
상황은 마찬가지로 절망적이다. 아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백천이 이곳에 있는 이들보다 더욱 깊은 구렁텅이에 잠겨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곳의 이들에겐 목숨을 이어 가야 할 이유가 있지만, 백천에게는 더 이상 그런 게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럼에도…… 모두가 빛과 색을 잃은 이곳에서 오로지 백천만이 아직 희미하게나마 빛을 간직한 듯 보였다.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미약하지만, 그 빛이 지금의 진송원에겐 더없이 눈부셨다. 바라보기 버거울 정도로.
진송원은 아뜩한 느낌에 눈을 감았다. 저 먼 곳에 남아 있을 그의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천막 앞에 나타났다.
그리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들어온 그는 백천을 힐끔 일별하더니 이내 진송원에게 귓속말을 전하고 휭하니 나가 버렸다.
진송원은 잠시 침묵 속에 백천을 응시했다. 그러다 입을 뗐다.
“자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그럴 기회는 사라진 모양이로군.”
“예?”
백천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밖에서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벽에 기대 죽은 시신 같던 이들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 속도에 차이가 있을 뿐, 한 사람도 남김없이 움직였다.
순간 백천의 뇌리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전장에 투입되는 겁니까?”
“그 정도면 다행이겠지.”
“……그럼?”
“총동원령이 내려졌네. 한 사람도 남김없이.”
백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총동원령.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곧바로 알아듣고 만 것이다.
굳이 보태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진송원은 아예 쐐기를 박듯 말했다.
“전면전일세.”
백천의 이마가 순식간에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 * *
호가명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걸 느꼈다.
‘갑자기…….’
장일소의 정신이 맑아졌으니, 이는 응당 기꺼워할 일이다. 결코 우려할 만한 건 아니다.
그러나 정신이 맑아지고 내린 첫 번째 명령이 총동원령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하나둘 모여드는 사패련의 군세를 지켜보던 호가명이 슬쩍 제 옆에 선 장일소를 곁눈질했다.
다르지 않다.
반개한 눈과 미세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 자신만만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요기가 흐르는 얼굴. 이는 지금까지 오랜 세월 보아 온 장일소의 모습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마음에 걸렸다.
“……련주님.”
“말하렴.”
“지금 총동원령을 내리심은 곧…….”
“그래. 알잖니.”
장일소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제대로 된 전쟁을 벌일 거란 뜻이지. 전면전 말이다.”
“……이토록 급작스레 말입니까?”
“걱정되니?”
호가명이 짧게 숨을 내뱉고는 단숨에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려가 큽니다. 보고드렸다시피 지금 내부 상황이 녹록지 않습니다. 물자는 부족하고 사기는 최악입니다. 더 큰 문제는, 사패련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이들 간의 관계가 최악에 치달아 있단 점입니다. 거기에…….”
“거기에.”
다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말허리를 잡아채어 온 장일소가 비릿하게 웃었다.
“련주에 대한 의심과 성토가 싹트고 있다. 그렇지?”
호가명은 차마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흘렸다. 물론 이 모든 걸 제외하더라도 지금이 전면전을 벌일 적기가 아님은 분명했다.
“천면수사가 제 임무를 완벽히 달성하지는 못했으나, 분명 놈들에게 분란의 씨앗은 남겼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련 내부를 정비하며 씨앗이 발아하기를 기다려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가명아, 가명아……. 왜 이리 답답하게 구느냐.”
장일소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련주님?”
“너라면 알고도 남지 않니. 전쟁에선 반드시 더 뛰어난 이가 이기지 않는다는 걸.”
“…….”
“대답해 보렴. 전쟁에서 이기는 건 어떤 쪽이지?”
호가명이 입 안 살을 잘근잘근 씹었다.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있어서였다. 지금 장일소가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에.
