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03화 : 초량과 천향옥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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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03화 : 초량과 천향옥봉


초량과 천향옥봉

동정호를 지난 배는 장사로 순조로운 항해를 해갔다. 파천
이 개방방주로부터 비밀 서신을 한 통 받게 된 것은 아침식
사를 끝내고 나서였다. 대부분의 전서구는 부령사를 한 번 거쳐서 파
천에게로 오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길들여진 송골매로 보내진 전서
만은 부령사도 볼 수 없었으며 보아도 알 수 없는 암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서찰을 보는 파천의 얼굴은 시사각각 변화를 보였다. 서찰을 전해
준 부령사는 무슨 내용인지 알 길이 없었기에 의문만 드러내고 서 있
을 따름이었다.
파천은 깊은 생각에 홀로 잠겨들었다. 부령사는 궁금했지만 참았
다. 궁금하다고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전서는 알아서 좋
을 것 하나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제갈초홍이 그렇게 전언을 했다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역시 그
들은 혈마천이었다. 문제는 그 자가 대총사라는 데 있다. 그 자가 배
신을 하고 쫓기고 있다. 이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 무조건 구하고
봐야 한다. 내가 지금 갈 수는 없다. 천마 역시나 움직일 수 없다. 광
마존 역시 아직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누굴 보내야 하는가? 마황
검위대를 보내야 하는가? 아니면 무림맹의 힘을? 그럴 수는 없다. 그
는 드러내는 것보다는 감추어 두는 것이 여러 모로 내게 이득이다.
그렇다면……. 그래 환노를 보내면 되겠구나. 이 기회에 그들의 실력
을 점검해 볼 수도 있고. 그것이 좋겠군.’
심중의 생각을 정리한 파천은 서찰을 적어 나갔다. 역시나 암호로
표기해 나갔다.
‘자, 이러면 적의 패 하나를 미리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더군다
나 내 패는 더욱 견실해지고. 이거야말로 절로 굴러 온 복 덩어리군.
하늘이 나를 돕는 건가?’
그는 소리내어 웃고 싶었다. 적들에 대해 제대로 안다는 것은 때로
그것보다 훌륭한 무기가 없다. 파천은 갑자기 강바람을 쐬고 싶어졌
다. 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밖으로 나가는 파천. 무슨 일인지 몰라 궁
금해 하는 곽운성은 그가 건네 준 서찰을 꼬깃꼬깃 접어 송골매의 다
리에 있는 전통에 넣었다.
그리고 심중의 의문을 날리듯 하늘로 힘껏 날려 보냈다. 오늘따라
하늘은 푸르기만 했다.
마도련은 대부분의 비밀 지단 들을 흡수, 통합하거나 아예 철수시
켜 버렸다. 그러나 일부 주요 거점 지역만은 여전히 지단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총단과 가까운 지역인 장사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고곳에는 작지만 내실 있는 지단이 버티고서 이 지역을 총괄하고 있
었다.
율극의 행패가 도를 지나쳐 가자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나왔던
제갈초홍은 개파대전이 열리는 날까지 마도련 장사 지단에 머물고
있었다.
드디어 그 날이 밝아 오자 그녀는 그 동안의 마음 고생이 심했던
듯 지쳐 보이는 몸으로 율극을 데리고 장사 지단을 떠난다.
그들 일행을 배웅하러 나온 지단주 이하 지단의 무사들은 앓던 이
가 빠진 듯한 후련함을 느꼈다. 멀어져 가는 그들에게 손까지 흔들
어 보이는 지단주의 눈두덩이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내 다시는 저 괴물 같은 놈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만약 또
다시 저놈과 함께 있어야만 한다면 차라리 목숨을 끊거나 마도련을
탈퇴하는 길을 선택하겠다.”
그를 바라보는 지단의 수하들은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
를 끄덕였다.

율극은 잠이 든 듯했다. 오랜만에 그녀는 혼자 사색에 잠길 수 있
었다. 잠이 든 율극은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다. 가끔 ‘대장’ 이나 ‘형
아’를 찾았지만 다행이도 그녀를 잘 따라 주었다. 가끔씩 돌변하여
야수처럼 행동할 때도 있지만 전혀 악의는 엿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걱정한 것은 혹시나 율극이 이성을 잃고 마성에 빠져 버리면 어떡하
나 하는 것이었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참 불쌍한 사람이지만 다른 측면으로 보면 부러운 사
람이다.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한다. 마음에 드는 사람은 친근하게 대하
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표현을 한다. 어찌 보면 악동 같기도
하지만 그 행동에 원래가 악의가 깃들어 있지는 않다.
개파대전에 지존이 오실 테니 당분간은 아무런 일도 없겠구나. 고
양이 앞에 쥐? 아냐, 지존 앞에서는 순향 양이 되는 것이 신기하단 말
야. 가끔씩 대장을 부르며 지존을 찾는 것을 보면 정이 깊이 든 것도
같고. 아니면 본능적으로 자신을 돌봐 줄 사람이라 여긴 것인가?
관도상에 수많은 무림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회
천문의 개파대전을 참관하러 온 사람들일 거다. 제갈초홍은 창 밖으
로 지나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강남에 마도련에 귀속되지 않은 마도인들이 저렇게 많았던가? 하
긴 워낙에 땅덩어리가 크니 사람들이 많기야 하겠지.’
스스로 무림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는 문파에 귀속되지 않은
이들도 상당수였다. 그들 대부분은 무림이라는 척박한 토양에서 뿌
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들이라고 왜 무림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길 원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럴 만한 실력도, 자신도 없어서 그들은 자신들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을 고집하고 있었다. 적은 소음이나 마을에 터전을 잡고
꼬마 애들에게 무술을 가르치거나, 관의 일을 도와 주거나, 그도 아
니면 지방 부호들의 호위를 담당하거나 등의 갖가지 다른 생활을 하
고 있었다.
