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21화 : 펠라모 주인 앙샹뜨의 환대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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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검 – 121화 : 펠라모 주인 앙샹뜨의 환대를 받다


펠라모 주인 앙샹뜨의 환대를 받다

매소 루하스는 자하린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곳이다. 영자들이 한번쯤은 일부러 찾아온다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주변 풍광이 뛰어나고 독특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다른 매소와는 달리 이곳엔 하늘을 찌를 듯한 고탑도, 땅을 짓누르는 듯한 거대한 건물도 없다. 작고 나지막한 단층의 건물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듯 정겨운 곳이었다. 처음 이곳이 유명해진건 루딘을 만들어 사용했던 루딘족이 한때나마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든 루딘은 예술품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한 조각물이었다. 전사들은 자신들의 파라슈나 투구나 갑옷 등에 그들이 만든 루딘을 장식물로 붙이고 다녔고, 그것이 무한계 전체에 루딘이 알려지는 경로가 되었다. 나중에는 루딘이 일종의 화폐로서 자리를 잡았는데 그건 그 누구도 쉽게 도용할 수 없다는 점도 한몫했다.
루딘족은 지금도 루딘을 만드는 재료인 메그나를 찾아 무한계를 떠돌고 있다. 그들은 정착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떠돌면서 루딘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지금처럼 루딘이 무한계 전체에 널리 퍼져 나간 건 그들이 끊임없이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영자들의 삶에서 루딘이 필요할 일은 거의 없었다. 루딘을 사용하는 자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거래를 하는 자들. 전사단이나 펠라모 그리고 사냥꾼 등이었다.
이들은 서로의 필요에 대한 가치를 루딘으로 환산했으므로 그들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으려면 루딘을 갖고 있어야만 했다. 루하스 또 하나의 명물은 펠라모 앙샹뜨였다. 앙샹뜨가 흔하디 흔한 펠라모들과 달리 루하스를 대표하는 명소가 될 수 있었던 건 차별화 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천은 그들의 환대에도 불구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도나투스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펠라모를 처음 방문한 파천은 그런 중에도 호기심을 갖고 여러 곳을 자세히 살폈다. 그들을 안내하는 자는 스스로를 앙샹뜨의 교관이라 했다. 전사를 양성하는 곳이니 당연히 분위기가 험악할 것이라 지레 짐작했던 파천은 아늑하고 평화로운 전경에 자기도 모르게 도취되어 갔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건 조각상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정교하면서도 깊은 현기를 담은 듯했다. 안내하던 자가 말하길, 그건 무한계 역사에서 이름을 날린 유명 전사들의 전신상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더욱 관심이 갔다. 그가 둘러본 것들 중에서는 이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는 물었다.
“아레나의 것은 없나요?”
“아쉽게도 없군요. 그 분은 여길 한 번도 방문하신 적이 없어서요.”
‘그렇다면 저 모든 전사들이 여길 한 번은 방문했었다는 얘기인가?’
파천의 일행을 안내해 간 곳은 펠라모의 주인인 앙샹뜨가 거처로 삼는 곳이었다.
그녀는 3천 년 전까지만 해도 중부권 최강의 여전사로 이름을 떨쳤었다. 그녀는 여러 번의 생을 살면서도 전사로 이름을 얻었고, 화려했던 산페소 전투를 끝으로 사실상 전사의 업을 그만두게 된다.
그녀는 이후 여러 곳을 떠돌아 이곳 루하스에 정착했으며, 제 이름을 걸고 전사 양성소인 펠라모를 열게 된 것이다. 이제 3천 년도 채 안 된 펠라모인데도 무한계 전체를 놓고 따져 열 손가락에 들 정도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는 건 남의 성공을 헐뜯기 좋아하는 자들의 상투적인 ‘천운’을 운운한다 해도 대단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 비결은 역시 앙샹뜨의 명성으로 인한 것도 있겠지만 더 큰 비중을 들라면 그녀의 독특한 운영방침 덕분이었다.
앙샹뜨는 다른 펠라모들과는 달리 루딘을 가져오기만 하면 누구나 받아들이는 곳이 아니다. 상당한 전사로서의 경험이 있는 자들을 아예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거기다가 이곳 수련생들은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이곳을 찾지 않았다. 그녀는 기억소멸에서 다시금 새로운 생을 살아가는 영자들만을 대상으로 했고, 그들의 잠재되어 있는 기억과 능력을 끌어 올려 주는 일을 했다.
