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1787화
1787화. 사패련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2)
“진영을 갖추어라!”
“사패련이 쳐들어온다!”
거의 화탄이 떨어진 듯했다.
사패련이 진군해 온다는 소식은 천면수사의 위협에서 겨우 벗어나 마음을 놓으려던 천우맹의 맹도들을 삽시간에 혼란으로 밀어 넣었다.
“저, 정말? 놈들이 정말 지금 밀고 들어오는 건가?”
“개소리 지껄일 시간에 움직여!”
“얼마나? 얼마나 오는데?”
“전부!”
“뭐?”
“총진격이다! 모조리 몰려오고 있다잖아!”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오늘 이곳에서 강호의 운명이 결정지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저, 전부?”
덜컥 공포심이 밀려든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이, 이렇게 급작스럽게……!”
“빨리 움직이라고! 제대로 포진도 하기 전에 공격받아서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으면!”
굳어 있던 이가 삐걱대며 고개를 애써 움직였다. 그리고 다급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다다닷!
빠른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형!”
나는 듯이 천막으로 달려간 조걸이 문을 과격하게 걷어 젖혔다. 그러나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조걸의 어깨를 잡더니 옆으로 밀쳤다.
“비켜 봐!”
“아악!”
밀려난 조걸이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천막에서 뛰쳐나온 이는 윤종이었다.
윤종은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미 난리가 났다. 모두가 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명령하는 사람도, 따르는 사람도 얼굴이 창백했다.
윤종은 표정을 굳힌 채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동하기에는 늦었어.’
대군을 움직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러니 이쪽에 유리할 만한 장소로 이동해서 적들을 맞이할 만한 여유는 없을 터였다.
이동 중에 습격당하는 최악의 사태를 피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단단히 지키는 수밖에 없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조걸이 외쳤다.
“사, 사형! 사패련 놈들이 여기로 몰려오고 있답니다.”
“나도 눈이랑 귀가 있다.”
윤종이 거칠게 목소리를 높였다.
‘빌어먹을.’
아직 전쟁 중이다. 언제든 다시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질 수 있었다. 그러니 이번 일도 이상할 건 없다.
이를 알면서도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왜 지금이지?”
이해가 안 되었다.
하오문주를 이곳에 침투시켜 혼란을 획책하고 있지 않았던가. 분명 달리 노리는 바가 있었을 텐데, 왜 갑자기 모든 계획을 뒤엎고…….
“글쎄요. 딱히 상관이 있겠습니까?”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윤종이 움찔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한 손에 부채를 든 임소병이 어느새 다가와 서 있었다.
“녹림왕.”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왜 여기 있는데요? 지금 상황이…….”
조걸이 놀라서 외치자 임소병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시겠지만, 저는 말귀 못 알아먹는 영감님들 귀에 경 읽는 취미가 없어서 말이죠.”
“허…….”
“그나마 말 통하고 목소리에 힘도 좀 실리는 사람 옆이 딱 제격이거든요.”
임소병의 눈길이 정확히 윤종에게로 향했다.
“안 그렇습니까? 윤종 도장.”
“…….”
“물론 백천 도장이 있었다면 그리로 갔겠지만, 아쉬운 대로?”
임소병이 한쪽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 묘한 도발이 실린 표정이었다. 그러나 윤종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지극히 담담한 반응에 임소병은 김이 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부채를 펼쳐 살랑살랑 흔들었다.
윤종이 물었다.
“그보다, 상관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저들이 기존 계획을 폐기한 이유는 알 수 없죠. 아니, 굳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종의 사정으로 계획을 수정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임소병의 눈빛이 다소 어둡게 가라앉았다.
“담여해를 보내 사패련이 뭔가를 획책하고 있다고 느끼게끔 만드는 것 자체가 계략이었을 수도 있지요.”
“……예?”
“덕분에 우리는 이곳에 발목이 잡히지 않았습니까, 보다시피.”
임소병의 부채 끝이 주변을 쭉 훑었다. 부채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드넓게 펼쳐진 평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딱히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딱 하나가 바뀌었을 뿐이지요.”
“……지형.”
“정답입니다.”
임소병이 자못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대량의 인원이 맞붙는 전투에서 지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따로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윤종의 얼굴이 더욱더 굳어졌다.
백 전(百戰)은 몰라도 수십 전은 치렀다. 소수로서 다수와 싸워 보기도 했고, 다수와 다수의 전쟁도 치러 봤다.
그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던 한 가지는, 아무리 무인의 전투가 일반적인 군의 전투와 양상이 다르다고 해도 그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일반적인 전투의 양상과 닮아 간다는 점이었다.
“……당했구나.”
윤종이 앓듯이 목소리를 흘렸다. 미처 다 이해하지 못한 조걸이 답답해하며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사형! 알아듣게 말 좀 해 보십시오.”
“……시간의 문제다.”
“예?”
“천면수사가 이곳을 들쑤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쯤 뭘 하고 있었을까?”
“그야…….”
“상황을 수습하고 무당으로 다시 복귀할 준비를 했을 거다. 조금 더 서둘렀다면 지금쯤 무당에 다시 진을 친 후일지도 모르고.”
조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반문했다.
“그게 뭐가 어쨌다는 겁니까?”
“그럼 우리는 무당산에서 놈들을 맞이할 수 있었겠지.”
“……뭐가 다릅니까? 놈들은 무당도 잘 공략했잖습니까? 산에 불도 지르고, 습격도 하고.”
윤종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래. 그게 문제다.”
“예?”
“그건 무당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그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뜻이다. 산에 불을 지르고, 수백의 인원을 희생양으로 몰아넣고, 허를 찔러 습격도 하고.”
“…….”
“놈들이 지금까지 워낙 당연하게 그리해 왔기에 우리도 당연하게 여겼지. 하지만…….”
