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17화 : 페나인 전투의 여전사 아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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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17화 : 페나인 전투의 여전사 아레나


페나인 전투의 여전사 아레나

선계의 권역에 근접하는 뜰이라 그런지 수련관들도 품위가 있고 조용했다. 대낮부터 수련관에서 땀을 흘리고 있을 영자들은 드물 것이라 예상했던 밴살렛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에 압도되고 말았다.
“이건 생각보다 더 대단한데?”
밴살렛의 눈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건 수련을 하고 있는 영자들의 진지한 모습들이었다. 뜰의 특성상 각종의 이종족들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들의 태도에서는 하나같이 진지함만이 감돌았다.
안으로 깊숙이 접어들자 여러 영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백여 명은 넘음직한 영자들을 앞에 두고 큰 소리로 강연을 하고 있는 자를 밴살렛은 주의 깊게 살폈다.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클 듯한 체구에 선계 특유의 흰옷을 걸친 투박하게 생긴 위인이었다. 두 눈은 횃불처럼 빛나고 수염은 가슴을 뒤덮을 정도로 길고 탐스러웠다. 입을 열 때마다 수련관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큰 소리가 흘러나온다.
밴살렛은 여기저기 앉아 강연을 경청하고 있는 무리들의 맨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지금까지 영계가 혼탁해진 것은 다른 누구를 탓할 바가 못 되요.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개개인의 잘못이 빚어낸 일임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요. 자신이 먼저 바로 서고, 남을 꾸짖어 바른 길로 인도하며, 부족한 자를 채워 주고, 약한 자를 보살피며 나아가 큰 뜻을 품고 정진하는 것이야말로 영자들의 본분일진데, 하나같이 사리사욕에 얽매어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고 욕심을 채우는 데만 급급하니 지금과 같이 혼란한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흔히들 선계와 천상계에 이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는 자들도 보았습니다만 어찌 우리들의 무관심만이 잘못의 전부일 수 있겠소.
물론 선계와 천상계가 제 수련에만 급급한 나머지 무한계나 귀계에 등한시해 왔음에 잘못이 없다고 말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인간일 때는 몰라 정진을 하지 못하고 새롭게 영체를 입어 새 삶을 사는 우리들은 알면서도 하지 못하니 무엇이 더 어리석은 일입니까!
수련은 영혼을 살찌우는 일이요, 욕망을 거세하여 장차는 완전자에 이르는 도리이건만 이를 망각하는 힘을 얻는 데만 급급하니 이 또한 잘못이징. 수련을 함이 어찌 남을 억압하는 데 쓰일 것이며, 힘이 있다 해서 어찌 제 욕심을 채우는 데 사용될 수 있겠소이까?
마계가 영계를 하나로 통일하여 왕국을 세우겠다 선언하고 나선 지금에도 뜻있는 몇몇 영자들을 제외하고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으니, 장차 닥칠 위난에 무엇으로 대처하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의 위기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말입니다. 모두들 자신들을 다시 한 번 돌아봐 주십시오. 우리들 모두 애초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우리 모두의 관심은 유일했습니다. 완전한 길로 들어서기 위해 용맹정진 하던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길이 험난하고 멀어 포기한 때를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악마는 다른 특정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옥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니 세상이 악마가 날뛰는 지옥이 된 것이 아닌지요.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의 모습으로, 순수한 열정만으로 자신을 다스려 가던 그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영력을 키움에 우선 순위를 두지 말고 영격을 세우고 완성시켜 가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본계가 마련한 수련관에 드실 때는 새로운 비결이라도 얻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기대를 품고 오셨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런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찬을 수 없을 겁니다. 힘을 지닌 자가 그 힘으로 의로운 일을 행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불의한 일을 하기 위해 힘을 얻고자 노력함은 자신만이 아니라 남까지 망치는 일입니다.”
이때다. 잠잠하던 무리 중에 하나가 일어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듣자니 너무 고리타분한 소리만 하는구려. 수련관을 잠시 이용함에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꼭 밟아야 하는 거요. 했던 얘기들을 재차 늘어놓는 게 지겹지도 않소? 사실 우리 중에 누가 그걸 모르는 이가 있소이까. 알지만 되지 않는데 어쩌란 말이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당신 말대로 사는지가 궁금해지는구려.”
온몸이 긴 털로 가득 덮여 있는 바이사인이었다. 성미가 급한 그들의 특성을 고려하면 지금까지 듣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칭찬해 줄만 했다.
그의 말에 동조하는 듯 여겨지는 비웃음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이와는 반대로 그를 비난하는 소리도 적지 않았다. 선인은 침착하게 바이사인에게 말했다.
“귀하의 질책에 부족한 저는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심판은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영원히 없을 것 같습니까?”
바이사인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예전 바이사인들은 두 패로 나뉘어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바이사의 전설적인 현인들이라 추앙받는 고란과 하멜이 심판이 있다, 없다로 논쟁한 것이 그 시초였다. 신의 개입이 있을 것이라는 쪽과 영원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는 편이 팽팽하게 대립하다 결국엔 서로 간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끝난 바이사의 전쟁.
지금까지도 바이사인들은 기억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동족을 상잔케 했으니 다른이들로부터 비웃음을 사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한탄했다. 선인이 그것을 물은 의도는 명백했다.
“심판이 있든 없든 개인의 정진이나 수련과는 하등 상관이 없지요. 굳이 심판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수련을 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고리타분한 얘기라고 했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요. 알지만 되지 않는 일이기에 서로를 더욱 독려해야 하는 겁니다. 모두 입을 다물고 있으면 옳은 일이 때로는 그릇되게 판단되기도 합니다. 너무도 분명한 진리지만 때로 잊혀지고 묻혀 가는 게 현실이지 않습니까?
가장 기본적인 것에 충실하지 못하고서 어찌 큰 것을 말하겠습니까? 제 임무는 수련에 임하는 여러분들이 혹시라도 잊고 있을지 모르는 본원적인 것들을 들춰내어 바른 수련을 돕는 것입니다.
어찌 이런 중차대한 임무를 반복됨이 싫어서 게을리 할 것이며, 듣기 지루하다 하여 거부할 것입니까? 심판이 있든 없든 우리는 우리 할 일을 바로 알아야 하고 바른 길에 서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선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밴살렛은 하품이 다 날 지경이었다. 그는 무리들 중으로 파고들었다. 그가 여기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뒤에서 파고드는 밴살렛을 영자들은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며 한참을 뒤지고 다니던 밴살렛은 머리를 살짝 저었다.
‘이놈이 여기 오지 않은 건가? 아냐, 분명히 이곳으로 왔다고 했어.’
바이사인과 선인간의 논쟁 아닌 논쟁이 계속 이어지는 동안 영자들은 재미있다는 표정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작태를 보며 밴살렛은 어처구니없어 했다.
‘허구한 날 이런 짓거리를 하며 산다는 것도 참으로 존경할 만한 일이야. 역시 내게는 수련관이 체질에 맞지 않는단 말이야. 세상이 어찌 되든 나랑 무슨 상관이람. 따지고 보면 모두 혼자인 걸. 수련을 하든 욕심을 채우며 하고 싶은 대로 살든 결국 이 지겨운 삶이 끝나지 않는다는 건 변함없는데 말야. 아, 저기 있구나. 어쭈, 저놈이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지을 때도 다 있었던가?’
밴살렛의 두 눈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목표한 인물의 뒤로 다가서더니 그는 한 손을 상대의 어깨에 살짝 갖다댔다.
“누구?”
뒤돌아보던 인물의 눈이 커다랗게 부릅떠진다.
“밴살렛!”
“쉿, 조용히 하고 따라 나와라.”
둘은 될 수 있는 한 다른 이들의 시선 집중을 피하고자 살그머니 몸을 일으켜 조심스레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완전자가 없다고 부정하는 건 아니오. 결국은 완전자 중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게 문제가 되는 겁니다. 만약 그들 중 단 하나라도 현세에 나서서 그들이 터득한 진리들을 설파하였다면 이런 혼란은 애초에 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바이사인은 끝까지 선인의 말에 대들고 있었다. 밴살렛은 고개를 저었다.
‘역시 바이사인들의 고집은 알아줘야 해.’
수련관 밖으로 나온 밴살렛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음흉스런 시선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자의 두 눈을 마주보았다.
“네가 여기 웬일이냐? 참 별일이네. 세상이 알아주는 망나니인 네가 수련관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을 누가 믿어주겠어? 너 설마하니 개심이라도 한거냐?”
“쓸데없는 소리 마라. 라치오가 널 찾는다.”
두 눈이 동그래질 정도로 놀라는 모양새가 영 달갑지 않은 듯했다.
“라치오가 왜 날?”
“그건 가보면 안다. 자, 가자.”
“싫다!”
“뭐?”
