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19화 : 위기의 선발대와 그 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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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19화 : 위기의 선발대와 그 적들


위기의 선발대와 그 적들

매소 자하린의 규모는 선계 뜰에 비할 바 없이 작은 편이었다. 자하린은 여느 매소와 마찬가지로 중심을 통과하는 큰 대로가 십자 형태로 닦여 있고 그 사이로 크고 작은 많은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선발대가 들어선 곳은 서부 대로의 첫부분이었다. 그들이 대로 중ㅅ미을 걸어가고 있음에도 영자들은 별 관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슬쩍 슬쩍 쳐다보기는 했지만 금세 고개를 돌려 버리는 게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전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
너울은 불안했던지 연신 고개를 사방으로 돌리며 주위를 살폈다.
“마치 자하린 전체가 누군가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파천의 말에 아난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심으로 접어드세요. 그곳에 강한 기운들이 대거 모여 있군요.”
아레나는 생각했다.
‘이것 충돌이 불가피하겠는데? 조금 전 구루족 놈의 말대로라면 처음부터 쉽지 않겠어.’
아레나가 파천을 불렀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난다 님이나 내 곁을 떠나지 마라. 만약 위급하다면 이동술을 사용해.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낸다. 믿어도 돼.”
그녀답지 않게 친근한 미소를 다 지어 보였다. 파천은 너무도 태연한 아난다를 쳐다보았다.
“혜능, 넌 별로 긴장하지 않는 것 같은데?”
“허허허…… ”
아레나가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난다 님을 긴장시킬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너는 아직 그것도 모르고 있었어?제 놈들이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 해도 최상위 수련자의 능력에는 미치치 못하지. 문제는…… 아난다 님이야. 그렇지 않은가요?”
파천은 무슨 말인지 얼른 이해하지 못했다.
“아난다 님은 지금껏 단 하나의 영체도 소멸시켜 본 적이 없으실걸. 때로는 …… 악을 멸하는 게 선을 행하는 길일 수도 있는데…… ”
파천은 자신이 알고 있던 혜능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위인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도 다급해진다면 어떻게 대처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에 선발대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그들은 서서히 중심부로 접어들어 갔다. 중심부에는 거대한 원형 광장이 있고, 그 주위로 빽빽하게 건물들이 감싸고 있었다. 광장은 텅 비어 적막감만 감돌았다. 이 넓은 매소에 오가는 영자들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범상한 일은 아니었다.
터질 듯한 긴장감은 저마다의 불안이 빚어낸 현상만은 아닌게 분명했다. 명백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주변 공기는 파동을 치고 있었다. 파천 또한 이를 느끼고 있었기에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만약 구루족 영자가 한 말처럼 최악의 상황이라면 이 위기를 어지 넘길까. 벌써부터 파천은 걱정이 되었다. 스스로에게 위기를 타개할만큼의 충분한 힘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불안한 일인가는 마계와의 경험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가 아니면…… 참을 수 있을 만큼은 참아야 한다.’
파천의 그런 생각이 자신의 경우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선발대 전체를 놓고 따지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너울이 제일 앞서가며 주변을 살피고 그의 좌우를 마고와 무초가 방비한다. 그 뒤를 각시와 무령, 대오 등의 선인들이 따른다. 파천의 옆면은 여전히 아난다와 아레나의 차지였다. 미타와 찬다마나, 이레네, 야다, 헵슬론은 파천과 아레나 등의 주변을 둥그렇게 감쌌다. 거의 완벽한 진세를 갖추고 조심스럽게 전진해 가던 행렬이 그 자리에 한순간에 멈춘다.
콰당
광장을 가로질러 정면에 보이는 건물의 문이 박살나는 소리였다.
파천이 가늠해 보니 이십여 장은 족히 될 거리였다. 박살난 문의 잔재를 밟으며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척 보아도 상대가 전통적인 전사의 복장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파천은 예전에 너울에게서 들었던 전사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전사에는 세 종류가 있다. 화신체를 장기로 하는 부류와 프리즈마를 운용하여 일정한 형태로 만들어 싸우는 걸 특기로 하는 부류, 나머지 하나는 술법과 갖가지 영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부류였다.
나름의 특징에 따라 그들이 갖춘 복장에도 차이가 있기 마련이었다. 화신체를 사용하는 자들은 마신갑과 같이 영력을 담은 영물을 이용하여 평상시와 화신했을 때의 모습에 차이가 있다. 그래서 평소에는 그가 전사인지를 복장만으로는 알 수 없다. 이와는 달리 프리즈마를 특정한 형태, 이를테면 검의 형상으로 만든다든지 해서 싸우는 자들의 복장은 늘 갑옷을 걸치고 다닌다.
마지막 하나는 갖가지 도구를 숨기고 다니기 때문에 소매의 폭이 넓고 망토를 걸치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물로 ㄴ이런 구분들이 반드시 전사에게만 적용되는 건 아니며 전사라고 해서 이 세가지 경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지금 걸어 나오고 있는 자는 그렇지만 전사가 분명했다. 그가 걸친 건 스메이 부족이 만든 것으로 지금은 전사들의 상징처럼 널리 알려진 고유의 복장이었다.
머리칼을 한데 모아 위로 올리고 이마와 귀 부분만을 덮은 형태의 투구를 썼다. 한쪽 옆구리에서 반대쪽 어깨까지 갑옷의 경계를 이루며 어깨엔 화려한 문양의 팜을 했다. 팜은 소속이 있는 전사일 경우 자신이 속한 전사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팔은 절반이 드러나 있다. 손에서 팔꿈치까지는 갑옷을 대었지만 그 이외에는 맨살 그대로다. 하체도 허벅지에서 무릎까지는 맨살이었다. 갑옷의 재질은 부드러우면서도 질기며 매우 가벼운 가죽으로 작은 조각들을 여러 개 이어 만든 것이며 심장과 복부 쪽엔 특별히 여러 겹을 대어 붙였다.
특히 스메이족이 만든 갑옷은 입어도 입은 것 같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었다. 파천은 상대가 거의 십 척에 달할 정도로 큰 체격의 소유자라는 저모가 철탑을 연상시키는듯 강한 기운의 소유자라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투구 사이로 흘러내린 붉은 머리틀이 허리까지 치렁치렁하다. 그의 기세는 선계 뜰에서 보았던 슈트레의 수하들과는 비교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될 정도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질식할 듯한 기세를 내뿜는 진정한 전사라 할 만했다.
메일을 전장에서만 보내는 자들 특유의 긴장감은 다른 이들까지 전염시키는 묘한 것이기도 했다. 파천은 이런 종류의 전사를 처음 대하는 셈이었다.
‘진정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구나. 예전에 내 수하들 중에서도 패기가 넘치는 이들이 있었지만…… 이건 비교가 안 되는군.’
파천은 상대가 누구인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저 정도라면 꽤나 유명한 전사일 거라 추측해 보았다.
광장의 가운데까지 이른 거구의 전사는 한 손을 허리에 척 갖다댔다. 자세히 보니 슈트레의 수하들이 입었던 것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났다. 손만 해도 그랬다. 손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 장갑과는 달리 손목에서 갈라져 손등만 덮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아레나와 같이 그도 허리에 대롱거리는 단봉을 차고 있었다. 파천은 그게 무얼까, 무척이나 궁금했다. 아레나는 분명 파라슈라고 했었다.
아난다는 이때 눈앞에 버티고 선 전사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천천히 쓸어 보고 있었다.
‘많다. 주위에 강자들이 많다. 시작부터 어려움을 겪는단 말인가……’
아난다는 상대들이 결코 가벼운 인물들이 아님을 직감했다. 내뿜는 기운은 예사롭지 않았고 그 수에 있어서도 상당했다. 그런데 다행이라면 그들이 결코 한 무리는 아니라는 점이엇다. 기운들이 서로를 경계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셈이군.’
상대가 아무 말도 없자 너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는?”
파천은 그 전경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저 전사가 만약 우리의 적이라면 참 멋스러운 면을 지니고 있군. 너울도 그렇고 서로의 진의를 먼저 알아 보고 추후에 가린다는 건가? 기습 같은 걸 예상했는데…… 내 생각이 빗나갔군.’
그건 파천이 전사들의 습성을 몰라서 하는 생각이었다. 전투만을 업으로 삼는 전사들이라고 해도, 아무리 패악한 전사들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영자들이다. 이들이 적을 구분 짓고 싸우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무엇인가 성취할 목표가 있다 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전사로서의 명예를 중히 여기는 건 모든 전사들의 공통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뜻을 서로 나눈다. 적이라는 게 드러나면 싸우기는 하지만 뒤에서 위해를 가한다거나 기습 따위는 하지 않는다.
물론 힘에 부치면 여럿이서 공격하는 경우는 있었다. 간혹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면 이런 건 무시되기도 하지만 때로 그런 급박한 와중에도 예의를 차리는 전사도 있을 정도였다.
“나는 롬멜 전사단의 가린차라고 한다.”
“우리 앞을 막은 이유를 대라.”
“그대들을 데리러 왔다. 날 따라 가겠는가, 아니면…… 내 능력을 보겠는가?”
힘차고 당당한 목소리였다.
‘참으로 기개가 넘치는 자다. 롬멜 전사들을 붉은 전사라고 부른다고 했던가?’
파천은 상대에게 호감마저 느낄 정도였다. 슈트레 같은 위인에게서 볼 수 없었던 산악 같은 기개와 당당함은 흉내낸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롬멜 전사단이라면 중부권의 패권 다툼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텐데…… 여긴 어쩐 일인가? 대체 어디를 함께 가자는 말이냐?” “가보면 안다. 나는 명을 받은 자. 그대들을 대동하면 그만이다. 가지않겠다면 힘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너 혼자 오지는 않았을 테고 네 조원들을 부르지 그러나?”
“그래야 할 것 같다. 그 전에 한 가지만 물어 보자. 뒤에 둘! 그대들은 누군가?”
그가 손끝으로 가리키는 건 아난다와 아레나였다. 다른 대원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선발대를 데리러 왔다는 위인들이 구성원이 어찌 되어 있는지도 모른단 말인가?
그는 사전 정보를 전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아레나는 가린차를 향해 손을 뻗어 가리키며 말했다.
“그대가 가린차? 명성은 귀 따갑게 들었어. 나는 아레나라고 한다.”
가린차의 얼굴이 처음으로 변화를 보였다. 그 역시 아레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결코 두려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뻐하는 듯도 보였다.
“아레나…… 최강 여전사를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기대하지 않은 기쁨을 누리게 디는 군. 나로서는 행운이다. 당신은 또 누군가?”
또 한 손으로 아난다를 가리켰다. 그는 약간 흥분마저 보이고 있었다. 아레나가 가린차를 보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 손 치워라, 가린차. 이 분은 아난다 수련자님이시다.”
“……”
말이 없었다. 아레나를 만난 게 기쁜 일이며 행운을 만난 것 같다고까지 했던 그도 아난다라는 이름 앞에ㅐ선는 아무 말도 못햇다. 그는 한걸음 물러서더니 팔을 가슴에 대고 허리를 굽혔다.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동작이었다.
허리를 편 가린차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롬멜이 나를 속였군.”
작은 중얼거림이었지만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어지 된 영문인지 드러난 셈이었다.
“아난다 님, 당신을 이렇게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감히 무례를 범하게 된 걸 용서해 주시길.”
그는 진정으로 아난다를 존경해 온 듯했다. 비록 매일 전장을 헤매고 다니는 처지였지만 언제나 그의 이상은 숭고함을 바라고 있었다. 도달할 수 없는 꿈이기에 더 절실한 것이기도 했다. 언젠가는 전사의 업을 접고 수련자로 살아 보리라 다짐하고 있기도 했다.
“롬멜이 우리를 데려 오라 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가만 내버려 두어도 어차피 중부권으로 들어섰을 터인데 굳이 이곳까지 수고로이 오신 이유를 모르겠구려.”
“그곳까지 무사히 다다른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곳에 와보니 더욱 그런 생각에 확신이 드는군요. 지금 여기 주변에만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것들이 느껴지니 말입니다.
서로 견제하느라 나서지 못하고는 있지만 이런 하찮은 것들이라도 그 수가 많다면 상황은 달라지지요. 중부권에 이르기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많은 난관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희들이 직접 여러분을 모셔가기로 한 것입니다.”
처음에 파천은 그를 앞길을 막는 적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들의 의도를 듣고 보니 중부권까지 길 안내를 자처하겠다는게 아닌가. 물론 강제이긴 하지만.
“가린차, 롬멜이 원하는 건 뭔가? 선발대를 잡아 가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지?”
“나로서는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는 일이지. 나는 명을 완수하면 그만이다.”
아레나는 다소 엉뚱한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롬멜 전사단도 이제는 좀 더 쉬운 길을 걷기로 했나 보군. 그렇겠지. 이제 지칠 만도 하지.”
그녀의 그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간파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가린차, 자신 있나?”
“솔직히…… 너 하나라면 모르되 아난다 님까지라면…… 자신 없다.”
“그럼 물러서지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전진하는 법만 배웠다. 더 이상 뜸을 들이는 건 무의미하겠군. 자, 시작해 볼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광장에 가린차만큼이나 거대한 체구의 전사들이 넷이나 떨어져 내렸다. 그들 역시나 가린차와 동일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 하나의 손엔 거대한 깃발이 들려 있었다. 롬멜 전사단의 문장기였다. 화려하면서도 단순한 그림이었지만 강렬했다. 흰색바탕에 붉은 두 마리 용이 서로를 꼬며 승천하고 주위를 빙둘러가며 검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있다.
가린차와 함께 나타난 이들 역시나 롬멜의 전사였다. 이들은 다섯이 한 조를 이루는 경우가 많으며, 롬멜 전사단 일개조만으로도 웬만한 전사단 전체를 상대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을 만큼 아주 강력한 전투력을 과시한다.
‘가린차는 아난다가 있어 힘을 거라면서도 포기하지 않으려 드는구나. 롬멜이라는 자는 이런 걸 예상하고 있을 터인데도 저들을 보낸 이유가 무얼까? 대체 무슨 이유로……’
파천은 아까부터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자들이 지켜보고만 잇는 이유도 궁금했다. 단순히 서로를 견제하고자 함인지 아니면 어부지리를 노리기 위함인지도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파천은 이대로 싸움이 시작되면 선발대 입장에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린차의 손이 위로 힘차게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저 손이 바닥으로 향하면 전투는 싫든 좋든 시작될 것이었다.
“잠깐!”
파천이 지른 소리에 가린차의 손이 더 이상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않은 채 허공 중에 딱 멈추었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라.”
“뭐냐?”
“그대를 따라가겠다.”
너무도 순순한 파천의 승낙은 모두에게 의외였다. 선발대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숨어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이들에게도 그건 충격에 가까운 놀람이었다. 아레나를 비롯한 선발대의 시선도 자연 급하게 파천을 찾아 왔다. 아난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두 눈을 감고 있다. 파천은 답답했다.
‘이럴 때 전음이라도 사용해서 내 뜻을 전달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전음을 사용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아레나의 경우에서 알게 되었지 않던가.
“그렇게 해준다면 서로 간에 불필요한 충돌은 피할 수 있겠지.”
가린차의 말에 파천이 호응하고 나섰다.
“물론이다. 자, 앞장서라. 그대가 원하는 곳까지 따르마.”
“파천!”
당치도 않은 소리를 한다는 듯 너울이 어이없는 눈빛을 보내고, 아레나는 파천의 진의를 알아내고자 주의 깊게 살핀다. 다른 선발대원들은 아난다를 향해 구원의 손길을 보낸다. 그건 마치 저 철부지의 뜻을 꺾어달라는 듯한 간절함이었다.
이때 파천이 가린차를 똑바로 쳐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런데 말야……. 따라가고는 싶은데 그걸 원치 않는 자들이 있으니…… 이를 어쩐다?”
