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20화 : 파천의 새로운 경지, 프라즈마
파천의 새로운 경지, 프라즈마
파천과 선발대는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매소를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는데 푸른 초지가 끝없이 펼쳐진 나지막한 구릉이었다.
파천을 가운데 두고 선발대원들은 긴장한 빛으로 사방을 바라본다. 그들은 완벽하게 포위되어 있었다.
“모두 계획적이었어.”
너울의 탄식 어린 말에 파천이 답했다.
“이 정도는 이미 예상된 일이 아니었나? 너울, 놈들이 누구인지 알겠어?”
“몰라.”
아직은 멀찍이 떨어져 자신들을 바라보고만 있는 자들의 정체를 너울은 파악해내지 못했다.
아난다와 아레나를 제외하고는 선발대 내에서 무한계 경험이 가장 많은 너울이었다. 그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이 또 한 번 선발대를 시름에 젖게 만들었다. 위기 감지는 선발대 모두가 동일하게 하고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야.’
적들의 수를 가늠해 보던 파천은 고개를 내젓는다. 족히 일백은 될듯했다. 흔하지 않은 복장에다 너울이 처음 대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무한계에 자주 출몰하는 세력은 아닌 듯했다.
“어떻게 할 거야?”
각시의 걱정스런 물음에 너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너울과는 달리 미타가 강려갛게 자기 의사를 주장하고 나서싿.
“어차피 뚫어야 사니, 치고 나가지?”
뚫어야 산다, 라는 단순한 미타의 견해는 사실이었다. 그걸 누가 모르겠는가, 문제는 파천에게 있었다. 다수에게 포위되었으니 산개해서 빠져나가는 게 정석이다. 그럴 경우 파천의 안위는 장담할 수 없다. 적들의 목표는 파천에게 집중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결론은 전열을 유지한 채 포위망을 뚫어야 하는데 영 자신이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건 당연했다. 파천은 그런 선발대의 초조함을 한번에 날려 버리며 너무도 담담하게 말한다.
“우리가 급할 건 없어. 아레나와 아난다가 합류해 오길 기다려야 하는 입장이라면 더더욱이나. 적들이 먼저 도발하지 않는데 우리가 초초해 할 건 없어.”
듣고 보니 그랬다. 선발대는 두 영자가 합류할 때까지 파천을 지켜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안심이 되는지 표정들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아난다와 아레나가 지금 어떤 지경에 빠져 있는지를 몰랐다.
파천은 의아해했다. 적들이 도통 움직일 기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뭘 기다리는 건가? 아니면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인가?”
파천은 다시 한 번 적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까마귀의 깃털 같은 외피를 전신에 가득 붙이고 있는 자들은 얼굴에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중심에 둔 적의 진로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건 당연했고, 혹시 모를 외부적인 공격에도 대비하는 것 같았다.
‘하나같이 같은 모습들이니 저들 중에 우두머리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군. 그렇다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파천의 이런 의문은 금세 해소된다. 그들 가운데 새로운 인물이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검은 색의 깃털이 아닌 백색의 깃털을 붙이고 있었고, 이목구비의 구분이 확연한 가면을 썼다는 것만 다른 자들과 달랐다. 그가 손을 들며 외친 내용은 분명 너울 등을 좌절케 하는 소리였다.
“진을 발동하라.”
너울이 모두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제길, 술법전이야.”
천상천의 아라한들에게 술법진은 생소한 것인데 반해 선계의 선인들에게는 너무도 낯익은 것이었다. 선계에도 이와 유사한 진이 존재하기는 하나 주로 선장들이 수련하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이들 중에 술법진에 대해 자신할 수 있는 영자는 단 하나도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술법진이 발동되자 주변은 급작스럽게 어둠이 찾아왔다. 제 손을 눈 앞에서 흔들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주변은 캄캄한 어둠이 장악했다. 그러자 선발대에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이때 찬다마나의 말이 터져 나왔다.
“미타, 어떻게 좀 해봐.”
미타가 뭘 할 수 있다는 말일까? 선발대는 찬다마나의 소리에 작은 희망을 가져 본다. 그때 미타의 작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빛을 수호하는 세레스의 원령께 비옵나니, 악의 권세를 깨트리고 어둠을 거두시어 환한 광명의 세계로 이끄소서.”
이어 미타의 모아 쥔 손에서 빛이 붐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점차로 커지며 사방을 향해 뿜어져 나갔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어둠의 한계는 선발대를 넘어섰을 뿐 그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파천은 오히려 불안했다.
‘이쪽이 훤하게 드러나 있고 적의 종적은 보이지 않으니 차라리 하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
그렇지만 선발대는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눈치들이었다. 전투 경험이 별로 없는 아라한들은 자신들이 지금 뭘 해아 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게 사실이었고, 이들 중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있는 건 너울 정도였다.
파천은 선발대의 그런 모습들을 보며 좀 한심한 생각도 들었다. 파천은 경각심을 돋우었다.
‘내 생명은 내가 지킨다.’
파천의 목표를 생각했다. 이대로 중단할 수 없는 여정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뺏어 가버린 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태웠으며, 결단코 포기할 수 없다고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각인시켰다. 처참했던 그때의 시간을 다시금 떠올리자니 당장이라도 앞으로 나서고 싶은 맘이 간절해졌다.
파천은 순간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는 선발대에 경고했다.
“방호막을 쳐, 어서.”
너울이 먼저 손을 뻗쳤고 뒤 이어 다른 대원들이 동참한다. 그러나 채 방호막이 완성되기도 전에 충격음이 전해져 왔다. 어찌들으면 장작을 패는 소리 같기도 했는데 연달아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파천을 가운데 두고 대원들이 더욱 조밀하게 붙어 섰다. 그건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밀려난 것이었다. 너울은 있는 대로 고함을 질렀다.
“힘을 더 뿜어내 봐. 있는 힘껏 밀어내란 말야.”
대원들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었고 그들의 표정에는 힘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방에서 조여드는 기운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걸 반증하고 있었다. 그때 선발대를 더욱 곤경으로 몰아가는 일이 발생한다.
드드드드드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에 이어 대지가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
누구나 할 것 없이 다급한 외침을 토한다. 대지가 균열을 일으키며 불쑥 솟아올랐다. 무서운 속도였다. 그럼에도 선발대는 속수무책이었다. 사방에서 조여드는 기운은 여전했기에 힘을 거두어들일 수도 없었고 전열을 흐트러뜨리자니 파천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하늘로 솟구쳐 오르던 대지가 순간적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모두 조심해!”
파천은 아마도 너울의 외침일 것이라 생각했다.
파천은 프리즈마를 운영해 전신을 보호했으며 허공 중으로 몸을 띄어 올렸다. 그런 다음 이어질 공격에 대비해 호신막을 쳤다. 그의 본능은 이럴 때 빛을 바라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오히려 선발대보다도 전투경험에 있어서 파천이 사실 더 탁월하다 할 수 있었다.
