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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 1790화


1790화. 사패련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5)

“밀어붙여라!”

“승기를 잡았다. 단숨에 밀어 쳐라!”

사방에서 들려오는 함성에 귀가 먹먹했다. 하지만 쏟아지는 기파에 비한다면 소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패련도들이 뿜어내는 기운에 백천은 피부가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

“어…….”

퍼억!

등 뒤에서 땅을 박찬 이에게 부딪힌 백천이 그 자리에 엎어졌다. 하지만 정작 그의 어깨를 밀친 이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가 버렸다. 백천을 밀쳤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큭.”

뻣뻣한 손으로 겨우겨우 땅을 짚고 일어난 백천은 참담한 심정으로 앞을 보았다.

‘이런 거였나.’

막아서는 이들과 달려드는 이들. 사람이 모여 파도를 이루고 서로를 부숴 대고 있다. 이토록 거대한 흐름 앞에서 백천은 한낱 티끌에 지나지 않았다.

‘뒤에서 바라보는 전쟁이라는 게…….’

지금까지 백천은 늘 선두에 서는 존재였다. 가장 앞에 나서서 뒤따르는 이들을 이끌어 왔다. 그래서 알지 못했다. 뒤에서 지켜보는 전쟁이 어떤 모습인지.

어쩌면 스스로 눈치채지 못했을 뿐, 그의 안에도 우월감이 몰래 숨어 있었을지 모른다.

선두에서 싸우는 그야말로 더 큰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고. 그러니 누군가를 이끌 자격이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전장을 이끄는 이에서 반편이 무인이 되어 버린 지금에야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제힘으로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이가 겪는 전쟁의 참상을. 그저 휩쓸리며 타오르기만 하는 전쟁이 그런 이들에게는 얼마나 참혹하고 끔찍한지 말이다.

그러나 감상에 젖을 여유도 없었다. 그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백천은 다리에 힘을 주며 앞으로 나아갔다.

‘막아야 해!’

그에게 이 전쟁을 멈출 힘은 없다. 전쟁의 양상을 바꿀 능력도 없다. 어쩌면 한때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을지도 모르나, 지금의 백천은 그 모든 걸 잃었다.

하지만 아직은 할 수 있는 게 있다.

잔뜩 흥분한 무인들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백천은 앞으로 나아가며 팔을 뻗었다.

“잠시!”

그를 밀치며 부나방처럼 달려가는 이들에게 저항했다. 성치 않은 팔과 뚝뚝 끊어지는 진기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저리 비켜! 병신 자식아!”

그때 누군가가 성가시다는 듯 백천의 배를 걷어차 버렸다.

“컥!”

백천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딱히 적의 실린 공격이 아니었음에도 지금의 백천에게는 숨이 잠시간 멎을 만큼 충격이 상당했다.

하지만 백천은 주저앉는 대신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장…….”

백천의 시선은 한 사람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들끓는 용광로 같은 아수라장 속에도 여전히 차갑게 식은 등을 보이는 남자. 어쩌면 더는 끓어오를 무언가를 가지지 못한 남자.

“장문인!”

그를 향해 백천이 목이 터지도록 고함을 내질렀다.

소리야 주변의 소음에 휩쓸려 묻혀 버렸겠지만, 의지만큼은 전해진 것인지 홀로 서 있던 그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복면을 쓴 남자의 태도와 몸짓에선 그 어떤 감정의 편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백천이 입을 뗐다.

“장문…….”

진송원이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좌우에서 백천을 밀치던 이들이 옆으로 이동했고, 좁게나마 백천을 위한 길이 열렸다.

“커헉!”

그러나 백천은 채 다 걷지도 못하고 그곳에서 허물어졌다. 진송원이 한심하다는 듯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멍청하기 짝이 없군그래. 분명 기회가 있었을 텐데.”

“후욱…….”

백천이 거친 숨을 토해 냈다. 그러다 입을 틀어막으며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달아나라. 기회는 아직 있다. 살아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으니까.”

담담한 목소리는 기이할 만큼 이 지독한 전장과 어울리지 않았다. 부조화라는 말을 직접 목격한다면 이런 모습일 듯했다.

