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06화 : 태산 십 년, 다시 무림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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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06화 : 태산 십 년, 다시 무림 속으로


태산 십 년, 다시 무림 속으로

천마교는 현재 황하를 끼고 있는 하남성 개봉에 위치하고 있었다. 장강변 무창의 무림맹이 아닌, 천마교를 거처로 삼기로 한 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 수밖에 없다. 그 동안 들어 온 바를 종합해 보면 무림의 크고 작은 변화는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먼저는 무림맹이 강남 무창에, 천마교가 강북 개봉에 자리 잡았다는 점이었는데 그 두 기점을 시작으로 서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점에서 무림맹은 천마교에 비해 세력이 형편없이 쇠락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두 세력의 수장들이 사실상 한 식구나 다름없는 현실에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정도와 마도라는 전통적인 구분 역시나 현재의 무림에는 별 의미가 없어졌다. 현 무림맹은 예전의 지도부가 전면적으로 물러나고 비교적 젊은 신진 고수들로 세대교체 되었다. 이 이면엔 예전 일월 교주에게 휘둘린 지도부 명숙들의 자성의 움직임과 아래로부터 시작된 변혁의 바람이 맞물린 것도 있었다. 무림맹을 구성하는 주요문파 수장들이 실제적으로는 모두 내 수하였던 점과 그들이 무림맹일에 사실상 관여하지 않으며, 오히려 천마교에서 머물게 된 점 역시 이런 변화를 부추기는 데 한몫 했다.
현재의 무림맹은 천마교로부터 음으로 양으로 여러 가지 지원을 받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니 대단한 변화인 셈이다. 예전 정도인들의 자존심이라면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일 텐데, 생각이 젊고 실리에 밝은 현 지도부는 일단 모든 지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무림맹이 여전히 옛 위용을 회복하지 못하는 데는 이런 것 말고도 여러 배경이 더해져야 설명이 가능하다. 원래가 강남은 마도가 기승하던 데고. 정도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9대문파는 거의 강북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 또한 기존 무림맹 소속 문파들이 하나 둘씩 발을 빼내는, 그래서 점차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현 지도부에는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상징적인 존재가 없었다. 천마교는 그 명성에 걸맞는 걸출한 고수들이 많은 반면에 현무림맹은 전체를 장악하고 이끌어 갈 지도자가 없는 셈이었다, 현맹주인 제갈초형에 대해서는 모두가 좋아하고 신뢰하긴 했으나 정작 결정적인 시기에 직면하면 지도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 때문인지 무림맹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키워 가고 있었다, 워낙에 현 무림이 별 주요 사안 없는 평화 시대이기에 문제가 불거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건 현재의 모양새일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몇십 년이 흐른다면 정도는 사분 오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론이 내부적으로는 잠재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중원에 터를 잡은 천마교는 기존의 세력에다 중원 마도인들과 새외의 일부 세력까지 결집된 사상 최대의 조직으로 자리 잡았다. 최초의 젊은 여교주의 지도력이 강하고 거친 마도인들을 어느 정도 사로잡을 수 있느냐고 의심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애의 뒤에는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촌마교의 상위 고수들과 나와 천마라는 든든한 배경이 존재했다. 이런 이유로 소군은 별 무리 없이 천마교를 성세로 이끌어 가고 있다.
광마존의 말에 의하면 현재 무림은 사실상 천마교가 다스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했다, 난 이 점을 대체적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만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시각이 없지도 않다. 무림의 두 축인 마도와 정도가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진정한 번성과 안정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다.
이런 점을 들어 여러번 천마교의 정책에 간섭한 적이 있었다. 물론 그건 태산에 오른 지 몇 년 되지 않은 시점의 일들이었다, 이런 내 의중을 파악한 소군은 여러 면에서 지금까지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산을 내려오고 있으려니 어느새 우리는 임청을 지나 황하 강변까지 다다라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황하는 십년의 세월에도 여전해 그 자리에 변함없는 자태로 있어주어 감회를 새롭게 한다.
“우와, 역시 내려오길 잘했어.”
환아의 탄성에 우리 모두는 피식 웃고야 말았다, 마치 제가 하산을 결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지 않는가. 난 저 녀석이 가끔은 정말 내 아들일까, 하는 의심을 하곤 한다. 도무지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조숙하단 표현으로도 당치 않을 징그러운 짓을 하지를 않나. 난데없고 엉뚱한 소리를 해서 진땀을 빼게 하지를 않나. 지나치게 영악하고 사리에 밝아 장차 어떤 어른으로 성장할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보곤 한다. 뒤짐까지 턱하니 지고 강을 내려다보는데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런 환아와는 달리 천아는 제 엄마의 손을 꼭 잡고 환한 얼굴을 짓고 있었다.
다시 환아를 보자 은근히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때쯤이면 날 곤란하게 할 질문이 나올 법 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빠.”
“왜?”
내 시큰둥한 대답에도 환아는 두 눈을 반짝이며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아빠는 이 강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더랬어요?”
이건 좀 약한데.
“글쎄, 인간의 심사와는 상관없이 대지를 감싸고 흐르는 저 놀라운 풍경에 압도되곤 했지. 그리고 세월이 무상하고 인간의 삶이 덧없다는 걸 가끔은 생각하곤 했다.”
“흐음.”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짓거리는 영락없이 세파에 닳고 닳은 노인네의 모습이었다, 으휴, 조 놈을 그냥. 환아의 저런 겉멋은 개왕과 쌍노, 천마교의 호법들과 장로들이 다녀간 뒤로 더해졌다. 그들이 애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 놨는지 제가 무슨 특별한 존재라도 되는 듯 스스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전 말입니다.”
바로 저 소리다. 저 말이 나올 때면 되도 않는 소리를 해대며 스스로 감탄에 젖고는 한다. 우리 모두는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나 싶어 관심 어린 눈초리를 집중했다.
“아름다운 산하가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가 싶군요. 이런 대자연의 위용에 비하면 인간은 얼마나 초라한가 싶군요., 또한 이런 이유로 마음속의 웅지가 싹트는 듯합니다. 이강을 바라보던 옛 사람들은 모두 어디 간 건지, 쯧쯧.”
에라이, 난 주먹을 불끈 쥐고 하마터면 환아의 뒤통수를 갈길 뻔 했다. 정말이지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도끼눈을 뜨고 날 감시하고 있는 설란이 있는 한은 말이다.
천마는 환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보인다. 그러더니 천아를 척하니 바라본다.
“천아야.”
“네?”
“넌 저강을 보니 무슨 생각이 드느냐?”
“……아무 생각이 안 들어요.”
순간 천마의 얼굴이 확일그러진다.
“아, 있다.”
“뭐, 뭔데?”
“저 강물에 뛰어들어 멱을 감고 싶어요. 저 끝에서 이 끝까지 수영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신날 것 같지만 옷을 입고 뛰어들면……..에 또……. 옷을 버릴 거고, 그러면 엄마가 힘들 거고, 뭐 그런 생각요.”
이 얼마나 아이다운 생각이요, 대답인가. 그러나 천마는 영 탐탁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리고 아직은 날씨가. 쌀쌀해서 수영하기에 이르지, 그렇지?”
“네”
우리는 한동안 감회에 젖어 있다 발길을 떼어 갔다. 강을 거슬러 올라갈 셈이었다. 포구가 나오는 데까지 걸어가기로 한 것이다. 여기까지는 경공을 발휘해 시간을 단축했지만 지금부터는 자제하기로 했다. 우리가 목표로 한 곳은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잔양이었다. 그곳에서 늦은 식사를 하고 배를 탈 생각이었다. 설란과 사라, 적루아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앞장서 걷고 우리는 좀 뒤쳐져서 걷고 있었다.
“마계의 문이 열리는 게 진인은 금방이라 했지만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다. 그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지 모르지만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겠지.”
천마는 자신의 각오를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기라도 하듯 독백처럼 말했다. 나 또한 그러고 싶다. 아니 그럴 곳이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야 후회가 들지 않는단 말인가. 어떻게 한다 해도 아쉬움은 남는 법이다. 그건 백 년을 살아도, 천년을 살아도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엄마, 나 먼저 갈게.”
황아가 설란의 손에서 제 손을 빼고는 앞으로 뛰어 가는 게 보였다. 저 녀석이 갑자기 왜 저러나 싶어 멀리 바라보았더니 몇 사람이 강변에 모여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가만 살펴보니 그들은………무림인들이었다.
“저 녀석이!”
내가 환아의 뒤를 쫓으려고 막 신형을 띄우려는데 천마가 옆에서 제지했다.
“내버려 둬봐. 어떻게 하나 보자고, 그리고 네가 걱정할 만큼 환아는 약하지 않아.”
그 말은 맞다. 환아와 천아는 무공 수준으로만 놓고 보면 무림에 내놔도 일류 고수의 반열에 충분히 들 정도였다. 녀석들은 둘 다 무공을 익히는 걸 밥 먹는 것보다 좋아한다.
난 처음엔 건성으로 가르쳤지만 천마는 그렇지 않았다. 둘을 데리고 얼마나 정성들여 가르치는지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그 열정에 함께 녹아들 정도였다. 이런 정성 때문이었던지 녀석들의 성취는 나이에 비하면 얼토당토않게 높은 경지를 이루고 있는 셈이없다.그렇지만 부모 마음이란 게 또 어디 그런가. 설란도 뒤늦게 환아가 뛰어간 이유를 알았는지 내 쪽을 급하게 쳐다본다. 난 고개를 가만히 끄덕여 그녀를 안심시켜 보지만 통할 리 없다.
“어서 뒤쫓아 가보세요.”
어부인이 시키시니 따를 수 밖에. 우리들은 금세 환아의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네놈 때문에 다 잡은 여자들을 놓쳤지 않느냐!”
우락부락하게 생긴 장한 하나가 감산도를 빼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같은 일행인 듯한 네 명의 무사가 눈을 부라리고 서 있다. 그들이 둘러싼 가운데 한 명의 서생차림의 젊은이가 바닥에 엎어져서 부들거리는게 보이고.
“이놈아, 아까는 그리 기세등등하더니 어찌 된 일이냐. 그놈의 명문을 들먹이며 또 다시 행세해 볼 생각은 싹 달아났느냐?”
아직 그 사람들은 우리가 근처까지 다다랐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서려는 환아의 손을 내가 꽉 움켜지었다.
환아는 고개를 내 쪽으로 급하게 돌리며 의문을 드러낸다. 나는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하라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녀석도 알아 들었는지 고개를 야무지게 끄덕인다. 환아의 눈 속엔 감출 수 없는 흥분이 서려있다.
우리는 십여장이나 떨어져 있는 그곳의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놈, 이제 당장 죽게되니 겁이 나는가 보구나. 하긴 네놈도 인간이니 삶에 대한 미련이 왜 없겠느냐. 재수가 없다고 생각해라. 우리 일에 끼어들어 방해한 대가라 생각하고 죽으면 덜 억울할 거다.”
둘러선 자들 중에서는 비교적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 엎어진 젊은이 가까이에 웅크리고 앉아 친절하게 속삭이듯 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자 중 하나가 급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뭐하고 있냐, 아삼. 그냥 죽여 버려.”
이 소리에 또 한 명이 동조하고 나선다.
“그래, 빨리 죽이고 그 년들을 쫓아 가야지.”
천마는 나를 쳐다보며 피식 웃는다. 대충의 상황이 짐작 간다는 표정이었다. 환아는 당장이라도 앞으로 뛰어가려는 태세였다. 이 녀석은 뭐가 어떻게 된 연유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참견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이다.
환아의 관점에서 본다면 약자는 무조건 보살펴야 한다. 녀석의 눈에는 쓰러져 있는 사람은 선한 사람, 그러니까 지켜 주고 도와 줘야 할 사람이고 그를 둘러선 자들은 악당인 셈이었다. 더군다나 여러명이 한 사람을 핍박하고 있었으니 좋게 보일 리가 만무했다.
난 환아를 잡고 있는 손을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환아가 간절한 시선으로 날 바라본다. 내가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순간 체념하는 빛이 빠르게 눈가를 스쳤다.
“살려 주시오. 내게 무슨 죄가 있겠소. 난 억울하오.”
“듣기 싫다. 네 놈 때문에 그 년들을 놓친 것도 분한데 넌 네 문파의 위세로 우리를 위협했고, 알량한 술수로 우리 일을 훼방 놓았다.”
“그 동안의 정리를 생각해서라도……”
“이자식이.”

“윽.”
안면을 걷어차인 젊은이는 얼굴을 감싸고 데구르르 구른다. 계속 듣고 보니 어찌 된 연유인지 점차 혼란스러웠다. 처음엔 환아의 시선대로 악당인 다수로부터 아녀자들을 구해낸 정의의 용사 정도로 젊은이을 생각했는데, 듣고 보니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참견은 해야 할 판이었다. 감산도를 뽑아든 장한이 막 젊은이에게 다가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들 보시오.”
내가 큰 소리로 말하며 그들 쪽으로 다가서자 그제야 낯선 이방인들의 접근을 알아채고서는 빠르게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역시 악당들은 얼굴들이 대체로 흉악한 편이군. 이러니 당장 오해를 받지.
“너희들은 뭐냐?”
저 말투도 그렇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말고 그냥 지나거라.”
“저를 좀 구해 주십시오. 전 비천문의……”
쉬익
“컥.”
또 한 번의 발길질은 제법 매서운 데가 있어 젊은이는 채인 가슴팍을 쥐고 고통을 호소한다.
“그러다 사람 죽이겠소.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너무 심하구려.”
내가 점잖게 이렇게 운을 떼자 한 명의 장한이 히쭉히쭉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어느 새 우리는 일장 가까이 다가서 있는 셈이었다.
“보아하니 새외에서 유람이라도 온 것 같은데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어 봉변당하지 말고 그냥 못본척 지나쳐라.”
새외?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당혹해 있다가 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나와 천마는 가발을 쓰고 있지 않은 채였다. 금발과 적발의 사내 둘 그리고 사라와 적루아의 이국적인 모습이 그들이 보기엔 중원인으로 비쳐지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십 년 넘게 가발을 쓰지 않고 살다 보니 우리 모습이 당장 눈에 띈다는 걸 잊고 있었던 거다.
“그놈, 생긴 것 답지 않게 참을성이 많군. 당장 살수라도 쏠 듯 싶게 생겼구만.”
천마의 그 말은 다가선 장한을 도발시키는 말이었다.
“이 놈이 죽고 싶어 애가 닳은 놈이구나. 네 소원대로 죽여 주지, 이 외팔이 붉은 원숭이 같은 놈.”
외팔이 붉은 원숭이라고? 하하하, 저 자 실수하는군. 그런데 ‘외팔이 붉은’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원숭이’라니. 사실 따지고 보면 독고무의 얼굴을 하고 있는 천마는 제법 준수한 편이지 않던가? 역시 내 예상대로 천마는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며 무섭게 분노한다. 그런 말을, 더군다나 가족들이 지켜보고 있는 데서 들었으니 그의 성미에 이대로 곱게 일이 마무리 되기는 그른 것 같다.
“흐흐, 그래. 간만에 무림에 나온 기념으로 네 놈의 목에 줄을 묶고 끌고 다녀야겠다. 네 놈은 목이 쉬어터지도록 꺅꺅대야 할 거다.”
으름장에 두려워하기는커녕 대응하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음인가, 뒤에 있는 자들 중 하나가 앞으로 급히 나서며 지금까지 태도와는 다르게 정중하게 말했다.
“오해로 인해 다툼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소. 여러분은 지나가다 보았으니 우리 행사가 심하다 여길 수도 있지만 저놈은 제 잘못의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니 그냥 모르는 척 해주시오.”
“무슨 연유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내 물음에 장한은 잠시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빛이 역력했다.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 라는 귀찮음의 표정도 내비친다.
“살려 주시오. 난 비천문의 제자요. 비천문은 천마……컥.”
또다시 심한 구타에 하던 말도 마저 못한다.
“먼저 저 매질부터 중지시키시오. 양쪽의 말을 다 들어 보아야 진위를 알 수 있지 않겠소? 그것이 귀찮다면 아마 귀하들은 오늘 심한 낭패를 당하게 될 거요.”
“귀찮은데 저놈들도 죽여 버리자.”
이렇게 말하는 자에 비해 앞장서 있는 자는 침착하면서도 상황 판단이 빠른 자였다. 내 말이 단순한 위협이 아님을 직감했는지, 자신감을 보이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판단한 건지, 신중하게 일행을 살피더니 한숨을 후우, 하고 쉰다.
“좋소, 어찌된 연유인지를 설명하겠소. 우리는 신천장의 수하들이오.”
이렇게 말문을 열기 시작한 그의 얘기는 대충 이랬다.
신천장은 3년 전에 새로 결성된 무림 문파로 원래는 산동성 개봉 근처에 문호를 열었다고 했다. 신천장의 장주는 사십대의 중년인으로 가문에 비밀리에 전해져 오던 백령검법을 익혔는데, 대대로 무림에 발을 들여 놓지 않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고 있던 터에 연로하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웅심을 포기할 수 없어 강호로 출사하게 되었다.
그가 익힌 백령검법은 투박하고 세밀함이 부족하지만 무림의 일절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강하고 위력이 뛰어난 검법이었다. 은근히 무림에 나가 영명을 날릴 것을 기대했건만 당시의 무림은 그가 바라던 혼란 시대도 아니고 무림 세력이 각축을 벌이는 때도 아니었다. 너무도 평화로운 시대였기에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없었다.
어쨌든 그는 개봉에 문파를 열었지만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그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니, 현 무림의 강자들을 하나씩 굴복시켜 제 이름을 떨칠 것을 계획한 것이다. 그리고 처음 찾아간 곳이 천마교에 새롭게 편입된 마도 문파인 적혈문이었다.
그들은 원래 신강에 자리하고 있다 천마교를 흠모해 집단 이주해 온 문파였다. 적혈문의 문도수는 고작 서른 명 남짓. 그렇지만 신천 장주 백령검 장두익에게는 그것도 부러운 것이었다. 그는 호리롭게 적혈문을 방문해 문주에게 비무를 요청한다. 적혈문은 그러나 그를 상대해 주지도 않는다. 몇 번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냉담한 반응만 겪게 된 장두익은 결국 야음을 틈타 적혈문에 잠입하게 되고 곤히 자고 있던 문주를 깨워 비무를 신청한다.
오밤중에 자다가 봉변 아닌 봉변을 당하게 된 적혈문주는 어이가 없었지만 무인으로서의 자존심 때문에 비무를 거절하지 못하고 승낙한다. 절혈문 제자 서른 명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비무가 벌어지게 되는데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장두익이 오초식만에 승리를 거둔다.
