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23화 : 저주 받은 대적자들의 출현
저주 받은 대적자들의 출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레나와 앙샹뜨가 멀쩡한 모습으로 펠라모에 나타났다. 그들은 발락과 가린차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는데 조금 피곤한 듯한 모습이었다.
앙샹뜨는 주인이 무사히 돌아와서인지 예전처럼 활기를 되찾았지만 선발대가 머무르고 있다는 것 때문인지 약간의 긴장감은 더해져 있었다.
파천마저 깨어나자 앙샹뜨는 선발대를 위한 조촐한 연회를 베풀었다. 선계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반도와 천상계의 감로가 차려졌다. 선계와 천상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므로 무한계에서는 좀처럼 접할 기회가 없는 것들이었다.
“아니, 이 귀한 것들이 어찌 이곳에 있누?”
먹음직한 만큼 귀한 영식 앞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건 역시 도나투스였다.
그는 수련자란 체면 따위는 벗어 던진 지 오래였다. 그에게 탐욕이알ㄴ 자연스런 내면의 발현에 지나지 않았고, 다스림과 돋움의 경계를 스스로 짓는 법에 충실했다. 그런 그가 정말 오랜만에 반도와 감로를 대했으니 얼굴에 희색이 감도는 건 당연했다.
“여길 방문하셨던 분들에게서 얻은 것들입니다. 많지는 않지만 선발대의 무사한 여정을 바라는 뜻에서 간소하나마 내놓은 것이니, 마음에 드셨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네요.”
빙 둘러 앉은 자들 중에 도나투스의 손이 제일 먼저 반도에가 닿는다. 그 손을 아그립바가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왜 또 심통이야?”
그 말은 아그립바가 영식을 섭취하지 못하니 괜히 심통을 부리는 것이란 의미였다. 그렇지만 아그립바는 그런 의미로 취한 행동은 아니었다.
“철들려면 아직 멀었더. 나보다도 생각이 없은. 부르나 영식을 대하면 앞뒤 생각도 못하는 게 한심해서 그런다. 눈 달렸으니 주변을 둘러보기나 해. 누가 너처럼 먹지 못해 안들을 하나.”
“으음.”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기본으로 깔고 다니는 도나투스도 이쯤 되고 보면 얼굴이 붉어질만 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일반적인 예가 적용되지 않는 무지막지한 얼굴 두께를 자랑했다.
그는 이미 나간 손을 거두지 않았다. 이대로 손을 거두는 것은 그 동안 견지해 오던 생활 철학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게 되고 만다. 그래서인지 그는 더욱 씩씩하고 과감하게 반도를 손아귀에 틀어쥐고서는 냉큼 한 입 깨물어 본다.
“햐. 역시나 이 맛은 일품이라니까. 혀에 닿자마자 녹아드는 이 시원함이 날 미치게 하는구나.”
아난다는 도나투스의 너스레에도 눈길만은 파천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파천은 한결 나아진 모습으로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난 현상에 대해 아난다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이후였다. 원인은 알게 되었지만 대책은 세우지 못했다. 그러니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 앙샹뜨가 화제를 돌렸다.
“저도 여러분들과 동행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어야겠지만……. 여길 한시도 비울 수가 없어서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그러시면 저희들이 더 미안해지죠. 이런 지나친 환대를 받았으니 항시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아난다는 정말로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그러자 무안해진 앙샹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전사의 예를 표한다. 반도를 쉼 없이 씹어대던 도나투스가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그럼. 앙샹뜨, 자네야 할 만큼 했지. 더군다나 이런 귀한 걸 내놓았으니 된 거야. 그리고 나중에라도 다시 합류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저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제가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난다는 그 동안 지니고 있던 의문 중 하나를 물을 심산이었다.
앙샹뜨는 빤히 아난다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최근래에 펠라모들의 회합이 여러 차례 있었다고 들었는지 어찌 된 연유인지 아시나 해서요.”
“아직 모르고 계셨습니까?”
“모르니 몯지. 그나저나 더 없어?”
어느새 반도를 모두 해치운 도나투스가 뻔뻔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이것 죄송해서 어쩌죠? 그것이 제가 지닌 전부인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까? 펠라모간의 회합이라니.”
각시가 재차 질문을 던지자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앙샹뜨가 얼른 대답을 했다.
“펠라모가 회합을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 뒤에는 중부권 전사단들이 연결되어 있지요. 최근래의 이런 움직임의 의도는 하나입니다.
메덴에 있는 수련자들의 원탁과 같은 성질을 지닌 기구를 창설하려는 움직임이죠.“
“뭐라고요? 세상에…….”
각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되고 만다. 그건 다른 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막 감로를 마셔 가던 도나투스는 목 안으로 들어가던 것을 입 밖으로 쏟아내기까지 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누구야? 대체 누가 그러 주재하고 있단 말인가?”
이런 반응들은 지극히 당연했다. 전사들의 연합기구. 물론 잘만 집행될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일이 없다. 당장 중부권에 평화가 정착 될 거고 그건 나아가 무한계 전체로 퍼져 나갈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저도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단 한번도 참석해 보지 않아서 말이죠. 들리는 얘기로는 몇몇 중부권 패자들이 연합 전선을 형성했고, 그들 가운데서 결정된 일이라고만 들어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연계하고 있는 펠라모들까지 자연스레 동참하면서 본격적으로 일이 진행된 것이겠지요.“
도나투스는 흥분해 소리 질렀다.
“이런 정신 나간 놈들! 무한계의 기본 정신인 자유의 이념을 송두리째 부셔 버릴 놈들이로다. 그놈들이 무슨 의도를 지녔는지는 들춰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고……. 그래, 어느 정도 참여하고 있나?”
“상당한 비율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걱정입니다. 만에 하나 불순한 의도로 시작된 거라면 이건 걷잡을 수 없을 것 같거든요.”
“만에 하나가 아니라 기정 사실이지. 막아야 돼. 이놈들이 무한계를 제 놈들 마음대로 지배하려 드는 게 분명해. 땅따먹기만으로는 양에 안 찬다 이건가? 동참하지 않는 자들은 적으로 몰아붙일 거고, 결국 대세라는 이름으로 재편을 서두르겠지.
