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08화 : 선계의 선택과 어떤 약속
선계의 선택과 어떤 약속
드디어 개봉의 괴목도 고사했다. 사라졌다. 먼지처럼 흩어져 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은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자고 했다. 난 망설여졌다. 어디까지 갈 것인가? 결국 그들의 소굴로, 제 발로 들어가는 꼴리지 않겠는가? 나 혼자라면 그냥 여기 있어도 무방했다.
결국 우리는 서쪽을 향해 걸었다. 다른 지역에서 이동해 가던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과정을 밟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전에 나와 천마가 석옥에 들어가 버린 뒤에 그 자가 결정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말이 있었다.
‘직접 보고 체험하고 나서 결정해도 늦지 않다.’
인간들은 자기가 지닌 신념이 옳은 것인가를 놓고 많은 갈등을 하는 존재다. 특히 확신이 부족하고 의심이 갈 경우엔 더 그러하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많은 정보를 조사하고 수집하고 분석해 신중한 결정을 내리길 원한다.
마계를 향해 떠난 사람들 중 상당수가 결정을 유보한 사람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더 이상 제 의지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걸었다. 황송하게도 인간들을 위해 마황께서 베풀어 주신 과실을 찾아 이 주린 배를 채우고자 이동해 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신체는 이처럼 연약하다. 배고픔과 추위와 더위에 노출되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굴복하고 만다. 문명의 발전은 이 신체의 약함을 극복해 가는 과정처럼 여겨진다.
불규칙적인 대오를 갖추고 걸어가고 있자니 드디어 살아 있는 괴목이 눈에 띠였다.
잠시 그곳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또다시 괴목이 부서져 갔다. 사람들은 이제 나와 천마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무작정 걸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무림인들은 날 바라보고 있다. ‘가자’라는 내 말을 그들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들이 듣기 원하는 걸 들려주었다. 나와 천마네 식구는 이 순간에도 끈질기게 생선만을 먹었다. 율극이 관리하던 냉동 창고 안에 있던 생선을, 괴목의 잎을 엮어 만든 사람보다 더 큰 보자기에 넣어왔다. 이걸 짊어지고 있는 건 역시 율극이다. 일곱 사람의 식사였다. 광마존 등도 마과를 먹기 시작한 지는 오래 되었다.
“모두 멈춰라.”
내 외침은 저 멀리 선두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컸다.
나는 훌쩍 몸을 날려 계속 전진해 가고 있는 무리들의 최선두를 가로 막았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뒤로 물러서라고 했다. 거부하고자 하는 눈빛이었다. 순간 난 이들로 하여금 이리 조급하게 만드는 게 마과 때문이란 사실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몇 시진 먹지 않았다고 해서 벌써 이런 반응이란 말인가? 두 눈에 초조함과 갈증이 가득했다.
“뒤로 가시오. 적이 출현한 것 같소. 죽고 싶다면 그대로 있어도 좋소.”
무림인들-태반이 천마교 무사들이다. -을 앞쪽으로 세워 진형을 갖추게 하고 일반인들은 뒤로 물렀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으려니 저 멀리서 먼지가 날리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말발굽 소리 같기도 했다. 대지를 일정한 박자감으로 두드리는 소리는 심장의 고동과 맥을 함께 하며 뛰었다. 점차 시야에 뚜렷이 잡히기 시작한 상대의 정체는 역시나 마수들이었다.
그것도 수십, 수백 마리가 아닌 수만이 넘을 듯한 어마어마한 무리였다. 나는 잠시 긴장감을 잊으려 깊은 심호흡을 했다. 우리와 그들 사이의 간격은 백여장 정도였는데 그것들은 더 이상 움직일 생각은 없는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있다.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멀리서도 난 그놈들의 눈에 가득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그 순하던 초식마수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적의를 한껏 드러낸 그들의 선두엔 육식마물들이 그 거대한 몸체를 과시하며 떡 버티고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질릴 것이었다.
“저 놈들이 왜 보고만 있지? 공격하려고 온 게 아닌가? 차라리 우리 쪽에서 선공을 취할까?”
그것도 괜찮을 생각일 것 같았다. 그렇지만 뒤에 남겨둔 일반인들과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도 큰일이다. 하늘을 나는 헤르곤 같은 놈들이 우리 후방을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속수무책이지 않겠는가? 그 대열엔 설란을 비롯한 식구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엔 적루아가 있어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기도 했지만 가족의 안위는 여전히 내게 불한 요소로 남아 있다.
선두에 선 육식마물들의 수는 쉰 마리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들이 지닌 힘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오늘 악전고투를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네 종의 육식마물들이 보였는데 그 첫째가 몰스라는 놈이었다. 황소같이 생긴 머리에 뿔 달린 투구를 쓰고 전신에 묵직한 검은색 갑옷을 걸쳤다. 팔이 네 개나 되었는데 각 손에는 양쪽에 모두 날이 있는 긴 창을 들고 있다.
신장이 거의 십여 장에 달해 j대한 탑을 보는 듯했다. 그놈은 거대한 발을 땅에 딛고 우뚝 서 있는데 세 마리가 이곳에 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쪽으로 에놈이라고 하는 마수가 열 마리, 라그란다가 가장 많은 스물다섯, 공중엔 전에 보았던 헤르곤이 열 두 마리였다.
그 중에 신장이 가장 크다 할 수 있는 놈은 에놈일 성 싶었다. 거대한 뱀이었다. 대가리를 꼿꼿이 세우고, 내 전신보다도 더 크지 싶을 두 눈에서는 붉은 광채가 스며 나온다. 그러나 이놈들의 무서운 점은 저 큰 몸집이 사실은 작은 실뱀의 연합체라는 점이다. 언제든 분리되고 다시 하나가 되는. 그 엄청난 수를 생각하자니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라그란다는 육식마수들 중 가장 작다. 사람 정도의 키에 얼굴도 어찌 보면 예쁘장하게 생겼다. 머리엔 머리칼이 없고, 위쪽이 뽈록 튀어나와 있어 계란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라그란다의 주공격이 뭐라 했지?”
난 전에 들었던 걸 잊어먹고 이렇게 천마에게 물었다.
“화염.”
간단하게 대답하는 천마도 어지간히 긴장하고 있는 기색이다.
“아 참, 그랬지. 전신이 화염에 휩싸인다고 했던가? 그래도 저놈이 제일 사람같이 생겼군.”
육식마수들 중 사람과 가장 흡사한 건 여기에 오지 않았지만 기실차반이라는 놈이었다. 한 때 천마가 군주로 있었다는 그 주인공들이었다.
이 외에도 마수들의 왕이라 불리는 쿤다리와 거대한 수룡을 방불케 하는 바알이 더 있다. 이 7대 마수들은 메타트론의 권능으로 지어진 것들로, 사람보다 월등히 강하고 일반 마인들인 마라보다 강하다. 때로 몇 놈은 하급마신보다 강하기도 하다.
내 관심을 가장 끄는 건 역시 쿤다리라는 놈이다. 단지 아홉 마리가 있을 뿐인데 형체는 용이다. 그렇지만 머리가 세 개고 뿔이 세 개, 눈이 세 개며, 얼굴이 사람의 얼굴이라는 점이 조금 다르다.
날개가 없지만 하늘을 날 수 있으며, 갖가지 술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변신에 능하며 사람으로도 화신할 수 있는데 이때는 코가 없다고 했다. 모든 마수들을 다스리는 존재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상당히 지혜롭고 언변에 뛰어나다.
그놈들 중 한 놈은 메타트론에게 직접 전수 받았다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 쿤다리 중에서도 대장 노릇을 한다고 했다. 한번도 사용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눈앞에 있는 육식마수들 중 만만한 놈은 하나도 없다. 물론 일반 무림인들을 기분으로 했을 때이다. 냉정하게 짚어보면 저놈들 하나를 당해낼 고수가 우리 중에 몇 명이나 될지 의구심이 들었다. 나는 이미 놈들이 나타났을 때 몇 명에게 전음을 보내어 지시를 내려 두었다. 조직적으로 상대하지 않고 우왕자왕하게 되면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엄청난 낭패를 당할지도 모른다.
“저놈들 너무 시간을 끄는데.”
“뭔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혹시…….”
“짚이는 거라도 있어?”
“쿤다리를 기다리는 건가?”
“그 놈이 올지도 모른다……이거지?”
“아닐 거다. 쿤다리는 그리 쉽게 모습을 보이는 놈이 아니다. 그리고 그놈들은 항상 대마신이나 마황을 태우고 다니고, 그럴 때가 아니면 홀로 어딜 잘 다니지도 않는다. 그놈들은 마계의 궁전 위 하늘을 떠돌고 있을 거다.”
한 번 보고 싶었다. 용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한번도 본적 없는 나로서는 호기심이 먼저 앞섰다. 물론 쿤다리가 진짜 용은 아니다. 용의 형상을 조금 닮았을 뿐이다. 진짜 용을 보려면 마계 궁전으로 가면된다. 타락한 천사들. 그들이 실제의 용이라고 그러지 않던가?
그렇지만 그건 호기심 이전에 생존과 직결되기에 참기로 했다.
제일 가운데 있는 몰스라는 놈이 입을 열어 말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 같이 엄청났다.
“잠시만 기다려라. 나도 네 놈들을 속히 죽여 버리고 싶지만……간신히 날 자제하고 있다. 흐흐, 인간의 육질이 보기와는 달리 맛이 없다고 하더군. 그래서 나 또한 입에 댈 생각은 없다. 그저 피를 즐기고 싶을 따름이다.”
놈은 그렇게 제 마음껏 지껄이고는 고개를 쳐들고 마음껏 웃었다.
“야, 소대가리. 금방 후회할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것 아니냐? 무식하게 생긴 놈이 그 생각도 무식하군. 여기 네 놈 식사거리 제공해 주러 오신 분들이라도 있단 말이냐. 잠시 뒤 내가 네 놈의 미어소리만 요란한 머리통을 몸통에서 떼주마. 오늘은 소머리로 포식하겠군.”
그놈의 얼굴은 멀리서도 표정이 분명히 보일 정도로 컸는데 잠??? 일그러지는 것 같더니 다시 웃기 시작했다.
“네가 파천이란 인간이구나. 얘기는 많이 들었다. 인간치고는 강하다고. 네 놈의 그 용기만은 가상히 여겨주지. 우리 마계의 인간계 정벌에 네 따위가 걸림돌이 된다면 너무 한심한 일이지. 가장 처참한 고통을 주겠다.”
“죽일 자신은 없는가 보군. 하긴 네 놈처럼 덩치만 큰 놈이 무슨 재주로 날 죽이겠냐마는 그래도 제 주제는 알고 있는 듯하니 그 큰 대가리 속엔 뭔가가 들긴 들었나 보구나.”
“우우우우.”
입을 모으고 그렇게 소리를 낸다. 무슨 감정인가를 표현하는 것 같은데……. 아마도 분노일 가능성이 많다. 그도 아니면 제 머리 생긴 모양대로 소의 울음소리는 흉내 내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가 한동안 대기를 진동했다.
정말 소리하나는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크군.
이때 헤르곤 한 마리가 몰스의 근처로 좀 더 가까이 날아갔다.
“먼저 마왕님의 뜻을 다시 한번 저들 인간에게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놈이 날 가르치려드느냐!”
열 받은 몰스가 헤르곤에게 고함을 지르자 겁먹은 헤르곤은 멀리 떨어진다. 이것만 봐도 두 마수간에 분명한 계급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놈은 헤르곤보다 훨씬 단순한 놈이군.
몰스는 전체 마수들의 계급상 두 번째이고, 헤르곤은 네 번째다. 오늘 온 놈들 중에서는 헤르곤이 몰스의 다음인 셈이다. 헤르곤이 저러니 다른 놈들은 말을 꺼내기에 엄두도 나지 않을 것이다. 난 저놈을 더 골려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저들이 기다리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마황이 전언하라고 한 것이 뭔지 모르지만 빨리 얘기하고 슬슬 시작해보자. 네 대가리를 보고 있자니 식욕이 동해 못 참겠다.”
쾅
몰스가 들고 있던 네 개의 창 중 두개가 바닥을 파고들었다. 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창으로 바닥을 내리쳤으면 땅속으로 쑥 들어가야 정상이건만 움푹패이며 구덩이를 만들었다. 물론 사람이 보기엔 구덩이였으나 놈의 신장으로 볼 때는 약간의 흠집이 났을 뿐이다.
“야, 박쥐! 네가 대신 마황님의 뜻을 저들 버러지 같은 인간들에게 말해라.”
헤르곤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박쥐의 날개를 지니고 있어서 그렇게 부른 듯 했지만 난 순간 한가지의 의문이 들었다. 마계에도 박쥐가 있나? 아니면 저놈이 인간계에 대해 잘 아는 건가?
주춤거리며 몰스 앞으로 나선 헤르곤 한 마리가 입을 열서 신중하게 말했다.
“간단하게 말하겠소. 마지막 기회를 여러분들에게 주고자 합니다. 보다시피 여러분들이 식량으로 삼아왔던 과실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과실을 찾아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점차 그 지역은 좁아질 것이고 결국 우리 마계의 성스러운 땅을 제외하고는 그 어디에서도 과실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들에게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눈으로 보고 체험한 뒤 무엇이 진실인가를 가려보길 권합니다. 이유 없고 목적 없는 옹고집으로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헛된 것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자, 길은 열려 있습니다. 강을 따라 마계로 가실 분들은 이 대열에서 이탈해 한쪽으로 걸어가시면 됩니다. 그렇지만 끝까지 거부하실 분들은 이 자리에 남아 계십시오. 처참한 죽음과 고통이 여러분을 환대할 것입니다.“
“다 한거냐?”
“네.”
헤르곤은 대답하고 부리나케 뒤로 물러선다. 몰스가 창끝으로 땅을 찍으며 다시 말한다.
“선택을 해라. 죽을 거냐, 살 거냐? 지금 선택 하면 마계의 신민으로 인정받지만 차후에는 살아도 노예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어찌하겠느냐? 어차피 과실은 거부하는 자들을 위해 있는게 아니다.”
“그 말을 하고자 지금껏 그리 뜸을 들이고 있었어? 자, 그럼 얘기는 끝났으니 시작해 보자구.”
나는 말을 하는 중에도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내 예상대로 대열에서 이탈하는 자는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죽음을 각오한 자들. 그런 걸로 마음을 바꾸게 하기엔 어림도 없었다. 이런 요지부동의 태도를 확인했음에도 아직 그들은 공격할 기미가 엿보이지 않는다.
이건 또 무슨 이유란 말인가?
“천마, 그냥 우리가 먼저 공격하자.”
“그러지.”
“호호호호.”