적혈문주는 막 천마교에 편입되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행복감을 만끽하고 있던 차였기에 불현듯 당하게 된, 그것도 무명소졸이라 여긴 자에게 당한 참패는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느껴졌다. 결국 그는 제자들이 보는 자리에서 자결을 한다. 졸지에 문주를 잃은 제자들은 분별력을 잃고 장두익에게 벌떼처럼 달려드니 그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수를 펼치게 된다. 결국 그 날밤 그에게 목숨을 잃은 자가 열여덟이요, 살아 남은 자도 중상을 면치 못했다.
이 일은 빠르게 개봉 전체에 알려지게 되니 천마교 또한 이를 알게 된 건 당연하다. 더군다나 적혈문은 이제 막 천마교에 편입된 세력이었던 것이다. 천마교주는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살아남은 적혈문도 십여 명과 장두익을 잡아다가 대질시키고 진상을 캐보지만 적혈문도 십여 명은 하나같이 장두익이 야음을 틈타 잠입해 사사로운 욕심으로 문주를 살해했다며 한소리로 아뢴다. 시체를 부검해 본 결과 타살이 아닌 자살임이 밝혀졌지만 어찌 된 연유인지 장두익은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장로 하나가 찾아 와 말하길,
“네 무고가 밝혀졌다. 너는 동아가도 좋다. 대신 한 가지 약속해다오.” 라고 했다.
“무엇입니까?”
“앞으로 비무행을 더 이상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이곳 하남성을 떠나라. 문파를 열어도 되고 홀로 자족하며 지내도 되지만 무림에 분란을 일으키지 마라. 만약 너와 다른 문파간에 또다시 이런 분쟁이 있을 시에는 네 정당함이 드러난다 해도 넌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할 수 있겠느냐?”
장두익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달리 도리가 없었다.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는 천마교. 감히 대항한다는 건 꿈에서조차 불가능하단 걸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아무 소리 않고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정착하게 된 곳이 산동성 대명이었다. 그는 적혈문주와의 일로 제법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기에 문파를 열고 제자를 모으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한 일년간은 그럭저럭 아무런 문제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던 그가 곤란을 겪게 된 것이 2년 전부터 였다.
대명 인근에는 신천장 말고도 비천문과 장학문이라는, 일대에서 가장 큰 문파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비천문이 가장 성세가 드높았다. 처음엔 별 경계를 하지 않던 그들도 점차 신천장의 규모가 커지자 은근히 핍박하고 압력을 가하는 일이 잦아졌다.
비천문은 천마교의 대명지부 역할을 하고 있던 문파. 신천장주 장두익은 감히 그들과 맞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런 까닭은 비천문이 무서워서라기 보다는 일년 전 천마교 장로와 한 약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참을 수 밖에 없었다.
매일을 근심으로 지내던 그가 활짝 웃게 된 날이 오게 될 줄은 당시의 그로서는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그렇게 눈엣가시처럼 신천장을 괴롭혀오던 비천문쪽에서 동맹을 제안해 왔던 것이다. 신천장주 입장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는 제안이었다.
당시의 비천문주에게는 한명의 아리따운 수양딸이 하나 있었는데 결국 일이 잘 진행되어 그녀와 신천장주는 혼인을 하게 된다. 신천장주가 비천문주의 사위가 된 셈이다. 설마하니 사위에게 칼을 겨눌 장인이 어디 있겠는가? 그제야 두 다리를 쭉 뻗고 안심하게 된 신천장주는 마음놓고 문파의 일에 전념한다. 그러나 이 혼담이 달콤한 꿀을 바른 독약일 줄이야……
신천장주의 부인인 연하심은 보기 드문 절색이었다. 그녀는 겉으로 보기엔 정숙하기 그지없는 현처였다. 더군다나 실제로도 신천장의 제자들에게 그렇게 다정다감할 수 없었다고 한다. 갓 들어온 제자들까지 챙기는 그녀의 선행을 보고 감동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그는 비천문을 떠나올 때 몇 명의 경호무사와 시비들을 데려왔다. 그들은 단지 그녀를 옆에서 보호하고 보살피는 것에 머물지 않고 곳곳에 배치되어 정말 충심껏 문파를 위해 일했다. 이런 점을 기특하게 여긴 문주는 아내와 비천문의 제자들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베풀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신천장을 삼키기 위한 비천문주의 악독한 음모에 지나지 않았으니. 연하심은 제일 먼저 신천장의 제2인자격인 총과 방운섭에게 접근한다.
야심한 밤에 주모가 자신의 처소에 들른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술상까지 봐 온 것을 보고는 기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감히 주모의 명을 거절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한다. 이런 일이 몇차례 벌어지자 문파 내에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당연했다. 이 소문은 결국 장주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지만 그는 아내와 가장 충실한 수하인 방운섭을 믿었다. 그렇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디 그렇던가.
결국 방운섭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그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어찌 주모의 행실을 가지고 왈가왈부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그의 심정이었다. 그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결국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렇지만 장주 장두익의 사람됨이 워낙에 진중하여 함부로 행동하지 않으니 좀 더 사태를 관망하기로 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한번 굳어지기 시작한 심증은 좀체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확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연하심의 시비 하나가 장주의 처소에 뛰어드는데 그녀의 모습은 보기 민망할 정도였다. 옷은 갈가리 찢어져 있고 허연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울며 장주에게 다급함을 아뢰었다.
“장주님, 큰일 났습니다. 지금 총관 방운섭이 마님의 처소에 뛰어들어 강제로 범하려 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막아 보려 했지만 방운섭의 무공이 고강하여 그만……흑흑흑.”
그 자리에서 오열을 터트리는 시비의 몰골을 더 이상 장두익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이 뒤집힌 것이다. 그는 백령검을 손에 쥐고 나는 듯이 부인의 처소로 향한다. 그가 문을 박차고 들어서 보니 부인의 옷은 방금 전 보았던 시비와 다름없이 갈가리 찢어져 있고 그녀의 두 눈엔 눈물이 가득하다. 더군다나 방운섭은 부인의 곁에 다가선 채 그녀의 두 손을 붙잡고 있지 않은가. 장두익은 분노해 앞뒤 잴 것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이놈, 네가 어찌 내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자,장주님.”
그의 검은, 막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떼려는 방운섭의 목을 단칼에 잘라 버린다. 그런 그에게 연하심은 통곡하다시피 울려 매달리니.
“저 자가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당신을 독살하겠다고 했어요. 몇 번이나 협박에 못 이겨 그의 요구를 들어오다……내가 거부했더니……그만…….흑흑, 제가 죽일 년이에요.”
이 일이 있고 난 후 장두익은 매일 술을 찾게 되었다. 무인에게 과도한 음주는 독약과 같은 것. 그의 판단력은 허물어지고 의기도 상했다. 이런 그의 처소를 연하심이 찾아와 위로했다. 그녀의 위로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연하심은 술에 취한 그를 자신의 처소로 이끈다. 그녀읭 방에 들어서 보니 떡 벌어지게 차려진 술상엔 온갖 다양한 음식들과 희귀한 술이 화려할 정도로 가득했다.
새벽이 맞도록 함께 술을 나누고 잠에 곯아떨어진 장두익은 이상한 악몽을 꾸고 두 눈을 떴다. 마침 그때 아내 연하심이 두 손에 비수를 들고 막 그의 심장을 찌르고 있던 참이다. 아무리 술로 인해 무뎌졌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 동안 익혀 온 무공이 하루아침에 어디 가겠는가. 몸을 간신히 빼내며 피하는데 이건 그의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다. 그녀의 무공이 그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상당한 수준이었다. 기습이었고, 술이 아직 덜 깬 상태였으며, 가볍게 생각한 때문이었는지 그는 중상을 면친 못하고 가슴과 어깨에 상처를 입게된다. 물론 당장 숨이 끊어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가볍지 않은 상처였다.
연하심은 분한 생각이 들어 재차 공격해 왔으나 이제는 더 이상 그를 곤란하게 할 수 없었다. 결국 연하심은 시비들과 경호무사들을 데리고 장을 빠져나간다.
장주는 그 순간 모든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녀가 비천문으로 돌아가면 자신은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수양딸을 내주었더니 오히려 죽이려 했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그로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게 되고, 그 누가 자신의 말을 믿어 줄 것인가. 결국 비천문주는 이걸 노리고 그녀를 내게 보냈구나, 라는 깨달음과 함께 충성스런 수하를 믿지 못하고 간악한 술수에 놀아난 자신을 한탄했다. 그렇지만 그러고 있을 수 만은 없다. 그는 수하들에게 명해 연하심을 추격해 잡아 오라 한다.
여기까지 들은 난 내심으로 답답한 심정이 되었다. 사내는 말하는 내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추측한 것까지 덧붙여 말하는 것 같았다. 그 얘가 실감이 나 나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장두익이란 인물의 기구한 운명이 동정이 가고 안타까웠고, 그런 간악한 잡배인 비천문이 천마교의 대명지부 노릇을 하고 있다는 현실이 또한 서글펐다. 아무리 많은 귀와 눈이 있다 해도 진실을 바라볼 수는 없는 법인가?
“이 모든 게 사실이오?”
“어찌 내가 거짓을 말하겠소?”
“그럼 지금 연하심이란 그대 주모를 추적중이었소?”
“그렇소. 그런데 이 놈이 뒤에 쳐져 있다가 우리에게 암계를 써 독수를 쓰는 걸 붙잡아 둔 거요”
“여기서 이렇게 지체하고 있었단 말이요?”
“염려 마시오. 일부는 이미 그 간악한 계집을 뒤쫓아 갔으니.”
난 비천문의 수하라는 자를 다시 살펴보았다. 어디 조용한 마을에서 학동이나 가르치면 딱 알맞을 용모였다. 어지 저 얼굴에서 그런걸 알아낼 수 있으리요. 세상엔 겉만 봐서는 속을 알수는 없는 일이 너무도 많다.
“모두 거짓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고 비천문을 삼키자는 수작입니다. 대인, 비천문은 천마교의 대명지부입니다. 천마교는 이땅의 정의를 지키는 의협지사의 모임이지 않습니까? 대체 누구의 말을 믿는 겁니까?”
간절한 호소로군. 대인이라, 허허. 그리고 언테부터 세상사람들에게 천마교가 의협지사 모임이라 여겨졌던가? 세상의 인심이란 이처럼 조변석개하는 것이란 말인가. 천마도 그 자의 말에 어이가 없었는지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이 세운 천마교가 저정도의 칭송을 들어본 적이 단연코 없기 때문인 듯했다.
“흠, 일단은 뭐가 사실인지 모르겠는걸.”
설마하니 저놈이 한 말에 동한 것은 아니겠지.
“그야 그렇지만……일단은 사실을 알아보자.”
“뭐? 그럼 너 설마 신천장으로 가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못 갈 건 또 뭐냐? 신천장은 여기서 얼마나 떨어져 있소?:
“5리만 더 가면 됩니다난……”
“실례가 안 된다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추이를 지켜보고 싶습니다만.”
“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아무 상관없는 외인을 데리고 들어간다는 게 영 게름칙한 것 같았다.
“혹시 또 압니까, 도움이 될지.”
“좋습니다. 일단은 장주님께 같이 가봅시다.”
그들은 추적을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오던 길을 되짚어 5리를 가니 나지막한 언덕위에 정성들여 지은듯한 장원이 그림처럼 앉아 있는게 보였다. 내부를 따라 들어서자 장원의 분위기가 어수선함을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신천장의 제자들은 우리들을 경계하는 빛이 강했다. 접빈청이라 명명된 전각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사십대 중순이나 되었음직한 기골이 장대한 중년인이 들어서는게 보였다. 얼굴이 검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강직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안으로 들어서며 우리리르 세심히 살피는 모습이었다. 살피는 작태가 노골적이라 그가 아직 사건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음을 짐작케 했다.
한 손에는 검집 전체가 서리를 덮고 있는 듯 새하얀 검을 들고 있고, 한쪽 팍과 심장 위쪽까지를 붕대로 칭칭감고 있다. 상의는 찢어져 있는데 그 사이로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피가 스며 나와 굳었다.
“신천장주 장두익이라 합니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은 개의치 않겠으나 깊은 관심은 사양하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귀장의 불행은 얘기 들었습니다. 아무쪼록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내 진심이 전해졌음인가, 장주는 한층 누그러진 얼굴로 자지를 가리켰다.
“그럼, 전 이만 나가 봐야겠습니다. 수하들의 동요가 심한지라 제가 독려하고 지휘를 해야 하겠기에.”
“네,그러시지요. 저희들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주는 슬쩍 천마 쪽을 살피더니 힘찬 걸음으로 밖을 향해 나갔다. 지금 그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참담할 것이다. 꼼짝없는 올가미에 걸린것도 억울한 일이겠지만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충성스러운 수하의 목숨을 스스로 취했다는 게 어찌 담담히 받아 들일 수 있는 일이랴. 그럼에도 그는 비천문의 공격에 대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수하들을 배치하러 몸을 일으켜야 한다. 그것이 조직을 이끄는 자로서의 의무인 것이다. 천마는 답답했던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바보같은 놈들!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그런 놈을 천마교 지부장에 들어앉힌 놈을 내 주리를 틀어 버릴 것이다. 사람을 어찌 그리 알아보지 못하고, 에잉.”
그게 그리 쉬운 일이던가. 속이려 드는 자를 가려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세상에 남을 등쳐먹고 속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자들이 넘쳐나는 게 아니겠는가.
이건 비단 여기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천마교가 현 무림을 좌지우지하는 유일한 절대자의 위치에 있으며, 알게 모르게 끼친 피해도 상당할 것이다. 물론 본의가 아니었음은 당연하다. 그리고 직접 관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지 그것만으로 모든 책임을 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고 그 역할을 부정한다면 더 큰 혼란을 초래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 무엇도 진실이 아니고 그 모두도 진실일 수 있는 세상에선 함부로 속단할 바가 아무것도 없는 것임을.
천마교는 어쨌든 현재의 무림에서는 그 존재 가치만으로 오랜 기간 동안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 이유가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다 해도. 결국은 밑으로부터 부정 부당한 일을 최소화 시키는 게 최선이며,부단한 노력으로 부족한 걸 메울 수 밖에 없다. 전부를 만족시킬 수는 없겠지만 더 많은 만족을 위해서라도 이건 최선이다.
“사라야.”
“네, 오라버니”
“넌 지금 곧 천마교로 가서 광마존에게 여기 일을 얘기하고 그를 데리고 오너라.”
“네? 장로원주님을요?”
“그래. 아무래도 이건 내가 직접 처리할 경우 그건 금방 소문이 나고 어쩌면 현교주인 소군의 앞으로의 행보에 장애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절대 바람직하지 않다. 사라가 밖으로 나가는 걸 쳐다보며 천마는 한심하다는 투로 또다시 투덜대기 시작했다.
“이것 큰일 앞두고 이런데 신경 쓸 틈이 있냐?”
“사람 사는 일이다. 크고 작은 일이 어디 있겠어? 일을 당한 사람에겐 당면한 일이 가장 큰 일이지. 몰랐으면 모를까…… 겪게 되었으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하긴 당분간은 무림을 정비하는 일에 신경을 써야겠지. 어차피 마계가 유입된다 해도 그들을 직접 상대할 역량을 기대할 만한 인원은 그리 많지도 않겠지만. 영적인 각성이 일어나 강자들이 출몰하길 기다려야 하는건가?”
“아마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무림을 정비 한다 해서 그들에게 대항할 힘이 생기는 건 아니다. 순순히 운명에 순응하지만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는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비참한 현실이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신천장의 분위기가 이리 어수선한데도 꼬박꼬박 식사가 날라져 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환담을 나누고 있으려니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내다보니 일단의 무사들이 장내에 힘없는 모습으로 들어서고 있었고, 동료 무사들이 그들 주위를 둘러서서 낙담하고 있다.
아마도 연하심이란 비천문주의 수양딸을 추격해 갔던 무사들인 듯했다. 그들은 결국 아무런 성과도 없이 되돌아 온 모양이었다. 난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항종안 밖은 조용했다.
“천마교의 절대적인 힘이 다스리는 현 무림에서, 더군다나 지척이라 할 만한 거리에서 이런 불법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니…… 한심한 일이군.”
천마의 그 말에는 절반쯤은 동조하지만 절반은 그렇지 않다. 현재의 천마교가 아무리 강성하고 두려운 조직이라지만 허점은 있기 마련이고, 무림 전체를 두루두루 살피기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다. 사람이 하는 일에 완전한 것이란 있을 수 없고 그런 틈새에 기생하는 곰팡이마저 완벽히 차단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권력은 복종을 끌어낼 수는 있지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순종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스스로 동감하고 스스로 돌아보아 조심하게 하려먼 모든 이들을 일깨워 동참시켜야 하는데 천마교가 그런 역할을 할 수는 없는 터였다. 옛 성현들이 권력의 이름으로 세상에 출현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번에 아예 확 뒤집어 버려야 하지 않겠냐?”
소용없는 일이지.
“뒤집어서는?”
“좀더 단단히 단속해야지. 위가 썩었으니 아래가 이 모양이지 않겠어?”
십년이 지났을 따름이다. 맑기가 십년을 가지 못하는군. 지도부가 전횡을 일삼는 것도 아닐 테고, 결국 중간 계층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신천장은 이 일대에서는 꽤나 알려져 있는 문파고, 이런 곳은 접수 내지 병탄하게 되면 문제가 발생할 건 뻔한 일인데도 비천문이 이런 깃을 과감히 저지를 수 있다는 건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의미이리라. 어느 선까지 닿아 있는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었다.
비대해진 조직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유지하고 싶다면 적절한 긴장을 주어야 한다. 이번이 그 기회인 듯도 싶다. 그래 본들 뭐하겠는가. 마음속은 착잡했다. 먼데 불길이 집으로 달려오는 게 보이는데 집안 사람들은 그도 모르고 서로 다툼만 일삼고 있는 꼴이었다.
“잠시 들어가겠소.”
장주의 목소리군. 무슨 일일까? 우리를 찾아 오고.
“들어오십시오.”
내 허락에 장주는 찢어진 옷을 그대로 걸친 채 안으로 들어섰다. 비어있는 의자에 몸을 싣고는 우리들 모두들 찬찬히 살핀다. 그리고는 여기에 온 용무를 밝혔다.
“아무래도 마지막 싸움을 준비해야 할 듯하오. 그래서 말인데……여러분들은 이만 본장을 떠나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신변의 염려 때문이라면 괜찮습니다만.”
“그래도 제 마음이 그렇지가 않군요. 아무 연관 없는 분들까지 해를 입게 할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의 시선이 잠시 환아와 천아에게 머무는 걸 난 눈여겨보았다.
이 자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군.
“아직 어린 소동들도 있군요.”
사실은 염려할 애들이 아닌데.
“걱정 마십시오. 우리 신변은 스스로가 방어할 정도는 됩니다. 그건 그렇고 장주께서는 왜 이 일을 천마교에 알리지 않습니까?”
장주는 내 물음에 허망한 표정을 짓는다. 물어 주지 않았으면 섭섭할 뻔했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 정도였다. 그는 한숨을 푸욱 쉬며 긴 얘기를 풀어 나가기라도 하려는 듯 분위기를 잡아 갔다.