‘할 수 없다. 신편의 힘을 빌려보자. 우선은 위험 지역을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파천은 망설임 없이 신속한 결정을 내렸다. 오른팔 안에 들어가 있는 신편을 다루는 방법은 무연을 통해 배우고 익혔다. 현재로서는 그가 가장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파천의 시선이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어느새 선발대의 전열은 흩어져 있었고 허공 중 여기저기에 중심도 채 잡지 못한 채 떠 있었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출!”
파천의 오른팔에서 막대한 양의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주변을 감싸고서 흩어지지 않던 어둠의 일부마저 신편의 출현으로 산산이 찢겨져 나갔다. 채찍을 꺼내들었건만 마치 용이 현신한 것처럼 보였다. 신편은 파천의 주변을 감싸며 일정한 방호막을 형성했다. 그 순간 파천은 생각했다.
‘놈들의 목표는 나. 그렇다면…… ’
파천은 더욱 높이 솟구쳐 올랐다. 술법진이 깨어진 것도 아닐 텐데 전해 장애를 느낄 수가 없었다. 파천은 좀 이상한 감이 들었다. 그때 무연이 했던 말 중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신편은 억겁의 세월 동안 여러 영자들이 주입한 영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축적된 영력은 술법에는 상극의 효능이있지요. 그 효능은 대단한 것으로 파천 님이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할 수만 있다면 웬만한 고급 술법이 아니고서는 곤란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파천은 처음부터 신편을 사용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그는 외쳤다.
“나는 여기 있다. 내가 목표라면 날 쫓아와 봐라.”
파천은 아예 홀로 이곳을 탈출하려는 듯이 방향을 잡고 신형을 날렸다. 일이 이쯤 되자 술법진을 펼치고 있던 자들이 오히려 당황한다.
“놈을 쫓아라!”
우두머리의 명이 떨어지자 어둠은 한순간에 걷혀 버렸다. 그들은 다른 선발대는 내버려 둔 채 파천의 뒤를 쫓아 신형들을 날렸다. 그걸 본 너울이 대원들을 독려했다.
“어서 빨리 파천을 쫓아.”
그들 역시 그곳을 빠르게 빠져 나갔다. 급작스런 상황 반전에 긴장감이 가득하던 곳은 좀 전 지진의 흔적만을 간직한 채 정적을 되찾았다.
쉬이이이이
허허로운 바람만이 휩쓸고 지나간 곳에 일단의 인물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놀랍게도 라치오 일행이었다. 라치오는 웃으며 말했다.
“적이 출현한 것까지는 맞았는데 그 결과만은 의외군. 아무도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거야. 파천이 저런 보물을 지니고 있을 줄은. 이렇게 되면 꽤나 애들을 먹겠는데, 하하하하.”
한바탕 시원한 대소를 흘리는 라치오와는 달리 쿤사의 표정은 달갑지 않은 듯했다. 그건 좀 전에 쿤사가 손을 쓰려 하자 라치오가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가야 하지 않겠어?”
밴살렛의 물음에 라치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지만 서두를 건 없어. 나타나는 놈들의 수준을 보건대 아직 그리 큰 위험은 없어. 그나저나 좀 전의 그놈들은 누구지? 쿤사, 너는 알겠나?”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라치오는 천천히 걸음을 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생각보다 빨리 시작된 감이 있어. 그만큼 애가 닳아 있다는 거겠지….. 좋아, 아주 좋아. 참여하는 놈들이 많을수록 수확물도 풍성해질 테니 말야. 자, 가자. 아레나가 열 받았으니 금방 따라올 거다. 그 전에 우리는 다음 장소에 도착해 있어야 한다.”
라치오와 그 일행은 선발대가 뜰을 벗어날 때부터 비밀리에 따르고 있었다. 그들은 선발대가 겪은 곤경을 지금껏 방치했다. 결계에 빠진 아난다와 아레나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고, 좀 전 선발대를 충분히 보호할 수 있었음에도 나서지 않았다.
라치오는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나직한 독백을 흘려냈다.
“마지막 승리는 인내하는 자만 누릴 수 있다. 떡밥이 훌륭하니 대어들이 낚이겠어, 후후후.”
파천은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날고 있었다. 땅에서 20여 장이나 떠서 날아가는 그의 뒤로는 백여 명이 넘는 영자들이 숨가쁘게 추격을 하고 있다. 파천은 생각했다.
‘저들을 완전히 따돌릴 수는 없다. 이것 어쩌지? 이 상태로 어디까지 가야 하나?’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가지 안심이 되는 건 내공과는 달리 전력이 고갈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외부의 프리즈마를 사용하니 지치지도 힘들지도 않으니 누가 막아서지 않는다면 어디까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뒤에서 따르는 자들은 간격이 좀체 좁혀지지 않자 좀 놀라고 있었다. 그들이 사전에 지닌 정보로는 별 대단치 않은 생령이라 했는데, 이건 겪어 보니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프리즈마를 자유롭게 운용할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간격이 오히려 점차 벌어지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선발대원들은 허공이 아닌 땅 위를 스쳐 날고 있었다. 파천과의 간격은 오히려 그들이 더 가까웠다. 너울은 신형을 날리면서 생각했다.
‘언제 저처럼 발전한 거지? 하여간 상식 밖의 괴물이야.’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파천은 지금 아무런 생각없이 도주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프리즈마를 운용하면서 여러 가지 수련을 동시에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가 알고 익히고 있는 자연검의 운용과 프리즈마의 운용이 닮은꼴이라는 것에 착안해 그 나름의 방법을 부단히 연고하고 실험하고 있었다.
파천의 생각처럼 자연검의 경지에서 자연의 기를 사용하는 것이나 우주의 프리즈마를 체내의 프리즈마와 융합해 사용하는 점은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았다. 아니 거의 똑같다고 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다르다면 자연검은 자연의 기를 가져와 사용하는 점이 주가 되는 반면 영력은 이와는 정반대라는 점이었다.
둘 다 의지의 개입이 있지만 후자 쪽이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일체감을 이루는 정도의 차이에 따라 사용하는 양의 차이가 정해지고 발휘하는 위력이 결정된다는 점에서도 둘은 일맥상통했다.
‘그래 결국 집중력의 차이였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으려면 순수한 의지와 집중력을 기르면 되는 거야. 완전자들의 의지는 가장 순수하고, 그 어떤 잡념이나 욕심도 지니고 있지 않기에 절대의 능력을 발휘하게 해준다.
강자가 되기 위해서 하는 수련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엔 벽에 부딪히고 만다. 마음을 다스려야 가능하다는 무연의 충고가 이해가 되는구나. 완전하다는 의미는 결여되어 있지 않다는 것,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깨끗하게 비어있어야 가능하다.
세월이 흐르며, 반복되는 생을 거치며, 쌓여진 때를 모두 벗겨내고 처음의 순수 상태로 돌아가는 순간, 마음은 우주와 일체를 이루고 그 무엇이든 가능하게 해준다. 두려움, 의심, 불안, 즐거움, 슬픔, 괴로움, 노여움, 미움 등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빈 허공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할 때 내 안에서 완전한 자유가 실현되는 경지.