돌아서던 밴살렛이 홱 몸을 돌려 세우고는 상대를 노려보았다.
“팡, 네 놈의 간이 못 보던 동안 많이 부은 게로구나. 감히 라치오가 부른다는데 가지 않겠다는 거냐, 지금?”
“그래.”
“허허허.”
밴살렛은 어이가 없었는지 한참 동안이나 헛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나를 부르는 이유를 대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
팔짱까지 끼며 시선을 외면하는 팡. 밴살렛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앞에서 흔들어대며 위협했다.
“너 제정신이냐? 네가 지금 지껄인 말을 있는 그대로 라치오에게 전해도 후회하지 않겠지?”
그제야 팡은 화들짝 놀라며 기어 들어가는 소리를 했다.
“밴살렛, 너도 알다시피 라치오는 너무 냉정하고…… 또 무섭단 말이다. 날 왜 부르는지 가르쳐 준다면…… 생각해보마.”
팡은 갑자기 자신을 라치오가 호출할 일이 뭐가 있을까를 생각해봤지만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참나…… 알았다, 가르쳐 주마. 라치오가 네게서 알고 싶어 하는 게 있어. 너는 그냥 날 따라가서 라치오의 궁금증을 풀어 주기만 하면 된다. 널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니까 겁먹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순간 밴살렛은 화가 치밀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밴살렛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팡을 슬슬 달래기 시작했다.
“너 아레나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지?”
팡의 얼굴이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굳어 가는 걸 밴살렛은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가 아레나의 위치를 알고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
“가서 라치오 앞에서 직접 말하든지 아니면 지금 여기서 말하든지 결정은 네가 해.”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난 아레나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정말이야.”
밴살렛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자 팡은 호들갑을 떨며 부리나케 손을 휘저었다.
“정말이라니까.”
“아레나의 거처를 알고 있을 유일한 놈이 바로 너라고 라치오가 말했다. 네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넌 라치오 앞에 가서 말해야 한다. 나는 네 말을 믿어 주고 싶지만 널 데려 가지 않으면 내가 곤란해져. 그나마 너와의 친분으로 미리 충고해 두는데 네 말대로 그놈의 성질 머리는 친구인 나도 가리지 는다.”
밴살렛의 그 말은 분명 협박이었다. 평소 라치오를 무척이나 두려워하던 팡은 심장이 맹렬한 속도로 뛰는 걸 느꼈다.
“만약 네 놈이 꽁무니를 빼기라고 한다면 넌 앞으로 두고두고 라치오에게 시달리게 될 거다. 이건 내 분명 장담할 수 있다.”
그건 사실이었다. 팡은 라치오에 대해 다른 일반적인 영자들보다 좀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무서운지, 또한 잔인한지를.
“좋, 좋아. 가자. 그렇지만…… 정말 아라ㅔ나가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래, 그렇게 말하란 말야. 자, 따라와.”
팡은 우거지상을 하고 밴살렛의 뒤를 따랐다.

라치오 앞에 선 팡은 옆에 있는 자들이 분명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심하게 동요한다. 라치오 주위에는 평소 잘 보이지 않던 그의 친구들까지 함께 있었기에 팡의 두려움은 더욱 큰 것이었다.
‘이 무법자들 앞ㄷ에서 무사히 살아 나갈 수 있을까?’
밴살렛은 라치오 옆에 앉으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놈이 따라 오지 않으려고 해서 애먹었다. 분명 알고 있는 듯한 눈치긴 한데 말야.”
“간이 부었군.”
듣기 거북할 정도로 탁한 음성의 주인공은 팡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민대머리에 새겨진 알록달록한 문양들은 얼굴에까지 이어져 있었다. 드러난 팔과 다리는 근육이 잘 발달되어 그가 전사거나 적어도 사냥꾼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케 했다.
팡은 그가 누군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슈트레의 충직한 수하였으나 지금은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숨어 사는 인물이었다. 북부권의 이름난 전사인 그레엄의 문하고, 한때는 장차 그레엄의 뒤를 이을 것이란 기대를 한 몸에 받기도 했었다.
슈트레의 초빙으로 그레엄의 곁을 떠나온 그는 처음에는 그런 대로 별 충돌 없이 잘 지냈었다. 당시 슈트레에게는 아름다운 연인이 있었다. 뜰 내에 자자했던 그녀의 미모에 로이 역시나 혹하긴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현재는 자신과 계약 관계에 있던 자의 여자였기에 애써 마음을 다스렸지만 운명은 그를 저주의 사슬에 채울 준비를 마친 뒤였다. 슈트레의 여인이자 야망의 화신인 그레이스는 예전과는 다른 슈트레의 태도에 은근히 화가 나 있는 중이었는데 슈트레의 환심을 사고자 로이를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그에게 접근한다.
그녀의 이런 의도는 잘 먹혀 들어갔다. 슈트레는 그레이스와 로이가 자신의 눈을 피해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고 곧장 앞뒤 상황을 헤아릴 여유도 없이 로이를 잡아다 감금한다.
그레이스는 바이롬의 제자였기에 어쩌지 못하고 다시 바이롬으로 돌려보내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지만 쉽게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슈트레는 로이를 소멸시키고자 한다. 이때 로이를 몰래 구해 간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라치오였다.
지금까지도 로이의 실종은 슈트레에게 큰 불안거리로 남아 있었다. 그가 그레엄에게로 돌아갔을 거라 단정한 터였기에 장차 어떤 식으로든 그레엄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해 오고 있었다.
로이를 구해 간 인물이 라치오일 거라고 팡은 평소부터 생각해 오던 차였지만 막상 그 현장을 대면하고 있자니 입 안이 바짝 말라오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맺혀 갔다.
‘로이 옆에 있는 자는 그렌달, 그 옆에는 베붓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모르겠어.’
어느 누구 하나 만만한 인물은 없었다. 그렌달이나 베붓 역시나 로이에 못지 않은 강자들이었다. 라치오의 주변에 쟁쟁한 강자들이 즐비하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팡은 슈트레가 눈엣가시같이 여기는 라치오를 가만 내버려 둘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이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다. 팡의 시선은 마지막 한 인물에게서 떨어질 줄 모르고 멈췄다. 자신이 지닌 정보로도 도무지 알 수 없는 자. 그렇지만 그가 풍기는 기운은 로이나 베붓 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라치오 뒤에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서 있었는데 팡에게는 거의 라치오게 버금가는 인물로 여겨졌다.
“내가 네게서 알고 하는 건 단 하나. 이미 들었을 테니 간단하게 말하지. 아레나는 어디 있나?”
차가운 라치오의 음성에 팡은 소름이 다 돋을 지경이었다.
“모, 모르오.”
밴살렛은 설마하니 라치오 앞에서조차 팡이 부정할 줄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던지라 벌떡 일어서며 팡에게로 다가섰다.
“너 설마 소멸당하고 싶은 거냐! 그녀가 있는 곳을 대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네 생명보다 그녀에 대한 정보가 더 중요하단 말이냐?”
밴살렛으로서는 도무지 팡의 이런 태도를 ㅇ이해할 수 없엇다.
“정말 모르냐?”
라치오는 처음과 다름없는 태도로 은근한 어조를 발했다.
팡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알고는 있소. 그렇지만 말할 수 없소.”
팡의 말에 라치오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변화했다.
“왜지?”
“라치오, 그대가 아무리 무섭다고 해도 난…… 신의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오. 그녀에게 약속했소. 그 약속은 내 생명보다 중요하오.”
“흐음.”
라치오의 손이 깍지 껴진다. 밴살렛은 그것이 라치오가 평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자신도 모르게 하는 습관적인 동작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한참 동안 정적은 팡을 괴롭게 했다. 언제까지나 열릴 것 같지 않던 라치오의 입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신의를 지킨다는 건 꽤나 중요한 일이지. 네 뜻을 존중해 주마.”
생각과는 달리 라치오가 너무도 순순하게 포기하는 듯하자 팡의 얼굴이 언제 그랬느냐 싶게 활짝 피어났다.
“고맙소. 이 은혜는 꼭 보답하겠소.”
“하지만…… 그건 그거고 아레나가 어디 있는지는 꼭 알아야겠단 말야. 어쩌지? 어떻게 생각하나, 팡?”
팡의 얼굴이 다시 허옇게 질려 갔다.
“날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난 모르오. 아니, 말할 수 없소. 죽어도 내 입을 열 수는 없소.”
“죽어서 입을 열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어. 그래서 난 널 소멸시키지 않아. 난…… 내 목적만 이루면 그만이다. 그래서 말인데…… 너도 신의를 지키고 나도 내가 알고 싶은 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런게 있을리 없다고 팡은 생각했다.
무슨 꿍꿍인지 밴살렛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쿤사, 할 수 있겠지?”
라치오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인물이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물론!”
순간 팡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다, 다, 다, 당신이…… 죽음의 술사라는…… 바로 그 쿤사?”