요사스런 웃음소리가 들렸다. 괴목이 사라지며 마무마저 사라져 하늘은 그대로 눈에 보였는데, 여전히 태양이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단지 좀더 밝아졌을 따름이다. 그 하늘 어림에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우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먹구름인가? 아니었다. 바로 내가 보길 원했던 마수들의 왕, 쿤타리였다. 검은 흑룡. 그 크기는 멀어 가늠하기 힘이 들었지만 최소 30장은 넘을 듯 했다. 세 개의 머리중 하나의 머리위에 한 사람이 우뚝 서 있다. 점차 가까이 다가오자 모습이 확연하게 구분된다. 진정 남 감탄했다.
“멋있군.”
내 첫마디가 이랬다.
“저놈이 여길 온건 좀 의외인걸. 그리고 저 여인은 누구 길래 저 놈을 타고 있단 말인가?”
마수들의 제왕 쿤다리를 타고 있는 여인.
오색으로 빛나는 머릿결은 바람에 나부끼며 뒤쪽으로 흐르는데 가는 목이 시리게 하얗다. 보라색 눈동자가 있는 걸 난 처음 보았다. 그것도 아주 밝은 보라색. 그 여인은 쿤다리의 머리를 밟고서 우뚝 서 있었으며 허리에 한 손을 척 얹고 있다. 몸을 감싼 건 이름조차 모를 온갖 보석이었다. 수십 종류의 보석을 촘촘히 엮어 전신을 장식했는데 그 휘황한 빛에 몸매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다.
“보석을 어지간히 좋아하는 여자군. 머리에조차 보석이 줄줄이야. 저 정도면 떼고 달기가 번거로울 텐데. 무게도 만만찮을 거고 말야. 저 여자 누구냐?”
“나도 모른다. 처음 본다.”
쿤다리는 우리와 마수들 사이, 정확하게 중간쯤 위치에 와서 멈췄다. 가까이서 보니 30장이 아니라 40여장은 될 것 같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어 요사스런 느낌이 들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전신을 덮고 있는 비늘에서 반사광이 번쩍거린다.
“저놈 멋져. 생각보다 훨씬.”
“그렇지, 메타트론의 최고 걸작이지.”
우리가 주고받은 말을 그놈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쿤다리의 머리 위에 서 있던 여인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릿결을 빗질하듯 훑어 내리는 걸 난 무덤덤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마수들은 저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싶다.
단지 아홉 마리 뿐이라는 쿤다리를 타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마계에서 최소한 대마신과 동급의 위치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난 긴장했다.
“그대 인간들이여, 무엇을 보고 있나요? 왜 그대들은 가장 소중한 것이 무언지 모르는 거죠?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건 생명 아니었던가요? 대항한다 해서 이길 수 있다면, 그 정도의 강자라면 그것도 현명한 결정이겠지만……. 쓸데없는 짓이죠. 마음을 돌이키세요.
손에 잡고 있는 걸 놓는 순간 그대들은 놀랄만한 걸 얻게 될 거라고 난 확신해요.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쾌락과 싱싱한 젊음을 마음껏 누리고 싶지 않은가요?“
“마계가 이제 보니 좀 유치하고 치졸한 구석이 있군. 이제는 요사스런 계집까지 동원하는가?”
그 여인의 눈길이 내게 멎었다. 순간 난 가슴속이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그대가 바로 파천? 들었어요. 드디어 오늘 보게 되는군요. 그대는 최후에 죽을 거니 너무 보채지 말아요.”
그 말을 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옆에 있는 천마도 잠시 혼이 빠진 듯한 표정이다. 나 또한 잠시 아찔했다는 건 부정하고 싶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향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살아 약동하는 아름다움이 아닌 조형된 미와도 같았다.
그보다 나는 그녀가 암시하듯 뱉은 말의 내용에 집중했다. 최후에 죽을 거라니? 이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계획을 짜 놓은 건가? 도무지 그 속들을 알 수가 없다.
“아무도 내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군요. 그렇겠지요. 그대들의 신념에 경의를 표하며 전 이만 사라져야겠어요. 행운을 빌어요. 찬란한 죽음에 입 맞추는 그대들을 위해, 쪽.”
손바닥에 입을 맞추는 그녀를 난 잡아두고 싶었다. 아니 포로로 삼고 싶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이게 가능하기나 한 생각인지 따져 볼 겨를은 없었다.
휘익
난 뛰어 올랐다. 오행신주로 가두리라.
스스스스
한 사람과 한 마리의 모습이 사라져 간다. 안 돼!
스팟
완전히 사라졌다. 자취를 감춘 것이다. 그 어디에서도 좀 전의 기를 느낄수 없었다. 그 때 천마가 내게 말했다.
“소용없는 짓이다. 지금쯤 마계의 궁전에 가 있을 거다.”
허망했다. 눈앞에서의 목표로 한 적을 놓쳐 보기는 처음이다. 그것도 옷깃 한번 스쳐보지 못하고. 이건 너무 절망적이군. 어떻게 한거지?
“마계의 영광을 위하여 저 어리석은 자들을 제물로 삼아라.”
몰스의 입에서 그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 신호였다. 양측은 서로를 행해 맹렬하게 돌진해 갔다. 난 잠시 산란했던 정신을 수습하고 좀 전에 소리친 소대가리를 향해 돌진했다. 이놈, 넌 죽었어. 다른 두 놈은 천마와 광마존이 처치해 줄거다. 이놈을 처치하는 시간이 짧아질수록 우리 측의 희생이 줄어든다.
“크크크크, 그렇지 않아도 네 놈은 내 차지였어. 파천이라는 애송이 얼마나 강한지 한번 보자. 감히 인간 따위가.”
그는 그렇게 이죽거리며 네 새의 손에 쥐어진 네 개의 장창을 맹렬히 회전시켰다.
쾨아아아
바람이 몰아쳤다. 그 안에서 번쩍거리는 건 심광이다. 그의 주변에 있던 마수들과 무사들까지 산지사방으로 날아간다. 대단한 압력이었다. 단지 창을 회전시키는데 이 전도의 위력이라니. 그의 십여 장 이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난 진기를 돋우며 더욱 가속했으며 그가 서 있는 빈 자리의 한 지점에 떨어져 내렸다.
“인간 따위에게 죽음을 맛보는 것도 특별할 거다.”
난 그 소리를 땅을 박차고 토했다. 내 손에는 천마검이 들려졌다. 하늘을 가를 듯이 상단으로 힘껏 치켜 올랐다가 땅을 향해 내리그었다. 놈의 힘을 알아보기 위해서 일종의 탐색전을 펼치고자 함이었다. 내 천마검의 끝에서 거대한 빛줄기가 뻗어 나와 놈의 머리끝에서 발끝을 향해 양단해 갔다. “이까짓 걸로 날 시험하려 들지 마라.”
그놈의 팔에 들린 창의 소용돌이와 내가 쏘아낸 검강이 하나로 어울렸다.
파츠츠층
기이한 소음이 났다. 폭발음이 아닌 서로 다른 성질이 하나로 합쳐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소리 같았다.
“이놈!”
콰아아아
놈은 손 안에 있던 창 하나를 휙 던졌다. 자기 몸보다 긴 창이었기에 그 길이만도 십장이 넘는 창을 날 향해 던진 것이다. 피하면 큰일 난다. 뒤에 있는 무리들은 바위에 깔려 터진 개구리 꼴이 되기 쉬웠다.
창의 주위로 새파란 불꽃이 보이는 걸로 봐서는 그리 만만하게 볼 수는 없는 힘이리라 짐작했다. 난 일단 안전을 위해 마신갑을 피부 위로 출현시켰다. 옷이 부서져 날린다. 이 소대가리 놈, 이 세상에 단 두벌뿐인 옷이거늘. 아니군, 장삼봉 진인도 옷을 입고 있었구나. 왜 이런 긴박한 때에 엉뚱한 생각이 드는지 이해할 수 없다. 두 팔을 벌렸다가 앞으로 모으며 기의 막을 펼쳤다. 자연의 기가 수심 겹으로 쌓여 수비막을 펼친다.
쐐액
쾅
츠츠츠츠
최초의 부딪힘으로 일어난 폭발음 이후에도 창은 회전하여 맹렬히 파고든다. 난 앞발에 온 힘을 모았다.
쾨아아아
놈이 또 하나의 창을 더 던지는 게 보였다. 이놈 힘이 보통이 아닌데. 더군다나 회전은 멈추지 않는다. 힘을 알아 볼 요량으로 시작한 것이 괜히 후회가 된다. 이젠 빼도 박도 못하게 되어 피할 수도 없다.
기의 막이 파괴되면 또다시 새롭게 형성되며 창의 회전력을 감소 시켰다.
그러나…….
쾅
주르르륵
나는 견디지 못하고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
“하하, 인간의 힘이 그 정도에 미친다니 상당히 의외야.”
마치 제가 다 이겨 놓은 걸 즐기고 있다는 듯한 태도다. 역겨운 놈. 이 상태로는 내가 불리하다. 빨리 이 위기를 벗어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놈, 이건 어떠냐?”
시전한 놈과는 상관없이 창 두개는 저 혼자 생명이라도 있는 양 내 기막에 붙어서 회전하고 있었다.
놈의 비어있는 두 팔이 하늘을 향하더니 두 손을 하나로 합쳤다.
파파팟
정전기가 일어나며 회전하고 있는 창의 끄트머리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섬광이 내리 꽂혔다.
“으윽.”
난 순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뻣뻣해지는 충격을 느꼈다. 할 수 없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하앗.”
나는 기막을 순간적으로 풀었다. 순간 봇물이 처지듯 쏜살같이 다가오는 두 창을 디로 인도해 갔다. 쉽지 않은 일이다. 까딱 실수하는 날엔 나도 부상을 면치 못하지만, 뒤에 있는 무사들이 더 위험했다.
핑그르르
나는 공중에 뜬 채로 두 손으로 창의 힘을 받아내며 앞으로 고꾸라져 한 바퀴 휙 돌아 하늘을 향해 창의 방향을 바꾸려 시도했다.
“으라차차.”
창이 전진하려는 힘과 공중으로 끌어올리려는 내 힘이 찰나적인 순간 맞선다. 난 내가 낼 수 있는 전력을 창에 쏟았다.
콰아아아
두 팔과 어깨까지 찌릿찌릿했다. 그렇지만 다행이 창이 뒤쪽의 무리들에게로 날아가는 것만은 막을 수 있었다. 순간 공간을 이동해 놈의 후면으로 돌아갔다. 약점을 안고 싸울 이유는 없는 것이다. 조금 전의 위치를 고집한다면 지금처럼 난 공격하는 모든 걸 막아내야 했다. 이걸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어느 새 두 개의 창은 그의 손 안에 얌전히 쥐어져 있었다. 놈은 창의 끝을 발로 툭툭 파며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대단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니 너무 의기양양해 할 필요는 없어. 그쪽으로 돌아간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 말이다.“
소대가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게 천천히 다가섰다. 한 발을 떼어도 5장이나 성큼 다가와 있으니, 이놈이 달리면 어느 정도일까? 아마도 땅이 쿵쾅거리며 진동을 하지 않을까? 그놈은 두 팔을 쫙 뻗고 창 두개를 서로 교차해 앞을 막고 두 팔은 하늘로 올려 창을 휘돌린다. 또다시 예의 그 지독하게 강한 바람이 휘몰아쳐 온다.
그렇지만 내게는 그다지 크다 할 수 없는 압력이었다. 놈의 두개의 회전하던 창이 공중을 향해 떠올랐다. 빈손으로 또다시 섬광을 일으키는 짓을 한다. 난 놈의 공격이 뻔히 예상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빛이 번쩍하더니 그의 손에서 시작된 정전기가 공중에서 회전하던 창에 가 머물고 그것은 이내 하늘 끝까지 오르기라도 하려는 듯 공중으로 무섭게 치솟아 올랐다. 그리고는 교차하고 있던 몸 앞의 두 창을 내 쪽으로 향했다. 나머지 두 개의 빈손은 뭐하고 있었느냐고? 그냥 주먹을 불끈 쥐고 가만있다.
“이걸 받아봐라.”
난 공중으로 올라간 창이 아직도 내려오지 않고 있자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막 신형을 흩으며 옆으로 빠르게 움직여 가는데 놈의 두 팔에 쥐어져 있던 창이 수십 개로 분열하는 듯한 환상을 일으키며 내 전신을 압박해 왔다.
마수라 해서 단순히 물어뜯고 할퀴고 독을 내뿜는 정도라고만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이놈이 지금 날 공격하는 기술들은 하나같이 무공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체계가 있었다. 그것도 극상승의 무공을 말이다. 나는 신형을 이리 저리 움직여 그의 창이 가두고 있는 공격 범위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나는 공중으로 향했던 창이 땅을 향해, 더 정확히는 나를 향해 내려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또 다시 놈의 창이 변화를 보인다. 두 개의 창 중 하나를 두 팔로 잡고 땅에 힘차게 꽂는 것이었다. 뭐 하는 거지? 그 행동만으로는 무슨 의도를 지녔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공중에서 회전하며 내려오고 있는, 그래서 륜처럼 보이는 번쩍거리는 창의 움직임에 더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
콰콰콰콰
워낙에 큰 소리가 났던 탓인지 상당히 많은 자들이 이곳을 언뜻 쳐다본다. 난 대전 중에서도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자, 오너라.”
근데 이상했다.
“땅 밑이…….”
푸악
빌어먹을, 아까 창을 꽂았던 게 이거였나? 그런데 이리 늦게 서야 반응이 온 거야?
신경을 공중에서 하강하고 있는 창에 쏟고 있다가 졸지에 한방 먹고 말았다. 바닥에서 치솟아 오른 강기에 휩쓸려 올랐다.
체중심을 잡지 못하고 허공에 떠 오른 나를 목표로 두 개의 창이 더 이상 빠를 수 없는 속도로 다가왔다. 저기에 격중 당하면 아무리 마신갑을 걸쳤다고 해도 내부는 멀쩡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피해야 한다.
스스스스
내 몸이 연기처럼 변하는 모습을 녀석은 약간 놀란 눈으로 쳐다보다가 나머지 창 하나를 휙하고 던졌다.
패액
소리만 요란했을 뿐 나를 맞추지는 못했다. 그리고 두 개의 회전하는 창은 여전히 속도를 죽이지 않고 비어 있는 공간을 지나쳤다가 다시 선회해 온다. 나는 허공중에 몸을 똑바로 세우고는 놈을 향해 씨익 웃어 주었다.
그때 그놈이 또 하나의 창으로 애꿎은 땅을 쑤시는 게 눈에 잡혔다.
“이게 네 밑천의 전부인 것 같으니 이쯤에서 끝장을 볼까.”
내 손은 이후 빠르게 허공을 누빈다. 자연의 기를 이용한 강기의 중대와 더욱 다양한 변화. 이 두 가지 장점이면 놈을 충분히 혼란케 할 것이다. 벼락을 본 적이 있는가. 이제 네 놈들이 하찮게 여기는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지는 벼락이다.
