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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 1789화


1789화. 사패련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4)

결의를 끌어 올려야 했다. 아니, 하다못해 각오라도 다져야 했다. 그게 세상을 혼란으로 물들이는 이들에 맞설 정파의 자세일 테니까.

“오, 온다아아아아아!”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제 목소리를 들으며 모두 알아 버렸다. 사실은 두렵다는 것을.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이들은 통일감도, 소속감도 없이 난잡해 보였다. 그런데 외려 그것이 더욱 두려움을 부추겼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탁류 앞에 맨몸으로 선 것만 같았다.

이렇게 거센 탁류 앞에서, 곁에 있는 동료가 과연 의지가 될까? 도움이 될까?

곁에 존재하는 이도, 등 뒤를 받쳐 주는 이도 모두 사라져 버린 듯한 고립감이 느껴졌다. 드높은 계곡을 무너뜨릴 듯 밀려드는 격한 격류의 환상만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함에 기껏 치들었던 검 끝이 힘을 잃어 가고, 의지가 점차 빠져나갔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이 와중에 내공을 실은 장일소의 웃음소리가 어지러이 뒤섞였다.

이곳은 어디인가? 무엇을 위해 이곳에 섰던가?

‘나, 나는…….’

혼란 속에 길 잃은 생각은 채 피어나기도 전에 으스러졌다.

“흐아아아아아아앗!”

괴성과 함께 사패련도들이 순식간에 코앞에 다가왔다. 훅 끼쳐 오는 열기를 채 다 실감하기도 전에, 머리 위로 맹렬한 도격이 쏟아졌다.

내력을 잔뜩 밀어 넣어 둔 검을 단번에 뻗으며 도를 막았다.

카아아아아앙!

“커헉!”

그 순간, 절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검에 가해진 힘이 예상보다 어마어마했다. 버티려고 해 봐도 끝내 두어 발짝 밀려나고 말았다.

물론 고작 두 걸음 남짓이다.

이 전쟁의 향방을 논하기엔 너무도 하찮은, 작은 결과이자 과정일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밀려난 이가 하나가 아니라 열이라면? 백이라면? 아니, 수백이라면?

밀려난 걸음이 물결이 되고, 그 물결은 이내 거대한 파도로 화해 천우맹을 몰아세운다.

단 한 번의 충돌이 뒤가 없는 전쟁에 선명한 균열을 만들어 내었다.

“흐아아아아압!”

“미, 밀리지 마라!”

“밀리면 끝장이다! 버텨라!”

상황이 잘못되어 감을 직감한 이들이 비명처럼 외쳤다.

“뭐, 뭐야! 왜 밀려?”

조걸이 눈을 커다랗게 치떴다.

확연히 선두가 무너지고 있었다. 조금 섣부를지 모르지만, 어쨌든 최초의 충돌에서 천우맹 쪽이 약세를 보였음을 부정할 순 없었다.

“이럴 리가!”

물론 사패련의 수는 천우맹을 압도한다. 이는 명백하다.

하지만 수가 승부의 향방을 결정한다면 이 전쟁이 시작될 이유도 없었을 터.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무력은 천우맹이 사패련을 압도해야 했다.

그런데 지금 가장 선두에서 동수로 맞닥뜨린 이들이 뒤로 밀려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불길한 직감에, 조걸이 윤종의 어깨를 움켜잡으며 외쳤다.

“사형!”

“진정해라!”

윤종이 이를 악물고 외쳤다.

‘저 망할 자식…….’

기세나 사기 따위로는 이 상황이 다 설명되지 않는다.

무력이란 피와 땀으로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성벽 같은 것. 사기의 고하에 따라 조금의 기복은 있을 수 있지만, 상황을 완전히 뒤집는 일 따윈 불가능하다.

“의도적으로 앞쪽에 정예들을 배치했군요.”

그때, 무심한 임소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를 들은 조걸이 급히 사패련의 선두 쪽을 살폈다.

‘뭐…….’

딱히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흔한 사패련의 무인들과 다를 바 없는 듯했다. 하지만 그들이 휘두르는 병장기의 기세를 가늠해 본 조걸은 무섭게 얼굴을 굳혔다.