쿤사.
술법으로 가장 유명한 곳은 라곤이다. 라곤의 성읍에서 술법을 뽐낼 인물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약하게만 보이는 사내 쿤사는 예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라곤과 대적할 정도로 술법에 능통한 집단이 있었다. 죽음의 술사라고 불리던 ‘파이온’이 바로 그들이었다. 그들은 라곤과 오랜 기간 동안 적대하며 전쟁을 벌였다. 지금에 와서야 파이온이 패해 깊은 지하로 숨어들었지만, 그들의 술법이 라곤에 비해 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얼마 전부터 중부권에 새롭게 등장한 강자가 있었으니 그는 파이온의 후계자라고 자처했다. 그는 뚜렷한 목적도 없이 온갖 전투에 참여해 혼전을 만들이 일쑤였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자신의 술법을 시험할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그 쿤사가 이곳, 라치오의 옆에 있었던 것이다. 팡은 도무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엇다.
‘어떻게 쿤사가 라치오의 친구가 되어 있는 거지? 둘이 어떻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연관성은 없었다. 팡은 지금까지의ㅏ 라치오에 대한 판단을 모두 백지화시켜야만 했다.
“그냥 대답하기 싫다면 내가 훔쳐주지.”
팡은 다가서는 쿤사를 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아레나, 날 살려줘. 제발 아레나……’
팡은 이 순간 아레나를 생각했다. 다른 자들은 그레이스가 아름답다고 했지만 팡만은 아레나가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해왔다. 그녀는 친절했고 상냥했다. 그녀는 적어도 팡에게만은 너무도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에게 바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마음을 아레나는 모를 것이다. 끝끝내 알 수 없겠지만 한번도 자신의 일방적인 사랑을 후회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팡은 그녀로 인해 위기에 처했다. 그렇지만 두려움은 있을 지언정 후회는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힘이 없어 그녀를 보호해 주지는 못하지만 죽음으로 그녀에 대한 사랑을 증명할 수는 있었고, 이를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수도 있었다.
‘저 자가 바로 그 쿤사라면…… 내게서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겠지. 그래, 차라리 그냥 죽자.’
“아, 잠깐 쿤사.”
거의 팡의 지척까지 다다른 쿤사가 멈칫했다. 눈을 감았던 팡도 두 눈을 번쩍 떴다. 어떤 결심이 팡의 눈에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때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레나를 만나려는 이유를 네게 말하지 않은 것 같군, 팡.”
“…….”
“난 아레나를 어찌 하려는 게 아냐. 그녀는 강하다. 난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거다. 페나인 전투의 최후 생존자 중 하나인 그녀의ㅏ 힘이 내게 필요하다. 내게 그녀가 있는 곳을 감춰야 할 이유는 없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날 믿어라. 나, 라치오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팡은 라치오의 깊숙한 눈을 바라보았다. 한없이 빠져들 것만 같은 그 눈에서 팡은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었다.
“내게 시간을 주시오. 아니, 먼저 그녀에게 물어 보게 해주시오. 그녀가 동의한다면 그대와의 만남을 주선하겠소.”
팡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의 제안에 라치오는 잠깐 생각하는 눈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도 그리 나쁘지는 않겠군. 좋다.”
“라치오, 그녀가 거부하고 더 깊이 숨어든다면 그때는 어쩔 건가?”
로이가 다급하게 뱉어내는 말에 라치오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녀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거물이다. 그녀가 숨기로 작정하면 쿤사라도 찾지 못한다. 처절했던 페나인 전투의 주역인 그녀는 명예가 무언지를 아는 진정한 전사.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팡, 가서 그녀에게 전해라. 나, 라치오가 도움을 청하더라고. 나와 만날 의향이 있다면 이곳으로 찾아오라 일러라.”
“좋소, 그렇게 전하겠소.”
팡은 아직까지 자신을 노려보는 쿤사의 시선을 피해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부리나케 밖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저놈이 도망가면…… 라치오, 이번 일만큼은 어째 너답지 않은 것 같은데.”
밴살렛의 말에 라치오는 웃었다.
“아니, 아레나의 힘을 얻으려면 그녀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우리가 만약 팡에게 강제로 그녀의 위치를 알아냈다면 그리고 그녀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과연 그녀가 진심으로 우리 일을 돕겠는가?”
밴살렛은 라치오의 말에 일견 동의하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그럴 거면서 왜 일을 이리 복잡하게 진행시킨 거지?”
“처음부터 팡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통했을까?”
“지독한 놈, 너는 아주 징그러운 놈이다.”
밴살렛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뇌까리는 투덜거림에 모두는 소리나게 웃었다.

무한계의 남부권과 북부권에는 전사를 양성하는 곳이 많았다. 전사가 되고자 희망하는 영자들에게서 일정양의 루단을 받고 전투 기술을 가르쳤으며 원하는 곳으로 진출할 수 있게끔 도움을 주기도 했다.
가장 방대한 지역인 중부권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전투가 가열될수록 전사의 필요성은 가일층 극대화되었다. 이에 따라 전사 양성소라 할 수 있는 ‘펠라모’역시 독특한 지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남부와 중부를 가르며 흐르는 고요의 강 루하스 언덕에 첫 펠라모가 생겨난 이후 주로 북부권과 남부권의 뜰과 매소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펠라모가 세워졌다.
슈트레는 지금은 와해되고 없는 북부전사동맹의 수석전사 출신으로 선계의 뜰에 자신의 모든 힘을 집중시켜 갔다. 일정한 소속이 없는 떠돌이 전사들을 수하로 거뒀으며, 지니고 있던 방대한 루딘을 풀어 세력을 형성해 갔다. 지금에 와서 이곳 선계 뜰에서의 그의 입지는 그 누구도 함부로 대적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거대한 궁을 세우고 자신의 눈과 귀, 손과 발 역할을 할 심복들을 도처에 배치해 갔다. 일단 선계의 뜰에 들어선 자는 선계 쪽이 아닌 슈트레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이런 그를 선계에서 제지하지 않고 두고 보는 건 선계가 온건한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슈트레의 세력은 적어도 겉으로는 펠라모를 표방하고 잇었기에 그들을 제어할 명분이 없었던 것이다.
슈트레의 궁은 전체 뜰의 넓이에 일할을 차지할 정도로 넓고 컸다. 북서부 방면 거의 대부분의 지대가 그의 사유지나 마찬가지였다. 그 중심에 거대하고 웅장한 궁이 세워져 있었고 그곳엔 적어도 일천을 헤아리는 영자들이 상주했다.
궁의 내부 중 한 밀실에 몇 명의 인물들이 착석해 있었다. 그들은 한쪽을 향해 고개를 들고 경건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비록 과장된 거짓일지라도 장내 분위기를 엄숙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나 슈트레는 전사의 명예를 걸고 여러 동지들 앞에서 성스런 약속을 하고자 한다.
중부권의 패권 다툼은 이제 직접적으로 관련된 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다. 전 무한계가 장기화된 전투에 몸살을 앓고 있으며 나아가 서로간의 분열이 더욱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장차 마계의 침략이 있을 것임을 우리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똘똘뭉쳐 그들에게 대항해도 부족한 판에 이 무슨 어리석은 짓이란 말인가. 중부권의 패권 다툼을 저지시켜 평화를 정착시키고 마계의 침략에 대비함은 너무도 절실해졌다. 이에 뜻있는 여러 동지들과 함께 나는 이 일을 도모하고자 한다.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겠지만 우리의 명분이 퇴색하지 않는 한 반드시 이룰 수 있으리라 본다.
예전 내가 몸담고 있던 북부전사동맹이 중부권의 강자들에 의해 맥없이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졌을 때 나는 한 가지 맹세를 했었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저 고약한 중부권의 쓰레기들을 내 손으로 쓸어 버리겠다고.
이제 때가 왔다. 우리 모두 한뜻으로 결속해 이 성스런 전투를 결행해 이기고 이길 때까지 멈추지 말자. 최후의 승리를 얻을 그날까지.”
평소 슈트레의 모습과는 상이한 태도 때문이었을까? 스무 명 남짓한 인물들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 갔다. 따지고 보면 이들 간에 무슨 신의나 충성심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일정 기간 종속되는 계약 관계일 따름이었다.
“슈트레 님이 진정 원하시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군요. 중부권의 패권을 다투는 일에 참여하시겠다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으신 건지.”
길잡이로 계약된 루카의 질문에 슈트레는 방긋 웃었다.
“날 믿지 못하겟나 보군. 그건 곤란한데? 우리의 힘은 냉정하게 따져 아주 미약하다. 서로 간에 믿음과 신뢰가 없다면 이번 거사는 해보나 마나야. 다시 말아지. 비록 부족하다 하나 나는 분쟁을 종식시키고 싶다. 중부권의 패권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나를 어리석은 그들과 동급으로 생각한다면 매우 섭섭한 일이지. 마계가 한바탕 휘저어 들어올 텐데 땅따먹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내 마음속에 작은 욕심마저 없는 건 아니다. 난…… 마계와의 전쟁에 선봉을 서고 싶고 그들의 침략에 맞서 싸운 특별한 자로 기억되고 싶다.”