바로 그것이 우주검의 겅지이며 영자들이 그렇게도 되길 원하는 완전자에 이르는 길이다.’
파천은 핵심에 거의 다다르고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였다. 그 부분에 이르자 파천은 아무런 생각도 더 이상 진전시킬 수 없었다.
‘이건 하루아침에 도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부단한 노력과 자기 희생. 철저한 절제와 인내만이 가능케 해준다. 그래서…… 어렵다. 이 길에 드러서는 순간 그는 철저히 혼자가 될 수밖에 없다.’
파천은 포기한 자들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의 무한계는 완전자보다는 강자가 되기 위한 몸부림으로 들끓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은 완전자로의 여정을 포기했기에 다른 방법이 필요했고, 결국 강자가 되기 위해 정도가 아닌 편법을 동원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고안된 다양한 방법들로 인해 영력은 지금처럼 수도 없는 변종을 낳은 것인지도 몰랐다. 파천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여전히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어린 시절 하늘을 나는 새를 보며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하늘을 마음대로 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이 실현되었는데도 자신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
‘욕망은 끝이 없다. 채워지면 더 큰 공허함으로 다가오고 더 큰 것으로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채워진다 해도 행복해지지 않는 데도 말이다. 만약 영자들이 점다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면 영계는 이처럼 혼란하지 않았을 것이고, 마계가 인간계를 침범하지도 않았겠지. 행복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감사와 만족을 배우고 스스로 채워 갈 때 이루어진다. 그 순간…… 불행은 사라지고 그곳이 바로 낙원이 되는 것임을.’
파천은 모든 것이 안타깝게 여겨졌다. 자신의 생명을 헤치려고 따라오는 자들이나 그걸 피해 도주하는 자신도 안타까웠다.
더 큰 자가 되기 위해, 더 큰 권력을 쥐기 위해, 더 많은 권리를 누리기 위해 경쟁하고 서로를 해치는 무한계의 영자들도 생각하니 안타까웠고, 서로 생각이 다르고 이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차원계의 현 상황도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건 내가 지닌 생각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포기한다고 저들이 날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을 알기에,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난…… 포기할 수 없다.
그래, 그런 것이다. 마계가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나도 내 갈길을 갈 수밖에 없다. 변화는 어느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
파멸을 알면서도 달려갈 수밖에 없는 부딪침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멈추고 싶은 절박함이 잠시 주저하게 해도 끝내는 전진하게 만든다. 파천은 뒤를 흘낏 쳐다보았다.
십여 장 뒤로 바짝 붙어 따르는 자들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따라올 생각인 듯했다. 그러나 잠시 후 파천은 그 자리에 멈추게 된다. 도주를 관두고자 멈춘 건 아니었다. 십여 장에 이르는 거대한 구렁이, 그것도 온몸이 새하얀 백사, 그 머리 위에 의젓하게 타고 앉은 자가 파천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파천이 땅으로 내려서자 백사도 함께 내려왔다. 죽을힘을 다해 파천을 쫓아오던 자들도 멈췄고, 선발대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선발대와 파천 사이에 무리들이 서 있었기 때문에 파천은 적들 사이에 끼어있는 형국이 되었다.
파천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에게 대뜸 물었다.
“당신도 적인가?”
“적이라…… 네 전진을 막아섰으니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널 해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앞을 막은 이유는?”
“널 위해 충고를 할까 해서.”
“충고?”
“아주 간단해. 그만 돌아가라. 넌 불씨야. 난 너로 인해 온 세상이 불타 오르는 건 원치 않아.”
파천은 피식 실소했다.
“어디로 돌아가지? 돌아갈 곳이 없는데…… ”
“그건 네 사정이다.”
“난 돌아갈 데도 없을뿐더러 돌아갈 수도 없다. 그리고 보다시피 내 뒤로 막혀 있지 않은가?”
“뒤에 있는 것들은 내가 치워주지. 어떤가, 내 제안이?”
“왜 그렇게 날 돌려보내려 하지?”
“너로 인한 혼란이 염려되어서다. 지금만으로도 무한계 영자들은 충분히 힘겨워. 더 이상 간악한 놈들에게 놀아날 수는 없다. 네 전진을 원하는 놈들을 즐겁게 해줄 수는 없기 때문이야.”
“알아듣게 설명해 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네가 광명을 가져오는 걸 기대하는 놈들과 그걸 달갑게 여기지 않는 놈들 그리고 그 둘간에 치열한 접전이 일어나 주길 바라는 놈들, 그 와중에 제 욕심을 채우려는 놈들. 문제는 거기서 비롯돼.
너 하나로 인해 무한계는 전에 없던 혼란을 겪게 될 거다. 차라리 마계가 침략해 오는 게 나아. 좋든 싫든 힘을 합하는 자들이 생길테니 말야.
네 앞을 막아서는 자들이 모두 마계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지는 마라.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 많을 거야. 이제 알아듣겠나?”
“알아는 듣겠는데…… 설득력이 부족해. 어느 일면만을 부각해 원인을 확대시키는 것 같단 말이야. 나로 인해 혼란이 가중되는 게 사실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더러 가는 길을 포기하라면 안되지.
내 선택만을 놓고, 네 가는 길이 잘못이니 가지 말라면 동의하겠지만 그로 인해 장차 벌어질지도 모를 혼란까지 책임지라는 건 너무 앞서간다는 생각이군. 그들의 욕심까지 내가 감당해야 한다는 건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야. 그렇게 생각지 않나?”
“이러니 저러니 해봐야 소용이 없다. 난 네가 더 이상 앞을 향해 가는 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고, 그게 싫다면 날 뚫고 나가라. 그러면 되는 거야.”
파천은 상대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승부욕이 동하기 시작했다. 파천은 그의 자신감이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님을 직감했다.
‘저 자가 나타나자 내 뒤를 쫓던 자들이 가만 지켜보고만 있는 것만 봐도 속 빈 강정은 아닌 것 같군.’
그러고 보니 그랬다. 적들은 선발대원들의 발을 묶어 놓고만 있을 뿐 파천이나 새로 나타난 자를 공격할 의지는 없어 보였다.
“좋다, 이렇게 된 이상 내 힘으로 널 뚫어 주겠다. 출!”
파천은 신편을 다시 꺼내들었다. 팔뚝에서 확 퍼져 오르는 기운이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파천의 손에 쥐어진 신편은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요동을 쳤다. 그걸 본 상대가 놀람을 보였다.
“대단한 영물을 지니고 있었구나. 그것 때문에 그렇게 자신만만해 했던 건가? 좋다, 어디 한번 부딪쳐 보자.”
그는 파천의 손에서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꿈틀대는 신편을 대단한 보물이라고 말하고 있었으며, 은근히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발짝도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신뢰와 자부심이 대단하단 의미였다.