아난다, 대체 메덴에서는 뭘하고 있는 건가?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아난다는 눈을 감고 있었다. 파천이 입을 열었다.
“메덴이 결부되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죠. 제가 지금껏 파악하기로 무한계의 주체 세력을 구분하자면 메덴의 수련자들, 칠대 부족, 중부권의 전사단들, 펠라모 그리고 일부 영향력 있는 부족들 정도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중부권 전사단 들 중 일부만의 힘으로 이런 큰일을 도모하기엔 역량이 모자라는 건 자명한 사실. 그렇다면 결론은 그들이 안심하고 일을 추진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조력자가 있다는 것일 테죠. 지금으로 봐서는 가장 유력한 게 마계나 메덴이라고 생각되는군요.”
도나투스는 강하게 부정했다.
“아무리 메덴이 예전과 달라졌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야. 그럴리는 없어. 아마도 마계의 그나풀들이 주도하는 일이겠지. 주체가 누가 되었든 이번 일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해. 당장 선발대에 대한 압박의 강도마저 달라질걸?
휘유, 걱정되는군. 한바탕 강풍이 몰아치려는가?“
지금껏 가만있던 아난다가 전혀 다른 부분을 입에 담았다.
“자금껏 숨죽이고 있던 자들을 전면에 부각시키게 되겠어.”
“ㅅ무죽이고 있던 자들이라며?”
“벌써 그들을 잊은 건가? 무한계의 이단자들 말일세.”
“흐음……. 그러고 보니 그들이 있었어.”
“메덴의 견제력이 상실되는 순간 그들은 뛰쳐나온다. 도나투스.”
“왜 그러나?”
“한 가지 일을 해줘야겠네. 이건 자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무슨 일인데 그러나?”
아난다는 도나투스에게 영언으로 전달했다.
아난다의 성격으로 봐서는 그건 좀 의외의 일이었다. 선발대에 대한 신뢰가 지나치다 할 정도로 강한 그가 이 정도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도나투스가 해야 할 일이 어느 정도로 중요한 일인지를 가늠케 했다.
도나투스의 얼굴이 몇 번인가 급변했다.
“으음. 그 둘을 불러낼 생각인가? 자네 제정신인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야. 최대한 빨리 그들을 데려와 주게. 자네가 얼마만큼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 주느냐에 따라 선발대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네.”
“자네가 걱정하는 게 대체 뭔데 그러나? 몇몇 전사단의 규합만으로 이리 호들갑을 떠는 건 아닌 것 같고. 게다가 나머지 영자들도 머지않아 합류할 텐데 굳이…….”
“더 이상은 묻지 말아줘. 나도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만약에 내 생각대로 이뤄진다면……. 생각하기도 끔찍하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지금으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어.”
“그렇기는 하지만 너무 위험한 방법이지 않은가?”
대화의 성질이 다른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난다의 심각한 표정이나 도나투스의 반응만으로 미루어 짐작할 뿐이었다.
“그리고 자네는 내가 한 말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되네. 다시 만날 때까지는 말야. 약속해 줄 수 있나?”
“허 참, 이것 난처하군. 알았어, 약속하지. 그리고 사실 어디다 떠벌리고 다닐 성질의 말도 아니잖은가.”
“고맙네. 지금 당장 출발해 주게.”
“그러지.”
도나투스는 마시던 감로마저 남겨 둔 채 벌떡 일어섰다. 아마도 시간을 다투는 일인 것 같았다. 도나투스가 아난다에게 말했다.
“곧장 떠나지는 않겠지? 차라리 여기서 좀 더 머무는게 나을 것 같은데?”
“우리가 여기 오래 머물러도 마찬가지야. 적당한 때 출발해야지. 그러니 서둘러 주게.”
“알았어. 아그립바, 너는 어떻게 할 거냐?”
“난 싫어. 여기 있을래.”
“그럼 갔다 올 동안 말썽부리지 말고 얌전하게 있거라.”
“남 걱정하지 말고 댁이나 잘하셔.”
도나투스는 다른 선발대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뒤로 하고 서둘러 밖을 향해 나갔다. 그와 아난다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를 짐작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굳이 말해 주지 않는데 물을 영자는 없었다.
아난다는 바닥에 앉아 꼿꼿이 사체를 세우고 있었다. 그를 보고 있지나 파천 역시나 편히 쉴수만은 없었다. 조금 전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던 권터가 단 한마디도 입 밖에 못 꺼내고 눈치만 보다 밖으로 슬그머니 사라져 갔다. 파천은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 아난다에게 이처럼 긴장하는 이유를 묻고 싶었다.
몇 번인가 망설이던 파천이 끝내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는 거야? 내가 알면 안 되는 건가?”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알아서 득 될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쪽의 경계심을 굳이 드러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흐읍, 그런 거라면 이해가 가는군. 그 말은 달리 해석하면 이곳이 그다지 안전한 곳만은 아니라는 의미도 되는군.”
“그렇지요. 앙샹뜨가 일반 영자들에게야 불가침의 장소겠지만……. 그들이라면 사정은 틀려집니다. 아마도 루하스 주변까지 그들이 임박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지나치게 앞서 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항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최소한의 안전이나마 보장됩니다.”
파천은 전사들의 연합기구 창설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마자 아난다가 긴장하기 시작했다는 걸 떠올렸다.
“전사연합체가 그리도 위협적인 건가?”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자체가 위험한 시도이기는 하지만 당장에 미칠 여파는 그리 크지 않을 겁니다. 아직도 진행주인 사안이고……. 제가 ㅇ며려하는 건 그런 시도가 나오게 된 배경에까지 생각이 미쳤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그걸 시도하다가 추방되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이번 일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다면 선발대는 중부권에 들어서지도 못하고 지리멸렬하고 말 겁니다.}
아난다가 영언으로 해오자 파천도 그에 응했다.
[그들이 그 정도로 강하단 말인가? 혜능, 네가 이토록 긴장할 정도로?]
[그들은 강할뿐더러 잔인한 자들입니다. 당시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메덴이 처음으로 뜻을 하나로 모아야만 했었죠. 메덴의 수련자들 중 선발된 50여 영자가 총력을 기울이고서도 자그마치 백여 년이란 시간이 걸려서야 완전하게 몰아낼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참여했던 자들 중엔 수련자들만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선계의 선장과 천상계의 신장 십여 명도 비밀리에 동참했었죠.]