“영웅이 되고 싶으시다, 이 말씀이십니까?”
“굳이 갖다 붙이자면 그런 셈이지.”
루카는 슈트레의 위인됨을 잘못 평가하고 있었나, 하는 의아심마저 들었다. 지금껏 슈트레에 대해 들어온 바에 의하면 권력에 대한 그의 집착은 대단하다 했다. 바이롬과 연합하고, 떠돌이 전사를 모으고,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옛 북부동맹의 생존자들을 규합하는 등의 모든 행보가 중부권을 한 손아귀에 쥐어 보려는 의도로 이해해 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슈트레를 제 주제도 모르는 놈이라고 비웃지 않았던가!
‘아니었던가? 내가 그의 숭고한 뜻을 오해하고 있었던 건가? 하긴 그래봤자 당신의 능력으로는 그 무엇 하나 이루기 쉽지 않겠지. 북부전사 동맹의 수석전사였다고는 하나 그 지위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고, 당신은 그저 흔하디흔한 중급 전사에 불과하지.’
“이번 선계와 천상계의 선발대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내가 수집한 정보에 의하면 아라한과 선인들, 일부 수련자들까지 포함된 대단히 강력한 조직이라 들었다. 그 중에 물론 파천이라는 생령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의 최종 목표는 광명을 가져오는 것. 거의 불가능하지만 만에 하나 성공하게 된다면 무한계의 분쟁을 수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무한계를 통일해야만 가능하고 이런 이유로 내가 원하는 것 또한 그 자가 광명을 취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기엔 무수한 난관을 넘어서야 한다. 가장 큰 장애는 역시 현 중부권의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다. 누가 적이 될지 모를 예측불허의 상황 가운데 그 자를 보호하여 목적지까지 가는 일은 험난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선발대에 포함된 자들이 아무리 강자라 해도 안전은 장담할 수 없는 일. 난 선발대를 수행하는 일에 동참하기로 했다. 그들이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하도록 여러 방면에 걸쳐 힘껏 도울 생각이다.
그래서 우리 쪽에서 출정할 전사의 수준도 어느 정도 제한하겠다. 수의 많고 적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과연 우리 중에 중부권 전사들과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실력자가 몇이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그 동안 나는 오늘을 위해 중부권의 여러 지역에 상당한 조력자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들과의 연합이라며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루카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이것 예상과는 너무 다른데…… 난 그가 제왕의 유물을 얻기 위해 이번 일에 개입하려는 줄 알았건만…… 두고 보면 알 일이지.’
“또한 우리 뜻에 바이롬의 전사들도 동참하기로 했다. 이번 일에 영계 전체의 사활이 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모두 각오를 새롭게 하도록!”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라.”
“전 오랜 시간 동안 수련자의 길잡이를 해왔기에 무한계의 상황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부합니다.”
“그렇지. 그래서 내가 자네를 특별히 초빙한 것이 아닌가.”
“정말 슈트레 님이 그런 의도로 우리들을 불러들인 것이라면 차라리 가만있는 것이 선발대를 도와주는 일이 될 겁니다.”
“무슨 뜻인가?”
“중부권의 패자들이라 자처하는 그들의 경계심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습니다. 그들은 슈트레 님이나 바이롬 전사들이 대거 압박해 들어오는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일 자들이 아닙니다. 결국 그들의 경계심은 선발대에게까지 이어질 것은 뻔한 일. 결국 슈트레 님의 출정은 선발대의 성공 확률을 더 떨어뜨리는 결과로 나타날 것입니다.”
루카는 스스로의 생각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확신에 가까운 그의 단정에 슈트레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우리가 대규모 전력을 고스란히 보유한 채 한꺼번에 중부권으로 들어선다면 그와 같은 양상을 빚겠지만 소수 정예로 비밀리에 침투한다면 상황은 다를 것이다. 또한 중부권에는 우리와 동맹 상태에 있는 세력들도 있다. 그들이 누구인지 밝힐 수는 없지만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자네의 뜻을 충분히 고려하여 일을 진행시켜 나가겠네.”
루카는 더 이상의 의견 개진이 필요 없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반대가 이미 결정된 사항을 번복시킬 정도로 대단한 것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슈트레는 자신감 가득한 어조로 또다시 입을 열었다.
“때가 온 것이다. 자유라는 이름 하에 공평하게 주어졌던 기회는 이제 거두어질 것이다. 누가 진정 위대한 전사인가를 전우주는 명확한 시선으로 가려낼 것이다.
악덕한 모리배들은 흩어질 것이며, 예전에 그들이 그러하였듯이 어느 한적하고 황폐한 땅에서 자신의 나약함을 원망하며 비참한 생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원래대로 돌아가야 한다.
나, 슈트레가 말하거니와 전사들 가운데 높고 위대한 자가 가려저 거룩한 슈메르 산에 올라 온 우주에 그 이름을 드높일 것이다. 그 이름으로 하나된 전사들은 마계를 무찔러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 올 것이다.”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자들 중에는 전사도, 사냥꾼도 있었다. 그들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슈트레의 충직한 수하인 모쿠가 말하였다.
“바라옵건데 모든 전사들이 슈트레 님의 거룩한 그 뜻을 받들 날이 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속히 이루어져 낮고 높음이 분명하게 가려지게 하옵시고, 용맹스런 전사들을 수하에 거두어 마계대전의 선봉이 되시옵소서. 슈트레 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슈트레 님의 뜻대로……”
“슈트레 님의 뜻대로……”
모쿠의 외침에 모두들 한 목소리로 화답했다. 그러자 슈트레의 두 눈에서 환한 빛줄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파천에 대한 관심은 일부 영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은 한 생령의 등장으로 전 영계가 지금처럼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게 된 건 따지고 보면 천상계와 선계의 움직임 때문이기도 했다.
그에 관련된 소문들은 제 몸을 부풀리며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억측으로까지 번져 갔다. 무한계 전체를 떠돌았지만 그 행적이 신비하기만 한 수련자들이 대거 회동을 한다거나 천상계 천주들이 다시 무한계를 지배하려 한다는 따위의 근거 없는 얘기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중부권의 패자들이 동향도 예상되었다. 결국은 힘을 하나로 합쳐 천상계와 선계의 연합 세력과 일전을 결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외부 소식에 무관심한 영자들이라 하더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소리 없는 움직임들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난다와 너울 등이 바빠진 건 이때부터였다. 파천의 수련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그들이 준비해야 할 일은 상당했다. 천상계의 아라한들이 뜰에 당도하고, 선계에서 차출된 선인들도 일행에 합류했다.
이번 선발대의 책임자격인 아난다의 지휘 아래 그들은 모처에 모여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었다. 선발대 구성에 대한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지 않았기에 이를 궁금하게 여기는 자들이 뜰에 곳곳을 뒤지고 다니는 일도 빈번했다.
그런가 하면 슈트레가 선발대를 수행하겠다며 선계측에 전갈한 것으로 전해져 이에 대한 구구한 억측들이 떠돌기도 했다. 슈트레는 적어도 남부권에서만은 상당히 비중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가 언젠가는 북부전사동맹의 해묵은 일로 중부권에 대해 포화를 터뜨릴 것이란 예상이 있어 왔던 터였다. 대부분의 영자들이 그리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기에, 혹여 그의 선발대 합류에 다른 저의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곱지 않은 시선들이 대부분이었다.
평소 다양한 족속들이 오가는 뜰이기에 번잡함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긴장감이 도는 건 근래에 없었던 일이었다. 모두의 관심은 선발대에 집중되었으며, 그들에 대한 작은 소문 하나에도 뜰 전체가 들썩거리기 일쑤였다.
너울은 거리를 오가는 영자들의 표정을 살피다 깊은 한숨을 토한다.
‘불안과 근심이 가득하구나. 희망 없는 암담한 미래보다 더 큰 불행이 있을까?’
너울은 영자들의 표정이 저마다 어두운 까닭을 곧 있을 마계의 침략때문이라 진단했다. 마계가 다른 차원계에 영향력을 미친 경우는 예전에도 전혀 없지 않았다. 대부분의 경우는 부분적으로 혼란 기도에 불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세력을 거두어 들였기에 그다지 심각하게 대응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대규모 침략을 결행하겠지.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켜 전차원계를 지배하려 들게 분명해. 그들이 지닌 힘은 막강하다. 하나로 뭉쳐 대항한다 해도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단결해야만 그나마 일발의 가능성이라도 높일 수 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단결의 구심점은 찾을 수 없다. 모두 지쳐 있다. 권태감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고 있지만 부정적인 자포자기로 이어지고 있다. 막아야 한다.’