꽈르르릉
허공 한 지점에서 몰스를 향해 쏟아져 내린 건 분명히 벼락이었다.
놈은 몇 번은 피했으나 전부를 피할 수는 없었는지 몇 방 얻어맞고는 풀썩 쓰러졌다.
그렇지만 역시 생긴 것 답게 체력하나는 자신이 있는 듯 했다. 벌떡 일어선 놈은 두개의 창을 손에 꽉 움켜쥐고 날 향해 달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우리 거리는 기껏 70여 장. 놈에게는 지척인 셈이다. 뛰는 걸음이라면 열 번만 내딛으면 도착한다. 나는 허공으로 빠르게 치솟아 갔다. 내 뒤를 그 귀찮은 두 개의 회전창이 따라오고 있다.
별 위력도 없는 것이 끈질기긴 하군. 몰스, 이놈은 하늘을 날아오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냥 공중으로 펄쩍 뛰어 올랐는데 하마터면 그놈의 손에 잡힐 뻔했다. 맙소사.
크게 원을 그리면서 선회하자 두 개의 창은 내 옆을 스쳐 지나며 지나온 길을 따라 선회했다. 이건 내 기운을 따라 직격하는 것이 아니라 날 다라 다니는 귀찮은 강아지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 번 더 시험해 보기로 했다. 괜히 안심하고 있다 또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두 개의 창이 다가오자 난 위로 휙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똑같이 따라 온다. 어쨌든 뒤에 꼬리표를 하나 단 셈이다.
난 놈을 향해 빠르게 쏘아져 갔다. 놈은 두 눈을 부라리고는 창 두개를 눈앞이 핑핑 돌 정도로 빠르게 돌리고 섰다. 수비를 하겠다는건지 또 나를 향해 던지겠다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이놈, 이제 내 차례라고 말했을 텐데.”
이건 어떠냐. 나는 좀 치사한 방법이지만 놈이 서 있는 땅바닥을 향해 기운을 운용했다.
퍼퍼퍽
땅이 뒤집히며 굵직한 바윗돌-놈에게는 돌멩이 정도-이 놈의 하체 쪽을 치고 올라갔다. 분명 충격이 있었을 텐데도 놈에게서는 그 흔한 비명소리조차 없다. 그냥 비틀거렸을 뿐이다. 나는 놈의 머리 위 공중에 사뿐히 서서 놈을 내려다보다가 슬쩍 몸을 뒤집었다.
내 아래를 스쳐가는 창의 파공성을 들으며 놈의 반응을 기다렸다.
처척
놈의 손에 돌아간 창을 보며 내가 지금 뭔 짓을 하나 싶었다.
“너 자꾸 도망만 다닐 거냐?”
지금 나더러 치사하다고 하는 것 같았다. 창을 그 정도로 잘 다루는 놈이 경공술 하나 못 펼치는 제가 잘못이지 내가 잘못이란 말인가. 난 신경 딱 끊고 내 식대로 하기로 했다.
화르르륵
이번엔 화염 공격을 해보았다. 놈은 이번에도 슬쩍슬쩍 피하며 아슬아슬한 장면을 연출하더니, 결국 급기야 정통으로 한 방 얻어맞는다.
퍼억
화악
그 뜨거운 불길에 그을렸는데도 놈에게서는 기대하던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제 보니, 혹시…… 내 예상이 맞는 것 같다. 놈은 고통을 모르는 것이다. 난 손 안에 오행신주 하나를 급히 만들었다.
화악
빛이 확 퍼져 오르며 손 안에 가득 찬 오행신주를 놈을 향해 힘껏 던졌다. 이어 또 하나, 계속 던졌다. 거의 십여 개 정도는 던진 이후에야 멈췄다.
퍽퍽퍽퍽
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지 아니면 작아서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지 전신을 그대로 드러낸 채 얻어맞고 있었다.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서면서도 여전히…..비명성이 없다. 놈을 사람으로 생각한 내가 멍청한 건가? 그놈에게도 혈도가 있는지 모르지만 사혈에 해당하는 곳만 골라 던졌는데도 놈은 여전히 서 있다. 괴물 같은 놈. 아니 괴물! 이제 나도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놈을 이기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신속히 끝장내야 한다.
놈의 요구대로 바닥으로 내려갔다. 오행신주는 여전히 놈의 바닥 아래 소복이 쌓여 있다. 나는 은연중 오행기를 작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상태로 상대를 향해 말을 걸었다.
“네 놈은 아주 강하구나. 인정하지. 인간이라면 벌써 죽었어야 할 텐데…… 너의 그 무지막지한 신체의 단단함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크크, 이제야 그걸 알았느냐. 너희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겠지. 우리들은 너희들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 네가 대단하다는 것 인정하니까 잘난 척 그만해라. 그래서 아주 신기한 걸 보여 주려고 그런다.”
놈은 날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어떤 무기를 사용하고 어떤 공격을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직도 보여 줄게 남았나?”
“보여 준 게 뭐 있다고. 다 보여 주려면 몇 날도 더 걸릴 거 같아서….그래서 널 한 방에 보내기로 했다. 이해하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날 한 번에 어떻게 한다고?”
“넌 지금 내가 친 오행신주 안에 갇혔다. 이 안에서 난 거의 전능한 힘을 발휘하지. 넌 아쉽게도 안타깝게도 멍청하게도 내게 걸려든 거야. 넌 도망가지도 못하고 누가 널 도와 주지도 못한다. 지난 십 년간 내가 다듬고 보완한 걸 네게 일부나마 처음 써보게 된 걸 나 참 기쁘게 생각하고, 넌 영광으로 생각해라.”
아직 놈은 무슨 영문인지를 모르고 헤매고 있었다. 그 상태로 보내기엔 뭔가 찜찜한 감이 있어서 간략하나마 설명을 덧붙였더니 말도 안 된다는 듯 픽 웃으며 몸을 움직였다. 투명하지만 분명 놈과 나는 오행신주 안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턱
옆으로 걸어가다 가로막혀 더 이상 나가지 못한 몰스는 그제야 내가 한 말이 사실인 걸 실감한 듯했다. 빠른 속도로 돌아서며 날 매섭게 노려본다.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 네 놈에게는 기회가 없다. 네가 힘이 강해 이 오행신주마저 파괴시킬 능력이 있지 않고서는 네 죽음은 기정사실이며 불변의 진실이다.
난 마신갑을 걸친 상태이고 오행신주 안에 있기에 내 능력은 최고치로 극대화되어 있는 셈이었다. 놈과 박투를 벌인다 해도 자신이 있었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 것이다.
“이놈.”
놈이 창으로 오행신주의 벽면을 후려지는 게 보였다.
텅
놈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며 난 한마디만 더하기로 했다.
“소대가리 잘 가라.”
“용서할 수 없다.”
놈은 드디어 현실을 실감하고서는 내게 빠르게 다가왔다.
스스스슷
이 안에서 둔한 몰스의 몸 동작으로 날 잡기란 멀쩡한 하늘에서 동벼락이 쏟아지기를 바라는 것보다 기대하기 어렵다. 놈은 몇 번이나 허탕을 치고서도 창을 휘둘러 날 잡으려고 했다. 난 그 좁은 공간 안에서도 날렵하게 놈의 공격을 피하며 될 수 있는 한 많은 개수의 오행신주를 던졌다. 약이 오른 그놈은 머리르 움켜쥐더니 괴성을 질렀다.
“끄아아악.”
귀청이 터질 듯한 소리에 난 그만 끝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이만 가마. 잘 가라. 네가 영혼이 있다면 내세를 빌어 줄 테지만…..아쉽게도 넌 갈 데가 없겠구나, 그럼.”
휘이이잉
내리치는 창이 날 향하기도 전에 난 우리들을 가두고 있던 오행신주 밖으로 나갔다.
놈은 내가 사라진 것을 알고서는 벽을 있는 힘껏 공격하고 있었다. 네 개의 창은 연달아 오행신주의 벽을 치고 있었지만 놈의 그런 발악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네 놈의 힘으로는 무리인 것을. 난 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오행신주 안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오행신주를 터트릴 작정이다. 놈은 그 막대한 폭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이건 흔들림 없는 내 확신이었다.
파앗
오행신주 안에서 빛의 폭발이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난 너무도 눈이 부셔 고개를 언뜻 돌려 버렸다. 이 빛을 다른 사람들도 보았을 것이다. 난 잠시 뒤 오행신주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없다. 투구도 창도 그 강한 신체도 가루가 되어 흩어진 것이다. 그곳엔 빈 공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난 돌아섰다. 이제 한 놈 해치운 것이다. 내가 오행신주를 칠 수 있는 최고로 확장된 공간은 30여 장 정도다. 그 이상은 해보지 않았다. 이것으로 어느 정도까지 상대할 수 있을 것인가? 오행신주에 갇히고도 그 안에서 탈출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자를 만나는 순간 내 운명도 끝이 나는 것을.
천마가 싸우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별 무리 없이 비교적 여유 있게 상대하고 있었다. 대부분 마신갑의 효용을 고려한 공격들이었다. 깊이 파고들어 놈의 약점에 마신갑이 늘어나 생긴 두 개의 점을 쑤셔 박고는 재빨리 물러선다.
이런 식으로 그는 몰스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싸움에 대한 감각만으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다. 별다른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 시기에 가장 적절한 위치와 자세를 선점하고 적의 중심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여기저기 베인 상처가 갈수록 늘어나자 몰스의 동작도 현저히 둔화되고, 천마는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며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문제는 광마존 쪽이었는데 마신갑의 착용으로 이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몰리고 있었다. 광마존의 무형검은 번번히 몰스가 휘두른 창에 가로막히고 다양한 공격으로 광마존을 점점 궁지로 몰아넣고 있었다.
내 눈앞에 펼쳐진 바로 저것이 현실이다. 나와 천마를 제외하고는 우리 중 누구도 저놈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나는 염려가 되어 다른 무사들이 싸우는 곳을 언뜻 살피다 여러 명이 조직적으로 잘 맞대응 하고 있다 판단되어 광마존의 위기를 돕기로 했다.
이번엔 나도 마신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마신갑은 한정된 범위 내에서는 어떤 형태로도 변형이 가능하다. 저번에 천마가 보여 줬듯이 여러 가지 이점을 지니게 해 준다. 난 두 손의 끝을 쭉 늘어뜨려 검처럼 만들었다.
몰스가 걸친 갑옷은 마신갑보다는 못하지만 강도 면에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지만 단점이라면 부드럽지 못해 관절의 연결 부위와 부분 부분 미세한 틈이 벌어져 있다. 난 그곳을 공략하기로 작정하고 잠형술을 펼쳤다.
이놈들은 의외로 경공에 약점이 많은 것 같았다. 내가 다가가고 있는데고 놈은 아직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난 몰스의 뒤쪽 허리 부분의 미세한 틈이 잠깐 벌어지는 순간 깊이 쑤셔 박았다.
푹
석 자 정도의 검이 끝까지 박혀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는 게 당연하다. 그렇지만 몰스는 사람이 아니다. 신장이 워낙에 크기에 이 정도로 무력화시키기엔 턱없이 작은 상처였다.
난 놈의 반격을 우려해 곧장 검을 뽑았다. 놈은 창을 잡은 한 손으로 마치 허리를 벌에게 물리기라도 한 듯이 철썩 때리는 것이었다. 정말 질리게 하는 놈이란 생각이 든다. 내가 이런 놈과 싸워 이겼는가, 다시 곰곰이 행각해 보게 하는 장면이었다.
등을 밟고 허공으로 몸을 띄워 곧장 놈의 뒷목을 강기로 쳤다. 순간 놈이 고개를 돌리는 걸 기다렸다가 슬쩍 앞쪽으로 돌아가며 역시 벌어져 있는 목의 미세한 틈에 두 개의 검을 모두 쑤셔 박았다.
푹
이번엔 충격이 있었던지 쿨럭거리며 잠깐 비틀거린다.
“광마존, 내가 공격한 이후의 틈을 노려라.”
“알겠습니다.”
나의 가세로 한숨 돌리게 된 광마존이 몰스의 후면으로 돌아갔다.
“이 쥐새끼 같은 놈들.”
역시 또다시 의문을 일으키게 하는 장면이다. 마계에는 쥐가 있던가? 아니면 인간계에 대한 지나친 애정 탓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결과인가?
몰스는 분노했는지 사방을 향해 창을 마구 흔들며 휘둘렀다. 그런 마구잡이식의 공격에 우리가 결려들 리는 없다.
방법을 바꾸라고 충고해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지 않으면 너 또한 얼마 버티지 못한다. 그때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몰스의 목 쪽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푹
천마였다. 어느 새 제 몫의 몰스를 쓰러뜨리고는 우리 쪽에 가담한 것이다. 천마는 목에 장검을 쑤셔 박고 양쪽으로 쫘악 벌렸다.
촤악
갑옷의 일부까지 갈라지며 푸른 액이 화악 튀어오른다. 저것이 마수의 피인가?
역시 비명이 없기는 매한가지다. 놈은 저 정도로도 쓰러지지 않는다. 잠시 그놈이 천마의 등장에 신경을 쓰는 사이를 노려 난 놈의 무릎 쪽 연골을 노리고 검을 비틀어 박았다. 그리고 곧장 강기를 밀어 넣었다.
푸확
이번엔 쾌나 효과적이었는지 놈의 무릎이 굽혀졌다. 그 순간을 우리 세 사람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놈은 몸이 주저앉으면서도 창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이미 승부는 끝나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우리의 검은 잔인하고 망설임이 없었다. 그놈은 점차 신체의 기능을 상실해 가면서도 끝까지 팔을 움직여 나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는 중얼거리기를.
“인간들 따위가…..인간들 따위……”
쿵
결국 쓰러졌다. 원래의 예측보다는 더 오래 걸린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로 오래 버틸 줄은 몰랐었다. 마신도 아닌 마수들을 죽이기 위해 이 정도의 시간을 소모해야 한다면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감상에 젖어 있을 여유는 없다. 격전장으로 눈을 돌려보니 치열하다는 말 밖에는 떠올라 주지 않는다. 한쪽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다른 한쪽은 명령을 수행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살기 위해 발악하는 자들이 그래서 더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자.”
나와 천마와 광마존이 격전장으로 가세했다. 초식마수들 중 비교적 공격력이 강하다 할 수 있는 쟁, 교, 영여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이놈들 역시 일반 무사들의 입장에서는 그리 상대하기가 녹녹치 않은 놈들이었다.
쟁은 찌르는 검을 입으로 물 정도로 순발력이 뛰어나고, 이빨이 날카롭고 강하며, 앞발의 힘이 대단하다. 곰이라도 이 발에 한 방 걸리면 바로 늑골이 작살 날 정도다. 이 정도의 맹수를, 더군다나 한번 도약에 십여 장을 뛰어오르는 놈을 상대하는 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것이다.