강하다.

사파를 겪어 본 경험을 따지자면 조걸도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다. 그런 만큼 저들이 사패련 내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이들이라는 사실을 곧장 알아챌 수 있었다.

“아니, 왜!”

전면전에선 정예를 아끼는 게 기본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해야 할 이들이 소모될 수밖에 없는 전면에 나서면 수지가 맞지 않으므로.

그래서 지금 화산도 뒤쪽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지 않던가.

“멍청한 짓이죠.”

“그러니까…….”

“그걸 이해하는 사람의 눈에는 말입니다.”

“……예?”

임소병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말도 안 되는 짓거리다. 병법으로 따지자면 말이다.

다만…….

“하지만 여기서 이 상황을 이해할 만한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맞붙은 동료들이 밀리는 광경을 보며 대부분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냐는 거죠. 저들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

말을 대신 맺어 준 윤종을 보며 임소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군인이 아니다.

물러난다고 해서 옥에 갇히는 것도 아니고, 명령에 불복한다고 목이 달아나지도 않는다. 일반적인 군이라면 전황이 불리하다고 해도 묵묵히 참아 내는 것만으로도 반전을 노릴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 전장에 그런 반전이 존재할까?

“그, 그럼 큰일 아닙니까? 당장 뭐라도 해야죠, 사형!”

조걸이 초조한 표정으로 윤종을 채근했다.

“맞아요, 사형! 이대로 가다간 손도 써 볼 수 없게 될 거예요!”

당소소도 조걸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유이설과 혜연 역시 은근한 눈빛으로 윤종을 독촉했다.

하지만 윤종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할 뿐이었다. 참다못한 조걸이 다시 외쳤다.

“사형!”

그제야 윤종이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이 자리를 지킨다.”

“예?”

조걸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그의 눈빛이 거칠게 떨렸다.

“뭔 소립니까, 사형. 지금 우리가 뭐라도 해야……!”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우리는 잘나지도, 대단하지도 않다!”

“아니…….”

“우리가 알고 있는 걸 가주님이 모르실 리 없다. 필요하다면 지시가 떨어질 거야. 이런 전장에서 각자가 제 생각대로 움직인다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된다. 그게 장일소가 진정으로 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내 말 알아듣겠어?”

“…….”

“그러니 이 악물고 버텨라. 반드시 지시가 떨어질 거다!”

조걸이 제 사형을 멍하니 보다가 임소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 윤종의 판단이 정말 옳은지 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임소병은 이 급박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을 만큼 느릿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틀리지는 않은 판단으로 보입니다. 확실히 모두가 제각각 움직인다면 문제가 커지죠.”

“그런…….”

임소병마저 동의하니 더는 반박할 수 없어졌다. 조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임소병이 부채를 펼쳐 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중얼거렸다.

“상식적으로는 확실히 그렇지만…….”

그러더니 저 멀리, 당군악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건 지휘부에게 이 상황을 수습할 만한 역량이 있을 때의 이야기겠지.’

의뭉스레 빛나던 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콰득!

거칠게 휘둘러진 도가 살을 가르고 뼈를 끊어 내었다. 곳곳에서 검붉은 피가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크하핫!”

열기에 취한 광소,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이 뒤섞인다.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숨통을 틀어막고, 전방에서 덮쳐 오는 기파가 심장을 두들겼다.

“아아아아아악!”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코앞까지 달려든 적들이 생각보다 강하다. 억지로 꾸역꾸역 맞서려다 보면 옆이 무너져, 금세 삼면에서 날아드는 공격을 감당해야 했다. 혼자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었다.

한번 기세를 내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뼈저리게 절감할 무렵, 불쑥 날아든 창이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컥!”

쓰러진다. 무너진다.

공들여 쌓은 모래성이 연이은 파도에 끝끝내 깎여 나가듯. 천우맹의 포진은 물결이 칠 때마다 차츰, 확실히 허물어졌다.