그렇지만 쉽지 않은 일임을 너울은 잘 알고 있었다. 길은 보이건만 그 길의 끝을 알 수 없는 막막함이 모두를 한곳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극단으로 치닫던 자들은 예전에 품었던 숭고한 이상이 점차 멀어져 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다시 돌이킬 수 있음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발길을 돌이키는 용기와 결단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완전자로서 멀고도 먼 여정을 중단한 자들에게는 철저하게 욕망에 충실하는 너무도 쉬운 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 길에 든 자들에겐 놓아 버린 꿈에 대한 아쉬움만 가득할 따름이었다.
절망은 더욱 철저한 타락을 부추겼다. 이런 과정은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진행되어 온 것이지만 근래에 더 가속화되었다. 그 단적인 예가 전사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이었다. 욕망의 충돌로 인해 분쟁은 더욱 첨예하게 대립되고, 이 와중에 패권을 향한 몸부림은 처절해져 갔다.
‘누구를 탓할 것인가. 마계가 인간계나 다른 차원계를 도모하기로 결정하게 된 이유가 그들 스스로 승산이 있다고 보았음이요, 그런 배경은 역시 무한계의 혼란이 힘을 실어 준 것이겠지.’
너울은 뜰의 서북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슈트레가 사유지로 선포한 지역과 경계를 이루는 지역이었다.
중심부를 벗어나서 한참을 날아가던 너울의 눈길이 어느 한곳에 머물렀다. 그곳에는 사방이 호릅나무로 둘러싸인 조그마한 단층 건물이 보였다. 울창한 수십 그루의 호릅나무 사이에 그림처럼 앉아 있는 푸른색의 건물은 비상하는 새를 옮겨 놓은 듯했다.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특이한 모양의 건물 앞에는 작은 공터가 있었는데 그곳에 하나는 쪼그리고 앉았고 하나는 서 있었다.
후루루룩
바닥으로 내려선 너울의 등장을 감지했을 터인데도 둘 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흠흠.”
너울은 일부러 헛기침을 해 자신의 등장을 알렸다.
“왔어?”
음성은 고운 여자의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그녀 앞에 서서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는 너울이 처음 대하는 인물이었다.
‘누구지? 외부와 연락을 두절하고 지내는 걸로 알았건만.’
“별일이네. 너는 또 웬일이야? 당분간은 못 볼 거라 하지 않았었나?”
쪼그리고 있다 일어나 돌아서는 여자의 손에는 땅을 파기 위해 사용되는 듯한 작은 도구가 쥐어져 있었다. 너울은 그녀를 향해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손님이 있을 줄 알았으며 나중에 오는 건데…… 그랬어.”
“객쩍은 소리 말고 안으로 들어가자.”

세 명은 마주 앉았다.
“자, 이건 내가 직접 만든 부르야. 지금까지 만든 것 중에서 가장 맛있게 숙성된 거야. 무척 아끼는 건데 특별히 내놓는 거니 사양치말고들 마셔.”
너울은 원래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술에 대한 선입견을 부셔버린 건 눈앞에 있는 특별한 존재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너는 여전하구나. 아무것도 심지 않으면서 땅을 일구는 버릇도, 매년 술을 담그는 것도, 그리고 처음 대하는데 소개시켜 주지 않는 것도 말이야.”
“아, 참, 내 정신좀 보게. 그런데 꼭 내가 소개를 시켜야 하는 건가? 알아서들 인사하고 그러면 되는 거지.”
“그래, 알았다. 저는 너울이라고 합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팡이라는 이름을 지닌 보잘 것 없는 떠돌이입니다. 아마도 모르실 겁니다.”
너울은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사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하긴 이곳 뜰에서 자신을 모르는 영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워낙에 빨빨거리고 돌아다니길 좋아하는데다 급한 성격 때문에 항상 크고 작은 사건들을 몰고 다니니 그럴 만도 했다.
너울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레나의 처소를 자유롭게 찾아올 정도면 꽤나 대단한 전사일 텐데…..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으니.’
아직까지 아레나가 다른 누군가를 이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하는 건 보지 못한 일이기에 팡에 대한 너울의 관심은 커져갔다.
여전사 아레나는 알려진 대로 외모부터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전체적으로 온화한 듯한 분위기가 풍겼지만 그 가운데 쉽게 범접키 어려운 고귀함이 은연중 내비치고 있었다. 그녀가 전사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우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수련자의 성지라 불리는 메덴의 언저리에서 한동안 떠나지 않았던 그녀가 친구이자 스승이기도 했던 수련자 메사의 부탁을 받았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았다. 곧장 메덴을 떠나 그의 부탁대로 중부권 서북부에 있던 라훌라 부족의 족장을 찾아갔다. 사단은 그 노정에 숨어 있었다.
메사는 원래 라훌라족 출신이었기에 그곳에 지극한 관심을 기울였다. 다른 부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극소수에 불과한 라훌라족이었지만 메사의 관심으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처음 그들을 찾게 된 그녀는 무척이나 기대가 컸다.
메사 정도의 대수련자를 배출한 라훌라족이었다. 그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중부권 서북부를 향해 가던 그녀에게 예상 치 못했던 뜻밖의 일이 발생한다. 그때 마침 근처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하필이며 그녀가 그 싸움의 중심으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그녀는 불필요한 싸움을 원치 않았기에 관여치 않고 그곳을 빠져나오려 했다. 그렇지만 그녀의 뜻은 단지 그녀의 것일 따름이었다.
이미 적아의 구분조차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상황.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앞을 막아서는 자들을 모조리 처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고서도 깨닫게 된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지닌 힘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메사의 도움으로 그녀의 전투력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고, 그 힘은 여타의 전사들을 오히려 능가하는 면이 많았다. 겨우 몸 하나를 빼낼 여유를 찾게 되자 그녀는 곧장 격전장을 빠져 나온다. 그렇지만 이로 인해 더 큰 불행이 발생할 줄은 당시의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아레나는 지체되긴 했지만 원래의 계획대로 메사가 전달하라고 부탁한 물건을 라훌라족에게로 가져 갔다. 불행은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엄습해 오고 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몰래 미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라훌라족의 영토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미행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상당한 전력을 이끌고 라훌라족을 공격한다. 아레나는 이 모든 게 자신의 경솔함으로 인한 결과임을 알게 되었지만 그녀로서도 시간을 돌이킬 재주는 없었다. 사소한 오해로 인해 시작된 일임을 강변하기엔 너무도 늦어 버린 것이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그들의 공격을 막아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제 몸 하나는 지켜낼 수 있었지만 적의 손에서 라훌라족을 지켜낼 수는 없었다. 아레나는 분노했다. 도주하던 적의 뒤를 끝까지 추적해 갔다. 이것이 나중에 페나인의ㅏ 전투라고 명명된 사건의 실체였다.
그녀는 우연적인 개입으로 우세하던 페나인 전사단의 전황은 순식간에 역전된다. 아레나와 투르만의 협공으로 전멸하게 되고야 만 것이다.
투르만 전사단 역시나 예전의 그 일로 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숨죽이고 있어야 할 만큼 당시에 입은 타격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뒤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들 두 세력 말고도 다양한 소속의 전사들이 참전했었다고 한다.
워낙에 치열한 전투였고 대규모 격전이었던지라 당시에 살아남은 전사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에 가서도 페나인의 최후 생존자라는 이름을 전사로서의 최고 명예로 알았으며, 이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아레나만은 달랐다. 라훌라족의 불행이 자신 때문이라 여기고 있었기에 메사에게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게 된 것이다.
아레나는 너울과 팡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하고서는 분위기를 바꾸고자 술잔을 높이 들었다.
“자, 한잔씩들 마시자고. 너울, 안 마실 거야? 팡, 뭐하고 있는 거야?”
두 영자들은 마지못해 잔을 높이 들었다.
“박 터지게 싸우는 전사라는 얼간이들의 앞날에 영원히 불관과 초조와 두려움만이 가득하길.”
그녀다운 말이라고 너울은 생각했다. 아레나는 자신이 전사로 불린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땅의 모든 전사라고 자처하는 것들을 쓸어 버리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되뇌곤 했다.
“아레나의 귀향을 위하여.”
“아레나 남의 귀향을 위하여.”
너울과 팡이 동시에 질러낸 말에 아레나의 얼굴이 살풋 일그러졌다.
“쳇, 술맛 떨어지게…… ”
그러면서도 그녀는 한 방울도 남김없이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너울과 팡은 서로의 시선을 맞추며 술을 한 모금씩 들이킨다. 그때 아레나가 돌변해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목적을 밝혀 봐. 내게 하고 싶은 얘기가 대체 뭐지?”
