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04화 : 너희들의 땅으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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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04화 : 너희들의 땅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의 땅으로 돌아가라

3일 밤낮을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그 당사자들이나 그들
을 주시하는 이들 모두에게 힘들고 어려운 경험이었다. 그
들이 달려가는 곳은 산동성 경계 지역이었으며 그들은 어느새 산동
성으로 들어서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임청이 나온다. 그들은 죽음
을 피해 죽을 힘을 다 내었다.
그들은 추격하는 자들도 끈질겼지만 그들은 더 끈질겼다. 3백 명
이 넘던 인원이 이제 백 명도 채 안 되게 남아 있었다. 그들의 공격은
집요했다. 그러나 앞지르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이유도 그들이 항상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뒤를 쫓겼기에망정이지
포위 당했다면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전멸당했을 것이다.
대총사를 중심에 두고 그들은 비교적 넓은 간격으로 달려갔다. 그
들은 추격자들이 웬 만큼 가까이 왔겠다 싶으면 매복자를 남겨 두었
다. 그들이 시간의 수는 줄어들어 갔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워낙에 쫓는 자들의 숫자가 많고 지역이 넓었기에 간혹 옆쪽에서 공
격을 당할 때도 있었다. 달려가는 그들이 흠뻑 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이유도 하간을 지나면서 겪는 전투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쪽 지방에 미리 숨겨져 있던 비밀 세력 중의 일부였는데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들
을 모두 죽이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추격자와의 거리는 그만
큼 좁아졌다.
대총사는 품에 소연을 안고 있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
려야 했다. 자신은 죽을지언정 이 아이만은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
다. 그녀의 생명이 위협받지만 않았다면 이런 모험도 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잠을 자지 못하고 달려오는 바람
에 누구 하나 지쳐 있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혈마천 내에서도 공포
의 대상이던 마혼대가 지금은 초라한 도주자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비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이런 불만을 내비치는 사
람은 없었다.
“헉헉.”
“놈들이 이제 가까이 와 있는 것 같습니다.”
“말을 아껴라. 가는 데까지 가보자. 가다 못 가면……. 거기가 우리
의 무덤이 되겠지.”
땅을 박차며 경공을 펼치는데 땅이 패이는 깊이가 점점 깊어져 간
다. 이것은 진기가 고갈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지만 아직 대총사
는 여력이 많은지 땅에 먼지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그의 몸 역시나
비록 상대의 것이긴 하지만 온통 피로 범벅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였
다. 손에 빼어 들고 있는 검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한쪽 팔에는 축 늘어진 소녀를 안고 있었는데 아직도 그녀는 의식
을 차리지 못했다. 사실 대총사는 일부러 그녀를 깨우지 않았다. 의
식이 있다면 어린 나이로 맨정신에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생각했
기 때문이다.

그때 앞쪽에서 폭발이 일었다. 일행들은 한쪽으로 몸을 피하며 폭
발물의 파편에 맞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빌어먹을, 또 놈들이다. 모두 정신 바짝 차려라.”
쉬쉬쉭
그들은 넓게 산개하면서 달렸다. 아니나 다를까, 눈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보였다. 약 3백 명쯤 될까 싶었다. 그들은 혈
마천이 중원에 숨겨 놓은 자들이었다. 대부분이 하수들인 그들의 역
할은 정보 수집이었다. 그런 그들이 배신자들의 걸음을 늦추게 하는
목적으로 소모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가여운 운명의 소유자
들이라 동정이 기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감상에 젖어 있을 틈
이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이치를 누구보다 절실히 느끼고
있는 마혼대원들이었기에 한 점 망설임 없이 살수를 펼쳤다.
“으악.”
“끄억.”
“컥.”
그들은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칼날이 자기 몸을 지나쳐
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마혼대는 역시나 강했
다. 특히 실전을 위한 무공에 능숙했던지라 효과적으로 적을 살해하
는 법을 몸으로 깨우치고 있었다. 대총사 또한 한때는 자신의 지휘
를 받았던 수하들이지만 망설임 없이 죽였다. 죽어가는 그들보다는
살려야 하는 존재에 대한 소중함이 더 컸기 때문이리라. 일검에 서
너 명씩이 나가떨어진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될 수 있는 한 고
통을 줄이며 깨끗하게 죽여 주는 일 정도였다. 그의 입에서 메마른
웃음이 툴툴거리며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마음을 모질게 먹기
시작했다.
쐐액
검에서 검강이 뻗치며 3장 방원을 휩쓸어 버렸다. 팔과 다리가 몸
통에서 분리되어 펄떡거리고 목 잃은 몸이 비틀거리며 몇 걸음인가
를 더 걸어다닌다.
콰쾅
무자비한 살수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인지 그는
정면을 후려치며 길을 뚫었다. 순식간에 가운데가 뻥 뚫려 버렸다.
그러자 그를 위새해 마혼대 대원들은 그곳을 통해 빠르게 빠져 나갔
다. 그들은 달리면서 마치 가지치기를 하듯 주변에서 몰려드는 자들
을 죽였다. 그럼에도 그들의 발은 쉼 없이 놀려지고 있었다. 조금이
라도 더 가야 한다는 생각만이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유일한 명령
어였다.
“마혼대 이놈들, 그만 멈추지 못할까.”
저 뒤에서 천둥 같은 소리가 들려 온 것은 그들이 포위망을 거의
벗어나던 시점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대총사는 소리의 임자가 누구
인지 깨닫고 다급해 했다.
‘천주 직속의 3개단 중 적혈단주의 목소리다. 그럼 적혈단(赤血團)
이 움직인건가? 그 녀석이…….’
그는 발을 놀리면서도 염두를 굴렸다. 적혈단이라면 3개단 중에서
는 최하위 단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실력으로만 따지자면 마혼대
랑 비슷하다 할 수 있었다. 단지 숫자가 더 많았다. 그들은 3천 명이
조금 넘었다.
‘저들만 왔을 리가 없다. 또 누가 왔는가?’
“이제 그만 포기해라.”
천둥 같은 소리는 앞에서도 들려 왔다. 막 포위망을 빠져 나온 그
들 일행은 소리가 앞에서 들려 옴에도 멈출 생각이 없는 듯 박차를
가했다. 그때 대총사의 명이 떨어졌다.
“모두 조심해라. 아무래도 장로들이 친히 나선 것 같으니.”
말을 해놓고 보니 그도 긴장이 되었다. 혈마천에는 총 열두 명의
장로들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모두 그에게 사숙 뻘이 된다. 그들은
천주의 명에만 따르고 고집불통의 늙은이들이었다. 그들에게 타협
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과연 몇 명이나 왔는가? 세 명이 넘는다면 빠져 나가기는 힘들다.’
저번에 천마에게 죽임을 당한 세 명의 장로들을 제외한 아홉 명의
장로들이 현재 혈마천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평소에는 칩거나 마찬
가지의 생활을 한다. 그러다 천주의 명이 떨어질 때만 그들은 움직였
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사정이 달라져 있었다. 대제사장! 천주가 폐
관에 들면서 장로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대제사장에게
부여한 것이다. 이번 역시 그의 명에 의해 장로들이 움직였을 게 틀
림없다.
나지막한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평지에 신선과 같은 모습의 노
인 네 명이 서 있었다. 그들은 각기 편안한 자세로 다른 방향을 점하
고 있었는데 그것을 본 대총사는 놀라 부르짖었다.
“모두 멈춰라.”
