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1785화
1785화. 이제 당신이 해야 할 후회입니다. (5)
세상이 진동한다. 아니, 격동한다.
“달려라!”
새삼 알게 되었다. 피가 끓어오르는 데는 긴말도, 열의에 찬 격려도 필요치 않음을.
적을 향해 달리는 것만으로도 사패련의 사기는 전에 없이 끓고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피어오른 이 열기의 팔 할 이상은 선두에 보이는 저 붉은 장포 입은 사내가 불러일으킨 것이리라.
전쟁에는 명분이 필요하다. 보급 역시 중요하다. 완벽한 전술과 운영도 결코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광경을 본다면 새로이 알게 될 터다.
자신을 사파라 칭하는 자들에게는 그 모든 것보다 오직 한 가지, 승리에 대한 확신이 중요함을.
“이 정도라고…….”
천면수사 담여해가 희미하게 앓는 듯한 소리를 흘렸다. 당혹감 어린 시선이 선두에 휘날리는 붉은 장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만큼 확신한다는 거겠지.’
장일소가 직접 나선 전투에서는 패하지 않는다. 반드시 승리한다.
사(邪)의 이름을 내건 이들에게 이 명제는 확고한 믿음을 넘어 신앙에 가깝다. 담여해가 슬쩍 뒤쪽을 곁눈질했다.
‘심지어는 이놈들마저 마찬가지군.’
사패련주가 아닌 그의 명에 따라야 할 하오문도들 역시 두 눈에 기이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이게 장일소라는 거군.’
괴이할 정도의 장악력이다.
이들은 지난 패배 역시 장일소가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믿는 듯했다. 사패련은 장일소가 있었던 곳에서는 반드시 승리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만일 미리 길게 설명하며 준비를 시켰다면?’
상황과 작전을 파악하기엔 좀 더 쉬웠을지 모른다. 싸울 준비 역시 조금 더 철저히 할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열광적인 분위기는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쟁 중에 시간이 생긴다면 반드시 패배에 대해 생각하게 되니까. 전쟁에서 패배란 죽음이고,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렵다.
장일소는 걱정에 사로잡힐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오직 흥분하고 기대에 부풀 시간만을 부여했다. 그래, 지금처럼.
혀끝이 썼다.
천면수사는 옆쪽, 저 멀리에서 보이는 한 무리를 흘끗 보았다. 선두에 선 남자의 표정이 꽤 볼만했다.
‘태양궁주.’
어처구니없겠지. 이토록 달아오른 분위기가 선뜻 이해 가지 않을 테니. 아니, 어쩌면 왕족인 그조차 할 수 없는 일을 너무도 손쉽게 해 버린 장일소에게 열등감이라도 느끼고 있으려나?
그러나 천면수사는 태양궁주를 비웃지 못했다. 아마 자신의 표정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므로.
‘만인방, 하오문, 남해태양궁, 이곳에는 없는 혈궁. 그리고…… 수로채와 흑귀보의 잔당들까지.’
전력은 차고 넘친다. 정파 놈들과 자웅을 겨루기에 부족함이 없다. 거기에 넘치는 사기까지 더해진다면?
‘아니, 심지어 하나 더 있지.’
하오문주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선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흑의인 무리가 고요히 달리고 있었다.
혼이 자꾸만 몸에서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진송원이 씌워 준 복면이 끈덕지게 피부에 달라붙어 왔지만, 백천은 그게 갑갑하단 생각도 못 했다.
이미 다른 일에 크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토록 급작스럽게 총공격을 감행한다고?’
장일소답지 않다. 아니, 너무도 장일소다운 것인가?
전술도 전략도 보이지 않는 총공격이다. 백천이 그동안 봐 온 장일소라면 벌이지 않을 만한 터무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또 한없이 장일소답지 않은가. 이 시점에 사패련이 뒤 없이 부딪쳐 올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테니까.
‘대체……!’
그러나 백천에게는 생각을 정리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빨리 움직여!”
“서둘러라, 이 느려 터진 놈들!”
“뒤처지는 놈들은 모조리 베어 죽이겠다! 내 손에 죽고 싶은 놈들은 어디 마음대로 해 봐라!”