그런 그들까지 이번 회천문 개파대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워낙에 오래 전부터 무림에 명성을 날리던 인물들에 대한 일인지라
그들이 호기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멀리서라도 한 번쯤 보고 싶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스스로
마음속의 우상으로 자리잡은 인물도 있었고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
는 사람도 있었다.
저 멀리 장원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아담한
장원이었지만 그 주위로는 각지에서 벌떼같이 몰려든 사람들이 웅
성거리며 서 있었다. 대부분이 안에 들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제갈초홍의 일행들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웅
성거리기 시작했다.
“마도련이다.”
“오!”
“대단한 위용이다.”
저마다 한마디씩을 토하며 경외의 시선으로 쳐다본다. 스스로 마
도인이라 생각하는 자들은 예를 취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절로
고개가 움츠러들었다. 그들 사이로 활짝 열려진 대문이 보였고 그 앞
에는 회천문의 무사들로 보이는 인물들이 스무 명 정도 서 있었다.
마차의 문이 열리며 제갈초홍과 율극이 내렸다.
“우와, 사람 많다.”
율극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마도련의 대표로 온 제갈초홍이라고 합니다.”
호장 무사는 제갈초홍과 그의 일행을 자세히 살피더니 안으로 데
리고 들어간다. 그의 뒤를 따르는 제갈초홍은 솔직히 놀라고 있었다.
‘일개 호장 무사가 저 정도의 기도를 풍긴단 말인가? 이건 대체 어
떻게 된 일이지? 99마 중의 일인은 아닌 듯한데…….’
그녀는 의문이 들었다. 당연한 의문이었다. 그녀가 호장 무사라 생
각한 인물들은 실은 마황검위대 대원들이었다. 그가 제갈초홍을 안
내한 곳은 가운데 삼층으로 지어진 누각이었다. 그녀는 그 앞에 도열
해 있는 인물들을 보고 또 한 번 놀라고야 만다.
‘일개 호위 무사들도 무시할 수 없는 고수들이다. 이것이 어찌 된
것이란 말인가?’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서 오시오, 제갈 군사.”
“다, 당신은.”
제갈초홍은 전각 안에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오는 인물을 보고
는 어찌된 영문인지를 몰라 부르짖었다. 그는 무영존이었다.
“하하, 자 안으로 드십시다.”
[군사, 이곳을 만드신 분도 지존이십니다.]
‘그, 그랬던가? 대체 그 분의 한계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어느 정
도 알게 되었다 여겼건만……. 이제는 하나도 모르겠구나.’
그녀는 무영존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전각 안은 비교적 넓고 깔
끔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갓 지어진 전각이니 오죽하겠는가마는 그
다지 눈길을 끌 정도는 아니었다.
[지존께서는 아직 당도하지 않으셨나요?]
[그렇소.]
대전 안으로 그녀와 율극만을 안내한 무영존은 그들을 데리고 싶
숙이 들어섰다. 안에는 긴 탁자가 이 열로 놓여져 있고 그 위에는 음
식과 술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아직도 음식들을 나르고 있는 시비들
의 모습이 보였다. 주위로는 수십 명의 인물들이 앉거나 서서 저희들
끼리 뭐라고 지껄이고 있었는데 그들 옆을 지나면서 들어 보니 하나
같이 듣기 민망한 음담패설이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서 제일 안
쪽으로 안내되어 가자 그들은 호기심이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
본다.
‘모두 노인들인 것을 보니 이들이 바로 99마구나.’
그녀는 살을 찌르는 예기를 느끼고 심호흡을 했다. 율극은 뭐가 그
리 신이 났는지 연신 싱글벙글거리며 그녀 뒤를 따르고 있었다. 노인
들 중에 하나와 시선이 마주친 율극은 그를 빤히 보며 걸음을 멈춘
다. 그리고는…….
“뭘 보는데? 사람 처음 보냐?”
그 말에 노인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그가 막 발작을 일으키려고
하자 이것을 안 무영존이 노인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 녀석 바보니 신경 쓰지 마시오.]
“킥킥.”
노인은 상대가 바보라는 사실에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노마들은
갑자기 그가 키득거리며 웃자 무슨 일인가 싶어 의문을 나타낸다.
“너 바보구나.”
율극이 노인을 보며 한 말이었다. 그 말에 노인은 웃다 말고 멍청
해지고 만다. 바보에게 바보라고 놀림을 받았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노화가 치밀 듯했다. 그렇지만 꾸욱 눌러 참았다. 그것을 본 다른 노
인네들은 그가 참 무던해졌다고 생각했다. 반말 짓거리에 바보라는
말까지 들었음에도 억눌러 참고 있다니. 그들은 노인을 향해 일제히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와 율극이 안내되어 간 곳은 제일 상석 쪽이었다. 제갈초홍은
그곳에 가서 얌전히 앉아 있었지만 율극은 달랐다. 차려진 음식을 두
손에 움켜쥐고는 입으로 쑤셔 넣기에 바빴다.
“잠시 안에 들어갔다 오겠소. 잠시만 기다리면 될 거요.”
무영존은 그 말을 하고는 안으로 사라져 갔다. 아직까지 어리중
절해 있던 제갈초홍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상황을 정리해 가기 시
작했다.
‘지존께서 무림맹과 마도련을 은연중에 연합하기로 하셨나 보구
나. 그래서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밟는 것이고. 하긴 연합의 사실이
다른 세력들에게 알려지면 곤란하니.’
그녀는 머리 회전이 빨랐다. 몇 가지 일만으로 앞 뒤 상황을 물 흐
르듯 분석해내고 있었다.
