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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 1796화


1796화. 나는 자네를 만나고 싶었다네. (1)

진금룡이 검을 움켜잡았다. 그보다 더 빨리 이송백에게 날아든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러다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라면 속이 시꺼멓게 탔을 것이다. 찢긴 자존심이 폐부를 찔렀을 테다. 그런데 기이하게 진금룡은 지금 그 자신도 놀랄 만큼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무의미하다.’

과거의 그였다면, 제 앞에 누군가가 설 수 있단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뒤처져 있다는 느낌 자체를 참아 낼 수 없었을 테고.

하지만 지금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런 것쯤은 이제 사소하다. 더 가치 있는 게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지금 그에게는 타인의 인정보다, 명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어쩌면 ‘종남’보다 더 중요한 것.

“잠시 맡기는 것뿐이다.”

잇새로 씹어뱉은 진금룡은 태양궁주가 아닌 다른 적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빽빽하게 모여 있는 혼돈의 무리. 그가 하나하나의 얼굴을 훑었다.

“어떻습니까?”

“……손목이 좀 아픕니다.”

“흑룡왕과 비교하면?”

“내력은 비교도 어렵군요.”

혜연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흑룡왕이 패(覇)의 화신이라면 태양궁주는 중(重)의 지배자라 해야 한다. 무엇이 더 우월한지 논하기란 어려우나, 하나는 확실하다.

태양궁주의 무학은 오히려 정공(正功)에 가깝다는 것.

“시주. 제 생각이지만…….”

“예, 스님.”

혜연이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남궁도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아는 듯했다.

“결이 같다고 해야 할까요?”

“제 생각도 그러합니다.”

중후한 내력을 바탕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무학. 이는 구파일방의 필두였던 소림, 그리고 오대세가의 필두였던 남궁세가의 무학과 닮아 있었다.

차이점을 꼽자면 소림은 밀어 내고 남궁은 깨뜨리는 반면, 저자의 무학은 태우고 녹인다는 것이다.

즉, 내력이 만들어 내는 현상에 차이가 있을 뿐 그 근본은 셋 다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야 했다.

그렇기에 정공이라고 평한 것이다.

애초에 압도적인 힘을 지닌 자에게 대단한 기술은 필요치 않다. 기술이란 결국 모자란 힘을 보충하는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

강호의 역사가 흐르고, 모든 것이 뒤바뀌어도 소림과 남궁이 여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며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았을 때, 지금 상황이 딱히 좋지는 않았다.

결이 같은 무학이 부딪친다면 더 약한 쪽이 깨지는 건 자명한 이치이므로.

“사과할 마음이 생깁니다.”

“예? 누구에게 말입니까?”

“조걸 도장에게요.”

“……예?”

남궁도위가 팽팽한 대치 와중에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혜연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혜연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조걸 도장이 저를 두고 속된 말을 늘어놓을 때, 그저 우는소리라고만 여겼는데.”

“아……. 개사기 어쩌고 하는 소리 말입니까?”

“예. 그런데 막상 저 시주를 눈앞에서 보니…… 그게 그리 과장은 아니었구나 싶습니다.”

남궁도위가 나직이 웃었다.

“조걸 도장이 들었으면 그거 보시라면서 좋아했겠군요.”

그가 검을 세워 들었다.

“이왕이면 그 입으로 직접 해 주십시오.”

“저 시주를 때려눕힌 뒤에 말이지요?”

“정확합니다.”

혜연도 양손을 천천히 늘어뜨렸다. 임전의 태세. 적이 더 강하다고 해도 물러설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지켜보는 태양궁주로서는 헛웃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격에 맞지 않는다.

애초에 종남의 어린놈을 제 상대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질 떨어지는 조무래기들을 휩쓰는 일도 길어지지 않으리라 여겼다. 태양궁주가 직접 나선 이상, 당연히 그에 걸맞은 이가 나서야 할 테니까.

아무리 정파가 반파되어 버렸다고 해도, 아직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나 장로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타초경사(打草驚蛇). 뒤늦게라도 뛰쳐나온 늙은것들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쳐 죽여 단숨에 전장의 주도권을 잡는 게 그의 계획이었다.

그런데 개를 때려 불러낸 주인이 겨우 이런 조무래기들이라니.