[대단하군. 그렇다면 혹시 마계와 관련이 있나?]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차원계와도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 마계와 그드 ㄹ중 하나를 악으로 규정하라면 전 서슴없이 그들 쪽을 선택할 겁니다.]
[그 정도란 말이지. 그들에게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대체 뭔?]
[그들이 원하는 건 놀랍게도…… 완전한 차원소멸입니다]
[차원소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영자들을 일순간에 소멸시킨다면 영계 자체가 사라지겠죠. 그들이 바라는 건 바로 그겁니다.]
[뭐야? 왜지? 그걸 왜 바란다는 거야? 지배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말야. 그건 이해가 가지 않는데.]
[마계는 신의 통치와 지배를 부정하지만 그들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죠. 그들은 분명 이단자들입니다. 완전한 소멸이 있으면 신은 사라진다고 믿고 그 이후에야 진정한 의미로서의 자유가 획득된다고 믿는 미치광이들이죠.
그런 만큼 그들은 극단적인 방법도 서슴지 않고, 적을 구분하지도 않습니다. 모두가 그들에게는 소멸시켜야 할 대상일 뿐이죠. 신의 권능의 훼손되는 순간 신도 사라진다고 믿고 있으며 그 믿음에 입각해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번 일은 그들이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전무하겠군. 생각해 봐. 그들의 성향을 잘 아는 전사들이 그들의 뜻에 동조하리라고 보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에도 그들을 따르고 숭배하는 자들은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처럼 마력적인 존재들입니다.]
[놀랍군, 놀라워. 그렇다면 마계와도 적대적인 관계겠군.]
[반반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적이겠지만 목적을 이루는 과정중에는 서로 얼마간의 일치점이 있죠. 그들은 언제나 손을 잡을 수도 있을 겁니다.]
[흐음, 정말 복잡한 곳이군. 이곳 영계란 곳은 말야]
[오랜 생과 기억소멸의 극복이 만들어낸 결과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신은 정말 불가사의해. 침묵의 의미는 대체 뭘까? 혹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존재는 아닐까?
“아닙니다. 신은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끊임없이 세계에 관여하고 계십니다. 그걸 온전히 이해한다면 완전자가 되겠지요.”
“호, 그런 건가? 이해하면 완전자가 된다……. 완전자가 되는 순간 다른 세상으로 옮겨지고 이곳은 불완전한 자들만 남겨지고 말야. 대립과 갈등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그 가운데 신은 침묵하고. 재미있군, 재미있어.”
파천은 아난다와의 대화가 길어질수록 점차 머리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무한은 유한을 담고 있어. 위대한 게 아니라 극복하지 못해 스스로 한계를 짓게 하니 위대한 거였어.’
파천은 앙샹뜨의 이곳 저곳을 거닐며 머리를 식히고 있는 중이었다. 영계에 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도 파천은 몇 번의 생을 산 것처럼 길게 여겨졌다. 제한이 없음을 인식하고 보고 느낀다는 건 너무 피곤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영원히 산다는 건 가장 비참한 일일지도 모른다. 완전한 무지도 아닌 얼마간의 지식을 지니고 있어 더욱 그러하다.’
파천은 스스로가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매 순간 느끼는 게 처음엔 괴롭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지만 지금은 지극히 자연스러워졌다.
‘현명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도 배울 준비가 되어있다는 걸 의미한다. 배워야지. 내가 부족하니 채우려면 그 방법 밖에는 없지 않은가. 후우, 갈 길이 너무 멀어’
처음에는 광명을 가져오는 단순한 여정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광명에 이르는 길을 걸었던 자들을 파천은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가고 있는 이 길을 그들도 따라갔을까를.
‘나는 영자들과 구분되는 점이 있다. 아무리 내가 소리쳐 동일하다 주장해 봐도 영자들과 인간인 나 사이에는 넘지 못할 간극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건 세월의 힘이다. 참된 지혜란 옳음과 옳지 않음. 그릇됨과 바름을 분별하는 저울이다. 그건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다.
일천한 내 경험으로 그 모든 걸 바르게 판단할 수는 없다. 지금 내가 선 곳이 바르고 올항 보이나 그 이면의 진실마저 그러하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아무것도 섣불리 판단할 바가 못 되는 것임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내가 왜 이 자리에 서 있어야만 했는가를.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끊임없이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란 세상에 없다. 성취하지 못함을 중단했구나 빨리 가고자 바른 길을 버렸기 때문이다. 내 의지가 바로 서게 하고 내 판단이 바로 보게 하여 스스로 그릇되지 않게 해야 한다.
죽음과 벗하지 않으면 죽음을 이해할 수 없고, 매순간 곧 죽을 듯이 성심을 다하지 않으면 후회가 남는 법이다. 후회가 없도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해 보는 수밖에. 나머지는…… 순리에 맡겨야겠지.‘
파천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영계에 오면 모든 비밀을 알게 되리라 여겼다. 영계에도 하늘이 있을 줄은 진정 몰랐다.
“그러고 보니 뜨거운 햇살을 못 본지가 꽤나 되었군. 해 아래에 매일 때가 그래도 행복했었는데.”
“꽤나 의미심장한 말이로군요.”
앙샹뜨의 목소리임을 파천은 고개를 돌려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다. 잘 손질된 후원을 거닐고 있던 파천은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몸을 돌려 세웠다. 앙샹뜨의 얼굴에 햇살이 머물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묻고 나니 어색했다. 주인이 자신의 처소를 마음껏 거닐고 있ㅇ므을 왜 그러하냐고 물은 격이었기 때문이다.
“산책 나왔지요.”
“참 아름다운 정원이군요.”
“그런가요? 제 딴에는 신경을 많이 쓴다고 하긴 했지만…….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살짝 미소 짓는 얼굴에서 고민 따위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편견을 지니고 바라보아도 지나치게 평화스런 얼굴이었다.
이런 표정을 지닌 여인이 한때는 전사였다니. 그것도 여전사 중 최고를 다툴 정도였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파천의 손가락이 이름 모를 꽃의 수술을 살짝 건든다. 그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꽃의 내음을 들이켰다.