“허허, 말해 본들 뭐하겠습니까. 귀 막고 눈 막은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고 말입니까? 팔이 안으로 굽는다지요. 더군다나 내겐 이미 미운 털이 박혀 있으니 오히려 불리해지겠지요. 마지막 분풀이마저 할 수 없을테니……. 차라리 그냥 싸우다 죽는 게 낫습니다. 천마교에 알리면 이 한 목숨 연명이야 하겠지만 모든 건 비천문의 차지가 되고 말겠지요. 그런 꼴을 보느니 이 자리에서 자폭하는 게 내 성미에 맞습니다. 이것 괜한 소리를 한 것 같습니다, 허허.”
웃음 속에 담긴 것 중 일부는 천마교에 대한 섭섭함이었다. 아이들이 싸우다 지나가는 어른이 말려는데 사정을 알아 보지도 않고 한쪽만 나무란다면 야단을 맞은 아이는 그 설움이 얼마나 가슴에 사무치겠는가.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확정적으로 말하는 그 불신이 난 안타까웠다. 그에게 이렇게 비칠 정도면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이것 엉망이군, 엉망이야.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
“무슨?”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문파나 무림인들이 많이 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네. 현 무림은 천마교에 직간접으로 줄을 대고 있는 자들의 세상이지요. 그렇지 못한 자들은 조용히 숨죽이고 있어야 하는데 어디 그렇습니까? 억을한 건 천마교도 아닌 그들의 위세를 등에 업은 쭉정이들이 설치고 다닌다는 것이지요. 알고도 모른 척하는건지, 아니면 그런 식으로 무림이 다스려지길 바라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불만들이 조금씩 팽배해 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비율을 상대적으로 낮지요.”
“그럼 장주께서도 천마교에 가입을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랬다면 비천문과 대등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게 가장 큰 불만들이지요. 이쪽 지방을 예로 들어보면, 비천문이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 다른 문파들은 천마교 가입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치를 보고 살 수 밖에 도리가 없는데, 나처럼 설치다간 이런 꼴을 당하고 말지요, 일이 커지면 천마교에서 중재를 한다고 나서지만 결과야 뻔한 겁니다. 항상 비천문의 손이 올라가지요, 그들은 드러내 좋고 비행을 저지르지는 않지만 알게 모르게 이 지역을 탄압하고 제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습니다. 대명에서만은 비천문이 곧 법입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장주의 말만 듣고서는 알 수 없다. 천마교 내부 사정에 무슨 변화가 있는지는 광마존이 와보야 알 일이었다. 차라리 이번 일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지 않은가. 아무 사정도 모른 채 천마교에 당도했더라면 천마교 내부에 좋지 않은 일이 있다는 건 짐작조차 못했을 수도 있었다. 우리가 하산했다는 걸 천마교도들이 알게 되면 평소보다 몸가짐을 조심할테고 결국 이런 일은 드러나지 않고 묻혔을 뻔 했다.
때로 알고서도 모른 척해 줘야 하는 일도 있지만 이번 경우는 파헤쳐야 할 일이라 생각되었다. 장주는 한참이나 더 나와 천마에게 하소연하듯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는 건 모든 걸 포기한 자의 허망함이 전부였다, 아무런 희망조차 바랄 수 없는 자신의 상황을 한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나와 천마의 심정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마지막을 준비하는 심정은 그와 우리가 다를게 없었다. 그러나 당신은 곧 생각지도 못하는 구원을 받을 테지만 우리는…… 그래, 희망을 버리지는 말자. 우리에게도 생각지도 못한 구원의 손길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세상 이치란 속단할 바가 못되는 것이니.
광마존과 율극, 사라 그리고 무영존이 내실에 나타난 것은 자시가 임박한 시점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보고들은 것을 광마존에게 들려주었다. 그런 연후 어찌 된 영문인지를 물었다, 광마존은 내 예상과는 달리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는 것 같았다.
“송구할 따름입니다.”
내가 그런 말을 듣고자 하는 건 아니다. 광마존을 소군 곁에 남겨두고 온 건 옆에서 잘 보좌하라는 의미였고 부족한 힘을 보태라는 뜻이었다. 그가 옆에 있는 한은 감히 그 누구도 소군의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니었던가?
“이런 일들은 꽤 오래 전부터 서서히 진행되어 왔습니다. 처음엔 저희들도 설마하니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지금은……손댈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무슨 말이냐?”
“현재 천마교는 내원과 외원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워낙에 비대해져 버린지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교주께서 내린 조치였습니다. 내원은 주로 원래의 천마교도들을 중심으로 되어있고, 외부의 일에는 거의 관여를 하지 않습니다. 나머지 외원이 문제인데……. 중원 마도와 새외에서 합류한 자들 그리고 새로이 영입된 자들이 주축입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파벌이 생겨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것입니다.”
“대체 그렇게 될 때까지 뭘 하고 있었단 말이냐?”
“…….”
“닭대가리 같은 놈들!”
천마의 한마디에 광마존과 무영존은 더욱 깊이 고개를 숙인다. 그런데도 나와 천마에겐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숨겨 왔다는 게 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외원을 이끄는 자들이 누구지?”
“저, 그것이…… 마도련님을 맡고 있던 상천일과 한당이 주축인 중원 마도 세력, 여기엔 야림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혼세마인과 마황군이 주축인 세력으로 이분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외부 지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은근히 부딪히고 있는 실정입니다.”
소군이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하고 방관만 하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워낙에 거물들인데다 함부로 손을 대다간 천마교 전체가 분열될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것보다는 내가 알게 될 것이 더 두려웠는지 모르겠다.
“이 썩을 놈들이! 모조리 떡을 쳐야겠구나. 이제 평화를 찾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제 밥그릇들을 챙기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니. 당장 가자. 내 이놈들을!”
천마가 흥분해 소리 지르자 광마존과 무영존은 진땀을 흘리고 섰다. 결국 이 거대한 세력은 사실상 세 축으로 나누어져 있는 셈이었다. 물론 원래의 천마교가 가장 강성하고 정통성을 이어받아 명분상으로는 지도부를 형성하고는 있으나 나머지 두 축 역시나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놈들이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그런 짓거리들을 하고 있어?”
천마는 좀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나도 물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어이가 없고 화가 났지만 표현하지는 않았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 난 이렇게 말했다.
“매를 대야 한다면……그래야겠지. 그냥 넘어가기엔 그들의 욕심이 너무 추하구나.”
조용한 뇌까림이었지만 일시 내실은 조용해진다. 천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너 설마……모조리 죽이거나 뭐, 그러지는 않겠지?”
농담인지 진담인지, 나 원.
“여기 일 마무리 되는 대로 바로 떠나자. 천마교 근처에서 조용히 살려 했더니……그럴 수 없을 것 같구나. 무영존!”
“네, 지존.”
두 사람은 누구보다 나에 대해 잘알고 있다. 평소에는 한없이 부드럽고 관대하나 칼을 빼들면 얼마나 단호해지는지를. 그래서일까, 그들에게서 내비치는 건 긴장감 일색이었다.
“네 지위가 순찰총감이라 했나?”
“그렇습니다.”
“순찰사가 총 몇 명이나 되지?”
“천명이 넘습니다.”
“그 동안 그들의 비리를 포착한게 있나?”
“물론입니다. 다만 교주님의 명에 의해 참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좋다. 그럼 너는 여기 있을 필요없이 지금 즉시 천마교로 가서 전 순찰사를 동원해 모든 증거들을 분류하고 필요한 증거들을 더 확보해 놓도록.”
“존명.”
무영존의 태도에서는 흥분마저 엿보였다.
무영존이 실내에서 사라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천마가 걱정이라는 투로 말했다. 좀 전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에구 불쌍한 놈들…… 나야 한 번 화내고 말지만, 네가 칼을 빼 들었으니 몇 대 맞고 말일이 아니구나.”
“느끼게 해줘야지. 권한이 많은 만큼 책임도 무겁다는 걸 말야. 그들이 아무렇게 휘두른 칼이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지……. 그들 역시나 느끼게 해 줘야지.”
“갈 길은 먼데 발목을 잡는 일까지 겹치니, 허, 이일을 어이할꼬.”
그래 천마 네 말대로구나. 그러나 머지않은 장래에 하늘이 뒤집힐 사단이 벌어진다 해도 지금 할 일은 지금 해야 하는 것을.
수하들이 오고 가는 걸 신천장의 인물들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하긴 그들에게 발각될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으니. 기다리고 있는 비천문의 무사들은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뜸을 들이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하느라 이리 시간을 허비하는 건가. 그리 넓지 않은 대명의 패권을 놓고도 온갖 음모술수가 난무하거늘 중원 하는 곳곳에 어떤 암울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접빈청이란 이름만 걸어 놓고 초라하게까지 느껴지는 방 하나를 사용하는 것은 작은 문파가 뭐 그리 탐이 났을까?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못마땅했겠지. 큰 힘을 지닌 자는 작은 힘을 지닌 자를 억압하고,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 위에 군림한다. 이런 풍조가 만연하게 되면 가진 것만으로, 부한 것 만으로, 힘이 있는 것만으로도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고, 그 누구도 그들을 존경해 주지 않게 될 것이다.
정당한 노력으로 이룬 것마저 이런 부당함에 뒤섞여야 한다면 너무 억울한 일이지 않겠는가. 때로 백번의 용서보다 한번의 징계가 효과적일 때도 분명히 있는 법이다. 힘의 논리만을 앞세워 정의마저 가리려는 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따끔히 징계해야 한다.
“아빠, 대체 무슨 일인가요?”
지금껏 궁금증을 참고 있었던지 환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내게 물었다.
“별일 아니다.”
어찌 별일이 아니겠는가마는 난 아이에게 시시콜콜 대답하는게 귀찮았다. 그러나 설란은 다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환아와 눈을 맞춘채 자상하게 설명해 준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더 큰 욕심 때문에 거짓을 꾸미고, 적게 가진 사람의 것마저 뺏으려 하는 거란다.”
“왜 그러는 거죠?”
정말 왜 그러는 걸까? 왜 인간의 욕심은 한도 끝도 없어서 만족을 모르는 걸까? 욕심이란 놈은 채워도, 채워도 허기를 호소하는데 왜 그걸 모르는 걸까? 아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알지만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사실 욕심이 나쁜 건 아니다. 부당한 욕심이 나쁠 뿐이지. 난 설란이 환아에게 뭐라고 답해 줄지가 궁금했다.
“음, 그건…… 사람들이 제게 있는 걸 정말로 자신의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야. 사실은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는걸 모르거나 알고 있어도 잊고 살기 때문이란다. 채우고 채워도 결국엔 하나도 내 것이 아닌 걸 알게 되면 그런 욕심을 부리지 않게 되는거야. ”
“으음, 그럼 알게 해줘야겠네여. 그런데 어떻게 알게 해주죠?”
“그건 엄마도 모르겠구나. 나중에 환아가 그걸 세상 사람에게 알게 해주렴. 알았지?”
“네.”
설란이 아이를 대하는 건 좀 특별나다.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인다. 나는 아이가 잘못하면 매를 대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반면 그녀는 절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환아가 잘못을 저지르면 그런 연후에 조용히 타이르고, 잘못을 하면 스스로에게 손해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그에 따른 의무를 지운다.
이를테면 평소에 하기 싫어하는 일을 시킨다거나 한다. 모든 걸 대화로 하고 절대 짜증이나 무시하는 발언을 하지 않는다. 이런 그녀의 노력 덕분인지 환아는 그 또래의 아이들보다는 월등히 조숙한 면이 많았다. 생각하는 방향이나 깊이가 때로는 날 놀라게 할 때도 흔했다.
실제로 드러나는 효과를 보고 있자니 아이에 대한 그녀의 교육 태도를 나무랄 수도 없었다. 어떤 질문이라도 성실하게 답해 주니 질문이 많아 지고, 답에 대해 이해하려 노력하다 보니 생각이 많아진다. 이런 작은 것들이 쌓여 오늘의 괴물 같은 징그러운 환아를 만든 것이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장원의 문이 박살나는 소리와 무사들의 외침이 뒤섞여, 기다리는 것이 왔다는 걸 알게 해 주었다. 우리는 막 자리에서 일어서는 중이었다. 그 때 우리 모두의 동작을 멈추게 할 만큼 큰 소리가 들렸다.
“어서 검을 버려라. 이 분이 뉘신 줄 알고 네가 감히 검을 들고 있다 말이냐. 이분은 천마교 외총당 소속의 벽력당주님이시다.”
“비천문주 사경륭! 네 놈이 이런 암계를 꾸미고 본장을 삼키려했다만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뉘 안전이라고 불경스런 말을 하느냐. 어서 검을 버리지 못할까.”
계속 들려 오는 말을 듣고 있다 광마존에게 물었다.
“외총당 벽력당주가 누구냐?”
그러자 광마존이 천마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용히 대답했다.
“무황성 마황군의 천군장이었던 함광필이란 자입니다.”
“함광필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허, 함광필이라면 자부쌍살중에 하나가 아니냐? 그가 당주직을 맡고 있단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현재 외전은 키게 두 조직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하나가 마황군과 혼세마인들이 중심이 된 외총당과 중원 마도가 주축이 된 자영부가 그것입니다. 외총당에는 다시 12당과 27대가 있고 자영부엔 39개 단이 있습니다. 자영부주는 상천일이, 외총당주는 혼세마인들 중 최강자인 백면신수 장익성이 버티고 있습니다.”
광마존은 천마교의 외원 조직 편제를 간략하게 언급했다. 이번 일에 천마교의 외원 세력이 직접적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충격적이었다, 당주금이 이 자리에 나타날 줄은 실로 예상 밖이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상당히 변질된 것 같구나. 뿌리가 다른 세력들을 하나로 묶어 둔다는 건 불가능 한 일이었는지도.
“네가 진정 수하들을 염려한다면 대항은 포기하는 게 나을텐데.”
비천문주라는 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 천마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이 문을 잡는다. 그런 그의 손을 내가 다시 잡았다.
“조금만 기다려 봐라.”
천마는 속에서 불이 타는지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마황군과 혼세마인들은 그가 직접 수하들로 거둔 위인들이었다. 그가 직접 조련을 하고 천마교에 편입시켰던 그들이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천마가 이리 열을 내는 건 당연했다.
“네가 내 앞에서 감히 대항할 꿈을 꾸다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수하들에게 무기를 내려 놓으라고 명해라. 그리고 투항한다면 선처해 주겠다.”
“저, 저놈이……”
함광필의 목소리가 분명한 지 천마는 전신을 부르르 떤다.
“선처란 말이오? 한 가지 물어 봅시다.”
“말해라.”
“천마교의 당주라는 당신이 왜 이런 일에 끼어드는 것이오?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알고나 당합시다.”
“어리석은 자. 아직도 모르는가. 너는 예전 적혈문주를 자살케 했다. 적혈문주는 총당주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던 자. 그가 먼 신강에서 이곳 중원까지 온건 바로 총당주님이 불러서였다. 그런데 너로인해 명을 달리했으니 어찌 널 그대로 둘 수가 있겠느냐?”
그랬던가……정당한 비무로 인해 그 수치를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자의 복수였던가. 천마교의 외총당주라는 자가 무엇이 옳고 그른 가에는 전혀 상관없이 제 나쁜 기분을 풀기 위해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그걸 돕기 위해 수하들이 세력을 움직이고? 이건 썩어도 너무 썩었군.
“역시 그것 때문이었구려.”
허탈한 심정일 것이다. 어쩌면 무림에 발을 들인 순간을 후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좋소, 한가지만 더….. 물읍시다. 내가 투항하면…… 수하들이 모두 무기를 버린다면…… 수하들 목숨은 어찌 되는 거요? 살려 주실거요?”
“물론이다. 신천장은 이후 비천문에 병합되어 대명을 책임지게 될 것이다.”
“좋소, 날……포박하시오.”
“하하하하, 잘 생각했다. 어차피 대항하면 모두 죽을 수 밖엔 없으니 현명한 결정이다. 네 용기에 박수를 보내마.”
“장주님 안 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대항하다 죽게 해주십시오.”
수하들이 완강히 거부하는 소리들이었다. 자신들이 섬기던 주군만을 사자로 보내고 그 대가로 목숨을 연명하기엔 무사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천장주를 묶어라.”
드르륵
우리가 나와도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았다. 밖에 나서자 곧바로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너른 연무장 주변을 둘러싼 무사들의 수는 족히 3백은 넘을 듯 했다. 신천장의 무사들의 무사 많이 잡아 줘도 일백 안팎인 것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많은 수였다. 어차피 싸워 봤자 이길 수 없다는 것과 이겨 보았자 이 하늘 아래 숨을 곳도 없다는 현실이 장주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버린 것이다.
우리가 천천히 앞으로 나서는 것과 동시에 비천문 무사들이 장주 쪽으로 다가오는게 보였다. 점차 우리와의 간격은 좁혀지고 있었다.
장원의 입구 쪽엔 두 사람이 말에 탄 채 환담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신천장의 수하들은 장주의 명 때문인지 병기들을 늘어뜨리고 다가서는 비천문 무사들과 장주를 번갈아 쳐다본다.
억울하고 분함을 참지 못해 부들부들 떠는가 하면 굵은 두 줄기 눈물을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말 탄 놈들은 우리를 보지 못했는지 얼굴 가득 웃음이 가득하다. 얼마 후에 그 웃음이 울음이 되게 해주마.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산을 내려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꿈에서도 몰랐을 것이다. 내 젊은 날의 땀과 피를 쏟고 지켜낸 중원이었다. 버러지들이 살기 좋게 하기 위해 내가 그렇게 노력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먼저 장주의 곁에 당도했다.
“너희들은 뭐냐?”
비천문 무사 하나가 경계하며 소리치자 신천장주의 고개가 슬쩍 우리 쪽으로 움직이고, 그 순간 말에 탄 두 사람의 얼굴도 우리를 향한다.
나는 두 놈의 얼굴을 똑똑히 바라보기 위해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한 놈의 얼굴이 다급하게 일그러지는 게 보인다. 저놈이 함광필이란 놈일 거다.
난 놈을 모른다. 그러나 저놈은 내 얼굴을 알고 있다. 내 옆에서 있는 천마의 얼굴은 더욱 잘 알고있다. 꿈에서도 잊지 못할 두려움과 존경과 경외의 대상. 최소한 그놈에게는 천마가 그런 존재일 것이다.
말에서 뛰어 내리는 것과 동시에 땅에 엎어지는 순간, 난 그 옆에 아직도 말에 올라앉은 놈을 바라보았다.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이다. 그놈은 나도 천마도 그리고 뒤에 있는 광마존도 알아 보지 못하는 듯했다.
“너희들은 뭐냐고 묻지 않았느냐?”
비천문 무사가 또 한 번 소리치는 순간, 분위기를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큰 외침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미천한 속하가 지엄하신 태상교주님과 조사님을 뵙습니다.”