둥둥둥
몇 번의 북소리가 울리고 나자 무영존이 사라졌던 곳에서 몇 사람
의 모습이 보였다. 총 아홉 명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얼굴을
탈로 가리고 있었다. 그들이 장내에 나타나자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
던 노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태상문주를 뵙습니다.”
이후 그들은 빠르게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구십구 명이 각기
배정된 자리에 앉자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장중한 분위기가 흘
러 나오기 시작했다. 제갈초홍은 감탄했다.
‘역시 저들의 명성은 헛된 것은 아니었어. 이들의 힘은 내가 생각
했던 것보다 더 대단할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도련에서 마천으로 알려진 천마에게 고
개를 숙였다.
“전 마도련의 군사인 제갈초홍이라 합니다.”
“아, 그러시오? 어서 앉으시오. 멀지 않은 길이지만 이렇게 오시느
라 수고하셨소이다.”
순간 음식을 먹기 바쁘던 율극의 손이 그 자리에서 딱 정지했다.
그리고는 방금 말을 한 탈을 쓴 인물을 주의 깊게 쳐다본다. 이런 짓
을 눈치 채지 못한 제갈초홍은 다시 자리에 앉아 돌아가는 상황을 지
켜본다.
“형…… 아?”
율극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은 제갈초홍을 놀라게 했다. 율극이 형
아라고 부르는 사람은 단 두 사람뿐이다. 하나는 광마존, 또 하나는
지존의 친구 마천. 그녀는 율극과 회천문 태상문주를 번갈아 쳐다보
았다.
“하하, 녀석 눈치 하나는 빠르구나. 그래 나다.”
그가 탈을 벗어들자 그 안에서는 천마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가?”
“형아!”
율극은 너무 기쁜 나머지 그에게로 덥썩 안겨 버렸다. 천마의 얼굴
이 찌푸려짐과 동시에 주먹으로 율극의 머리통을 갈긴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아야, 왜 때려?”
“이 녀석이 징그럽게……. 난 지금껏 사내를 안아 본 적은 없다. 그
러니 얌전하게 앉아 있어라.”
“치이, 맨날 때려.”
뭐라 뭐라고 종알거리는 그를 향해 눈을 부라리자 율극의 입이 철
썩 달라붙어 버린다.
“으음.”
너무 의외의 일이었던지라 제갈초홍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천마가 입을 열었다.
“군사, 왜 놀랐는가?”
“네? 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하하, 그렇겠지. 나야 그놈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고. 그 동안 별
일은 없었겠지? 아 참, 광마의 얘기는 나도 들었다. 미련한 놈.”
제갈초홍은 그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다 제 잘못인걸요.”
“그게 어찌 너의 잘못이더냐. 그놈이 못나서 그렇지. 그건 그렇고,
율극아.”
“왜?”
언제 그랬느냐 싶게 율극은 똘망똘망한 눈을 치켜 떳다.
“너는 여기에 있으면 곤란하니 안에 좀 들어가 있어라.”
“싫어.”
“어허, 이놈이 말을 듣지 않네.”
그가 있으면 실수를 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리 조치를 취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제갈초홍도 율극을 설득하기 시작
했다.
“그래요. 잠시만 안에 들어가 있으세요.”
“그래, 안에다 음식을 차려 줄 테니 심심하더라도…….”
그 말을 하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천마는 그를 구슬리기 시작했다.
“너,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대장을 만나게 해주마.”
“대장? 정말이야?”
율극의 눈이 왕방울만해지며 희색이 떠올랐다. 그는 더 이상 생각
할 것도 없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래쪽으로 걸
음을 딛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보고 천마는 머리를 짚었다.
“율극아, 그쪽 아니다.”
뒤에 있는 인물들에게 눈치를 주자 그 중 하나가 안쪽으로 안내
해 갔다. 바로 그때였다. 바깥에서 큰 소리가 들려 왔다.
“대상벌에서 오신 초량 대협 드시오.”
그 소리를 들은 천마는 얼른 탈을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점잖을 빼
고 몸을 뒤로 제쳤다. 대전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은 남녀 한 쌍이
었다. 제갈초홍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천마도 반쯤 몸을
일으켰다가 자리에 다시 주저앉는다. 두 사람은 고요히 발을 디뎌 다
가왔다.
저벅저벅
사방은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그들을 주의 깊게 살펴 가던
사방의 눈길을 의식할 법도 한데 그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가까
이 다가오던 두 명중 하나, 천향옥봉은 상단 쪽에 앉아 있는 한 인물
을 발견하고는 휘청했다. 그녀도 제갈초홍을 발견한 것이다.
‘아아.’
그녀에게 제갈초홍은 사질 뻘이었다. 자신의 대사형인 대총사의
제자가 바로 제갈초홍이지 않은가. 그녀의 모습을 의아하게 여긴 초
량이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소?”
“네.”
그들을 바라보던 천마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멍청한 광마존 녀석. 제 여자 하나 구해내지 못하다니. 에잉 쯧
쯧.’
그는 단숨에 놈을 쳐죽이고 싶었지만 꾸욱 눌러 참았다. 이런 것도
모르고 가까이 다가온 초량은 포권을 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대상벌에서 온 초량이라 합니다.”
“아, 그러시오. 본문의 개파대전을 축하해 주러 먼길을 달려와 주
셨으니 저로서는 기쁘기 그지없군요. 어서 이리로 오르십시오.”
천마의 말에 고개를 한 번 더 숙인 초량은 천향옥봉과 함께 천마의
우측에 가서 앉았다. 제갈초홍의 시선은 천향옥봉에게서 떠나지 않
고 머물러 있었다. 그것을 의식했음인가, 그녀는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았다. 묘한 긴장감이 장내에 감돌기 시작했다.
“무림맹 대령사께서 오셨습니다.”