영여는 두 손으로 뒤에서 끌어안고서는 목을 물어 물어뜯어 죽이거나 뾰족한 뿔로 찔러 죽이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땅에 떨어져 있는 무사들의 병기를 주워 휘두르기도 했다. 교는 이빨에 독이 있다는 걸 제외하고는 그다지 조심할 게 없었다. 이놈은 한 번 물면 물린 사람이 죽은 걸 확인하고서야 놓기 때문에 다른 무사들이 입 안 가득 사람의 살을 물고 있는 그놈을 어렵지 않게 죽이고 있었다.
문제는 이들 세 종의 초식마수들이 아니었다. 나머지 세 종의 육식마수들이었다. 천마교 상위 고수들도 곤란을 겪어야 하는 마수들. 헤르곤은 하늘에서 떠돌다 매가 사냥감을 발견하고 낙하하듯 내리꽂히는데 그 빠름은 상상 밖이었다.
그놈이 한번 내리꽂히면 일장 정도가 풍비박산이 난다. 그 반경안에는 무사들도 있지만 초식마수들도 있었다. 어차피 제 먹이에 불과하니 저런 짓을 서슴없이 하는 것이리라.
바닥에 내리꽃힌 놈이 다시 하늘로 오르기 전에 무사들이 그놈을 그대로 둘 리 없다. 그렇지만 그의 큰 박쥐 날개는 완전히 자신을 감싸고 방어한다. 일종의 방패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그리고는 활짝 날개를 펴고 그 자리에서 회전을 한다. 날개의 끝이 얇고 날카로워 도에 베인 듯 허리가 잘리는 자들이 속출한다. 여유 있는 얼굴로 다시 하늘로 올라서 인간들의 약함을 비웃는 것이다.
에놈은 역시 생긴 대로 징그러운 놈이었지만 대량 살상을 한다는 점에스 급히 처리해야 할 놈이었다. 그놈은 거대한 제 몸을 마구 비틀어 사람들을 짓이겨 죽이거나 삼키거나 그도 아니면 작은 실뱀들로 화해 사람의 모공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내부를 순식간에 녹여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놈은 참 생대하기가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수천, 수만 마리로 화한 실뱀들을 일일이 찾아 죽일 수도 없고, 결국 하나로 합쳐져 있을 때 단숨에 죽여야 한다. 이때 천마가 제일 먼저 처치해야 할 놈으로 헤르곤을 짚었다.
“저 놈부터 처치하자. 그 다음이 화염덩어리 마수 라그난다. 저놈은 그다지 강하지 않으니 별 피해 없다. 제일 나중에 에놈이다. 무사들을 한쪽으로 물리고 한곳으로 몰아 죽여야 한다.”
나도 동의했다. 나와 천마는 하늘에 떠 있는 헤르곤을 노리고 신형을 공중으로 띄워 올렸고, 광마존은 땅에 내려 와 있는 놈들을 맡기로 했다. 열두 마리 헤르곤 중 엷 마리가 공중에 떠 있었는데 내가 가까이 가자 막 땅으로 내리꽂혀 가던 놈이 방향을 홱 틀어 나를 경계한다.
나머지 놈들도 마찬가지여서 나에서 넷이, 천마에게 넷이 달려들어 포위했다. 난 곧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이놈들의 신장은 몰스처럼 크지 않아 몇 번의 칼질이면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손에 달린 검을 원상으로 만든 다음 내 신형을 여러 개로 분리시켰다. 놈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오히려 내가 그들을 포위한 형국이 되자 그놈들 중 한 놈이 큰 소리로 외친다.
“신경 쓸 것 없다. 눈속임일 테니 그냥 처치해라.”
눈속임? 그렇게 생각해 주면 나로서는 고맙지.
푸악
여덟 개로 나눠진 몸에서 제각기 화염이 솟구쳤다. 그놈들은 역시 빠른 놈들이라 그리 쉽게 당해 주지 않는다.
쉬익
쉬익
공중에서 저리 빠르게 움직이는 상대를 난 처음 겪어 본다. 아니군.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일월교주도 상당히 빨랐지. 물론 마신갑 때문이긴 했지만. 나도 빠르기라면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고, 더군다나 지금은 마신갑으로 인해 더 빠르지 않던가.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놈들이 움직이면 나도 움직이고 그놈들이 물러서면 따라 붙었다. 오히려 내가 놈들이 예상하는 제이 동작과 진로마저 계산하고서 움직이기 시작하자 놈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내 손에서는 끊임없이 검이 쏟아져 나가 놈들을 조금씩 상처 입히고 다치게 했으며 우리 주변은 때때로 바람이 몰아치거나 벼락이 떨어져 놈들에게 타격을 더했다.
“너희는 이걸로 처리해 주마.”
내가 순간 하나로 몸을 합쳐 두 손을 번쩍 쳐들자, 그들은 의아하여 바라보다 일제히 내게로 달려들었다. 크고 강하고 날카로운 발톱과 손톱으로 so 전신을 찍으려고 했다.
“핫.”
놈들은 동시에 동작을 중지하고는 거짓말처럼 멈춘다.
이놈들은 기의 운행으로 하늘을 나는 놈들이 아니다. 날갯짓으로 하늘을 난다. 그런 놈들이 날개를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으면 자연히 땅으로 떨어져 내려야 정상이다. 어떻게 했냐고?
기의 그물로 놈들을 묶었다. 몰스 같은 놈에게야 이런 방법이 통하지 않겠지만 이놈들에게는 충분히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지금 내 눈앞에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그만 끝내자.”
촤악
촤악
난 가까이 있는 놈부터 차례로 양단했다. 놈들은 저항 한 번, 공격다운 공격 한 번 못해 보고 죽었다. 내게 여유가 있다면 이놈들의 특징을 좀더 자세히 관찰해 보았겠지만 지금 내게는 그리 여유가 없단 말야.
난 천마 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곧장 광마존 주위로 내려왔다. 광마존도 두 마리의 헤르곤을 바닥에 눕혀 놓고 있는 중이었다.
바닥으로 내려서며 곧장 한 마리의 등 쪽을 공격해 놈을 절명시켰다. 이어 광마존에게 달려드는 놈을 막 마신검으로 공격하려는데 등 뒤로 붉은 검이 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헤르곤을 모두 처치했을 때쯤 율극과 신수궁주 등의 지도부 고수들은 라그난다를 거의 다 해치우고 있었다. 그놈들은 전신이 화염덩어리로 화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었다.
이제 남은 건 에놈. 이놈들은 좀 특별하니 특별한 방법으로 처치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놈들은 한 놈도 죽지 않고 모두 멀쩡했다. 마수들의 계급상으로는 헤르곤이 에놈보다 두 단계나 위다. 그런데 헤르곤은 서열에 비해 실제 전투력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내 생각엔 날 수 있다는 헤르곤의 이점이 작용했기 때문일 것 같았다. 천마가 우리 곁으로 떨어져 내렸을 때였다.
“오늘은 이 정도로 그만하지. 마수들을 상대하는 그대들의 활약, 감명 깊게 봤어요. 나중을 기약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언제 또 나타났던 걸까? 쿤다리를 타고 있는 여인이 저 멀리 보이고 있다. 그녀가 나타나자 그렇게 극성이던 마수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더니 뒤로 슬금슬금 물러선다.
이쪽저쪽에서 물러서는 초식마수들을 향해 살수를 펼쳐도 그들은 대항하지 않았다. 그냥 죽는 것이었다. 난 그걸 보며 좀 섬뜩한 느낌이 들어싿. 어떻게 했기에 본능마저 지배를 받는단 말인가?
자신을 향해 죽이려는 손길이 있다면 당연히 피하거나 공격하거나 그도 아니면 움찔거리기라도 할 텐데. 이놈들은 어찌 된 놈들인지 그냥 순순히 칼을 맞고 죽는 것이었다. 난 무사들의 최선두 쪽으로 나가며 쿤다리를 타고 있는 인간 같지 않은 여자를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말했다.
“무슨 의미이지? 이대로 물러나겠단 건가?”
“물론! 오늘의 싸움은 모든 마신들을 즐겁게 해준 훌륭한 유흥이 있어요. 그들이 장차 그대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처참한 죽음을 내릴 것이니 그때까지 마음껏 남은 삶을 향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왜지? 왜 너희들은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한꺼번에 처치할 수 있는데…..무엇 때문에?”
“물론 마라나 나찰을 세상 전역에 푼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거부하는 인간들을 모조리 찾아내 죽일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건 그렇게 성급하게 처리해야 할 만큼 중요한 게 아니죠. 어차피 그대들은 우리가 볼 때는 전혀 위험하지 않은 존재들. 물론 좀 특별한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리 큰 흥미를 끌게 할 요소는 그 어디에도 없지요.
우리의 목적을 잘 아시더군요. 지금 모여든 사람들을 분류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게 우리에겐 더 중요하고 성급한 일이랍니다.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힐 때쯤 그대들을 찾아 가겠어요. 아, 그렇다고 안심하고 있지는 마세요. 언제든 수정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알려드리죠. 두 분은 그냥 순순히 죽을 수 있는 행복도 누리지 못할지도 몰라요. 호호호호, 기대하셔도 좋을 거예요.“
스스스스
아까 사라졌던 것처럼 또다시 형체가 희미해져 갔다. 급작스런 출현에 이은 돌연한 퇴장. 마수들은 자기들 갈 길을 찾아 가고 있었다.
그 뒤를 죽은 사람들이 따른다. 짓이겨져 뼈만 앙상한 시체들도 벌떡 일어나 그들의 뒤를 쫓고 있다.
무사들을 둘러 봤다. 쾌나 고전했지만 어쨌든 승리를 거두었다.
그렇지만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다. 희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서안까지 가서야 진군을 멈추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들이 그곳을 그저 지나치지 않는 것처럼.
그곳엔 괴목들이 싱싱하게 살아있었다. 다들 지치고 고단했던지 괴목에 기대어 잠을 청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나도, 천마도 허탈한 심경으로 그들처럼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이렇게 의미 없는 삶의 지속이 내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이제 화아는 꽤 자라 뒤뚱거리면서도 걸음을 내딛고 있다. 마계가 유입되고 나서 사람들의 삶에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죽음은 흔히 볼 수 있지만 더 이상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거나 태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여자들이 집단으로 괴이한 괴질에 걸린 것인지, 이 반대의 경우인지 모르지만 마무나 마과가 어떤 작용을 한 것일 가능성이 많았다. 그래서 갓난아기를 보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이전에 태어난 아이들도 성장이 상당히 빨랐다. 우리 화아는 비교해 보니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되려 늦은 편이었다. 내코를 잡고 흔들며 좋아라 웃는다.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녀석의 반응을 기다렸다.
“까르르르.”
녀석 숨넘어가겠군. 이 녀석은 세상에 왜 태어났을까? 네 녀석이 태어나서 보게 되는 세상이 네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난 무사들의 지쳐 있는 모습을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의미 없다. 그냥 저항하지 말고 당할 일ㅇ르 당하자. 그리고 이 고통의 시간을 줄이자. 마수들에게조차 쩔쩔매야만 했던 그들이었기에 그 실의는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닐 것이다.
일반인들이 무림인들을 강호의 신선이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그들보다 지금의 이들이 느끼는 벽은 더 큰 것이었다. 도저히 어찌 해볼 수 없는 상대를 적으로 둔 자들의 자포자기의 심정. 무엇을 할 것인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쓸모없는 제 존재에 대해 회의하다, 절망하다 결국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힘이 든 게 아니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울 뿐이다.
할 수 있다면 이들 모두를 대피시키고 싶었다. 그런 안전한 곳이 있다면 말이다. 문득 전에 장삼봉 진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장백산이라고 했던가? 그곳엔 마계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다고? 어째서지? 그렇다면 그곳으로 찾아가는 건 어떨까?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차라리….혹시 미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버려 두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여자가 그러지 않았던가. 지금은 당면한 일들이 더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우리 같은 하루살이들은 언제 해치워도 된다는 의미이리라. 크크, 재미있는 세상이야. 세상 사람들이 날더러 무림황제라 했던가? 어쩌다 황제가 하루살이로 전락했지. 상대적이었을 뿐 절대적인 강자는 없는 거야. 그래서 강자일수록 약자가 될 때 못 견뎌 하는 것인지도. 그것을 인정하기가 괴로운 거지.
그런 점에서 난 이미 경험이 있어 그런 걸로 실의에 빠지지는 않아. 그렇지만 이 상황은 나도 못 견디겠군. 차라리 죽든 잡혀서 끌려가든 마찬가지이니 마계를 내 발로 찾아가 볼까? 그놈들이 얼마나 잘난 놈들인지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어졌어.
“천마, 나와 같이 마전으로 찾아가 볼까?”
천마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짤막하게 답했다.
:싫다.“
“왜?”
“내가 너무 비참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하찮은 놈들에게 조롱당하고 싶지 않다.”
난 천마가 마계를 등진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단지 환멸을 느끼고 있던 차에 천상계의 한 천주에게 감명을 받고 그런 결단을 내렸다고만 했다. 그 이유가 무척 궁금했지만 굳이 말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지금까지도 이런 내 생각엔 변함이 없다.
먼저 말해 주기 전에 물어 볼 생각은 없다.
우리는 하루하루 변함없이 지냈다. 율극이 가져 온 생선도 이제는바닥이 났다. 다시 바다로 나가서 잡아오거나 그도 아니면 산으로 들어가서 먹을 걸 구해 와야 한다.
“천마, 여길 지켜라. 내가 갔다 오마.”
물끄러미 바라보는 천마의 시선에서 그 역시 당당히 지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난 화아를 번쩍 한 번 안아 주고는 설란의 품으로 넘기며 말했다.
“갔다 오리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빠,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래, 우리 아들, 내 갔다 올 때까지 엄마랑 화아 잘 보호하고 있어라, 알았지?”
“네, 염려 마세요.”
난 문든 저 녀석이 장성한 모습을 보고 싶다는 열망이 가슴 깊은 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몸을 돌려세우고 동쪽으로 향했다. 그들의 눈길이 머물지 않는 곳에 이르러 금응을 불렀다. 그리고는 해안을 향했다.
전에 사용하던 그물이 그대로 있었다. 얼마간 우리가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잡아 가자. 어차피 많이 가져가 봐야 소용도 없고. 금응이 하늘을 맴도는 동안 난 바다를 밟고 섰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눈을 감고 기운을 감지해 보기 시작했다. 바닷속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들을 포착해내려 애써 보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단 하나도 감지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바닷속에서도 무슨 일이 있단 말인가? 난 좀더 멀리 나가 보기로 했다. 그렇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그냥 허탕치고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계속 앞으로 가게 되었다. 한참을 와서 이번엔, 하는 심정으로 시도해 보았으나 역시…..헛수고였다. 이게 무슨 일일까? 그 많던 물고기들이 한꺼번에 사라질 리는 없다. 무슨 연유인지를 알 수가 없구나.