“이번에 중원에 온 것이 그리 나쁜 경험은 아니로군. 이렇게 사람을 화나게 하는 놈들이 사방에 널려 있을 줄이야.”

“으음.”

“아…….”

태양궁주의 차가운 조롱에 앞에 선 둘이 꽤 생경한 반응을 보였다. 표정이 떨떠름한 것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굉장히 많이 생긴 듯한…….

“이걸 대체 뭐라 말해야 할지…….”

“하하하하!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스님?”

혜연은 곤란해하고, 남궁도위는 크게 웃어 대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 태양궁주를 무척 곤혹스럽게 했다.

남궁도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이 정도로 화가 난다고 하면…… 차라리 다행으로 여기는 게 좋을 거요. 그 양반을 만났다면 피를 토하고 주화입마에 들었을 테니.”

“가능성이 다분하군요. 아미타불.”

남궁도위가 낄낄 웃어 댔다.

“아니, 아니지……. 주화입마에 걸리기 전에 목이 잘리려나?”

“그 또한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쪽이 더.”

태양궁주의 얼굴에서 점차 표정이 사라졌다.

너무 화가 치밀면 오히려 감정이 사라진다더니, 그게 맞는 모양이었다. 대신 그의 분노는 즉각적인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위이이이이잉!

수천 마리의 벌떼가 일시에 날아오르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태양궁주의 장력이 두 사람을 향해 쏘아졌다. 작열하는 태양을 대지로 끌어내린 듯한 열기와 위력이 무섭게 허공을 가르며 쇄도했다.

하지만 남궁도위와 혜연, 두 사람은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갔다.

“스님!”

“예!”

둘이면 된다. 혼자서는 할 수 없어도, 둘이라면 가능하다.

파앗.

혜연의 승포 자락이 크게 펄럭였다. 허리춤에 주먹을 붙인 그가 왼손으로는 반장을 취했다.

“아미타불.”

나직한 불호를 외며 느릿하게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아라한신권(阿羅漢神拳).

소림의 숱한 절학 중에서도 백보신권과 함께 유이(唯二)하게 신권이란 이름이 붙은 권학.

그 위력은 날아드는 태양의 기세를 억누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하아아아아아압!”

거의 동시에 남궁도위의 거대한 백색 검강이 작렬했다.

태산을 검에 실어 날린 듯한 강렬한 제왕의 검격이 태양궁주의 장력에 충돌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들의 전력이 저자의 힘을 응당 막아 낼 것이라고.

하지만 그 순간, 두 사람이 동시에 눈을 치떴다.

우우웅!

남궁의 검기가 직격했음에도 장력은 여전히 파훼되지 않고 밀고 들어왔다. 물론 계속 무사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 기세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 힘 덩어리가 붕괴한다면?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이윽고 거대한 기의 폭풍이 혜연과 남궁도위를 향해 격류처럼 쏟아졌다.

콰아아아아아아!

기운으로 이루어진 탁류였다.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면 결코 버텨 낼 수 없을 듯한 기운이 그들을 한참 동안 무참히 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기운이 잦아들었을 때.

“…….”

“…….”

혜연과 남궁도위는 당황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일권, 일검에 힘을 실었던 그들로서는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단 일격에 승부가 결정 날지도 모를 상황이기도 했다. 원래대로라면 참극이 일어났을 터.

하지만 그 참극을 지금 한 검수가 막아 냈다.

“둘이 아니라…….”

이송백.

그가 한 자루의 철검으로 만들어 낸 검벽이 혜연과 남궁도위를 지켰다. 묵묵히 둘을 지킨 종남의 검수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일갈했다.

“셋입니다!”

순간 혜연과 남궁도위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걸음을 옮겨 자연스럽게 이송백의 좌우에 나란히 섰다.

“지독한 장력입니다. 거리를 두고 싸우는 건 좋지 않을 듯합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시주.”

혜연과 남궁도위. 압도적인 내력을 자랑하는 두 사람조차 태양궁주의 장력과 정면으로 맞서기란 무모하다고 판단했다.

남궁도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답은…… 저 인간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건데.”

“아미타불. 한 번만 실수해도 오장육부가 녹아내릴 것이외다.”

“자신 없으십니까, 스님?”

송아지 같은 혜연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눈빛에 못마땅한 기색이 어렸다.