천상계나 선계의 경우 아라한이나 선인들이 새로운 영체를 입고 메덴에 나타나면 곧장 소환하는 방식으로 불러들인다. 그건 그들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장치이기도 했다.
마계의 일원들은 아예 윤회에서 제외되었으니 말할 것도 없고, 이외에는 이런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는 데가 거의 없다. 그런데 앙샹뜨가 그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3천 년 동안 그녀가 기울인 노력은 차차 결실을 맺어 갔다. 그가 가르치고 양성한 자들 중 뛰어난 전사들이 배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전에 명성을 떨쳤던 전사였다가 기억소멸에 이른 자들일 가능성이 많았지만 어쨌든 그들의 잠재된 능력을 빠른 시간 안에 일깨워 줬다는데서 그녀의 가치는 빛났다.
이런 이유로 이곳은 단순한 전사 양성소 역할만 하는 건 아니었다. 전사들의 존경을 토대로 루하스는 그 어떤 세력도 무력 침략을 도모하지 않는 불가침의 지역이 된다. 이건 무언의 약속이었는데 지금껏 아무도 이 금기를 깨트리지 않은 것만 봐도 앙샹뜨의 영향력을 미루어 짐작할 만했다.
게다가 이곳 출신의 전사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건 언제라도 앙샹뜨의 호출이 있으면 만사 제쳐 두고 달려온다는 점이었다. 이러니 그 누가 감히 이곳을 침범할 생각인들 하겠는가. 앙샹뜨를 대면한 파천의 첫 느낌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신비한 여인이다. 저절로 자세를 가다듬게 할 정도로 품위가 있다. 저 보일 듯 말 듯 입가를 맴도는 훈훈한 미소와 보고 있으면 한없이 아늑하게 해주는 편견 없는 시선은 아무리 악랄한 악인이라고 감화받겠구나. 대단한 여인이다.’
파천과 그 일행을 맞이한 앙샹뜨는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선발대를 내 집에 모시게 되다니 무척 영광이에요. 여기 있는 동안만이라도 편안하게 쉬시다 가세요.”
도나투스가 앙샹뜨 바로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췸을 튀기며 그녀를 칭찬했다.
“그대가 여기 펠라모를 연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천 년이 흘렀어. 그간에 이렇게나 훌륭하게 번성시켰으니 그 노고가 참 대단해. 한때는 철의 전사라고 불렸던 자네가 이처럼 큰 일을 해낼 줄 내 진작에 알고 있었지. 암나 무한계는 언제까지나 그대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게야.”
앙샹뜨는 과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이 얼굴을 붉혔다.
“지나친 칭찬이시네요. 도나투스 님은 예나 지금이나 저를 당황시키는 건 여전하시군요.”
“햐, 그러고 보니 이것 잘하면 수천 년래 가장 뛰어난 여전사 둘이 대면하게 되겠군. 자네도 아레나를 알지?”
“그럼요. 그렇지만 한 번도 만나 본 적은 없어요.”
“앙샹뜨와 아레나의 대면이라. 두고두고 회자될 일이야.”
앙샹뜨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파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무슨 염려라도 있으세요?”
“아, 네…… 일행 중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자들이 있어서요.”
“아, 아난다 님과 아레나 님이 자하린에 남았다고 했지요? 걱정 마세요. 곧 당도하실테니.”
“네.”
“권속들을 시켜 두 분을 마중 보냈으니 무슨 전갈이 있을 겁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파천은 마주 미소를 보냈다. 그러자 앙샹뜨의 얼굴에 한가닥 의문이 맺혀있었다.
“그런데 누굴까요? 누가 이런 일을 꾸몄을까요? 중부권도 아닌 이곳에서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세력은 없는데 말이죠.”
권터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건 모르는 일이오. 숨겨진 세력은 얼마든지 있고, 마계의 끄나풀들은 지난 천 년래 엄청난 수로 늘어났소. 게다가 중부권 패자들의 흉성은 날로 더해 가고 있으니 이까짓 일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벌이고도 남지.”
도나투스는 고개를 저었다.
“둘다 틀렸어. 그쪽은 아니야. 이번 일을 내 들어보니 아마도 선발대의 전력을 탐지해 볼 요량이었던 것 같아. 탐색이 끝나면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겠지. 앙샹뜨, 만약 그대라면 이런 시시한 공격만으로 선발대를 잡겠다고 일을 벌였겠는가?”