파천은 거대한 백사가 발락이 타고 다니던 흑호와 같은 놈일 거라 생각했다.
‘저놈까지 상대하려면 꽤나 애먹겠는데.’
그러나 그건 금방 수정되어야만 했다. 사내를 훌쩍 뛰어내려 파천의 앞쪽에 섰으며 백사를 뒤로 물러가게 했다. 그리고는 두 발을 벌려서도 두 팔을 앞쪽으로 쭉 뻗었다. 마치 말ㅇ르 타고 있는 듯한 자세였다. 사내의 기묘한 동작에 파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 뭐하는 거지?”
“예비 동작이다. 너는 신경쓰지 말고 어서 공격해라.”
“흐음, 그 전에 한 가지만 물어 보자. 너는 누구냐? 그리고 내 앞을 막아서는 것이 네 자발적인 의지냐?”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를 물어 보는군. 그 중에 하나만 대답하지. 내 이름은 권터! 무한계에 몇 남지 않은 진정한 자유인이다. 나는 부족을 지니고 있지도 않고 소속도 없다. 지금껏 내게는 적도 친구도 존경의 대상도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난 내가 옳다고 믿는 것만 행하며 산다.”
정작 권터는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를 말했다. 파천은 그가 지나칠 정도로 강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부럽군.”
“뭐가 말이냐?”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하고 산다는 게 누구에게는 주어지는 행운은 아니거든.”
“그런가? 나는 내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나친 욕심도 부리지 않는다. 그것이 비결이다.”
그는 물어 보지 않은 것까지 일일이 대답해 주고 있었다. 파천은 우스꽝스런 권터의 자세에도 불구하고 그를 비웃을 수 없었다. 그는 차라리 아름답게 여겨졌다. 자신의 소신을 이렇게나 당당하게 펼쳐 나갈 수 있다는 게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란 생각도 했다.
“자, 그럼 조심해라. 이 신편의 위력은 나도 잘 모른다.”
“으음, 그러지. 이왕이면 최선을 다해다오.”
파천은 권터의 눈빛이 너무도 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파천이 넌지시 다시금 물었다.
“그냥…… 비켜 주면 안 될까? 굳이 네가 아니어도 날 막아설 자들은 많을 것 같은데 말야.”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런 건 내게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너와 마주치지 않았다면 모를까, 너를 이대로 지나치게 한다는 건 내 스스로의 의지를 배반하는 짓이다. 난 비겁자가 되기는 싫다.”
“좋아. 자, 이번엔 진짜로 간다.”
“그래, 와라. 참고로 내 장기는 이 두 주먹이다. 나는 오직 이것 하나만 연마했다. 다른 건 복잡해서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런 걸 친절히 설명하는 권터는 어찌 보면 순수하기 짝이 없었다. 파천은 그가 내밀고 있는 주먹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생김새 만큼이나 투박한 두 주먹은 자신의 것보다 크긴 했지만 저걸로 뭘 어쩌겠다는 건지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신편을 사용하는 것이 괜히 미안해지려고까지 했다.
“안 되겠다. 네가 먼저 공격해라.”
그렇게 양보까지 하는 파천. 그러자 권터는 여전히 자세를 유지한 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난 절대로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이건 나와의 약속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파천은 난처해졌다.
‘어쩔 수 없지.’
파천은 손에 든 채찍을 슬쩍 흔들며 손목을 탁 쳤다.
콰르르르릉
우레 소리가 나며 공간이 쫙 찢어진다. 권터는 긴장하며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쿠우우우우
권터의 두 주먹을 감싸고 소용돌이가 생기더니 거대한 기운이 뭉쳐서 직격해왔다.
번쩍
순식간의 일이었다. 신편의 힘과 권터의 주먹이 만들어 낸 힘이 중간에서 마주쳐싿.
팡
거대한 기운이 터지는 소리가 나며 폭풍이 사방으로 몰아쳐 갔다.
멀리서 그걸 본 너울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지금 선발대는 적들 가운데서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는데, 권터라고 스스로 밝힌 자와 파천이 대치하고 선 이후로 너울은 그가 누구인지를 생각해내느라 애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신편과 마주 부딪쳐가는 권터의 모습과 그 위력을 보고서는 한 인물을 떠올리게 됐던 것이다.
‘저 자는 설마……’
너울은 그가 누구인지를 생각해낸 것이다.
둘의 첫 격돌은 의외로 막상막하였다. 누가 더 우위를 점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비등한 위력을 보인 것이다. 이렇게 되자 파천은 경각심을 돋웠다. 어쨌든 승부는 이기고 봐야 했다. 그에게 힘을 더해 줄 동료는 없다. 있어도 제 역할을 못해 주고 있다.
너울을 비롯한 선발대가 지금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파천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패한다면 권터의 요구대로 따라야 할지도 몰랐다. 여정의 첫 단계에서 채 가보지도 못하고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상황만은 막고 싶었다.
“하아.”
파천은 채찍을 좌우로 흔들며 힘을 증폭시켜 갔다. 연신 폭음과도 같은 우레 소리가 이어지고, 붉은 불기둥을 연상케 하는 채찍의 움직임은 종잡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권터와의 공간을 꽉 채운 기운은 섬칫하기까지 했다. 파천은 스스로 펼치면서도 이걸 권터가 과연 막아낼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조심해라, 권터.”
“오너라.”
권터는 여전히 그 자세를 고집하고서는 두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의 주먹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일었다. 주먹 주위로 프리즈마의 고리가 점차 그 수를 늘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새파란 형태를 너무도 뚜렷이 나타내고 있었는데 점차로 폭이 넓어졌다. 잠시 뒤 파천이 쏟아낸 기운과 권터의 주먹이 만들어 낸 기운이 정 중앙ㅇ에서 다시 부딪쳤다.
꽈드드등 쩌적 쾅
땅이 얼마간 갈라지고 폭풍이 몰아쳐 흙덩이들이 공간을 뒤덮었다. 파천과 권터는 허공으로 높이 치솟아 오르며 연신 격돌을 하고 있었다. 권터를 자세히 보면 그는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기계적으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파천의 동작은 점차 화려해지고, 이에 따라 신편의 위력도 수위를 더해 갔다. 권터는 지금 솔직히 좀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충돌의 횟수가 늘어날 수록 상대의 힘이 배가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변화는 단순히 힘만으로 찍어누를 수 있을 정도로 조잡하지 않았다.
그는 점차 힘이 달린다는 걸 느끼고 심중으로 다급해했다.
“파천, 이걸 받아낸다면 널 인정해 주마.”
드디어 권터는 비장의 수를 쓸 셈인 것 같았다. 그러자 파천은 일시 공격을 중단하고 여전히 허공에 뜬 채 권터를 주시했다. 여전히 신편은 빛을 뿜어내며 요동치고 있는 중이었다. 권터의 자세가 그 순간 싹 바뀐다. 두 팔을 허공 중으로 뻗고 고함을 질러댔다.
“우아아아아.”