‘저것은 사상복마진(四象伏魔陳)이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의 전진
은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사상복마진이라는 이름 앞에 그는 낙담하고 말았다. 노인들은 각
기 동서남북 네 방향을 점유하고 서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사숙들께서 친히 나설 줄은 몰랐군요.”
그들 중에 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허허, 우리도 자네와 이렇게 마주설 날이 있을 줄은 몰랐지. 무슨
불만이 있었기에 이런 과오를 범하시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
니 돌아선다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할 것임을 이 보잘것없은 늙은
생명을 걸고 장담하겠네.”
대총사는 그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
신의 소신을 굽힐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사숙. 혈마천은 이제 예전과는 다른 곳이 되어 버렸
습니다. 악취가 나서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내 옆구리에
있는 이 아이를 보십시오. 이제 열일곱 살 된 어린 소녀입니다. 이 아
이가 무슨 죄가 있어 그런 참담한 일을 겪어야 합니까. 저는 변질되
어 가는 혈마천을, 무너져 가는 혈마천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떠나기
로 했습니다. 길을 비켜 주십시오.”
동쪽을 향해 서 있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가당찮은 소리. 어찌 네가 혈마천의 은혜 아래 자라 놓고서 그런
배은망덕한 말을 입밖에 낼 수 있더란 말이냐. 네 사부인 대사형은
너희들 사형제를 두고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첫째인 상무룡(相武
龍)은 장차 혈마천의 무공을 대성하여 천주의 위엄을 드날릴 것이요,
둘째인 상천일(相天日)은 덕이 있어 혈마천의 내실을 다질 것이며,
셋째인 상여락(相餘樂)이 가장 문제로고. 아마도 둘째가 잘 보살펴
줄 것이야’ 라고. 그런데 너는 어찌 좁은 편견으로 스스로 혈마천을
버리겠다 하느냐. 네 사형이 이 사실을 안다면 배신감에 치를 떨지
않겠으며, 전 천주셨던 네 사부께서 지하에서 이 일을 아신다면 가슴
을 치시며 피눈물을 흘리시지 않겠느냐. 어서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
겠느냐.”
그는 어버이가 자식을 꾸짖듯 대총사를 나무랐다. 그럼에도 대총
사는 끄덕도 없었다. 자신의 소신을 이렇게 쉽게 굽힐 것 같았으면
그렇게 고민하여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약 나중에 사형이 내 생명을 원한다면 기꺼이 내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죽기 전에 할 일이 있어 이대로 뜻을 굽힐 수 없으
니 널리 이해해 주시고 저를 보내 주십시오.”
네 명의 노인 중 남쪽을 향해 앉아 있던 노인이 장탄식을 토했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구나. 너의 이런 결정이 무작정 나쁘다고 할
처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의 의견을 따르기엔 혈마천이란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그보다 크다. 너는 어찌 남아서 고쳐 볼 생각은 않고
너 하나를 이곳에서 건져낼 생각만 했더란 말이냐. 그러고도 네가 혈
마의 후예라 할 수 있더냐.
그날의 피맺힌 원한을 돌이켜 보지 않아도, 그 동안 지하에서 흘린
피눈물을 그새 벌써 잊었더란 말이냐. 네 가슴에 흐르고 있는 피가
너만의 것이라 여겼다면 네 마음대로 하거라. 만약 그 피에 네가 조
금이라도 책임질 무게가 느껴진다면 걸음을 돌이켜라. 더군다나 너
의 경솔한 석택으로 죄 없는 마혼대 아이들까지 피를 흘리게 했으니
그 죄를 무엇으로 갚으려 하느냐!”
하나같이 대총사 상천일의 가슴팍을 헤집어 놓는 말들이었다. 그
는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위로해
주고 아껴 주며 염려했던 정겨운 친인들을 적으로 돌려 놓은 작금의
상황이 안타까웠고, 자신의 선택을 따라 생명을 기꺼이 바치며 낙화
되어 가는 수하들의 충정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 모든 상황이 거부하고 싶을 정도로 싫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무엇보다 우선시 해야 할 약속을 생각했다. 그리고 대의니 명분보다
더 소중하다 생각되는 이유 없는 죽음을 경계하고 싶었다. 그 대상
이, 더군다나 아직은 세상을 더 보고 배울 권리가 있는 어린아이임
에야.
그들의 생각과 입장은 너무나 큰 간격으로 벌어져 있었다. 더 이상
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그것을 두 진영 모두 깨달았다. 말을 주고받
는 사이에 어느새 그들은 포위되어 갔다. 이번에는 시시한 삼류 무사
들이 아닌 정예 중에 최정예라 할 만한 혈마천주 직속 3개 단 중 하
나였다. 고래의 껍질을 벗겨서 옷을 만들어 입기라도 했는지 착 달라
붙은 그들의 옷에서 윤기가 흘러 나왔다. 최선두에 서 있는 자는 대
총사를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대총사, 아니 상천일. 오랜만이다.”
‘친구, 오랜만이군.’
그 말은 대총사의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그와는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자신은 천주의 제자였고 그는 일반 제자였다. 그 신분의 격차
는 그들의 우정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한 자리
에서 얘기를 나누어 본 지도 십 년이 넘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
람의 가슴속에는 서로를 향한 소중한 우정이 감추어져 있었다. 그런
데 이런 자리, 이런 모습으로 만나게 되다니.
둘은 미묘한 감정에 빠져들고 말았다. 둘의 관계를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장로들과 적혈단원, 그리고 마혼대원들 역시 안타까운 시선을
두 사람에게서 거두지 못했다. 이것이 운명이고 하늘이 안배한 것이
라면 너무 지나친 장난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필이면 적혈단이
나설게 무어란 말인가.
대총사 상천일은 얼굴을 덮고 있는 황금탈을 벗어 버렸다.
그의 진면목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의 인상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웠
다. 이마를 가리며 흩날리는 머릿결을 그는 가늘게 떨리는 손길로
쓸어 올렸다. 그는 부드러운 시선을 들어 친구인 적혈단주를 쳐다보
았다.
“풍준현(馮俊泫), 우리가 이런 자리에서 만날 줄은 몰랐구나. 언제
가 될지 모르지만 한 잔 술에 취해 만사를 잊고 싶었건만. 허허, 이런
게 인생이더냐. 대체 무엇 때문에 너와 나는 이렇게 마주보고 있어야
한단 말이냐.”
자조적인 웃음이 그의 입가를 오히려 화려하게 장식했다. 적혈단
주 역시나 생각이 같았기에 마찬가지 심정이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
다.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한마디라도 하게 된다면 친구
를 향한 척살 명령을 내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 그게 운명인 것을.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갈 길을 가다
가 새월이 흐르고 흐르면 잊혀질 것을 말이다. 하하하하.”
고개를 숙이며 미친 듯한 광소를 흘려대던 대총사의 고개가 과거
에는 친구였지만 지금은 적으로 마주 선 적혈단주를 찾아 든다.
“우정도, 사랑도, 믿음도 결국엔 얄팍한 가슴팍에서 맴도는 것이
었음을. 이렇게 검을 세우고 마주보면 너와 나는 적이 되는 건가. 후
후후, 어서 네 의지대로 행해라. 네 의지가 시키는 대로 날 베라고 명
하란 말이다.”
마지막 말은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그는 스스로 가심에 생채기를
내고 있었다. 스스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금 상황을 맨정신으로 바
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모든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은가. 이제 죽는 일만 남았군.’