“글쎄요. 만약 제가 이 일을 도모했다면 아난다 님 한 분만으로도 제가 지닌 전력을 기울여야 안심이 되겠죠. 역시 그 정도의 힘을 투입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다지 많지 않고, 그런 만큼 용의 세력이 좁혀지는군요.”
이때 밖에서 펠라모에 새로운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이로 전사단주이신 바이롬 님과 슈트레 궁주님이 도착하셨습니다.”
‘궁주라고? 허 참. 그나저나 이젠 이 자들이 드러내 놓고 우리와 동행할 셈인가?’
파천의 생각처럼 그들은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섰고, 잠시 앙샹뜨에게 예를 표했다. 특히 바이롬과 앙샹뜨는 약간의 친분이 있었던지 서로를 반갑게 대했다.
슈트레는 도나투스를 슬쩍 쳐다보더니 편치 않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약간의 악연이 있었다. 예전 슈트레가 명목상으로나마 북부전사동맹의 수석전사로 있을 때의 일이긴 했지만 아직까지도 슈트레로서는 도나투스를 이렇게 가까이서 대한다는 건 조금 껄끄러운 일이었다.
“누군가 했더니 잘나신 수석전사 나리셨군. 북부전사동맹을 물 말아 먹으신 분이 이런 곳에는 어쩐 일로 납시셨는가?”
한껏 비꼬는 도나투스의 말에 슈트레는 기분이 팍 상했지만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웃음 띈 얼굴로 도나투스에게 전사의 예를 표했다.
“도나투스 수련자님을 다시 뵙게 되어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 동안 별고 없으셨지요?”
“흥, 그 동안은 별고 없었다만 네 놈의 상판을 대하지 또다시 속이 뒤틀리기 시작하니 어째야 할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네 놈은 자하린에 남았다고 하더니 그게 아니었더냐? 그놈의 중하신 몸을 보전하시려고 잽싸게 도망치신 건 아닐 테고 말야.”
“으음. 저도 그다지 좋은 기분만은 아닙니다. 도나투스 님의 입은 여전히 거칠기 그지없군요. 이제 웬만하면 그 입 단속 좀 하시는 게 여러모로 좋을 듯 싶은데 제 충고를 받아들이실 의향은 없으신지……”
슈트레도 더 이상은 양보를 않고 맞불을 놓았다. 그러자 장내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슈트레는 하여간 어딜 가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구나. 깨진 바가지가 집인들 바깥인들 가릴까마는. 처신하는 것이 저 모양이니…… 보면 볼수록 한심한 작자야.’
파천의 생각을 읽은 도나투스가 낄낄거렸다.
“네 생각이 맞다. 저놈은 어딜 가도 문제를 일으키지. 제 욕심만 챙기는 놈들은 원래 따돌림 당하게 되어 있는 거다.”
괜히 파천을 끌어들여 놓자 슈트레의 화살이 그렇지 않아도 감정이 좋지 않던 선발대에게로 꽂혀 갔다.
“흥, 휘황찬란하던 빛은 어디 가고 꼴들이 말이 아니로군. 기세 등등하던 처음의 당당함은 다 어디다 팽개치고 이런 꼴들이 되셨나, 그래? 이것봐, 너울 선인. 우리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더니 어떻게 된 건가?”
“입 닥치고 있어라, 슈트레.”
너울의 입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자존심에 상처 입은 너울은 지금 착잡한 심정을 달래느라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런데 슈트레마저 깔짝대자 화가 치솟은 것이다. 그렇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그다지 많지도 않은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슈트레는 자신의 처지도 잊고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망각한 채 계속 지껄여댔다.
“선발대를 이 기회에 아예 교체하는 게 어떻겠어? 너희 정도의 수준이라면 원하는 인원은 내가 얼마든지 충원시킬 수 있으니 내게 맡겨보지, 그래. 그리고 너와 동료들은 안전한 너희 터전에서 좀더 연마하고 익힌 뒤에 나오거라. 그 정도로 무한계를 돌아다니다가는 비명횡사하기 딱 좋겠더라.”
“이봐 슈트레. 너무 말이 심하잖아.”
바이롬이, 흥분하여 점차 앞으로 나서고 있던 슈트레의 어깨를 흔들며 끌어당겼다. 그럼에도 그는 그만두지 않고 더욱 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래도 꽤나 기대를 했었다. 명색이 천상계와 선계의 선발대이니 천한 무한계의 잡종들보다는 좀 나은 게 있겠지. 그래, 저렇게 잘난 척들을 하시니 대단들 할 거야. 세상을 저 혼자 고고하게 살아간다고 믿는 자들이니 뭐가 달라도 다른 게 있을 거야.