“흐음, 아주 좋은 향기가 나는군요. 이 꽃은 이름이 뭐죠?”
“이름요? 그런 건 없는데……. 하나 지어 주실래요?”
‘이름이 없는 꽃이라? 하긴 이것도 자연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닌 영력으로 피워낸 것일 테니 당연한 건가?“
“앙샹뜨라고 하죠. 쉽게 볼 수 없는 희귀한 것인데다 향기가 독특하고, 우아한 품위마저 지니고 있으니 무척 어울릴 것 같아요.”
앙샹뜨의 얼굴이 더욱 화사하게 피어난다.
“그 말씀 저를 향한 칭찬이죠?”
“하하하, 그럼요.”
둘은 정원에 난 소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니 모르는 자가 보기라도 한다면 연인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만큼 자연스러웠다.
그렇지만 지금 파천의 심정은 편할 수만은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니 앙샹뜨는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다. 기분이 매우 유쾌한지 입에서 흥얼거리는 소리마저 간간이 흘러나온다.
“저기…….”
“여기 오신…….”
둘은 동시에 입을 열다 또 황급히 다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먼저 하세요.”
앙샹뜨가 파천에세 선뜻 양보했다.
“펠라모를 특별히 만들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파천은 머쓱해졌다.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색함을 덜어내고자 입을 연 것에 불과했다.
“글쎄요. 굳이 이유를 대라면 이제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죠. 전 기억이 있을 때부터 전사였거든요.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길러졌죠.
제 이름은 알려질수록 마음 깊은 곳에서는 더욱 큰 공허함이 자리 잡아갔어요. 제 곁을 맴도는 외로움의 근원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처음에는 잘 몰랐죠. 전 제 스스로가 전사에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럼에도 실력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나날이 늘어만 갔어요.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그때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관여하고 있더군요.
전 전장을 떠도는 내 자신의 모습에 서서히 환멸을 느꼈어요. 삶에 달리 선택이 없다면 모를까, 다른 길이 있다면 제가 지닌 모든 걸 희생하고서라도 그 길에 도전하고 싶었어요. 그러다 선택한 것이 전사 양성이라니……. 생각해 보면 참 어처구니 없는 결정이죠?“
“전사가 싫어서 떠났는데 전사를 양성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니…….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럴 거예요. 저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다지 많지 많았어요. 수련자가 되어 볼까도 생각했지만 스스로의 부족함을 잘 알기에 금방 포기하게 되었고, 선계나 천상계는 왠지 답답하게 여겨지더군요.
결국 전 생각을 바꿔 제가 지닌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기로 결정하게 되었죠. 기억이 소멸된 첫 영체들을 찾아내 그들을 옆에서 도와주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단지 그것이 유일한 목표였어요. 그러나 무한계는 그런 그들이 견뎌 나가기엔 지나치게 험악한 곳이었어요. 그렇지만 않아도 굳이 펠라모의 성격을 띠지는 않았겠는데 제 생각대로 현실이 따라 주는 건 아니더군요.
그들은 기본적으로 약자죠. 아무것도 모르기에 더 순수하고 깨끗한 백지와 같은 자들에게 전 정성껏 그림을 그렸어요. 전사로서 지녀야 할 모든 것들을 가르치고 익히게 했어요. 그들이 전사가 되든, 일반 영자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든 그건 나중의 선택이죠.
일단 힘을 키워 주고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는 데 주력했어요. 전 지금껏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왔다고 자부해요.“
“남에게 작으나마 도움을 준다는 건 어떤 것으로도 퇴색시킬 수 없는 훌륭한 일임에도 틀림이 없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앙샹뜨 님은 아주 대단한 일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자부심을 지녀도 될 듯 싶네요.”
“그런가요?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그런데 기억을 되살리는 게 가능한가요?”
“일부는 가능해요. 천상계나 선계에서도 기억소멸을 약간이나마 회복시키는 일을 해왔어요. 처음의 기억마저 되살릴 수는 없지만 노력에 따라 그것도 가능하겠죠.
완전자들은 마지막 순간에 모든 생애를 다 기억해낸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로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하죠. 그리고 일부 부족에게는 기억소생술이라는 비술이 전해진다고도 하고.“
“그럼 저 같은 경우에도 가능한가요? 전생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알아 볼 수 있습니까?
파천은 조금 전과는 달리 적극적인 호기심을 나타냈다.
“해봐야 알겠죠. 장담은 못하지만 어느 정도는 가능할 거예요.”
“그럼 지금 당장 해주실 수 있나요?”
앙샹뜨는 다급하게 말하는 파천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전생이 무척이나 궁금하셨던가 보네요. 아쉽게도 그건 금방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니랍니다. 파천 님에게는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으니 무척 안타깝네요.”
파천은 실망했다.
이번엔 앙샹뜨가 궁금한 점을 파천에게 물었다.
“이곳 무한계에 파천 님에 대한 여러 소문들이 떠돌았었죠. 난 그 동안 참 많이 궁금하게 생각해 왔어요.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그런 허무맹랑한 소문들이 떠돈 것일까? 생령에게 이런 관심이 솔린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죠.”
“어떤 소문이 돌았기에 허무맹랑하다고 하는 거죠?”
“이를테면……. 인간이 물질 생성력을 지녔다던가, 루시퍼마저 경계할 정도로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등의 소문이죠. 심지어 마계의 마신들을 능가하고 대마신과 비슷한 능력을 지녔다는 그런 얼토당토 않는 소문으로까지 비약되더군요.”
‘그건 사실이었는데, 지금이야 비록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 별 대단치 않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인간계에서는 대충 비슷한 정도는 되었는데……. 그게 허무맹랑하단 말인가? 인간의 능력을 얼마나 과소평가하는지를 단적으로 알게 해주는군.’
파천은 씁쓸한 심정이 되었다. 앙샹뜨 정도의 영자들마저 그럴 정도라면 다른 이들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들은 왜 인간계를 무시하는 걸까?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건 어느 정도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군요. 제가 오행의 기운을 뭉쳐 구술을 만든 것이 생성력의 맞다면 말이죠. 그리고 인간계에 침범한 마계의 마신들 중 제가 위협을 느낄 만큼 강자들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고, 물론 대마신들은 상대하기 벅차긴 했지만 말입니다.”