그는 장로들이 지키고 서 있는 방위는 포기했다. 그렇다고 저 많은
적혈단을 모두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에게는 그런 능력도 없었
다. 결국은 좀더 빨리 죽거나 싸우다 지쳐 죽거나 둘 중에 하나일 뿐
이었다. 그는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미안하다, 소연아. 너를 지켜 줄 수가 없겠구나. 네 오빠를 대할
면목이 서지 않는다. 나중에 지옥으로 날 찾아 온다면 뭐라고 해야
할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수하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너희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리겠다. 자신의 생명은 스스로
지켜라. 그 동안 고마웠다. 내세가 있다면 그곳에서는 내가 너희들을
섬기겠다.”
비장한 한마디는 마혼대 대원들의 가슴속에서 화석으로 굳었다.
그들은 동시에 죽음을 직감했고, 오히려 동시에 죽을 수 있음에 감사
했다. 그들의 손에 검이 들렸든, 도가 들렸든, 쇠꼬챙이가 있든 없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서로의 마음은 이 순간 이미 하나로 제
몸을 꼬아 가고 있었다.
죽음은 더 이상 절망이 아니었다. 차라리 고단한 삶을 마감하는 휴
식처로의 진입이었다. 서로의 눈길을 찾은 그들 얼굴엔 어떤 의미인
지 모를 웃음이 동시에 떠올랐다. 함게 수많은 나날을 지냈고 사선을
넘나들며 느꼈던 동지애가 더렵혀지지 않고 죽음까지 이어질 수 있
음에 안심하고 있었다. 스스로 주군으로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죽음
의 순간만은 그를 위해 선택할 수 있음에 기뻐했다. 그들은 한마디를
끝내 내뱉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들의 눈빛만으로도 충분했
다. 그들의 눈은 말하고 있는 듯했다. ‘당신은 영원한 우리의 자랑스
런 주군이십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당신을 기뿌게 주군으로 섬기
고 싶습니다’ 라고.
적혈단주의 손이 천ㅊ너히 들리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에 투영된
그의 손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그들의 운명은 어떤 식으로든 결정날
것이다. 서로의 심장에 칼을 꽂고 눈물을 흘릴지언정, 그것이 가혹하
다 하늘을 바라보며 분노의 외침을 토할지언정 그들은 주저 없이 상
대를 죽여야 했다. 자신이 죽을지 아니면 상대를 죽일지 모르지만 분
명 현재라는 시간은 그드르이 운명을 심판하고야 말 것이다.
드디어 느릿느릿 올라가던 적혈단주의 손이 허공의 정점에 세워졌
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들 모두는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을 받았
다. 그러나 오랜 훈련으로 단련된 본능은 신체의 기능을 장악한 채
서로를 향해 돌격하게 만들고 말았으니. 이제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이들의 싸움을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상대방의 움직임,
그 세세한 부분들까지 머리에 새겨지는 듯한 착각 속에 빠져들었다.
귀는 제 기능을 잃고 아무 소리도 포착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상대의
번뜩이는 살기만을 감지할 뿐이었다.
마혼대 대원 하나가 손으로 검을 쥐고 있었다. 그의 손은 자신의
검이 아닌 상대의 검날을 맨손으로 쥐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빠르게
죽어가고 있었는데 마지막까지 그의 동공에 남은 영상은 그의 심장
으로 들어간 검이었다. 아픔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저 몽롱해지며 시
야가 흐려졌고 점차 졸린다 여겨졌을 뿐이었다. 자신의 심장에 박힌
검을 움켜쥔 마혼대원의 손은 풀리지 않았다. 당황한 적혈단원은 발
로 상대방의 다른 쪽 가슴을 차며 힘을 주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목
은 적읙 검에 날아가고야 만다. 그들은 한 몸으로 뒤엉켜 있었다. 이
제 그들의 앞에는 무엇을 위해, 라는 대의명분은 사라지고 죽고 죽이는
현실만이 남겨졌다.
죽을 것인가, 죽일 것인가. 이것은 절실한 문제였다. 생존을 위한
사투는 그래서 더욱 처절했다.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기준을 본능적
인 느낌에 의존해야 할 만큼 혼전이 빚어졌다. 뒤섞이어 사투를 벌이
다 보니 적을 뒤에 두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서로의 진영을 구
분하고 싸운다면 대등한 실력을 지닌데다 다수인 적혈단이 휠씩 유
리하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렇지가 않았다. 백 여명의 마혼대원들
이 차지한 공간으로 적혈단 2백 여명이 뒤섞이어 버렸다.
마혼대원들은 살아날 실낱 같은 희망마저 포기했기에 배후의 안전
을 확보할 생각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혼전 가운데 제 실력
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어처구니없이 죽어갔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
은 양자에게 공평했기에 적혈단 역시나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함은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위한 몸부림인가. 서로가 동지였던 자들이 적
으로 돌아선 배신감 때문인가. 아니었다. 서로 상대의 생존을 용납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다. 살아 남기 위해 도주하는 자
와 그들을 이대로 보내 줄 수 없는 자들의 자기 입장에 대한 증명의
몸부림들이었다.
대총사의 검은 오늘따라 더 빠르게 번득였다. 그가 서 있는 일장
간격 안으로는 그 누구도 들어시 못했다. 들어서는 순간 그의 검은
춤을 추고 그 춤사위에 따라 상대는 조각나 흩어졌다. 그는 혈마천
내에서 세 손가락 내에 들 정도로 강했다. 그런 그의 위력은 대단했
다. 점차 시체들이 차지하는 공간이 넓어짐에 따라 양쪽 진영의 숫자
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어 갔다. 장로들도, 적혈단주도, 아직 격전에
참가하지 않은 적혈단원들도 남의 일처럼 방관하며 지켜보고만 있
었다. 적혈단원은 줄어드는 만큼의 숫자가 계속적으로 증원된다. 이
러다 보니 마혼대 생존자의 숫자는 더욱 빠른 속도로 감소해 갔다.
이제 5십 명이나 남았을까.
“모두 멈춰라.”
거대한 종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대총사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 소리를 들었다고 서로를 향한 살수를 멈출 리는 없
었다. 먼저 멈추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머뭇거림도 없었다.
“멈추란 말이다.”
“모두 멈춰.”
이번엔 대총사와 적혈단주에게서 동시에 소리가 발해졌다. 그래
서인가, 거짓말처럼 양 진영은 동작을 멈추어 버렸다. 적의 목에 대
어진 칼날의 거두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이미 찔러 버린 뒤라 비틀어
빼내는 이도 보였다. 어쨌든 마혼대원들과 적혈단원들은 동시에 뒤
로 물러서면 간격을 벌렸다.
“그만 하자. 어차피 너희들을 조금 더 죽인다고 여기서 살아 나갈
수는 없는 것. 한 가지 제안을 하마.”
적혈단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하나의 생명으로 마무리 지어다오. 대신 살아 있는 내 수하들
과 이 아이……. 이들은 보내 주길 바란다.”
“안 된다.”
“이 생에서의 마지막 부탁인데도 안 되겠나?”
“주군, 저희들만 살아 남을 수는 없습니다. 함께 죽도록 허락해 주
십시오.”
“주군, 어찌 우리들만 살아 남으라 하십니까?”
“안 되겠나?”
수하들의 비통에 젖은 소리를 등 뒤로 하고 대총사의 간절한 목소
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적혈단주는 순간적으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장로들 쪽을 쳐다보았다. 장로들 또한 한참을 망설였다. 그들
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에 하나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너와 그 아이는 살려 줄 수가 없다. 대신 너의 수하들만은 살려 주
마. 그들을 살려 주는 대신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검을 잡으면 안 된
다.”
무림을 떠나라는 말이었다. 대총사의 고개가 발작적으로 소리가
난 뒤쪽으로 돌아갔다.