또다시 들려온 소리에 제갈초홍의 얼굴이 활짝 펴졌고 천향옥봉은
놀람의 탄성을 발했다. 초량은 호기심이 담긴 시선으로 전면을 바라
본다. 역시 두 명의 인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앞장서 오는 인물은 파
천이었다. 그 뒤를 부령사 곽운성이 따르고 있었다. 파천은 들어오면
서 즉각 전음을 보냈다..
[천마, 그 동안 수고했다.]
[입에 발린 소리는 말고 내 옆을 한 번 봐 주라.]
파천은 무슨 말인가 싶어 천마의 옆을 쳐다보다 흠칫 놀란다. 그러
나 순간적인 일인지라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자운. 으음, 차라리 잘 되었군. 이 기회에 아예 저놈 손에서 자운
을 구해야겠구나.’
이 순간 초량의 얼굴도 놀람으로 굳어 갔다.
‘역시 저 자가 대령사였구나. 현 무림을 움직이는 절대자 중의 한
명. 그럼 저번에 왔던 그 자는 남도맹의 비무 대회에서 우승했다는
일인지하 만인지상객이란 자가 분명하군.”
그의 눈에서도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파천은 그를 향해 씽긋 웃어
주었다.
“여기서 또 만나는구나. 조심해라. 언제 내 검이 너의 심장을 난도
질할지 모르니.”
표정의 변화가 좀처럼 없는 초량도 이 순간만은 참을 수 없는 적대
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 자는 강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솔직히 내가 당해낼 수 있
는 수준이 아니다. 이번엔 길보다 흉이 많을 듯하니 조심해야겠다.’
어쨌든 파천도 천마 옆에 앉았다. 좌우로 나누어 앉은 그들은 서로
인사를 했다. 제갈초홍과 파천은 공식적으로는 서로 대치하고 있는
세력들의 대표들로 왔다. 그래서 마음속에서의 반가움을 내색할 수
는 없었다. 파천 옆에 앉은곽운성은 가끔씩 제갈초홍을 노려보곤 했
다. 이제 올 사람은 다 온 것이다. 더 이상은 방문객이 없을 듯하자
천마가 일어서서 큰 소리로 회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본 회천문의 개파대전을 시작한다. 회천문이 개파했음
을 여기 계신 분들의 공증과 더불어 정식으로 무림에 선포하는 바이
다.”
“우와.”
“회천문 만세.”
“태상문주님 만세.”
“와와.”
대전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 나왔다. 나머지 네 개의 전각에서
는 일반 무림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서도 이와 같은 비슷
한 선언이 있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회천문의 개파를 축하해 주었다.
연회는 시작되었다. 한참 주흥이 무르익어 갈 때였다. 아래쪽에 앉아
있던 99마 중 일인이 앞으로 나서더니 파천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
였다.
“귀 공에 대한 소문은 제가 무림에 재출도하면서 귀 따갑게 듣고
있었소이다. 무림의 절대자라른 무림5천의 일인이시니 감히 청하건
대 제가 부족하나마 귀 공의 한 수를 견뎌 보고 싶습니다.”
‘저, 저 미친 놈이.’
천마는 어이가 없었다. 파천의 실력이 이미 자신을 넘어서 있음을
몸으로 실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술에
흥이 겨워 저런 망발을 토해내다니. 그는 골이 지끈거리는지 머리를
짚었다.
‘미친 놈. 제 놈의 진정한 주군인지도 모르는 한심한 놈.’
천마의 뒤쪽에 서 있다 주석에 합류한 인물들 역시나 반응은 마찬
가지였다. 하군표는 민망했던지 머리까지 긁적였다.
[야, 이놈아. 당장 네 자리로 안 들어가.]
천마의 전음이 노인에게 정해졌다. 그럼에도 그는 물러설 수 없다
는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전면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태상문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처음으로 태상문주님께 패
하기는 했지만 저런 해송이 녀석에게까지 꿀릴 이유는 없습니다. 무
림에 과도하게 퍼진 저 자의 명성이 한낱 쓰잘데기 없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무림 천하에서 태상문주님이 최고
수임을 입증해 보이겠습니다.]
그는 충정에 불타는 시선을 잠시 천마 쪽으로 보낸다. 천마는 미치
고 팔짝 뛰고 싶었다.
“하하, 좋소이다. 귀하가 누구신지 물어 봐도 되겠습니까?”
파천이 승낙을 하고 나서자 천마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멍청한 놈. 파천이 작정하고 나섰으니 네 놈은 이제 개망실 뻗칠
일만 남았다. 제 무덤 파는 데는 하여튼 일가견들이 있어.’
그는 구개를 빳빳이 세우고는 자랑스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제 명호는 귀 공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환우마종(煥宇魔宗) 천시
효(千施斅)라고 합니다.”
초량과 제갈초홍, 곽운성 등은 분명 놀라고 있었다.
환우마종 천시효!
이 이름은 40년 전만 해도 공포의 상징이었다. 그는 마인이면서
정도인들에게 어느 정도 존경을 받았었다. 전대 소림사 방장이
었던 법문 선사와 3일 간의 비무로도 승부를 결하지 못했다는 전설
적인 고수였다. 그는 항상 자유롭게 무림을 떠돌았기 때문에 일개 문
파에 그가 귀속된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 그런 그
가 회천문에 소속되어 있을 줄이야.
사실 99마가 어떤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
지 상세하게 전해지지 않았다. 단지 몇몇 사람만이 알려졌을 뿐이지
만 그들의 이름만으로도 전 무림이 격동할 정도였다. 환우마종이 아
직까지 생존해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저리도 팽팽한 피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더욱 놀랍기만 했다. 지금 못 되어도 130세는 넘었을
노마가 중년 서생처럼 보였기 때문인다.
[천마, 저놈이 99마 중 최강자인가?]