순간 연무장의 공기가 한꺼번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말뚱거리고 섰는 자들을 향해 광마존이 준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난 천마교 장로원주다. 이 두 분은 천마교 태상교주님과 조사님이시다. 모두 예를 갖추지 못할까.”
풀썩
덜퍼덕
소리도 요란했다. 내 시야에 잡혔던 자들은 모두 바닥에 엎어져 있다. 그리고 그들이 뭐라고 떠드는 소리들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너희들”
난 두 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물론 함광필과 비천문주였다.
“하, 하명하십시오.”
자신들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확인만 하고는 얼른 다시 고개를 숙인다.
“이리로 오라.”
그들은 기어서 오고 있었다. 벌레처럼, 무릎걸음으로. 역시 엎어져 있는 수하들을 밀쳐내며 겨우겨우 다가오고 있었다.
“그대는 일어서라.”
신천장주에게 한 말이었다.
그는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엉거주춤 일어서서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대 억울함을 내가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무림황이시여, 감사하나이다. 이 은혜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는 목이 메이는 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엎어졌다.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 준다는 게 이렇게도 고마운 일이었던가. 근데 무림황? 으음, 이건 좀 듣기 민망하군. 어느새 두 놈은 내 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이 상황을 누가 내게 설명해 주겠느냐?:
두 사람은 말이 없다. 두 사람은 지금 전음을 주고받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전음을 도청할 수 있다는 건 모르는 모양이군.
[당주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저 사람이 정말 무림황제 파천이란 말입니까?]
[빌어먹을, 네 놈 때문에 내가 죽게 생겼다. 그러게 이 자리에 나오는게 아닌데. 내 만약 이 자리에서 살아난다면 널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테다.]
[그, 그런 게 어딨습니까? 이건 모두 총당주님이 지시하신 거지 않습니까?]
[너, 만에 하나라도 살아날 확률을 기대한다면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마라. 그말을 하는 순간 너와 난 끝장이다. 알겠느냐?]
[억울합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구요.]
허, 어이가 없군. 내가 언제 너희들을 죽인다고 한 적이 었더냐? 죄를 지은 게 많으니 어쩔 수 없는가 보군.
“태상교주님 말씀이 안 들리느냐?”
두 사람 중 아무도 말이 없자, 광마존이 다그쳤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함광필이 고개를 슬쩍 들었다.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현재 이곳 대명 지역의 천마교 지부를 비천문이 맞고 있사온데 듣기로 신천장의 세력이 커지며 괜히 분란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비천문의 지시에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고 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비천문주의 수양딸을 신천장에 시집을 보냈는데 겨우 생명만 부지한 채 도주했다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비천문을 제압하고 자기들이 이곳 대명 땅을…..”
“사실이 아닙니다.”
신천장주는 내가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사실도 잊었는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저 자가 하는 말은 모두 ‘들었다’로 끝나고 있지 않은가? 모든 걸 비천문주 탓으로 돌릴 셈이군.
“네놈, 어느 안전이라고 거짓을 아뢰느냐. 이미 모든 걸 확인하였는데도 네 놈이 거짓을 고하는걸 보니 죽고 싶은가 보구나.”
광마존이 뒤에서 으름장을 놓으니 함광필의 두 어깨가 파도를 치는 듯 흔들린다. 어찌 이 상황에서 거짓으로 들리겠는가.
“비천문주,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그래? 넌 참 어리석구나. 난 원래가 명을 하들받은 수하에게는 죄를 묻지 않는다. 물어도 경미한 수준이지. 네가 명을 받고 어쩔 수 없어 한 짓이라면 용서해 줄 참이었는데…..할수 없군. 모두 죽이는 수 밖에.”
“억울합니다. 전 정말 억울합니다.”
역시 네 놈에게 의리 따위가 있을 리 없지.
“사실을…..”
[네 놈 미쳤느냐! 그 사실을 말하면 네 놈인들 살 것 같으냐?]
“염려 말고 말해라.”
“사실은 전 아무런 잘못도 없습니다. 전 그저 시키는 대로 한 것뿐입니다. 이 모든 건 여기 함 당주님이 명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이 일은 사실 외총당주님이 모든 걸 명하신 걸로…..”
“그래? 그렇단 말이지.”
[미친놈, 네 놈과 난 이제……죽었다.]
“광마존.”
“네, 지존.”
“이 두 놈을 포박해 천마교 총단으로 압송해라. 두 놈들은 증인이니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각별히 신경 써서 보호해라.”
“존명.”
광마존은 비천문의 무사들에게 오히려 명하여 두 사람을 묶에 하였다.
그걸 바라보다 난 신천장주를 돌아보았다.
“신천장주.”
“네, 말씀하십시오.”
“어떤가, 그대. 날 따라가지 않겠는가? 이곳보다 천마교 총단이 자네에겐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제가 감히 어찌…..”
“신천장을 정리하고 날 따라라. 그대에게 중요한 일을 시킬 일이 있으니.:
“명을 따르겠나이다.”

북검회를 개축하고 수리하여 사용하는 천마교 총단은 예전보다 훨씬 넓은 규모를 자랑했다. 단순히 넓기만 하다는 의미는 아니없다. 복잡했다. 그리고 인원이 많아서 후끈후끈한 열기가 느껴질 정도다. 나와 천마가 하산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탓인지 주요 인물들은 문 밖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얼굴 가득 반가움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그건 오랏줄에 묶인 함광필을 보기 전까지였다. 외원을 거쳐 내원으로 가고 있는데 주변엔 거의 전 천마교 무사들이 바닥에 엎어져있다.
그들은 나와 천마가 지나칠 때마다 있든 힘껏 소리를 질러댔지만 내 마음이 흡족할 수는 없었다. 그런 수하들에게 무슨 말인가를 해 주길 소군은 바라는 모양이렀으나 그럴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곧바로 천마교 수뇌회의를 소집했다.
“서열 일백위 내의 수뇌부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회의에 참석하라. 열외는 없다.”
대전에 모인 자들을 둘러보고 있으려니 낯선 자들이 상당히 많이 눈에 띄었다. 그들은 마황군과 혼세마인 등을 포함하는 새외의 인물들이었다.
난 그들을 적이 아닌 수하로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들 역시나 내 권위는 인정하겠지만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는 충정을 지니고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들 마음속에 두려움말고 다른 감정이 섞여 있을 가능성은 그다지 없을 듯했다.
나와 천마와 소군은 나란히 앉아 있었고. 그 조금 아래로 태상호법 좌우호법 그리고 장로들이 줄지어 앉아 있다. 몇 개의 계단을 아래로 하고 나머지 인물들은 포단을 깔고, 좌우로 나누어 앉았다. 그들은 거의 대부분 고개를 바닥으로 살짝 내리고 있다.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을까?
함광필과 비천문주가 한쪽 구석에 여전히 묶인 채 얌전히 앉아 있다. 이 상황에서 그와 약간의 연관성이라도 있는 인물들은 긴장하고 있겠지. 그렇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설마 무슨일이 있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순찰총감.”
“네.”
무영존이 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온다. 그는 계단 아래 중간에 서서는 날 올려다본다.
“지시한 건 어떻게 되었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완벽하게 갖추어 놓았습니다.”
무영존의 저 자신감이 되려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외청당주와 자영부주는 앞으로 나오라.”
두 사람은 자신들이 호명되자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다. 난 두 사람중 상천일의 얼굴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는 적어도 이런 일에 결부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다. 내 신뢰와 스스로의 긍지에 반하는 이런 하찮은 일에 스스로를 옭아맸을 리는 없어야 했다. 그렇지만 이런 내 바람과는 달리 그의 얼굴은 곧 이어 밝혀질 사실들이 모두 진실이라 무언중에 강변하고 있지 않은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얻고자 이런 일에 발을 들였단 말인가? 그대가 지닌 명예만으로는 부족했던가? 아니면 더 많은 권한을 지니지 못해 불만이었단 말인가? 애써 쌓아온 지금까지의 그대 가치를 스스로 허무는 이런 어리석음에 동참애야만 했을 정당한 사유가 있다면 내게 말해보라. 왜 그대는……
내 눈길의 의미를 알아차렸는가. 상천일의 표정은 거무죽죽했다. 부끄러워 어쩔 바를 모르겠단 태도이기도 했다.
“순찰총감…..말하라.”
“지금까지 순찰사들이 확보한 저들 두 사람의 비리 사실은 총 마흔아홉 가지에 이릅니다, 이외에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제외시킨 것은 백여 가지 정도입니다. 먼저 외총당주의 최근 비리 사실부터 밝히겠습니다.
가장 최근의 비리는 단연 비천문의 일입니다. 그는 예전 적혈문주의 죽음이 대명의 신천장주 장두익에 의해서란 사실로 그를 집요하게 관찰해 오다 비천문주를 불러 두 차례 압력을 넣어 신천장을 복속시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일이 크게 벌어진다 해도 자신이 방패막이가 되어 주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실은 당시의 술시중을 들었던 두 기녀로부터 접수한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런 관계를 빌미로 비천문에게서 일정액의 상납금을 매달 챙겨온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액수만도 물경 황금 5만냥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달포 전에는 사천의 송번 지역의 부호인 송민주 대인의 청탁을 수뢰하며 장원 두 채를 받은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시가로 황금 7만냥을 상회하는 규모입니다. 그는 이 대가로 송민주의 경쟁자인 왕주명의 사업체에 교묘한 압력을 넣어 사업을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3일간 그와 가족들을 납치해 협박한 사실도 있습니다.
그리고 석 달 전에는 무림맹의 주력 사업체인 모 표국의 표물을 강탈해 물의를 일으켰지만 무림맹측으로서는 심증이 가나 증거가 없어 유야무야 된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엄밀히 조사한 바로는 이 일 또한 그가 수하들을 시켜 자행한 일임이 밝혀졌습니다.“
이 대목에 이르자 모두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설마설마 했던 일이 모두 사실로 드러난 것에 대해 모두들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난 두 눈을 감았다. 옆에서 천마가 물었다.
“그게 저 자식의 짓이란 증거가 뭔가?”
“저희들은 당시 표물의 항목들을 일일이 조사해 확보해 두었습니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유통되리란 저희들의 기대대로 사건 두달이 지난 시점부터 비밀리에 사천 성도와 산동 제남 등지에서 발견되기 시작했습니다.”
“품목이 뭐였는데?”
“금괴와 만보장에서 만들어 낸 귀금속이었습니다. 금괴는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기에 일단 포기했지만 만보장의 귀금속은 그 형태나 재질이 독특해 다른 곳에서 만들어낸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저희들은 그 물품을 유통시키는 조직을 역으로 추적한 결과 본겨 외총당 소속의 경혼대와 잇닿아 있다는 걸 알아냈습니다. 물론 당시의 도난 물품과 증인을 확보해두었습니다. 다음은…..”
“그만. 외총당주는 그만하면 되었다. 자영부주의 비리 사실은 뭐지?”
“자영부의 비리 사실은 드러났지만 그것이 부주와 관련되어 있는지는 아직 밝히지 못했습니다. 주로 세력 다툼에 관한 것이온데 지부로 내정된 문파를 지원해 준 정도입니다. 이를테면 은근한 힘을 보여 준 정도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자영부가 관련되어 있는 문파들은 하나같이 상대 경쟁 문파가 외총당에서 지원해 주는 문파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금품이 오간 사실은 없습니다. 속하의 견해로는 자영부의 비리 사실은 외총당과의 감정적인 재립에 기인한 지나친 월 행위로 간주됩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서면으로 작성했습니다.”
무영존이 갖다 준 서류를 난 면밀히 검토했다. 잠시지만 대전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단지 내가 서류를 뒤적이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릴 뿐이었다.
“이런 죽일 놈들, 너희를 그 자리에 앉혀 둔 것이 그런 짓이나 하라고 그런 줄 아느냐. 아랫사람들에게 본을 보여도 부족한 판에 이따위 짓이나 하고 있었으니……백면신수.”
“네.”
“너 다시 지옥을 경험해 보고 싶어? 내가 예전에 분명히 그랬을텐데. 만약 천마교에 편입되고소 헛된 망상을 꿈꾼다면 네 놈들은 내가 직접 처리해 주겠다고. 벌써 잊었나?”
“…….”
“죽을 때가 된거야, 아암.”
서류를 검토해 가던 나는 한 대목에서 잠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천마가 여전히 장익성을 나무라고 있는 중이었다. 이건 그 정도로 그칠 문제가 아니었다.
“장익성”
내 부름에 장익성은 새로운 긴장감을 보인다.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인가?
“네, 태상교주님.”
“6개월 전 항주에서 한 달여에 걸친 부녀자 실종 사건이 있었군. 알고 있나?”
“잘……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럴테지…… 그일이 네 짓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거짓말입니다. 이건 순전히 우리 외총당을 견제하고 물 먹이려는 수작에 불과합니다. 태상교주님께서는 좀 더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해 주십시오.”
저 태도만을 보면 그가 억욱하다는 걸 의심할 만한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다. 나도 언뜻 정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였으니 말이다.
“순찰총감, 증인을 대령하라.”
“존명. 증인을 데려 와라.”
“너,너,너는…..”
장익성은 들어오는 자를 바라보고는 놀라 저도 모르게 기함을 내 질렀다. 바보 같은 자. 오리발을 내밀거면 끝까지 태연했어야지.
“네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라.”
대전 안으로 들어와 있는 자는 사십대 중반 정도 되는 미부였다. 그녀는 약간 겁먹은 표정으로 장익성과 무영존을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거짓을 아뢸 시엔 무사하지 못 할 것이다.”
무영존이 다시 한 번 이렇게 못을 박는다.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결심이 선 듯 이후 장익성 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는다.
“저는 소주와 항주에서 유곽을 경영한 바 있는 계집입니다. 꽤나 규모가 컸던지라 그다지 어려움 없이 생활할 수가 있었지요. 저기 계신 저 장 어른께서 우리 주요 고객 중에 한분이셨는데 술자리에서 제가 농담 삼아…… 요즘 계집들이 귀해 장사해 먹기 힘들다고 한 적이 있었지요. 그랬더니 저 분께서 내가 계집을 공급해 줄 테니 얼마씩 쳐주겠냐고 은근슬쩍 운을 떼시더군요. 저는 농담이겠지 싶어 한 명당 황금 5백냥은 쳐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미모에 따라 최고 3천냥까지 해줄 수 있다고 하며 웃었더랬지요. 그런데…… 저분이 재미도 보고 용돈도 벌고 괜찮겠는데, 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저는 정말이지 그냥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3일에 한 번씩 적게는 십여 명에서 많게는 스무명 넘는 계집들을 데리고 오시더군요. 전 처음엔 너무 반갑고 고맙기까지 했지만 모두 납치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너무 겁이 났습니다. 하나같이 소주와 항주 근처가 집인 그 애들을 버젓이 저희 가게에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소문해서 산서나 섬서쪽으로 보내고는 했었습니다.
더 이상은 제 역량에 벗어난 일이라 힘에 겨워하고 있는데도 저 분은 끊임없이 계집들을 데려 오는 것이었습니다. 전 거부했으나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지닌 유곽마저 빼앗기고 결국 납치된 아이들을 다른 지역으로 공급하는 역할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벗어나보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저 분들의 도움으로 그 지겨운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지요.“
너무 어이가 없어 말이 안 나왔다. 평화로운 중원의 이면에는 이런 추악한 모습들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내가 쥐어 준 칼에 의해. 힘없는 자들은 더 큰 희생과 고통을 강요당하고 있었던 거다.
난 머리가 아파 올 지경이었다. 그리고 저 쓰레게 같은 놈을 눈앞에서 보지 않았으면 싶었다.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는데 아직도 그놈은 뻔뻔하게도 자신의 비행을 부정하고 있었다.
“모두 거짓입니다. 제가 뭐가 부족해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태상 교주님, 바라옵건데 저들의 간악한 간계를 물리치시고 현명한 판단을 해주십시오, 저는 정말이지 너무 억울합니다. 외총당의 제 수하들이 결백을 증명할 것입니다. 이건 모두 외총당의 힘을 견제하려는 함정일 따름입니다.”
분열시키려는가? 네가 지닌 힘, 배경을 들먹이려는가, 내 앞에서.
“이, 이때려죽일 놈.”
천마가 벌떡 일어서서 성큼 앞으로 걸어나간다. 난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뭐가 어쩌고 어째? 모든 걸 시인하고 잘못을 빌어도 시원찮은 놈이 지금 모함을 받고 있다고 했느냐?”
“사실입니다.”
천마는 외총당주 장익성과 마주섰다. 그 놈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의 결백을 믿어 달라는 듯 비장한 감마저 내비친다. 허허, 대단한 ]자야. 저리 뻔뻔할 수가 있을까? 천마에게 맞아 죽고 싶은가 보군. 천마를 겪어 봤으니 지금 그의 상태가 어떤지 정도는 알 놈이 저 정도로 태연할 수 있다니, 참 놀랍기만 했다. 옆에 있는 상천일은 눈을 내리깔고 비교적 담담한 표정이었다.
툭툭
“네가 결백하다고 했지?”
천마는 손가락으로 장익성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네, 결백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헉.”
머리털을 몽땅 뽑아버릴 듯이 움켜진 천마는 그의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갖다댔다.
“네 놈의 하늘은 귀머거리에 봉사가 분명하다. 그러니 그런 소리를 하는게지. 내 지금 심정을 맞춰 보겠느냐?”
“무, 무슨 말씀이신지……”
“널 죽일 것 같으냐, 아니면 살릴 것 같으냐?”
“절 죽이실 겁니까?”
“넌 죽는 것도 사치스러운 놈이다. 예전 마계의 꼭두각시 노릇하던 때가 그리우냐? 네 마음껏 세상을 휘젓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좀이 쑤시는거야?”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혼세마인들까지 싸잡아 매도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말이었다. 왠지 천마가 실수하는 것 같다.
“천마, 그만해라. 순찰총감은 외총당주와 그의 비리에 관련된 자들을 모두 뇌옥에 가둬라.”
“존명.”
좀더 시간을 두고 해결할 일이었다. 당장 어떻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외총당 전체가 관련되어 있다면…… 이건 상당히 심각했다.
마계의 유입에 대해 논의하고 준비를 해도 모자랄 시간에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심력을 소모하고 있다니, 한심한 일이다.
순찰사들이 연루된 주요 인물들을 끌고 나가는 걸 보며 난 아직도 서서 시다리고 있는 상천일을 주시했다.
“그대는 내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자영부주는 한당이 맡고 그대는 그 간의 공로를 참작하여 장로에 임명한다.”
웅성웅성
한창 일할 나이인 그에게 장로직 임명은 좀 이른 감이 있었다. 직급상으로는 오히려 승급한 셈이지만 그의 활동 범위를 축소시킨 일종의 징계차원이라고 보는 편이 옳았다.