순간 앙샹뜨의 얼굴이 불신의 빛을 띠는 걸 파천은 놓치지 않았다.
“그럼 그 소문들이 사실이란 말인가요?”
“앙샹뜨,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대체 인간들은 그렇게나 무시하는 이유가 뭐요?”
약간은 도전적인 언사였으므로 앙샹뜨가 기분이 나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인간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에요. 단지 그들의 성정이 그러니까……”
“어떻다는 겁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스스로가 지는 가능성을 무시하죠. 게다가 짧은 시간의 제약이 그들을 제한시키죠. 그러니 어찌 인간의 상태로 그런 능력을 지닐 수 있다고 믿겠어요?
“그럼 완전자는 반드시 인간계에서 나온다는 얘기는 어떻게 셜명하겠소?”
“그건 예외에 해당하죠. 영계에서 완전자의 수행을 거의 마친 자들이 마지막으로 인간으로 태어나니 가능합니다. 그런 가능성을 지닌 분들은 영계에서도 한정적으로 정해져 있죠. 그런 분들이 인간세에 나시면 영계에서는 주의 깊게 관찰하고 예의 주시한답니다.
그건 비단 우리 차원계에만 국한 된 건 아니죠. 마계도 그건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반드시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완전자로 각성하지는 못하죠. 그건 넘기 힘든 마지막 고비거든요. 지금가지의 생에서 거쳐온 수 많은 난관들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관문이죠. 성공 확률은 그만큼 희박한 거죠.
그런데 파천 님에 대해서는 너무 생소하거든요. 그 전에 전혀 주목 받지 못했던 생령이 갑자기 신성으로 부각되었으니……. 이런 경우는 단연코 처음 있는 일이랍니다.“
앙샹뜨의 말은 사실이었다. 완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영자가 현생에 태어나게 되면 전 영계는 주목하여 관찰한다. 그리고 완전자가 되는 순간 전 영계는 한바탕 난리가 난다. 그가 속한 차원계는 잔치를 열고, 그를 위해 특별한 것들을 준비하기도 한다.
마지막 완전자의 수행을 지켜보는 일은 그 자체로 영광이었다. 영계를 지나쳐 가는 걸 보기 위해 수많은 영자들이 집결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다지 흔한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작은 것 하나라도 얻기 위한 몸부림은 그래서 더욱 치열했다.
이때만은 중부권의 전투도, 마계의 온갖 음모도 멈추게 되며 무한계의 복부권에서는 천사들이 마중을 나온다.
완전자는 수행의 마지막에 전 영계의 영자들을 향해 자신의 깨달음을 설파하고서는 다시 길을 돌이켜 인간세로 향하게 된다. 이때는 번개가 이쪽 하늘에서 저쪽 하늘을 순식간에 관통하듯이 지나쳐 간다.
이후 현생에서 인간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생을 마감하고 완전자들의 세상인 광명세로 들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지금까지 완전자들의 공통적인 행보였다.
“나는 완전자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런 극강의 힘을 지녔던 건 사실이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에 대해서 묻는 거라면 나로서도 설명이 곤란하오. 원래 지녔던 힘도 아니었고 내게 무슨 특별한 재능이나 뼈를 깎는 고통이 있었기에 성취된 것도 아니었소. 어찌 보면 거저 주어진 것에 가까웠죠.
난 그 힘이 내게 주어진 게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기에 하늘이 내려 전 것이라 믿고 싶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난 내 전생이 무척이나 궁금한 평범한 사람일 따름입니다. 오히려 내 주변에는 나보다 더 고귀한 전생의 쇼유자가 많았지요.
그들 중에 일부는 당신들도 알고 있는 라미레스나 아난다, 천상계의 아라한들과 선계의 선인, 팔선 중 하나와 귀계의 칠성 중 대덕까지 포함되어 있었소.
인간으로 태어남이 하늘의 권한이라면 이는 분명 무슨 뜻이 있어서일 거요. 아직은 모르지만 분명 그러하리라 믿습니다. 내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것 한 가지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무시하는 생령이 영계를 거쳐 광명에 이르러야 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내가 아니어도 되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내가 이 길에 서 있습니다. 성공이든 실패든 그 결과가 있어야만 할 이유가 있겠지요.
내가 알고자 하는 건 그 끝이 어떠한가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 삶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음대로 농락한 그 주재자에게 묻고 싶소. 왜 그래야만 했냐고. 다른 길은 없었느냐고 말입니다.“
앙샹뜨는 파천의 눈길이 향하는 곳을 따랐다. 밝은 하늘을 향해 파천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다. 앙샹뜨는 한숨을 포옥 쉬며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신을 만나고 싶은 건가요?”
파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분을 만나는 건 포기하세요.”
“왜죠?”
“둘 중에 하나의 경우에만 그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완전자가 되거나 완전소멸의 벌을 받거나.”
“그럼 나는 완전소멸을 택해야겠구려.”
파천의 옆얼굴을 보며 결의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고 앙샹뜨는 생각했다. 결코 무너뜨리거나 회유할 수 없는 결연한 의지는 흔히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앙샹뜨는 파천의 얼굴에서 또 하나의 얼굴을 찾아 가고 있었다. 꼭 한 번 이런 의지를 대먼한 적이 있었다.
‘라미레스, 그 분은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 파천님의 결에 있으면 그 분도 만나 볼 수 있겠지?’
그랬는지도 몰랐다. 앙샹뜨는 파천에게서 라미레스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난다가 무슨 생각인지 파천을 이끌고 펠라모를 나섰다. 따라오는 선발대원들을 물리고 단 둘이서만 나선 길이었다.
매소 루하스의 거리는 그 어느 곳보다도 한적하고 평화롭기만 했다. 가끔씩 보이는 영자들의 얼굴은 조금 달라 보였다. 자하린과 뜰에서 보았던 영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던 여유가 넘쳐나고 있었다.
파천은 자신도 절로 마음이 차분하고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한 영자의 노력으로도 이처럼 평화를 전염시킬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앙샹뜨에 대한 평가에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앙샹뜨……. 그녀는 이것 한가지만으로도 대단한 일을 한 거야.’