아레나는 풋, 하고 소리내며 웃고 말았다. 파천의 의도가 무엇인지 간파했기 때문이다. 어부지리를 노리는 자들을 먼저 끌어내고자 함이 분명햇다. 이때 가린차도 파천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닫고는 큰 소리로 호기롭게 외쳤다.
“누가 감히 내 뜻을 거스른단 말인가! 너는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그래? 그렇다면 뭐, 따르도록 하지.”
‘저들을 따르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지. 최소한 중부권에 이르기까지 저들은 충실한 우리들의 방패가 되어 줄 것이 아닌가? 만약 그 전에 힘을 잃게 된다 해도 우리로서는 손해 볼 일이 없고, 무사히 우리를 인도해 간다면 그때 가서 저들을 정리하면 된다. 걱정할 거리도 없지. 괜히 힘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 말야.’
파천은 특유의 영악함으로 앞뒤 상황을 모조리 계산해내고 있었다. 적의 힘까지 빌려 스스로의 안전을 도모한다면 이야말로 손대지 않고 코 푸는 격이지 않겠는가.
이런 파천의 의도를 알아 챈 아레나는 그를 새로운 시선으로 눈여겨보았다. 가린차의 외침이 있고 나자 상황은 묘하게 풀려가기 시작했다. 파천은 근처의 기운들이 들썩거리는 걸 확연히 구분해낼 수 있었다.
‘저들이 최강 전사단의 일원이라면 그리 쉽게 도발하지는 못하겠지. 그렇지만 분명 대적할 자들은 있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이들에 버금가는 자들이 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말야.’
선발대원들 역시나 지금의 상황이 자신들에게 결코 불리하지 않다는 걸 느끼고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몇 마디 말로 불리한 상황을 유리하게 반전시키는 파천의 재지에 다들 놀라고 있었다.
묘한 긴박감이 느껴지는 광장을 향해 파천이 한마디를 툭 던져 놓는다.
“아무래도 그대들의 뜻을 거스를 자는 없나 보군. 하긴 천하의 롬멜 전사단을 상대할 베포 큰 자들이 그리 흔하겠어? 자, 더 시간 끌 필요도 없으니 그만 갑시다. 앞장 서시오.”
“그럴까.”
가린차는 어깨를 활짝 펴고 으쓱해한다. 사실 파천이 롬멜기사단의 위명이 대단한지 자세히 알 리가 없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자들의 자존심을 건드려 놓기 위함이었다. 그는 이대로 그만두기 섭섭했던지 장난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원래가 산에 대호가 나타나면 잡다한 뭇 짐승들은 제 목숨 연명하고자 숨기에만 급급하지. 두려움을 갖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야. 전사로서의 명예나 자존심이 뭐 대단한 거라고 생명을 걸겠어. 그렇지 않나, 가린차?”
“그, 그런가?”
가린차는 엉겁결에 대답하기는 했지만 뭔가 분위기가 묘해지는 걸 느끼고는 입을 얼른 다물었다. 프리즈마의 기운이 사방에서 회오리치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아레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구나.’
그렇지만 파천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만 가자고. 쥐새끼들은 제 주제에 맞는 구멍이나 들락거리게 내버려 두고 우리는 우리 갈 길로 가자고. 출발!”
파천의 그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하늘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크헝
파천은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들다 그만 크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까마득한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는 게 있었다. 그것도 무서운 속도로. 가린차 역시 공중을 쳐다보고 있다 낮은 침음을 흘렸다.
“으음, 저건 발락의 영물인 흑호? 발락의 도살자가 이곳에 왔다는…… 말인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건 거대한 호랑이였다. 광장의 정중앙에 소리도 없이 착지하는 검은 호랑이. 파천은 정말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고야 말았다.
‘정말 호랑이가 나타났네.’
낮게 웅크리고 있는데도 얼마나 덩치가 큰지 가린차의 일부를 가려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반듯이 서면 어깨까지의 높이만도 일장은 됨 직했다.
‘저놈의 앞발에 정통으로 맞으면 뼈조차 남기지 못하겠군. 저런 놈이 하늘을 마구 날아다닌다니…… 무서운 놈이군.’
흑호의 등에 누군가가 의젓하게 타고 있었다. 파천에게는 그 자의 뒷모습만 보였으므로 외모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파천의 시선은 허공을 이리저리 휘저어 놓는 흑호의 꼬리에 머물러 있었다. 옆을 슬쩍 쳐다보던 파천은 아레나가 묘한 표정이 되는 걸 놓치지 않는다.
‘뭔가 걱정거리라도 생긴 건가? 새로 나타난 자 때문에 긴장하는 건 아닌 것 같고.’
“롬멜이 드디어 미쳤군. 과한 욕심으로 제 뱃가죽을 뚫고 나올 것인지도 모르는 걸 삼키려드는구나. 가린차, 못 본 척할테니 돌아가라.”
“으음, 너야 말로 이곳엔 웬일이냐? 발락의 성주가 다시는 바깥 출입을 하지 않겠노라 선언한 지 이제 겨우 백여 년이 지났을 뿐이건만 그 새를 못 참아 뛰쳐나온 것이냐?”
“착각하지 마라. 그건 성주의 뜻일 뿐. 내 뜻은 아니다. 그리고 한 가지 소식을 알려주마. 이제 머지않아 발락의 폐쇄된 성이 다시 문을 연다.”
그 말이 그리 충격적이었던가. 여기저기 숨어 있던 자들에게서 놀람의 기성이 발해졌다. 흑호의 등에 타고 있던 자가 슬쩍 고개를 돌려 코웃음을 쳤다.
“쓰레기들…… 그 동안 설치고 다녔던 것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겠다. 세상이 왜 우리를 도살자라고 하는지를 몸소 체험하고 싶은 놈들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여길 떠나라. 발락은 이곳을 새로운 성지로 선언하노니 우리 허락을 받지 않고서는 오가지 못하리라.”
파천은 눈앞의 변화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대단한 기세다. 가린차의 기세마저 누르는 듯하다.’
흑호의 등에 타고 있는 자의 몸이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르며 두 발을 딛고 섰다. 팔짱을 끼고 두 발로 흑호의 등을 딛고 선 자의 신장은 결코 가린차에 못지 않았다. 그는 양팔을 모두 드러내놓고 있었는데 정교한 근육이 역동적으로 꿈틀댈 때마다 새겨진 문신은 흥을 내며 춤을 추었다.
크헝
흑호가 울부짖으며 한발을 떼어 놓자 가린차가 급하게 말했다.
“발락, 우리와 싸울 생각인가?”
“흐흐흐흐 하하하하.”
갑자기 미치기라도 했는지 도살자의 광소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때 아레나가 발락에 대해 조그만 소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무한계에서 가장 강성한 칠대부족 중의 하나가 바로 저들이다. 저들은 성주 휘하에서 모두 한 형제처럼 지내가 때문에 서열이라는 게 없지. 저들은 이름도 없다. 그래서 다른 이들은 저들을 그냥 발락이라고 부른다. 저 흑호는 발락의 상징. 마게 마수들과 싸운다 해도 절대 지지 않을 강한 놈이지.”
흑호 위에 서 있던 발락이 뒤로 홱 돌아보았다.
“아레나, 발락이 롬멜보다 강하다는 얘기는 왜 하지 않는 것이냐!”
‘저 와중에도 자기 얘기를 하니 귀 기울여 듣고 있었나 보군. 저 괴상망측한 얼굴은 또 뭐람.’
얼굴 전체에 호랑이 무늬가 가득했는데 그려 넣은 건지 원래 그런건지는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두 눈알이 빨개 야수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정말 흉악하게 생겼다는 느낌뿐이었다.
파천은 그조차 아레나를 알고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선발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에 오히려 관심이 갔다.
‘저들이 원하는 건 대체 뭘까? 하는 짓을 보아서는 선발대의 여정을 단순히 방해하고자 함도 아닌 것 같고, 소멸시키고자 함도 아닌 것 같으니…… 도무지 모르겠구나.’
“발락이 어찌 롬멜보다 강하다는 것이냐?”
가린차가 발락의 말에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발락이 활동할 때 롬멜은 작은 전사단에 지나지 않았다. 예전 롬멜은 성주에게 충성을 맹세한 적도 있었다. 물론 너희들뿐만이 아니지.
그런데 너희들은 신의를 저버렸다. 발락이 위기에 처해 성을 폐쇄하게 되었는데도 누구 하나 도울 생각을 하지 않았지. 우리는 이제 다시 힘을 갖췄고 복수를 시작할 것이다. 그 복수에 배덕자들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그런데 그것하고 우리 앞을 막아선 것 하고 무슨 상관이 있지?”
아레나의 질문에 발락은 가린차를 무시한 채 뒤돌아섰다. 쩍 벌어진 어깨와 잘 발달된 가슴 근육은 보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부담을 줄 정도였다.
“아레나, 발락은 선발대를 막지 않는다. 내가 여기 온 건 사냥감들을 찾아온 것 뿐이야.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형제들은 도처에 나가 발락의 재기를 선포하고 있다. 이제 세상은 발락을 새롭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궁금증이 풀렸냐, 아레나?”
“내 기억으로 발락의 성주와 여기 계신 아난다 님과는 특별한 친분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 ”
“이상한 일이군. 예전 같으면 먼저 인사를 했을 텐데…… 왜 그러지를 않지?”
“발락은 모든 인연을 끊기로 했다. 아난다는…… 우리들의 친구였다.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다. 수련자들은 결국 우리의 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와의 우정을 우리는 잊지 않을 것이다.”
파천은 아난다와 발락의 성주가 특별한 관계였음을 알고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때 아레나가 다시 말했다.
“발락에게 모욕을 준 자가 수련자이기 때문인가? 그래서 수련자들을…… ”
“더 이상 말하지 마라, 아레나. 너 또한 수련자의 친구. 적이 되지 않으려면 잠자코 있어라.”
발락은 화가 난 듯했다.
‘발락에게 모욕을 줬다는 게 무슨 뜻일까? 그리고 그 자는 누구지?’
파천은 자신이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사실에 답답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어쩌리요, 하루아침에 습득할 수 있는 양의 지식이 아니잖은가. 가린차가 이때 파천을 재촉했다.
“어서 가자.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소모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누구 맘대로!”
“발락! 넌 분명히 선발대의 앞을 막지 않겠다고 했었다. 한 입으로 두말 할 셈이냐?”
“그랬지. 그렇지만 네 앞도 막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았다. 난 롬멜전사들과 싸우길 원한다. 날 이겨라. 그러면 보내주마.”
“건방진…… 네가 아무리 발락이라지만 우리 다섯을 이길 수 있으리라 보는가.”
“지지도 않을 거야.”
“오만한 놈, 네 놈들이 예전에는 대단했었는지 모르나 지금은 어림없는 소리. 너희들이 숨죽이고 있는 동안 롬멜의 전사들은 수만 번의 전투를 치렀다. 너희들을 겁내던 예전의 우리들이 아니다.”
“그러니 증명해 보라고 하지 않느냐?”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대신 저들을 무사히 데려 간 뒤에 그대들을 다시 찾겠다. 그때 제대로 겨뤄 보자.”
“나는 싫은데…… 난 싸움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겁쟁이가 아니다.”
이때 한 무리의 인물들이 광장으로 다가섰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싸움이라면 우리도 무척이나 좋아하지.”
“이건 또 뭐야?”
가린차는 신경질적으로 말했고, 아레나는 피식 웃었다.
“바이롬과 슈트레가 동시에 납셨군. 대단한 배짱들이야.”
아레나의 비웃음에 슈트레의 얼굴이 일그러진 건 당연했다.
“주둥이 닥쳐라, 아레나. 우리는 그대들의 적이 아니다. 도움을 주고자 나섰지만 냉대한단 말이더냐!”
“떨거지, 주둥이 닥쳐라.”
슈트레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발락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그럼 저놈이 내게?’
슈트레의 얼굴이 또다시 뭉개졌다.
파천은 궁금했다. 듣기로 슈트레 역시 예전에 북부전사동맹의 수석전사를 지냈으며, 바이롬은 남부건 최대의 전사단이라 하지 않던가. 그 정도의 인물들이라면 대단한 위치에 있을 텐데 저렇게 무시를 당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 파천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원래가 전사가 생겨난 데가 중부권이기에 전사라고 하면 으레 중부권의 전사들만을 지칭한다. 물론 지금은 남부권과 북부권에서도 전사단이 생겨나고 있지만 대부분은 어중이떠중이 집단일 경우가 많았다.
실력에 있어서도 중부권과 남부, 북부권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일례로 스메이족은 아무리 많은 양의 루딘을 갖다 줘도 아무에게나 전사복을 내주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그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다시 말해 스메이족이 만든 전사복을 입지 못하면 전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영자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롬멜의 가린차에 비해 슈트레나 바이롬이 중량감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전통 전사들은 남부권과 북부권의 ‘자칭 전사’들을 인정해 주는 법이 없었다. 그들이 아무리 훌륭한 치장을 하고 세력을 모아 봐도 중부권의 전통 전사들이 볼 때는 도토리 군단의 행차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전부터 남부권은 현자가 많이 나고, 중부권은 전사가 강성하며, 북부권은 술사들의 세상이라 했었다. 지금은 그런 구분이 없어졌지만 유독 전사들만은 중부권에 집중되어 있었다. 슈트레와 바이롬이 힘을 합하고 선발대에 빌붙어 중부권으로 들어가고자 애쓰는 것도 변방에서 더 이상은 기죽어 지내기 싫었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무한계 칠대부족의 분포 역시나 중부권에 거의 편중되어 있다는 것도 중부권을 중심 지역으로 성장시킨 배경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지금 슈트레의 심기는 그리 좋지 않았다.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슈트레와 바이롬은 앞으로 나설까, 말까를 놓고 머리 터지게 갈등하고 고민했다. 50여 명에 달하는 전사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단 여섯에 불과한 자들을 겁내야 하는 자신들의 꼴이 얼마나 비참하고 한심했겠는가.
결국 마지막 남은 자존심 하나로 광장으로 나서긴 했는데 곧바로 떨거지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또 그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슈트레는 뒤를 슬쩍 쳐다보았다. 역시 든든한 수하들이 뒤를 당당하게 받치고 있다. 약간 용기를 얻은 슈트레가 한 발 나서며 호기롭게 외쳤다.
“이제 발락의 시대는 갔다. 때를 알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을 들먹여 위세를 떨치려 한다면 망신당하기 십상이지.”
“말로만 실력을 가늠한다면 저놈이 최고일 거야. 어떻게 생각해, 파천?”
아레나의 말에 파천은 한술 더 떴다.
“슈트레도 참 불쌍하군. 뒤에 서 있는 전사들을 보라고. 두 다리는 떨리고 동공은 풀어져 있으니 겁을 먹다 못해 혼이 나간 것 같다구…… 저런 자들을 믿고 나선 거라면 판단착오야. 위기일발이로군.”
슈트레는 파천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다시 뒤로 고개를 돌려 확인했다.
이런슈트레와는 달리 바이롬은 그래도 의젓한 편이었다. 그는 비록 변방의 전사단을 이끌고는 있었으나 스스로 전사임을 한시도 잊지 않는 기개가 있는 인물이었다.
실력 또한 중부권에 내놓아도 결코 밀리지 않을 정도의 수준에 올라 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레나도 슈트레를 비웃을지언정 바이롬만은 인정해주는 눈치였다. 바이롬은 초조해하거나 서두르는 기색도 없이 천천히 가린차와 발락을 훑어본다.
‘이제야 그 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겨루어 볼 때가 왔구나. 난 수하들을 믿는 것이 아니다. 내 자신의 능력을 믿는다. 이때…… 라치오가 있었다면…… 아쉽구나.’