“상황이 우월하다면 계략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임소병이 윤종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완성했다.
“최고의 전략은 그 우월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 말투가 지나치게 태연해서, 윤종은 저도 모르게 임소병을 노려보았다.
“그리 태연자약하게 할 말입니까?”
“굳이 그렇게 눈빛으로 힐난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한 일이 없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다만…….”
임소병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뭘 할 수 있었을지도 생각해 보셔야겠죠.”
윤종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임소병의 말이 틀리지 않기 때문이다.
임소병은 녹림의 수장, 즉 사파 출신이다. 어떻게 해도 사파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는 그가 지금껏 천우맹 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건 든든한 뒷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맹주인 현종과 총사인 청명, 그리고 암묵적으로 화산의 대표자로 인정받던 백천까지.
관철할 힘이 없는 옳음이란 참으로 허망한 것이다. 현종이 두문불출하고, 청명이 침묵하고, 백천이 축출된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임소병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건…….”
“뭐, 굳이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과하려던 건 아닌데요?”
“중요한 건 지금부터니까요.”
임소병이 너른 들판을 보며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회전(會戰)은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형태의 전쟁이죠. 변수가 너무 많거든요.”
임소병이 윤종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니 이제 마음을 단단히 먹어 주셔야겠습니다.”
“저는…….”
윤종이 잠시 침묵했다.
임소병의 말뜻을 안다. 지금 화산은 머리를 잃은 몸뚱이와 같다. 하지만 맹 내에서 화산이 가진 힘은 아직 살아 있다.
이제 누군가는 그 머리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게 이대제자에 지나지 않는 이라고 해도.
“하나 제게는 무겁습니다.”
“이대제자라서?”
“…….”
“그거 아십니까? 제가 아는 누구는 이대제자 때도 장문에게 바락바락 대들며 장문대리 자리까지 낚아채더군요.”
조걸이 피식 웃고 말았다.
“돌이켜 보니 진짜 미친 사람이네.”
그들에게 백천은 어른이었다. 나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고 하지만, 그들이 꼬꼬마일 때 백천은 이미 성인이었으니 당연히 그리 여겼다.
시간이 흘러 백천의 입장에 서고 보니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실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저는…… 사숙과는 다릅니다.”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제가 이곳에 온 이유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
“언젠가 백천 도장이 그러더군요. 만약 자신에게 의지할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땐 윤종에게 가라고. 그라면 잘해 낼 거라고 말입니다.”
“……사숙께서요.”
“어떻습니까?”
윤종이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겪으면 겪을수록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좇아야 하는 이의 등이 얼마나 거대했는지.
‘사숙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사숙도 청명이 녀석을 보며 이런 암담함을 느껴 왔을까? 그러면서도 그렇게 악착같이 좇았던 것인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 묻는다면, 사숙은 뭐라고 대답할까?
그 답은…… 듣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윤종이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었을 때는 어느새 유이설과 당소소, 혜연이 지척으로 다가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 실린 건 재촉이 아닌 굳건한 믿음이었다.
윤종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숙이라면 이렇게 말했겠지.
– 내가 안 하면 다른 이가 하게 되니까.
“녹림왕.”
윤종의 시선이 흔들림 없이 임소병에게로 향했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실로 단호한 그 말투에 임소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정면을 주시하는 당군악의 얼굴에 긴장이 스쳤다.
조금 전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놈들이 지척에 이르렀다.
개방에서 목숨을 대가로 전해 온 정보인 만큼 틀리지 않을 터. 놈들의 모습을 곧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아.”
당군악은 차라리 놈들이 빨리 나타나 주기를 바랐다. 모습을 드러낸 사패련이 줄 공포감이, 지금 그가 느끼는 지독한 압박감보다는 나을 듯했다.
“준비는?”
“우선은.”
제갈자인이 잠시 말을 끊었다. 입이 바싹 말라 버린 사람 같았다. 그 역시 심한 부담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 제갈자인뿐만이 아니다.
옆에 자리한 종남의 장문인 종리곡도, 개방의 전대 방주인 풍영신개도 굳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들의 공격을 물리치지 못한다면 세상은 사파가 지배하게 된다.
사도천하(邪道天下). 그 이름마저도 생소한 세상이 정말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곳에서 머지않아 그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누가 쉬이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저도 모르게 현종의 모습을 찾던 당군악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때, 귓가에 모용위경의 한숨 섞인 푸념이 들려왔다.
“이럴 때 법정 대사께서 있으셨다면…….”
놀라서 눈을 뜬 당군악이 멍하니 모용위경을 바라보았다.
법정? 지금 설마 소림의 법정을 말하는 건가?
지독히 황당한 말이었다. 그러나 당군악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이 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이를 보며 당군악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당군악을 비롯한 이곳의 모두는 사패련을 두려워하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신음하고 있구나. 비어 버린 자리에’
구파는 소림의 빈자리를 찾고, 당군악은 현종의 뒷모습을 좇는다. 화산은 제 장문제자의 부재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고, 각 세가는 창천남궁의 존재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었던가?’
모두가 함께하고 있음에도 떨쳐 낼 수 없었던 불안감. 그저 청명 한 사람의 침묵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었던 혼란의 정체가.
하지만 그렇다면…….
당군악의 상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오, 옵니다!”
거의 비명에 가까운 누군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과연, 지평선 너머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
천하의 당군악이 마른침을 삼켰다.
예상한 그대로지만, 그렇기에 더욱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끝이 없다. 헤아릴 길이 없다.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될 만큼 대단한 인의 물결이 이곳으로 빠르게 밀려들고 있었다.
“사패련……이 옵니다.”
사(邪)의 이름을 내건 침략자가 검은 파도처럼 들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