아난다가 파천을 데리고 들어간 곳은 의외로 중앙 광장 주위에 있는 주점 중 한 곳이었다. 파천은 생소한 전경이었지만 중원의 주점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편안해지는 자신을 느낀다.
아난다의 두 병의 부르를 가져와 파천의 앞에 앉고서는,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 파천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혜능, 너도 술을 마셔?”
“그럼요. 저라고 못 마시라는 법이 있습니까? 즐겨 먹지는 않지만 마셔야 할 때는 마십니다.”
“지금이 마셔야 할 때란 말인가?”
“딱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군요.”
파천은 주위를 둘러보다 아난다 가까이 얼굴을 가져 가며 물었다.
“왜 여기에 데려 온 거지?”
“이걸 마시려고 온 거죠.”
주변에 있던 영자들이 자신만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게 영 어색하고 불편한 파천은 툴툴댔다.
“생령이라고 내 얼굴에 써져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하나같이 귀신처럼 알아 보는군.”
“그야 당연하죠. 무림에서 기운으로 상대를 감지하듯 이들 역시 프리즈마의 거유 파동을 감지하기 때문이죠. 파천 님에게 보이는 프리즈마의 파동은 영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것이니 이들이 주목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는데?”
“영자들의 수준과 상관없이 고정적으로 지니고 있는 능력이 있으니 그걸 영안이라고 합니다. 프리즈마의 고유 파동으 ㄹ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들은 영자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겁니다.
모든 물질의 존재 형식에도, 갖가지 운동에도 고유의 파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가 움직였다는 것은 프리즈마의 파동이 변화했다는 의미와도 같은 거죠. 프리즈마의 결합에도 프리즈마의 생성에도 이런 파동의 변화가 따릅니다.
자, 보십시오. 내가 이 병을 여기서 이쪽으로 움직이는 힘은 고유 진동수를 바꿔놨다는 의미와도 같은 거죠. 가장 작은 단위의 흐름에도 프리즈마의 고유 파동은 존재합니다. 이 형식에 변화를 주게 되면 변화한 파동에 따라 다른 존재 형태가 자리 잡게 되는 겁니다.
이런 원리로 영자들은 움직이고 힘을 쓰는 겁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그걸 의식하면서 힘을 일으키는 영자는 없을 겁니다. 몸에 배인 것이라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거죠.
파천 님의 경우엔 그런 영자들과는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프리즈마의 결합 양식은 같지만 작용은 다릅니다. 각기 다른 색깔이 섞여 새로운 색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다른 색상의 것을 외부에서 만들어 가져옵니다. 얼핏 보면 같은 것 같지만 전혀 다리지요.“
파천은 아난다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알 것 같기도 했지만 따져 보면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함구하고 있던 파천이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파동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뭔데?”
“그건…….”
아난다도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아난다가 결국은 답을 내렸다.
“의지의 파동이 우주의 프리즈마가 지닌 개체 프리즈마의 파동과 혼합하여 전혀 새로운 결정체로 고유 진동수를 부여하는 걸 겁니다. 우주는 가장 작은 단위로 나누면 뭐가 될 것 같습니까?”
“먼지인가?”
“말입니다.”
“뭐라고?”
“신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우주죠. 영자들의 의지가 신의 의지 내에서 새로운 의미로 변화하는 과정이 곧 운동입니다.
존재는 의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윤회의 비밀은 개개의 의지가 소멸되지 않고 우주의 부분들을 이루며 영원히 존재하기에 가능한 겁니다. 말로나 생각만으로도 그건 지워지지 않고 영원히 각인되어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그걸 완전하게 원래의 상태로 복원시키지 않고서는 완전자가 될 수 없는 겁니다. 모든 업을 소멸시키지 않고서는 말입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로군.”
“그럴 테지요.”
“자, 이거나 먹자고.”
파천은 얼른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려 버렸다. 지금 당장 아난다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는 기억해 두기로 했다.
‘그렇다면 결론은 뭐야? 현존재라는 것이 신에게로 회귀되어간다는 의미란 말인가? 신은 그럼 뭐란 말인가?“
파천ㅇ느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섞이는 걸 절감하며 한쪽 손을 펼쳐 머리에 대고 소리 나게 탁탁 쳤다. 그 행동을 지켜보던 몇몇 영자들이 킥킥거리며 웃는다.
그때다. 주점의 문이 벌컥 열리며 새로운 영자들이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파천은 대수롭지 않게 쳐다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 갑자기 이렇게 기분이 나빠지는 거지?’
뭔가 알 수 없는 께름칙한 기분에 휩싸인 파천은 앞에 있는 아난다의 표정을 살폈다. 아난다의 얼굴 역시 매우 어둡다는 걸 발견하고는 자신만이 그런 기분을 느낀 것이 아님을 알았다.
다른 영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 세 명의 영자들이 주점 안으로 들어섰건만 장내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얼어붙고야 말았다. 파천은 그들을 다시 한 번 눈여겨보았다. 여자 둘에 남자 하나. 제일 앞에서 있는 건 여자였다.
그녀는 푸른 반소매에 얼기설기 얽은 붉은 사슬을 팔뚝에 두르고 있었으며, 목 주위를 큰 깃이 에워싼 평범치 않은 복장을 했다. 가죽 재질로 보이는 검은색 망토를 앞쪽까지 끌어다 여미고 있어 다른 건 알아 볼 수 없었다.
그녀의 한 손만이 밖으로 살짝 드러나 있는데 손 끝에 쥔 홀이 매우 인상적이다. 벌어지지 않은 장미꽃 봉오리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의 절반을 금속제의 가면으로 가리고 있어 용모를 알아보기는 힘들었으며, 드러난 부분도 금발에 가려져 있어 역시 잘 알아볼 수 없었다.
대신 머리카락 사이에서 반짝이는 눈이 피보다 붉은 색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약간 뒤쪽에 처져 있는 자들 역시 비슷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모두 금발이었다. 단지 틀린 점이라면 남자의 한 손은 번쩍이는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여자의 손은 푸르스름했다.
‘참으로 독특한 분위기들을 지녔구나. 저 붉은 눈은 정말이지 소름이 다 끼치는구나. 내장까지 훑어 내릴 듯 날카로운 것도 마음에 안 들어.’