그렇다. 진송원은 이미 삶과 죽음을 초월해 버린 사람 같았다. 그렇기에 이곳이 지옥이라 한들 개의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백천은 그럴 수 없었다.

“계속하실 생각이십니까?”

“…….”

“정말 제자들이 천우맹을 공격하게끔 하실 겁니까? 아시잖습니까! 그리하면…….”

“그리하면?”

백천이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자 진송원이 대신해 주었다.

“아, 돌이킬 수 없게 된다고?”

“…….”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돌이킬 수 없게 된 지는 이미 한참 되었네.”

“하지만…….”

진송원의 눈이 어둡게 번뜩였다.

“놀아 주는 건 여기까지.”

그가 다가와 백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실로 냉정한 기세였지만 그대로 잠시 머뭇거리던 진송원이 이내 피식 웃었다.

“재주껏 살아남아 보게. 그럴 수 있다면.”

그가 백천을 그대로 들어 올리더니 저 뒤쪽으로 내던졌다. 저항할 힘이 없는 백천은 맥없이 허공을 날아 땅에 처박혔다.

쿠웅!

등이 끊기는 듯한 충격이 밀려들었다.

“으…….”

세상이 검고 희게 점멸했다.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번져 오는 명치를 부여잡고, 백천은 어렵사리 몸을 일으켰다.

“허억.”

그도 알고 있다. 이건 오만이다.

저들은 이미 모든 것을 내던졌다. 고작 몇 마디 말로 저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을 리 없다.

‘그래도…… 뭐라도 해야 해.’

설령 무의미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상황이 더욱 파국으로 치닫도록 손 놓고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백천이 비척비척 다시 무거운 다리를 움직였다.

“흐음.”

장일소는 펼쳐진 광경을 음미하듯 응시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칼날을 쑤셔 넣고, 다시없는 증오를 담아 서로를 저주한다. 욕설과 원망, 광기가 흘러넘친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밑바닥이 이곳에 펼쳐져 있다.

이런 광경을 여유롭게 바라본 이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 것인가.

다투고, 싸우고, 죽이고, 약탈하기를 반복해 온 ‘악인’의 역사를 뒤져 보아도 이만한 장관을 만들어 낸 이가 또 얼마나 있겠는가.

“하하하하핫. 우습지 않으냐, 가명아.”

장일소는 즐거운 공연을 보는 듯이 웃으며 앞을 가리켰다.

“보려무나.”

세상 모든 것을 조롱하며 요사스럽게 빛나던 그의 두 눈은 지금 짙은 쾌락에 잠겨 있었다.

“잘난 체하던 것들도, 고상한 척하던 것들도 결국 하나같이 저 모양이란다.”

대의는 잊고 오직 다가오는 이를 죽이기 위해 발악한다. 그토록 언성 높여 가며 외치던 협의를 잊고 적을 피해 달아난다. 죽지 않기 위해 동료의 등을 떠민다. 새파랗게 질린 채 주저앉아 버리기도 한다.

저들의 민낯이란 참으로 볼품없었다.

“하하하핫! 보기 좋구나! 아하하하하핫!”

장일소가 신나게 웃어젖히는 동안, 호가명의 표정은 자못 심각하게 굳어졌다.

예상 이상으로 효과가 좋다. 호가명도 저들이 이토록 쉽사리 밀려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저들의 계략? 아니, 그럴 시간이 없었어.’

계략이란 이루어져야 의미가 있다. 제아무리 대단한 전략을 짜냈다고 해도, 병력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면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다. 단언컨대 천우맹에게는 미리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하면 정말로 저리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있는 거란 말인가?

“저들의 전력이…….”

“설마 그럴 리야 있겠니.”

호가명이 장일소를 돌아보았다. 장일소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사람이란 간사한 존재란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앞과 뒤가 다르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저들이 외치는 협의가 가짜일까?”

“…….”

“아니, 진짜일 거다. 정말로 그 협의와 대의를 위하는 이들도 많겠지. 하지만 그 협의와 대의 뒤에 숨겨진 말이 있단다. 바로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이라는 말.”

호가명이 마른침을 삼켰다.