“왜 이 아이를 죽이겠다는 거요? 대체 왜?”
“그 아이와 너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지.”
“대제사장에게서요?”
“…….”
“내 그놈을 베고 오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구나. 그렇다면 나 하
나로는 그냥 물러설 수 없다는 말이구려. 그렇다면 나 또한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겠군.”
“어차피 여기서 다 죽을 터인데 굳이 위험을 무릅써 가면서 그런
협상을 할 이유가 없지. 그렇지만 그 아이를 네가 죽이고 스스로 죽
겠다면 나머지 아이들을 살려 보내 줄 수 있다.”
“기대에 못 미쳐서 미안하오.결국엔 끝장을 보겠단 말. 좋소, 나를
죽이려면 그 만큼의 희생을 치러야만 할 거요. 혈마천이 내게 준 무
공은 만만한 것이 아니니 말이오.”
마혼대원들은 주군의 생명을 담보로 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
었다. 아이를 살리려는 주근의 마음을 이해하는 그들이었기에 그들
또한 대총사의 뜻과 다르지 않았다. 다시 그들은 싸움을 준비했다.
제일 먼저 앞으로 튀어나간 것은 대총사 상천일이었다. 그는 지금
까지와는 달리 처음부터 강맹한 공격 위주로 나갔다. 공력을 있는 대
로 끌어 올린 뒤에 적들 사이로 침투해 들어간 그는 사방을 향해 검
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3장 방원이 태풍에 휩싸인 듯 몸서리쳤다.
콰쾅
부딪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파괴해 버리는 위력에 그들은 일시간
죽음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를 제지한
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방에서 그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
지만 그의 위력적인 검강에 막혀 전진하지 못하고, 검으로 치면 검이
부러지고 도를 뻗으면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적
혈단이 아무리 강하고 용맹하다 하더라도 죽어 가는 건 마찬가지였
다. 그들은 죽어가면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었음인가. 남은 마혼대원들 또한 대총사를 따
라 돌진했다. 그들의 심정이야 한 명이라도 더 죽이겠다는 것이 고작
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그 또한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살아 나가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아직까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몸
짓들에 불과했다. 적혈단주는 그 모습들을 보며 치를 떨었다. 물론
현재야 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관계이긴 하지만 어제까지 동지였던
자들을 향한 살수치고는 너무 잔인했기 때문이다. 그 또한 자신들의
수하들이 죽어 나가자 분노했다.
“모두 포위망을 넓혀라.”
한 면에서 치고 들어오는 자들을 막아서며, 그들은 원형으로 가두
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황은 금세 역전되고 만다. 한 사람이 여러 사
람의 공격을 한꺼번에 막아야 했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이 용이하지
않을뿐더러 수비하기도 벅차서 헐떡거렸다. 이미 손과 발은 묵직하
니 움직이기도 힘에 겨워진 지 오래였고 점차 진기도 바닥을 보여
갔다.
“컥.”
“꺽.”
마혼대원들이 죽어가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포위
한 원형이 점점 간격을 좁히기 시작하자 마혼대와 대총사는 서로 등
을 맞대고 힘든 싸움을 해야만 했다.
“더욱 바짝 조여라. 놈들이 지치기 시작했다.”
적혈단주는 더 이상 인정에 얽매이지 않았다. 이젠 친구도 아니었
고 동지들도 아니었다. 빨리 이 살육의 현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아마도 얼마간은 마음이 어지러울 것이다. 마혼대원들 중
살아 남은 사람은 고작 스무 명 남짓. 그나마 지금까지 버텨 온 것은
대총사의 월등히 강한 실력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만이 이리저리 옮
겨 가며 상대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부하들이 위험에 처하면 그가 힘
을 보냈다. 그렇지만 거의 동시적으로 그런 상황을 겪었기에 그가 도
와 줄 수 있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대총사, 참으로 아까운 인물이다. 우리 혈마천의 식구들은 그대
를 언제까지 기억할 것이다.”
한 장로의 입에서 나직한 독백이 흘러 나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저들의 희생을 딛고 우리는 더욱 강하게
단결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난세에 인간적인 도의나 감정 따위는 버
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멸한다. 그대들의 일이 그 좋은 본보기
가 되길 바랄 뿐이지.”
또 한 명의 장로는 그 말을 하면서도 심정이 그리 좋지 않은 듯했
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 왔던 사질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에
는 아직도 그의 피가 뜨거웠다.
“후유, 천주가 출관하신다면 과연 이 일을 뭐라 하실지.”
“사형, 어차피 이 일의 모든 책임은 대제사장에게 있는 것이니 우
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때 격전장의 중심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
한 명의 마혼대원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며 간격을 좁혀 오는
적혈단의 목을 노렸다. 그의 의도대로 상대의 목을 자르기엔 그의 동
작에 허점이 너무도 많았다.

한 사람의 칼이 그의 뱃속으로 깊이 바히는 순간 서너 개의 검이
그의 상체를 난자해 버렸다. 목이 잘리고, 어깨가 베어지고, 구멍난
심장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비참한 죽음이었다. 십여 명의 살아
남은 마혼대원들의 눈이 뒤집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아아아.”
그들 모두가 거의 동시에 자신의 손에 들린 무기를 치켜세우며 너
무나 무모하게 적들에게 돌진하지 않는가.
“안 돼!”
“꺽.”
“으악.”
그들은 이미 모두 죽어 있었다. 그들이 튀어나가는 순간 그들의 몸
은 적들의 무기에 고슴도치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이놈들!”
유일하게 살아 남은 상천일 역시 이성을 잃고 말았다. 사방에서 모
여드는 적들을 향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검강을 흩뿌렸다. 그 바
람에 포위망이 느슨해졌다. 그 순간 그의 손에서 검이 떠났다. 이기
어검술은 그들 정도의 인물들이 막아낼 수 있는 성질의 공격이 아니
었다. 검으로 막든 도로 막든 아니면 몸으로 막든 마찬가지였다. 검
이 지나는 검로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뚫고 지나갔다. 그의 손은
허공 한 점에 멈추어진 채 교묘하게 검을 조종하고 있었다. 밀어내고
당겼다 뒤집는 등 그의 손짓에 따라 검이 춤을 추었다. 희뿌연 빛 무
리에 감싸인 검이 어디로 쑤시고 들어올지는 예상한다는 자체가 힘
들었다.
피융
그 순간 대총사 상천일을 향해 무엇인가가 날아 왔다. 그는 본능적
으로 위기를 느끼고는 몸을 바닥으로 굴렸다. 구르며 그의 손이 검을
회수했다.
“으음.”
그의 어깨를 뜯어 놓으며 바닥에 박혀 꼬리를 떨어대는 것은 단지
하나의 화살에 불과했다. 그는 바닥을 한바퀴 구른 뒤에 다시 자세를
잡았다. 화살을 쏜 자는 적혈단주! 바로 그의 친구였다. 상천일은 검
을 쥔 오른쪽 어깨를 부상당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근육이 아닌 뼈
에 깊숙이 박혔을지도 몰랐다.
“그만해라. 이제 네가 지켜야 할 것은 그 아이 하나다. 어차피 살아
나가지 못할 것, 발악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죽어 다오. 너에게 진정
혈마천에 대한 애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들을 더 이상 해치
지 말아라.”
그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여기서 죽을 건데 죄 없는
그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말이었다.
‘애정이라고 말했더냐? 나에게 진정 그것을 물었더냐? 혈마천에
대한 내 충정과 애정을 묻는 거라면 친구여, 너무 잔인하구나.’