아레나는 너울이나 팡이 별 일 없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입을 다물고 있었던 건 두 사람을 친구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너울과 팡 모두 먼저 입을 열기를 주저했다. 아레나가 그런 둘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쏘아 붙였다.
“이 자리에서 하기 곤란한 얘기라면 앞으로도 하지 마. 나도 듣고 싶지 않아.”
너울은 급하게 손을 저었다.
“아냐 그런 게…… 단지…… 내놓고 떠들고 다닐 만한 애기는 아니기에 그러는 거지. 하긴 뭐 상관없을 수도 있겠군. 좋다. 말하마.”
“뭔데?”
내가 지닌 부르를 몽땅 내놓으라는 것만 아니면 상관없어.“
너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잠시 뜸을 들였다. 아레나의 입이 다시 열리려는 찰나.
“너도 이번 선발대에 대한 얘기를 들어 봤을 거야.”
“물론 나 또한 귀먹은 건 아니니 들어는 봤지. 그런데?” “호, 그래? 이것 축하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너도 참 골치 아프겠구나. 안됐다. 어쩌다 그런 데 차출되었어, 그래?”
아레나는 진지하게 너울의 불운을 위로한다는 투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네 도움이 필요해.”
너울의 얘기가 끝났는데도 아레나는 한동안 무슨 뜻인지를 몰라 어리벙벙한 모습이었다.
“무슨 의미야?”
“선발대에 널 추천했다. 함께 가자.”
단출한 실내에 갑자기 냉랭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했다. 아레나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스치기 시작한 건 너울의 등줄기에 맺힌 땀이 흘러내린 이후였다.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아냐, 진담이야.”
“농담일 거야. 되도 않은 소리 말고 술이나 마시자.”
쉽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완강하게 거절할 줄은 너울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인지라 당황하기 시작했다.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며, 한 번 결정한 일은 웬만해서는 번복하지 않는 아레나의 올곧은 성격을 잘 알기에 너울은 다급해졌다.
“잘 생각해 봐라. 이번 선발대 동참은 네 생에 두 번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야.”
“기회? 무슨 기회? 시시껄렁한 명예에 환장한 전사 놈들이라면 모를까, 나는 그 딴 것 관심 없다. 마계가 침략을 하든 무한계를 하나로 통일하든…… 그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난 나 하나 버텨내기도 벅찬 몸이야. 네가 날 인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사양한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피하고만 살래? 라훌라의 원한을 갚을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겠단 말이야?”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아레나의 얼굴이 너울을 향해 황급하게 고정되었다.
“너…… 지금 한 말 무슨 뜻이지?” 아레나는 한 가지 맹세를 했었다. 라훌라를 공격했던 일에 관련된 놈들을 하나 남김 없이 처치하기 전에는 메사에게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당신 페나인 전사단을 암중 조종했던 세력은 북부전사동맹을 해체시킨 세력과 동일한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 중부권을 혼란으로 몰고 가고 있는 그들이야말로 이 모든 일의 원흉 중 하나겠지.”
서서히 아레나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려 간다. 너무도 확연한 변화였다.
“그래서?”
“네가 이번 선발대에 합류하게 되면 좋든 싫든 그들과 조우하게 될 거다. 이건 장담할 수 있다. 너 혼자서 그들을 밝혀내고 복수를 하는 건 분명 한계가 있을 거고 결국 벽에 부딪힐 거다.
같이 하자. 네 원수라며 내게도 원수다. 그리고 이왕이면 뜻 깊은 일에 참여하여 일조를 한다면 차후 메사 앞에 당당하게 설 수도 있을 거고.”
너울의 말들은 하나같이 비수가 되어 아레나의 가슴에 박혀들었다. 자책감이 아레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고 지금까지도 일그러진 채 그대로였다.
“복수를, 복수를 할 수 있단 말이지? 놈들을 내 손으로 처단할 수 있다면……”
“하겠나?”
잠시 고개를 숙이고 고민하던 아레나가 번쩍 고개를 치켜든다.
“네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좋다. 내가 사정을 해서라도 합류하겠어.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으마.”
‘하여간 못 말려. 한번 마음을 바꾸니 저리 쉽게 결단하다니. 어쨌든 나로서는 잘 된 일이야.’
아레나의 진정한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너울이었다. 그녀의 힘은 반드시 큰 보탬이 될 것임을 너울은 확신했다.
두 사람의 얘기가 진행되어 가는 동안 팡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화를 보였다. 아레나가 너울의 제의를 승낙하는 순간 팡은 아레나와 반대로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그의 태도를 너울은 주의 깊에 살폈고 아레나도 뭔 일인가 싶어 의아해 하는 표정이 된다.
“팡, 왜 그래?”
팡은 이 순간 갈등을 하고 있었다. 라치오와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내심으로 팡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닙니다. 아레나 님. 저는 그저 아레나 님이 잘 지내시는지 그것이 궁금하여…… 들러 본 것입니다. 저는 이만 가봐야겠군요.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팡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이봐, 팡. 왜 그래? 왜 그러는 거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팡을 보며 아레나는 의문으로 가득한 얼굴이 된다.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던 너울에게 급한 소리로 말했다.
“너 먼저 돌아가라. 난 팡 녀석을 따라가 봐야겠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너울 역시 태연하게 앉아 잇을 수가 없었다. 팡을 뒤쫓아 가려는 아레나의 팔을 낚아챈 너울이 빙긋 웃었다.
“같이 가자. 왠지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것 같군.”
“알아서 해.”
짧게 뱉어낸 아레나가 먼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자 너울은 양팔을 옆으로 벌리며 계면쩍은 표정을 했다.
“나 참 급하기는.”

팡은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매우 빠른 속도였다. 그의 머릿속은 스스로 다스리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게 엉켜 있었다. 아레나에게 라치오의 말을 전해야 했음에도 그는 그러지 못했다. 그녀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불쌍한 아레나…… 나까지 힘들게 할 수는 없다. 아레나가 곧 거처를 떠날 테니 이제는 그들에게 내보일 것도 없다. 라치오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어찌 아레나를 끌어들일 수 있겠는가.’
팡은 각오를 새롭게 했다. 라치오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그 앞에 서면 예전과 다름없이 움츠러들겠지만 이제는 견뎌낼 자신이 있었다. 설사 자신의 영체가 소멸된다 해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자신이 있었다.
차라리 멀리 도망갈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건 잠시의 시간은 벌어 줄지언정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가 이동해 가는 방향은 라치오와 친구들이 있는, 맨정신으로는 결코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아레나와 너울은 빠르게 움직여 가는 팡의 뒤를 몰래 뒤쫓고 있었다. 아레나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팡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말하기 곤란해 하는 걸로 봐서는 나와도 관련이 있는 일이다. 팡, 대체 무슨 일이기에…… ’
한편, 팡 역시나 아레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팡은 오랜 기간동안 한곳에서만 지내 왓었다. 처음 아레나가 선계의 뜰에 왔을 때만 해도 팡은 꽤나 자유분방한 삶을 살 고 있었다. 비록 힘이 없고 겁은 많았지만 자신이 지닌 최대의 강점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사내였다.
그는 전사가 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그에ㅐ게는 전사 수업을 받기 위해 펠라모에 들어갈 만큼의 루딘이 없었다. 결국 그는 정보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평소 다방면에 친분 관계가 돈독했던 그였기에 뜰이나 외부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진상을 캐내는 건 그리 어렵지가 않았다.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하루하루를 평화롭게 지내던 그에게도 위기라는 것이 찾아왔다. 바이롬 전사단의 일급 전사인 라피네가 뜰에 돌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불칸의 수하들을 찾아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물론 그 대가는 팡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의 루딘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의 불칸과 바이롬은 적대 관계에 있었다. 이들의 첨예한 대립은 오랜 기간 동안 이어져 왔던 것이고, 조금만 현명한 영자라면 이들 싸움에 끼어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팡은 별 망설임 없이 이 일을 맡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평소 친분과 동물적인 감각을 이용해 불칸이 뜰에 침투시킨 자들을 하나하나 가려내기에 이른다. 결국 바이롬이 원하는 대로 그들은 모조리 소탕되었다. 팡은 약속받았던 대가에 덤으로 더 많은 루딘을 챙길 수 있었다.
목표했던 루딘을 모두 모으게 되자 팡은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불행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으니. 불칸의 전사들에게 팡에 대한 소멸령이 내려진 것이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 소식을 접하게 된 팡은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그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인물들도 하나 둘씩 그의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혹시나 불똥이 튈까 염려해서였다.
그는 고민 고민하다 바이롬에 도움을 청한다. 바이롬 전사단의 수석전사인 빌로드가 말하길, ‘정식 의뢰라면 받아들이겠다. 널 보호하는 기한에 따라 루딘의 양은 달라진다.’라고 했다.