파천의 이런 느낌은 다른 영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는 것이었지만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나타난 반응들은 아닌 듯했다. 그들은 주점의 가장 안쪽까지 다다라 빈 의자에 털썩 몸을 싣는다.
“여기 부르 세 병만 가져와.”
아무도 그의 말에 대답하는 이가 없다. 필요로 하는 이들이 스스로 가져다 먹는 주점에서 그들의 시중을 들어 줄 이가 없음은 당연했다.
“뭐야? 내 손으로 직접 갖다 처먹어라 이건가!”
그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영자들에게 지른 소리였다. 그들은 우물쭈물하며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이것들이 귀가 처먹었나.”
남자가 막 일어서려 하는데 홀을 쥔 여인이 제지했다.
“소란 피우지 말고 네가 가지고 와서 마셔.”
“플로렌서……. 그렇지만.”
“말이 많다, 딜타이. 플로렌서 님의 명에 토를 달 참인가!”
딜타이라고 불린 사내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곁에 있던 영자들의 곁을 지나치다 그들의 목을 한손으로 슬쩍 쓰다듬으며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영자들 중 일부는 주점을 빠져 나갔고 주점에 여전히 남아 있는 영자들은 감히 새로 등장한 자들에게 눈길도 주지 못했다. 이때 플로렌서가 파천을 직시하며 옆에 있는 여인을 불렀다.
“메르센느.”
“네.”
“생령을 대한 심정이 어떻지?”
메르센느가 푸르스름한 손을 들어 금발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반쪽의 드러난 얼굴은 조각같이 선명했다. 게다가 붉은색 눈은 금방이라도 터져 피가 솟구칠 듯 강렬했다.
“아주 매력적이네요. 생각해 오던 것보다는 훨씬 뛰어난 것 같습니다.”
“어떤점에서?”
“물론 용모죠. 도발적인 눈빛이 매우 마음에 드는군요.”
“흐음, 네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났구나. 어찌했으면 좋겠느냐?”
“제 곁에 두고 싶습니다. 그럴 수 있게 허락해 주신다면 말이죠.”
“호호호호.”
파천은 상당히 기분이 언짢아졌다. 자신을 화제에 올리는 건 차치하고라도 손 끝에 닿는 장난감을 대하듯 쉽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때 부르를 가지러 갔던 자가 돌아왔다.
탁자게 부르를 올려놓으며 그 역시 파천을 눈여겨본다. 반쪽만 드러난 입꼬리가 슬쩍 말려 올라가는 걸 보아 그자가 웃고 있음이 분명했다.
파천은 이 어이없는 상황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었다.
아난다는 그들에게 정중한 어조로 물었다.
“대체 언제…… 천형의 땅에서 벗어난 것이요?”
플로렌서는 아난다를 매우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대가 쿠사누스일 줄은 진정 의외였어. 어떤가? 차라리 우리쪽에 가담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경계하던 자들은 어찌하고 나온 겁니까?”
“그갓 허수아비들 쯤이야. 오래 전에 거두어 들였지. 그들은 우리들의 충실한 노리개로 전락한지 오래야.”
“또다시 시작할 셈이요?”
“호호호호.”
플로렌서는 목이 꺾이지 않을까 염려 될 정도로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이 어깨 주변에서 마구 요동쳤다.
“아난다! 우리의 꿈을 이해하고 있는 자. 그대가 수련자임이 애석하구나. 어떤가, 지금이라도 우리 쪽에 동조한다면 그대를 특별하게 대해주지. 그럴 의향이 없는가?”
“그대들은 나서지 말았어야 했고. 그대들이 날뛰지 않아도 세상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충분히 혼란스럽습니다. 대체 왜, 어리석은 과오를 또다시 저지르려 하는지 진정 모르겠구려.”
“긴장하지 않아도 돼. 잠시 살펴보러 온 것뿐이니까. 전 영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존재가 어떤지 무척이나 궁금했거든. 그들이 기대를 너무 쉽게 무참히 짓밟는 것도 예의에 어긋나지.
파천이라고 했던가? 기다려라. 그리고 이왕이면 즐겨. 파멸의 순간이 도래하는 때를 갈망하고 있거라.“
파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 여자의 눈에서 생명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저처럼 완벽하게 죽어 있는 눈은 처음 본다.’
플로렌서에 대한 파천의 첫 인상이었다. 주점의 문이 열리며 두 여전사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들은 아레나와 앙샹뜨였다. 들어서면서부터 얼굴이 굳어 있는 것을 보니 그녀들 또한 긴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파천은 그녀들이 나타나자 어찌된 상황인지를 곧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강적의 출현이 있을 것을 감지한 아난다가 그들을 글어낸 것 이다. 그들을 확인하고자 했던 의도는 성공했다. 어차피 펠라모에 있는다고 해서 안전의 유무에 큰 영향을 받는 건 아니다. 그럴 바에는 드러내놓고 적의 움직임마저 동시에 확인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가장 확실한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아레나와 앙샹뜨를 몰래 따라 오게 한 건 파천마저 감쪽같이 모르고 있던 일이었다. 아난다는 상대들과 한판의 드잡이질을 하게 되면 결과가 어찌 될까를 가늠해 보았다.
‘셋 중에 하나는 상대할 수 있다. 나머지 둘은 앙샹뜨 님과 아레나 님이 막아 낼 수 있을 거다. 그렇지만 이들만으로 무한계에 들어선 건 아닐 터. 숨겨진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이들이 선발대를 저지하고 와해할 요량이었다면 벌써 끝장을 보려 했을 것이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플로렌서가 스스로 내뱉었듯이 그들은 단지 호기심에 끌려 여기까지 왔을 뿐 다른 의도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언제일지 모르지만 곧 선발대에 대한 악독한 계획을 실행할 것이다.
‘도나투스가 생각보다 빨리 도착해 주길 기대하는 수 밖에 없다.’
아난다가 이 정도 자신 없어 하는 건 상대들이 그만큼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걸 의미했다. 새로운 여전사들의 등장에 플로렌서가 흥미를 더했다.
“누구신가 했더니 이름도 자자한 앙샹뜨가 아닌가? 그래 여긴 어쩐 일이지? 설마하니 우리를 그 무시무시한 파라슈로 처단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말야.”