[뭐, 그런 셈이지. 저놈 말고 두 놈이 더 있는데. 그 세 명을 저놈들
은 상당히 따른다. 이들을 은연중 이끄는 위치에 있다.]
“이제 보니 대단한 분이셨군요. 부족한 저와 손을 섞기엔 귀하의
명성이 너무 대단해서. 괜찮겠습니까?”
파천이 추켜세워 주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 듣기로 귀 공의 배분이 무림의 최고라 들었건만 그런 것은 개
의치 않습니다.”
‘놀고 있네. 네 놈은 나한테 찍혔다. 두고두고 씹어 주마.’
천마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시키지 않은 짓을 부득부득 하려고 하
는 놈들이 골치 아팠다. 그는 예전의 자신의 부하들이 그리웠다. 자
신을 하늘같이 알고 명령에 죽고 살던 그들이 너무나 그리워졌다. 파
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밑으로 내려갔다. 그가 떡 하니 버티고
서자 천시효는 눈앞에 산이 하나 가로막고 있는 듯 숨이 막혀 왔다.
그는 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자, 이제 보니 태상문주님과 버금가는 자다. 어찌 저 나이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상황을 물리고 싶었지만 이미
시작했으니 어쨌든 끝내고 볼 일이었다. 그는 어금니를 힘주어 물며
기세를 올려 본다. 그럼에도 작아져 가는 자신을 느끼며 몸을 떠어야
했다. 그는 내공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상대도 느끼고 있
을 텐데 아무런 준비도 없었다.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현 무림은 어떻게 된 것이 저런 상식 밖의 고수들이 이렇게도 많
단 말인가? 태상문주에게 패하고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는데 이놈도
그 정도라니.’
정말 현 무림의 일반적인 수준이 대체로 이 정도라면 괜히 재출도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조심하시오.”
호기롭게 외친 천시효는 빠르게 몸을 띄우며 앞으로 쏘아져 갔다.
그의 손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그가 손을 흔들자 강맹한 기류가
소용돌이치며 파천에게 빠르게 직격해 갔다. 파천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슬쩍 한 손을 들어 흔들었다. 단지 그것뿐이었건만 천시효의
장력은 흔적도 없이 소멸되어 버렸다.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기엔 스
스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최고 무공인
파한기공(破限氣功)을 끌어 올렸다. 원래는 3백 년 전 마존인 천수마
제의 무공인데 자신이 변형시켜 파한기공이라 명명한 것이었다. 기
마 자세를 취하고 두 개의 손바닥을 앞으로 뻗고 허공을 문지르듯이
흔들었다.
“흐흐아앗.”
기합성인지 괴성인지 모를 기이한 소리를 발하며 손을 떨쳤다. 그
러자 새파란 강기가 물고기의 비늘처럼 벗겨지며 빠른 속도로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몰아쳐 갔다.
쉬리리링
소리 또한 기이했다. 파천은 또다시 한 손을 내밀어 슬쩍 밀었다.
그의 손에서는 유백색 강기가 아주 느리게 뻗어 나갔다.
치지지직
두 강기가 충돌한 것치고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달군 쇠를 물 속에 담그는 듯한 소리. 분명 그랬다.
“으으으으.”
천시효의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신음이 흘러 나오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자신이 발출한 강기가 자신의 지척까지 밀려 나
와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힘을 뺄 경우 상당한 부상을 감수해야
하고, 끝까지 버티자니 다리가 후들거려 왔다. 뒤로 밀려나는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를 관전하던 98마들은 눈앞에
서 벌어지는 일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자신들 가운데서 재
일 강하다 할 수 있는 환우마종이 저 정도로 밀릴 줄이야……. 그들
로서도 예상 못한 바였다.
‘파천, 아예 그 녀석이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따끔하게 혼내 줘
라. 지금 파천이 봐 주고 있다는 걸 너희들이 알기나 할까. 에잉, 쯧
쯧.’
초량 또한 심각한 얼굴로 전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저 자의 한계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솔직히 환우마종이 약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듯한 저 태도라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땀이
맺혀 흥건했다.
환우마종은 더 이상 견딜 기력이 없었는지라 일시에 힘을 거두어
들였다.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팽팽하게 두 힘이 마주치
고 있다가 한쪽 힘이 거두어진다면 이후의 일은 뻔한 것이다. 피를
흘리며 뒤로 날려 가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연출하는 일만 남은 것이
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환우마종은 아무리 기다려도 별다른 느낌이
오지 않자 슬그머니 한쪽 눈을 떳다.
“어이구 저 한심한 꼬락서니하고는.”
천마의 말에 그제야 어찌 된 상황인지를 깨달은 환우마종은 정말
이지 쥐구명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상황에서 장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회수할 수 있다니…….’
그는 자신이 실제 겪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당당하게 인정했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귀 공께서 손속에 사정을 두신 것에 감사함
을 드립니다.”
“으음.”
“휴우.”
여기저기서 장탄식과 감탄성이 어우러져 터져 나왔다. 파천 또한
환우마종을 향해 포권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는 몸을 돌려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환우마종은 자신을 노
려보는 천마의 시선이 따가웠던지 얼른 몸을 돌려 돌아가는데 아직
도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연회는 점차 무르익었다. 여러 가
지 다양한 행사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번 개파대전은 3일간 계속
될 것이라 했다.

저녁 무렵이었다. 파천과 천마, 제갈초홍, 무영존, 그리고 율극 등
이 함께 모여 있었다. 천마가 심각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럼 네 말은 무림맹과 마도련 그리고 회천문을 연합은 하되 표면
에 드러내지 말자는…… 뭐 그런 얘가냐?”
“그렇지.”
“어차피 그 세 개의 세력 모두 네 권한 아래에 있는데 연합하고 말
고가 어디 있냐?”
천마는 당연히 품을 만한 의문을 말했다.