“허허허허.”
그의 공허한 웃음에 깃든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허탈감이었다. 왜 사노라고 묻는다면 그는 단연코 말할 수 있었다.
혈마천의 깃발을 저 중원에 단 하루라도 휘날려 보기 위함이라고. 이
중에 그런 자신에 대해 부정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랑의 대상이 이제는 자신을 향해 칼을 겨누고, 애정이 남아 있다면
조용히 죽어 달라고 한다.
“하하하하.”
그는 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울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마음껏 웃고 있었지만 사실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 그런 모습을 감
추기 위한 것이었다. 하늘이 푸른 것 따위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그…… 러지. 죽는 거야 뭐 어렵겠는가. 나는 할 만큼 했다. 이것
도 이 아이의 운명이니 보잘것없는 내가 관여할 바도 아니구나. 좋
아, 죽어 주지. 내가 죽는 걸 혈마천이 원한다면. 그러나 이것 한 가
지만은 명심해라. 항상 혈마천의 이름 뒤에는 그 이름으로 죽어간 충
인들의 혈채가 있음을. 내 죽어서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검을 아이의 심장에 겨누었다. 자신이 죽기 전에 그녀
를 먼져 죽여야 했다. 그녀의 죽음 이후에 자신도 죽을 것이다. 검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미안하다.”
[진정 그 아이를 죽일 셈이오?]
막 힘을 줘 가던 대총사는 들려 온 전음에 동작을 멈추었다.
[늦어서 미안하오.]
‘설마…… 한당?’
[나 한당이오. 진심으로 대총사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오. 수고하
셨소. 이제부터 그 아이는 내가 책임지겠소.]
“어디 있나? 어디에 있는 건가?”
그의 행동을 주의 깊게 쳐다보던 적혈단의 인물들은 갑작스런 그
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했다. 죽음을 앞두고 실성이라도 한 모양이라
고 여겼다.
“쳐라.”
“와아.”
돌발적인 함성소리에 적혈단원들은 주위를 빠르게 돌아보았다.
저 멀리서 황진을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는 기마대가 보였다. 지평선
을 가득 메우며 달려오는 기마대의 기세는 그들이 보기에도 대단한
것이었다.
“저것들은 또 뭔가?”
장로 중 하나가 의문 가득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설마 무림맹이란 말인가?”
지금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무림맹의 영역이었다. 반도들을 추적하
는 동안 그들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 일에
끼여들고 싶어하지 않는 듯 관망만 해왔었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적혈단주였다. 그 역시 의아함을 드러내며 생각했다. 갑자기 그들이
마음을 바꿀 여유가 없지 않은가, 라고.
두두두두
가까이 다가오자 그들의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 몇
은 벌써 말 등을 박차고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적혈단의 중심으로 떨어지며 대총사의 주의로 늘어섰으며
곧바로 살수를 펼치기 시작했다. 잠시 의문에 사로잡혀 있던 적혈단
주의 입에서 뒤늦은 명령이 떨어진다.
“진영을 흐트러뜨리지 말고 적들을 막아라.”
장로들 역시 의외의 기습에 조금은 놀란 듯했지만 이제는 자신들
이 나서야 할 때임을 직감했는지 대총사가 서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려
왔다. 그들의 손이, 수많은 세월을 인간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의
순간을 거쳐온 손이, 그 기나긴 수련 기간을 거쳐 완성된 손이, 때로
는 그 누군가의 피로 적셔졌던 손이 자신들의 사질을 향해 퍼부어졌
다. 네 명이 동시에 그를 노리리란 것을 이 중에 그 누구도 미리 짐작
한 사람은 없었다. 그들의 손은 세월을 통해 단련되었고 그만큼 정교
하고 강력했다.
상천일은 순간 인생 최대의 위기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느꼈다. 그
는 지금껏 장로들을 대하며 두 명까지는 상대할 수 있을 것이란 자신
감을 지녀 왔었다. 그런데 네 명이라니. 그는 그러나 절망하긴 이르
다 생각했다. 그들의 손을 상대할 자신의 검 역시나 스스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만큼은 강했으므로. 바로 그때 전음이 들려 온 것은
그에게는 반가운 일이었다.
[좌측에 두 명만 맡으시오.]
그 말은 나머지 두 명은 자신이 상대하겠다는 말이었다. 상천일은
그를 신뢰한다. 인간 한당을 신뢰한다기보다는 그의 무공 실력을 믿
는 다. 가끔 그를 보고 있자면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속 깊은 심연을
떠올리고는 했다. 그가 그 만큼 위대한 존재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내. 진정한 자신의 무위를 어떤 순간에도 감출
줄 아는, 그래서 비정한 무림에서 그만큼 살아 남을 확률이 높은 사
내였다.
장로들의 공격은 거세기도 했지만 나해했다. 이어짐은 하나도 엿
보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변화만 느껴졌다. 저 손에 스치기만 해
도 치명적일 수 있었다. 고수들간의 싸움일수록 단 한번의 수세에도
생명을 잃기 쉬운 법이니까.
그는 순간 검을 사선으로 그으며 좌우로 떨쳤다. 이어 한 호흡도
멈추지 않고 연속적으로 검을 찔렀다. 족히 십삼 검 이상이 날카로운
점을 허공에 찍었다. 장로들의 손길은 그것마능로 안심할 수 없을 정
도로 기이한 수법이었다.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펼치고 거대한 바위로
찍어누르는 듯한 압력과, 작은 호흡에도 이리저리 날려 가는 새의 깃
털과 같은 가벼움을 동반하고 있었으며 한 번의 동작에 수십 개의 환
영을 그려내는 변화무쌍함까지 갖추었으니 과연 이를 제대로 막아
낼지가 의심스러웠다.
‘저 변화에 현혹되면 안 된다. 차라리 힘으로 밀어붙이는 수밖에.’
그의 이런 결정은 동시에 검의 힘을 수평으로 누이는 결과로 나타
난다. 그는 그 상태로 허리의 반동을 이용하여 힘껏 휘두렀다. 검세
가 미칠 수 있는 힘의 반경을 일장으로 응축시켰다.
검강과 수강의 무딪침 따위는 없었다. 장로들은 슬쩍 힘을 거두며
뒤로 물러서는가 했더니 재차 하나는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또 한 명
은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공격해 들어와다. 두 방향에서 공격함은 힘
을 분산시키려는 의도 같았다. 뻔히 알면서도 그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의 옆구리에 매달려 있는 소연 때문에 움직임에 약점이
있었기에 차라리 간단한 보법만으로 상대하기로 했다.
그들의 움직이는 선은 일직선상에 놓여 있지 않았다. 횡으로도 종
으로도 그들은 겹치지 않았고 오로지 사선으로만 겹쳤다. 더군다나
아래쪽에서 공격하는 장로의 움직임이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먼저
다가왔기에 밑에서 위로 검을 쳐올리는 수밖에 없었지만 오른손을
사용하는 그의 위치에서 아래쪽에서 위로 올린다는 것은 여러 모로
힘의 약화를 가져 온다.
그는 발을 빠르게 놀리며 오른쪽으로 돌았다. 장로들의 공격 권 밖
으로 피하겠다는 생각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을 정면에서가 아닌 축
면에서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을 대하는 각도가 변화하는 순간
그는 검을 사선으로 힘껏 그어 내렸다.
우르르릉
전력을 다 기울인 공격이어서일까, 뇌전이 치는 듯했다.
파앙
처음으로 강기의 부딪침이 있었다. 그는 퉁겨지는 검을 다시 힘으
로 내리누르며 바닥으로 내려서는 장로의 목을 노리고 쑤셔 넣었다.