아마도 전력을 끌어올리느라 내는 괴성인 듯했다. 파천은 긴장하며 예의 주시했다. 권터의 전신에서 파바밧, 하는 소음과 함께 내부에서 터진 듯한 빛이 확 퍼져 나오더니 하늘 끝까지 꿰뚫어 버릴 듯 치솟아 올랐다.
“대단…… 하다.”
파천은 진실로 감탄해마지 않았다. 아직 채 힘을 발출하지 않았는데도 전신이 압박을 느낄 정도로 권터가 뿜어내는 기운은 힘차고 강했던 것이다. 파천은 이번의 격돌에서 승부가 결해지리라고 직감했다. 그 또한 신편의 기운을 북돋웠다. 멀리서 이걸 지켜보는 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입을 벌리고 있다. 미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러고도 우리가 파천을 보호한다고 할 수 있어? 선발대 구성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어.”
그녀의 말을 각시가 이었다.
“그렇네요. 우리 중 저 힘들을 맞받을 수 있는 자가 있을까요?”
너울 또한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두 주먹만으로 콜리나의 사냥꾼들을 작살낸 권터와…… 저 정도로 접전을 펼칠 수 있다니…… ”
콜리나는 북부지대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계곡의 이름이었다. 그곳에는 백여 명에 달하는 사냥꾼들이 집단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너울은 그것이 권터의 솜씨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파천의 신편을 이길 것인가, 아니면 권터의 두 주먹이 이길 것인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느낌만으로는 어느 한쪽이 더 우세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우열을 가리기가 힘이 들었다.
지켜보는 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둘의 격돌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정점에 이르자 권터는 처음의 기마자세로 돌변하며 힘을 파천에게로 몰아붙였다. 파천도 이에 질세라 팔을 힘차게 휘둘렀다.
선발대도, 그들을 가두고 있는 정체 모를 자들도 두 눈을 부릅뜬다.
슈슈슈슈슈
피시싯
이게 무슨 소리인가. 좀 전과는 분명 다른 소리가 들리는 듯 마는 듯 조그맣게 흐른다. 파천의 황당한 표정과 권터의 멀뚱거리는 표정이 둘 사이에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바로 그때다.
“이놈, 또 사고를 치는구나.”
저 하늘 너머 어딘 가에서 난 소리 같았는데…… 금세 파천의 앞에 서 있는 자가 있었다. 그는 파천과 권터를 번갈아 보며 씩 웃었다.
“이것 미안해서 어쩌나?”
아직까지도 파천은 어찌된 일인지를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눈앞에 서 있는 저 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권터도 맥놓고 괴이한 영자를 힐끔 쳐다보다 고함을 빽 질렀다.
“당신은 혹시…… 도나투스?”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사내.
“허허허, 이것 미안해서 어쩌나?”
연신 그 말만 되풀이한다. 파천은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오리무중에 빠져 있었다. 권터는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신까지 이 자에게 관심이 있소?”
“뭐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이놈을 따라오다 보니 그만…… 허허허허.”
파천은 새로 나타난 영자를 권터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좀 당황하여 뭐라고 막 입을 열어 가려던 참이다. 그런데 그 자가 먼저 입을 연다.
“네 놈이 파천이냐? 보기엔 그럴 듯하게 생겼지만 아직 애송이군. 그래 어쩌다 홀로 이런 지경이 빠졌나, 그래?”
정제함 없이 나오는 대로 마구 뱉어냈다.
파천은 그 자의 하고 있는 모양에 하마터면 소리 내어 웃을 뻔했다. 어깨에 맨 커다란 보자기도 그랬고 부스스한 머리에 새집이라도 얹은 듯한 모습도, 얼굴 가득 주근깨가 가득한 모습도, 결정적으로 낡고 색 바랜 허름한 옷이 딱……
‘개방의 거지를 보는 것 같군.’
파천의 적절한 평가였다.
이때 자신에겐 관심조차 두지 않는 도나투스에게 권터가 재차 물었다.
“여기엔 왜 나타난 거요?”
“야, 이놈 따라 왔다고 했잖느냐, 이놈아. 귀가 먹었느냐? 그깟 프리즈마 좀 빼앗겼다고 그렇게 뚱해서 쳐다보느냐. 까짓 돌려주면 될 것 아냐.”
뭘 돌려준다는 말일까? 파천은 도나투스의 말을 이해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권터는 어깨가 으쓱하며 난처해했다.
“누가 그것 때문에 그럽니까.”
금방 기세가 죽어 기어들어 가는 소리를 한다.
파천은 둘 사이의 대화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럼 뭣 때문에 그러는데?”
“여기엔 왜 왔냐고……”
“그놈 참 말귀 못 알아듣네. 이놈 따라 왔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되겠느냐?”
“흐음.”
권터는 더 이상 말해봤자 본전도 못 건질 것 같자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파천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람. 저 거지 같은 자는 누구지?’
“뭐, 거지 같다고? 이 새파란 애송이가 지금 나보고 거지 같다고 한거야? 허 참, 오래 살다보니 별일을 다 겪네, 그래. 야, 떨어지지 못해! 뭐 건져먹을 것이 있다고 아직도 붙어 있어.”
파천은 기겁을 했다. 자신의 생각을 읽었다는 것에 먼저 놀랐고, 두 번째는 거지 같은 도나투스가 가리킨 고을 쳐다보다 또 한 번 놀랐다. 파천의 손에 여전히 들려 있는 채찍 끝에 하얀 덩어리가 하나 붙어있었는데 그것이 글쎄 자신을 보며 씩 웃었던 것이다.
“헉! 이, 이게 뭐야?”
“어서 덜어지지 못해!”
도나투스가 그 희멀건 덩어리를 나무라자 그놈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완강한 표정이 된다.
“하여간 똥고집에다가 욕심 부리는 건 못 말리는 놈이야. 그렇게 처먹고도 아직 미련이 남은 거냐?”
‘누가 내게 이 사태에 대해 설명해 줘.’
파천은 머리가 돌 지경이었다. 파천이 괴로워하는 걸 안 도나투스가 점잖게 파천에게 권고했다.
“어서 그 채찍을 거두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놈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테니까.”
파천은 일단 그 말에 따르고자 채찍을 거두어들이려다 그놈과 다시 눈이 마주친다.
놈은 두 눈을 부릅뜨고 파천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디 그렇게만 해봐라, 하는 표정이었다.
놈은 기이하게 생겨먹었다.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었다. 구름의 한 조각을 떼어놓은 것처럼 두리뭉실하게 생겼는데 입 달리고, 눈 달리고, 두 손도 있고, 두 발도 있었다. 형태는 갓 낳은 새끼 곰 같았다. 하는 짓을 보니 말귀를 다 알아듣는 것 같긴 했다.
‘저게 무슨 동물이람? 새끼 곰인가?’
“그건 생명체가 아니다.”
또 도나투스가 파천의 생각을 훔쳐보고는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파천은 그것도 영 못마땅했다.