“그건 그렇지가 않아. 당장에 부령사 곽운성만 해도 초홍을 바라
보는 시선에 적대감이 가득했다. 그들은 쉽사리 합쳐질 수 없는 자들
이다. 오랜 기간의 적대감이 하루아침에 사그라지기를 바랄 수는 없
지. 결국 그들에게 현 무림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빌미로 잠시 연합
한다는 명분을 제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역할을 무림맹 쪽에서는
내가, 마도련에서는 제갈초홍이 맡는 거다. 두 사람과 회천문의 문주
간에 밀약이 세워졌다는 식으로 각 수뇌부에 통보하는 거다. 그럴 경
우 그들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게 된다.”
“호, 그런 뜻이 있었구먼.”
“지존, 무림맹이야 지존의 권위로 설득이 가능하다지만 마도련은
제 독단으로 일을 처리했다고 말이 많을 텐데요. 저는 지금 회천문을
회유하거나 적당히 타협하러 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 핑계를 대면 된다. 마도대공이 그렇게 지시했다고 해라. 그러
면 잡음이 없을 테니.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나 언젠가는 두 세력간
에 연합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해왔을 거다. 마침 회천
문의 개파대전이 그 가교 역할을 해준 거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
지.”
무영존은 파천의 얘기를 듣고 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입밖에
냈다.
“천황부에서 움직인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려고 했다. 그들의 생각은 뻔하지. 회천문
을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여 어떤 식으로든 이용해 목자는 수작이겠
지.”
“그런 생각을 하다니 참 뻔뻔한 놈들이다.”
천마의 말에 파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들은 오히려 그들의 그런 의도를 이용한다.”
“무슨 말이냐?”
“좋은 생각이십니다.”
제갈초홍이 파천이 한 말의 의도가 무엇인지 간파하고 그의 뜻에
동조했다.
“대체 무슨 뜻이냐고?”
천마가 궁금한 듯 재차 다그쳤다.
“마도련, 무림맹, 회천문이 연합했다는 것은 수면 밑에 잠겨 있다.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을 거다. 그런 상황 가운데 그들의 제의를 회천
문이 받아들이는 거지.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들과 연합하고 동조하
는 척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그럴 경우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생각
지도 않은 소득이 생긴다.”
“호, 위장 동맹이란 말인대…….”
“그들과의 연계를 통해 그들의 움직임을 미리 알 수가 있어 좋고
또한 나중에 뒤통수를 칠 수 있어 그만이지.”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배어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율극만이 지겨
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대장을 만나 기분이 흡족했
는데 자신과는 놀아 주지도 않고 이상한 소리만 해대자 몸을 배배 꼬
았다. 지금까지 참아낸 것만 해도 보통 기특한 일이 아니었다.
“자운은 어떻게 할 거냐?”
천마의 그 말은 장내의 분위기를 일시에 냉각시켜 버렸다.
“찾아야지. 그리고 이왕이면 그들에게 회천문과 틀어졌음을 알릴
필요도 있으니 상황을 적당히 이용해야겠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천마는 도무지 그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가 궁금했다. 끊
임없이 샘솟는 계책들을 듣고 있자면 자신이 멍청한 것이 아닌가 하
는 생각이 들때가 많았다.
“천향을 구하는 과정에 그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자신의 안마
당에서 무단으로 그런 일을 벌인 무림맹에 대해 회천문이 탐탁지 않
게 여길 거라는 판단은 당연할 거고, 그렇게 비춰질 거다. 이후 초홍
은 마도련이 마도의 종주임을 내세워 이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
고……. 뭐, 그러면 그들은 의심하지 않고 협상에 들어가겠지. 그때
천마 네가 그들에게 적당한 요구 조건을 내세우며 동맹을 맺고. 그러
면 끝나는 거지.”
“햐, 하여튼 잔머리는 알아 줘야 한다니까.”
“다들 실수 없이 잘해야 한다.”
“네.”
제갈초홍이 생긋 웃으며 말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천마는 퉁명스
럽게 대답했다.
“뭐, 그 정도쯤이야.”
“지존.”
“왜 그러지?”
“혈마천 일은 어떻게 처리하실 셈입니까?”
제갈초홍의 말에 무영존과 천마는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빛냈다.
“그 일은 환노에게 맡길 셈이다.”
“지금까지 키워 왔다던 그 세력 말씀이죠?”
“으음.”
“햐, 드디어 걔들도 출도하는 건가? 그건 그렇고 혈마천의 일이라
니?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거냐?”
천마의 질문에 제갈초홍이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난 천마는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그 집안 구석도 망조가 들었군. 잘들 하는 짓이야. 그러면 그놈만
구해내면 그쪽을 두드리는 일은 쉬울 수도 있겠군.”
“그렇다고 봐야겠지.”
제갈초홍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가 않았다. 몇 번인가 망설이다 어
렵게 입을 떼었다.
“지존, 솔직히 그들이 어느 정도의 세력인지는 모르지만……제 생
각에 사부를 쫓고 있는 조직은 혈마천 최정예입니다. 그들을 제지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이 대단할 거라고는 믿을 수가 없군요.”
“그들에 대해서 잘 아는가?”
“자세히는 모릅니다만…… 혈마천주의 직계에는 3개 단이 있습
니다. 그들 모두는 혈마천 내 최고수들이며 잔인하기로도 이만저만
한 자들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사부의 뱌신이 줄 타격을 그들이 예상
치 못하는 바가 아니겠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좀더 신중하게 처리하셔야 할 듯합니다.”
“그렇다고 마땅한 대안이 없는 걸 어떡하지? 나나 천마가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림맹을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그렇다고 마도련이 움직인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고. 결국은 그들뿐
이다.”