“태상교주님의 은덕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영부 수하들은 다행이라는 표정들이었다. 외총당주가 끌려 간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어서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외총당의 분위기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로서도 불만을 가질 수 없는 게, 드러난 비리 사실이 그들로서도 충격적일 정도였으니…… 무인으로서의 최소한의 명예마저 더럽힌 그를 동정하지는 않을것이다.
어느정도 대전의 분위기가 가라앉자 난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시간 부로 천마교에 소속된 전 무사들은 외부 활동을 전면 중단한다. 각 단위 기구별로 내실을 기하고 수하들의 근무 태도에도 각별히 신경을 쓰도록. 어느 시점이 되면 내가 왜 이런 명을 내렸는 지 알게 될 것이다.”
난 곧바로 모임을 파했다. 회의라기 보단 일방적인 조치에 불과했다. 이어 광마존과 소군 등을 임시 처소로 불렀다.
“마련해 두라고 한 장원은 어떻게 되었느냐?”
“네, 마련해 두었습니다만…… 굳이 그러실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그래요, 사부님. 그냥 여기서 머무시는게 나을 것 같아요. 그러세요.”
“싫다. 이번일 아니었으면 곧바로 여기 들어올 일도 없었어. 어차피 내부에 있으나 외부에 있으나 상관은 없을테니 난 바깥에 있겠다. 그리고 무슨 특이한 사항이 생기면 내게 즉시 알려다오.”
“네.”
은자의 세계 무량천인과의 조우(page 124-172)

우리가 새로 살 집은 꽤나 컸다. 거주할 인원에 비하면 엄청난 규모라고 할 만했다. 개봉에, 그것도 중심지에 이만한 장원이 들어서 있을 줄은 몰랐다. 원래는 황실의 외척이 사용하던 장원이라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규모도 규모지만 그 화려함이 대단했다.
환아와 천아는 이런 곳에서 살게 된 것이 너무 신나고 좋은지 연신 벙글거리는 얼굴로 여기저기를 쏘다닌다. 말로만 듣던 천마교의 위용에다 개봉의 변화함과 이런 화려하고 큰 집까지 한번에 보게 된 그들은 별천지를 대하는 표정들의 연속이다.
만날 산새와 다람쥐, 멧돼지, 이런 것만 보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거리와 위풍당당한 고각들이 즐바한 거리를 보았으니 당연한 반응이라 해야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들해지겠지만 즐거워하는 애들의 모습을 보니 나 또한 마음이 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내려올 걸 그랬나? 그건 아니겠군. 아름다운 자연에 익숙해진 아이들이기에 이런 인공미가 새로울 뿐이겠지.
“이야, 이게 나랑 천아가 사용할 집이에요?”
환아와 천아에게는 따로 한 채의 작은 전각을 배정했다. 두 개의 방과 한 개의 서재, 욕실과 놀이방 역할을 할 응접실이 딸린 전각이 있다.
나와 설란, 천마와 적루아, 율극과 사라가 사용할 전각들이 품(品)자형으로 아이들의 처소를 둘러싸고 있다. 전각들 간의 간격은 5장 정도였고, 그 사이로 정원이 꾸며져 있으며, 전각 뒤로 작은 연못도 하나 보였다.
네 개의 전각을 둘러싸고 담이 쳐져 있는데 그 너머로는 또 다섯채 정도의 전각이 더 있었다. 우리가 사용하기엔 지나치게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저다섯 채의 전각은 예전에는 하인들이나 경호무사들이 머룰렀던 곳 같았다.
광마존은 세심한 배려를 해놓고 있었다. 각 전각마다 천마교에 소속된 시비들을 배치시켜 놓았고, 경호무사들만 해도 기백 명이 넘을 듯 싶었다. 난 필요없다고 돌려보내려 했지만 천마는 ‘수하들의 정성을 외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라는 말로 내 의견에 반대했다. 그래서 난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이제 설란도 배가 불러와 편히 지내야 할 시점이 오기도 했으므로.
안 그러면 내가 시중을 다 들어야 할 텐데, 도움을 받는 것도 괜찮겠어.
이후 며칠 간은 바쁘게 지나갔다. 천마교의 전 수하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왔으며 밤이 되면 매일 술자기가 벌어지기 일쑤였다. 주로 마계애 대한 얘기들을 나누느라 심각한 분위기였지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 집은 뭐 하는 집이기에 저렇게 매일 사람들이 들락거리나 의아하게 생각하기 딱 좋을 것 같았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바쁘긴 매한가지였다. 둘 다 붙임성이 좋고 활달해서인지 금방 또래들을 친구랍시고 데리고 오곤 했다. 주로 열 살에서 열세 살 정도의 아이들이었는데 은연중 환아가 대장 노릇을 하고 있다.
이건 또 어찌 된 연유인가 싶어 주의 깊게 살펴보니, 저보다 나이가 많은 아이들도 도무지 기를 펴지 못한다. 힘이면 힘, 꾀면 꾀, 말이면 말, 제 또래나 세 살 많음직한 아이들보다 더 어른스러우니 당연한 일인가? 게다가 충실한 조랙 노릇을 해주는 마음 착한 천아까지 옆에 있으니 두려울 게 없는 모양이다.
주로 데려 오는 아이들은 주변에 사는 것 같았다. 이 주변에 산다면 비교적 가정 환경이 풍족한 아이들이다. 언제부터 거주 지역이 특성화되어 갔는지 모르나, 현재의 개봉은 분명 그랬다. 이 큰 대시전에서 힘 깨나 쓰고 돈푼이나 만지는 사람이 아니면 근처의 저택이라 할 만한 곳을 집으로 가지긴 힘이 들다.
그래서 그런지 아이들은 제 힘이 부족하다 싶으면 제 아버지나 친척을 거론하기 일쑤였는데, 다행인지 환아와 천아는 그런 면이 없었다. 항상 모든 일을 제 선에서 마무리하려 했고 비교적 당당했다. 아이들 사회에서도 이런 면이 작용되고 참작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도 환아의 그런 모습은 보기가 좋았다.
그렇지만 제 아비를 닮았는지 때로 독단적인 면을 보일 때가 있었는데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면 만사가 제 뜻대로 되니 버릇이 될까 무서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항시 그런 건 아니었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돈이 많아서 개봉에서 힘센 사람들 모두를 살 수도 있다고 하셨어. 그러니 우리 아빠가 제일이야.”
열 살 정도 먹어 보이는 한 남자애가 이렇게 말하자 그보다는 반뼘이나 키가 더 큰 애가 코웃음을 친다.
“너희 아빠 저번에 우리 집에 돈 놓고 가셨어, 바보야. 그러니 우리 아빠가 최고지. 너희 아빠는 우리 아빠한테 잘봐 달라고 했단 말이야.”
그 아이가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러자 한 아이가 그걸 보고 있을 수 없었는지 앞으로 쓰윽 나서며 당차게 말한다.
“너희들, 이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사람이 누군지 알지?”
“그야 무림호아제 파천이지.”
“그래, 그렇다고 들었어. 천마교의 신이라는 사람 말이지.”
아이들은 제각각 동의를 한다. 내 얘기이건만 난 다른 사람을 두고 하는 말처럼 별 감흥이 없었다.
“우리 아빠는 말야…….”
모두들 침을 꼴깍했다. 환아와 천아도 궁금한지 귀를 기울이는 모습이다. 나는 그 아이의 아빠가 천마교 인물일 거라고 지레 짐작하고 있었다.
“천마교의 모든 식품을 공급해 주는 사람이야. 매일 천마교의 높은 사람들과 만나고 술도 마시고 그런단 말야. 얼마나 친한지 알아? 그러니 우리 아빠가 젤 힘이 센 거지. 내 말이 틀려?”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천아는 가만있다 입이 근질거리는지 나서려 했고, 그런 천아를 환아는 꼭 붙잡고 입을 틀어막는다. 둘이 하는 짓이 이상했던지 아이들의 시선이 한데 모인다.
“헤, 별것 아냐. 천아가 고함이라도 지를까 싶어서.”
환아는 속 깊은 아이다. 제 아빠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내세워 자랑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숨긱기에 급급하다. 저또한 본능적으로 그 사실이 알려졌을 때 친구들을 잃을 것을 알고 있는 건가? 그건 아니겠지. 잠시 그때 일을 떠올리고 있자니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어린다.
이런 날 지켜보고 있었던지 천마가 핀잔을 준다.
“너 또 무슨 생각하느라 그런 표정 짓고 있는 거냐? 다들 네 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무슨 얘기?”
그러고 보니 모두 날 쳐다보고 있다. 뭔가 얘기들이 오가고 있었나 본데 난……듣지 못했으니.
“흠흠,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었지?”
“하하하, 저놈 또 제 자식 생각하고 있었을 거다. 에이, 팔불출 같은 놈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하지만 너도 어쩔수 없는 속물이다.”
천마가 이렇게 날 몰아세워도 난 기분이 좋다. 환아를 보고 있으면 내 근심은 씻은 듯 사라지고 그 세계로 내 자신이 빠져드는 착각이 든다.
“지존, 마계의 유입이 있었을 때의 본교의 지휘방식에 대해서 의견이 오가던 중입니다.”
광마존이 친절히 설명을 덧붙인다. 난 오늘도 어김없이 내 집을 찾은 수하들을 쳐다본다.
“그래 어떤 의견들이 있었지?”
다들 멀뚱거리며 날 쳐다본다.
“너 설마 그걸 다시 듣고 싶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다시들 말해 봐라.”
천마는 헛웃음을 치더니 오히려 자기부터 입을 연다.
“나는 아까 이렇게 말했어. 잘 들어라. 뭐 달리 방법이 있나, 앉아서 죽든 도망가다 죽든 저항하다 죽든 마찬가지지, 라고.”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었죠. 그래도 꽥 소리라도 질러보고 죽어야지 않겠습니까?”
무영존이 두 번째를 이속, 그 다음이 광마존이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할 거냐는 건지. 왜 다들 구체적인 얘기들은 않고 그런 말만 하고 있는지 답답하군요, 라고 했더니 율극이…….”
“형님이 물어 보죠, 라고 했습니다. 이제 이해가 가십니까?”
이 녀석들이 은근히 날 놀리고 있군. 광마존, 무영존, 율극, 나 그리고 천마느 늘 모였고 오늘은 이외에도 혈마존 담대우리와 옥기린, 쌍노와 개왕이 동석했다.
쌍노는 현재 천마교의 장로 신분이기도 했다. 개왕은 전전대 개방주라는 신분 때문에 천마교에 가입을 하지는 못했지만 여기서 사는 것과 진배없었다. 현재의 개방주는 소군의 의동생기기도 한 소왕이었다. 예전의 정도사령들이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는 무림맹에서 개방은 가장 활동력이 강한 방파 중 하나로 두각을 보였다. 젊은 신임 방주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 매일 그 얘기 해봐야 답은 안 나온다. 마계 유입이 어떤 형태로 시작될지, 그들이 어느 지역에서 출몰할지, 어떤 식으로 공격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의 대응 방법 또한 뜬구름 잡기식이지. 그리고 본교의 힘이 어느 정도 먹혀들지도 아직은 미지수고.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면…… 굳이 본교의 힘을 전체적으로 움직일 필요도 못 느끼고.”
전체적으로 마계의 유입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난 점차 회의적이 되어 갔다. 이런 내 시각엔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 다른 특별한 존재들이라는 것이 근거했다. 그래서 감히 항거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 끝까지 싸울 것이다. 단지 이런 저항에 다른 사람들까지 무조건적으로 동원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결정할 것이다. 당면한 현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괴로울 것이기에 그 처절함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는가는 저마다의 자유인 것을. 모든 건 저절로 모여들고 헤져지게 되어 있다. 흐르다 고이고, 고이면 넘친다. 굳이 어떤 형태로 흐르게 할 것인가. 어느 시점에 넘치게 할 것인가, 등은 우리의 또는 나의 소관이라 할 수 없다.
이건 모두 개인의 무제며, 삶의 마지막 마침을 하는 거룩한 의식이다. 그런 점에서 난 차라리 충고하고 싶다. 가족이 있다면 그들과,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그와, 아직 풀지 못한 매듭이 있다면 그 일에 전념하라고. 많지 않은 시간을 좀더 가치 있는 것-물론 그 개인에게 있어서-으로 만들라 하고 싶다. 이번 하신은 그런 내 의지의 표현이지, 굳이 더 많은 시간을 마계 유입에 대한 대책이나 방비를 세우는 데 할애고자 함은 사실 아니었다.
어쩔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일월교와의 마지막 결전을 위해 우리느 신수궁에서의 수련을 선택했다. 잠시의 고통을 견딘다면 마지막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떤가. 한계는 우리 눈앞에 분명하게 그어졌다. 그건 극복할 수 없는 죽음만큼이나 확실해 보였다.
이걸 넘여야만 우리에겐 최소한의 힘이 생긴다. 그런데 방법이 없다. 인간이기에. 인간의 육체가 지니는 연약성 때문에 우리는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고, 시간은 그래서 우리를 초조하게 한다.
“역시 매일 얘기해 봐야 제자리를 맴도는군요.”
개왕은 개방에 갔다 이제 돌아왔다. 그는 마계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 비교적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랬다. 속마음은 어떨지 모르지만 겉으로 드러난 모습들에서 두려움이나 초조감을 엿보기란 쉽지 않았다. 더 이상 삼에 여한은 없기에 그런 것인가? 죽음의 순간까지 이른 사람이라도, 아니 그런 사람일수록 아쉬움은 더 크다. 그런 점에서 이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개왕만 해도 소왕이 개방을 좀더 튼실하게 일으켜 세우는 걸 보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왜 이들은 이렇게 태연한 모습들일까?
난 그 이유를 전체적인 문제로 돌려 보았다. 나 하나만이 당하는 일, 누구도 관여될 수 없는 일, 나 홀로 감당하여야 할 일이 아닌 이 땅을 딛고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전체의 일이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가야 한다면 더 괴로울 것이다. 자신이 일궈낸 일의 말미를 보지 못하고 가야 함이 더 안타까울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의 경우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역사의 단절. 이 한마디면 적절할까? 마계 유입 이후로 인간의 삶이 계속 유지되거나 승계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변형된 형태일 것이다.
모든 게 끝이다. 더 이상 미련을 가져 봐야 소용이 없는, 분노도, 애씀도, 절망도, 안타까움도 전혀 소용이 없는, 우리의 손길이 닿지 않는 권한 밖의 일이기에, 그래서 마음을 비웠기에 가능한 모습들은 아닐지. 그래서인지 우리 모임의 시작은 걱정과 한숨이지만 mx은 언제나 시꿀벅적한 잔치 집을 연상케 했다. 우리들은 주로 추억을 되씹는데 주력했다. 함께 했던 그 시간을 떠올리며 아직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안심하는 것이다.
“소왕 이놈이 글쎄 결혼을 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왜? 거지 왕초라고 해서 결혼하지 말란 법이라도 있나?”
천마가 이런 말로 개왕이 좀더 흥이 나 사연을 풀 수 있게 도와준다.
“물론 내규에는 그런게 없지만……그게 좀 보기가 그렇죠.”
“소왕이라면 사내로서 그만이지. 그래 그 행운의 여인은 누군가?”
의노가 진정 궁금했던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그게…… 허허허.”
말을 꺼내 놓고 저러는 건 좀더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뭐야, 궁금하니까 빨리 얘기해 봐라. 대체 누군데 그러는 거야?”
환노의 급한 성격이 개왕이 뜸 들이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흐음, 오련회주에게 여식이 둘 있었지?”
오련회주의 딸이라면 남궁아연과 남궁혜미다. 설마 그들 중의 하나?
“잠깐, 남궁세가의 그 두 계집들 말이냐? 그 중의 누군데?”
“둘째.”
남궁혜리라면 소왕보다는 연상이다. 개방주를 남궁회주가 사위로 맞는단 말이지. 괜히 웃음이 나왔다. 무슨 특별한 의미가 포함된건 물론 아니었다.
“하하하하, 재미있군. 그 애라면 꽤나 인물이 반반했던 것 같은데, 소왕은 역시 보는 눈이 있었군.”
천마가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겠다는 말을 덧붙이자 개왕이 한숨을 몰아쉰다. 모두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답답해 하고.
“그런데 그게 제 혼자 열내는 거니 문제지. 상대는 소왕에게 전혀 이성적인 관심도 없으니 문제가 아니겠어?”
“뭐야? 그런데 결혼 얘기가 나온단 말이냐? 그놈 눈만 높아 가지고 제 주제에 무슨, 난 또 둘이 눈이 맞은 줄 알았네.”
어이없다는 투로 말하는 환노에게 개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그것 현 개방주에 대한 말투 치고는 좀 경우에 벗어난 것 아니냐? 그리고 우리 소왕이 뭐가 어때서?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그만한 신랑감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이냐. 아픙로 십 년만 지나 봐. 그 애 이름이 사해를 찌르르 울릴 테니.”
분명 그런 기질이 소영에게 있는 건 사실이다. 개방 역사에서 그만한 인물이 다시 나올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특출한 인재였다. 그런데 그에게 그런 시간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안타까운 일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뭐라 자신의 의견으로 공박하고 있는 꼴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난 잠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밖의 공기는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곧 봄이 올 것이다. 봄의 기운은 언제나 그랬듯 변함없이 만물을 소생시키고 천지를 따스하게 감쌀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무정하지만 변함없는 믿음을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 왔다. 규칙적이며 반복적인 이 흐름에 대한 믿음은 절대적인 것이다. 앞으로는 어떨까? 이 봄이 가고 나면 또 다시 봄을 맞을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난 아직 혼란스럽기만 하다. 마계의 유입이라는, 차원의 벽이 최초로 붕괴된다는 의미가 어느 정도의 재앙을 불러일으킬지 예상할 수 없다. 아무 일도 없을지, 아니면 모든 것을 황폐화시킬는지. 나는 머리 한쪽을 지그시 눌렀다. 간혹 이렇게 통증이 느껴질 때가 있다. 둔부를 지그시 누르며 오랫동안 내 삶에서 퇴장 당한 ‘그’를 상념 가운데나마 다시 초대했다.
그에 대한 내 감정은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다. 애증이 교차한다는 표현이면 적당할지. 그는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이 세계에 대해 가장 놀라운 지식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제 스스로 가장 바른-무엇에 대한 바름인지는 모르겠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신 앞에서라고 했지만-의식을 지니고 있다고도 했다.