거의 반나절 이상을 그러러 헤매었으나 그 어디에서도 물고기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바다는 죽어 있었다. 아무런 생명체도 살지 않은 곳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어 이와 내친김에 금응을 타고 한참을 더 날아갔다. 그리고 난 뛰어내렸다.
내가 감지할 수 있는 공간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기에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조사한던 차였는데 드디어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왔어! 으음, 쾌나 큰놈인데. 고래인가?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군. 이놈이 날 알아 보고 반길 리는 없고. 후후, 그래. 너로 인해 우리는 또 한동안은 배곯지 않고 살 수 있겠구나. 거의 바로 발밑까지 이르도록 가만히 있었다.
촤악
순간적으로 날라고 말았다. 그놈이 내 밑에서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다. 이놈이 미쳤나? 난 몸을 뒤집어 허공중에 바로 세웠다. 눈앞에 보이는 건 헉, 저건 바로……바수다.
7대 마수 다섯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바알이란 놈이었다. 단지 한 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바알은 마수들 중 가장 큰 몸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물이 있는 곳에서만 서식하며 그곳을 지배한다.
천마에게서 듣기로는 그 크기가 천차만별이어서 가장 작은 놈이50여 장에 이르고 마계 사상 가장 큰 놈은 3백 장이 넘는 것도 있었다 한다. 지금 눈앞에 드러나 바알의 모 크기도 꽤나 큰 축에 들어갈 것 같았다. 물 위로 드러난 부위만도 30장은 넘었다.
이놈의 생김새는 윗부분은 목이 긴 물개와 비슷하고, 아래쪽은 악어와 흡사하다. 긴 목과 순하게 생긴 얼굴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는 악어의 가죽같이 우둘투둘 했다.
“인간, 네가 파천인가?”
이놈은 날 알고 있구나.
“넌 물론 물고기를 잡으러 왔겠지. 보다시피 네가 잡을 물고기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고 모두 쫓아 버리기 때문이다. 가라. 이곳에서 네가 먹을 걸 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네 놈은 날아다니니 내가 너와 싸울 수는 없고……그냥 보내 주마.”
다른 마수들이 이런 말을 했다면 웃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놈은 다르다. 천마가 말하길 물 속에서 바알을 만난다면 백 번 싸워 단 한번도 이길 수 없다. 물에서만은 무적인 놈이다, 라고 했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데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수들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 간에 의사 교통이 가능하다. 내가 만약 이놈과 싸우길 원한다면 결국 몰려들 것이다 난 승산 없는 싸움이라 생각하며 단념했다.
“그깟 물고기 몇 마리 못 잡게 하려고 이런 황송한 일을 다 해주시고. 이것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네 놈들은 점점 내 흥미를 돋우는구나. 좋다, 그냥 물러가지.”
“단념이 빠른 현명한 인간이구나, 내가 물 밖에 나간다면 널 이길 수 없겠지만 물 안에서만은 너도 내 상대는 아니다. 너는 그 어디에서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게 네 운명이다. 여길 떠나면 산으로 가겠지.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야. 쿤다리 님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를 이미 자유롭게 제어하고 조종하고 계시다. 너는 어딜 가도 쥐새끼 한 마리 구경하지 못할 거야.”
“날 굶겨 죽일 작정을 했구나.”
“한심한 인간이군. 왜 그 맛있는 과일을 안 먹지? 나도 별로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건 너희들이 이 땅에 선사한 독일 뿐. 나는 죽었으면 죽었지 그걸 먹지는 않을 거다.”
“그래라. 그럼 굶어죽으면 되겠군. 아주 멋진 선택이야. 물론 네 가족들도 거기에 동의했겠지?”
난 더 이상 저런 마수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비참하군. 참 무능한 가장이야. 난 그때까지도 하늘을 맴돌고 있던 금응의 등에 타올랐다. 서안으로 돌아가야지 별수 없겠어. 저놈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지만 일단은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너무 오래 지체했기 때문이다.
서안에 들어서서 무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는 순간, 난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없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있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아직 죽지 않아 꿈틀거리는 인간들일 뿐, 멀쩡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뭐지? 어떻게 된 거지? 또 공격을 받은 건가?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이런 일이. 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보이지 않는다. 설란도, 화아도, 환아도, 천마도……모두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건가? 누가 내개 말을 해줄 사람이 없나? 난 이번엔 살아 있는 사람이 없나 살폈다. 대부분 살아 있었다. 그렇지만 곧 죽을 사람들뿐이었고, 개중에는 이미 시체인 사람도 간혹 섞여 있다.
그들은 죽어 영혼이 빠져 나간 사람이었다. 영혼이 금제당했으면 마계를 찾아 떠나겠지. 정신없이 헤매다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삼살 중 둘째인 지살이었다. 난 그가 곧 죽을 것임을 알아 보았다.
“정신 차려라, 지살. 어찌 된 거지? 모두 어떻게 된 거냐?”
난 그에게 진기를 붙어 넣었다. 잠시라도 좋으니 제발 정신을 차려다오.
“으으.”
“지살, 나다, 파천이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모두…..모두 잡혀……..갔습…….나가. 마신…………헉헉, 오지 말라 하셨…….희망이라고.”
툭
고개가 떨어졌다. 순간 그가 벌떡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는 마신이 아닌 마수에게 당한 것이다. 저번에 한 말은 모두 거짓이었나? 마신들이 마수들을 이끌고 왔다는 얘기다. 결국 모두 끌려갔다는 건가, 모두? 나 혼자 남은 거라고? 나 혼자………
나는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미 서안에도 괴목들은 보이지 않았다. 허탈한 심정으로 주저앉아 있던 난 뒤로 벌렁 누워 버렸다. 내 몸엔 어찌 된 일인지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힘이 없었다. 이대로 그냥 잤으면 싶었다. 모든 걸 잊고 잠시라도 좋으니 잘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설란의 얼굴이 화아와, 환아와, 천마와, 적루아와, 천아와, 광마존과…….모구의 얼굴이 하나로 겹치더니 요사스런 웃음을 흘렸던 여자의 얼굴로 변한다. 가야지. 가서 끝내자. 이 지겨운 삶도 이젠 끝내자. 희망이라고? 천마, 너겠지? 나더러 오지 말라고 말한 이가. 가지 않으면 날 더러 뭘 어쩌란 거냐? 이제는 두렵지도 않다. 잃을 것이 없는데 무엇이 두렵겠는가.
가자. 가서 모든 걸 종결짓자. 영원히 내 영혼이 금제를 당해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 해도. 이제는 장말이지 끝내고 싶다. 일어섰다. 청해로 가기 위해서 난 일어섰다.
그리고 걸었다. 한참을 걸었을 거다. 이대로 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니 가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여기 있으면 그놈들이 또 날 찾아올게 아닌가. 그럼 단 한 놈이라고 속 시원하게 죽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것도 복수라면 복수다. 내가 내 발로 찾아 갈 필요는 없다.
기다리자. 사실은 설란이 화아가, 환아가 어떤 지경에 빠져 있는지 알 수 없기에, 만약 어떤 변고가 발생했다면, 그걸 확인하게 되는게 두려웠다. 여기 있으면 그걸 알게 될 때까지는 작은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살아 있어야 했다. 마신에게 죽었어도 여기 시체로 누워 있어야 했고, 마수에게 당했다면 금제당했다는 결론이다. 살아 있어야 했다. 그것만이라도 제발……내가 원하는 건 그것 하나다. 그것 하나만이라도, 하늘이시여……
며칠째 굶은 채 누워 있었더니 뱃속에서 난리였다. 잠시 앉아 있는데도 현기증이 났다. 이놈들이 왜 오지 않는 건가, 왜? 난 마냥 기다렸다.
또 며칠이 그냥 흘렀다. 난 이제는 정말 움직일 기력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대로라면 정말 굶어죽겠군. 무림황제 파천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고 소문 날라. 크크. 아 참, 그렇지. 이제는 그런 소문을 퍼트려 줄 사람도, 들어 줄 사람도 없지. 나 하나지? 그냥 이대로 죽어도 되겠군. 그래 죽자, 죽어 보면 알겠지.
아이들과 설란이 그곳에 있으면 다행이고. 없으면…..기다리면 되지.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난 점차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졌다.
[일어나라.]
잠이 쏟아진다. 그래, 난 깊은 잠을 자고 싶어. 더 이상 깨지 않아도 좋을 깊고 긴 잠을.
[일어나라.]
깨어 또다시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싶지 않다. 날 내버려 둬.
[일어나라. 넌 혼자가 아니다.]
무슨 개소리야. 난 혼자야. 완전한 혼자라고. 난 혼자…….
[이 고집불통 녀석, 일어나지 못해? 일어나서 네 꼴을 한 번 봐라. 일어나서 장백산으로 떠나. 장삼봉이 널 기다리고 있다. 가서 그를 만나라.]
장삼봉이 누구지? 누구였더라? 아, 생각나는군. 진인…….그래 그러고 보니 그가 있었군. 그는 안전한 곳에 있다고 했지. 그는 신비한 사람이니까 말야. 크크크, 고민하지 않아도 좋겠군. 그런데 너는 누구지?
[나는 너다.]
난 두눈을 떴다. 눈이 부셨다. 해가 보이지 않음에도 눈이 부셨다. 꿈이었나? 꿈을 꾼 건가?
[꿈이 아니다.]
“그래, 꿈이 아니군, 제길. 오랜만이야.”
[일어나라. 아직은 네가 할 일이 있다. 이대로 포기해서는 안 돼.]
“내 꼴을 좀 보고 나서 그 말을 해도 늦진 않아. 난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며칠 굶었다고 그리 쉽게 죽지 않는다. 금응을 불러서 장백산으로 가라. 가서 네 할 일을 고민해 봐라. 물론 결정은 네가 하는 거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언제나 그랬듯이라고? 그렇군, 그래. 가긴 가야겠는데………몸에 힘이 없어. 한계를 넘어선 것 같아.”
[기를 모아라. 넌 할 수 있어.]
난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자연의 기를 받아들였다. 몸이 텅텅 비어 있는 것 같이 힘이 하나도 모아지지 않더니 얼마 지나자 기운이 났다. 난 힘겹게 일어설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앉아서 반 시진이나 더 있어야 했다. 머리가 빙빙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기운에 널 실어. 네 힘으로 움직인다 느끼지 말고, 기운이 널 움직이게 하란 말이다.]
기운이 날 움직인다……..
스스스스
내 몸은 그 상태대로 공중에 떠올랐다. 그리고 난 금응을 불러 하늘을 날 수 있었다. 장백산으로 떠났다. 그의 말대로 내 결정에 의해서.
장백산에 올랐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상에 천지라고 불리는 호가 있을 뿐이었다. 주변을 돌아다니다 한 곳에 웅크리고 가만있었다. 어차피 만날 사람이면 만날 것이다. 결국 이곳까지 오고야 말았다. 여기가 어디고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사람들이 사는가는 중요치 않다. 이곳에 내가 만나야 할 사람, 대화를 나누어야 할 사람이 있음이 중요했다.
역시 내 예상대로 그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따랐다. 물 위에 떠 있는 건물치고는 꽤나 큰 것이었음에도 난 이걸 보지 못했다. 밖에서는 분명 보이지 않았었다. 의문을 접었다. 뭐, 결계 정도야 이들에게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그런데 관심을 기울일만큼 내 마음은 한가롭지가 못했다.
얼마 기다리고 앉아 있으려니 장삼봉 진인이 들어왔다. 그는 다짜고짜 내 앞에 앉더니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어쩌기로 했느냐?”
뭘? 뭘 어쩌리고 했느냐는 물음인가?
“무얼 말이오?”
“떠나겠느냐?”
“그 말씀이셨소? 선계로 떠나라는. 그 말씀을 하시고자 날 여기로 오라 하신 거요?”
“그것 말고 달리 네게 할 말이 있었더냐?”
난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얘기했다. 진인도 그런 사정에는 어두웠던지 날 보며 애처로운 시선을 보냈다.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흐음, 그럼 넌 더 가지 않으려 하겠구나.”
“가서 뭘 하란 말인지나 얘기해 보시오. 그건 들려 주고 내게 이런 요청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야 그렇지. 좋다, 어차피 알아도 무방하니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만 얘기하마.”
난 진인의 말에 경청할 모든 준비가 되어 있다. 귀는 항시 열려 있지 않던가.
“마계의 인간계 유입에 대해 다른 차원계에서는 달리 대책이 없다. 있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들이 했던 방식으로 선계나 천상계가 똑같이 행동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 어차피 무한계는 중심이 없어 이 일엔 관심도 없고, 귀계 역시나 마계의 힘에 눌려 있는 형편이다. 결국 차원의 벽이 없고, 오고 감이 비교적 자유로운 선계에서 이일을 떠맡았는데 그 이유는 모르지만 네가 있어야 한다는구나.”
“그 이유를 정말 진인도 모르시오?”
“나도 모른다. 대충 짐작하는 바는 있지만 그 방법은 나도 모른다.”
“그 짐작하는 바라도 내게 말해 주시오.”
“아마도……..”
그는 망설이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에라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더니 입을 열어 사실을 털어 놓는다.
이래서 세상엔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아마도 진인이 이 지시를 받으면서 입단속에 대한 특별한 당부를 들었을 터인데도 지금 내게 털어 놓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방법은 단 하나일 수밖에 없지. 다른 차원계가 간섭할 수 없으면 간섭할 수 있게 하면 된다. 명분을 주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광명을 가져오는 일이다.”
역시 그거였던가? 그런데 왜 나지? 내가 무슨 자격으로, 무슨 힘으로, 능력으로 그걸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단 말인가?
“내게 그 일을 시키려고 날 부른다는 거요?”
“그래.”
“참, 이 말을 날더러 믿으라는 겁니까?”
“사실이다.”
“왜 하필이면 나요?”
“모른다. 왜 너여야 하는지 나로선 알 수 없다.”
“그럼 묻겠소. 선계에 가면 광명을 가져 올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소? 아니면 무슨 그런 능력이나?”
“방법은 일러 주겠지. 그냥 무턱대고 가져 오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여간 가봐라. 나도 더 이상을 모르고 알 수 있는 자격도 없으니.”
방법이 있다면 이야기는 틀려진다. 그래서 내가 그들이 가르쳐 준 방법으로 광명을 가져 오거나 훔치거나, 그럴 경우 천상계와 선계, 무한계 등을 이곳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그렇다면 마계와 한번 해볼만 하다.
난 내 속에서 죽어 있던 희망이 꿈틀대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방법은 있다. 그래서 ‘그’도 여길 한사코 가라고 했던 거군. 하여간 그는 모른는 게 없다.