그러나 이런 그의 공격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또 한 명의
장로 손에서 회오리 치는 장력이 발출되었으니까.
한편 한당 역시 수세에 몰려 곤욕을 치르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벌써 여기저기 상처를 입었다. 몇 번의 부딪침만으로도 그는 상
대의 위력을 절감하고야 말았다.
“자. 이건 어떠냐!”
그는 호기롭게 외치며 손에 들린 검을 사방을 향해 크게 휘둘러 원
을 그렸다. 이후 바짝 땅으로 몸을 낮추는가 했더니 두 다리를 쫘악
벌리며 주저앉았고, 이어 수비가 힘든 상대의 하체 쪽을 쓸어 버렸
다. 두 사람은 그 공격이 의외였던지 훌쩍 공중으로 도약했다. 한당
은 오히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그들을 따라 붙었다. 손목이 출렁거리
는가 했더니 그의 팔과 검을 타고 독사가 꿈틀거리며 진격하듯 일순
그들의 사혈을 노렸다. 노인 중 하나는 검과 비슷하지만 검은 아닌
끝이 뾰족한 꼬챙이 같은 것으로 그의 검을 쳐내었다. 그렇지만 검과
부딪치는 순간 한당의 검에서 비롯된 강기가 오히려 상대의 병기를
타고 오르지 않는가.
“허억.”
노인은 기함을 하여 급히 물러서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피슛
가까스로 노인은 상체를 뒤로 제치며 한당의 공격을 피해낸다. 그
러나 한숨 돌리고 있을 틈이 없었다. 몸을 젖힌 상태에서 바로 뒤로
몇 번인가를 회전하며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한당은 그쪽으로는 신
경도 안 쓰고 모처럼 혼자 남은 노인을 공격해 들어갔다. 노인은 검
을 쓰고 있었는데, 길이가 한 자 정도밖에 되지 않는 단검이었다. 이
런 인물일수록 가까이 접근하는 공격을 펼치기 마련이고, 접근하며
상대의 공격을 흘리는 데 익숙하다.
거리를 두고 있는 상태라면 검이 상대적으로 긴 한당이 유리했다.
그는 자신감을 갖고 힘껏 검에 찔러 갔다. 상대가 정신을 차리지 못
하도록 빠르고 다양한 수법을 구사했다. 한당과 함께 적진으로 파고
들었던 그의 사제들은 적혈단원들에게 둘러 싸여 혼전을 치르고 있
었다.
적혈단주와 맞대결하던 능비호는 계속 수세에 몰려들며 진땀을 흘
렸다. 적혈단주는 그 체구만큼이나 거대한 도를 무지막지한 힘으로
휘둘러 왔다. 멀찍이 떨어져 나가는 그의 펄럭이는 옷이 도풍에 휘말
리며 찢어질 정도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빠른 몸놀림을 이용하
여 간간이 장력을 발출하는 정도였다. 마운13장(魔雲十三掌)을 끝까
지 펼쳤는데도 상대를 한 걸음도 물러서게 하지 못하자. 그는 상대의
힘에 놀라고야 만다.
한당이 데려 온 인물들은 마도련의 인물들이었다. 그가 새로 맡게
된 마안대 중 외부에서 활약하는 천 명의 대원들을 급히 모아 온 것
이다. 그들은 마도련의 정예들답게 혈마천 적혈단에 그다지 밀리지
않았지만 솔직히 조금은 약한 듯도 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첩보에
주력해 왔던 인물들답게 경신술의 재간만은 더 뛰어났다. 문제는 수
적인 열세였다.
적혈단은 수적인 우위로 몰아붙이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세는 대등 국면에서 적혈단쪽으로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장
로들과 상대하는 한당과 대총사 역시 어려움을 겪는 건 마찬가지였
다. 점차 초식이 늘어나자 상대의 공격 수법이 눈에 익게 되고, 노련
한 장로들은 큰 힘을 쓰지 않고도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다. 한 손이
두 손을 당하긴 어려운 법인가, 이 상태로 간다면 이미 지쳐 있는 대
총사와 실력의 열세에 빠져 있는 한당이 쓰러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
고, 결국 그들이 쓰러진다면 간신히 버티고 있는 마안대도 한꺼번에
허물어질 것이었다.

파천은 금두신응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는 환노가 지나갈
법한 곳으로 금응을 몰아 갔다. 금응은 영물인지라 그의 말을 알아듣
고 그가 원하는 곳을 비행했다. 파천은 아래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
들이 어디쯤 지나가고 있을지는 그도 몰랐다. 그의 생각에는 황하를
건넜을 것 같았지만 정확한 위치는 가늠할 수 없었다. 그들을 미리
만나본다고 달라질 것이 없었는지라 포기하고 먼저 가기로 했다. 그
들을 찾느라고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혈마천이라 짐작되는 세력의 움직임에 대해 그가 마지막으로 접한
소식이, 산동성에 인접했다는 보고였다. 그는 임청 쪽으로 금응을 유
도했다. 저 밑에 누런 구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지나고 있는 것
이 보였다. 황하였다. 임청 위를 지날 때는 사람들이 놀랄 것을 염려
해 좀더 하늘 위로 떠올랐다. 그러자 그 큰 지역이 새까만 점으로밖
에 보이지 않는다.
임청을 지나자 평원이 펼쳐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찾고자 하
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하늘 위를 좀더 비행하며 상황을 지
켜 보았다.
‘듣기로 백여 명 정도만이 살아 남았다 들었는데……. 저들은 또
누구지? 혹시 상여락이 사형을 돕기 위해 증원군을 보낸 건가?’
그는 상황을 좀더 지켜보기로 했다.
‘적은 숫자가 대총사쪽이겠군.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도 저들 중에 살아 남아 있다는 말이겠지? 의외로 잘 버티고 있
구나. 환노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그 참.’
그는 망설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대총사를 막상
구한다고 해도 과연 그가 자신을 따라 갈지도 의문이었다.
‘결국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천마서생으로 구해야 한다는 말
이군. 흐음, 할 수 없다. 일단은 도와 주고 볼 일이다.’
그는 금응의 등을 토닥여 주고서는 곧장 땅으로 향했다. 바람을 타
고 몸을 낙하시켜 갔다. 금세 밑에서 싸우는 무리들이 확연하게 들어
오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내공을 끌어 올리며 속도를 줄여 가다 땅 위 십여 장
위에서 딱 정지했다. 그는 세밀하게 전세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낯익은 인물들을 발견하고는 놀라고 말았다.
‘저놈들은 한당과 그의 사제들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저들은 마
안대원들!’
그는 어이가 없었다. 그들이 왜 여기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
었다.
‘대체 저놈이 왜 여기에 와 있는 거지?’
그는 밑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전 가운데 마안대가 섞여 있어야 할
이유를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다. 그는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
고 또한 그런 보고를 받은 적도 없었다.
‘그렇다면 저놈이 독단으로.’
이렇게 되면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처음에는 대총사만 구
출해서 빠져 나갈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어쨌든 밑
에서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자들은 자신의 수하들이지 않은가.
결정되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행동으로 들어갔다. 두 손을 합쳤다
양쪽으로 떼며 공력을 모았다. 그의 양손에서는 서서히 기운이 스며
나와 검의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무형검을 두 개나 발출시킨 것
이다.
‘한 번에 놈들의 기를 꺾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놈들의 수장을 베
면 일단은 승기를 잡을 수 있다.’
“모두 멈춰라.”