“지존의 친위 부대가 있지 않습니까? 그들까지 함께 움직인가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을? 낙양에 있기는 하지만……. 만약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들의 수가 월등히 많거나 그들의 최고 수뇌부들이 직접 움직였을
경우엔 그들로도 안되겠군. 이것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것 같은데.”
천마가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느냐는 듯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너나 나, 둘 중에 하나가 갔다 오면 되지 뭘 그러냐? 내가 갔다 오
기는 좀 그렇고. 네가 움직여라. 금응을 타면 금방인데 주저할 게 아
니네. 그 정도로 비중 있는 인물이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안전을 확보
해 두는 게 여러 모로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좀더 생각을 해보자. 일단은 여기 일이 우선이니. 아, 그리고
무영존. 사천의 일은 수고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먼길에 피곤할 텐데 그만 가서 쉬어라.”
“존명.”
그들은 이후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율극이 몸을 꼬다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투덜거렸음은 당연했다.

밤이슬을 밟으며 정원을 거니는 자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가 못
했다. 달빛을 받아서인지 상심이 있어서인지 천향옥봉의 얼굴은 빛
을 잃고 음울하게 젖어 있었다. 그 감정은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초량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 또한 가슴이 답답했다. 몇 번인가 대
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그녀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가 옆에
서 함께 걷는 것도 솔직히 그녀는 별로 개운치가 않았다.
“자운, 이제 그만 들어갑시다. 먼길에 피곤할 텐데 좀 쉬어야 하지
않겠소?”
역시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먼저 말을 거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는 초량이었지만 최근의 반응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럼
에도 그는 아무런 내색도 않았다.
‘기다리자. 그녀의 마음이 먼저 풀릴 때까지 언제까지나 기다릴
수 있다.’
미련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집착이 강한 것인가. 초량은 고개
를 흔들었다. 자신을 객관화하기엔 너무 늦어 버렸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후후, 다시 만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걸.”
뒤에서 들려 온 소리였다. 초량은 전신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들려 온 소리로 봐서는 간격이 불과 3장 정도다. 이렇게 가꾸운 데까
지 이르도록 자신이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 스스로를 충격 가운데
로 몰고 갔다. 두 사람은 모두 다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지, 지존.”
천향옥봉의 몸은 연약한 가지가 폭풍에 휩싸인 듯 심하게 휘청거
렸다. 부축하는 초량의 손길을 그녀는 매정하게 뿌리친다. 그리고는
자신의 힘으로 꼿꼿이 서서는 파천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못난 천녀가 지존을 뵙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다.
“자운, 이리로 오라. 그 자리는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아마도
그 자는 너를 내게 보내 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초량에게서는 잠시 당화아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저 자의 말은 자운을 보내지 않으면 실력 행사로 들어가겠다는 말
이다.’
초량의 착각인지 모르지만 순간 상대의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일
어나는 듯싶었다. 상대의 눈을 마주보기가 겁이 날 정도였다.
‘저건 살기다. 자신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날 죽이겠다는 경고다.’
[그녀를 내게 보내라. 안 그러면……널 이 지라에서 죽이겠다.]
그의 전음은 자신의 짐작을 확인한 것에 불과했지만 실제 듣고 보
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두려움 따위는
결코 아니었다. 어쩌면 자운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절망감 때문이
었다.
“그럴 수 없소. 나를 죽이지 않고는 자운을 내게서 뺏어 갈 수 없
소.”
예상하고 있던 답이 나오자 파천은 망설임 없이 그에게로 다가
갔다.
“그럼 죽여야지. 별 수 없군.”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죽이겠다는 말을 뱉어내는 자를 초량은
처음 대한다.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생명의 위협을 받아 본
적은 단연코 없었다. 삶보다는 죽음에 더 가까운 위치를 점하고 있은
적도 없었다. 초량은 자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섭선을 꺼내
앞으로 세웠다. 결의를 내보이는 그를보며 파천은 더욱 살기를 뿜어
낸다.
“그 무엇도 오늘 네 놈의 생명을 지켜 주지 못할 거다. 변수나 이변
따위는 바라지도 말아라. 네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는 사실만큼은 내
일 해가 다시 떠오를 것이라는 사실만큼이나 확실할 테니.”
초량은 상대가 두려웠다.
옥면신룡 문윤! 자신이 듣고 생각해 왔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강
한 자. 그 앞에 서 있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여겨졌다. 이미 마음으
로 지고 들어가는데 승부는 해보나마나였다. 그럼에도 그는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둘 사이의 긴장은 더욱 팽팽해져 갔다. 파천
의 걸음이 빨라지는 순간이었다.
“지존.”
그녀의 부름에 파천은 자기도 모르게 우뚝 그 자리에 서버리고 말
았다.
“왜 그러느냐?”
“전…… 가지 않습니다. 저희들을 이대로 보내 주십시오.”
무슨 말인가. 파천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설마……. 아니겠지? 내가 잘못 들은 거다. 자운이 그런 말을
할…… 이유가 업다.’
“전, 가지 않습나다. 용서해 주세요, 흑.”
결국 울음을 토해내는 천향옥봉.
“뭐……라고 했느냐? 왜? 왜 가지 않겠다는 거지? 그놈이 널 위해
생명까지 걸었다는 걸 모르느냐. 그런데……그걸 알고 있는 네가 가
지 않겠다고? 이유가 뭐지? 대체 이유가 뭐야?
파천의 음성은 점차 커지다 마지막에 가서는 고함소리에 가까워졌
다. 그의 고함소리에 가지 위에 앉아 있던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푸
드득 거리며 밤 하늘로 날아 올랐다.
정원 주위로 어른거리는 그림자들! 초량이 데리고 온 수하들이었
다. 그들은 파천이 나타났을 때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순간 그
들도 놀라 몸을 정지하고 말았다.