“왜 자꾸 남의 생각은 훔쳐보는 거요?”
“미안하다. 내 오랜 습관이라서 그렇다. 저놈은 네가 지니고 있는 채찍처럼 영물이다. 짐승이 아니라 물질에 가깝지. 오랜 세월 영성을 먹다 보니 이렇게 괴물이 되었지만.”
‘영성을 먹다니?’
둘간의 묘한 대화가 계속 이어져 갔다. 파천은 굳이 입을 열어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놈은 너도 보는 것과 같이 너나 나처럼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하며 제 스스로 의지도 지닌 생명체처럼 보인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놈은 기운 덩어리에 불과해.”
그러자 그 기운덩어리가 도나투스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도나투스는 얼른 시선을 외면하며 할 말을 마저 했다.
“처음엔 네가 지닌 채찍처럼 그저 흔한 영물에 불과했겠지. 아, 취소하지. 좀 특별한 영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놈에게 세월이 흐르며 기이한 능력이 생겨나기 시작한 거야. 다른 영물을 먹어치우기 시작했어. 힘없고 약한 영물의 기운을 모조리 흡수한 이놈은 점차로 영악해져 갔고 힘은 강해져 갔지.”
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곰 새끼처럼 생긴 이놈의 이름은 아그립바였다.
영물의 탄생이 그렇듯 예전 수련자 중 하나인 아그립바가 평범한 장식용 단검에 영력을 불어넣기 시작하면서 이놈은 세상에 등장했다.
수련자 아그립바는 늘 단검을 품에 지니고 다니며 틈만 나면 영력을 축적시켜 갔다. 그가 정성을 다해 특별한 영물을 만든 건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는 기억소멸의 시기가 거의 다가와 있다는 걸 알고는 영물에 자신의 모든 능력을 불어넣었다. 나중에 잃어버린 옛 기억을 그 영물을 통해서 되찾고자 한 것이다.
처음의 의도는 이랬으나 그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그는 어쩌다 우연히 새로운 영물을 손에 넣게 되었는데 그건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래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영성이 지나쳐 말을 알아듣고, 할뿐더러 제 의지마저 지니고 있는 희한한 놈이었다. 게다가 온갖 술법마저 부릴 줄 아니, 아그립바는 천고의 보물을 지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그립바는 자신이 만든 영물과 그놈을 하나로 합쳐 보아야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기억소멸의 시기가 거의 다가온 날, 그는 그간에 지니고 있던 계획을 실행하게 된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고 나서 그는 결국 두 영물을 하나로 합하는 데 성공한다.
그런데 어찌 알았으리요. 그놈은 아그립바가 기억소멸을 당해 영체를 벗어 버리자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이놈은 스스로의 이름을 아그립바라고 칭하며 영계를 떠돌았다.
이놈에 대한 소문이 무한계에 떠돌게 되자 너도나도 아그립바의 주인이 되고자 놈의 뒤를 뒤쫓았다. 그러나 그건 매번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놈은 보통의 영물과는 격이 다른 놈이었다. 워낙에 영악한 놈이었던지라 번번이 영자들을 되려 골려주기 일쑤였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아그립바의 가치는 제왕의 유물과도 동격을 이룰 정도로 대단한 것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놈이 머물고 있던 단검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파손되고야 만다. 아그립바는 이때부터 제가 머물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나서게 된다. 그런 도중에 이놈이 벌인 말썽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일정한 거처도 없는 영물은 영자들이 지닐 수도 없는 것이었기에 이놈에 대해 욕심을 부리는 영자는 더 이상 없었다.
아그립바는 이후 여러 물건들에 머물러 보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때부터 이놈은 영물이라 소문난 것들만 찾아다녔다. 기운을 따라 떠돌기 때문에 아무리 꼭꼭 숨겨 놔도 아그립바는 쉽게 찾아냈다. 그리고는 영물의 기운만 뺏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놈의 소동에 영물을 지니고 있던 자들은 전전긍긍했다. 어떻게 싸울 수 있는 놈이라면 어지 해보기라도 하겠건만 이놈은 그럴 의향도, 그럴 수도 없는 아주 골치 아픈 존재였다. 기껏 할 수 있는 게 영물에 결계를 친다든가 해서 기운을 차단하는 정도였다. 영물의 기운을 차단하고 결계를 쳐 사용하지 못하니 가지고 있다 한들 소용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 파천의 신편에 붙어 있는 놈이 바로 그 소동의 주인공인 아그립바였다. 도나투스의 설명을 모두 듣고 난 파천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이놈이 신편의 기운도 뺏어 가면 어쩌지?’
“그런 염려는 마라. 보다시피 저넘도 매달려만 있을 뿐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잖아. 그건 네가 지닌 채찍이 저놈이 침범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단 의미다. 이놈이 갑자기 미친 듯 날아오기에 사냥물을 발견했구나 싶었는데 의외로 아그립바의 사냥물은 아니었던거야.”
도나투스의 말에 아그립바가 인상을 썼다.
“어쭈, 자존심이 상한다 이 말이냐?”
“그래, 자존심 상해.”
파천은 온몸이 소름이 돋는걸 느꼈다. 놈이 말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너무도 또렷한 목소리로. 그건 서너 살 정도 됨직한 아이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고?”
도나투스가 슬쩍 떠보자 아그립바가 채찍을 잡고 툭툭 당겨 본다.
“반드시 이놈을 사냥하고 말거야.”
파천은 더 이상 내버려 두면 괜히 억울한 일 당할 것 같아서 재빨리 채찍을 판 안으로 불러들였다. 매달리고 있던 채찍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자 그놈은 방방뛰기 시작했다.
“너 그러기 있어?”
파천은 더 이상 상대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그러자 아그립바가 채찍이 사라져 간 파천의 팔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뭐 하는 짓이냐. 이놈아. 어서 떨어지지 못해?”
“싫어.”
도나투스가 아무리 윽박질러 보았자 소용이 없었다. 도나투스는 머리를 짚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큰일났구만. 이를 어쩌나 그래? 저놈의 고집은 지금껏 단 한번도 꺾지를 못했는데.”
‘그게 정말이라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닌데.’
파천은 팔에 매달려 있는 곰 새끼 아그립바를 노려보았다. 놈은 배시시 웃으며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귀여운 데도 있었다. 파천의 이런 생각을 알아 챈 도나투스가 경고를 잊지 않았다.
“그놈한테 한 번 휘말리면 생이 고달파져. 수작에 넘어가다간 내 꼴이 난다네.”
파천이 무슨 소리냐고 묻자 한사코 대답하기를 꺼려 했다. 이때 아그립바의 작은 손이 파천의 손가락을 더듬었다.
“햐, 멋진데.”
놈은 입을 한껏 버리고 정말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아그립바가 쓰다듬고 있는 건 파천의 손가락에 끼어진 천마환이었다.
“문양이 너무 멋있어.”