“전쟁을 치르는 이들은 반드시 망가진단다. 그럴 수밖에 없지. 숱하게 사람을 죽여야 하고, 옆에선 동료가 죽어 나가는데 망가지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니. 당장 내일은 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거기다 대고 백날 침착하라고, 이성을 찾으라고 소리쳐 봐야 개소리밖에 안 된단다.”
호가명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일소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전쟁에선 더 잘난 쪽이 이기는 게 아니라, 덜 망가지는 쪽이 승리하는 거란다.”
이미 몇 번이고 겪어 보았다.
그들보다 강대한 세력을 상대로 승리를 거머쥐었고, 그들보다 나약한 이들을 상대로 고전을 거듭하기도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우리가 얼마나 완전한지는 중요하지 않단다. 지금 우리의 처지가 적보다 나은지가 중요한 거지.”
천하를 양분하는 두 집단은 이미 발을 뺄 수 없는 진흙탕 속에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다. 사패련이 망가진 만큼 천우맹도 망가졌다.
‘냉정하게 바라본다면 저들의 상태가 조금 더 안 좋다.’
그러니 장일소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호가명의 의문과 염려는 아직 남아 있었다.
“련주님의 뜻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승기를 더 굳힐 수 있는 시점이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예. 매화검귀 놈이 천면수사를 물리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천면수사가 죽거나 회복할 수 없는 부상을 입은 건 아닙니다. 천면수사가 언제 또 같은 일을 벌일지 모른단 공포가 놈들을 좀먹을 것입니다.”
“……흐음. 그리고?”
“또한 저들은 우리가 사용할 계략이 천면수사 하나뿐이 아님을 능히 짐작할 것입니다. 그 역시 저들의 불안을 부채질할 터. 그러니 련주님, 지금은 일단 시간을 끌면서…….”
호가명이 말꼬리를 흐리며 결국 입을 다물었다. 말하는 와중에 깨달은 탓이었다. 어째서 장일소가 지금을 적기로 여기는지.
장일소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다. 놈들은 반드시 내가 또 다른 계략을 꾸미리라 생각하고 그에 대비하려 들겠지.”
그들도 장일소를 오래도록 봐 왔다. 장일소의 계략은 늘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어 왔다. 그는 흡사 멀리서 쏘는 화살 같은 공격을 선호했다.
“그렇기 때문이다.”
장일소가 피처럼 붉은 입술을 핥았다.
“계략에 대비하는 이들은 전면전을 고려하지 않지. 우리가 잔수작을 부릴 거라 여기는 동안은 오히려 느슨해지는 셈이란다.”
“…….”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기는 양쪽 다 마찬가지.”
장일소의 시선이 전면에 고정되었다. 땅을 뒤덮는 개미 떼처럼 빽빽한 인원이 두 사람 앞에 몰려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회복하기 전에 무너뜨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짓밟아야지. 그게 바로 이기는 방법이란다.”
호가명이 눈을 감았다. 이견을 낼 여지 따윈 없었다.
그가 아는 패군 장일소가 지금 이곳에 있다.
빽빽하게 몰려든 이들과, 그 선두에서 존재감을 발하는 수장들이 장일소 앞에서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
평소라면 이 모두의 표정과 분위기를 살폈을 호가명이지만, 지금만큼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가 바라봐야 할 이는 오직 한 명뿐이다.
앞으로 걸음을 옮긴 호가명이 장일소를 돌아보았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련주님.”
늘 차갑고 냉정하던 그의 목소리마저 살짝 떨려 나왔다.
“명을!”
호가명이 부복했다. 그러자 그 뒤로 도열한 이들 역시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았다.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장일소는 그의 앞에 부복한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일순 숨이 턱 막힐 만한 광경이지만, 장일소는 숨죽이는 대신 익숙한 미소를 지었다.
“가자꾸나.”
그가 몸을 돌렸다. 붉은 장포가 커다랗게 펄럭였다.
“중원을 손에 넣으러.”
가장 선두의 핏빛 장포가 깃발처럼 펄럭이고, 사패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