이런 내 기대를 너희는 처참하게 짓뭉겠다. 좀더 솔직하게 말해 줄까. 너희는 세상 물정 모르고 설쳐대는 철부지에다 힘은 쥐뿔도 없는 게 그 동안 받아오던 대접은 있어서 고개만 빳빳한 하등 쓸모 없는 쓰레기들이다.
그런데도 아직 자기들이 잘난 줄 망상 속에서 헤매고 다니시니 이 일을 어쩌리요. 아, 큰일났구나. 저런 자들 때문에 무한계가 한바탕 죽음의 춤사위를 흐드러지게 추게 되었으니, 이게 무슨 야속한 운명의 저주란 말인가.”
슈트레는 과장된 표정과 동작으로 너울과 선발대의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당장 반박하고 나섰을 너울마저 입술만 자근자근 깨물고 있을 뿐 아무 소리도 못했다.
파천은 슈트레가 마음대로 지껄이는 걸 보고 있자니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으며, 그런 소리들을 듣고도 아무 소리 못하고 있는 선발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다. 도나투스가 턱을 매만지며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권터, 저놈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지 넌 이해하겠느냐?”
“모르겠소. 제 놈이 잘났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를 좀 보아 달라고 칭얼대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소. 게다가 제 주제 파악을 못하고 설쳐대는 꼴이 영 보기 거북하구려.”
“그렇지? 나도 그래. 앙샹뜨는 다 좋은데 이런 점이 좀 마음에 안들어.”
“네?”
갑자기 자신을 언급하자 앙샹뜨의 큰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찾아온다고 다 손님인가? 제 말마따마 잡종들은 이곳에서 웬만하면 가려서 받았으면 좋겠단 말야. 하긴 앙샹뜨의 잘못은 아니지. 겉모습은 그럴 듯하니 속까지 그런 줄 알았을 테지. 이제라도 알았으니 저 깨갱대는 잡종은 좀 눈에 안 보이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도나투스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된 앙샹뜨는 민망한 듯 살포시 고개를 숙였다. 그때까지 분노를 삭히고 있던 파천이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슈트레에게 일침을 가했다.
“이것 봐, 슈트레. 네게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지 마라. 너는 선발대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자격이 없고 설사 만 번 양보해서 네게 자격이 있다고 해도 네 간섭을 우리는 바라지 않는다.
선발대는 말 그대로 선발대다. 네 말대로 아무리 무능하고 한심해 보여도 현재는 천상계와 선계 그리고…… 인간게를 대표하고 있다. 네 경망스런 혓바닥에 함부로 올려놓고 더럽힐 수 있을 만큼 우리가 만만한가!
저들은 아량이 넓어 네가 마음대로 찢고 까부는 걸 참아내지는 모르지만 나는 다르다. 네게 마지막 기회를 주마. 한 번 더 날뛰면 다시는 그 입을 놀리지 못하도록 해주겠다.”
“이, 이 감히 생령 따위가…… ”
“그래, 감히 생령 따위가 하는 경고를 잊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영계에서의 첫 번째 살생의 대상이 너 따위가 아니길 나도 간절히 바란다.”
파천이 영계에 와서 처음으로 특정 대상에 대한 살심을 품는 순간이었다. 그의 분노는 곧장 그의 체내에 응집되어 있는 프리즈마를 들끓게 했고, 그건 이내 다스려지지 않는 야생마처럼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파천은 그걸 제어할 생각 없이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파천의 모공에서 잠시나마 뚜렷한 금빛이 흘러나온는 것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장내의 공기는 일순 터질 듯 팽배하며 피부로 분명히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압력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이야, 대단한걸.”
아그립바의 감탄성이 없었다면 모두는 할 말을 잃고 가만있었을 것이다. 순간 앙샹뜨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섰다.
“모두들 험로에 예민해지셨나 보군요. 여러분들이 쉴 곳을 마련하겠으니 잠시 안정들을 취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주인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데 달리 토를 달 정도로 눈치 없는 자가 그들 중에는 다행히 없었다.
앙샹뜨는 파천과 선발대를 비롯해 도나투스와 권터까지 함께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가 하면 바이롬과 슈트레만 다른 곳으로 처소를 안배하는 돋보이는 세심한 배려를 했다.