그러더니 말릴 새도 없이 천마환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모두는 할 말을 잃었다. 파천은 손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반지의 표면을 박박 문질러 보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입을 가까이 대고 고함을 질렀더니 놈도지지 않고 맞고함을 질렀다.
“시끄러워!”
“그놈이 반지를 제 집으로 삼았으니 너도 엄청 시달리겠다, 허허허허.”
뭐가 그리 유쾌할까. 파천은 청하지 않은 두 존재의 등장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갑작스런 상황 반전으로 관심에서 잠시 밀려나 있던 자들은 멀직이 떨어져 돌아가는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도나투스가 그들을 슬쩍 펴다보고는 턱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저것들은 뭐냐?”
권터가 대신 답했다.
“파천을 죽이려는 자들이지요.”
“쟤네들이? 허 참 어이가 없네. 보아하니 별 대단한 능력자들도 없어 보이는데 무슨 배짱으로 이번 일에 끼어들었는지 모르겠군. 아냐, 저것들 뒤에 분명 다른 누군가가 있을 거야. 확인해 봐야겠어.”
도나투스의 관심이 무리들에게로 향하자 그들은 뜨끔한 표정이었다. 그들 중 수장으로 보였던 자가 주춤거리며 물러선다. 그걸 본 도나투스가 손가락을 까닥했다.
“너, 이리와 봐라.”
“싫소.”
“싫어?”
“그렇소.”
“그럼 그만 가봐, 좋은 말 할 때. 낯짝을 드러내지도 못하는 용기없는 것들이 어디서 얼쩡거리는 거냐!”
놈들은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너희들 이제 보니 몰이꾼 역할을 했었던 거군. 오다 보니 그럴 듯한 놈들이 몇 보이던데. 그들이 너희들을 부리는 놈들이겠고.”
도나투스는 아그립바를 따라 오다 심상치 않은 일단의 무리를 보았었다. 그들에 대한 호기심이 동하였지만 일단은 아그립바를 따르는 게 급했기에 지나쳐 온 것이었다.
“너희들 정말 안 꺼질래?”
도나투스가 슬슬 짜증난다는 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바로 도나투스다, 이놈들아. 내 화를 돋구면 어찌 된다는 것 쯤 알 텐데도 뭐 처먹을 것 있다고 죽치고 있을 작정이냐!”
그러자 천마환에서 작은 비웃음이 들려 왔다.
“도나투스란 이름도 한물 갔어. 그걸 저만 모르고 있으니, 바보.”
“뭐야?”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도나투스는 정말로 화가 났다. 매일 티격태격하며 다투는 처지였지만 매번 먼저 화를 내는 쪽은 언제나 도나투스였다. 아그립바는 그런 그를 약올리는 게 재밌는지 또다시 소리를 흘려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쟤네들도 아는 걸 도나투스만 모른다네. 가엾은 도나투스. 원탁에서 쫓겨나고 수련자의 옷도 벗어 버렸는데, 이제 떨거지들한테도 무시당하니 이 일을 어쩌지? 가엾은 도나투스. 잊혀진 이름에 한숨이 가실 날이 없구나. 가엾은 도나투스.”
“이…… 너 조용히 안 할래?”
“그럼 쟤네들을 쫓아 봐.”
파천은 둘의 하는 양을 보며 어이없어 하면서도 한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아그립바는 분명 도나투스가 원탁에서 쫓겨난 수련자라고 했다.
이때 권터가 무리들을 향해 소리쳤다.
“충고하는데 그만 여길 떠나라. 괜한 봉변 당하지 말고.”
권터는 도나투스의 불같은 성격을 들어 알고 있었다. 권터는 자신과 상관없는 자들까지 배려하는 마음 좋은 사태였다.
“원탁에서 쫓겨난 도나투스, 불쌍한 도나투스. 이 일을 어째? 이제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으니.”
아그립바는 쉬지 않고 종알거렸다.
“파천, 그 반지 이리 줘봐라.”
파천은 도나투스의 요구에 난색을 표했다.
“그럴 수 없소.”
“왜지?”
“이건 내 친구의 것. 함부로 빼줄 수는 없소.”
“괜찮아. 그 친구가 누군데? 내가 다른 걸 줘서 잘 달랠 테니 이리 줘봐.”
“나중에 직접 허락을 받으시오. 그 전에는 안 되오.”
도나투스는 아그립바가 계속 약을 올리자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에이, 왜 이리 되는 일이 없냐? 내가 나중에 책임진다니까. 그 친구가 대체 누구야. 내가 모든 걸 책임지마.”
“이 반지의 원래 주인은 천마요. 여기서는 라미레서라고 불리는 걸로 알고 있소.”
예전에는 대마신 바알세불로 불렸고 무한계에서는 메덴의 무법자 라미레스로 불렸던 천마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순간 도나투스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거무죽죽해졌다.
“라미레스의 반지라고?”
“으음.” 도나투스가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자 아그립바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또다시 재잘대기 시작했다.
“도나투스가 아무리 화가 나도 라미레서의 반지를 탐낼 수는 없지. 그의 친구에게서 반지를 뺏을 수는 없지. 둘의 차이점은 하나, 도나투스는 원탁에서 쫓겨났고, 라미레스는 원탁도 두려워한다네. 킥킥.”
이쯤 되고 보면 도나투스의 인내도 한계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파천에게 화를 풀 수도 없었기에 엉뚱하게도 선발대를 포위하고 있던 무리들에게로 퍼부어졌다.
“이놈들 내 말을 무시하고도 무사할 성싶었냐!”
두나투스의 신형이 공중으로 확 떠오르며 그의 두 손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어리들이 마구 쏟아져 나갔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허공 중 이곳저곳에 빛 덩어리들이 형성되더니 아래쪽을 향해 쭉 뻗어 나갔는데 그 위력이 실로 대단했다.
진을 형성하고 있던 자들은 그 탄탄한 진세에도 불구하고 마구 퉁겨져 나갔다. 그러던 그가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를 향해 한 손을 활짝 펴고 장난하듯 까닥거렸다. 그는 별 저항도 못해보고 순식간에 딸려들었고 도나투스의 손에 붙잡혀 바둥거리는 신세가 되고 만다.
도나투스가 마지막 경고를 했다.
“모두 쳐죽이기 전에 어서들 꺼져라. 알아들었냐!”
가면을 멋들어지게 쓰고 있던 자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도나투스는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는지 그 자를 홱 던져버렸다. 얼마나 세게 던졌는지 그는 한참을 하염없이 날아간다. 간신히 착지하긴 했지만 아직 얼떨떨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수하들에게 명했다.
“여길 벗어난다.”
그 말이 있기도 전에 벌써 움직이는 자들도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
도나투스는 손을 툭툭 털며 파천의 곁에 내려서더니 손을 향해,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그립바를 향해 보란 듯이 거들먹거렸다.
“자, 보았느냐? 아직 나는 죽지 않았다. 나, 도나투스가 원탁에 의해 제명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내 발로 내뜻으로 메덴을 떠났었다. 몇 번을 말해야 너는 날 믿겠느냐?”