그는 예전 바이롬의 수석전사였으며,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라치오를 생각했다. 바이롬전사단이 남부 최대, 최강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그의 공로가 컸었다. 바이롬이 라치오를 내치고 나자 곧바로 다른 세력들의 도전을 받은 것만 봐도 그의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때 광장은 새로운 무리로 또다시 채워지기 시작했다. 지켜보고만 있던 나무지 부류의 인물들이 이제는 나서도 좋다고 판단했는지 어슬렁거리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상황은 급진전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파천의 한마디가 만들어 낸 반전인지도 몰랐다. 어느새 선발대에 대한 관심은 뒤쪽으로 밀려나 있었고, 자기네들끼리 해결해야 할 문제로 긴장감을 촉발시키고 있었다.
파천은 그들을 보며 내심으로 흐뭇한 심정이었다.
‘온갖 이해관계가 뒤엉켜 있고 해묵은 감정이 녹녹치 않으니 차라리 처신하기가 쉬울 수도. 잘만 이용하면 큰 위험 없이 위기를 넘길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파천은 잘 알고 있었다. 결정적일 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이런 요행도 소용없음을. 파천은 주변에 서 있는 동자들을 쳐다보았다. 든든하고 미더웠다.
광장으로 나서는 이들은 의외로 많은 수였다. 각양각색의 복장에 여러 종족이 뒤섞여 있었다. 5백여 명은 족히 될 인원을 보자 파천과 선발대는 솔직히 좀 놀라는 중이었다.
그건 발락과 롬멜의 가린차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가린차가 전사 넷을 거느린 조장이라지만 이 정도의 인원을 손쉽게 생각할 만큼 절대적이지는 않다. 그건 발락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무리들을 격동시키는 대담함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잠자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아야 함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자 신이 난 건 슈트레였다.
“왜 기세가 수그러지는 건지 모르겠군. 평소 너희가 무시해 오던 남부권 전사들의 등장에 기가 죽엇을 리는 없고 말야. 또다시 떨거지라고 해보지 그러나, 위대한 발락! 늘 거침없는 무용담의 주인공만 도맡아 했으니 눈에 보이는 게 없을 텐데.
용맹을 떨쳐 보아라, 롬멜. 기가 죽었나? 너희들이 여기 온건 솔직히 의외였어. 부담이 간 것도 사실이지. 그렇지만 자, 보아라. 선발대의 출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이 많은 수의 전사들을.”
파천은 슈트레가 떠드는 말이 제멋대로 진행될수록 듣기 거북한 심정이 되어 갔다.
‘무리들이 자신의 편인 양 기세를 부리는군. 게다가 선발대 운운하는 건 낯간지러워. 교활한 놈.’
그렇지만 적어도 발락이나 롬멜에게만은 상당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슈트레를 노려보고 있었고, 가린차는 주변을 은근히 경계하는 빛이 역력했다. 슈트레의 말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꼬랑지를 내리고 여길 떠난다면 더 이상 너희를 피밥하지 않으마. 선발대를 데려 가겠다는 둥, 돌아가는 둥의 얘기를 한다면 오늘 여기서 낭패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말 다했느냐, 떨거지!”
발락의 낮은 저음이 슈트레를 향해 직격했다. 순간 미세하게나마 움찔하는 슈트레. 그렇지만 이제 와서 기세를 늦출 슈트레는 아니었다.
“누가 떨거지인지 오늘 결판을 내볼까!”
광장에 있는 자들 중 ‘저 자가 오늘 무리하네.’라고 생각지 않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바이롬이 슈트레의 팔을 슬쩍 당기며 말했다.
“발락, 너는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가 너희들의 재등장을 온 세상에 알리고자 함이라 했다. 목적을 달성했으면 이제 그만 가는 게 어떤가?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나? 가린차…… 그대는 우리와 승부를 결해야 할 것 같다. 선발대는 너희가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영계의 꺼져 가는 마지막 희망이다.
도움을 주지는 못할망정 그 앞길을 막거나 사사로운 욕심으로 이용하려 든다면 마계의 앞잡이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 될 게다. 롬멜의 가린차, 너희는 마계의 앞잡이인가? 그래서 선발대를 저지하려드는 건가? 대담하라, 내 질문에.”
바이롬의 말은 가린차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마계의 앞잡이. 누가 있어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전사로서 이건 치명적인 불명예일 수밖에 없었다.
“닥쳐라. 교묘한 말로 우리를 모욕하지 마라, 바이롬! 그대는 지금껏 남부권 최강의 전사라고 자처해 왔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넌 전사로서 자격이 없다. 실력이 아닌 그 어떤 것으로도 전사의 명예를 실추시켜서는 안 된다.
네가 스스로 전사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말을 그리 생각 없이 쉽게 할 수는 없을 거다. 제기랄,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다. 우리가 하는 일에 반대하고픈 자들은 힘으로 우리를 눌러라. 말이 아닌 실력으로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하란 말이다. 선발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를 따르겠다던 무리 뒤에 웅크리고 있지 말고 어서 나서라.”
가린차가 선발대를 다시 한 번 재촉하고 나서자 광장의 분위기는 팽배한 긴장감으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무질서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는 서로를 경계하느라 온 신경을 쏟아야만 했다. 누구든 쉽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파천이 아난다를 툭 쳤다.
“자, 그만 가지.”
“그러지요, 출발.”
선발대가 움직였다. 순간 균형이 한꺼번에 무너지며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빠른 움직임이 있었다. 선발대 앞을 막아서는 자들, 포위하는 자들, 롬멜의 전사들을 압박해 들어가는 자들, 발락을 경계하는 자들이 앞 다투어 동시에 움직인 까닭이었다.
전광석화처럼 빠른 움직임 뒤에 다시 정적이 찾아들었다. 이렇게 되자 선발대도 더 이상 발을 떼어 놓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보다시피 우리는 움직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소. 우리가 당신들을 따라 나서는 걸 막고 있으니 우리로서도 달리 방도가 없구려.”
파천은 정말 안타깝다는 듯 처연하게 말했다. 이때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크헝
발락의 흑호가 그 큰 발을 휘두른 것이다. 너무 가까이까지 다가간 한 영자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정확하게 몸통을 가격당하고 만다. 간신히 몸을 웅크리며 방비한다고 했지만 그 충격은 대단한 듯했다.
뒤로 붕 날아가서 살갗은 터져 피가 흥건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발락의 근처에 운집해 있던 영자들은 부리나케 간격을 넓혔다.
아직도 흑호는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입을 벌리며 시원스레 포효한다. 광장의 긴장감이 그놈의 화를 돋운 것 같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목줄을 물어뜯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발락의 명이 있기 전에 흑호는 단 한 발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발락은 한쪽에 처박혔다 일어서는 영자를 보며 비웃었다.
“세상이 참 많이도 변했구나. 남부권의 버러지들이 감히 발락에게 대들 수도 있다는 건가? 무엇이 너희들로 하여금 용기를 갖게 했는지 모르겠으나…… 그래 보았자 너희들의 몸짓은 꿈틀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롬멜, 내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마.”
“뭔가?” “잠시 우리들 간의 대결을 미루자. 저것들을 쓸어 버리고 나서 다시 자웅을 겨루는 게 어떤가?”
“좋은 생각이로군. 좋다!”
상황은 또 다시 전환되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지 포위하고 있던 영자들이 당황하는 빛을 보인다. 파천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느새 포위망이 느슨해지고 슬금슬금 물러서고 있는 자들이 속출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 대부분은 전사도 고급영자도 아닌 엉겁결에 끼어든 하급영자들이었다.
사실 광장에 모여든 자들의 상당수는 이곳 매소에 거처를 둔 일반 영자들이었다. 아레나가 중얼거리는 소리만 봐도 그건 확실해 보였다.
“이것 가만 두면 극한 상황으로 가겠는데? 거물들은 아직 몸을 숨기고 있고, 별다른 의도도 없는 자들만 희생을 당하게 생겼군.”
아레나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자들을 언급하고 있었다.
파천 역시나 그걸 감지하고는 있었다. 바로 이때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또 한 번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가만있던 바이롬과 슈트레 일행들이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롬멜과 발락의 근처로 몰려들며 한순간에 압박해 들었다. 그들은 손에 파라슈를 들거나 글라번을 끼고 맹렬한 기세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파천은 이 급작스런 움직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부딪침이 있을 거란 예상을 하긴 했지만 막상 슈트레와 바이롬의 수하들이 파상적인 공격 진형으로 움직이자 뜻밖이라는 표정이었다.
파천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들의 움직임과 공격 형태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두 눈을 부릅떴다. 마계 마신들의 능력을 부분적으로 접해 봤던 그였지만 다른 차원의 영자들의 격돌은 이번이 처음인 셈이었다.
중원 무림의 절대자였던 파천.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초극강의 고수였던 그에게도 지금의 대결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이었다. 50여 명에 불과한 인원이었지만 그들은 일반 영자들과는 달리 전투력을 극대화시키는 데 전력을 다해 왔기에 그 움직임이나 기세는 사뭇 다를 것이다.
전사가 된다는 의미는 언제든 적을 만날 수 있고 적과의 싸움에 패했을 경우 소멸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항상 동반한다는 걸 전제로 한다. 매 순간을 최후라는 심정으로 대하며, 마지막 순간을 위해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거쳐 온 자들이다.
바로 이 순간, 전투에서 전사의 진가는 비로소 발휘되며 존재 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었다. 때로 개체보다는 집단의 의사에 의해 원치 않는 싸움을 치러야 할 때도 있지만 이미 누구에게나 각오된 바였다.
조금 전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그들이 분명했던가 싶게 기세는 확연히 달라졌다. 너무도 기나긴 세월을 살아 왔기에 개개의 격차는 그 만큼 더 큰 법이었다. 그렇지만 무한계 상위권인 고급 전사들과 하위권인 저급 전사들과의 싸움이라는 간단한 도식만으로 이해하기엔 모자란 감이 있었다. 분명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었다.
‘파라슈라는 게 저렇게 사용되는 것이었나? 내 팔에 들어가 있는 신편과 비슷한 작용을 하는구나.’
서넛의 전사들이 발락의 배후로 치고 들어가는데 그들의 손에 들고 있던 파라슈의 끝에서 새파란 빛이 너무도 뚜렷한 형상을 갖춘 채 마구 휘둘러지고 있었다. 그 빛은 검이나 도나 채찍, 도끼, 창, 봉 등 아주 다양한 형상을 취한 채 발락의 전후좌우를 물샐틈없이 막아서며 찔러들었다.
그런가 하면 허공 중에서 아래로 내리꽂히는 자들도 보였는데 그들은 파라슈 끝에 아름답게 맺힌 빛을 파라슈에게 분리시켜 쏘아내기도 했다. 지켜보던 파천은 전신으로 점차 퍼져 나가는 흥분감에 연신 잘게 몸을 떨었다.
‘너무도 빠르고 완벽한 몸놀림들이다. 가장 이상적인…… 내가 여기서 무공의 끝을 보는 건가?’
감탄을 넘어서 경이로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과연 저 공격들을 어찌 방비할 것인가?’
파천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방비해낼 만한 성질의 공격력이 아니었다. 보다 빠를 수 없는 빠름에 보다 강할 수 없는 강력한 힘. 무엇으로 대처할 것인가?
파천의 시선이 이번에는 발락과 롬멜에게 머물렀다. 발락은 여전히 흑호 위에서 팔짱을 끼고 있다. 순간 흑호가 잔뜩 웅크리는가 했더니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파악
“놈이 빠져 나간다. 방비막을 쳐라.”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롬멜 전사단 역시나 파라슈를 손에 들고 있었는데 거기서도 눈을 못 뜨게 할 정도로 강력한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다섯 개의 빛을 하나로 모았고 그 순간 거대한 빛의 폭발이 일어났다.
“오…… 저럴 수가……”
파천은 놀란 나머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롬멜 전사들의 근처로 다가갔던 자들은 거대한 빛의 기둥에 가격당하는가 했더니 일순간에 허공중으로 비산했다. 자세히 보니 그들은 저마다 희뿌연 막을 몸 앞에 펼치고 있었다.
한편 허공으로 도약하는 흑호를 내리누르던 막은 여지없이 깨져나간 뒤였다. 흑호는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더니 다시 바닥으로 내리꽂혀 왔다. 선제공격은 슈트레와 바이롬 전사단의 것이었지만 별 타격을 입히지 못했고, 단숨에 공격권에서 벗어난 발락과 롬멜 전사단의 역공을 맞아들여야만 했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파천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머릿속에 새겨 넣고 있었다. 그들의 미세한 동작 하나하나에도 파천은 감탄사를 연발해야만 했다.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하급 전사들에게서조차 중원 무공에서 볼 수 없었던, 아니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극강함과 현묘함이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저것 때문이었구나. 무연이 내게 실전과 다름없는 가상훈련과 갖가지 지식을 습득시킨 것이……’
파천은 지금 다른 이들의 실전을 보며 많은 걸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바닥으로 흑호가 내려서자 발락이 저 홀로 다시 몸을 솟구쳤다.
“발락이 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가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겠다. 자, 보아라. 발락의 힘을.”
발락은 허공에서 맹렬하게 회전하며 무리 중으로 파고들었다. 파천은 그걸 보며 어이없어했다. 그렇지만 그의 이런 생각은 단번에 뒤집어지고야 만다. 전사들의 파라슈가 휘둘러지자 가공한 빛의 폭풍이 몰아쳐 한꺼번에 발락을 휘감아 버렸다. 그 순간이었다. 보면서도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전신을 가격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을 것이라 생각되었던 발락은 도리어 자신에게 집중된 빛을 모조리 흡수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그보다 배는 더 강할 것 같은 힘을 사방으로 폭발시켜 버렸다.
슈슈슈슈슈
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빛의 폭풍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회오리치며 하늘로 솟구치는데 그 여력에 딸려 올라간 전사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최대한 견뎌내고는 있었지만 고통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닌 듯했다.
이때 롬멜 전사단 쪽에서 싸우고 있던 바이롬이 파라슈를 휘두르며 발락의 발락의 공격을 중간에서 차단해 왔다. 거대한 줄이 풀어지기라도 하는 양 유형화된 프리즈마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빛의 회오리를 잘라 갔다. 허리 어림을 파고드는가 했더니 조이며 끊어 버린다. 바이롬 역시나 대단한 실력자임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발락이 의외라는 듯 바이롬을 추켜세웠다.
“그래도 이름값은 하는구나.”
아까는 그렇게도 폄하하더니 그 역시 바이롬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바이롬이 파라슈를 쓰는 기술은 다른 전사들과 그 수준을 달리하는 매우 정교함과 다양함을 지니고 있었다. 파천은 그걸 보며 한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저들의 공격은 매우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중원의 무공과 그 맥을 같이한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저기 장갑 같은 것으로 프리즈마를 응집해 사용하는 이의 공격은 마치 장법을 보는 듯 하고, 바이롬의 좀 전 수법은 채찍을 사용하는 것과 흡사하다.
그리고 전사들의 주된 공격 역시나 검공이라 할 만하다. 속도와 강함 그리고 허점이 적다는 것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 중원 무공과 흡사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형태와 운용의 차이를 배제하면 저건 무공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위력 면에 있어서만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들을 영계 최강자라 할 수 없으니 그 이상의 걸 볼 수는 없어 아직은 단정하기 이르나 두 가지가 서로 닮아 있는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파천이 장갑이라 생각한 건 글라번이라 불리는 무기의 일종이었다. 파라슈와 마찬가지로, 프리즈마를 응집하고 사용하기에 좀더 용이하도록 제작된 병기의 하나였다. 전사들의 주된 애용 병기 중 하나로 화신체의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 자들이 그 효과를 얻기 위해 주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파라슈는 단봉이 프리즈마를 응집하나 글라번은 손에 끼고 사용한다. 각기 장단점이 있었는데 파라슈는 강하고 날카로운 점을 극대화시켜 준다면 글라번은 빠르고 다양한 공격을 용이하게 해준다. 이 모든 걸 충족시켜 주는 게 화신체다. 영계의 초강자들이 대부분 화신체를 주공격법으로 애용한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가린차와 네 명의 롬멜 전사들은 어느 새 뿔뿔이 흩어져 무리 중에 뒤섞여 힘차게 몰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가린차는 상대에게 연습이라도 시켜 주듯 여유롭기만 했다. 그는 양손에 하나씩 파라슈를 들었다. 하나는 빙글빙글 돌리며 수비막을 형성하고, 또 하나로 장난치듯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파라슈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하고 빠른 빛줄기가 쉴 사이 없이 뿜어졌다.