이를 인식한 지휘부에선 무너지는 모래성을 다시 세우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제갈자인이 힘을 다해 소리를 내질렀다.

“진정해라! 진정하란 말이다! 놈들이 강한 게 아니다, 이건!”

내력까지 실어서 터뜨린 목소리였지만 반응하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간절한 목소리조차 전장의 열기에 휩쓸려 부질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아, 안 돼! 도저히 안 된다고!”

그때, 제갈자인의 시야에 적을 두고 뒤로 돌아서는 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뭐 하는 거냐! 달아나지 마라!”

제갈자인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대가 약한 겁쟁이는 어디에나 있다. 고작 한 사람이 달아난 것이고, 아직 천우맹이 크게 실기를 하진 않았다.

그러나 제갈자인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천년을 버틸 거대한 성벽을 무너뜨리는 균열 역시 작은 실금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맞서란 말이다! 자리를 지키고 싸우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유리한 상황이란 말이다! 이 빌어먹을!”

제갈자인이 악을 써도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명을 뚫을 순 없었다. 끝내 체면이고 뭐고 다 내던진 제갈자인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움켜잡았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엔 간극이 있으며, 아무리 머릿속에 천하를 뒤흔들 계략이 있다고 해도 이를 실제로 써먹을 수 없다면 그저 망상에 불과하다. 제갈자인도 안다.

하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했다.

‘대체……?’

제갈자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아무리 적들이 전방에 정예를 배치해서 기선을 제압했다고 해도, 천우맹이 이토록 쉬이 무너질 만한 곳이던가?

– 하하하하하하하하핫!

쩌렁쩌렁한 장일소의 광소가 귀에 꽂혀 왔다.

저 입을 틀어막고 싶다. 아니, 하다못해 제 귀라도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제갈자인은 그중 어느 것 하나 행할 수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합니다!”

제갈자인은 결국 곁에 있는 당군악과 종리곡을 찾았다.

“이대로 두면 순식간에 전열이 무너집니다. 그럼 난전을 치러야 하는데, 저들과 벌이는 난전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지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다급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종리곡은 헛웃음만 흘렸다.

“뭘 어쩌라는 거요?”

“지휘를…….”

“내 문파의 아이들을 사방으로 흩뜨려 놓고는, 이제 와서?”

그 말에 제갈자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여기에 종남이 한데 모여 있다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렇질 않잖소. 더 나은 방법이라며 당을 만든 건 군사가 아니셨소.”

그건 제갈자인이 아닌 청명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사소한 걸 따질 때가 아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겠다는 겁니까?”

“손 놓고 있겠다는 게 아니라, 할 수가 없다는 거요. 제갈세가의 식솔들은 내 말에 목숨을 걸겠소이까?”

순간 제갈자인은 말문이 막혔다.

“우리가 가진 힘은 문파 안에서나 의미를 지니오. 지금 우리에게는 이들을 통솔할 만한 힘이 없소.”

“아…….”

제갈자인은 제 착각이 무엇인지 알아 버렸다.

힘은 체계에서 나오고, 체계를 유지하는 것은 권한이다. 적어도 제갈자인은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평시의 일이었다.

누구도 그 허무맹랑한 ‘권한’에 제 목숨을 맡기지 않는다. 각기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을 어설프게 모아 놓은 천우맹은 그 권한이 힘을 발휘하게 할 여유가 없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그럼…….”

제갈자인의 눈빛이 뒤흔들렸다. 조금 전부터 느꼈던 강한 위화감의 정체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는구나.’

이곳에 지휘부가 있음을 모두가 알 텐데, 누구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맹의 어느 누구도 지시를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이게 어떤 의미인지 어찌 모르겠는가. 제갈자인의 낯빛에 암운이 밀려왔다.

그리고 이 순간.

제갈자인이 느끼는 절망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큰 좌절을 마주한 이가 한 사람 존재했다.

제갈자인의 반대편. 자신이 마땅히 서 있어야 할 곳에 서지 못하고, 적이라 불러야 할 이들에게 둘러싸인 이.

백천의 눈빛은 차마 다 감출 수도 없는 절망에 휩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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