그는 나라고 했다. 난 지금까지도 그 단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가 나라면 나는, 어디에 있는 건가? 난 나일뿐 그 누구도 될 수 없다. 그의 중장을 받아드이는 순간 난 사리질 것이다. 난 죽는 순간까지 나이고 싶다. 그가 네게 어떤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온전히 그가 나로 교체될 수는 없다. 거부할 것이다. 내 의지가 살아 있는 한은.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난 알고 있다. 그는 내 무의식 가운데 잠을 자고 있다. 제 스스로 주문을 걸기라도 했는지 그는 필요에 따라 내 의식 가운데 분명한 모습으로 현현했다. 그 시기는 항상 교묘하기 그지 없었다. 내가 심한 갈등 가운데 표류하거나 외부로부터 간절한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 주로 나타났다. 그리고는 권위에 가득찬 어조로 교설하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진실로 감탄했고, 그의 도움에 감격했다. 분명 그랬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점차 시간이 흘러 가고, 그에게서 내게로 흘러 들어오는 지식의 양이 많아 질수록 내 사고는 무분별한 습득이나 흡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내 처음의 반발은 그에게나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준 그 한 번의 시도는 무섭게 증폭되어 제 몸을 부풀리더니 우리의 관계를 대등한 차원으로 이끄는가 했으나 어니세 난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딱히 내가 왜 그래야만 했는가에 대한 답을 내 스스로도 쉽게 내릴수 없다. 나 어떤 측면에서는 그의 도움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를 부르고 싶지는 않다. 그는 명쾌하지는 않더라도 분명히 내가 취해야 할 최선을 가르쳐 줄 것이다. 전혀 내가 생각지 못했던, 기반이 약하기에 생각해낼 수 없었던 것을 내 앞에 풀어내 줄 수도 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난 네 의지로 그를 거부하고 있다. 그럿이 내 최후의 자존심이라도 되는 emtd.

시간은 또다시 우리를 일상의 모습으로 끌어내려 분주함 가운데 한 곳에 오래 머물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많은 움직임이 있었지만 별다른건 없었다. 그 가운데서 우리 가족과 천마네 가족은 이 세상이 천국이라는 걸 만끽이라도 하는 듯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인근 명승지를 돌아다니고 따뜻한 볕을 쬐며 싸온 음식들을 먹었다. 아이들의 양손을 잡고 우리는 일생동안 치러야 할 가족에 대한 봉사를 짧은 기간 동안 해치우겠다는 듯 치열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접었다. 우리가 얼마나 열성이었던지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 마져 피곤한 기색을 보일 정도였다.
앞날에 대한 불안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아이들도, 여자들도, 우리 두 사람 역시나 무언중에 그 일을 잊으려는 노력에 힘을 더했다. 이런 중에 두 가지 큰 변화가 우리 앞에 다가온 것은 봄의 힘이 다하여 계절의 권한을 광폭한 여름에게 내어주기 바로 직전이었다.
첫 번째 변화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었다. 설란의 뱃속에 열 달이나 있던 아이는 새롭게 맞은 세상에 제 등장을 알리듯 큰 울음을 토하며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여자아이였다.
환아는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제 동생을 바라본다. 자신에 비하면 너무도 적고 귀여운 아이가 동생이란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 모양이다. 난 딸에게 화(化)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로써 난 환(換)과 화라는 이름을 지닌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첫 아이을 보았을 때의 감동만큼은 아니였지만 여전한 설렘은 한동안 그 아이에게 전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꼬물거리는 손가락에 내 손가락을 걸고 너와 나는 하나야, 라는 말을 되뇌고 있었다.
하나. 그래 하나다. ‘그’에게서 들었던 ‘하나’ 라는 의미와는 분명 다르다며 스스로를 경각시켰다. ‘그’는 인간의 탄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었다. 영혼이 현생에 태어날 때 지난 기억을 모두 잊게 되는건 사실은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했다. 열 달 간 태 내에 있는 생명은 백 년을 산 인간보다 오히려 완전에 가까운 존재라 했다.
그 의식은 명료하여 과거생의 모든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 영혼은 열 달이라는 시간 동안 이후 수십년 간 행해야 할 모든 행동 양식을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한다고도 했다. 그것이 ‘운명의 정체’라는 말은 아직도 내게는 충격적인 얘기였다. 당시의 의식 활동은 의식의 표층 아래로 깊이 숨어 있다가 순간순간 판단의 기로에 설 때 행동 양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의 열 달이 지는 의미는 나머지 생보다도 독특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는 이미 현생에서의 모든 수행을 어머니의 태 속,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거친 이후이다. 그의 영격은 새로운 도약을 보였지만 그 순간 태가 열리고 세상에 첫 호흡을 하는 순간 그를 지난 열 달 간 지배하던 의식은 무의식으로 침잠되고 그에게 남겨진 건 이미 그려져 있는 밑그림에 실제로 먹을 댈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단이라 했다.
기억을 잃어버린 그 존재는 미세하게 남아 있는 밑그림을 떠올리지 못하고 백지마냥 새롭게 모든 걸 시작해야 한다. 물론 끊임없이 이 무의식의 존재가 예전에 그렸던 그림을 자아에 각인시키려 노력하지만 그걸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전적으로 새로운 현생의 의식존재가 결정하는 것이다.
대충 이런 얘기들이었다. 난 화를 바라보며 정말 그럴까를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내게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내 피를 이어 받았다는 것과 언젠가는 날 자신과 무관하지 않은 존재로 인식하게 될 것이라는 게 더 중요했다. 어쩌면 마계의 유입은 내 생애 동안은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희망을 품어 보았다.
며칠 후, 나 천마교에서 심상치 않은 소식을 전달받는다. 작게나마 품기 시작한 희망을 송두리째 날려 버린 그 소식은 그 동안 내 뇌리 속에서 단 한 번도 떠나지 않았던 의문에 대한 최초의 단서이기도 했다.
마계의 유입과 환사의 실종. 이 둘이 맞물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최근의 추측을 좀더 신빙성 있는 모양새로 만들어 주는 정보였다.
나와 천마는 부리나케 현 지도부가 모여 있을 장소로 이동했다. 가는 내낸 기억 속에만 살아 있는 환사의 흔적을 다시 불러내 보았다. 불행한 삶을 살다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그녀이기에 내 마음은 더욱 아프다. 어쩌면 그녀를 찾을 수도 있다는 기대감의 측면이, 마계의 유입이 이제는 기정 사실이라는 절망과 함께 공존했다.
“지금껏 십여 년 동안 서른 두 명이 실종되었다고 합니다. 그 지역이 특정 장소에 한정되어 있는 것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종자의 신분을 들춰 보아도 어떤 특이점이나 공통적인 점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이거나 그곳을 우연찮게 지나던 사람들이 이 명단에 포함되었다는 것이 실종자들의 유일한 공통점입니다.”
천마교 군사직을 맡고 있는 옥기린의 말 중에 난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그 동안 많은 실종 사고가 있었지만 최근에야 그 심각성이 대두된 것이 좀 의아하군. 이 보고가 총단에 전해진 것은 언제였지?”
“평균 일년에 세 번 꼴로 실종사고가 있었던 셈입니다. 그쪽 지부측에서도 이 일을 그다지 심각한 것으로 보지는 않았고, 보고는……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흐음, 하긴 전 중원에 걸쳐 실종 사고가 한두 건이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 장소란 말이야. 환사의 실종 이후로 조사대가 그 인근 지역에 항시 파견되어 있었을 텐데도 이 점을 간과했다는 게 좀 납득이 가지 않아.”
“저도 그 점을 이상히 여겨 조사해 보니 우리가 추적해 왔던 환사의 이동경로가 그곳과 일차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건 환사의 실종과는 전혀 무관한 사건이거나 우리가 환사의 이동경로를 잘못 예측한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실종 사고, 흔하디흔한 사건이었지만 결코 그렇게 볼 수 없었다. 일정 지역에 진입한 자들의 어김없는 실종 사실을 놓고 어찌 태연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겠는가.
“저곳인가?”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천마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는 분명했다. 마계의 유입. 어쩌면 환사의 실종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은 점차 확신으로 굳어 간다.
“천마.”
“왜?”
“그곳이 맞다고 해도 아직은 마계가 유입되지 않았고, 차원의 벽이 허물어지지 않은 게 분명할 텐데……. 왜 그 지역을 들어선 이들이 실종된 거지? 이 점은 좀 이상한데.”
“나도 그 점이 이해가 가지 않지만 가보면 알겠지. 이런 건 여기서 백날 얘기하고 있어봐야 소용이 없다. 가자. 가서 알아보자.”
“그래야겠어.”
“즉시 조사대를 편성하겠습니다.”
옥기린의 자발적인 말에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이번 조사는 나와 천마만이 간다. 많은 인원이 가봐야 도움 될 일도 없다. 그보다 군사!”
“말씀하십시오.”
“그 지역에 대한 자세한 정보나 좀 챙기도록 해.”
“존명.”
“교주!”
“네, 사부님.”
“우리가 갔다 올 동안 우리들 가족이나 부탁한다. 그리고 만약……. 우리에게서 별다른 기별이 없다면……. 그럴 일이 없겠지만 만약 그럴지라도 흔들리자 말고 꿋꿋이 견디길 바란다. 너를 믿는다, 소군.”
“염려 마십시오, 사부님.”

환사가 실종 된 곳은 섬서와 산서 경계쯤으로 추측되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최근의 실종 사건으로 주목받는 곳은 청해 북동부의 일월산(日月山)이란 곳이었다.
보기에 사람의 발길이 빈번한 곳은 아닌 듯했다. 나는 왜 이곳까지 환사가 왔어야만 했을까를 고민했다. 중원으로 나가기 위해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천마는 곧장 금웅을 타고 인근에 내려 이 근처 주민들의 얘기를 들어 보았다. 그들은 처음에는 우리의 질문들을 두려워하는 듯했고, 그래서 말하길 한사코 꺼려했다.
내 집요한 물음에 겨우 입을 연 노인이 있었는데, 그는 배포가 있었다기보다는 미끼로 내건 은자 몇 푼이 당장에 필요한 만큼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말하는 내내 그는 그일을 당장에 겪고 있는 것처럼 공포에 질려 있었다.
‘십여 년 전부터 괴이한 울음소리가 들리고 인근 지역에 자욱한 안개가 끼어, 이상하다 여긴 사람들이 출입을 금하고 있었더랬죠. 뭐,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거라 여기면 불안한 만음을 누르고 있었는데, 웬걸요. 십년이 다 지나도록 안개는 걷힐 줄 모르는 겁니다요.
사시사철 햇빛도 들지 않으니 사람들이 잘 가지 않았습죠. 다만 외진인들이 그곳을 들어가는 일이 가끔 있었지요. 그런데 들어간 사람은 그가 누구든 간에 나오지를 않는 겁니다요. 사람들은 불길한 징조라며 산신에게 재를 지내야 한다고 했으나 어떤 도사가 말하길 소 5백 마리를 산채로 잡아 그 피로 인근의 동서남북을 막고 불을 질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워낙에 두려움이 앞섰던지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또 몇사람이 들어갔다 실종되었다고 들었습니다.‘
노인은 한달음에 마릉ㄹ 쏟아내고도 두려움이 쉬 가시지 않았는지 긴 한숨을 몰아쉬었고, 은자 주머니를 챙기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를 뜨려했다. 애써 불러 챙겨 주니, 평생을 이 근처에 살았지만 이런 일은 금시초문이라고 덧붙여 준다.
난 그 도사라는 인물이 궁금했다. 그냥 한 소리는 아닌 것 같고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했는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안개가 자욱한 일월산 전역에는 소문을 듣고 온 사람들이 간혹 가다 올라간다고도 했다. 그 사람들이 실제로 산을 올랐는지 몰라서 그렇지 실제 실종자는 훨씬 많을 것이라고고들 추정했다.
나와 천마는 산자락을 밟아 올라가며 기분 나쁜 안개를 손바람을 일으켜 흩으려 했다. 어둠 속도 꿰뚫는 시력을 지닌 우리들이건만 어찐 된 연유인지 한 치 앞도 알아 볼 수 없었다. 일반의 안개와는 달리 흐르지 않고 뭉쳐 있을 뿐만 아니라 색깔이 검은색에 가까웠다.
“이것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데.”
내 말에 앞장서 걷던 천마가 지나는 투로 말했다.
“이 안개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게 아냐.”
“그야 당연하겠지.”
“이건 마계 서북쪽 지옥수라 불리는 늪지대의 마무(摩撫)다. 아마도 차원에 균열이 생기면서 제일 먼저 흘러 들어온 것 같다.”
여기 사람들은 십 년이 된 일이라 했다. 그러니 마계가 차원의 벽을 허물기 시작한 건 일월교가 건재할 때부터라는 얘기이다.
“그런데 이런 안개만으로 사람들이 실종되지는 않았을 거고, 벌써 마수들이 들어와 있는 건 아닐까?”
마계에 대한 지식은 당연히 천마가 월등하니 나 그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천마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딛으며 고개를 젓는다. 바로 앞에 붙어 있는 그의 형체만이 흐릿하게 보이니 고개를 저었다고 느꼈지만 사실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냐, 마계가 유입되었다면 이 지역의 지형 자체가 변했을 거다. 그리고 마계의 마신들이라고 해서 이런 안개 낀 음침한 걸 좋아한다고는 여기지 마라. 그건 편견이야.”
우리는 말을 주고받으며 산 정상을 향해 바삐 움직였다. 혹시라도 돌발적인 일이 발생할 것에 대비해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사실은 긴장은 나만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저 녀석의 태도로 보아서는 긴장은커녕 즐기는 것 같은 느낌나져 드는걸, 간만에 이런 분위기를 맞으니 감회가 새롭기라도 하나. 아니, 그건 편견이라 했지. 그렇다면 마계의 마신들의 등장이 아닌 걸 확신하고 있으니 저리 여유를 부리는 건가.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우리가 이곳에 온 건 여거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확인이었고, 과연 이곳이 우리 생각대로 마계와 관련되었나 하는 점, 진정 차원의 입구쯤 되는 곳이라면 진행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 보기 위함이다. 원천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인 대안이 없다는 게 안타깝긴 하지만……. 솔직한 고백이다.
정상에 거의 이르게 되자 생각 밖으로 안개는 점차 옅어졌다. 일장 정도의 시계를 확보하게 되면서 난 주변을 빠르게 관찰했다. 지금은 정오쯤 되었다. 그런데도 그걸 느낄 수는 없었다. 정상 역시나 햇빛이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 어슴푸레한 느낌, 마치 새벽녘 푸르스름한 하늘을 보는 것 같은 그런 전경이었다.
그런데 가만보니 바닥이 이상했다. 군데군데 바위가 있었던가 본데 그 표면이 하얗게 변색되었고, 딱지가 앉은 듯 그 위를 푸르스름한 이끼 같기도 하고 작은 버섯 같기도 한 것들이 번져 있다. 나는 손가락으로 슬쩍 긁어 보았다.
“이게 뭐냐?”
손끝에 붙은 푸른색의 결정체는 순간 부글거리며 녹아들더니 금세 붉은색으로 변해갔다. 천마는 내 손에 묻은 걸 주의 깊게 살피더니 마치 피 같은 그 액체를 손으로 쓱 문질러 본다.
“흐음, 이건 마수들의 식사인 홍균(紅菌)이란 거다. 마수들 중 대부분은 이 홍균만 먹고 살지. 일부는 물론 그런 마수들을 잡아먹고 살고, 이걸보니 이곳이 마계가 뚫고 있다는 차원 출구가 확실하다. 그런데 완전히 개방되지도 않았건만 마무와 홍균이 빠져 나온 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아.”
내 손에 있던 홍균은 완전히 녹아 피가 되어 있었다. 누가 보아도 그건 피였다. 그 순간 괴이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작은 관을 통해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 오자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등줄길에 진땀이 맺혀 흐르고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하자 난 천마에게 구원이라도 있는 양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무슨 영문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애 이해가 간다.”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천마의 말이었다.
“이 소리를 두고 하는 말이냐? 정말이지 기분 나쁜 소리군.”
“너 괜찮냐?”
천마가 걱정하는 투로 말하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은 안 좋지만 견딜 만해.”
“흐음, 넌 역시 별종이야. 이 소리는 인간의 영혼을 제어하는 미곡성이다. 마계의 생명이 잉태되는 원형의 수정 연못에서 흘러 나오는 소리지. 아마도 내 생각엔 환사를 비롯한 실종자들이 이 마곡석에 제어되어 이곳까지 왔던 것 같다. 조금만 더 가면 진원지가 나올 것 같은데…….”
그러고는 앞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다. 나도 모르게 주변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는 그의 뒤를 따랐다. 등 뒤에서 무언가가 불쑥 솟아 날 것만 같아 몇 번인가 뒤를 돌아다보았지만 별 다른게 있을 리 만무했다.
내 간담이 이 정도였나 싶어 갑자기 오기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어디까지나 새로움을 대하는 낯선 감점의 자연스론 표출일 뿐이지 내가 겁을 집어먹은 건 결단코 아니다. 난 스스로를 이렇게 위로하며 천마의 뒤를 될 수 있는 한 바싹 뒤따랐다.
“저곳인 것 같군.”
천마가 가리키는 곳은 지형상으로 분명 이 산의 정상이 분명했다.
“아!”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 나온 건 감탄사였다. 진정 황홀한 전경이지 않은가. 정상은 주변보다 오히려 움푹 파여져 아래로 가라앉아 있다. 둘레가 십여 장은 됨직했는데 둑처럼 쌓여 있는 그 가운데에는 푸른 물이 찰랑거리며 맴을 돌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들어가서 마음껏 들이키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푸르스름한 물 속은 일장 정도만 보이고 그 밑은 어둠이 넘실대었다.
“여기가 분명하군.”
“실종자들은?”
난 주변을 둘러보며 그들의 시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되도 않은 기대를 품었다.
“이 안으로 들어갔겠지.”
“네 말은 이곳에 뛰어들어 자살들이라도 했다는 거냐? 그렇다라도 시체는 떠올라야, 최소한 최근의 시체들이라도, 아니면 그 흔적만이라도 있어야 정상 아니야?”
천마는 날 주의 깊게 쳐다보았는데 ‘너 지금 그게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역시 마곡성이 네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 건 아닌가 봐. 견디긴 하지만 이리 멍청한 소리를 하니 말이다.”
졸지에 난 천마에게 바보라는 핀잔을 듣고 말았다.
“이곳에 뛰어든 자들은 지금 모두 마계에 있을 거다.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너오지는 못하지만 이곳에서 저곳으로 갈 수는 있는 거겠지. 아마도 내 생각엔 이건 꽤나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것 같디고 하고, 몰론 최근 십여 년 전부터 실종 사고가 있었지만 더 극심해진 것일 수도 있고. 그러고보니 이곳 산 이름이 일월산이잖아?”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일월교에 대한 것이라면 대충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듯도 했다. 물론 지금은 죽어 이 땅에 없는 일월교주에게 물어 보지 않는 한 확인할 길은 없다. 우리는 근처에 아무렇게나 편한 자세로 앉아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더 이상 전진할 곳도 할 일도 없어졌기 때무이다. 확인은 끝났다. 이곳이 마계의 출입구일거라는, 곧 있을 유입도 이곳을 통해서이지 않을까 하는 확신도 들었다.
“이 마곡성이 계속 흘러 나오는 한 끊임없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겠지. 여길 틀어막으면 어떻게 될까?”