“어떻게 하겠느냐? 갈래, 말래?”
“휴우……가겠소.”
“정말이냐?”
“속고만 살았소?”
“역시 네 놈이 가겠다고 할 줄 알았다. 이럴 걸 그렇게 애를 태웠느냐, 이놈아!”
진작 이렇게 말했다면 그때 결정했을 것 아냐.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여겼으니 당연히 거절한 거고.
“선계로 가겠소. 단!”
“단?”
“내게 시간을 좀 주시오.”
“무슨 시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아니오. 아무래도 이대로는 못 가오. 그들의 안위를 확인은 해야겠소. 살았는지 죽었는지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는지 정도는 알아야겠습니다.”
“뭐야? 그럼 너 설마 마계로 들어가겠단 말이냐?”
“단지 확인만 하는 거요. 몰래 들어갔나 나오면 될 것 아니요?”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그놈들이 그렇게 물렁한 놈들일 것 같으면 너보고 광명을 훔쳐 오라고…………”
말하다 말고 진인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말하다 놀래 입을 다문 것이다. 역시 훔치는 거였군.
“하여간 안 된다. 안 될 말이다. 넌 들어가면 다시 못 나온다.”
“그것도 운명이지 않겠소?”
“그럴 거면 여긴 뭐 하러 왔어? 그리고 왜 간다고 하는 거냐, 에이.”
그는 못마땅한지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때로 내 고집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렇지만 난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비겁하게 이대로 도망갈 수는 없었다.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간다 해도 저만치에 희망이 있다는 걸 이대로 발길을 돌린다면 내가 날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진인은 말을 하지 않는다. 나도 말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가만있는 게 상수다. 먼저 상대가 말을 할 때까지 입 꾹 다물고 있으면 만사 해결이다.
“어쩔 수 없지. 네 맘대로 해라. 언제 네가 고집을 꺽은 적이 있더냐. 좋아, 단!”
“단?”
“너도 그 약속을 지켜라.”
“아, 간다니까 그러시오? 노인네 의심만 더 늘었소? 내가 언제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 봤습니까?”
“이놈아, 그 얘기가 아니잖아.”
“그럼 뭐요?”
“정말 확인만 하고 오는 거다. 알았느냐?”
“그야 물론이오. 사실 진인 말마따나 갔다 빠져 나올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는 것 아니오? 그것만도 힘겨운 일이거늘 내가 무슨 난놈이라고 그곳을 휘젓겠소? 그냥 얌전히 들어갔다 얌전히 빠져 나올 테니 걱정 마시오.”
“그래, 얌전히……에구,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고? 나 참.”
그래서 일단 우리 계약은 성립이 되었다. 뭐, 계약이라고 해봤자 달리 주고받은 것도 주고받을 것도 없지만 지켜야 할 약속은 생긴 셈이다.
“좋아, 대신 한 가지를 내가 주마. 그걸 가지고 가면 그나마 성공 확률을 높일 수 있을 거다.”
진인의 말에 난 솔깃해졌다.
“그게 뭐요?”
“여기서 잠깐 기다려라.”
밖으로 나갔던 진인이 일각 정도가 지나서 돌아왔다. 작은 나무상자였다. 진인은 뚜껑을 열어 한 가지를 내밀었다.
천이었다. 커다란 보자기였는데 아무런 무늬도 없이 지극히 평범했다.
“이게 뭐요?”
“이건 네 자취를 감춰 주는 공능을 할 거다. 너는 잠형술에 능통하니 이게 필요 없다 여기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네 기운 자체가 외부로 나가는 걸 막아 주는 거다. 이왕이면 잠형술을 펼친 상태에서 뒤집어쓴다면 더 나은 효과를 볼 수 있겠지. 어느 정도 속일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DAK 그리 쉽게 발각 당하지는 않을 거다.”
잠시 전 진인의 말에 솔깃했던 자신을 후회했다. 난 또 대단한 거라도 주는 줄 알았더니 이런 보자기를 주다니.
“뭐, 어쨌든 고맙소. 그럼 난 가보겠소.”
“이놈아, 원리리고 보충하고 가야지. 보아하니 한동안 아무것도 못 먹은 것 같은데 좀 있다 가거라.”
그래서 난 팔자에도 없는 선인들이 먹는다는 선단을 삼킬 수 있었다. 그리고 몇 알을 더 꺼내 손에다 꼭 쥐어 주는 진인의 자상한 배려에 감격할 수밖에 없었다.
금응을 타고 일부러 달단 쪽으로 갔다. 감시가 심할 중원에서가 아닌 달단 쪽에서 침투해 볼 요량이었다.
며칠을 보내며 어떤 식으로 잠입할 것인지에 대한 세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냥 무작정 갔다가 막상 최악의 상황에 닥치면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여러 가지 상황을 예상해 보고 그에 대한 대비를 세워 보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막연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부딪혀 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좋다, 해보자.
청해가 가까워질수록 그곳을 향해 이동해 가는 사람들과 시체들은 눈에 밟힐 정도로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난 그들 무리 중에 끼어 들었다. 눈에 띄는 것을 막고자 마신갑 대신 잎으로 만든 옷을 걸치고 있다. 대충 만든 거라 어설펐지만 그런 대로 입을 만은 했다.
사실은 그 정도가 아니라 피부에 닿는 착용감이 그만이었다. 내 마음은 급해 한시라도 빨리 당도하고파 안달이었지만 그렇다고 나 홀로 가면 더 눈에 띌 건 따져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가다 쉬고 가다 쉬는 무리들 가운데서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달랜다. 쉽게 이룰 수 없는 일은 멀리 보고 길게 봐야 한다. 차분하게 냉정하게 허와 실을 따져 가며 조금씩 해나가지 않으면 좋은 기회를 잡았다고 해서 원하는 걸 이룰 수 없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실수는 있기 마련이고, 그 작은 틈을 통해 실패는 제 몸을 들이미는 법이다. 그때는 이미 후회해도 늦다.
마과를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볼 때면 솔직히 입 안에 군침이 감도는 게 사실이다. 그 맛을 몰랐을 때는 호기심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고, 그 맛을 한번 본 이후로는 그 맛을 다시 되살려 보고픈 욕구를 이겨내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들과 같을 수 없는, 함께 뒤섞일 수 없는 내 처지를 돌아본다. 마과가 주는 폐해는 따지고 보면 없다. 마성에 젖어든다 했지만 마계에 동조하고자 가는 이들에게 그건 영광인 것이다. 내게 해가 되는 것이라도 저들에게는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같은 걸 놓고도 이렇게 입장 차이가 분명하군. 언제까지라도 주저 앉아 있을 것만 같던 무리들이 서서히 움직여 갔다. 난 그들 무리의 중감쯤에서 걷고 있었다. 이런 속도라면 사흘은 더 걸릴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디 무림인들 무리라도 찾아 볼 걸 그랬나? 아니다, 초조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마음을 느긋하게 갖자. 가다 보면 당도하겠지.
난 태어나서 이렇게 아름다운 전경은 처음 본다. 아무리 황성이 호화롭고 거대하지만 여기에 비하니 뒷간처럼 초라하지 않은가. 어찌 저런 걸 누군가가 이 땅에 지을 수 있다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저 장엄하고 놀라운 광경을 보라.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한동안이나마 같이 동행했던 무리들도 탄성을 발하며 가던 걸음을 멈추고 넋이 빠져 바라보고 있다. 혼이 달아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난 전에 천마랑 이곳을 분명히 와봤었다. 그때만 해도 읠월산이란 이름을 지닌 흔한 산자락만을 보았다. 물론 그곳에 기인한 것이 있기는 했지만 어찌 이리 변할 줄 알았겠는가.
산은 온데 간데 없이 자취를 감추고 넓은 초원이 깔려 있다. 군데군데 작은 호수엔 무엇이 있길래 광채를 발산하는 걸까? 호수들을 기고 이어진 길들은 매끄러운 수정을 보는 듯했고, 그 주위로 늘어선 것들은 지겹도록 보아 온 괴목이 아니었다. 3장 정도의 그리 높지 않은 나무는 흐드러지게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는데 그 끝에 제각기 탐스런 과실들이 매달렸다.
호수들 위를 가로지르는 유리 다리를 따라가다 보면 안이 훤히 비치는, 역시 유리로 지은 집들이 즐비하고 그것들은 호위하듯 중앙의 궁전들을 감싸고 있다.
궁전의 수는 얼른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하나같이 보석으로 지은 듯 휘황한 빛을 내뿜는다. 그 너머로 보이는 건 세상에……용들이다. 아니 쿤다리였다.
아홉의 쿤다리가 공중에 떠 있었는데 그들의 머리가 있는 방향에 이곳에서 본 그 어떤 것보다 화려하고 거대한 궁전이, 한가로이 떠다니는 하늘 위 구름처럼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건 어떻게 하늘에 떠 있단 말인가? 저 정도를 하늘에 띄워 놓으려면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할 텐데. 난 감탄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계 궁전에 도착한 것이다. 긴장하자. 긴장…..
“마계의 성지에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저를 따라 오십시오.”
우리 앞에 나타난 이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단지 입은 옷이 여타의 보아오던 것과 다르다는 정도였다.
검의 흑의였는데 반지르르 윤기가 돌았고, 그것도 그리 풍성하지 않아 전신을 가리고 있진 않았다. 무릎 위를 살짝 덮고 있을 정도의 길이에 팔도 맨살을 드러냈다. 허리와 어깨엔 역시 검은색의 가죽띠로 보이는 게 장식되어 있을 뿐이다.
그는 우리를 큰 대로로 인도해 간다. 그곳엔 우리 일행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마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끄는 건 말과 비슷하나 다리가 여섯인 거대한 마수였다. 족히 2천이 넘을 우리들 일행을 네 대에 나눠 태우고는 그 큰 대로를 질주했다.
정말 크다. 모든 게 크구나. 이 길만 해도 이런 마차가 열 대는 거뜬히 달리 수 있겠어. 마차의 폭이 5장이니 50장이 넘는 셈이군. 한참을 달렸는데도 아직도 까마득한 느낌이었다. 멀리서 볼 때와는 또 다른 전경들이다.
군데군데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그들은 초원에 한가롭게 드러눕거나 앉아 담소를 나누며 무엇인가를 먹고 있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들이었다. 곁에 있는 누군가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오는 건데. 여기야 말로 인간세에 펼쳐진 낙원이구나.”
그래, 마계에 대해 부정적인 내 눈에도 그렇게 비치니 저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한참을 달려 우리가 당도한 건 하늘에 떠 있는 궁전의 아래였다. 그곳은 광장이었다. 광장의 중앙에 역시나 거대한 건축물이 우뚝 세워져 있다.
세모꼴의 건축물이었는데 면이 네 게였다. 그 옆면에는 수백 개의 계단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있다. 난 고개를 들어 공정에 떠 있는 궁전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놈들이 있나? 높이는 까마득했다. 침투하기엔 쉽지 않은 높이였다. 저 거리를 들키지 않고 잠입해 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으로는 중원 수뇌부들이 왜지 저 곳에 있을 것만 같다. 광장의 중앙에는 거대한 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백 개는 족히 넘을 계단을 지닌 건축물이었다. 계단 하나 높이가 반장은 될 듯 싶었다. 그 밑에 당도하자 우리들을 인도해 온 사람이 말했다.
“모두 내리십시오.”
그는 우리를 밑에 두고서 계단 위를 뛰어 올라갔다. 무림인들의 경공을 보는 듯한 몸놀림이었다. 계단의 상층부에는 또다시 작은 탑처럼 생긴 것이 있었는데 그곳에 원래는 없던 문이 생기며 그가 안으로 들어갔다. 난 주변을 다시 돌아보았다.
뒤로 돌아서자 내 눈에 이곳의 전체 전경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지대가 중앙으로 갈수록 높은 것 같다. 워낙에 미세한 차이여서 오면서도 쉽게 느끼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궁전들과 유리고 된 집. 내가 여기의 구조를 보고 느낀 건 철저한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 같은 예감이었다. 영역과 공간이 은연 중 구분되어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아작은 모를 일이었다. 아무리 주변을 살펴봐도 감시 병력은 없다. 자신감인가?
“여러분들은 오늘 성전에 입전하는 의식을 치러야 합니다. 루시퍼 님을 왕으로, 영원한 주인으로 섬기고자 결정하신 분들은 입전 의식을 거치는 순간 마계의 신민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그 즉시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아직 망설이고 계신 분들은 입구 쪽에 있던 유리궁전에 머무시게 됩니다.
여기까지 오시는 동안 이미 결정하신 분들도 계실 테니…..입전의식을 치르실 분들은 이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아까와는 다른 사람이 우리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걸어 나온 곳은 탑의 제일 하층부, 즉 우리 바로 앞이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다수의 사람들이 망설이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간다.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그들 무리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탑 안은 아래로 경사져 있었고 복도는 어지럽게 얽혀 있어 안내자가 없이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몇 번이나 복도들이 한곳으로 모이는 광정을 거쳐 왔다. 이곳은 지하다. 지하가분명하다. 상당히 복잡한 미로로 구성되어 있는 건 그만큼 공간이 넓다는 의미다. 지나치며 보니 복도마다에는 문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는데 아마도 그곳에 거주하는 누군가가 있을 듯했다. 대체 이곳에 수용하고 있는 인원은 얼마나 될까? 온 땅에서 몰려 온 사람들을 여기 다 수용한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지상에 있는 건 보여 주기 위한 거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무는 건 다른 곳에 있을 거다.
무리는 몇 번의 과정을 통해 분류되기라고 하는 듯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결국엔 나와 같이 움직이는 자들은 기껏 50명 정도에 불과했다. 넓기는 정말 넓구나. 가도 가도 끝이 없어.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이 바뀐 건 여러 차례였고, 지금 또다시 인계하기 위해 멈췄다. 한 자리를 맴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길 다시 나가는 것도 문제다. 이래서야 길을 찾을 수도 없다. 나는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거기가 거기인 듯 비슷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복도의 벽면 하단 쪽에 미세한 홈이 선처럼 그어져 있었는데 그 안을 채우고 있는 색깔이 계속 바뀐 것 같았다. 나는 재차 확인을 위해 면밀히 살폈다. 역시 좀 전에는 녹색이었는데 지금은 검은색이다. 그리고 색깔이 바뀌니 우리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인수되었다. 벌써 스물 다서 번째. 어디까지 갈 셈인가?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니 그들도 이젠 지친다는 표정이었다.
“이제 다 왔습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이 당분간 머물 곳입니다. 마계 신민으로 최종 인정이 최종 인정이 될 때까지는 여기가 여러분들이 머무셔야 할 공간입니다.”
조금 전과 다름없는 복도다.