“아무래도 남궁 시주께서는 겸손을 좀 갖춰야 할 것 같소이다.”

“겸손은 지긋지긋하게 배웠습니다. 누구 덕분에.”

“……그도 그렇지요. 하지만 좀 더 배워 보시지요.”

여기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짓밟힌 싹이다. 애초 원했던 대로 올바르게 자라지 못하고, 꺾이고 상처 입은 동량들.

하지만 그리하여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갑니다, 스님.”

“송백 시주, 뒤처지지 마십시오.”

“죽을 각오로 따라붙겠습니다.”

그 결과는 이 싸움이 말해 줄 것이다.

파앗!

세 사람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한 줄기 섬전으로 화한 이들이 단숨에 태양궁주를 향해 쇄도했다.

“이놈들이!”

끝 모를 당돌함에 태양궁주가 나직이 욕지거리하며 양손을 펼쳤다. 가공할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한 줌 잿더미로 만들어 주마, 이 쥐새끼 같은 놈들!”

극렬한 노기가 열기로 변해 사방으로 뻗쳤다.

당군악은 필사적으로 태양궁주 쪽을 외면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야만 했다.

‘남궁도위, 혜연, 이송백.’

하나하나 쟁쟁한 이름이다. 미래에는……. 아니, 어쩌면 이 순간부터 강호를 이끌어 갈 이들의 이름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런 그들도 태양궁주의 기세 앞에서는 모자라 보였다. 셋의 이름을 더하고도 아직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당군악은 저들을 도울 수 없었다.

‘찾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선 태양궁주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배는 더 위험할 이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면수사 담여해. 언제 어디서고 균열을 가져올 수 있는 존재.

어쩌면 담여해야말로 장일소와 호가명 이상으로 천우맹에 위협적인 인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그를 막아야 한다면 그게 바로 당군악일 터. 그렇기에 당군악은 한눈팔 수 없었다.

‘어디냐.’

당가의 가주라면 응당 갖추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눈, 또 하나는 손.

그러나 나아가 ‘위대한’ 가주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가 더 필요했다. 바로 감각이었다.

눈으로는 천면수사를 찾아낼 수 없다. 적을 찾지 못한다면 손은 무용(無用)할 뿐이다.

그렇기에 당군악은 오로지 감각으로 적을 쫓았다. 이곳 어딘가에 있을 그를 반드시 찾아내야 했다.

‘분명히 있다. 멀지 않은 곳에.’

그를 반드시…….

매섭게 감각을 곤두세우던 당군악이 순간 멈칫했다.

무언가가 섬찟하게 신경을 건드렸다. 천면수사를 찾기 위해 전력으로 감각을 곤두세웠기에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은밀하고, 패도적이며, 실로 섬뜩한 기운.

당군악이 즉시 온 힘을 다해 몸을 뒤틀었다. 거의 동시에 그의 얼굴 바로 앞으로 도격이 스쳐 지나갔다.

“아아아아악!”

저 멀리서 비명 한 줄기가 들려왔다. 하지만 살이 갈리는 파육음은 적어도 넷. 아마 셋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반으로 갈라졌을 터.

당군악은 이를 악물었다. 이마가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다.

‘뭐냐, 이 도기는.’

그는 독왕이다. 독과 암기에 있어서는 천하에서 감히 견줄 자가 없다. 그런 그의 이목을 속이고 참격을 날릴 이가 천하에 있었던가? 그것도 육중한 도를 이용해서?

공격이 날아든 쪽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당군악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당군악은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그가 지금 어쩌면 생에 다시없을 강적을 마주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날카로운 눈매에 굳게 다물린 입술. 억센 턱에는 짧은 수염이 자라 있었는데, 이것이 첫인상을 더욱 사나워 보이게 했다. 척 보아도 성미가 강팔라 보이는 놈이었다.

마치 칼 같았다. 말 그대로, 철로 만들어진 쇠붙이.

“독왕 당군악.”

“……누구냐?”

“적호(赤虎).”

“적호?”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련주님의 명이다.”

적호가 도를 천천히 다시 도집에 밀어 넣었다. 뽑는 게 아니라 거꾸로 납도한 것이다.

“너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당군악은 오늘 자신이 목숨을 걸어야 하리란 사실을 직감했다. 전신의 근육이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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