그의 발은 허공에 한 자 가량 떠서 일정한 도형을 밟기라도 하는 듯 규칙적인 놀림을 펼쳤고,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그의 몸을 시야에서 놓치기 일쑤였다. 마치 공간 이동이라도 하는 것처럼 빠른 움직임인지라 다른 전사들이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었다. 수십 명 사이를 누비고 다녔지만 그 홀로 춤을 추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그러던 그가 발락이 있는 곳을 향해 갑자기 큰 외침을 토했다.
“발락, 이제 대충 마무리를 짓는 게 관객들을 위한 배려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가?”
그러자 막 한 명의 파라슈를 뺏어든 발락이 맞장구를 쳤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군. 몸을 푸는 건 이 정도면 된 것 같으니 말야.”
흑호는 전사들 사이를 누비며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로 전열을 흩어놓고 있었다.
“이제야 말로 제대로 된 실력들을 보이겠군.”
아레나의 말에 파천은 더욱 긴장했다.
파천은 아레나를 슬쩍 쳐다보며 과연 그녀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생각해 보았다. 무한계 최고 여전사로까지 불리는 그녀라지 않던가.
겉으로 보기에 매우 분주히 움직이는 것 같은 발락이었지만 그는 현재 엉뚱한 곳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가 이러는 건 광장 너머 어느 곳인가에서 흘러드는 기운을 감지하고 나서부터였다. 그건 가린차나 바이롬도 마찬가지였다.
‘범상한 기운이 아니다. 놈이 만약 적이라면…… 곤란을 겪을지도 모른다. 만약…… 상처를 입기라도 한다면……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이때 아난다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하는 걸 파천도 보았다. 그것도 잠시, 시선을 거두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파천은 숨 가쁘게 돌아가는 결투를 보며 뭔가 빠져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저들에게서는 살기라는 게 없구나. 마치 비무라도 하는 것 같다.’
그로서는 조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무림에서 적으로 마주선다는 건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는 걸 의미했다. 그렇기에 적을 배려한다는 자체가 사치스런 생각일 따름이었다.
순간의 방심으로 자기보다 약한 적에게 목숨을 잃게 된다면 누구를 원망할 것이며 어디 가서 하소연할 것인가. 그래서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최대한의 집중력을 가지고 적을 단숨에 제압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사의 기본 생리였다. 그런데 거칠고 잔인할 것 같았던 발락에게서조차 살기를 느낄 수 없으니 어찌된 노릇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앞을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파천이 아레나에게 물었다.
“저들이 손을 쓰는 것을 보니 전력을 다하지 않음이 분명한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발락이나 롬멜 전사나 바이롬은 말할 것도 없고 슈트레까지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 근처까지 집중되기 시작한 기운을 감지했기 때문이야. 저들은 지금 형식적인 전투를 벌이면서 적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거야. 그리고 저들은 따지고 보면 반드시 소멸시켜야 할 만큼 공존할 수 없는 적의 관계는 아니거든. 그러니 자연 공격이 날카롭지도 잔인하지도 않은 거지.”
아레나는 정황을 정확하게 분석해 내고 있었다. 그녀의 말처럼 정체불명의 수상쩍은 자들이 광장 주변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은 세 방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기운들이 파천이 느끼기에도 예사로운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 자욱하게 깔리는, 눈에 보일 정도의 짙은 기운은 호흡을 들이킬 때마다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는 것 같기도 했다.
가린차는 지금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며 전력을 소모할 이유가 없다. 놈들을 먼저 드러나게 해야 한다. 대체 어떤 놈들일까?’
가린차는 양손의 파라슈를 양옆으로 빠르게 회전한 연후 앞쪽을 향해 힘차게 뻗었다. 검의 형상을 하고 있던 두 개의 빛이 하나로 합쳐지며 전방을 향해 쭉 늘어난다.
엿가락 늘어나듯이 뻗어나간 빛은 무리 가운데를 뚫으며 직진하더니 돌연 방향을 바꿔 사방으로 확 퍼져 나갔다.
“모두 조심해.”
슈트레의 글라번에서 전신을 가릴 정도의 큰 막이 형성되며 가린차의 공격을 막아 갔다. 다른 전사들 역시나 각기 막을 만들어 몸을 보호했다. 그때였다.
“하앗.”
가린차의 파라슈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붉은 줄기의 기운이 뻗어나왔다. 그것은 그와 전사들 사이를 연결하고 있던 빛을 타고 일순에 전달되었다.
파파파팡
“헛.”
“이이이……”
“앗!”
강한 타격에 뒤로 한없이 날아가는 자, 뒤로 밀려나면서도 간신히 버티는 자, 바닥에 사정없이 내동댕이쳐지는 자가 속출했다. 순식간에 가린차의 주변은 휑하니 비어 버린다. 그러자 빈 공간을 다른 롬멜의 전사들이 채웠다. 그들은 원진을 형성해 우뚝 섰다. 어젼히 파라슈틑 손에 들려 있었다.
이때 발락이 고함쳤다.
“바이롬, 수하들을 물려라.”
바이롬도 은근히 원하던 바였기에 망설임 없이 명을 내렸다.
“모두 뒤로 물러서라.”
휘리리릭
발락이 멋들어지게 공중제비를 돌며 흑호의 등에 안착한다. 아레나가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좀 시시하군. 경계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시작된 싸움을 이렇게 끝내다니……”
그러나 파천에게는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시시하다니? 어떻게 저걸 시시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파천은 불현듯 자신을 돌아보았다.
‘과연 할 수 있을까? 저들보다 더한 강자들이 즐비할 텐데…… 그런 곳을 통과할 수 있을까? 저런 자들도 두려워하는 마계의 마신들을 내 손으로……내 손으로 무찌를 수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암담했다. 그렇지만 파천에게는 불굴의 의지가 있었고 든든한 동료들이 있었으며, 그 어떤 역경도 이겨 나갈 수 있게 해주는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반드시,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
파천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신의 피라 모조리 용솟음치며 미친 듯 들끓어 오르는 것 같았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의 하고자 하는 의욕도 더불어 크게 상승했다.
뒤로 물러선 바이롬과 슈트레의 전사들은 정신적인 피로감에 종전과는 다른 모습들이었다. 그들 옆에 선 바이롬과 슈트레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발락과 롬멜 전사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넘지 못할 벽 같은 걸 느끼며 주변의 수하들을 바라본다.
‘괜히 데려 왔는지도 모른다. 필요 인원만 제외하고는 모두 돌려 보내야겠다. 어차피 중부권으로 들어서면 핵심 전력이 합류하니 이들은 돌려보내자.’
바이롬의 생각과는 달리 슈트레는 더 많은 전사들을 데려 오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목적을 위해 수하들이 희생당하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위인이었다.
‘사실 이들은 계약 관계일 뿐 나에 대한 충성심도 없다. 루딘을 소모하는 일이 있어도 더 많은 전사들을 모으는 건데……..’
그는 남부권을 벗어나기 전에 중부권에서도 통할 수 있는 강한 전사들을 재차 모집하리라 작정했다.
선발대는 광장 끝머리에 자리 잡으며 좁은 간격으로 모여들어 있었다. 여전히 주변을 경계하는 건 마찬가지였고 바짝 긴장하고 있는 것 또한 변함없었다.
너울은 지금 몸이 근질거리는 걸 간신히 참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발락과 가린차와 자웅을 결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럴 수 없어 아쉬웠다. 발락의 도살자는 웬만한 영자들이라면 그 이름만으로도 두려움을 주는 대상이었고, 롬멜 전사단 역시나 그에 버금가는 명성을 지니고 있다.
선계의 선인이나 천상계의 아라한들이 무한계의 강자들과 마주칠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다. 대결해 볼 기회는 더더군다나 없는 일이었다. 선발대 중에 발락이나 가린차를 손쉽게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는 자는 몇몇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너울 역시나 솔직히 한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들에게 실력으로 딸린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문제는 실전의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너울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럼에도 중부권의 전사들이나 칠대부족을 만나면 왠지 모르게 위축되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점에 생각이 머물자 스스로 화가났다.
‘선발대에서 선계의 선인 중 내가 서열이 가장 높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야.’
사실 너울은 이번 선발대를 뽑은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게 생각해 오고 있던 차였다. 선계에서 자신의 서열이 상층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하층부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은 엄밀히 말해 선계의 무력을 담당하는 선장이 아니다. 지금 곁에 있는 아라한들 역시나 그건 마찬가지였다.
천상계에서 전투에 능한 자들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신장들로서 마계의 마신들과 싸운 경험마저 있을 정도로 전투에 능한 인물들이었다. 그런 자들을 모두 제외시키고 선발대를 구성했을 때부터 너울은 한 가닥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다행히 아난다 님이나 아레나가 있기에 망정이지.’
그들의 존재로 너울은 안심할 수 있었고, 어쩌면 이번 여정이 그다지 힘에 부치치 않을 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더군다나 나머지 여섯의 안배된 영자들마저 합류하게 된다면 감히 누가 앞을 막을 것인가, 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니 단순히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부터 강자들이 출몰하니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어찌 알겠는가. 아난다 님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건가?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는 건 그다지 유리할 것 같지 않은데…… 의도를 알 수가 없으니 참으로 답답하구나.’
이런 너울의 생각ㅇ르 읽은 것인가. 아난다가 선발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또렷한 목소리로 지시를 했다.
“곧 여기를 탈출해야 할 일이 발생할지도 모르니 준비들을 하고 계세요. 제가 신호를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말고 앞만 보고 달려가세요. 그 외에 발생할 위험은 저와 아레나 님이 담당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갑자기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모두는 마음의 준비를 새롭게 했다. 파천은 그때까지도 발락과 롬멜 전사들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굳어 버린 것처럼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고, 그들을 멀찍이서 포위하고 있는 바이롬 등도 움직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광장에 있던 영자들 중 몇몇이 건역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바보같은…… ”
아레나의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비명이 천지간을 울렸다.
“아악.”
“크악.”
무엇이 어떻게 된 일인지 파천은 얼른 파악할 수 없었다. 어찌된 연유인지를 헤아리느라 고개를 이리저리 빼보는데 그래도 모르긴 마찬가지. 5백여 영자들은 주변 상황의 급변에 따라 조급함을 보였다.
사방에서 옥죄어 드는 기운은 점차 숨 가쁘게 그 농도를 짙게 만들어가고 이에 따라 기괴한 소음까지 동반하기 시작했다. 불그스름한 빛은 이리 저리 찢어지거나 뭉쳐 광장의 허공을 가득 메워 갔다.
위이이잉
쿠루루루
갖가지 소리들은 출처를 알지 못해 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무슨 소리지?”
아레나 역시 이 순간만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아난다를 찾았다.
“혹시…… ”
“귀계의 악령들인 듯합니다.”
파천이 듣기로 귀계의 귀령들은 영체를 지니지 못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차원계의 영자들에게 무시를 당해 왔었다. 인간들에게야 그들이 두려움을 줄 수 있겠지만 영자들에게는 그리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힘을 축적해 가기 시작한 건 꽤나 된 일이었다. 소멸 직전에 영체를 자신들이 차지하는 방법이었다. 처음에 영자들은 그런 식으로 반복되는 짓거리를 힐난만 할 뿐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상황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귀계의 귀령들 중 상당수가 귀계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영체 사냥에 나선 것이고, 아직 죽음이 도래하지 않은 영체마저 힘으로 빼앗는 극악한 일을 한 것이다.
사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과 거래를 하는 영자들까지 생겨났으니, 그들이 곧 사냥꾼이다. 영체를 훼손시키지 않고 죽음에 이르게 한 뒤 그걸 귀령들에게 파는 것이 그들의 업이었다. 이러다보니 여러 부작용도 생기고 변동도 생기고 변종도 생겨나서 귀계에서는 영체를 입은 귀령들을 악령이라 규정하고 그들을 이단시하기 시작했다.
오갈 데 없어진 그들은 무한계를 떠돌며 세력을 형성하거나 차원계를 혼란케 하는 주역으로 떠올랐는데 그들을 가리켜 영자들을 ‘라만’이라 불렀다.
“라만이 온 것 같습니다.”
침착한 아난다의 어조에 선발대는 당황했다. 라만은 중부권 전사들에게조차 껄끄러운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영계의 다양한 부류들중에서 가장 상대하기 거북하다. 원래 지니고 있던 귀령으로서의 능력에다 영체를 입으면서 생겨난 능력, 거기다 술사들의 도움으로 갖게 된 괴이한 능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잘 파괴되지 않는 영체도 문제였고, 설사 영체를 소멸시킨다 해도 이놈은 죽은 것이 아니다.ㅣ 다시 어딘가에서 영체를 입고서 재차 나타나 괴롭히니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라만은 기본적으로 모두 끈질겼다. 한 번 원수를 지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웬만하면 이들을 피하는 게 일반화 되어 있는 현실이었다. 그런 라만들이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아직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분위기만으로도 다른 영자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롬!”
발락이 바이롬에게 성큼 다가서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라만들이 온 것 같으니 우리들끼리의 다툼은 뒤로 미루는 게 어떤가?”
라만은 공동의 적이다. 그들이 나타나는 순간 적은 동지가 된다. 바이롬도 싱긋 웃으며 동의했다.
“그야 당연한 일잊. 모두 전투 대형으로.”
바이롬 전사들은 이번에는 라만들을 상대하기 위한 전투 대형을 짰다. 사실 라만들에 대해 알려진 건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에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는 확연하지가 않았다. 어떤 낭설에 의하면 놈들은 단순해서 협공이란 걸 모른다고 했다. 오직 돌진. 이에 비해 바이롬 전사들도, 슈트레의 전사들도 몇 개의 열로 나누어 서고 있었다.
나머지 영자들 역시 무리를 이루어 라만의 공격에 대비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런가 하면 라만은 철저하게 무리를 이뤄 협공만을 주로 한다고도 했다.
선발대는 전사들의 움직임을 물끄러미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이 아니야. 만약 내가 생각하는 자들이 맞다면…… 대체 무엇을 뜻하는 걸까? 중부권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아난다의 그 말은 워낙에 작았을뿐더러 다들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었기에 아레나와 파천만이 들을 수 있었다. 파천은 아난다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질문했다.
“그들이라니?”
“아직 확신은 없지만…… 타이론이 함께 하는 것 같습니다.”
파천과 아레나는 뜨끔했다. 발락과 마찬가지로 칠대부족의 하나인 타이론. 그들은 무한계에서 무법자인 양 설쳐대는 자들이기도 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어찌 그들이 라만과 함께 있다는 겁니까?”
아난다도 설명할 수 없는 현 상황에 머릿속이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파천은 작금의 위기에 대한 걱정보다는 새로운 영자들을 만난다는 사실에 흥분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광명을 가져와 저들을 모두 하나로 할 수 있다면 마계도 상대할 수 있다는 말이 그저 나온 얘기는 아니구나. 타이론은 변체술과 환상에 능하다 했다. 기대가 된다.’

무한계 칠대부족은 대부분의 영자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다. 아무리 강력한 전사단의 조직했다. 하더라도 이들과 껄끄러운 관계가 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길 곳은 없다.
수백여 개의 부족 가운데서 가장 강성하고 결속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게다가 한 번 맺은 원한은 어떤 식으로든 결말을 보려 한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그들은 일정 지역에 거주하면서 자치권을 행사하며, 다른 세력이나 부족의 개입과 간섭을 극도로 경계한다.