팡은 그들의 냉정함에 치를 떨며 그곳을 박차고 나온다. 누구 때문에 자신이 이런 위험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런 가당찮은 요구를 한단 말인가. 그는 몸을 숨기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저곳을 불안하게 떠돌던 팡은 한적하고 영자들이 잘 찾지 않는 숲에서 그림처럼 서 잇는 집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그는 약간의 루딘을 소비하기로 작심하고 그곳을 사들이리라 생각했다. 그곳의 주인은 아레나.
처음 그녀를 접하게 된 팡은 그녀의 충격적인 미모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낯선 이방인의 바문에도 아레나는 경계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반갑게 맞아 주지도 않았다. 팡은 우물쭈물하다 결국 용기를 내 ‘당신의 집을 사고 싶소.’라고 말한다. 아레나는 생각해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팡은 아무리 설득해 봐도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는 근처에다 허름하면서도 볼품없는 작은 거처를 하나 짓고 그곳에서 한동안 기거하게 된다.
두 영자 간에 아무런 교류도 없었음은 당연했다. 특히 아레나는 철저히 팡을 외면하고 무시했다. 옆에서 무엇을 하든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몇 번인가 팡이 아레나의 관심을 끌어 보기위해 애를 썼지만 그럴 때마다 심한 모멸감을 감당해야만 했다. 그러던 그들 사이에 획기적인 바전이 이러난 것은 전혀 뜻밖의 일 때문이었다.
별달리 할 일도 없이 무료해 하던 팡은 주변에 호릅나무가 많다는 걸 발견했다. 아레나에게 집 주위에 있는 호릅나무의 뿌리를 조금만 캐낼 수 있게 해달라 부탁한다. 아레나는 대수롭지 않게 그러라고 한다. 팡은 즉시 호릅나무의 뿌리를 이용해 부르를 만들었다. 그리고 오랜 기간이 다시 흘러 팡이 아레나를 찾는다. 그가 내민 건 잘 숙성 된 부르였다.
아레나는 술을 좋아했지만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술을 마셔 보지 못했다. 팡이 수줍게 내민 것이 부르임을 안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태도가 돌변해 그를 친절하게 맞았다. 그리고 두 영자들은 3일동안 만취하도록 부르를 들이킨다.
술에서 깨어난 뒤로 둘은 너무도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팡은 아레나의 청을 받아들여 부르 만드는 법을 자세하게 가르친다. 이렇게 살아가던 그들 앞에 불칸의 전사들이 찾아 온 건 어찌 보면 팡으로서는 행운이었다.
우연히 이곳을 찾은 불칸의 전사들은 소멸령이 내려진 팡을 알아보고는 다짜고짜 공격해 들어왔다. 팡은 이제 죽었구나, 라는 심정으로 체념하고 모든 운명을 묵묵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구원을 받게 되니. 그저 아름다복 신비한 여인으로만 알고 있었던 아레나가 놀라운 신위를 보이며 세 명의 전사를 너무도 쉽게 처리해 버린 것이다.
팡은 감격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아레나 앞에 무릎을 꿇고 스승으로 모시고 싶다고 말한다. 아레나는 어이없어하며 그 이유를 물었다.
지금껏 둘 사이에 친분은 있었을지언정 개인적인 얘기를 아껴 왔기에 두 영자는 서로를 잘 몰랐다. 한참을 귀 기울여 듣던 아레나는 전사가 되고 싶어 하는 팡을 호되게 꾸짖고는 그럴 생각이면 다시는 자신을 찾지 말라고 한다. 팡은 그 이후로 그 건물을 떠났고 전사가 되고자 했던 생각도 바꾸었다. 가끔 아레나가 보고 싶다든가 부르를 마시고 싶을 때 그곳을 찾는 관계로 정착된 것이다.
팡은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아레나가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인가를 조심스럽게 되물어 보았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은…… 내게는 너무도 소중한 존재다. 그녀의 상처를 내 힘으로 치유해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에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제 결심은 마쳤다. 팡은 아레나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그녀를 지켜 주지는 못하지만 위험 가운데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소멸된다 해도 후회는 없다.’

뜻밖의 방문에 라치오는 한동안 팡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이미 그곳을 떠난 뒤였소.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 단서 역시나 발견하지 못했소. 아마도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황급히……”
“닥쳐라. 팡. 네가 지금 누굴 속이려 드는 거냐!”
밴살렛이 눈을 부릅뜨며 팡을 위협했다. 라치오는 의자에 몸을 묻고 물끄러미 팡을 관찰했다. 팡은 전신이 하나하나 쪼개져 해체되는 듯한 기분에 몸서리를 쳤다.
“사실이 아니군. 별일이야.ㅣ 네가 그렇게도 안간힘을 쓰며 장소를 말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모르겠어, 도무지. 혹시…… 팡.”
“말하시오.”
“아레나를 사랑하냐?”
팡의 얼굴이 급격히 붉어진다. 팡은 완강하게 부정했다.
“닥치시오. 아레나 님을 모욕하지 마시오. 난 단지…… 그 분의 친구일 따름이요.”
“좋아, 사랑이든 우정이든 아무래도 상관은 없겠지. 너는 알고 있으면서도 말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이곳에 나타난 것을 보니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를 하고 왔다는 거로군. 난 말야, 자네처럼 신의가 있는 친구를 아주 좋아한다네. 그렇지만…… 그녀가 있는 곳을 알아야겠기에 자네에게 무례를 범할 수밖에 없음을 용서하시게나.”
“마음대로 하시오. 그렇지만 내 입에서는 그 무엇도 들을 수 없을 것이오.”
“자멸이라도 할 생각인가?”
밴살렛이 팡에게로 다가섰다.
“다가서지 마라. 내가 너희들을 당해내지는 못하겠지만 스스로 소멸할 힘 정도는 있다. 더 이상 날 핍박한다면 난 자멸하겠다.”
대단한 기세를 보이는 팡을 향해 로이가 이죽거렸다.
“정신 나간 놈. 정말 대단한 결심을 하셨어. 사랑에 눈먼 어리석은 작자를 여기서 또 보게 되는군.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족속이 바로 너 같은 친구야. 네 그런 결심을 누가 알아 줄 것 같은가.”
로이의 그 말은 사실 팡에게 한다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것이었다. 과거 그레이스에게 농락당해 신세를 망친 장본인이 아니던가. 최근까지만 해도 그녀 역시 자신을 진정 사랑했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이용당했을 뿐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밴살렛이 라치오에게 물었다.
“어쩔 생각이냐?”
결정은 라치오가 하는 것이다. 모두들 라치오를 쳐다보았다. 라치오는 심각한 얼굴이 되어 좀처럼 입을 열 뜻이 없는 듯 보였다.
“라치오.”
밴살렛이 다시 불러 보았지만 다른 데 정신이 팔렸는지 눈길도 돌리지 않는다.
“라치…… ”
밴살렛의 말을 끊으며 라치오의 나직한 웃음이 흘러 나왔다.
“역시…… 내 예상대로 직접 행차하셨군. 귀한 몸이 오셨으니 자리를 정돈해야겠어.”
뜬금없는 말에 밴살렛과 로이는 어리둥절한 기색이다. 단지 쿤사만이 옅은 미소를 보였다.
“그대를 환영하오, 아레나. 그대 같은 유명인사를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다니 나 같은 무명인에겐 무상의 영광이 아닐 수 없구려.”
아레나가 이곳에 와 있다는 말인가? 모두 이런 표정들이었다. 특히 팡의 얼굴은 보기 애처로울 정도로 파리해져 갔다.
‘바보같이…… 그녀가 내 뒤를 따를 것이란 생각을 못하다니.’
팡은 이 자리에서 당장 죽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결국은 자신이 아레나를 이곳으로 유인한 결과가 되고 만 것이다.
“너희들은 뭐 하는 것들이냐?”
스스스스
팡과 밴살렛 사이에 두 명이 등장했다. 아레나와 너울이었다. 실내에 모습을 드러낸 두 영자를 대하는 각자의 심정은 저마다 다른 것 같았다. 라치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나는 라치오라 하오. 그대를 이 자리까지 모신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하겠소.”
“라치오?”
아레나는 그 이름을 처음 들어 본다는 얼굴이었지만 너울은 그렇지가 않았다. 직접 만나 본 적은 지만 들어는 본 낯익은 이름이었다. 뜰에서 밑바닥을 흘러 다니는 하급영자들 사이에서 가장 두려움을 주는 이름은 슈트레가 아닌 라치오라 했다. 그는 한때 이름난 전사였으나 지금은 사냥꾼을 자처하며 온갖 지저분한 일에 관여하여 잇속을 챙긴다고 했다.
‘저 자에 대한 소문이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닌데.’
너울은 다시 한 번 라치오를 자세히 관찰했다.
“당신과 중요한 협상을 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번거롭게 해드린 것이오.”