그는 내공을 실어 큰 소리를 질렀다. 격전 중에 빠져 있었다지만
그의 소리는 누구의 구에나 들릴 만큼 컸다.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사
방을 둘러보았다. 고수라 할 수 있는 자들은 소리의 출처를 깨닫고는
곧장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순간 공중에서 거대한 빛이 폭발을
일으켰다.
슈슈슈슝
“모두 피해라.”
적혈단주의 외침을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사방으로 몸을 빼내었
다. 그렇지만 바닥으로 곧장 직격해 오던 빛은 방향을 틀어 적혈단원
들만 몰려 있는 곳에 내리꽂혔다.
콰앙
“끄악.”
“으악.”
처절한 비명성이 하늘을 울려 갔다. 상당한 양의 폭탄을 한꺼번에
터트린 듯한 소리가 나고, 자욱한 먼지가 바람에 날려 간 뒤에 드러
난 전경은 참혹했다. 방원 2장은 될 듯한 구덩이가 다섯 자의 깊이로
움푹 패여 있었다. 파천은 자신이 해놓고도 놀라 손을 눈앞으로 가져
가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의 위력이었나? 이것 함부로 쓸 일이 아니구나. 천마의 전
설이 그 정도로 과장되게 난 이유가 있었어.’
사실 따지고 보면 그가 전력을 기울여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얼마 전에 초마의 진경에 들어선 파천은 이후 제대로 힘을 쓴 일이
없었고, 천마와 대결을 할 때도 전력의 일부만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그 또한 이 정도의 위력을 보일 줄은 몰랐는지라 놀라고 만 것이다.
그가 이렇게 놀라고 있으니 직접 그 공격을 당한 당사자들이야…….
그들은 모두 얼이 빠져 움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대총사와 한당 역시
나 마찬가지였다. 스스로를 무림 최고수라 자부해 본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최상위의 수준에 올라 있다고는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들이
받은 심적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공중을 밟고 천천히 하강하는 인
물을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그들의 마음이 시킨 자
연스런 반응들이었다.
“대, 대공.”
“대공을 뵙습니다.”
8백 명이 넘는 마안대원들이 한 소리로 외치며 무릎을 땅에 대었
다. 어느새 양 진영은 간격을 벌리고 나뉘어 있었다. 그 사이로 천마
서생의 모습인 파천이 내려섰다. 그는 먼저 한당을 쳐다보았다.
“대, 대공을 뵙습니다.”
한당은 설마 대공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기에 철퇴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세상에……대공의 실력이 설마……이 정도일 줄이야.’
그리고 그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오게 되었는지도 궁금했으며, 마도
련의 병력을 허락 없이 임의로 사용한 것에 대한 죄스러운 생각도 들
었다. 마안대원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 자리에 동원되어 있었다. 대
공의 명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한당은
언젠가 대공이 자신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이것 한 가지만은 명심해 둬라. 나는 그렇게 자비롭지 못하다. 지
금까지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앞으
로의 네 행동에는 철저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그는 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시선을 마주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의 고개는 깊숙이
숙여지고 말았다.
“그대가 혈마천의 대총사요?”
파천의 물음은 한당에게가 아닌 대총사에게로 향했다.
“그……렇소.”
그 또한 조금 전의 놀람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말이 그렇게 매끄럽
게 나오지는 못했다.
“하하, 이것 늦어서 미안하오. 내가 멀리서 소식을 듣는 바람에 수
하들을 먼저 보내었는데 늦지는 않았소?”
이게 무슨 말인가? 한당은 땅 속으로 처박힐 듯 숙인 고개를 일순
번쩍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천만에요. 대공의 관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 보는 건 처음이지만 저 자 진정한 영웅의 기
상을 지녔다. 그리고 그 엄청난 무공이라니. 저런 자를 암살하겠다고
나섰으니. 사형이라 하더라도 승부를 장담하지 못하겠구나.’
그는 얼마 전 천황부에서 제시한 조건을 듣고 천마서생 파천을 제
거하겠다고 약속한 바가 있었다. 그것을 떠올리자 자신이 얼마나 한
심한 약속을 했는지가 새삼 느껴졌다. 파천의 등장으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던 한당과 그의 사제들과 사매는 파천의 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파천의 전음이 그들에게 전해진다.
[오늘의 일은 총단에 돌아가서 따지마. 각오는 해둬야 할거야.]
예상외로 웃음 섞인 전음에 그들의 가슴에서 뭉클한 그 무엇인가
가 치밀어 올랐다.
‘감사합니다. 대공.’
한당은 진심으로 그에게 감사했다. 그가 진정으로 자신들을 수하
로 인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 순간 그가 너무나 자랑스럽
고 또한 제때에 나타나 줘서 고맙기까지 했다.
“자, 그럼 일단 본격적인 인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은 거추
장스런 떨거지들부터 치우고 봅시다.”
‘거추장스러운 떨거지?’
3천에 가까운 적혈단 고수들을 떨거지라 표현하는 그의 오만함에
대총사 상천일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지만 조금 전의 가공한 무공
을 본지라 그리 생각할 수만도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이
상하기도 했다.
‘매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파천에 대해서 가진 첫인상은 이처럼 신선한 충격이었다. 파
천은 한당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며 천천히 몸을 돌려 세웠다. 그리고
는 입을 열어 아직도 얼이 빠져 있는 인물들을 향해 느릿하게 입을
열어 갔다.
“아직도 그러고 있었나? 볼일 끝났으면 그만 가봐야지.”
“으음.”
장로들의 입에서는 침음성이 토해지고 그들보다는 젊다 할 수 있
는 적혈단주는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이, 이 오만한 자. 감히…….”
“잘 들어라. 여기는 중원이다. 너희들은 지금 남의 영토를 침범한
것이다. 물론 이 땅이 내 것이라 할 수는 없지만. 중원인으로서 한마
디만 하지. 그만 돌아가라. 그러면 지금까지의 행동은 불문에 붙이겠
다.”
마치 철없는 아이들의 행동을 어른이 잘 타이르는 듯한 어조였다.
그 말은 지금까지 인내력을 발휘해 분노를 억누르고 있던 장로들마
저 치를 떨게 만들었다.
“네 이놈, 감히 네가…….”
그 또한 적혈단주와 마찬가지로 ‘감히’ 라는 말을 꺼내 놓고 그 다
음을 잇지 못했다. 감히 네 따위 놈이 죽어 싶어 환장했느냐, 라는 말
을 해야 하는데 솔직히 그도 저 괴물 같은 자를 죽일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입만 나불대 봐여 시간 낭비다. 빨리 철수해라. 아 참, 한 가지 말
해 준다는 것을 잊어 버렸군. 오다 보니 무림맹의 본진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더군. 아마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이곳에 당도할 거고…….
그렇게 되면 그대들은 남의 것을 넘보다 주인에게 걸려 쫓기는 도둑
고양이로 전락하고 만다. 중원에 발을 디디면서 ‘이곳은 사람이 없
다’ 라고 생각했겠지만…… 내가 한 가지 말해 주마. 나는 너희들 따
위를 적으로 간주해 본 적이 없다. 중원은 너희들이 발을 디딜 곳이
아니다. 다시 말해 꿈도 꾸지 마라. 또다시 이곳에 발을 딛는다면 내
장담하건대 그 발모가지를 모두 잘라 돼지먹이로 주고야 말겠다.”
“으으으.”
장로들과 적혈단주는 파천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며 약을 올렸음에
도 ‘감히’ 그에게 대들지 못했다. 솔직히 그들이 믇는 것은 이제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아직까지는 월등한 자신들의 숫자였다.