파천은 좀체 가라앉지 않는 격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힘들어했다. 무연의 말처럼 분노는 그에게 매우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파천의 현 상태는 인간이 분명했지만 프리즈마에도 기민하게 반응할 정도로 매우 예민했다. 더군다나 격발의 순수력이 오히려 영자들보다 더 폭발적이라는 인체의 특성 때문에 상당히 위험한 상태이기도 했다.
그가 만약 죽기로 작정하고 프리즈마를 폭발시키면 그 위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파천의 내부에 어떤 변화가 심어졌는지를 모르는 자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너울은 파천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은 변화를 감지했다. 그가 힘은 걸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그걸 알아챈 너울은 그를 혼자있게 해주었다. 파천이 있는 방 옆에 모여 있던 선발대에 미묘한 기류가 감돌기 시작한 건 너울이 안으로 들어올 때였다.
“너울,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이 구성원으로는 중부권은커녕 남부권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각시가 걱정스레 하는 말에 너울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괜히 이렇게 선발대를 구성한 게 아닐 테니 너희는 잠자코 따르기만 하면 된다. 의심을 버리고 서로를 신뢰하자. 지금으로서는 그것밖에 우리가 할 일이 없는 것 같다.”
“파천은 좀 어때?”
마고는 조금 전 보였던 파천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렇게 물었다.
“모르겠다. 아난다 님이 와보셔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괜찮을 거야.”
미타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그렇게 말했다. 방 안은 우울함으로 가득했다. 이때 찬다마나가 조금전 파천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감동젖은 목소리로 말한다.
“난 조금 전 솔직히 좀 눈물이 나려고 했어. 우리들을 위해 분노하는 파천을 보면서…… 그와 함께 하는 내 자신이, 선발대의 일원인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생각까지 들었어. 좀 웃기지?”
헵슬론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입 안에 담아 두었던 말을 끝내 뱉어내고 만다.
“빌어먹을! 슈트레의 말은 사실이지. 우리가 한 게 뭐야?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왜 우리가 선발대에 차출되었을까? 아니,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를 말야. 아직도 그건 모르겠어.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게 됐어. 난 포기하지 않아. 적어도 나에게는 내 생명을 버리고서도 이번 여정을 성공시키고 싶다는…… 그런 간절한 열망이 자라나기 시작했어.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그래, 끝까지 가보는 거다. 실력으로 안 되면 오기와 깡으로 밀어붙여 보는 거야. 자, 모두 할 수 있지?”
평소 말이 없던 무초까지 이러고 나설 정도니 다른 이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마지막으로 미타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딴 자식의 말은 잊어버리고 모두 힘내자고. 우리의 생명을 하나씩 포기한다면 적어도 열한 번의 위기는 넘길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아레나나 아난다 님은 마지막까지 파천을 보호해줄 거고. 그 정도 각오가 되어 있다면 못할 게 뭐가 있겠어.”
전화위복이라 했던가. 슈트레의 선발대에 대한 비난 발언이 오히려 침체된 분위기를 자극했고 언제 그랬느냐 싶게 새로운 각오를 다져갔으니. 슈트레는 이런 점에서 적어도 한 가지에는 쓸모가 있는 자가 분명했다.

파천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어찌된 연유인지 그의 체내에서 들끓고 있던 기운은 아직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분노했다고 이 정도로 날뛰다니, 이건 뭐가 이상한데?’
파천은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갔다. 더 이상 분노의 감정이 생겨나지 않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수면의 움직임처럼 마음은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현상은 여전하다. 으음.’
파천은 점차 머리가 터질 듯 아파 오자 두 눈을 번쩍 떴다.
‘어찌해야 하는가? 이 현상에 대해 이해할 수 없으니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지를 모르겠구나.’
“헉!”
머리 뒤 꼭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뜨거워지며 고통이 가중되었다. 파천은 두 손으로 머리를 박살낼 듯 움켜쥐었다. 파천의 전신은 어느새 땀에 푹 절어 있었다. 바닥에 엎드린 채 머리를 휘젓던 파천은 순간적으로 머리를 제 손으로 깨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안 돼, 안 돼! 이겨야 된다. 이대로,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어.’
“헉헉.”
파천은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었다. 어금니를 꽉 물고서는 신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무연이 했던 방대한 양의 지식들 가운데서 지금의 현상에 대해 참고할 만한 것이 없나를 그 와중에서도 되짚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혜능 도……. 와…… 줘.’