“이유는 묻지 마시고…… 제발 ……저를 이대로 놔주세요. 나중에
기회가 닿는 다면 목숨으로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은 파천의 의문을 해소해 주지 못했다. 그의 분노는 초량
에게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놈! 네 놈이 자운을 어떻게 했기에 저런 소리를 하는가? 네 놈을
찢어 죽이겠다.”
그의 분노는 하늘을 뒤덮고도 남음이 있었다. 초량 역시 그녀의 말
에 충격을 받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왜 그녀가 그런 말을 했을지,
도무지 해아릴 수 없었다. 대체 왜? 파천의 손이 흐릿한 그림자를 끌
고 초량을 휩쓸어 갔다.
주위에 은잠하고 있던 초량의 수하들은 그가 이렇게 불시에 공격
을 할지는 예상 못했던지라 다급하게 뛰어 오르기는 했지만 이미 늦
어 버렸다.
초량 역시나 그의 재빠른 공격에 일시 당황하며 엉겁결에 손에 들
린 섭선으로 가로막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쓸데없는 몸부림에 지나
지 않았다. 형체도 없이 섭선을 지나치는가 했더니 초량의 품 안에서
작렬하는 폭음. 아무리 호신강기를 발휘한다 해도 그 충격은 고스란
히 몸에 전해졌다.

“컥.”
초량의 몸은 허공으로 붕 떠서 뒤로 2장이나 날려 갔다. 바로 그 순
간 그의 수하들이 장내에 나타나고 파천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퍼부
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기세도 파천의 분노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사방으로 풍차를 돌리듯이 휘저어 버린 손 그림자는 돌연 장내에
광풍을 불러 오고, 그들의 손과 발과 도와 검 사이를 비집고 동시에
때려 버렸다.
퍽퍽퍽
수박 깨지는 소리. 선혈이 사방으로 튀어 오른다. 파천의 몸이 희
미하게 장내를 돌아가는가 했더니 초량을 경호하기 위해 배치디어
있던 천황부 고수들은 늦가을 기운이 다해 떨어지는 나무의 이파리
처럼 속절없이 허공을 비산하고 만다.
순간 그의 손에서 검의 형체를 한 가운이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직 살아 남은 초량의 수하들은 초량의 앞을 막아서고는 그것을 보
고 두려움에 떨었다.
“서, 설마……. 무…… 형검?”
그들의 눈은 정확했다. 파천은 왠만해서는 사용하지 않는 무형검
을 시정하려 했다.
“비……켜라.”
초량은 입에서 피를 흘리며 힘겹게 수하들을 헤치고 나섰다.
“차라리 죽으리라. 힘에 부친다 하더라도…… 후회는 없다.”
“주군.”
그들은 비통함에 자신들의 주인을 불렀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몇 사람의 희생으로 요행을 바라며 살아나갈 꿈꿀 수 있는 상대가 아
니었다. 상대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모두 죽여 주겠다. 살려 두면 그 기간만큼 사람들에게 해를 입힐
놈들은 가차없이…….”
“안 돼요. 안됩니다. 지존, 제발.”
천향옥봉 자운은 눈물을 흘리며 초량의 앞을 막아섰다. 처절하기
까지 한 행동이었다. 파천은 그녀의 모습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되자
이제는 어이가 없었다.
“자……운. 너를 위해 희생한 그를 잊었느냐? 너의 지금 행동
은…… 대체…….”
그는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그의 행동이 납득이 가지 않
았다.
“이대로…… 저를 보내 주세요. 이 사람도 죽이지 말아 주세요. 저
를 죽이신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제발 자비를 베푸셔서.”
파천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한 수면 놈을 죽일 수 있다. 그
수하들까지 모조리 쓸어 버리는 것 또한 그다지 어렵지 않다. 지금의
상황은 그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경우였다.
“비켜라. 비키지 않으면……너도 죽이겠다.”
드디어 파천도 분노로 이성을 상실해 가는지도 몰랐다. 광마존이
그녀를 위해 생명을 걸고까지 사랑한다는 사실을 아는 그로서 그녀
를 친히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서는. 파천의 손
위에는 아직 검의 형체가 뚜렷이 살아 있었다. 파천은 손을 천천히
그들 쪽으로 향했다.
피슝
그 무엇도 파괴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무형검이 혈과 육으로 된 사
람들을 향해 쏘아졌다. 자운은 초량의 앞을 비키지 않고 오리혀 두
팔을 활짝 벌리기까지 했다. 무형검이 자신에게 쏘아져 온다고 느낀
자운은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다시 두 눈을 떴을 때는 그녀의 눈앞에 빛 덩어리가 뭉쳐져
있을 뿐이었다. 그 빛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녀는 환상을 보고 있
었다. 그 환상 속에는 그가 있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랑하는 이가 있었다.
‘당신을 죽인 자들. 우리를 삶과 죽음으로 갈라놓은 자들을 용서
할 수 없어요. 내 손으로…… 내 손으로 그들을 죽일 겁니다. 절대
로…… 이것만은 하늘도 나를 막을 수 없답니다. 그리고 나서 전……
당신을 따라 스스로 죽을 것입니다.’
천향옥봉은 그가 죽었다고 믿고 있었다. 파천은 그녀가 그렇게 알
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운명은 또다시 엇갈
리고 있었다.
“너를 기억에서 지우겠다. 다시 내 눈에 보인다면 둘 다 죽이겠다.
명심해라.”
파천은 그 말을 끝으로 할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세웠다. 자신의
손으로 자운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광마존을 생각했다.
‘바보 같으니. 저런 여자를 위해 생명을 바치려 하다니. 넌 참 바보
다. 이미 네게서 떠난 여자다. 허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
인가.’
파천은 몸을 날렸다. 떠나가는 그를 보며 자운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는 서러운 울음을 모조리 토해내었다. 그녀
의 앞에서 초량은 넋이 빠져 멍하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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