‘저 자는 우리 모두가 덤빈다 하더라도 죽일 수는 없는 자다. 막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죽이기는 벅차다.’
장로 중 하나의 시선이 슬그머니 움푹 파인 구덩이 주위의 시체들
에 머물렀다. 수십 명이 떼죽음을 당해 있었다. 그들의 몸은 제각각
따로 흩어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더욱 두려움에 사로잡
혔다.
“참, 그렇게 알아듣게 설명했는데도 말귀가 통하지 않는 친구들이
구먼. 정 그것을 원한다면 시작해 볼까? 난 말야, 항상 싸움이 시작되
면 수장들부터 죽이고 본다. ‘시작’ 하는 순간 너희들 먼저 죽이고
본다는 거지. 결코 숫자의 많고 적음은 내게는 적용이 안 된다는 말
이다. 막말로 너희들을 때려죽이고 나서 이 넓은 평원을 도망 다니며
한 놈씩 죽이는 것도 재밌을 거야. 난 체력도 좋거든. 한번 시험해 볼
까?”
그가 슬쩍 발을 떼며 한 걸음 다가서자 그들은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움찔거리며 한 발 물러서고 말았다. 비교적 뒤에 있던
적혈단주는 한 발을 떼어 냈다가 마지막 자존심 하나로 다시 제
자리에 갖다 놓기는 했지만, 적혈단원들 모두가 그의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는지라 단주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
니었다. 그것을 의식했음인가, 그가 호기롭게 외치며 앞으로 나섰다.
“네 이놈, 네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네 놈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가 죽는 한이 있어도 네 놈의
그 가벼운 입만은 찢어 놓고야 말리라.”
파천은 그를 보며 씨익 정겹게 웃었다.
“네 놈이 그래도 용기가 있구나. 그 정도의 용기면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겠군. 좋았어. 네놈으로 결정했다.”
순간 적혈단주의 얼굴이 혼자 보아 주기 아까울 정도로 샛노래지
는 것이 아닌가. 정말로 파천은 그에게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것을
의식한 장로들은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들의 얼굴은 비장함으로 물
들어 있었다.
“수하를 아끼는 그 마음은 아주 보기 좋은데, 죽음도 대신 할 수 있
다면 좋겠지만. 원래가 나이가 들수록 생명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진
다던가. 뭐, 예외도 있겠지.”
대총사는 파천의 행동과 상대방의 반응들을 보며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믿을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피 냄새 가득한
격전장을 한 순간에 자신이 주도하는 놀이터로 만들어 버리는 그의
신비한 기질은 실력만 있다고 해서 누구나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
란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파천의 걸음은 중단함이 없었다. 멈춤이
없이 다가서는 그를 향해 장로 중 하나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 자리에 멈추지 못할까.”
파천은 그의 말에 코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의 눈가에 피어 있던
장난기가 씻은 듯 사라지고 살기라 느껴지는 기운이 뻗치기 시작했
다. 그것을 장로들이 느낀 순간이었다. 이미 적혈단주는 두 손으로
도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피슛
파천의 몸이 순간 공간을 단축하며 앞으로 돌진하는 것처럼 보이
는가 했는데 장로들의 손이 들리는 순간 장내에서 사라져 버렸다.
팍팍팍
“끄악.”
처절한 비명성이 장내에 있던 인물들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크
게 울렸다.
“저, 저기.”
한당의 막내 사매인 비연림이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일제
히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한다.
피슛
파천이 허공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이미
그는 원래 있던 자리에 뒷짐까지 지고 서 있었다. 그리고…… 적혈단
주는……. 입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는 것이 억울할 정도로 모두는
입을 따악 벌리고 말았다. 적혈단주의 위풍당당하던 그 큰 체구는 이
미 그 자리에 없었다. 장로들 또한 뒤를 돌아다 보다 할 말을 잃었다.
몸통에서 분리된 팔과 다리와 머리가 뒤엉킨 채 소복이 쌓여 있었다.
파천이 대체 어떤 수법을 써 그를 살해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중에 아무도 없었다.
“다시 한 번만 말한다. 두 번 다시 말하게 하지 마라. 모두 돌아가
라. 이것은 너희들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다. 난 살인을 즐기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망설이지도 않는다. 돌아가라. 괜한
객기 따위로 자신의 하나뿐인 생명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라. 생명은
하나뿐이다.”
파천의 이번 말은 묵직하게 흘러 나와서인지 또 다른 느낌으로 전
해졌다. 마지막 경고임을 그들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장로들은 잠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고 망설였다.
두두두두
바로 그때 저 멀리서 지축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 오기 시
작했다. 그 방향은 중원 쪽이었다. 순간 장로 중 한 사람의 입에서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 귀환한다.”
그들은 돌아가고 있었다. 등 뒤에 남겨 둔 것은 적혈단주와 단원들
의 시체만이 아니었다.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수치와 굴욕감을 남겨
둔 채 떠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떨쳐지지 않고 그들을 따라
다닐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다시 중원을 밟았을 때는 지금보다는 더
강해져 있을 있을지도 몰랐다.
파천의 고개가 한당 등에게로 향했다.
“우리도 돌아간다. 대총사! 당분간 마도련에서 머무셔야겠소.”
“그럼 잠시 폐를 끼치겠습니다.”
“한당.”
“네, 대공.”
“곧장 마도련으로 가라. 가서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어라. 너희들
은 당분간 근신이다. 각오해야 할거야. 그럼 대총사, 나중에 총단에
서 뵙겠소. 나는 다른 곳에 볼일이 있어 이만 헤어져야겠소.”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파천은 땅을 박차며 날아 올랐다. 그를 쫓는 시선들엔 숨길 수 없
는 감탄이 배어 있었다. 파천은 곧장 말발굽 소리가 들려 오는 곳으
로 향했다. 저 멀리서 질주해 오는 기마대는 천 기가 넘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그들의 간격은 좁혀져 갔다.
[환노, 일은 끝았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곧장 낙양으로 돌아가서
대기해라.]
[존……명.]
그는 어찌 된 영문인지를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못했다. 이미 그
는 자신들을 훌쩍 넘어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으므로.
“모두 방향을 틀어라. 목적지는 낙양이다.”
그들 또한 어찌된 영문인지를 모르긴 마찬가지였지만 명령에 충실
했다. 명령대로만 살아 온 자들이었기에 의문을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 뒤를 따라 가는 마도련 고수들은 저 앞쪽에
서 달려가는 기마대를 보며 호기심을 가졌다.
“무림맹의 고수들이 반가워질 날이 올 줄은 몰랐군요.”
“역시 중원 무림의 저력은 대단하구나. 한당, 내가 약속은 지킨 건
가?”
“감사합니다.”
혈마천의 대총사 상천일은 한당과 날ㄴ히 다리며 죽어간 마혼대
대원들을 생각했다. 자신의 일방적인 선택을 존중해 준 그들이 너
무나 자랑스러웠다. 스스로 진 빚은 축정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었
지만 갚을 길은 없었다. 죽음으로서도 그 빚은 갚을 수 없었다. 있다
면 자신을 따라 준 그들의 선택이 진정 옳았음을 입증해 주는 것뿐
이었다.
‘이제 내 삶은 내 것이 아니다. 혈마천, 그들은 오늘의 일을 후회하
게 될 것이다. 작은 것을 잃었다 여긴다면 분명 후회하게 해주고야
만다. 내 삶을 바쳐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고야 말
것이다. 이것은 그들을 향한 새로운 약속이다.’
그들 삶의 모습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난세를
살아가는 삶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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