등 뒤에서 사패련도들이 연신 고성을 내질렀다. 위협적이라기보다는 악을 쓰는 것에 가깝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장일소가 직접 나서서 이끌고 있으니. 뒤처지는 이들이 나와서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면, 저들의 목숨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더 빨리 뛰라고!”
백천의 입에서 차츰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이 속도를 계속 유지한다고?’
정상적이지 않은 속도다. 세력의 규모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과 열이 움직이는 속도가 다르듯, 백이 움직이는 것과 천이 움직이는 것은 천양지차다.
하지만 이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고 있었다. 비정상적으로 치솟은 열기가 그걸 가능케 한다. 마치 지금껏 해 온 모든 일이 오직 이 한순간을 위해서였다고 외치는 것 같다.
“허억! 허억!”
백천의 턱이 열리고 가슴이 들썩였다.
‘빌어먹을!’
무학을 대부분 잃은 몸으로는 발을 맞추기조차 버거웠다.
계속 이만한 속도로 진격한다면 맹이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사패련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면 후에 벌어질 일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빤하다.
‘어떻게 하지?’
초조함에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하지만 당장은 대책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얼굴을 덮은 복면이 흘러내린 땀으로 금세 축축이 젖어 들었다.
백천이 결국 뒤로 조금씩 처지기 시작했다.
복면인들이 같은 복면을 쓴 백천을 힐끔 일별하더니 무심하게 추월해 갔다.
‘제기랄!’
이를 악문 백천이 진기를 끌어 올리려 했지만, 금이 간 단전은 흘러나오는 진기를 가닥가닥 끊어 놓기만 했다.
“이 개 같은 놈이!”
대열에서 처지는 백천을 보며 사패련의 무인 하나가 눈을 까뒤집었다.
“좋은 말로 해서는 말귀를 들어 처먹지 않는다 이거지? 오냐!”
이를 갈아붙인 사패련도가 벼락처럼 도를 뽑아 백천의 등을 향해 휘둘렀다.
“쓸모없는 척추를 끊어 주마!”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공격이었다. 등 뒤에서 날아드는 강한 살기에 백천이 기겁했다.
‘막아야…….’
하지만 이런 순간에도 손이 말썽이었다.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백천이 저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으려는 그 순간.
카앙!
날아들던 도가 백천의 등판 바로 앞에서 튕겨 나갔다.
“웬 놈이냐!”
“우리 쪽엔 관여하지 않는다.”
잔뜩 진노했던 장한이 앞을 막아선 진송원을 보더니 움찔했다. 진송원은 서늘한 눈으로 장한을 노려보았다.
“그게 원칙이었을 텐데? 머리가 지극히 나빠 잊어버리기라도 했나?”
진송원의 기세에 눌린 장한이 벌겋게 얼굴을 붉히며 바락바락 외쳤다.
“련주의 명이다! 네놈이…….”
“그럼 련주더러 직접 오라고 해.”
“뭐야? 가, 감히!”
“궁금하군.”
진송원이 사패련도를 노려보며 씹어뱉었다.
“과연 네놈들의 그 대단하신 련주께서 조무래기 목 하나 떨어져 나가는 데도 관심을 줄지.”
“…….”
“어디 확인해 볼까?”
진송원이 검을 꽉 움켜쥐자 장한이 파랗게 질려서 뒤로 물러났다.
명에 따르는 건 물론 중요하지만, 명령보다 더 중요한 것도 있기 마련이다. 진송원의 말대로 위에서는 그의 목숨 하나 떨어져 나가는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결국엔 장한이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기죽은 그를 경멸하는 눈길로 흘끗 본 진송원이 심드렁하게 몸을 돌렸다. 그러곤 곧장 백천의 어깨를 잡더니 제 쪽으로 훅 끌어당겼다.
“번거롭게 하는군.”
“……죄송합니다.”
진송원이 대답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백천의 어깨를 잡은 채로.
단순히 어깨를 잡아끌어 주는 게 아니다.
어깨에 맞닿은 진송원의 손에서부터 중후한 진기가 밀려 들어왔다. 그 덕분인지 백천은 한결 손쉽게 경공을 운용할 수 있었다.
한숨 돌린 백천은 크게 당황했다.