“그런다고 진실이 숨겨지나? 도나투스는 이제 뻔뻔한 거짓말쟁이가 되었구나.”
“뭐야?”
“그만들 하는 것이….. ”
권터가 그렇게 말하다 본전도 찾지 못한다. 도나투스와 아그립바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닥치지 못해!”
“조용히 해!”
파천은 정말이지 이곳에서 빨리 벗어나고픈 생각밖에 없었다. 엄청난 속도로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걸 더 이상은 듣고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지껄였고 파천과 권터는 듣고만 있어야 했다.
무리가 떠남으로 자유로워진 선발대원들이 파천의 곁으로 슬며시 다가왔다. 그들의 얼굴엔 상심의 그림자가 가득했다. 그들은 한 가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진작 영력 수련에 매진할 걸.’
영격과 영력은 관련이 있기도 하고 관련이 없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선계의 선인이나 천상계의 아라한들이라면 수준 이하의 영격을 지닌 자들은 없다. 그렇지만 영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자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영격이 높다면 자연 영력도 높아지는 거지만 어느 정도의 한계라는 건 분명히 있다. 달리 수련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영력만 전문으로 키운 자들을 상대로 쉽게 이기기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들의 잠재된 영력은 상당할지 모르지만 실제 전투력으로 환원해 사용할 수 있는 건 그다지 많지 않았다. 게다가 경험이 적어 노련한 무한계의 전사들을 상대하기엔 상당한 무리가 따랐던 것이다. 처음 선발대에 합류할 때만 해도 자신만만해 하던 선인이나 아라한들은 풀이 죽어 보기에 딱할 정도였다.
그걸 알아챈 도나투스가 위로한답시고 말했다.
“매일 싸움만으로 단련된 놈들을 상대하기가 쉽나? 그렇지만 금방 적응이 될거야. 지닌 바 능력들이 있으니 싸움판에서 구르다 보면 좋아지겠지. 어떤가? 나를 스승으로 삼아보는 것이?
툭 튀어나온 배를 손바닥으로 탕탕 치며 하는 말이었다.
“저걸 위로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놀리는 건지 모르겠다니까.”
또 역시나 아그립바가 참견하고 나섰다. 이번엔 도나투스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상대해 봤자 심력만 낭비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듣자하니 아난다 수련자가 선발대를 이끌고 있다더니, 그 친구는 어디 간게야?”
너울에게 한 질문이었다.
너울은 도나투스에게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난다 님은 자하린에 남으셨습니다.”
“자하린에 왜?”
너울은 자초지종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다 듣고 난 도나투스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라만에다 타이론이라. 게다가 정체 모를 술사들까지라면…… 아난다도 꽤나 고생하겠군. 어려움이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너무 빠른 시도인데.”
“별 일 없겠지요?”
너울의 걱정에 도나투스는 염려 마라고 했다.
“그 정도로 무너질 친구는 아니지. 그리고 아레나 역시나 메사가 심혈을 기울여 키워냈으니 오죽하겠어? 염려들 마. 곧 뒤따라들 올테니. 문제는 아난다가 놈들을 뒤에 달고 오느냐, 처치하고 오느냐 하는 건데…… 그건 나로서도 장담할 수 없어. 워낙에 누굴 해치는 걸 피하는 성품인지라.”
미타가 너울이 아닌 파천에게 물었다.
“이제 어떡하지? 여기서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우리끼리라도 움직여야 하나?”
모두는 결정권을 파천에게 일임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파천은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여기서 기다릴 이유는 없어. 천천히 전진해 가자. 곧 뒤ㄸ라오겠지. 그것보다는 도나투스.”
“왜?”
“오다가 수상한 자들을 목격했다고 했소?”
“그래.”
“그들은 어디쯤에 있었소?” “다음 매소인 루하스의 첫머리였다. 이런 변방 지역에서 잘 보기 힘든 강자들이니 아마 너희 일행을 노리는 놈들일 거다.”
너울은 도나투스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루하스의 첫머리라면 펠라모가 있는데? 혹시 펠라모 앙샹뜨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앙샹뜨? 그곳이 펠라모였던가? 흐음,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것도 같군. 맞아, 그랬지? 분명 그 근방이었어.”
파천은 속으로 어이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놈아, 잠시 착각할 수도 있지. 그런데 아무리 앙샹뜨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로 강한 기운을 뻗치는 자들이 하나도 아닌 여럿이 있다는 게 영…… ”
“앙샹뜨라면 염려가 없군요. 그들을 의심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런가? 하긴…… ”
“그럼 그곳에서 잠시 머물며 둘을 기다리지.”
파천의 제안에 모두는 동의했다.
파천은 다시 권터를 향해 물었다.
“아직도 내 앞을 막을 생각인가?”
“승부를 내지 못했으니 일단 보류하지. 그렇다고 해서 널 인정하는 건 아니다.”
“자존심은 살아가지고…… 권터!”
“왜 그러시오?”
도나투스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사실 아그립바가 나서지 않았다면 땅 위를 구르고 있을 놈이 너라는 것 혹시 알고 있나 해서?”
“뭐요? 그건 모르는 거요. 내가 될지 아니면…… 파천이 될지는.”
“제발 꿈에서 깨라. 아그립바가 먹어치우지 못한 채찍이다. 전력을 기울였다면 아마도 네 놈은 갈가리 찢어졌을 거다.”
“믿을 수 없소.”
‘“아그립바, 네가 말해 봐라. 어떻게 됐을 것 같나?”
“당연히 파천이 이기지. 그런데 좀 전에는 무승부야. 파천이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거든.”
아그립바는 정확하게 진단을 내리고 있었다. 파천이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아그립바의 지적에 권터는 파천을 쳐다보았다.
“빌어먹을….. ”
“권터, 선발대에 합류해라. 그래서 네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라. 나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를 말야. 정말로 네 생각처럼 내가 발길을 돌리는 것만이 최선인가를.”
권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나투스 님은 어쩌실 겁니까?”
너울의 질문에 도나투스는 짜증을 부렸다.
“뭘 어째? 저놈이 저리 자리를 잡았으니 나도 따라야지.”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는 걸 이 중에 모르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는 지금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이놈들 뒤를 쫓아다니면 재미있는 일이 많을 것 같단 말야.’
이때 아그립바가 또다시 도나투스를 물고 늘어졌다.
“저 눈 돌아가는 것 좀 봐라. 또 잔머리 굴리고 있어. 가엾은 도나투스. 아무도 친구가 되어 주지 않으니 이젠 내 핑계를 대고 눌러 붙으려는 구나.”
“뭐야, 이놈아?”
티격태격하는 아그립바와 도나투스 그리고 권터. 그들은 이유야 어떻든 선발대와 동행하게 되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일이지만 그건 사실 선발대에게 여러모로 든든한 일이었다.
그들은 다시 움직여 갔다. 파천은 혜능과 아레나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기원한다.
‘아무일도 없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