이들은 원래 한 뿌리에서 시작되었다. 수련자의 시초가 메테우스라면, 칠대부족의 시작을 연 이는 영자로서 신으로까지 추앙받았던 전설적인 강자 ‘카란’이다.
성스런 산 슈메르의 중턱에는 일단의 무리들이 모여 살았다. 그들은 메테우스의 무한계 개척과 비슷한 시기에 슈메르를 개척한 자들로 원래는 천상천에서부터 메테우스를 따르던 자들이었다.
메테우스에 대한 그들의 기대는 특별했다.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계급간의 불화와 차별, 억압을 해소시키고 나아가 이상적인 세상을 만들 수 있는 특별한 영웅! 그건 하나의 이상이었으며, 메테우스 그 자체로 하나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를 흠모했던 자들은 돌연한 메테우스의 행동에 실망감과 분노를 동시에 느껴야만 했다.
당시 메테우스와 가장 친밀하게 지내던 자가 바로 카란이었다. 카란은 메테우스와 친구 사이였음에도 스스로 종을 자처하며 주인으로 섬겼다. 메테우스에 대한 그의 충정은 특별한 것으로써, 당시 메테우스를 질시하고 몰아내려 했던 천상천의 신장들을 은연중에 경계하는 역할을 자임했었다.
카란은 용족의 족장 그레고스와 함께 특별한 수련을 하며, 자웅을 겨룰 정도로 영력에 재능이 탁월해 당시 천상천에서도 수위를 다툴 정도였다. 그가 보고하고 있는 한, 메테우스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메테우스를 따르던 자들의 세력이 점차 커져 가자 곧 영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란 희망에 부푼 소리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카란은 신이 났다. 자신이 주인처럼 따르는 친구 메테우스가 머지않아 새로운 천상천주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 마냥 행복했다. 이러한 시점에 메테우스의 돌연한 결행은 적잖은 파장을 불러오게 된다.
수많은 영자들이 그러했듯 카란의 실망감도 이만저만 클 것이 아니었다. 단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천상천을 홀로 떠나간 메테우스. 그에 대한 배신감으로 망연자실한 카란은 결과적으로 그와 결별하게 된다. 이후로 그들은 단 한 번도 다시 만나지 않았다.
카란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천상천을 나와 지금은 슈메르 산이라 명명된 곳 중턱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한다. 이런 소문은 급속하게 퍼져 나갔고, 그를 따르고자 하는 수 많은 영자들이 새롭게 모여들게 된다. 카란은 고민했다. 저 많은 수의 영자들이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지만 채워 줄 만한 역량이 없었던 것이다.
그제야 메테우스를 조금은 이해할 듯도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완전히 용납하는 건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결심을 했다.
‘이곳에 이상 세계를 건설하리라.’
그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슈메르 산 전역에 완전한 평등이 구현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시도한다.
처음에는 그 시도가 성공한는 듯도 보였다. 차별과 불평등이 사라진 곳에는 매일 평화의 노래만이 가득했고 영자들은 슈메르가 곧 광명세라고 믿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런 카란의 노력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한다. 처음 그를 따라나섰던 충직한 동지들이 어느새 세월이 흐르며 기억소멸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때 카란은 후광을 뻗칠 정도로 완전엑에 가깝게 가 있었기에 기억소멸을 맞지는 않았다.
그를 제외한 슈메르의 지도층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계속 변동되었다. 이렇게 되자 처음의 이상은 흐려지고 슈메르 역시나 다른 영자들의 대지와 다름없는 곳이 되고 만다.
카란에게도 변화는 찾아온다. 강하지만 겸손하고 온화하던 그의 성품이 급격하게 괴팍해져 간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슈메르가 변질되어 간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도 별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자신의 권위를 대신하는 대리자들이 갖가지 부정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외면했다.
메테우스가 망각의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슈메르의 모든 영자들을 한곳으로 모이게 하고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게 된다.
‘나는 얼마 전 메테우스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난 처음으로 내 예지력을 발휘해 미래의 일을 내다보았다. 내가 본 것을 이 자리에서 소상히 밝힐 수는 없지만 큰 불행이 이곳 영계에 닥칠 것이란 건 말할 수 있다.
난 이곳을 떠난다. 완전자로 향한 길을 나는 포기했으며, 내 관심은 이곳 무한계에 머물러 있다. 나는 이지ㅔ 스스로를 금제해 기나긴 잠을 자고자 한다. 내가 다시 깨어날 때 메테우스 또한 돌아오리라. 나는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 예전에 하지 못했던 말을 그때는…… 할 수 있겠지.
내가 없는 동안 이곳 슈메르를 통치할 자들은 내 사랑스런 일곱 제자들이다. 이들을 의지하고 신뢰하라. 슈메르를 지켜낼 수만 있다면 평화는 유지될 것이다.’
카란이 그 말을 하는 내내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말처럼 슈메르를 떠나갔다. 그가 어디로 향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카란의 일곱 제자. 이들이 바로 무한계 칠대부족의 족장이자 슈메르를 파괴시킨 자의 오명을 쓰고 있는 자들이기도 했다.
칠대부족은 서로간에 미묘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적대 관계도, 그렇다고 친밀한 관계도 아닐 뿐만 아니라 서로 서로 애써 외면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한 뿌리에서 시작되었으나 지금은 너무도 상이한 길을 걷고 있는 칠대부족이 한 자리에서 만날 일이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지금 있을 수 없는 그 일이 벌어지려 한다. 발락의 도살자가 있는 자리에 타이론족의 전사가 나타나려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만나지 않고, 우연히 마주쳤다 해도 외면하며, 절대로 부딪치지 않는다. 이런 오랜 금기가 깨어지려 하고 있었다.
아난다가 탄식을 불어냈다.
“잠들었던 대지들이 깨어나는 건가?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구나.”
그의 독백은 의미심장했다 파천 또한 불길한 예감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무한계 영자들 사이에 떠돌던 전설 같은 이야기를 말하는 거군. 만약 그들이 실재하고 현 혼란에 참여한다면 누가 있어 그 겁란을 잠재울 수 있겠는가?’
지금껏 파천이 습득한 정보는 꽤나 많은 것이었다. 천마와 혜능에게서, ‘그’에게서, 그리고 무연에게서 들어 알고 있던 내용이 영계에 대한 모든 것은 아니었지만 충분할 정도는 되었다. 그 중에 그의 관심을 유독 끌어당기는 몇 개의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건 마치 처음 무림에 대해서 들었던 어린 시절을 연상케 했다.
‘그 가운데 가장 내 관심을 끌었던 건 역시나 잠자는 대지에 관한 얘기였다. 영계 영자들에게조차 전설과 신화로 여겨지는 신비한 이야기들. 그게 과연 현실성 있는 이야기일까?’
잠자는 대지.
그 이야기를 처음 한 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다. 영자들의 영격이나 영력이 최고조에 이르면 기억소멸마저 오지 않는 불사의 존재가 된다.
그 시점은 오랜 세월의 축적이라는 전제하에 달성도리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영자들 기억에 의존해 거론될 수 있는 영계의 역사는 많은 부분 시초에 대해서 논의할 자료가 전무한 게 사실이다.
심지어 천사들조차 그건 예외가 아니어서 어쩌다 그들을 대면할 기회를 천운으로 맞는다 해도 알고 싶은 걸 얻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잠자는 대지에 관한 전설은 영자들의 첫 기억이 있던 때부터 떠돌았다.
무한계의 대지를 처음 연 이가 메테우스라는 게 정설이지만 그 이전에도 무한계에는 여러 대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걸 뒷받침하는 증거로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분명 과거의 것으로 보이는 유적들이 즐비했던 것이다. 무한계의 끝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너머 어딘 가에는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데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지금의 영계가 체계를 잡아 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일이고 영계 대전쟁, 다시 말해 천사들의 반란이 있기 전에도 새로운 세계가 존재했었다.
그 당시의 세계는 아흔아홉 개의 대지가 서로 겹쳐져 있었는데 각각의 대지마다 시간대가 다른 문명이 번성하고 있었다. 각 대지에는 그 세계를 다스리는 제왕이 있었으며, 그들은 대지가 위치를 바꿀 때마다 회동을 갖고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들은 서로를 침범하거나 왕래할 수 없도록 허물 수 없는 벽을 세우고 각자가 다스리는 영자들의 능력을 어느 정도 제한시키는 데 성공한다.
제왕들은 불사의 존재였으며 가장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들이었다. 그들은 적어도 그들이 다스리는 대지에서 신으로 군림했으며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때 일정한 규칙 안에서 서로의 위치를 바꾸어 가던 대지들 사이에 작은 균열이 있게 된다.
자연적이라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가해진 힘으로 벽은 무너지고, 제한되었던 영자들의 능력도 점차로 회복되기에 이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신이라 생각해 왔던 제왕이 자신들과 별 다르지 않은 영자란 사실을 모든 영자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충격을 던지게 된다. 이는 결국 반란이라는 극한 대립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일단락 되었는지에 대해 전설은 소상히 전하지는 않는다. 단지 전쟁 후 모든 것이 황폐화되고 남겨진 건 서른세 개의 대지뿐이라는 것. 그것 또한 각기 찢어져 다른 차원으로 분리되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당시 반란을 주도했던 영자들의 우두머리에게는 조력자가 있었는데 그가 다름 아닌 가장 힘있는 천사 메타트론이었으며, 남겨진 반란군은 새로운 공간을 찾아 떠나고, 그곳이 지금의 영계가 시작된 기원이라는 것이다.
당시 반란군의 지도자는 첫 천상천의 천주가 되었고, 후에 완전자의 세계인 광명세를 엿보았다는 죄로 천궁천사들에게 사로잡혀 영원히 결박당하기에 이른다. 잠자는 대지는 당시 제왕들의 추종 세력들과 그들의 터전을 이르는 말이며, 그들은 현 무한계 너머 다른 차원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는 것이 전설의 주요 골자였다.
잠자는 대지에 관한 전설은 지금까지도 영자들 사이에 심심찮게 회자되고 있지만 사실 신빙성은 거의 없다. 메테우스와 카란의 이야기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었으나 잠자는 대지는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증명할 수 없는 허구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잠자는 대지가 영자들에게 흥미를 끄는 건 역시 그들이 남겼다는 제왕의 유적과 유물때문이었다. 지금까지도 그 유혹은 무한계를 들끓게 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분석되고 있었다.
아난다의 독백을 파천은 다시 되짚어 보았다.
‘잠자는 대지가 깨어나고 그들의 유물이 세상에 드러나면 과연 누가 있어 욕망을 잠재울 수 있을까? 세상을 거머쥘 수 있다는 건 이들 영자들에게도 끊을 수 없는 마야고가 같은 것이니.’
광장의 분위기는 더 이상 고조될 수 없는 긴장감으로 잔뜩 움츠러들었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 같았다.
“기다리던 때가 도래하니 세상이 뒤집어지고 어둠 가운데 숨어야 했던 진실들이 드러나리라. 거짓의 옷을 입은 자들은 파멸을 맞아 영원히 저주 아래 떨어지리라.”
‘기분 나쁜 소리군.’
파천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는 마치 불어치는 바람이 우연히 말을 만들어 낸 것처럼 괴이하게 들렸다. 그 의미또한 심상치 않아 더욱 그런 기분이 강하게 드는데 가린차는 매우 불쾌했던지 크게 맞고함을 질렀다.
“이 잡것들! 어서 썩 나서지 못할까. 온갖 추잡한 짓만 일삼아 제집에서도 쫓겨난 주제에 감시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온 것이냐!”
라만의 소리가 다시 응답했다.
“무한계는 새 빛을 보리라. 이제 시작되었다. 전차원이 하나가 되어 왕으로 섬길 자가 오실 것이니 그는 영원토록 영화로우리라. 어리석은 자들은 때가 왔음도, 그 힘이 얼마나 순수하며 강성한지도 모른다. 그는 힘있고 권세 있는 왕이며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할 분이시다.”
가린차가 코웃음쳤다.
“숨어서 지껄이지만 말고 자신 있으며 나서 보아라. 라만의 저주 따위가 그리 대단한 것이면 진작에 세상은 종말을 고했겠지. 세상이 어수선해지니 너희들 세상이 온 듯 착각하나 본데 그래봤자 라만은 라만일 뿐, 너희 설자리는 앞으로도 여전히 없을 것이다.”
“롬멜의 전사와 발락의 도살자 그리고 선발대, 너희들은 오늘 이곳을 빠져 나가지 못한다. 위대한 역사를 예비하는 첫 번째 희생양으로 너희가 선택되었음을 영광으로 알라.”
그르르르릉
꽈르릉
“우레소리마저 동반되니 분위기가 아주 고약하군.”
파천의 그 말처럼 라만들의 기운 때문인지 광장은 더욱 을씨년스럽게 변해 갔다. 무리들은 라만의 공격에 대비해 초긴장 상태로 돌입했다. 광장 위 허공은 점차로 짙은 검은색 기운으로 뒤덮여 가고 그 가운데 번쩍이는 섬광만이 간헐적으로 나타났다가는 사라진다.
바람이 갈대 숲을 마주 휘저거 놓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허공 중에 전에 없던 형체가 맺히기 시작한다. 여기저기 어지럽게 공중을 떠다니는 것들이 있었다.
파천이 아난다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저것들이 라만이라는 귀계의 악령들인가?”
“맞습니다. 영체를 훔쳐 입고 있는 라만이 분명합니다.”
“눈에서 섬광이 번뜩이는 게 영 께름칙하군.”
전신을 빈틈없이 검은 천으로 동여맨 라만들이었다. 그들이 허공을 부유하는 전경은 누구라도 소스라쳐 놀랄 정ㄷ로 귀기스러웠다. 라만들이 등장하자 광장을 채우고 있던 영자들 대부분이 움찔거리는 게 눈에 확연히 보였다.
그들은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광장 전체를 포위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고 전신을 감고 있는 천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걸 걸치지도 않았다. 검은 기류를 몰고 나타난 것이 전부였다.
파천은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음에도 전사들 쪽에서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않자 의아해졌다. 자취가 파악되며 금방이라도 손을 쓸 것처럼 열을 냈던 가린차도 가만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잔뜩 웅크리고 기회를 엿보는 듯 신중하기까지 했다.
‘저들도 다른 적들이 있음을 알고서 저러는 걸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라만은 누구에게나 까다로운 유형의 적이었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법이 무언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이들 중에 없었다. 잘 드러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적의 출현에 그들 모두가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굳이 선공을 취해 빈틈을 노출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걸 알 리 없는 파천은 그들간의 침묵이 따분하게 여겨졌다. 따지고 보면 라만의 공격 의도가 자신에게 향해 있는데도 그는 지나치게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잇을 것만 같던 라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 빠름은 번개가 무색할 지경이었다. 그들은 동서남북 사방에서 흐릿한 자취만을 남긴 채 일순에 중앙으로 날아들었다. 몇 개의 열을 지어 그들을 방비하려 했던 전사들은 갑작스런 라만들의 공격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다. 정면에서 치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허공에서 내리찍듯 몰아쳐 왔기 때문이다.
“모조리 쓸어버려라.”
라만들 가운데 하나가 지른 명령은 오히려 그들의 움직임보다도 늦게 터져 나왔다.
파천은 긴장을 돋우며 온 신경을 라만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 소모했다. 롬멜의 전사들은 손에 쥔 파라슈를 흔들어 상대가 다가오는 걸 경계했으며, 발락은 오히려 허공 높이 몸을 솟구쳤다. 발락의 팔이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팔 전체에 진홍빛이 감돌며 두 배로 부풀어 오른 것이다.
그의 두 손이 마치 합장을 하듯 모아지더니 손바닥을 앞으로 한 채 마구 휘젓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 주위로 팔에 흐르던 빛과 동일한 기운이 회오리치더니, 엄청난 압력을 동반한 채 광장 위 허공 전체를 휩쓸어 버렸다.