시종일관 예의를 잃지 않는 라치오를 보며 밴살렛과 로이 등은 참 별일도 다 있다는 표정이었다.
이들 중에 지금 누구보다 긴장하고 있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쿤사였다. 그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은 그다지 많지 않다. 웬만한 일에는 별 흥미를 보이지도 않을 그가 지금 긴장에 휩싸여 있었다. 여전히 여유 있는 모습으로 팔짱을 끼고는 있을지언정 손바닥에 땀에 촉촉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음을 밴살렛 등은 전혀 모를 것이다.
“협상? 너와 나는 오늘 처음 대면하거늘 무슨 협상을 한단 말인가?”
“물론 없었소. 앞으로는 자주 만나야 할 테지만.”
“귀찮으니 간단하게 말해라. 원하는 게 뭐냐? 왜 날 만나고자 한 거지?”
“아, 그렇게 서두르지 말고 일단 자리에 앉아서 얘기합시다. 자, 이쪽으로.”
라치오가 자리를 가리키느 모습을 아레나는 별놈 다보겠다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것도 잠시, 팡의 기죽은 모습을 대하자 아레나의 얼굴이 차갑게 변해 갔다. 너울이 먼저 움직여 자리에 착석했다.
“아레나, 그곳에 서 있지만 말고 일단 앉아 봐라. 얘기는 들어 봐야 할 것 아니냐.”
처음으로 라치오의 시선이 너울에게로 향했다.
‘감춰져 있지만 저 자 역시나 대단한 기세. 누구지?“
뜰에서 두 영자는 모두 상당한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운이 없게도 단 한 번도 대면한 적이 없었기에 라치오는 너울을 알지 못했다. 물론 그가 너울이라는 이름을 모를 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설마하니 아무런 동요됨도 없이 자신이 가리킨 의자에 척하니 몸을 싣는 당돌한 꼬맹이가 너울이라는 선인인 줄은 그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자리를 정돈해 앉자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나 아레나였다.
“너는 지금부터 할 말을 가려서 하는 게 좋을 거다. 별 시답잖은 이유로 팡을 곤란하게 만들었다면……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어.”
밴살렛의 얼굴이 꿈틀하는 순간.
“하하하, 들어 보고 판단하시오. 나 라치오 역시나 그리 한가한 놈은 아니오.”
너울은 그런 라치오를 대하며 만만한 사내는 아닐 것이란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옆에 계신 분을 소개해 주는 것이 순서일 것 같은데…… 내 생각이 어떤 것 같소?”
라치오의 그 말은 달리 해석하면 지금부터 자신이 할 얘기가 당사자가 아닌 제 삼자가 함께 들어야 할 만큼 가볍지 않다, 라는 뜻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런 걸 모를 리 없는 너울이 아레나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너울이라고 하오.”
“너울이라면……ㅣ ”
“너울 선인이시오?”
“으음.”
여기저기서 감탄인지 놀람인지 모를 소리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너울은 그런 반응에 왠지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것 몰라 봐서 실례를 범했군요. 너울 선인이시라면 이 자리에 함께 있어도 무방하겠군요. 오히려 잘된 감도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꺼낼 사안과 무관하신 분이 아니니 말입니다. 어차피 만나 뵈려 했던 분을 일찍 뵙게 되었으니 시간을 절약하게 되었군요.”
너울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선발대에 관한 것입니다.”
“또 그놈의 선발대 얘기인가?”
아레나가 약간은 짜증 섞인 어투로 뇌까리자 너울이 곧바로 받아 쳤다.
“그놈의 선발대라니?”
“하여간…… ” “그렇습니다. 그 선발대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대가 왜 선발대를 운운하는지를 당최 모르겠군.”
“기실 선발대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을 영자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 또한 영자 중의 하나로 지극한 관심을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뭐, 좋소. 그래서?”
너울은 라치오의 말을 재촉했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의미였다.
“이번 선발대의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나 성공 확률이 그다지 높은 건 아닐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
“제가 아레나 님을 뵙고 싶어 한 건 새로운 선발대를 결성하기 위함이었습니다만…… ”
너울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다.
“새로운 선발대라니? 그대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
이번에는 아레나가 너울의 말을 가로 막았다.
“너울, 가만히 있어 봐.”
“흠흠, 저야 뭐 자격이 없지요. 그렇지만 열정만은 누구 못지않습니다. 현재 선발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모르지만 제 생각으로 허점이 많을 거라고 사료되는 군요. 중부권의 치열한 접전 지역을 무탈하게 통과하려면 여러 가지를 동시에 고려해야 합니다.
과연 현 선발대가 그 모든 걸 충족시켜 줄지가 의문입니다. 특히 고매하신 분들이시니 만큼 지저분한 일은 하지 않으실 것이 분명하고, 그런 이유로 상당히 걱정이 됩니다. 제가 현 선발대를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전 선발대의 선발대 노릇을 하고 싶습니다. 일종의 그림자 역할이지요.
저를 비롯한 우리 동지들은 꽤나 그런 점에서 유용할 겁니다. 어떻습니까? 제 제안이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라치오는 아레나를 이 일에 끌어들이고자 만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너울을 동시에 대면하게 되자 자신의 뜻을 솔직히 밝히고 있는 것이었다.
선발대의 선발대 노릇을 하고 싶다. 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선계나 천상계의 인물들은 강하지만 임기응변에 능하지 못하다. 때로는 악랄하고 잔인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는데 선인들이나 아라한들은 그러지 못할 것이다. 이 점을 라치오는 짚고 나선 것이다. 너울ㅇ느 일견 고개를 끄덕이고 싶은 맘도 있었지만 의문이 더 앞섰다.
‘저 자는 그 일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 하는 걸까?’
아무런 유익도 없는 일에 자진해서 나설 자들은 아닌 걸로 보였다. 평화를 바라는 순수한 열정이 동인이 되었다고 믿기엔 라치오의 눈빛은 너무도 복잡하게 비쳐졌다.
‘위험한 인물이지만…… 받아들여도 우리에게 손해는 없다. 아마도 슈트레가 제안하고 나선 것과 일맥상통하는 의도겠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한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어차피 우리들만으로는 역부족인 게 사실이다.’
이때 아레나가 짧게 물었다.
“원하는 대가는?”
이것저것 재볼 필요도 없이 곧바로 물어 보는 아레나를 보며 너울은 내심으로 한숨을 내쉰다.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다면 믿지 않으시겠지요. 우리가 얻고자 하는 건 분명히 있습니다. 한 가지는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선발대나 선계, 천상계가 지불해야 할 대가는 없다는 것. 이걸 먼저 짚어 두죠. 우리가 얻을 몫은……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 얻겠습니다. 우리 또한 선발대의 힘을 이용하는 거라 할 수 있으니 따지고 보면 상부상조하는 겁니다.”
라치오는 솔직했다. 너울은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의심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믿어 보고 싶은 마음이 먼저 였다.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오. 그렇지만 일단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겠소. 그럼 일간 소식을 보내도록 하겠소이다.”
“고맙습니다. 아레나 님은 어쩌시겠습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면 저희들이 지니고 있는 의도를 모두 말씀드리겠지만 거절하신다면 굳이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겠지요. 저희와 동참하시겠습니까?”
아레나가 고개를 가로젓기도 전에 너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레나는 우리 선발대에 포함되었소. 그러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아…… 그렇습니까? 제가 헛다리를 짚었네요. 그럼 이제 우리는 동지가 된 것입니까?”
라치오는 이미 모든 게 제 뜻대로 결정되었다는 듯이 단정지어 말하고 있었다. 너울은 라치오 패거리들과 마주앉아 있는 것이 그다지 썩 좋은 기분만은 아니었다.
“더 이상 용건이 없다면 이만 가겠소. 나중에 봅시다.”
너울이 일어서자 아레나와 팡도 함께 일어섰다. 라치오가 섭섭하다는 투로 말했다.
“이것 아쉽군요.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말입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해야겠군요.”
그런 그를 아레나가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이 매섭게 빛나기 시작했다.
“경고하겠는데…… 다시는 팡을 괴롭히지 마라.”
“어이구, 이를 말씀이십니까. 이제는 그럴 일도 없습니다. 하하하하…… ”
팡은 라치오의 너스레에 고개를 푹 숙였다. 너울 일행이 밖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라치오의 표정이 순식간에 냉랭해진다.
“이제 시작되는 건가?”
밴살렛이 불만이라는 듯 볼멘소리로 말했다.
“너무 저자세를 보이는 거 아냐? 우리가 그럴 필요까지는 없잖아?”
“그런 건 상관이 없다. 우리는 우리 목적만 달성하면 그만이다. 저치들은 대접해 주면 으쓱해져서 상황판단이 흐려지니 이까짓 것 백 번인들 못하겠느냐. 한시도 잊지 마라. 우리가 이때를 위해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참고 지냈던가를 말야.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 그 순간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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