내 제안에 천마가 고개를 저었다. 좀 생각이라도 하는 척하나 그런 것도 아니고 곧바로…….
“쓸데없는 것이다. 자, 봐라.”
천마는 조금 걸어가더니 손에서 강가를 일으켜 큰 바위를 통째로 들어 보리더니 정상에 척하니 올려 두었다. 그 기분 나쁜소리가 더 이상 흘러 나오지 않았다.
“어, 들리지 않느데.”
난 거 보라는 심정으로 그렇게 외쳤다. 그러나 곧바로 어처구니없는 장면에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치치치칙
거대한 바위가 순식간에 녹아들더니 물 소게 동동 떠올라 돌아간다. 그것도 잠시,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모습은 소금이 물에 녹는 것과 같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전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난 그걸 보면 왜 주변의 땅은 녹지 않는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위를 향해서만 기운이 뻗치나? 그렇다고 또다시 천마에게 그걸 물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까와 같은 핀잔은 한 번으로 족하니까. 내 자존심을 위해 스스로 답을 내기 위해 노력하다 결국은 ‘알수 없다’로 종격지속 말았다.
천마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저들은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걸 느끼고 있을 거다. 너와 내가 여기 와 있는 걸 말야. 머지않아 대면하게 되겠지. 빌어먹을! 난 저들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나 비참한 최후를 당하게 될거다. 그렇게 되느니 차라리…….”
그 뒤의 말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천마는 순순히 저들의 손에 채 운명을 맡기기보다는 소멸되는 길을 걷더라도 원래의 힘을 쓰려 들지도 몰랐다. 전에도 한 번 그런 적이 있지 않았던가. 한때는 대마신까지 오르며 마개의 지도자 중에 하나로 군림했던 그가 지금은 대마신도 아닌 아수라나 나찰과도 힘겨워하며 싸워야 할 판이었다. 자존심 하나만은 이 세계 최고라 자부하는 그가 그 수모를 견뎌낼지는 두고 볼 일이다.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지금의 이 상황 모두가 마뜩찮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당면한 현실에 당황할지라도 황당한 표정 한 번 짓고 모든 걸 끝잘 볼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런 일을 미리 알아야 하고, 번민해야 하고, 내 소중한 시간들을 끙끙거리는 데 소비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고 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현실에 충실하고, 가족과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자고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다짐하고 다짐했건만, 이곳 소식을 접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오는 꼴은 또 대체 뭐란 말인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월등하게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우리 등을 떠밀며 ‘당신들만 믿겠습니다’ 라고 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제길, 그만 가자.”
이런 감정이 담겨 있어서 그런지 내 음성은 나도 느낄 마늠 평소와는 달리 거칠었다.
“가자니까.”
천마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여전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꼴이 또 갑자기 보기 싫었다.
“파천.”
“왜?”
“너 솔직히 도망가고 싶지?”
녀석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렇게 물었다. 천마의 그 말을 곱씹어 볼 필요도 없었다. 당연한 소리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안전한 곳이 있다면, 내 가족과 친근한 몇 사람만이라도 재앙으로부터 피신 시킬 수 있다면……. 난 망설이지 않고 그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안고 있는 현실은 그런 곳이 전혀 없다는, 그래서 어찌 됐든 무주치고 끝장을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천마, 우리 여기다 중원에더 구할 수 있는 폭약을 몽땅 매설해 놓고 터트려 버릴까?”
“하하하하, 그것 한번 해볼 만하겠는데. 불꽃놀이로는 그만일 거야. 엄청난 장관이지 않겠느냐?”
천마와 난 산이 무너져라 웃었다. 이런 우리들 꼴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충실한 수하들조차 우리라면 뭔가 대책이 있을 거라 은연중 믿고 있을 것이다. 빌어먹을, 난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란 말이다. 고만고만한 무리 중에 조금 특별하게 강한 것뿐인데. 그런 나를 왜 특별한 존재로 보는지……. 이게 다 일월교의 난 때 잘난 척한 덕분인가? 갑자기 장삼봉의 말이 떠올랐다.
‘너 영계에서 꽤나 유명해져 있더라.’
“허허허.”
내 실없는 웃음이 천마에겐 어떻게 들렸는지 그도 마주보며 함께 웃었다.
누가 보면 실성한 사람인 줄 알 것이 아닌가. 하늘 한 번 보고 물 마시고도 아니고 하늘 한 번 보고 웃고 섰으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낄낄거리며 웃고 떠들고 있던 우리 두 사람의 눈길이 반짝거리기 시작한 건 그로부터 반 시진이 지나서였다. 천마의 전음이 내게 전해졌다.
[너도 느꼈냐?]
[물론.]
[두 놈이다. 넌 왼쪽을 맡아라. 난 오른쪽이다.]
[좋았어.]
내 대답이 있고 우리 두 사람이 움직인 건 거의 동시였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면 동시에 그 자리에서 퍽, 하고 사라졌다고 느낄 만큼 움직임은 급작스러웠고 또한 신속했다. 나는 천마잠형술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목표물이 부리나케 움직이는 걸 지켜보았다.
“어딜.”
내 몸은 의지가 움직이기 전에 벌써 그의 등 뒤로 가 있었다. 그 자의 두 팔을 움켜쥐고 뒤로 훽 꺽어 보니……. 여자다.
“아악, 아프잖아.”
이건 어린애잖아. 난 천마를 눈으로 쫓았다. 그 역시 한 사람을 붙들고 끌어오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것 못 놔? 너희들 뭐 하는 놈들이냐?”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사십대 중년인이 천마의 손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붙들려 오는 모습을 보다 난 내 올무에 걸린 사냥물을 다시 살폈다.
“너희들은 뭐지? 왜 여기서 서성거리고 있었느냐? 아니다. 다시 묻지. 왜 우리들을 살펴보고 있었지? 너희들은 마계의 끄나풀이냐, 아니면 일월교의 잔당인가?”
이 손 놓지 못해? 아악, 아프단 말야.“
내가 손에 힘을 넣자 소녀라고 볼 수 밖에 없는 여자아이는 얼굴을 있는대로 찡그린다.
“그만두시오. 말할 테니.”
사십대 중년인은 소녀를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자세히 보니 점잖아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 순간 슬며서 소녀의 팔을 놓았다. 어차피 그녀가 무슨 엉뚱한 것을 한다 해도 내가 보기엔 그다지 위험한 수준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대체 누구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내게 오히려 그가 그렇게 물었다.
“당신들 여기서 뭐하고 있었던 거요?” 재차 질문을 하는 그를 천마가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며 팔을 꺾으려 들자, 난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를 풀어 줘라.”
천마는 네 요구에 순순히 응하고서는 그가 혹시 딴 짓이라도 할까봐 주의 깊게 살피고 섰다. 중년남자와 소녀는 두 사람 모두 조건(?巾)을 하고 백저포를 입었다. 생김새나 입은 모양새가 중원인들 같지가 않았다.
“당신들은 누구며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소?”
내가 다시 묻자 서로를 바라보더니 중년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허, 우리 위치를 그리 쉽게 알아낸 것도 놀랍거니와 이 놀라운 무공을 보아하니 중원에서도 이름 높은 무림인들이겠구려. 우리는 조선에서 온 사람들이오.”
“조선이라면…….”
고려를 이은 그 조선을 말하는 건가? 자세히 살피니 말하는 폼이 천박하지는 않은 것 같고, 또한 제압되어 억눌려 있음에도 당당하군.
“나는 파천이라 하고 여기는 천마라고 하오.”
“오.”
두 사람은 놀람이 가득한 얼굴로 역시, 하는 표정들이었다. 이때 천마가 내게 전음을 보냈다.
[이 자의 무공이 예사롭지 않았다. 기습을 했음에도 몇 번의 손이 오고갔으니 말야.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어.]
천마가 저 정도로 인정할 정도면 대단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셨구려. 중원의 두 거성들이셨구려. 다시 우리 소개를 해야겠구려. 난 최경문이라 하고 여긴 내 딸인 최미이라 하오. 우리는 어찌 보면 무관한 사이는 아니오.”
“그건 무슨 말씀이시오?”
“은자천의 장삼봉 진인과 우리는 한 식구요. 은자의 세계에 세 하늘이 있으니 하나는 은자천이고 두 번째가 호나상천이요, 마지막 하나가 무량천이오. 우리는 백두산 무량천의 사람들이니 어찌 무관하다 할 수 있겠소? 예전에 장삼봉 진인에게 대인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개까지 숙여 보이며 이렇게 말했고, 나 또한 얼른 그에게 포권으로 예를 취했다. 우리는 편하게 둘러앉아 서로 경계함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 예까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물론 대인과 같은 의도지요. 마계의 유입이 어느 시점에나 있을 것인가, 살펴보려 왔습니다.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려 하는데 두 분이 산을 오르는 걸 발견하고 몰래 뒤를 밟아 왔던 겁니다.”
처음부터 우리 뒤를 따랐다는 건데 이제애 발견하게 되었으니 이또한 어찌 대단찮은 일일까. 역시 이들은 범상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이제 열아홉이 되었다는 소녀가 난 더욱 대단히 여겨졌다.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성취를 이뤘으니 예전 같으면 승부를 나눠 보아도 부족하지 않은 여걸이지 않은가. 최경문이 내게 말했다.
“정삼봉 진인께서도 그러셨지만, 대인께 많은 이들의 시선이 모아져 있음은 하늘의 뜻이 대인께 있음이요, 대인을 통해 이 난국을 풀어 가고자 함인 듯합니다. 이 부족한 자의 눈에도 그리 보이니 아무쪼록 대의를 항사 곁에 둔 듯하셔서 큰 일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난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으나 속에서는 또 그 소린가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의 입을 막느라 일부러 질문을 했다.
“무량천은 선인의 수가 얼마나 됩니까?”
“밖으로 수백이요, 안으로 수십입니다. 모두 한 마음으로 이번의 이레 목숨을 걸었습니다. 어찌 보면 이 환난의 날에 이 땅을 살아감도 복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 번 태어나기도 힘이 드는데, 이왕이면 더 큰 어려움이 있으니 이기면 복이요, 참아내면 정진이 될 것이니 이 일이 어디 예사로운 일입니까. 덧없는 생에 이만한 의미면 충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는 허허, 웃는 그를 난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뭐가 복이고 뭐가 의미가 있다는 말인지, 선인이라는 자들은 왜 이리 가식적인가. 진정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게 당키나 한 소리인가. 사고 방식의 차이는 분명 있을 수 있지만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저들은 현실을 저리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가. 이 땅에 낙원이 이루어지면 큰 일이라도 생기는가. 무엇이 그리 자신의 수행에 저이되는 것이 있기에 사람들을 피해 산으로 들로 숨어 다니는가.
난 내 마음의 소리들ㅇ르 그에게 해주고 싶었으나 꾹 눌러 참았다.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는 자에게 할 도리는 아닌 듯 했다. 최민이라느 아이가 내 얼구을 아까부터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더니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날 질책하고 나섰다.
“대인은 듣기와는 달리 속진이 가득하신 분이군요.”
속견이라. 내가 속인이니 속견이 가득한 건 당연한 일인걸 어쩌겠는가.
“저만 위해 사는 사림이 있고,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으며, 큰 것을 향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 것에 집착하는 이가 있지요. 대의란 남을 위해 생을 수놓는 자의 취하는 바요,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바라고 참고 인내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대인은 큰 것을 지니고 있으나 작은 생각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으니 대의와는 거리고 멀고, 남을 위해 살기도 하지만 전적으로 자신을 위한 생각이 가득하니 역시 대의의 가치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어찌 대인이 대인이겠으며 존경을 받을 만한 분이겠습니까? 마지막 때에 저마다 제 살길을 찾아 천지사방으로 동한다 하더라도 대인만은 그러시면 안 되지요. 하늘이 인연을 베풀고 그걸 또한 대인께서 아시면서 이찌 그런 삿된 생각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내 비록 미흡한 눈이지만 천기를 헤아리고 인생의 복과 화를 내다 볼 줄 알아 대인의 생각을 잠시 엿보았습니다만……. 진정 실망이 되는군요.“
“얘야, 민아.”
최정문이 당황하며 딸아이을 제지하지만 이미 늦었다. 쏟아낸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저 아이가 지금 나를 공박하고 있구나, 라고 생각이 들면서도 그리 불쾌한 기분이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이기 때문이다. 내 뭐 그리 특별난 구석이 있어 대인이라 불릴 것이며, 무슨 큰 뜻이 있어 세상을 위해 날 내어 줄 각오를 하겠는가. 그런 걸 탓하는 거라면 난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다.
“허, 어린 계집이 말을 함부로 하는군. 네가 세상을 얼마나 안다고 그리 쉽게 판단하고 내가 파천을 얼마나 안다고 속단하느냐. 이보시오. 최경문이라고 했소? 당신들 은자들이 세상에 얼마만한 유익을 끼쳤는지 일일이 헤아리고 싶은 맘은 없지만 솔직히 말해 그대들만큼 스스로의 이익에 밝은 사람이 누가 있소이까? 세상이 손가락질 하는 악인이라도 한 번의 선행을 베풀고 살지만 당신들은 세상을 떠나 있으며 제 수행에만 급급하지 않소? 무엇이 더 가치 있다고 굳이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대들은 파천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소. 그래도 장삼봉 진인은 내 각별히 인정하는 바가 있으나……. 무랼천이라 했소? 그대들은 뭐가 그리 잘나 미치 이 세상 위에 노닌다는 식으로 말하시오? 이거 생각해 보니 은근히 열 받네.”
천마가 얼굴까지 붉히며 그리 말하자 최경문이 안절부절 못한다. 그러나 최민이란 아이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천마를 똑바로 주시하고 당당하게 제 할 말을 한다.
“우리는 세상을 등지고 숨은 것도 아니고 세상에 관심을 끊은 것도 아닙니다. 무수히 오가며 덕을 쌓고 선을 행하니 보지 않았다고 그리 말하지 마십시오. 복을 빌고 위경에 처한 자를 돕고 잘못된 생각들을 일깨우고……. 악을 일삼는 자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니 이 또한 작다 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건 드러내지 않아도 종을 미미한 것에 불과합니다. 도리어 크게 자랑할 것은, 욕망을 삼가고 이 땅에 더러움을 심지 않으며 내 것 네 것을 구분치 않으며 있으면 베풀고 없으면 스스로의 힘으로 얻으며 족한 마음으로 살아간다는 겁니다.
해를 주지 않고 이익만 끼치니 이만도 못한 이가 세상엔 천지지요. 우리가 비록 때를 구분하여 세상에 미침이 제한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찌 그런 망령된 말의 대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린 계집이 말을 함부로 한다 하셨습니까? 내가 비록 어리지만 내 마음마저 그러하지는 않습니다. 어찌 제가 함부로 입을 놀려 대인을 폄하할 수 있겠습니까? 보아하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절망만이 가득한 듯하여 정성으로 한 말을 그렇게 곡해하신다면 저로서는 억울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천마가 괜히 나섰다 본전도 못 건진 꼴이었다. 그가 디시 입을 열려고 하는 걸 내가 먼저 말하고 나섰다.
“백 번 지당하신 말이오. 내가 날 가만히 보아 해도 그러한데 남이 보기에 그리 보이는 건 당연하겠지요. 두렵고 떨리오. 내 솔직한 심정이오. 그런데 그것이 당연한 것 아니오? 그것이 단지 집착이라 말하며 욕하기엔 우리 피가 너무 뜨겁다 여겨지는구려.
사람다움이 어디 있소? 난 이렇게 생각하오. 아이는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배고프거나 어디가 아프거나 무섭거나 슬프거나 하면 누구할 것 없이 웁니다. 이게 아이의 당연한 성정이지요. 부끄러운 걸 부끄럽게 여기고 두려운 걸 두려워한다 해서 잘못이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무어시 바르다는 건 성장하며 배워 알지만 그 이전에 우리 마음이 먼저 제 자신을 가르칩니다. 내가 하기 싫은 걸 남에게 강요함도 그르며 네가 하지 못하는 걸 남이 해주길 바람도 적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세상에 잠시 왔다 가는 인생이지만 여러 가지 사는 법이 서로 다르기 마련. 욕망을 억제하는 것도 한 방편이 되겠으나 욕망에 솔직한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다 여겨집니다.
난 후자의 삶을 선택했고, 그리 살아왔소.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그 가운데 스스로 부족함을 느꼈소. 그런데 세상은, 당신들은 날 어찌 여기오? 내가 진 짐은 스스로 진 것이 아니오. 내 어깨가 연약함은 생각도 않고 그대들은 모든 짐을 내게 지우려 했소. 지금도 마찬가지지 않소? 난 무거운 걸 무겁다 하는 것뿐이오. 스스로 내팽개친 것도 아니고 자원하여 지고자 함도 아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난 짐을 지고 갈 것이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날 위해서, 내 가족을 위해서, 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 짐이라 생각지 않고 지는 것 뿐, 내가 모르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짐을 지는 건 아니오.
백 번 말해도 마찬가지지만 사실은 난 짐을 진 자도 아니고 세상을 위해 날 헌신하는 것도 아니오. 더군다나 당신들 같은 선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존경받기 위해 이 길에 나선 것도 아니오. 난 내 할 일을 인정받기 위해, 존경받기 위해 이 길에 나선 것도 아니오. 난 내 할 일을 내가 선 자리에서 묵묵히 해갈 뿐이오. 물론 그러면서도 여전히 내 입은 쉬지 않고 불평과 불만을 늘어 놓을 것이고, 마음은 불 특정한 누군가를 향해 곤두서 있을 것이오. 나는 그 무엇에도 속박당하고 싶지 않고 그냥 나 자신이고 싶을 뿐이오.“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지만 이들과 다투고자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나를 어찌 바라보든 그건 저 사람들의 일이지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다. 스스로 옳다 여기는 것, 그것이 현재의 내게는 언제나 진실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대라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리오.
난 나일 뿐 그 무엇도 아니다, 라는 내 의견은 현재의 심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런 걸 느꼈음인가, 최민이라는 소녀는 더 이상의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어찌하다 보니 이런 얘기들이 오갔지만 그들과 헤어지며 다시 만날 날을 예감했다. 마계의 유입이 있게 되면 세상 곳곳에 숨어 있던 자들이 나타날 것이고, 뜻이 동일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같은 입장에서 동지가 될 것이다. 나와 천마뿐이라 여겼던 마음에 조금의 여유가 더 생겼음이 이번 여행의 소득이라면 소득인 듯도 싶었다.

우리 둘은 곧바로 중원으로 들어오지 않고 금응을 타고 서쪽으로 날았다. 천마가 불현듯 생각이 났는지 내게 그럴듯한 제안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마신갑을 잊고 있었구나. 그걸 착용하면 좀더 대등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겠다. 그걸 오행신주 안에서 회수할 수 있겠어?”