과아아아아
용권풍이 저러할까 싶을 정도로 강력한 힘 앞에 라만들은 바람에 휩쓸린 꽃잎 마냥 맥을 못 추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잠시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의 몸을 가리고 있던 천들이 한꺼번에 풀어져 나가며 거대한 강줄기를 만들었다. 힘에 힘으로 맞서는 걸까? 천들은 빳빳이 곤두선 채 발락의 기운들을 파고들었다.
빠츠츠츠층
괴이한 충격음은 불똥이 터지면서 나는 소리였다.
“이놈들 제법이구나.”
발락은 신이 나서 다시 소리를 지르며 두 주먹을 앞으로 쭉 뻗었다.
콰쾅
산 하나가 흔적 없이 주저앉는 듯한 소리가 나며 발락의 전면을 때렸다. 그러자 기세 좋게 뻗어 가던 라만들의 공격이 순식간에 와해된다.
발락의 매서운 공격이 연이어졌기 때문인지 광장의 다른 영자들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모습들이었다.
롬멜의 가린차는 발락에게 모아지는 라만의 공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를 제쳐 두고 발락에게만 공격을 하다니.’
그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 역시 허공으로 솟구치며 라만들의 공격권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파라슈를 종횡으로 마구 휘저으며 라만들을 빠르게 압박해 들었다.
“하앗.”
하늘과 땅을 양단할 정도로 거대한 프리즈마가 형성되며 그의 전면은 통째로 갈라져 갔다. 라만은 그 힘에 감히 맞부딪칠 자신이 없었던지 사방으로 흩어지고, 그 순간을 발락은 놓치지 않았다. 어깨 넓이로 벌리고 있던 양손 사이에 거대한 기류가 들끓더니, 불을 찾는 나비처럼 빠르게 흩어지던 라만들을 유연하게 따라붙는 것이었다.
가린차는 그런 발락을 추켜세우며 자신의 실력도 더불어 뽐냈다.
“나도 놀고 있을 수만은 없지.”
슝슝슝
라만을 끈질기게 따라붙는 건 가린차의 파라슈에서 발출된 프리즈마였다. 발락과 가린차가 잠시 보여 준 수법들은 놀라울 정도로 강하고 정교했다. 또한 가장 시기 적절한 순간을 노리고 있었기에 적들을 당황시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둘 다 속으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도 섣부른 판단이었다.
라만은 협공을 하지 않는다. 라만은 무리를 지어 다닐지언정 힘을 합하지는 않는다. 이런 라만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이 깨어지리라고는 그들 역시 미처 예견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라만들이 뒤로 후퇴하는 듯하더니 급기야 두 손을 마주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걸 본 아레나가 놀라 소리쳤다.
“역시 저들이 합체술을 사용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광장의 다른 영자들을 공격하던 라만들까지 발락과 가린차의 주위를 둘러싸고 그들 역시나 손을 마주잡았다. 거대한 원을 형성한 채 손을 잡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일견 장관을 연출하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보여 줄 것이 없다면…… 이제 그만 끝내지.”
라만의 경고 때문은 아니었다. 발락과 가린차는 힘을 거두어들인 채 망연자실해 허공에 떠 있었다. 그들의 머릿속을 동일하게 채우고 있는 생각은 그들이 알고 있던 라만에 대한 정보가 모조리 잘못 전해졌다는 점이다.
“발락이 라만 따위에거 져서야 체면이 안 서지.”
발락은 호기롭게 외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때 롬멜의 나머지 전사들도 가린차와 합류한다. 여섯 대 수십의 힘 겨루기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아난다가 아레나에게 말했다.
“저들만으로는 벅찹니다.”
아레나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합류할 생각이었습니다.”
아난다가 막 파천의 곁을 떠나려던 때였다. 라만들의 붙잡은 손과 손 사이를 빠르게 오가는 기류가 보였다.
몇 번인가 서로의 힘을 충돌시키더니 그 기운은 급기야 하나로 합쳐져 중앙을 향해 쏘아져 갔다. 거대한 빛의 폭풍은 파천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종류의 힘이었다.
화아악
화산이 폭발한들 저럴까 싶을 정도로 그 힘은 놀라운 것이었다.
‘저걸…… 막을 수 있을까?’
파천은 자신과 상관없는 자들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합류할 시점을 놓쳐 버린 아레나 역시 파천 옆에서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가운데로 직격한 힘이 끝나는 지점에 발락과 롬멜 전사단이 있었다.
콰콰콰콰쾅
“터졌다.”
파천은 저 힘의 폭발 앞에 과연 무엇이 견뎌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라만의 합쳐진 힘은 생각보다 더 대단했다. 광장에 있던 모든 영자들의 시선에도 감출 수 없는 감탄과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얼마나 그 힘의 여파가 강했던지 뭉쳐진 기운들이 중앙에서 만나 하늘로 끝없이 솟구쳐 올랐다.
‘어찌 되었는가? 그 힘을 견뎌낼 수는 없었겠지?’
파천은 그렇게 생각했다. 되받아 치는 힘은 분명 없었다. 누군가 밖으로 빠져 나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나 당했다는 결론인가? 저렇게 어이없이 무너지다니.’
발락과 롬멜의 전사들이 대항 한 번 못해 보고 너무도 무기력하게 당했다는 사실은 다른 영자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아레나의 눈이 그 순간 반짝이기 시작했고 아난다의 탄성이 이어졌다.
“힘에 대항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였군. 빠른 결단이 위험을 비껴가게 했어.”
“반격인가?”
아레나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 높은 곳에서 빠르게 떨어져내리는 형체가 파천의 시야에 잡혔다.
상황은 명백했다. 라만들의 공격이 모아지던 그 짧은 순간 롬멜 전사들과 발락은 힘에 맞서지 않고 몸을 솟구쳐 올렸던 것이다. 그들이 소모한 힘은 격돌한 기운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것과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것 정도였다. 너무도 바른 속도였기에 아래쪽에서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라만들 힘의 여파에 휩쓸려 올라갔기에 그들의 움직임은 더 가속되었다. 그들이 다시금 맹렬한 속도로 아래로 떨어져 내리자 광장은 묘한 흥분감마저 보이고 있었다.
“이놈들! 이번엔 이쪽 차례다.”
발락의 고함소리보다 먼저 라만들을 향한 건 그의 전력이 모아진 거대한 원형의 기운이었다. 발락의 두 팔에서 뿜어져 나온 힘의 결정체는 라만들 전체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롬멜의 다섯 전사들이 뿜어낸 프리즈마가 동시에 라만들을 내리찍었다. 파천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라만들이 피하면 광장은 쑥대밭이 되겠는걸.’
그러나 파천의 이러한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라만은 피하지 않고 맞서 갔다. 종전과는 동일한 힘이 가운데가 아닌 위로 향해 갔다. 두 힘이 처음으로 허공에 부딪쳤다.
콰쾅
쇄애애액
폭발의 여력은 대단했다. 바람이 휘몰아쳐 할퀴고 지나가자 영자들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고, 광장 전체가 일시에 들썩거렸다. 한편 맞부딪친 대결에 발락 등도 버텨내지는 못했다.
그들은 재차 공중으로 높이 솟구쳐 올랐다. 이번에 ㄴ라만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아예 끝장을 볼 심산인 듯했다. 광장에 있던 영자들은 이때다 싶었던지 사방으로 몸을 날려 도주한다. 눈치만 보고 있던 그들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는 없었다. 이제 광장에는 선발대와 슈트레, 바이롬 전사단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다른 영자들이 빠져 나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아레나는 잠시 어찌할지 몰라 망설이는 눈치였다. 아난다 역시 갈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들을 뒤에 달고서 도주하는 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해결을 봐야 한다.’
결정이 내려지자 아난다는 아레나에게 망설임 없이 말했다.
“아레나 님, 라만을 맡아 주세요.”
“그렇지만…… 저들은 어찌하고……. ”
“제가 전력을 기울여 보겠습니다. ”
아레나는 안심이 되었다.
‘아난다 님이 전력을 기울이신다면야……’
그녀는 파천의 등을 철썩 두드리며 힘있게 말했다.
“파천, 내가 싸우는 모습을 잘 지켜봐라. 도움이 될 거야.”
자신감 넘치는 말에 파천은 싱긋 웃으며 화답했다.
“무한계 최강 여전사의 솜씨를 볼 수 있는 건가? 이것 영광인걸.”
아레나는 파천의 추켜세우는 말에 대답 대신 미소를 남긴다. 그녀의 시선은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하늘로 고정되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간만에 한바탕 신명난 춤사위를 벌여 볼까.”
그녀에게서 강적을 만난 긴장감이나 두려움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녀의 신형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빛살처럼 빠르게 위를 향해 쏘아 갔다.
“히야, 빠른데?”
아레나는 라만을 상대할 나름대로의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놈들의 연합 전선을 깨는 게 급선무다. 큰 힘을 앞세워 전체를 상대하기보다는 빠른 공격으로 적의 허점을 파고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
라만들도 아래쪽에서 빠르게 다가서는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
발락은 아레나의 합류가 의외라는 태도였다.
“춤추는 여전사, 아레나가 이런 잡 것들하고도 싸우시려고?”
약간 비아냥거림이 담겨 있었지만 사실은 기쁨을 감추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린차 역시나 그건 마찬가지였다.
“도움은 잊지 않겠어.”
“난 돕고자 하는 게 아냐. 저들이 싫을 뿐이지…… ”
라만들은 공격을 일시 중단하고는 새로 합류한 아레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 아레나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게 그 증거였다.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아레나, 네 소문은 익히 들었다. 페나인 전투를 승리로 이끈 실력은 인정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사들을 상대했을 때의 경우. 너는 오늘 최초로 패배를 맛보게 될 거다.”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꺼낸 건 그들 역시나 아레나를 껄끄러워 한다는 반증이었다.
발락과 가린차의 중간에 선 아레나가 라만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 너희들의 장기를 펼칠 때가 되지 않았나? 나는 라만이 합체술을 사용한다는 거짓말 같은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오늘 보니 사실인 것 같군.”
라만의 합체술. 단 한 번 세상에 공개되었다고 하지만 사실인지 알 수 없는 라만들의 감춰진 비기였다. 중부권의 일부 부족 중에는 합체술만 전문으로 사용하는 데가 몇 곳 있었다. 그럼에도 합체술하면 라만이 거론되는 건 단 한 번이었지만 그 위력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북부권의 부족인 가르만을 멸족시킬 때 사용했는데 당시 살아남은 소수의 영자들에 의해서 전 무한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라만을 만나면 피하라는 얘기가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기이하게도 라만에 대한 이런 소문은 신빙성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일쑤였다. 라만은 힘을 합하지 않는다는 또하나의 속설때문이었다. 그런 논리로 합체술을 사용한다는 걸 그 누구도 믿으려 하지 않앗던 것이다.
라만은 영체를 지니고는 있지만 엄밀히 말해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건 단지 빌린 것일 따름이다. 그들의 합체술은 다른 일반의 형체만을 합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틀렸다. 완전한 결합. 칠대부족 중 하나인 거신족 콴보다도 거대한 몸집으로 화신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날렵하며, 개체가 지닌 프리즈마를 온전히 합일하니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이겠는가.
아레나의 말에 발락도 가린차도 당황했다. 지금껏 그들이 염려하던 건 오직 그것 하나였다. 라만이 합체하면 어찌나 하는 걱정 때문에 그들이 초조해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레나가 오히려 그걸 부추기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다. 우리의 합체술을 너희들이 견뎌내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자, 봐라.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진정한 힘이다.”
라만들은 서로가 서로를 끌어당겨 하나씩 덧붙여져 갔다. 신체가 마음대로 늘어나거나 분리되며 이지러지는가 했더니 급기야 하나씩 포개지는 것이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기괴한 장면이었다. 파천은 아래쪽에서 그걸 지켜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고 만다.
“저것들…… 진짜 괴물들이었군.”
아레나는 더욱 눈을 빛내며 라만들의 합체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지켜본다. 발락은 지금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내심으로 투덜대고 있는 중이었다.
‘합체하기 전에 끝장을 냈어야 하는 건데……’
가린차 역시 못마땅한 건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직접 겪어 보지 않았으니 그 위력이 미루어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라만의 합체는 잠깐 동안에 이루어졌다. 놈들이 합쳐지고 나자 그 크기가 5장은 족히 될 듯했다.
그놈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는데 목소리도 좀 전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이제 마음껏 공격해 보거라. 너희들 정도에 합체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야.”
발락의 인상이 고약하게 일그러졌다.
“한껏 기세가 올랐군. 네 놈의 커진 덩치만큼이나 실력이 대단한지 어디 이 몸이 한번 겪어 볼까!”
발락이 슬쩍 앞으로 나서자 라만이 손을 저었다.
“너를 상대할 자는 따로 있다.”
발락은 무슨 의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아레나가 발락을 쳐다보며 물었다.
“타이론과 원수진 일이라도 있나?”
아레나는 라만의 말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다. 발락을 상대할 자가 타이론이라고 미루어 짐작한 것이다.
발락은 무슨 뜻인지 아직 헤아리지 못했다. 갑자기 웬 타이론을 들먹이느냐는 표정이었다. 같은 칠대부족 중 하나이지만 교류는 아예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어쩌다 마주친다 해도 서로를 피해 왔다.
발락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레나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는 황망히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타이론이 라만드로가 동행할 일도 없거니와 설사 그렇다 해도 우리와 적이 되지는 않을 텐데……”
믿을 수 없었다. 칠대부족 중 하나인 타이론이 라만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이건 장치 잠잠하던 칠대부족을 격동시킬 것이 분명했다. 최강 부족이라는 자부심을 버리고 모두가 경원하는 라만과 야합하는 건 그 무엇으로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이건 다른 육대부족을 다시 전면으로 나서게 하는 대사건이라 할 만했다.
발락은 지금 그런 걸 따지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정말 타이론이 와 있다면…… 그리고 부딪쳐야 한다면 부담스런 일이다.’
칠대부족이라 해서 같은 비중으로 다뤄지는 건 아니었다. 흔히들 1강 3중 3약이라 하여 그들간의 우열을 구분하는 경우가 있었다. 1강은 당연히 용족이며, 3중은 요령족인 헤세시, 거신족인 콴 그리고 타이론이다.
이런 구분은 칠대부족 간의 전체 우열을 뜻하는 건 아니며 개개의 능력을 상대적으로 비교했을 때의 일반적인 분류에 지나지 않는다. 무한계의 다른 영자들이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당사자들이 칠대부족도 이를 인정한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었다.
발락은 지금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타이론과의 대결이 주는 부담감보다 장차 칠대부족 간에 있을지 모를 알력과 분쟁이 염려되어서였다.
‘카란 님의 뜻을 잇지는 못할망정 적대하려 한단 말인가?’
발락은 슬며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 자리에 타이론이 와 있다는 아레나의 판단을 아직 믿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타이론이 와 있는가? 나서라. 발락의 앞을 막을 것인가! 천한 람나과 손을 잡고 형제를 칠 것인가! 어서 나와서 대답해 보라.”
발락의 흥분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가 토해내는 음성엔 타이론에 대한 분노가 고스란히 깃들여 있었다.
“발락, 흥분하지 마라.”
광장 위 허공 중에 새롭게 나타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타이론이 분명했다. 단 셋에 불과했지만 그들이 던지는 부담감은 대단했다. 너울이 아난다에게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여길 빨리 빠져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빠져 나간다 해도 저들은 쫓아 올 겁니다. 저들이 원하는 건 우리의 생명인 듯하니 추격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지요.”
아난다의 그 말은 빠져 나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라는 의미도 되었다.
이때 파천은 조금 전 발락과 바이롬, 라만 등이 사용했던 수법들에 대해 다시 정리해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저건 내가 사용하던 자연검과 다르지 않다. 자연의 기가 프리즈마로 대체되었을 따름이다. 결국 무연의 말이 이걸 이른 것이었군.’