‘결국, 뜻은 이루고 싶으나 희생은 치르고 싶지 않다는 소린가?’

사실 비웃을 것도 없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을 테니까. 당장 호가명만 해도 그렇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리된 이유는 한 가지로군.’

호가명이 길게 늘어진 전선을 주의 깊게 살폈다.

‘전면에 나선 이들의 수가 과도하게 많다.’

저 많은 이들 중 정말 중원을 위해 제 목숨을 걸 각오를 갖춘 이가 몇이나 될까.

징집된 병졸이었다면 각오가 서든 말든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일반 병사들이 벌이는 전쟁에서도 목숨을 걸고 승리와 영광을 위해 싸우는 병졸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다.

하지만 군과 군이 싸우는 전장과 이곳의 전장 사이에는 단 하나,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달아날 수 있다.”

호가명이 저도 모르게 생각을 입 밖에 내며 중얼거렸다.

병졸은 달아날 도리가 없다. 겁에 질려 돌파구를 찾아본들, 보이는 거라고는 적을 향해 달려드는 수많은 아군, 앞으로는 이쪽으로 달려오는 적들뿐일 거다. 그 군세를 뚫고 달아날 수 있다면 애초에 한낱 병졸로 남을 이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무인은 다르다. 무인은 원한다면 언제든 뒤에 선 아군의 머리를 넘어 영원히 달아나 버릴 수 있다.

사패련처럼 달아나는 이들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을 감시자가 없다면.

물론 저들도 무인이니 달아날까 말까 처음부터 고민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달아날 수 있단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살고 싶다는 욕심. 굳이 목숨을 걸지 않아도 승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죽음에 과연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 그리하여 비롯된 찰나의 망설임.

이 모든 게 모여 검 끝을 둔중하게 만들 것이다. 이 전장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를 만들어 낸 것은…….

호가명의 시선이 장일소에게로 향했다.

전면 돌진은 언뜻 너무 무모해 보였다. 전술도 전략도 보이지 않는, 지독하기 짝이 없는 소모전 같았다. 호가명조차 잠시나마 의구심을 품었다. 한데 이게 그 모든 것을 헤아려 선택한 수였다는 건가?

“련주님…….”

“아니. 아니란다, 가명아. 아직은.”

“……예?”

장일소가 의뭉스럽게 웃었다.

“저쪽도 고작 이 정도는 아니겠지. 그랬다면 우리가 지금껏 고생할 이유도 없었을 테고. 알잖니.”

“…….”

“저들이 어떻게 싸워 왔는지. 왜 우리가 저들을 지금껏 꺾지 못했는지. 적어도 제 수족들도 수습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저 무능하고 하찮은 것들 때문은 아니었단다.”

호가명의 시선이 전장으로 향했다.

‘그래.’

그도 전장의 열기에 취해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천우맹을 이끄는 이가 누구였는지.

전장에서 힘을 발휘하는 건 거창한 직위도, 대단한 명성도 아니다. 목숨을 건 전장에선 명령조차도 하찮아지므로.

장일소가 그러하듯, 전장에서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콰아아아아앙!

성난 파도처럼 적을 밀어붙이던 전선의 일각에서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왔다. 장일소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렇지.”

그는 예상한 광경이라는 듯 환하게 웃었다. 색 옅은 눈동자에 흥분이 차올랐다.

“아무래도 내가 미친 것 같구나, 가명아. 이걸 재미있다 느끼는 걸 보니.”

웃음이 과하게 번지며 그의 얼굴은 마치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어느 한 군데에 고정되어 있었다. 어느새 드넓은 전장이 시야에서 모조리 지워졌다.

장일소는 단 한 사람, 그의 대적자를 시야에 한가득 담았다.

“이제 시작이지. 그래, 이제야 마침내.”

비산했던 흙먼지가 가라앉자, 그 자리에 우뚝 선 한 사람이 드러났다.

검은 화산 무복과 그 가슴에 새겨진 붉은 매화.

“그렇지, 매화검귀?”

화산검협 청명이었다. 그의 서늘한 시선이 수많은 이들을 넘어 정확히 장일소를 꿰뚫었다.

영웅과 효웅.

둘을 둘러싼 전장이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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