물론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서쪽 땅으로 가 두 개의 마신갑을 회수하고서야 중원으로 들어왔다. 오행신주를 폭발시키지 않고 해체시킨 뒤 발견한 건 붉고 단단한 작은 구슬 한 개였다.
처음에 오행신주 밖에서 들여다보다 마신갑이 보이지 않기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안에 있어야 하건만 보이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싶었다. 천마가 그런 내 의문을 깨끗이 씻어 주었다.
“마신감을 착용한 이의 의지가 소멸되는 순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뿐이다.”
원래 저런 모습이었단 말인가? 천마는 원래 마신주의 색이 검다며 이상한 일이라 했다. 아마도 오행신주 안에서 십 년 간 있으면서 오행기를 받아들여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짐작일 뿐이었다. 금응은 또다시 무창으로 향했다. 마지막 하나의 마신주를 회수하기 위해서였다.

탁자 위헤 놓여진 붉은 광채의 마신주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건 마낭이 아니었다. 첨마는 마계를 벗어나면서 그 스스로 마신주를 뱉어냈다고 했다. 그런데 다시 그걸 삼킬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로운가 보다.
나는 천마와는 다른 의미의 감정에 빠져 들었다. 마계를 사실상 처음 연 메타트론이 만들었다는 마신주. 그 복용한 이의 능력에 따라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나며, 갑주의 모습도 제 각각이라 했다. 난 이걸 내 몸 안에 넣어야 한다는 사실에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달리 선택의 여지는 없다.
“또 하나는 누구에게 먹이지?”
마땅한 이물이 언뜻 떠올라 주지 않았다. 광마존이나 율극이 가장 적당한 대상이긴 했다. 수하들 중 그들보다 강한 고수는 없다. 혼세마인 중 일부가 수준이 비슷하긴 하나 그들은 아직도 마성이 채 가시지 않은 인물들. 어찌 그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신수궁주도 적임자이긴 했지만 그는 현재 중원에 나와 있지 않았다. 이래저래 생각해 보다 결국은 광마존과 율극 중에 한 사람을 택하기로 했다. 우리 두 사람의 의견을 모아 보니 역시 노련함이나 전투 경험 면에서 광마존이 적임자라 판단되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마신주를 삼켰다. 작다고는 하나 그게 과연 목구멍을 통과할지 의문이었는데 뜨거운 기운이 목 안으로 쑥 들어간다는 느낌뿐이었고, 전혀 어떤 접촉도 느끼지 못했다. 천마도 곧 마신주를 삼킨다. 나는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몰라 천마에게 물었더니,
“마신주는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 그게 전부야.”
그러더니 자신이 먼저 시현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이 잘게 부서지면 흩날리더니 붉은 갑주가 드러났다. 전신에 착 달라붙어 있어 몸의 굴곡을 그대로 나타냈다.
“형태는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너도 일월교주가 한 것을 보았겠지.”
말을 하는 동안 갑주의 형태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깨에서 검날이 여러 개 솟아나는 것이었다.
“특별히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 그 부분만 두껍게 할 수도 있지.”
몇 겹을 덧댄 듯 불룩 솟아난다.
“날개를 만들면 하늘을 날 수도 있다.”
정말 날개 같은 것이 천마의 등 뒤에 달렸다.
“이건 전에 일월교주가 한 걸 봤겠지?”
손끝이 쭈욱 늘어나는가 했더니 뾰족한 장검이 되었다.
“어떤 보병보다도 날카로움이나 강도가 월등하다. 이런 것도 가능하다.”
화르륵
그의 전신에 새파란 불꽃이 피어났다 꺼졌다. 잠시였지만 후끈한 열기에 얼굴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난 감탄이 지나쳐 얼이 빠져 있었다. 이건 기대보다 더 엄청난 보물인 셈이었다. 잘 적응하기만 하면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난 오후 내내 마신갑의 운용에 심취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불행은 생각지도 않은 시점에 불현듯 찾아오기 마련이가. 꽤 긴 시간을 마음속으로나마 준비하여 지내 왔어도 막상 닥치게 되면 심정은 또 다른가 보다. 딸애 화아가 세상에 난 지 백 일하고도 열하루가 지난 날 세상을 향해 쏟아진 첫 조짐은 길도고 긴 폭우였다.
밤 낮 없이 퍼부어 대는 비 때문에 황하와 장강이 범람했다. 토지는 유실되었고, 집들이 물에 잠겼다. 강남은 거의 전 지역이 물난리를 겪었고, 강북의 일부 높은 지대조차도 질퍽거리긴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런데도 비는 멈출 줄 모르니 아마도 며칠만 더 쏟아진다면 사람이 발 딛을 곳은 고산준령ㅇ르 제외하고는 없을 듯했다.
불시의 물난리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산으로, 산으로 모진 목숨을 이끌로 올랐다. 다행인지 어느 날 거짓말처럼 비가 멈추고 땅을 태워 버릴 듯한 햇볕이 내리쬐자 사람들은 안도의 함숨을 쉬며 자신들의 터전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절기상을 h가을에 들었음에도 어찌 된 연유인지 모르나 혹서의 진행은 멈출줄 몰랐다.
신선한 바람이 불어 주어도 시원찮은데, 뜨거운 땡볕 아래 그렇지 않아도 극심한 식량난에 굶어 죽은 사람까지 속출했다. 황실과 무림은 전 중원에 걸친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동분서주해 보았지만 어느 지역 할 것 없이 모자라니 대책이 서지 않았다.
새외의 사정 또한 중원과 다름이 없어 멀고 긴 여정을 통해서라도 구해 보려 한 시도는 포기된다. 높고 낮음, 부함과 가난함의 구별이 있을 수 없었다. 금덩이가 있어도 곡식을 구할수 없고, 지난 물난리에 가축들도 거의 떼죽음을 당한 판이니 이제 재화는 한줌의 식량보다 못했다.
사람들은 산으로 들로 다니며 먹을 수 있는 건 모조리 구해 먹었다. 허기에 우는 아이들 모습은 이제 중원 전역에서 어디나 쉽게 발견되는 익숙한 전경이 되었다. 이런 시점에 갑자기 겨울이라도 닥친다면 모르긴 해도 그 결과는 참혹하기 이를 데 없을 터였다. 무림인들은 손에 쥔 병기들을 사슴이나 노루, 꿩을 사냥하는 데 사용했고 온 산을 뒤져 그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걸 모아 사람들에게 먹였다. 물난리에 떠내려 간 집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는 건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지금은 그런 힘도 아껴 두야야 할 때였다.
천마교의 사정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전각은 부서지고 식량창고는 물에 잠겨 썩어드는 악취가 사방에 진동했다. 바위를 부수고 아름드리 나무를 뽑아내는 신력이 있으면 뭐 하겠는가. 굶는데 장사는 없는 법이지 않은가. 물론 좀더 조직적인 힘으로 식량을 수급하고는 있었으나 그 대부분이 주변의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 소모되었다. 일반인들보다 좀더 오래 견디긴 하지만 주린 배를 움켜쥐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런 차에 대륙에 흉흉한 소문이 퍼져 가니 어느 작은 산골에서 역병이 돌기 시작해 광서 서부 지역이 온통 시체 투성이라는 것이다. 확인 차 다녀온 천마교 무사들은 그것이 소문만이 아닌 사실임을 재확인시켜 주니 급작스런 재난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계의 유입 시도에 의한 차원 균열이 가져오는 재난이라 짐작만 하고 있을 뿐 달리 대책을 세울 수는 없었다. 수습이라 해봐야 무사들을 독력하고 민간의 흉흉한 인심을 달래 보는 정도였다.

모든 무인이 협을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협을 행하는 이는 무인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많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간에서 그 힘의 가장 근원적인 형태인 최소한의 무력을 지니고 있지 않고서는 옳은 일임을 알고서도 섣불리 나서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현 무림의 무사들은 그런 점에서 중원을 살찌우고 풍요롭게 만들어 온 장본인들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무림도상이 혼란해지면 민간에 끼치는 해악이 그만큼 증대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지금의 세상은 이런 무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곤란을 겪고 있었다.
사람간의 일이 아닌 대자연의 분노 앞에서는 인간은 언제나 연약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건 염연한 진실임을 또다시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천마교와 무리맹의 전 무사들이 동원되었지만 민간의 핍절함은 나날이 더해 갔다. 여기에서 역병까지 번져 가니 실의가 이만저만 크지 않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은 서로를 보듬기 보다는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의 것을 약탈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신이 굶는 건 견디지만 아이가 배고프다 보채는 건 참기 힘들다. 더군다나 온 세상이 이런 어수선함에 빠져들었으니 치안은 엉망이었고, 이런 틈을 타 잠시라고 배고픔ㅇ르 달래기 위해 사람들은 서로의 것을 빼앗았다.
하늘이 문을 열고 식량을 온 천지에 뿌리지 않고서는 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시체가 거리에 방치되어 있어도 며칠을 넘기기가 일쑤였고, 남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손길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했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데 어찌 남을 돌보랴. 이런 점에서 천마교와 무림맹 소속 무사들은 끝없는 인내로 자기보다는 남을 돌보는 일에 앞장서고 있으니 칭송 들을 만하지 않은가.
그러나 견딤도 잠시, 규율에 매여 있던 무사들이 제 살길을 도모하고자 조직을 이탈하는 사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라면 이 배고픔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남들보다는 더 오래 견딜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탈한 무사들은 도적이 되었다. 예전엔 동지였던 자들의 눈길을 피해 어둠을 헤매고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한솥밥을 먹도 동료의 칼에 죽임을 당하는 일도 벌어진다. 난 이 시점에서 더 이상 방치하면 마계 유입이 있기 전에 세상은 끝장나리라는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무사들의 이탙까지는 막을 수 없어도 그들의 약탈만은 철저하게 경계했으며 강한 철퇴를 가했다.
이 도한 비극이었다. 아무도 미래를 장담하지 않는다. 천마는 내게 말하길, ‘차라리 지금 재난에 죽는 것이 복일 것이다’라고 했다. 난 동의하는 한편 반발하고 싶었다. 어찌 이렇게 생을 마감하는 것이 복일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삶을 시작하는 것이 제 의지에 의한 것은 아니라지만 마침을 이리 비참하게 한다면 세상에 왔다 가는 의미가 무엇이란 말인가.
천마교의 수뇌부들도 굶기는 마찬가지였다. 식량을 최대한 모아 보았지만 이틀에 주먹밥 하나 먹기도 힘들었다. 그나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해야 했다. 점차 모두가 지쳐 가고 있을 때 혹서는 끝이 났지만 그 경계에 서 있는 건 폭설과 한파였다. 이제 죽음만이 안식이라는 생각이 모두의 가슴을 무섭게 점령해 가고 있는 건 나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광동성과 복건성에 엄청난 대지진이 일어나 사망자와 실종자가 헤아릴 수 없다 합니다.”
옥기린이 내 방으로 뛰어들며 한 말이었다. 오, 하늘이시여. 이건 해도 너무합니다. 난 손짓으로 나가보라고 했을 뿐 아무 말도 않고 벌떡 일어선 그 자세에서 고개만 숙였다. 털썩 주저앉는 건 내 몸뿐만이 아니었다. 마음이 무너져 간다. 나도 견디기 힘이 들다. 내 몫으로 할당된 주먹밥은 환아와 설란에게 먹였다. 물론 나는 총단에서 많이 먹었다는 거짓말을 보태며.
아직 제 힘으로 무엇을 먹지 못하는 화아를 위해서도 설란은 배불리 먹여야 했지만 그럴 만큼 식량이 남아돌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허기에 지쳐 힘이 빠지면,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면 산으로 올라간다. 그리고는 사냥을 해서 돌아온다. 물론 산중에서 홀로 먹지는 않는다. 운이 좋아 노루라도 잡는 날이면 우리 식구와 홀로 먹지는 않는다. 운이 좋아 노루라도 잡는 날이면 고기 맛을 보며 행복해 하는 것이다. 자연의 기를 이런 사냥에 이용하게 될 줄이야 예전에 어찌 알았겠는가.

이제는 정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가족만 이끌고 훌쩍 산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가득하다. 율극과 광마존을 무사들과 함께 지진이 난 광동과 복건성에 파견했다. 난 그들을 떠나보내며 별다른 지시를 하지 않았다. 그냥 보고 도울 여력이 있거든 돕되 무리하지는 말라는 말을 덧붙였다.
살신성인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제 목숨을 연명하기만도 벅찬데 어찌 남까지 돌아볼 여유가 있으랴. 난 그들에게 그런 걸 요구할 어떤 자격도 가지지 않았다. 지금 처지로는 그곳까지 가는 것만 해도 무리한 결행인 셈이었다.
난 옥기린이 내 처소를 찾는 게 두렵다. 또 어떤 좋지 않은 소식을 들고 올까 봐서였다.
“지존, 큰일 났습니다.”
이번엔 또 뭔가? 땅이 갈라졌으니 하늘이 무너졌는가?
“광동과 복건에…..”
“또 지진이란 말이냐?”
“해일입니다. 해안선을 따라 백 리 이내가 물에 잠겼다 합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간다. 순간, 광마존과 율극 등이 생각났다.
“광마존과 율극은…….그들은 어찌 되었다더냐?”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연락을 취해 놓았지만 아직 답신이 없습니다.”
콰당
“파천, 들었느냐? 광동과 복건에….”
천마는 들어서며 외치다 옥기린이 서 있는 걸 발견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허, 어찌 이런 재난이 연거푸 겹친단 말이냐. 도무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야 멈추려는지……”
이젠 확실해졌다. 그래, 죽음이 빠를수록 복된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하겠는가. 그걸 다 겪고 고통을 당하다 죽을 바엔, 그런 중에도 아득바득 살아남아 마수들의 재물이 될바엔 그래, 차라리 잘 된 것이야.
순간 내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번뜩 스친다.
“그래. 바다다. 물고기를 잡으면 된다.”
급작스런 내 외침에 천마와 옥기린이 반색을 하는가 했더니 금세 얼굴이 어두워졌다. 바다는 아무런 피해가 없다. 무진장의 보고이다. 그런데 왜 저러지?
“언제 또다시 해일이 덮칠지 모르는데 누가 바다로 나가려 하겠느냐? 집채만한 파도가 넘실대는데 누가?”
그것 때문이었나? 그렇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리느니 한번 해보자.”
며칠 뒤, 광마존과 율극이 무사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소식을 접수하자마자 난 천마교와 무림맹의 일급고수들만 추렸다. 그리고 수공에 능한 자들은 무조건 차출했다.
해일의 피해를 입지 않은 강북의 해안 쪽으로, 나와 천마를 비롯한 이만 명이 결연한 표정으로 섰다. 물에 뜰 수 있는 건 나무 조각이라도 다 동원했다. 넓고 푸른 바다를 향해 우리는 과감히 생명을 던졌다.
무사들이 언제 생선을 봤겠는가. 그렇지만 그들은 금세 익숙해져 갔다. 그물과 작살을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건 모조리 건져 올렸다. 그리고는 육지로 나가지 않고 곧장 금응을 동원해 내륙으로 이동시켰다. 그 녀석은 거대한 그물에 쌓인 엄청난 양을 발로 움켜쥐고 어렵지 않게 생선들을 날랐다.
나와 천마는 좀더 멀리 나가 고래나 상어를 잡았다. 한 가닥 희망이 생긴 탓인지 우리는 힘든 줄 모르고 쉼 없이 바다를 누볐다. 살갗이 터질 듯한 추위에도 시야를 가지는 폭설에도 고기잡이는 멈추지 않는다. 양이 적든 많든 개의치 않았고 우리의 이 노동력이야말로 사람들을 살리 수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부들도 총동원되었다. 그들은 익숙한 솜씨로 배를 몰며 고기잡이를 진두 지휘했는데 그 바람에 어획량은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잡아들인 생선들을 분류해 전 중원의 내륙으로 골고루 보내기 시작했다. 이 일은 주로 나머지 천마교와 무림맹 고수들과 상인들, 관리들과 군졸들 할 것 없이 모조리 동원되었으니, 살기 위재 전 중원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셈이었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오히려 추운 날씨 덕분에 원거리 이동이 용이해진 셈이다. 만약 날씨가 더웠다면 얼마 운반하지도 못하고 썩어 문드러졌을 것이었다.
천마는 마신갑을 이용해 바다 속을 오가며 물고기들을 잡았고, 난기를 운용해 무더기로 하늘로 띄워 올렸다. 이런 식으로 몇 번 하자 우리가 타고 왔던 큰 범선이 가득 차 버리는 것이다. 난 내 할 일을 하며 틈틈이 금웅을 부려야만 했다. 여기저기 만선을 알리는 깃발이 나부끼면 난 금웅을 타고 녀석의 발에 그물을 건다. 그리고는 내륙으로 향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런 노력 덕분에 굶어 죽는 사람들이 줄어 갔다. 그렇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우리는 당분간 어부로 살 결심을 하고 있었다. 새해가 되어 땅이 녹으면 우리는 다시 씨앗을 뿌릴 것이다. 그리고 풍성한 결실을 거둘 것이다. 그때까지는 중원인들의 배고픔을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
사람들은 해안가로 몰려나와 환호성을 질러 주기도 하고 생선을 운반하는 무사들에게 격려의 말을 해주기도 했다. 난 금웅을 타고 하늘을 날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렬을 보며 흐뭇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도 길은 열린다. 두 발과 가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파도가 심한 날은 무사들만 바다로 나갔고 비교적 잔잔해지면 어부들도 합류한다. 이러기를 한 달여. 우리가 쉬지 않고 일한 덕분인지 중원의 현편이 나아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럼에도 우리는 중단할 수 없었다. 딱히 기대할 곳이 여기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모두 일손을 놓아야만 했다.
콰콰콰쾅
드드드드
머리가 터질 듯한 거대한 폭발음과 한동안 이어진 진동. 온 땅이 누가 뒤흔들어 놓은 듯 진동한 것이다.
“이, 이건 혹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몰아치던 눈발이 그친 건 우연일까?
“이상하다. 뭔가 불길해.”
나와 천마는 동시에 직감적으로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하고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내륙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직은 어찌 된 연유인지를 모르기에 무사들을 철수시키지는 않고 해안에 그대로 둔 채였다.
파도가 심한 날은 무사들만 바다로 나갔고 비교적 잔잔해지면 어
부들도 합류한다. 이러기를 한 달여. 우리가 쉬지 않고 일한 덕분인
지 중원의 형편이 나아졌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럼에도 우리는 중
단할 수 없었다. 딱히 기대할 곳이 여기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모두 일손을 놓아야만 했다.
콰콰콰쾅
드드드드
머리가 터질 듯한 거대한 폭발음과 한동안 이어진 진동, 온땅이
누가 뒤흔들어 놓은 듯 진동한 것이다.
“이,이건 혹시…….”
나와 천마는 동시에 직감적으로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하고서는
하던 일을 멈추고 내륙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지긍ㄴ 어찌 된 연유인
지를 모르기에 무사들을 철수시키지는 않고 해안에 그대로 둔 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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