설마 했던 타이론이 실제로 모습을 드러내자 발락은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그는 타이론들에게 따지듯 물었다.
“형제들, 그대들이 왜 라만과 동행하고 있는 것이냐?”
셋 중 하나가 입매를 비틀며 툭 내뱉었다.
“몰라도 된다. 그리고…… 타이론과 발락은 더 이상 형제가 아니다.”
“카란 님이 들어셨다면 얼마나 실망이 크셨을까. 타이론이 카란의 후예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건만 라만 따위와 손을 잡고 있으니 개탄할 일이구나.”
“그럴지도 모르지. 발락,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마. 이곳을 떠나라. 가서 발락의 성주에게 말하라. 타이론은 더 이상 카란의 후예가 아니라고.”
발락보다 작은 체구의 타이론이었으나 그가 뿜어내는 기운은 발락을 능가할 정도였다.
붉은 피부에 푸른 머리털이 휘날리는 그들의 팔에는 기이한 병기가 부탁되어 있었다. 머리통만한 크기의 날이 선 반달도 팔뚝의 바깥쪽에 하나씩 번뜩이고 있었고, 손등에는 끝이 뾰족하고 길쭉하게 생긴 단검이 붙어 있다.
타이론의 말에 라만이 제동을 걸었다.
“아무도 이곳을 빠져 나가지 못한다.”
“조용히 하라, 라만. 결정은 우리가 한다.”
라만이 못마당한 얼굴로 다시 타이론을 쏘아 붙였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건가? 어리석군. 발락을 이대로 보낸다면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그러느냐?”
“무든 건 우리가 책임진다. 발락, 어서 떠나라.”
발락은 라만과 타이론의 대화를 듣고 있다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이 된다.
“내 생명이 마치 너희 것인 양 떠들어대는군. 타이론, 발락은 결코 등을 보이지 않는다. 그걸 잊은 거냐? 설사 이곳에서 소멸한다 해도 나는 도망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배신자가 앞에서 꽁무니를 빼는 짓은 절대 있을 수 없지.”
발락은 결심을 굳힌 뒤였다.
타이론 셋과의 싸움이라면 승산이 없음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가린차가 듣고 있다 옆에서 거들고 나섰다.
“타이론과 라만이 힘을 합했다는 건 확실히 충격적인 사건이긴 하지만 세상이 뒤집힐 정도로 대단한 건 아냐. 부담스럽긴 해도 우리들도 그리 만만하지는 않지. 게다가 아레나가 우리편을 드렁 주니 해볼만하지 않겠어?”
타이론의 시선이 아레나를 향했다. 아레나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훑어볼 것까지는 없잖아? 자,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는 것 같으니 시작해 보지, 그래.”
한 점 동요 없는 평정. 아레나는 그 흔한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자신감은 발락이나 롬멜 전사들에게도 힘을 북돋워 주는 것이었다.
“누가 라만을 맡을 것인가?”
“우리가 하지.”
가린차가 나섰다.
발락은 숨을 크게 내쉬며 타이론을 가리켰다.
“하나는 내 차지야.”
아레나가 펄쩍 뛰는 시늉을 했다.
“뭐야, 그럼? 나더러 타이론 둘을 상대하라고?”
발락이 웃으며 말했다.
“네 명성이 헛된 게 아니라면 그 정도쯤 어렵지 않을 것 같은데?”
“하, 이것 참. 좋아, 한번 해보지, 뭐.”
어느새 그들은 여유를 되찾고 있었다. 그런 상대들을 보며 라만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는다.
“곧 죽을 것들이 큰소리는…… ”
그들간의 긴장감이 고조되는 것과는 달리 광장은 오히려 평온해져 갔다. 그러나 아난다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너울에게 신중하게 지시를 내렸다.
“내가 움직이는 순간 선발대를 끌고 매소를 벗어나세요. 절대로 멈추지 말고 곧장 전진하셔야 합니다. 뒤는 걱정하지 마시고요.”
너울은 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 된다. 급하게 도주를 결행해야 할 만큼 위기 상황인 것 같지도 않건만 왜 저런 지시를 내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너울은 선발대원들에게 일일이 아난다의 지시를 전했다. 이후 자신은 파천 옆에 바짝 붙어 섰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했다.
‘파천을 살리기 위해서 내 생명을 대신 버려야 한다면 그렇게 한다. 그것이 선발대의 임무다.’
품자형으로 벌려선 타이론이 서서히 앞으로 나가자 롬멜도 발락도 같이 움직였다. 라만은 아래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너희들은 다음 순서를 기다려라.”
선발대에게 하는 말이었다.
라만의 말이 끝나는 순간 롬멜 전사들이 라만을 순식간에 포위했다. 때를 같이해 발락이 움직였으며 그 순간 타이론의 신형이 자취를 감췄다. 그들은 진정 빨랐다. 없어졌는가 했더니 어느새 발락과 아레나의 곁에 있었고 그들의 공격이 폭발했다.
최소한의 프리즈마만을 운용해 아레나의 신형을 베어 가는 그들의 솜씨는 진정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레나도 발락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지 원래의 자리에서 목을 빼놓고 기다리지는 않았다.
그들의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술래잡기라도 하는 것일까? 너무도 빠른 움직임들이라 아래에서 관전하던 전사들은 그들의 흔적을 뒤쫓기에 급급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라만과 롬멜 전사들은 매우 정적이었다. 상대가 먼저 움직이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아니었다. 두 진영 모두 힘의 격돌을 준비하고 있었다. 합체를 이룬 라만과 힘 겨루기를 한다는 자체가 어리석은 선택일 수 있음에도 가린차 등은 그렇게 생각지 않는 것 같았다. 중부권 일급 전사로서의 자존심이 그들을 부추긴 것이다.
상대가 강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적이 강하기에 그들은 오히려 더 열을 내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승부가 쉽게 결해지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겁 없는 놈들.”
거대한 라만의 신형이 슬쩍 앞으로 이동해 왔다.
‘저놈의 태도를 보건대 우리쯤은 안중에도 없는 듯하구나. 그렇지만 롬멜 전사단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쌓여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마.’
가린차는 수하들에게 영언으로 뜻을 전했다.
(내가 신호를 내리면 사방으로 흩어져라. 놈의 집중력이 떨어졌을 때를 기해 내가 먼저 공격한다. 이후 너희들은 놈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관절들을 노려라.)
특정한 상대에게 영언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상대보다 월등한 영력이 있거나 서로간에 영력의 교통을 일치시켜 놓을 때만 가능했다.
전사들은 집단 전투에 임하게 되면 본능적으로 영언으로만 의사를 나눈다. 적에게 이쪽의 의도를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반적으로 양자간에 특별한 집중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지금이다.”
가린차가 위로 솟구쳐 오르자 나머지 전사들도 사방으로 흩어져갔다. 그건 적을 혼란케 하려는 일시적인 눈속임이었으나 지금은 시기 적절한 방법이기도 했다.
라만은 정면 대결을 할 것처럼 여겨졌던 전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가자 순간 긴장하며 그들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쏟았다. 라만의 동작이 경직되었음은 당연했다. 바로 그 순간을 가린차는 노렸다. 그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공간이동을 사용한 건 아니었다. 환상력의 일종으로 잠시간 적을 혼동케 하는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 놈을 놓쳤다.’
라만은 가린차의 흔적을 찾기보다는 나머지 전사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바로 그때 그의 이마를 노리고 쑤셔드는 날카로운 기운이 포착된다.
“이놈!”
라만이 반사적인 동작으로 두 손을 포개 이마 앞을 막아 보지만 조금은 늦은 감이 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그의 두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파라슈를 통해 프리즈마를 운용한 가린차의 공격을 라만의 눈에서 쏘아진 기운이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가 노리는 건 다른데 있었다. 두 기운에 충돌하며 애초에 가린차가 노렸던 라만의 이마 정 중앙에서 약간 옆쪽으로 힘이 밀려나 버린 것이다.
푸슉
“으으.”
라만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이마가 길게 찢어진 것이 가린차의 시야에 포착된다. 가린차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롬멜 전사단을 우습게 보지 마라.”
승기를 잡았다고 여긴 가린차의 파라슈가 이번에는 라만의 목을 노렸다.
“까불지 마라, 이놈!”
라만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으며 가린차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해냈다.
가린차의 신형만큼이나 큰 라만의 손이 휘저어졌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보다 더 빠르게 도달한 것은 라만이 쏘아낸 프리즈마였다. 가린차는 이번에도 안 되겠다고 여겼던지 황급히 신형을 뒤로 빼낸다. 그렇지만 그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지금이다.)
가린차의 영언은 수하들의 2차 공격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정신을 어디다 파는 거냐!”
네 전사들의 파라슈가 춤을 추자 길게 반달을 그리며 프리즈마가 작렬한다. 각기 무릎과 척추, 어깨 등을 노린 공격은 상당한 충격을 줄 듯 싶었다.
파파파팟
그러나 의외의 결과 앞에 전사들은 뒤로 퉁겨나가야만 했다. 라만의 몸은 그들이 생각했던것보다 더 견고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맨몸이건만…… ’
가린차는 수하들의 공격이 먹혀들지 않자 당황했다. 게다가 라만의 찢어진 이마는 어느새 깨끗이 원상 복구되기까지 했다.
한편 아레나는 타이론 둘이 빠르게 따라붙어도 시종 여유 있게 피해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파라슈를 손에 쥐고 있지도 않았다. 타이론들 역시나 자신들의 장기를 펼쳐 보이지는 않았으며 아레나의 속도를 가늠해 보기라도 하는 듯 탐색만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발락과 타이론 사이의 격돌은 점차 격렬해지고 있었다. 발락의 두 손은 연신 진분홍빛 기운을 뿜어내고, 거대한 탑을 연상시키는 유형화된 기운들은 타이론의 움직임을 둔화시켜 갔다.
타이론은 팔뚝에 부착된 반달형의 칼을 이리저리 흔들어 발락의 힘을 다른 쪽으로 유도하며 위험을 벗어나고 있었다. 외양은 격렬했지만 그들 역시나 탐색전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서로 부딪쳐 본 적이 없었기에 상대의 장기를 잘 몰랐고, 그 점 때문인지 섣부르게 전력을 쏟아내지 않고 있었다.
파천은 그걸 보며 심드렁한 표정이 된다. 처음의 호기심 어린 빛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 눈이 잘못 된 건가? 공격 기법이 하나같이 거기서 거기인 것 같으니…… 가장 초보적인 운용이 프리즈마를 결집해 유형화시키는 것이고, 그건 무공에 있어서의 강기와 같은 작용을 한다. 지금 저들이 펼치는 건 다른 형태이긴 하나 검강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잖은가?’
그러나 그건 파천의 착각이었다, 보여지는 것과 실제 대하는 건 차이가 있었다. 속도와 강력함에서 무공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지금 저들이 보여 주고 있는 건 실제 자신들 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그건 단박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라만을 공격하던 가린차의 파라슈에서 맹렬히 쏟아져 나가던 프리즈마가 새로운 형태로 변형되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한 힘의 결집이 아닌 정교함으로 승부를 결하려는 것 같았다.
파라슈의 끝에 맺힌 프리즈마가 한없이 늘어나며 라만의 전신 곳곳을 위협했다. 다른 전사들 역시나 전력을 기울이는 듯 그 힘은 더욱 강력해져 갔다. 일이 이쯤 되자 라만도 더 이상 여유롭게 상대할 수 없었다. 그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라만의 거구가 허공에서 몇 번인가 위치를 바꾸는 듯하더니 급기야 온몸을 회전하며 사방을 향해 프리즈마를 분출시켜 갔다. 그 힘은 곧장 진격하지 않고 차츰 영역을 확대하고 있었다. 가린차는 자신이 쏘아낸 프리즈마가 라만의 주위에서 힘없이 흩어지는 걸 보며 초조해했다. 일종의 방호막으로 쳐진 것이었는데 기이하게도 맞대진 기운이 하나로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슈웅
또 한 번 뻗어간 프리즈마의 끝이 확 갈라지며 작은 줄기를 수없이 만들어내었지만 여전히 단단한 벽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일이 이쯤 되자 롬멜 전사들은 뒤로 급급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기운이었지만 휩쓸리면 치명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로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발락 역시나 연신 뒤로 몸을 빼내기 바빴다. 타이론의 환상력이 힘을 발하기 시작한 이후로 그는 빈번이 공격다운 공격을 해보지 못했다. 마치 공간 이동을 보여주듯 빠른 타이론의 몸놀림에 괴이한 환상력이 가미되니 발락으로서도 난감한 노릇이었다.
타이론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는 순간 발락은 또다시 긴장해야만 했다. 일정 공간을 환상지대로 변형시켜 버리는 환상력은 시술자의 능력에 따라 다양한 공격이 가능했다. 환상력을 펼치는 자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갇히지 않거나, 갇힌다 해도 그걸 깨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이 요구됐다.
그러나 발락은 그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지 못했기에 어떻게 고전하는 것이었다.
“이런 갇혀 버렸어.” 발락은 두 팔을 휘저으며 사방을 향해 힘을 격출한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일정 공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타이론이 만든 환상지대에 갇혀 버린 것이었다. 그 안에 타이론도 함께 있었다. 그러나 발락은 그걸 전혀 느끼지 못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새하얀 기운들은 형체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았으며 힘으로 쳐내 봐도 그때뿐이었다. 그런가 하면 공간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그의 두 발을 잡기도 했다.
그때 발락의 신형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사방으로 불똥을 퉁겨냈다.
치치치치칙
발락의 발을 잡았던 두 손이 순식간에 타버린다. 발락은 평정을 잃고 마구 힘을 뽑아냈다. 그의 두 손에서는 갖가지 색채의 광채가 출현하며 전신을 감싸더니 일시지간 강한 폭발을 일으켰다. 광장에서 지켜보던 자들은 탄성을 발했다.
파천은 화려한 폭발을 지켜보며 발락이 지금 어떤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롬멜의 전사들도, 발락도 수세에 몰려 있는 것이다. 그만큼 라만과 타이론은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들이었다.
아레나는 자신이 여유를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란 걸 깨닫는다.
‘할 수 없군. 저들을 도와야겠어.’
아레나의 주변을 꽁꽁 묶어 두고 있던 타이론들도 환상력을 펼쳐 갔다. 아레나는 자신을 향해 시전되는 기운을 감지하고는 드디어 파라슈를 손에 잡았다.
“나는 속전속결을 좋아한다. 막을 테면 막아 봐라.”
그녀의 파라슈에서 서서히 강력한 힘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은 다른 전사들이 뿜어내던 프리즈마와는 형태가 달랐다. 약 일장 정도까지 커지자 더 이상의 변형은 없었다. 아레나는 그걸 손에 쥐고 두명의 타이론을 지그시 바라본다.
슈슈슛
바로 그 순간 타이론의 환상력이 아레나 주변을 차단했다. 아레나는 타이론의 환상지대에 자신이 갇혔음을 알았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하앗.”
춤추는 여전히 아레나가 드디어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파천은 아레나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마치 화룡이 꿈틀대는 것 같다.”
그의 감탄처럼 아레나가 파라슈를 흔들 때마다 그녀의 주변은 화려한 불꽃들로 출렁거렸고 그건 이내 가속되며 수십 마리의 용이 동시에 출현한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타이론의 환상력은 그녀를 전혀 곤란하게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힘은 서서히 증폭되는가 했더니 주변을 감싸며 나선형으로 치솟아 올랐다. 견고한 막을 형성한 환상력에도 서서히 균열이 일더니 급기야 산산이 깨어지고 만다. 아레나는 타이론은 내버려 둔 채 곧장 발락에게 손을 뻗쳤다. 그러자 발락을 가두고 있던 타이론도 황급히 몸을 빼낸다.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곧장 라만에게로 향하여 멀리서 두 팔을 힘껏 내리그었다.