덜컹
문을 하나 열어 한 명을 안으로 들여보낸다. 내 차지는 열두번 째였다. 안으로 들어가 휘 둘러보니 별게 없다. 다섯 평이나 됨직한 방에 침상 하나와 탁자, 의자 하나가 전부다. 여긴 그럼 일종의 대기실인 셈인가?
의자에 앉아 잠시 정리를 해보았다. 분명 의식이란 걸 한다고 그랬다. 한 사람씩 하지는 않을 거고 그럼….. 그때가 내게는 유일한 기회다. 난 탁자에 놓인 과일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향긋한 향은 거기서 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저들의 의심을 살지도 모른다. 그래서 손에 넣고 진기로 녹여 버렸다.
침상에 누워 눈을 감았다. 조금일지라도 피로를 풀어 줄 작정이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해 보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낯선 곳에 누워 있다는, 더군다나 마계의 소굴에 들어와 있다는 불안감과 가족드로가 동료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다. 그래서 운기를 했다.
[파펀.]
‘그’다. 그가 날 찾아 온 것이다.
“말해라. 듣고만 있을 테니. 너도 알다시피 지금 대화를 나눌 형편이 아니다.”
[너, 정말 대단하구나. 어떻게 여길 들어올 생각을 한 거지? 너 제 정신이냐?]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제정신이 아니지. 어떻게 제정신일 수가 있겠느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빨리 빠져 나가라. 여긴 네가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다. 여긴 무림이 아냐.]
난 대답하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또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 더 이상 그 사실을 들취내어 날 비참하게 만들지 마라.”
[넌 지금 마지막 기회마저 스스로 던져 버리려 하고 있다. 알고 있느냐? 여긴…. 네가 와서는 안되는 곳이다. 절대로.]
난 이번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냥 운기에만 전념했다.
[모든 일을 네가 망쳐 놓았다. 네가 조금만 생각이 있었다면 이런 경솔한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넌 때로 지나칠 정도로 감정적이고 단순하다. 이루고자 하는 목적보다 지금의 네 감정이 더 중요하다고는 말하지 마라. 물론 가족의 안위가 염려된다는 건 나 또한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네가 여기 온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널 봄으로 인해 그들은 절망할 거다. 왜 그런 건 생각하지 않지?]
“때로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내 머리와 가슴은 일치되기보다 어듯날 때가 더 많아. 내 가족들이, 내 동료들이 내가 오지 않았으면 차라리 어딘가로 도망이나 갔으면 하고 바란다는 것 나도 안다. 그렇지만….그들이 그걸 원하는 것과 내가 그렇게 하는 건 엄염한 차이가 있어.
내가 그들을 믿고 있는 만큼 그들도 날 믿고 있다. 알겠나? 내가 오지 않는다면 난 이후 영원토록 내 스스로를 비겁자라고 생각하게 될 거다. 난 그들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없겠지. 모든 걸 얻어도 신뢰를 잃으면 다 잃는 거다. 그리고 나…..무사히 빠져 나갈 거다. 반드시….“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젛겠군. 한 순간도 잊지 마라. 어떠한 경우에도 순간의 감정으로 인해 널 포기하지 마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영원의 시간에 비한다면 인생은 순간일 뿐이다.]
좋은 말이군. 그래, 네 말대로 그랬으면 좋겠구나. 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지금 심정으로는 그렇게만 된다면 난 내 영혼이 소멸당해도 기뻐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원이란 내게 전혀 실감나지 않는 개념이다. 짧을 수도 길 수도 있는 인생 백 년초자 감당하지 못해 비틀거리는데 영원이라. 후후, 달갑지 않군. 역시 그것도 내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겠지.
나는 뭔가? 태너아는 것에도 죽는 것에도 내 의지는 전혀 관여하지 못하고 무작정 떠밀려 다니다 어, 여기 내가 왜 있지, 하는 순간 삶은 끝나겠지? 그리고 또 영원의 시간 속에, 윤회의 굴레를 뒤집어 쓰고 시답잖은 수행을 한담시고 헤매고 다녀여 하는 건가?
영격 완성? 그걸 내가 원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영원토록 삼류 따라지가 되는 건가? 주류에서 떠밀려 그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가 되는 건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나그네가 낫지. 그래, 나그네. 정착하지 않고 떠돌다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관계를 맺지 않고 왔는지 갔는지조차 모르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지만 그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는 나그네. 그런데 난 이미 관계를 맺었으니…… 이것도 글렀군. 태어남과 동시에 누구의 무엇이 되어야 하니 이 또한 내 뜻과는 상관없군. 자야겠다. 술이 있었으면 좋겠어. 왜 이리 간절할까…..
잠시 눈을 붙였던 것 같다. 문을 벌컥 여는 소리에 깨어났다. 어슬렁거리며 일어나 보니 한 사람이 날 쳐다보고 있다.
“나오시오. 곧 의식이 시작되오.”
나에게 말을 하는 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분명 인간의 생김새였다. 정말 인간일까? 이들이 마라인가? 모르겠다.
난 떠밀려 밖으로 걸었다. 사람들의 대열에 뒤섞여 움직였다. 내 기억으로는 아까 왔던 곳으로 되짚어 나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분명했다.
이번에도 한참을 가야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거리가 짧았다. 사람들이 밀려 복도가 밀려 복도가 꽉 차자 난 그 자리에 섰다. 저 말리 내다보니 거대한 문이 서서히 올라가고 있다. 바깥이었다. 분명 지하였는데 바깥으로 나오다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쨌든 밖으로 나왔다.
나와 보니 아까 그 세모꼴의 탑이 있는 곳이었다. 그 가운데 내가 서 있었다. 내 밑으로 내 위로 층층이 계단이 있고, 그 곳마다 사람들이 빽빽이 서 있다.
저 밑을 내려다보고 난 어찌 된 영문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까 보다 탑의 높이가 훨씬 높아져 있었다. 지하에 숨어 있던 나머지가 땅 위로 솟아 올라온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낭패였다.
난 생각하기를 큰 대전이나 광장 같은 곳에서 의식이 치러질 거라 여겼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라면 빠져 나가기가 쉽지 않다. 밑에서도 위에서도 우리들을 지켜보는 자들은 있었다. 그 누구도 앞, 뒤 사람 때문에 가려지는 일은 없었다. 서로 높이가 다르고 그 차이 또한 반장이나 되었기에 그건 당연했다. 어쩌지? 좀더 기회를 엿보자.
“모두 내 말에 집중해 주시오. 난 의식의 집전을 맡은 나찰이오.”
나팔이라면 마신이란 말이다. 순간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최초로 나타난 마신인 셈이다. 탑의 꼭대기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 역시 짧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어둠처럼 검다. 다른 마인들과 다른 게 있다면 어깨 뒤로 내려뜨린 망토를 걸쳤다는 것이다.
얼굴은 역시 사람의 얼굴이었다. 초장부터 마수들만 겪어서인지 왠지 섭인견이 생긴 것일까? 예전에 태산에서 본 마신이란 자의 모습은 분명 사람이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마신들이 흉측하고 기괴하게 생겼을 거라 여기다니.
“의식은 아주 간단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생령입니다. 아직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각성이 없겠지만 의식을 통한 효력은 동일하니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에게 어떠한 불이익도 가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단지….. 여길 나가시기만 하면 된니다. 아시겠습니다? 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부하실 분 있습니까?”
잠시 뜸을 들인다. 그가 뜸을 들이는 시간 동안 난 극도로 초조해졌다. 의식을 치르게 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럼 아무도 안 계신 걸로 알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마계는 우주의 모든 영혼들을 속박과 굴레에서 해방하고자 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건 영원토록 계속된 윤회의 사슬을 끊고자 함입니다.
마계를 창조하신 메타트론 님과 영도자인신 그 분의 아들 마황 루시퍼 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그 대역사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일에 동참하신다면 이후 영원한 생명과 즐거움을 누릴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죽고 태어남을 반복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듣고 그대로 마음에 새기십시오. 나는 내 영원의 순결을 걸고 이후 마계의 뜻을 따라 복종하고 충성하며, 마지막 승리를 거두는 날까지 변함없이 마계의 일원으로 남을 것을 맹세합니다. 자, 이대로 마음속으로 되뇌이십시오.“
흐음, 저건 시켜도 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번엔 두 손을 모으고 가슴 위에 얹은 뒤에 큰 소리로 말하십시오. 그 순간 여러분은 마계의 일원으로서 이 영광된 역사에 동참하게 됨은 물론이요, 우주의 위대한 해방자로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놈의 목소리거 점점 커져 감에 따라 사람들의 목소리도 더불어 커진다. 여기저기 서 있는 마인들의 눈이 매섭게 번뜩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두 손을 모으고 가슴에 올리기는 했다. 그렇지만 난 더 이상 어떻게든 할 수 없었다. 말이 지닌 효력에 대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에게서 들었다. 영혼의 맹세, 말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했다. 차라리 영원토록 태어나는 걸 반복하는 게 낫지, 네 놈들의 주구 노릇은 못한다.
저 멍청한 소리를 내 입 밖으로 내려면 뇌의 절반쯤은 부서져야 가능할 것이다. 난 순간 이곳에 내가 서 있다는 게 역겹다는 생각마져 들었다. 마인들이 비어 있는 공간을 따라 왔다갔다하며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인다.
[파천, 해도 상관은 없다. 물론 네가 진실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사실 지금 하고 있는 의식은 효력이 없다. 루시퍼 앞에 가서 맹세하고 그에게 절하는 순간, 효력은 발생한다. 그 순간 영혼은 그의 것이 된다.]
그런가? 잘됐군. 더 이상은 놈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거든.
“나는 내 영혼이 순결한지 모르지만 어쨌든 마계의 뜻에 따라 충성복종하고 마지막 승리를 거둘지 어쩔지 변함없이 마계의 일원으로 남아 있을 것을 약속합니다.”
어차피 이 정도라면 내 소리는 묻힌다. 단지 그들이 살피는 건 그 모습뿐이다. 이놈들은 이 의식을 통해 모든 사람들에게 이제 너는 마계의 일원이다, 라는 자각을 심어 주고자 함인 것 같았다. 난 이 의식의 무효함을 ‘그’에게 들었음에도 마신이 시키는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왠지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마지막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열광적이었다. 목이 터져라 외치는 사람들은 이 순간이 지나면 신이 되기라도 하는 양 미쳐 있었다. 무엇이 저들로 하여금 저렇게 광분하게 만든 건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유혹 때문인가? 저 화려하고 거대한 궁전들을 보고? 그도 아니면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좋다는 안도감으로? 하여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난 정말이지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그들과 동류 의식으로 합일되지 못한 내 또렷한 의식은 이 순간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겹고 무료했다.
한참이 지나자 저절로 소리들이 잦아들었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혼이 나가서 외치는 자도 보였다. 그에게로 마인이 다가가더니 귀에 대고 뭐라고 하자 그 자는 그제야 조용해졌다.
난 그 순간 입 밖으로 풋, 하고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 마인이 그에게 가서 한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작게 속삭인 말이지만 그 정도를 못 들일 리는 없다. 그가 말하길.
‘그만해라, 멍청이. 너 때문에 마신님이 기다리고 계시잖아. 너무 튀려고 그러지 마라. 오히려 미움 받는다.’
후후, 정말 재밌는 놈이군. 사방이 조용해지자 그제야 마신이 입을 연다.
“자, 이제 여러분은 모두 마계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마지막 절차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이 우주 전체를 다스리실 루시퍼 님을 뵙는 일입니다. 오늘 했던 것처럼 또 한번의 맹세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후에야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신분과 직무가 주어질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의 목표는 전 우주적인 영혼들의 해방입니다. 그럼 어디로부터의 해방이냐? 윤회의 질서를 관장하는 신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우리 최후의 적은 신입니다. 그 전에 인간계와 마계가 힘을 합해 천상계와 무한계와 귀계와 선계를 통일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천궁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의 얘기는 이후에도 장장 한 시진이 넘게 어ㅣ어졌다. 사람들은 서 있음에도 지겨워하거나 힘들어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도무지 이 초인적인 인내심은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나는 아까부터 좀이 쑤셔 죽을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표정 관리까지 해야 하는 이중적인 부담이 날 더 괴롭게 했다.
마신이 사라지자 마인들은 우리들을 있던 곳으로 몰아갔다. 잡아먹기 위해 살을 찌우는 소를 몰고 가듯이 말이다.
난 내 거처로 지정된 방에서 왔다갔다하며 생각에 잠겼다. 도무지 방법이 떠오리지 않는다. 여길 어떻게 빠져 나가느냐부터가 문제였다. 어떻게 운이 좋아 빠져 나갔다 치더라도 내가 없는 사이 또 다른 집회라도 있다면 참으로 곤란한 일이다. 금방 들통 나게 될 테고 이안은 비상 체제로 돌입하게 될 거다.
물론 나 하나 사라졌다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고, 위에 보고라도 되면 잠입은 훨씬 힘들어질게 아닌가? 난 그래서 조금만 더 기다리기로 했다. 한참 있으려니 아까 방으로 들어왔던 그 마인이 또다시 날 찾았다.
“교육이 있다. 모여라.”
아까와는 달리 반말이었다. 이래서 세상은 믿을 놈 없다니까.
한 백여 명 정도 되는 것 같다. 백여 명 이상은 충분히 수영할 공간에 사람들이 모였다. 빙 둘러져 있는 의자에 한 사람씩 앉고 나자책임자인 듯싶은 사람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는 거만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아직 생령이다. 아직까지 생령을 교육시켜 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날 잘 따라 준다면 우리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거다.”
저건 마치 문파에 처음 입문한 사람들을 교육하는 교두들을 보는 것 같군. 저 말투와 태도도 영락없어. 이런 식으로 소수 단위로 나누어 교육을 하는 건가? 그런데 무슨 교육을 한다는 거지?
“여러분들은 어차피 마황님을 뵙고 난 이후에는 각성을 위한 관문을 거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은 여러분들이 그 동안 잊고 있던 전생의 기억들과 원래의 자기를 찾아 주는 과정이다. 물론 그때가 되면 모든 걸 알게 되고 이 중에는…… 고급영자여서 순식간에 마신으로 위치가 조정되는 자들도 나올 것이다. 그때는 날 잊지 말고 찾아주면 고맙겠다.”
그리고는 씨익 웃는다, 허허.
“자, 그전에 내가 여러분들에게 이 시간 가르칠 것은…. 천상계나 다른 차원계의 고급영자들도 잘 모르는….마계의 진정한 역사와 우리의 목적, 행동 강량, 마계의 구조와 조직 구성 등이다.