요상결(療傷結)이 아닌 이상, 타문의 진기는 되레 독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진송원의 진기는 어떠한 충돌도 없이 백천의 순환을 돕고 있다.
“이건…….”
“별것 아닌 재주네.”
잠시 망설이던 진송원이 뒷말을 이었다.
“내 문파의.”
점창이 아닌, 내 문파.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너무도 짙어서 백천은 일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가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말했다.
“별것 아니라기에는…….”
대단한 기예다. 과연 점창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그러나 돌아오는 진송원의 대답은 무심했다. 아니, 무심을 가장했다.
“무의미하네. 이제 곧 사라질 잔재주에 불과하니까.”
백천의 눈빛이 희미하게 떨렸다.
점창이 사라진다면, 점창의 무학도 사라질 것이다. 아니, 무학뿐 아니라 점창의 모든 게 사라질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수백 년간 지키고 전해 온 것들 모두가.
이는 과연 어떤 기분일까.
하지만 진송원의 입에서 나온 건 찰나의 비웃음이었다.
“동정이라도 할 셈인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래야겠지. 지금 걱정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자네이니.”
진송원의 말이 백천을 현실로 되돌렸다.
“이대로 천우맹이 사패련에게 짓밟힌다면 딱히 억울할 것도 없겠지. 늦든 빠르든 모두가 겪을 결말은 같을 테니까.”
백천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종말. 그리고 단절.
그래, 진송원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어쩌면 그 종말이 점창보다 화산에 더 빨리 다가올지도 모를 상황이 아닌가.
“장문인. 정말…… 천우맹과 진심으로 싸울 생각이십니까?”
“…….”
“지금이라도…….”
“자네 목을 비틀어 버리기는 어렵지 않네. 그리고 나는 그리 인내심 깊은 사람이 아니지.”
서늘한 살기가 백천을 향해 쏟아졌다.
“나는 개일세. 짖으라면 짖고, 기라면 기지. 심지어 거름 밭에서 구르라 하면 망설이지 않고 구른다네. 그뿐이야.”
하지만 백천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진송원을 마주 보았다.
“이는 옳지 않은 일입니다.”
“진작부터 그랬지. 호북에서부터. 아니, 어쩌면 운남에서부터.”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백천의 말에 진송원이 실소했다.
“뭐가 늦지 않았다는 거지?”
“장문인께서…….”
“자네가 모두를 설득하기라도 할 텐가? 우릴 다시 정파로 받아들일 수 있게? 자네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나?”
“…….”
백천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니겠지.”
나직한 진송원의 웃음이 백천의 폐부를 찔렀다.
백천도 알고 있다. 비단 백천뿐만이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불가능한 일임을.
이제 점창이란 문파는 존속이 불가능하다.
사패련이 이긴다면 당연히 점창의 이름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천우맹이 이긴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팽가와 공동은 멸문지화에 이르렀고, 소림은 전력의 절반을 잃었다. 아니, 죽은 이의 면면을 보면 전력의 칠 할 이상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일에 점창이 협력했다. 과연 세상이 그런 점창을 용서할까?
그래, 어쩌면 백천은 용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어 간 이들의 친인이 과연 점창이라는 문파가 세상에 다시 이름을 내거는 꼴을 용납하겠느냐는 말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백천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고뇌하며 입술을 짓깨물었다.
진송원은 그런 그를 무심히 응시했다. 백천의 눈은 조용히 들끓고 있었다.
‘이 와중에 말이지.’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놈이다.
제 문파가 멸문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도 이 작자는 점창을 걱정하고 있다. 설사 그게 제 문파의 안위와 맞닿은 일이라고 해도, 지금 상황에 다른 문파의 처지를 헤아리기가 어디 쉬운가.
진송원은 흘끗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숱한 복면인들이 그를 따라 달리고 있다. 검은 복면에 뚫린 구멍 사이로 드러난 눈은 하나같이 빛을 잃었다. 생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잿빛 눈.
진송원이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터였다.
그에게 남은 일은 사지를 찾아드는 것. 더는 숨 쉬지 않을 방법을 찾아 안식에 잠기는 것뿐이다.
그럼 이 가슴도 더는 이토록 욱신거리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