파천은 기진해서 모로 쓰러졌다. 전신은 뜨거워졌다 차가워졌다를 반복했다. 의지를 벗어난 몸은 제 마음대로 뒤틀렸고 새우가 바닥에서 튀어 오르듯 펄쩍 뛰기도 했다.
아그립바는 이런 파천의 현상에 호들갑을 떨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큰일났다. 파천이 이상하다. 곧 죽을 것만 같아. 모두 와봐. 와보란 말야.”
천마환에 들어가 있던 아그립바가 모습을 드러냈다. 변신술마저 익힌 아그립바가 새끼 곰의 형상이 아닌 작은 고마아이의 모습으로 파천을 걱정스레 내려다보다 도저히 안 되겠던지 파천을 마구 흔들었다.
“이봐, 파천! 정신 차려. 왜 그러는 거야? 어이구, 답답해. 이놈들아, 어서 와보라니까.”
쿠당탕탕
방문이 왈칵 열리며 선발대원들과 도나투스등이 몰려 왔다. 그들은 파천의 모습이 심각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전전긍긍했다. 그들 중 가장 경험이 많고 식견이 풍부한 두나투스가 파천을 안아들었다.
“파천, 왜 그러느냐? 어디가 어떤지 말할 수 있어?”
그때 이미 파천은 의식을 거의 잃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얼굴은 새파랗다못해 거무죽죽하게 변해 있었으며 입가로 가느다란 선혈마저 흘리고 있었다. 눈은 뒤집혀 흰자위만 보이고 얼굴엔 쉴새없이 경련이 인다. 도나투스는 즉각 파천의 상태를 진단하기 시작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눈을 감고 있던 도나투스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도무지 모르겠는데?”
그러자 아그립바가 빽, 고함을 지른다.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니 메덴에서 쫓겨났지!”
평소 같았으면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아그립바와 입 방정을 떨었을 도나투스도 지금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는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놈은 생령인데 프리즈마가 왜 이리 날뛰는 거지?”
그가 처음 발견한 의문이었다. 그는 파천이 신편의 도움으로 그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는 거라 생각했으며, 생령이라도 갖고 있는 최소한의 프리즈마를 운용하는 거라 여겨왔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너울이 빠르게 대답했다. 소소하게 늘어놓을 시간이 없으니 간략하게 설명했다.
“영물의 도움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무연이라는…… “
그의 설명을 다 듣고 나서도 도나투스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지금 눈앞에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울이 혹시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자신이 아는 얘기를 마구 늘어놓기 시작했다.
“인간이었을 때 파천은 벌써 생성력을 익힐 정도의 능력자였다고 합니다.”
“뭐라고?”
도나투스는 너울의 얘기가 더해질수록 점차 미궁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사실 너울도 파천에게 가해진 안배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그 원리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그 모든 안배는 수호자님이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난다 님만이 그나마 파천의 상태를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 그 분이 오셔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너울의 결론은 아난다가 와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오기를 기다릴 시간 여유가 없었다. 그가 오고 난 뒤엔 파천이 죽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도나투스는 결연한 의지로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아난다가 와야만 한다면 오게 해야지. 아그립바!”
“왜 불러?”
“아난다와 아레나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어?”
“그건 가능해.”
“좋아, 그럼 그들을 이곳으로 불러온다. 자, 내손을 잡아, 어서! 어서 뭐해. 시간이 없어.”
파천의 상태가 급속도로 악화되어 가는 것을 본 도나투스가 아그립바를 채근했다. 아그립바는 순순히 그의 손을 잡고 아난다의 위치를 추적해 갔다.
파천은 지금 헛것을 보고 있었다. 고통은 오히려 그를 잠들게 하는 수면제에 가까웠다. 그가 지금 서 있는 곳은 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였다. 그의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설란과 천마와 광마존과 쌍노와 소군과 율극과……
그들은 죽어가면서 파천을 슬픈 눈으로 응시했다. 그들은 말하고 있었다. 너무 억울하다고. 이대로 죽기에는, 이대로 소중한 삶의 끈을 놓아 버리기엔 너무 억울하다고, 파천에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파천은 그들의 죽음 앞에서 오열했으며 자신의 무기력함 앞에서 몸부림쳤다.
파천의 눈에서 실제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너울 등은 그걸 보며 충격 속에 빠져들었다. 파천은 끊어질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이대로…… 끝…… 낼…… 수는…… 없…… 어. 안…… 돼.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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