여러분들이 마계에 신속이 적응하기 위해 필요한 잡다한 상식들을 상세히 친절히 가르쳐 주는 곳이 이곳이며, 그걸 담당한 자가 바로 나다. 내 강의 시간 동안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손을 들고 말해 주면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설명하겠다. 자, 그럼 시작하겠다.“
그가 하는 얘기들은 대부분이 내가 아는 것들이었다 .물론 천만에게서 들은 얘기들이 태반이었지만 때때로 ‘그’에서게 들었던 내용도 나왔다. 어떻게 된 거지? 이건 다른 차원계의 고급영자들도 잘 모르는 마계의 내부적인 이야기들인 것 같은데 어찌 그가 알고 있었을까?
그의 얘기를 듣고 있으며 내가 내린 결론 중 하나는 이 마계라는 곳은 철저한 계급 사회라는 것이다. 천마교는 여기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상명하복은 기본이어서 그 어떠한 불합리한 명도 윗사람이 내리면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서열은 기본적으로 영격의 정도에 기초하며 능력이 탁월할 경우에, 다시 말해 전투력이 예외로 뛰어나다거나 할 경우엔 그에 걸맞은 위치를 확보할 수도 있다. 마인이 사례로 든 경우가 천마의 얘기임을 깨닫고 난 기분이 묘했다. 대마신 이상은 모두 타락한 천사들이다. 이건 다시 말해 인간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 그들과 대등해질 수 있다 해도 쉽게 그 자리로 오를 수 없다는 얘기도 된다.
그렇지만 최초로 인간이 대마신이 되었다. 그 바람에 여섯이었던 대마신이 일곱이 되었다고 마인은 말했다. 현재 마계에는 일곱의 대마신이 있다. 그렇다면 천마를 대신해 누구 그 자리를 꿰찬 건가? 혹시 전에 보았던 그 여자인가? 아니면 다른 인간? 외부에서 영입했나?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다 난 내 처지를 깨닫고는 염두를 굴리기 시작했다.
모임이 파하자 난 곧 바로 행동 개시했다. 지금이 가장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언제 또 다른 집회가 있을지 모르기에 금방 끝난 지금이야말로 가장 적절한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첨마잠형술에 진인이 준 보자기까지 덮어썼다.
난 방을 나가 복도를 따라 걷다가 천장으로 몸을 띄우고 아주 서서히 이동해 갔다. 아까 봐두었던 통로 쪽으로 가다 보니 저쪽에서 두 명의 마인이 내 쪽으로 오고 있었다.
난 그들을 무시하고 그냥 앞으로 갔다. 저들 정도에 발각된다면 아예 포기하는 게 나을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문 앞까지는 오기는 했지만 나갈 일은 막막했다. 난 기다렸다. 누군가 나가거나 들어오기 위해 문이 열리기를.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으려니 몇 명의 마인이 문 앞으로 다가오는게 보였다.
“오늘 교육생들 중에 고급영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모르지. 대부분의 고급영자들은 대항하다 죽거나 지금 포ㅍ포 잡혀 있는 것 같던데. 이들 중에서 있을지도 모르지만 좀 희박하겠지.”
“생령들이라 그런지 몰라도 싱싱하던데. 내가 신이라도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어.”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며?”
그르르릉
문이 열렸다. 그들은 나가며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몰라, 나도 그런 얘기는 들었는데 무슨 일인지는 알 수가 없지. 혹시 다른 차원계에서 공격할 기미가 보인다든가,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럴 수도 있지. 다음엔 자기네들 차례니 그냥 가만있지는 않을 거야. 그래봤자 소용이 없겠지만 말야. 마신님들을 당해낼 수 있겠어?”
“하여간 이번 인간계 장악은 성공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야.”
“그러게. 인간들이 이렇게 쉽게 두 손 들 줄은 몰랐어.”
“이게 다 강약을 적절히 가미했기 때문이야. 더군다나 인간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먹을 걸 이용한 것도 조효했고. 만약 바로 힘으로 강제하려 했다면 이런 성과가 없었을지도 몰라. 그리고 아직 끝난 것도 아니잖아? 이미 어느 정도 각성한 고급영자들도 어딘가에 숨어 기회를 노리고 있고 선맥도 한 번은 여길 치러 올 거야.”
“난 오히려 그때가 기다려져, 요즘은 영 따분해서 말이야. 신참들 보는 맛도 생각보다 재미없고.”
“그야 위에서 워낙 엄격하게 하니 그렇지. 조금만 지나 봐라. 살판날 거다. 노예로 분류된 놈들 다루는 게 난 제일 기다려져, 크크.”
난 놈들의 뒤를 따라 가며 얘기를 듣다 탑의 꼭대기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 위에서 내려다보니 주위엔 아무도 없다시피 했다.
간혹 보이긴 했지만 날 발견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기로 가야 한다. 쿤다리들이 궁전의 주변을 떠돌고 있는 게 시야에 잡힌다. 마신들 이상은 모두 저 위에 산다고 들었다. 저 어마어마하게 큰 궁전이야말로 마계의 핵심인 셈이었다. 저 쿤다리 놈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부터가 염려되는군. 까짓 해보다. 높이는 상관이 없다.
스스스스
미세한 소음이 들리자 난 긴장했다. 이 정도의 소리도 위험하다.
난 공기의 흔들림이 없도록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한 마리도 아닌 아홉 마리의 쿤다리를 한꺼번에 보게 되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런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 것ㅇ르. 이놈들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그 위엄에 찬 신비한 모습들 때문이었다.
거의 5장 거리에서 바라다본 모습은 더욱 멋있었다. 그들을 자세히 보니 하나같이 두 눈을 감고 있다. 명상이라도 하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지는 것이다. 다행이다 싶었다.
내부의 궁전으로 들어가는 건 의외로 쉬었다. 너무 경계가 허술하다는 게 오히려 난 마음에 걸렸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했다. 감히 누가 이곳에 잠입할 생각 따위를 하겠는가? 게다가 우주에서 어쩌구 하는 위인들이니 그 자신감이 또 어느 정도이겠는가.
내부의 모습은 황활 그 자체였다. 궁전에 나가고 들어옴을 제한하는 문 따위는 없었다. 이제 보니 저번 그 여자가 그렇게 많은 보석으로 치장한 이유를 알겠구나.
그런데 이 희귀하고 빛나는 보석들의 이름들은 다 뭐란 말인가?
이 모두가 이 땅에서 얻은 건 아닐 테고, 마계에서 가져 온 것인가? 그도 아니면 원래부터 있던 궁전을 옮겨 온 것인가?
안으로 들어선다는 게 두렵고 떨릴 정도였다. 여기에 천마와 내 가족이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단 하나였다. 밑에는 마신들이 없다. 결국 여기에 둘 수밖에 없을 터. 좋다, 한 번 찬찬히 찾아보자. 유리보다 더 매끄러운 바닥을 딛고 싶었지만 참았다.
허공에 떠서 난 천천히 전진해 나갔다. 기둥을 장식한 건 하나같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천룡의 형상이었다. 자신들이 용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니 궁전 전부에 온통 용을 새겨 놓았다. 천장은 쓸데없이 높기만 했고 복도도 지나치게 넓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아 마음이 놓이는 한편 다른 불안이 들었다. 내가 지나온 복도 외측으로는 곧바로 외부로 나가는 곳이 개방되어 있다. 그곳을 통해 쿤다리의 자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참 이상한 전경이었다.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듯한 느낌. 그리고 궁전에 들어 온 순간 알 수 없는 엄숙함이 날 지배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갈수록 불안했던 애초의 마음까지 가시는 듯했다. 돌아다니다 마신들과 맞닥뜨리기도 했다. 그들은 다행히도 내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난 한참이 지나다 이 넓은 궁전의 구조를 제대로 알 수조차 없었다. 계속 겉돌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작심하고 조사하고 다녔던지라 중심쪽으로 이동해간다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그곳은 궁전의 외부를 이어주는 복도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런,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그러게. 대마신이었다고는 하지만 너무 융숭한 대접이 아닌가?”
나는 잘못 들어왔다 여기가 나가려다 이런 소리가 들리자 멈췄다.
“물론 마황께서 알아서 하시겠지만 만약….그의 지난 행적을 아시고도 그를 중용하시겠다 하면 자넨 어쩌겠는가?”
“다른 대마신들이 가만 있겠습니까? 저번 일월교 때가 마지막 기회였지요. 그가 만약 그때 일월교주를 도와 세상을 혼란에 빠트렸다면 훨씬 일은 수월했을 겁니다. 아무리 루시퍼님이 하시는 일이지만…… 그건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예전의 일은 눈감아 준다 해도 이번 일만은 …..용납이 안 됩니다..”
“그런데….이건 내 생각이네만, 아마도 또 그런 일이 있을 것도 같데.“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하여간 우리들 뜻도 어느 정도 정리해 둘 필요는 있어.”
“그렇죠. 나찰과 아수라의 뜻만 하나로 통일시켜도 루시퍼님은 그리 성급한 결정을 내리시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우리 입장에서는 그가 다시 대마신이 된마면…..좋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약간의 긍지 정도지 좋을 건 뭔가? 하여간 이번 일은 진통이 좀 있을 듯해. 루시퍼님의 성격으로 봤을 때 뜻을 잘 굽히시지 않을 거고, 대마신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거고. 그러니 그런 일이 있기 전에 우리가 먼저 입장 표명을 하자는 거지.”
“알겠습니다. 나찰들은 제가 포섭해 보겠습니다.”
“참, 그건 그렇고 파천이라는 자의 아이와 아내는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
난 나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보람을 찾게 되어 기뻤다.
“제가 아무리 내전 시위라고는 하지만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서궁 쪽에 있을 겁니다. 듣기로는 그들 역시나 바알세불과 마찬가지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살아 있었구나. 그런데 대접이라니? 그들이 왜 그 정도의 대접을 한단 말인가? 그 점만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서궁이라 했던가? 서쪽이겠지. 난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무작정 움직여 갔다. 그들의 얼굴만이라도 보기 위해서였다.
몇 번이나 길을 헤매다 한 곳에 있는데, 두 놈이 내 밑을 지나간다.
“꼬마 녀석이 말을 너무 안 듣는단 말야. 저런 대접을 해주니 자기가 대단해서 그런 줄 아나 봐. 먹으라면 얌전히 먹을 일이지. 그리고 우리가 꼭 이런 것까지 해야 되겠어?”
“하라면 해야지 별수 없잖아?”
“말이 돼? 산에 가서 짐승을 잡아 오라니. 루시퍼님의 명이니 하긴 한다만….”
“쿤다리에게 얘기해 놔야겠군.”
난 놈들이 온 방향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저곳이다. 저곳에 환아가 있다. 녀석! 괴목의 과실을 거부하고 있나 보군. 그래, 내 아들이니 오죽하겠느냐. 난 급한 마음에 조금 속도를 붙였다.
스스스스
어딘가? 어디에 있느냐, 환아?
“들어가겠습니다.”
“필요 없어요.”
“이건 과실이 아닙니다. 그리고 전혀 해가 없는 음식입니다..”
“그냥 가져가세요. 별 생각 없으니.“
환아다. 내 아들 환아의 목소리다. 저 안에 내 아들이 있다. 밖에 서서 우유처럼 책을 받쳐 든 여자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화려하고 널찍한 실내가 조금 보였다. 그녀가 문을 완전히 열었을 때 나 또한 안으로 들어섰다.
“드셔야 합니다. 더 이상은 저도 곤란합니다. 지금 나찰들을 시켜 산짐승들을 잡아 오라 했으니 그때까지 이걸 드세요.”
“전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으니 나가 주세요.”
“한 가지만 말씀드리죠. 공자가 생각하는 것만큼 이곳이 나쁜 곳은 아닙니다. 제가 아수라이긴 하지만 필요 없는 살생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여러 생을 인간으로 살기도 했지요. 절 믿고 이걸 드세요. 맛은 모르겠지만 허기는 면하게 해줄 거예요.”
그리고는 생긋 웃었다. 난 왜 한 번도 여자 마신이 있을 거란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저들은 인간이었다 마신이 된 존재들이다. 그래서일까, 내가 여지껏 생각해 왔던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고, 난 이런 내 생각에 놀라 거부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걸 놓고 가겠어요. 저번에도 그랬지만 공자께서 거부하시는 한 생선이든 산짐승의 고기든 구해다 놓겠어요. 그러니 이번 한 번만 이걸 드세요.”
“알았어요. 놓고 가세요.”
“그럼 공자,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왜 저리 깍듯하게 대하는 걸까?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문이 닫히자 환아는 의자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는 그릇에 담긴 걸죽한 죽을 들여다보며 한참을 고민하는 것이었다.
“휴우.”
한 숨을 쉬는가 했더니 손을 들어 수저를 집어 간다.
[먹지 마라, 환아.]
내가 전음을 보낸 걸 듣고 환이는 흠칫 놀랜다. 그리고는 사방으로 고개를 돌려 날 찾는다.
[지금 여기 와 있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기가 곤란하니 이대로 얘기하자. 네 엄마는 무사하냐?]
순간 환아의 눈에 눈물이 그득했다. 쓱 팔로 문질러 닦더니 고개만 끄덕였다.
[화아는?]
끄덕
[아빠가 오지 않아서….많이 미웠니?]
고개를 숙이더니 가만 흔들었다. 난 그 녀석 가까이 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손길을 느꼈음인가, 어깨를 들먹인다.
[나 이제 가봐야 한다. 살아 있는 걸 확인 했으니, 난 또 가야 한다. 아직은 아빠가 너와 화아와 네 엄마를 구해낼 힘이 없지만……..언젠가는 다시 구하고 오마. 약속하마.]
환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난 녀석의 등을 쓸어 주었다. 내 마음도 아프단다. 이렇게 밖에 못하는 아빠의 무능이 나도 부끄럽구나. 그렇지만…꼭 다시 오마.
“왜 오셨어요?”
작은 소리였다. 나는 처음에 다른 누군가가 이 방 안에 있어 그 말을 한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놀랐다.
“왜 오셨나구요? 외숙부가 오지 말라고 한 말 전해 듣지 못했어요? 오지 말라고, 오지 말라고 한 말을요. 여기 왜 오셨어요!”
난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온몸이 굳어졌다. 환아는 거의 고함치듯 말하며 한쪽으로 걸어갔다.
“전, 약속을 지켰어요. 그리고 앞으로도 지킬 거예요.”
환아가 움직이는 모습이 내게는 그림처럼 느껴졌다. 정지해 있던 그림이 갑자기 화폭을 찢고 나가 내 눈 앞에 서 있는 것처럼. 환아는 여전히 울구 있다. 그리고 바들바들 떨고 있다. 환아, 왜 그러니? 왜? 환아의 손이 무엇인가를 잡고 흔들었다.
그르르릉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방의 벽이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왜 벽이?
짝짝짝짝
“현명한 아이야. 아주 훌륭했어. 역시 넌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박수소리가 막 들리기 시작할 때쯤 난 천장으로 솟아오르며 사방을 경계했다. 이런 세상에. 벽이 다 내려간 뒤에, 그 뒤에 있는 존재들이 보였다.
“파천, 널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