화르르르륵
단 한줄기였다. 긴 불꽃의 사슬이 라만을 향했다. 라만의 주위를 감싸며 다다른 불꽃은 위로 솟구쳐 오르며 그의 주변을 둘러쌌다. 거대한 불기둥 하나가 생겨난 셈이었다. 아레나는 가린차 등에게 빠르게 지시했다.
“거기서 빠져 나와!”
가린차 등은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았고 그녀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혼 좀 나봐라.”
아레나가 파라슈를 힘껏 미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라만의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불꽃들이 갑자기 안쪽으로 쏘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라만은 당황했다. 자신이 펼쳐놓은 강력한 힘을 밀고 서서히 침투해 들어오는 불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에는 다급함도 함께 묻어있었다.
아레나가 쏘아낸 기운을 자세히 보면 작고 가느다란 불꽃들의 연합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다. 라만이 쳐놓은 방호벽의 극히 미세한 틈을 파고드는 힘은 날카롭고 강력했다. 뜨거운 열기가 지척에까지 이르는 것 같자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라만은 새로운 시도를 한다.
그는 이를 앙 다물며 두 팔을 있는 힘껏 허공을 향해 뻗었다.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천지를 허물 듯이 크고 우렁찼다.
“암흑과 저주의 사슬이여, 모든 영혼을 관장하는 권능의 힘이여, 태초의 내밀한 어둠이여, 그대 힘을 내게 주시어 거짓과 위헌을 일삼는 저들을 멸하게 하소서. 지옥의 불꽃이여, 대지를 소멸하는 힘이여, 내게로 와 그대 권능에 항거하는 자들을 압살하소서.”
콰아아아아
돌연한 변화에 같은 편인 타이론도 의아한 표정이 된다. 라만이 무엇을 하려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레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힘을 밀어 넣었다.
“허튼 짓하고 있군. 관심을 끌어보려 했다면 실패한 거야.”
그녀의 비아냥거림에도 라만의 입은 쉬지 않고 열린다. 아레나는 파라슈를 한 번 끌어당겼다가 다시 내쳤다.
쇄애액
더 큰 힘이 실린 불꽃은 금방이라도 라만을 태워버리려는 듯 힘차게 전진했다.
타이론들은 서로 영언을 나누며 아레나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라만이 이대로 당하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의도를 발락 등이 그대로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그들은 아레나의 주변을 에워싸고 타이론이 다가서는 걸 방비했다.
이로써 아레나가 제일 먼저 처치하기로 지목한 건 타이론들이 아닌 라만인 것이 확연해졌다. 그녀의 선택은 라만이 쓰러지면 타이론을 상대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 판단에 기초하고 있었다.
라만의 마지막 외침은 타이론과 발락뿐만 아니라 광장 모둔 영자들의 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라곤의 왕, 메치스토 님께 고하오니 미천한 제게 꺼지지 않는 지옥의 화염을 부리게 하시어 저 오만한 자들을 태워 버리게 하소서.”
아레나 또한 기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소환술을 쓸 작정인가?”
그녀의 다급한 말처럼 라만은 지금 마계 대마신인 타락한 천하 메피스토를 간절히 외치고 있었다. 능력소환을 할 참인 것 같았다.
“안 돼!”
아레나는 다급한 나머지 파라슈에 가해진 프리즈마의 양을 갑절로 증폭시켰다. 그러자 불꽃은 점차 새파래지더니 급기야 투명하게까지 빛이 난다. 증폭된 힘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라만의 방호막을 순간적으로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쇄애애애액
저대로라면 라만은 분명히 숯덩이가 될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의외의 격돌음은 아레나의 다 잡은 승리가 확실하지 않음을 강변하는 것이었으니.
츄츄츄츄츄
끝장낼 듯 밀어붙이던 아레나의 기운이 점차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라만은 여전히 두 팔을 하늘로 뻗은 채였는데 그의 위에는 희미하게나마 누군가의 영상이 맺혀져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랍게도 그건 메피스토였다. 진땀을 빼고 파라슈를 움켜쥐고 있던 아레나는 탄식했다.
“저놈이 여길 불바다로 만들 심산인가!”
그랬다. 라만이 메피스토와 대등한 계약소환을 할 정도의 능력자가 아니니 힘의 일부를 빌려 오는 능력소환을 했던 것이다. 그건 그의 머리 위에 맺힌 영상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소환술에도 형태에 따라 분류가 가능하다. 시전자가 소환의 대상보다 월등한 능력을 지녔거나, 이전에 계약이 되어 있는 경우에는 계약자 자체를 소환시킬 수 있다. 그럴 경우 소환된 자의 능력이 대등하거나 뛰어나면 시전자는 힘을 잃게 되고 한동안 무력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는 공간 이동에 따른 제약 때문이었다.
지금 라만의 경우는 메피스토의 동의하에 그의 능력의 일부만을 소환한 능력소환에 해당되었기에 그런 징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라만의 전신이 화염에 휩싸인 것을 보니 아마도 화염생성의 능력만을 빌려온 듯했다. 어쨌든 그것만으로도 반전은 가능해 보였다. 아레나의 공격을 아주 훌륭하게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점차 우위를 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라만은 신이나 소리 질렀다.
“어디 다시 나를 핍박해 보거라. 당당하던 아레나가 어찌 그리 움츠러들었느냐. 모조리, 모조리 태워버리겠다.”
라만은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을 뒤덮은 화염이 그가 움직일 때마다 이리저리 퉁겨나가며 불길을 만들어낸다. 그건 한 번 붙기 시작하면 좀체 꺼지지 않는 지독한 것이었기에 광장은 한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지금은 어쨌든 동료나 마찬가지인 타이론들마저 이리저리 피하느라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라만은 광장으로 떨어져 내리며 두 팔을 마구 휘두른다. 그러자 화염덩어리들이 광장 곳곳으로 쏟아져 내리며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으악, 살려……. 줘.”
“으으아아.”
화염에 휩싸여 타들어 가는 전사가 속출하고 대열은 급속하게 흩어지며 난장판이 된다. 비교적 만만한 바이롬과 슈트레 일행들에게 손을 뻗친 라만을 그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파천은 그걸 보며 메피스토의 능력이 이 정도로 대단했나 하는 놀라움을 나타냈다. 메피스토 장본인도 아닌 능력의 일부만을 빌린 라만. 그를 당해내지 못해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자들을 보며 좀 한심한 생각도 들었다.
그 순간 라만이 선발대를 향해 다가오는 게 파천의 시야에 잡혔다. 그때 아난다의 시선이 라만쪽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빛을 발했다.
“드디어 놈들이 손을 쓸 모양이군요.”
파천은 그가 보는 곳을 함께 바라보았다. 혼란의 와중이라 분명하게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분위기는 예사롭지 않았다. 파천은 그들을 보고 있다 놀라운 걸 발견하게 된다. 화염이 그들에게로 떨어졌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고 움직였으며, 예상과는 달리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저놈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잖은가? 우리를 노리는 건가?’
바로 그때 아난다의 외침이 있었다.
“지금입니다.”
선발대 모두가 그 소리를 들었다. 너울은 그 외침이 이곳을 탈출하라는 신호임을 알아채고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길 빠져 나간다.”
아난다를 제외한 선발대 전원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신형을 허공중으로 띄어 올렸고, 곧장 광장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파천은 왠지 아쉬운 감이 있었지만 어절 도리 없이 행동을 같이해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도 파천은 고개를 돌려 새롭게 광장에 나타난 이들을 살폈다. 그들 중 하나가 선발대의 진로를 막으려는 심산인 듯 빠르게 날아오는 게 보였으나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껏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아난다가 나섰기 때문이다. 아난다는 두 팔을 휘저으며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말했다.
“날 거치지 않고서는 통과하지 못하오.”
라만과 수상쩍은 두 영자를 막아선 아난다. 이때 타이론과 발락 등은 다시 접전을 시작한 연후였고 아레나는 아난다의 곁으로 떨어져 내렸다. 슈트레와 바이롬 곁에 있던 루카가 더 이상은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며 설득한다.
“선발대의 뒤를 따르는 것이…… ”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슈트레는 황급히 정신을 수습하며 군말 없이 몸을 날려 광장을 빠져 나간다. 별 논의나 지시도 없이 홀로 떠나가는 슈트레의 뒷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바이롬과 루카 등도 당연히 뒤를 따랐다.
아난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술사들인 것 같구려.”
이때 앞길을 제지당한 것에 아직까지 분이 풀리지 않은 라만이 손을 휘저으며 아난다에게 달려든다.
“서두르지 마라, 라만.”
새로 나타난 자들 중 하나의 목소리. 자그맣게 속삭이듯 흘려낸 말에도 라만은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걸 보며 아레나는 생각했다.
‘저 술사들이 라만을 통제할 정도의 위치에 있다는 건데…… ’
그들은 무슨 비밀이 그리 많은지 탈을 뒤집어써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라만은 화가 가라앉지 않아 씩씩대면서도 군소리 않고 물러났다. 둘 중에 하나가 말했다.
“아난다 수련자, 선발대를 피신시킨다 해서 파천을 보호할 수는 없다. 그는 우리 차지다. 우리 앞길을 막아 보았자 위험을 피할 수는 없지.”
그들은 그렇게 태연하게 말하면서도 선발대가 매소를 벗어나는 것에 별 상관을 않는 듯 태연하기만 했다. 그걸 아레나는 자신감으로 이해했지만 아난다는 달랐다.
‘혹시 저들이?’
“다른 조력자들이…… 또 있나?”
“하하하하……. ”
탈바가지를 뒤집어 쓴 놈은 한참을 웃더니 냉랭하게 잘라 말했다.
“당연한 것 아니냐!”
일이 이쯤 되자 다급해진 건 오히려 아난다와 아레나였다. 둘 중 하나는 선발대를 뒤쫓아 가야 했다. 누군가 선발대 앞을 또다시 막는다면. 그리고 적이 감당하기 벅찬 강자들이라면 참으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난다는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속전속결로 마무리 짓기로 작정한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이미 술사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하나가 그 자리에서 퍽 꺼지듯 사라지더니 아레나의 뒤쪽으로 돌아갔고 또 하나는 아난다의 옆쪽으로 이동해 갔다.
라만은 노호성을 토하며 그 자리에서 두 손을 허공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라만을 노려보며 막 출수하려는 아레나를 아난다가 제지했다.
“물러서세요, 아레나 님.”
아난다는 앞쪽으로 몰려 들어오는 라만의 화염을 바라보더니 슬쩍 손을 흔들었다. 순간 뒤쪽에서 거센 돌풍이 몰아쳐 오히려 화염을 라만 쪽으로 날려 버렸다. 그 순간 두 술사가 방향을 점하고 서는 게 보였다.
아난다는 그들이 술법을 사용하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술법이 무서운 건 아니었지만 귀찮은 건 사실이었다. 지금은 그들과 시간을 두고 겨룰 마음의 여유가 없다. 아레나 역시 그건 마친가지였다. 아난다는 수련자이기에 술법에도 어느 정도는 능통했다.그는 술사들의 공격이 개시되려 하자 먼저 술법을 발동시키려 했다.
‘프리즈마를 동결시키자.’
그는 술법 중에서 최상급에 해당하는 고급 기술을 사용하려 하고 있었다. 일정 영역의 프리즈마를 술법으로 뺏어 오거나 동결시키는 것으로, 여기에 당하면 일시지간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만큼 치명적일 수 있는 술법이었기에 상당한 전력의 소모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연유인지 아난다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얼굴을 굳히고 서 있다.
“결계인가? 미련하게도 그걸 모르고 있었다니….. ”
아레나는 아난다의 말을 듣고 놀란다.
“무슨 일입니까?”
“저들이 결계를 쳐 술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놨군요. 가로막는 힘이 엄청난 걸로 보아 어디 영물의 힘을 빌리고 있는 듯합니다.”
결계를 치려면 철저한 준비를 해놓고 기다렸다는 말이 된다. 아난다는 더 이상 이곳에서 시간을 끌다가는 선발대에 큰 위험이 닥칠거라는 걸 직감하고는 프리즈마를 파동시켰다.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 봐주지 않는다.”
아난다가 작정한 듯 중얼거리자 술사들 중 하나가 비웃었다.
“이미 늦었다. 우리의 역할은 너희들을 이곳에 잡아두는 것. 아난다 수련자, 그대가 아무리 강자라 해도 시간을 지체할 수밖에는 없다.”
아난다는 멀찍이 떨어져서 태연하게 바라보는 자들을 대하자 왠지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는 아레나에게 빠른 속도로 말했다.
“먼저 가세요. 저들은 제가 맡을 테니…… ”
“네, 알겠습니다.”
사태의 다급함을 아레나도 알기에 망설이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가긴 어딜 간다고?”
“이제 시작이다.”
두 술사는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손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사방에 거대한 화염의 벽이 생겨나 아레나의 앞길을 막았다. 아레나는 파라슈를 잡은 손에 힘을 실으며 냉소를 흘렸다.
“이런 걸로 날 잡아 둘 수는 없다.”
그녀의 파라슈가 순간 뻗어 나간 기운은 불과 상극인 차가운 냉기류였다. 두 상반된 기운이 부딪치자 거대한 폭발음이 대기를 진동시켰다.
콰콰콰콰쾅
아난다가 손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에 화염의 고리가 수십개 생겨나며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고 그 뒤를 이어 빛의 폭풍이 휘몰아쳐 나갔다.
화염의 고리는 신기하게도 상대가 움직이는 곳을 정확하게 찾아들며 그들을 가두려 했다. 그건 포승줄이나 다름없었다. 한번 묶이게되면 고리가 조여지며 모든 걸 태워 버리는 무서운 공격이었다.
그런가 하면 뒤를 따르는 응축된 프리즈마 역시나 닿는 순간 모든 걸 파괴시켜 버리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난다가 이처럼 처음부터 무지막지한 공격을 서두른 건 파천의 안위가 염려되어서였다. 술사들은 아난다의 위력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별로 당황하는 모습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두 손을 앞쪽으로 뻗었을 따름이었다.
“소용이 없다니까……. ”
아레나의 뒤이어진 공격이 공간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자 그제야 두 영자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제 보니 공간 자체를 결계로 가둬 놨구나.”
아레나는 탄식했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아난다와 아레나는 지금 갇혀 있는 셈이었다. 안에 갇히며 그 벽을 깨지 않고서는 나갈 수 없는 반면에 밖에서는 안을 향해 얼마든지 공격이 가능했다. 이건 방호막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강력한 술법이었다.
일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 가자 아난다는 다급한 탄식을 흘렸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공간결계는 힘으로 조금씩 깨뜨려나가는 방법 외에는 갇힌 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했다. 아무래도 가장 확실한 방법은 외부에서 힘을 가하는 것이었으나 지금으로서는 기대할 수 없다. 어쨌든 두 영자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레나는 분노한 나머지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예전 페나인 전투 이후로 처음으로 전력을 기울이는 셈이었다. 그녀의 전신에서 전에 없던 환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와는 반대로 그녀의 얼굴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모두, 모두 죽이리라.”
그녀의 파라슈는 다시 허리에 얌전히 매어져 있었고 그녀의 두 손을 교차시켜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긴 머리칼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가 하면 옷이 찢어질 듯 펄럭거렸다. 아난다는 아네라가 전력을 기울이려 하자 그 자신도 힘을 모아갔다. 아레나와는 달리 아난다는 서서히 힘을 집결시켜 갔고 별다른 외형상의 변화도 없었다.
“아무리 애를 써봤자 소용없는 일이야. 공간결계를 힘으로 깨기 위해서는 시간과 진력의 소모가 큰 법이지. 흐흐흐…… ”
술사는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완수했기 때문인지 시종 여유있는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만에 하나 상대들의 능력이 생각 밖일 때를 대비해 술법으로 튼튼한 방비막을 겹겹이 쌓아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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