“플로렌서, 오랜만이군요. 언젠가 라미레스 님과 함께 만난 적이 있었지요?”
“흥, 그 잘난 대마신 놈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라. 그때 그놈만 없었어도 네 년은 내 포로가 되었을 거다.”
“그랬겠죠. 그렇지만 지금은 아마도 다를 겁니다.”
“자신 있나?”
손에 쥐고 있던 홀의 끝이 살짝 들리며 탁자를 툭툭 내리친다. 홀에 눈길을 주고 있던 앙샹뜨는 플로렌서의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난다, 오늘은 부르나 먹다 갈테이 우리를 경계하지 않아도 좋다. 그렇지만 다시 찾아오마. 그때는 네 목줄을 움켜쥐고야 말겠어. 아, 물론 생령도 함께인 건 당연하고.”
아난다는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도나투스가 이들이 움직이기 전에 와준다면 해볼 만하다.’
아레나는 셋 중 단 하나도 알고 있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들이 누군인지는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메덴이 한 대 그들로 인해 상당히 시끄러웠다는 걸 기억해낸 것이다. 그 장본인들 중 일부가 선발대 앞에 나타난 것이다.
‘까다로운 적이다. 이들은 칠대부족이나 중부권 전사들보다 더 상대하기 힘겹겠어.’
아레나의 이런 판단은 객관적인 비교 우위에 따른 것이었다.
“자, 거기들 앉아서 부르나 한잔씩들 하지. 이렇게 마주 앉을 때가 그리 흔한 건 아니잖아.”
이때 파천이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선다. 그러더니 공장 플로렌서에게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놀란 아난다가 파천의 팔을 잡아채며 당경ㅅ다.
파천은 아난다를 향해 싱긋 웃으며 걱정말라는 투로 말했다.
“혜능, 지나치게 긴장할 필요 없어. 난 단지 저들에게 몇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을 뿐이야.”
파천이 여유를 부린다고 해서 아난다가 그의 뜻에 선뜻 동조해 줄리는 없었다.
“안 됩니다. 저들은 믿을 수 없는 부류의 영자들입니다.”
이때 딜타이가 화가 나 소리쳤다.
“닥쳐라, 아난다. 감히 플로렌서 님의 안전에서 그따위 망발을 지껄인단 말이더나!”
파천은 얼굴을 찡그렸다. 딜타이란 사내의 목소리는 아무리 좋게 들어 주려 해도 잘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천은 혜능을 향해 다시 한 번 웃어 주었다.
“잠깐이면 돼.”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난다는 자기도 모르게 파천의 손목을 움켜쥔 손에서 힘을 풀어 버렸다.
뚜벅뚜벅
5장 되는 거리를 좁혀 가는 파천의 움직임만이 주점의 굳어 버린 정적을 깨트리고 있었다. 앙샹뜨와 아레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아난다의 곁으로 신속히 다가왔으며,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파천의 뒤를 따르려 했다. 아난다가 그녀들을 제지했다.
“플로렌서라고 했고? 난 파천이오. 날 보아 두려고 먼 길을 달려오신 분들을 섭섭하게 해드릴 수는 없겠지요. 자 마음껏 보시오.”
파천은 플로렌서의 정면 빈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아무 거리낌 없이 대했다. 그러자 당황한 건 오히려 그녀들 쪽이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하는 심정이 된 것이다.
플로렌서는 피식, 실소를 흘리고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배짱이 있는 놈이군. 능력만 뒷받침 된다면야 강자의 여유라고 봐주겠지만 생령이 아니던가. 아이야, 우리가 무섭지 않느냐?”
“중원의 무사들은 여인을 무척이나 편애하는 경향이 있소. 사람 또한 다뤄지는 성격에 따라 구분될 수 있는데 중원의 인간들, 그 중에 남자들은 여인을 아끼고 사랑할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소. 두려움이라니. 당치도 않소이다.
그대는 아름다운 여인이니 그런 시각으로 보자면 뚜렷이 구분되는 점이 있지요. 두렵기는 합니다. 혹시 유혹이라도 해오면 어쩔까 하는 두려움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뜻밖의 엉뚱한 말에 플로렌서 일행은 할 말을 잃고 멍청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난 그대들로 인해 내 친구 혜능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흥미롭소. 게다가 저 거침없는 두 여전사를 위축시키고, 지켜보는 영자들을 얼어붙게 할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궁금하오. 그대들은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건 우리가 강하기 때문이다. 강자 앞에서 약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으레 그렇게 행동하게 되는 거지.”
“오, 그렇소? 그런데 내 눈엔 좀 특별할 뿐 그다지 위협적인 존재감으로 다가오지 않으니 참 이상한 일이 아니오.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건 네가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처음과는 달리 플로렌서는 파천과 한마디씩 주고 받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흥미로워했다.
“그러소. 난 아무것도 모르오. 영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왜 이렇게 무한계가 여러 경향으로 분류되어 서로를 향해 독아를 드러내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고. 내 짧은 지식을 채워 주실 의향은 없으시오?”
“무슨 말이냐?”
“그대들이 원하는 게 전 영자들의 소멸이라 들었고. 맞소?”
“그렇다. 잘 알고 있구나.”
“그 이유가 그래야만 신이 소멸할 거라 믿기 때문이라 들었는데……. 이도 맞소?”
“비슷하다.”
“그럼 묻겠소. 당신들은 신을 직접 소멸시킬 자신은 없는 거구려. 내가 바로 이해하고 있는지 모르겠소.”
“우움.”
“닥쳐라, 생령 놈!”
‘딜타이란 놈의 저 목소리는 정말 들어 주기 거북스럽군.’
“안타깝게도 생령인 나도 입이라는 것이 달렸으니 이는 주제넘게도 내 뜻을 밝힐 권리가 있다는 것일 테니,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입을 다물고 있다는 건 순리에 어긋나는 일인 듯 싶어 그럴 수 없소이다.”
제 뜻을 담아 두지 않고 또박또박 모조리 토해내는 파천, 딜타이는 노려보기를 멈추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기를 꺾어 놓고 싶은데 파천이 전혀 동요하지 않자 억눌러 둔 화가 치솟아 오르기 직전이었다.
원래라면 이 순간에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게 일반적인 경우였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게도 상관의 눈치를 봐야만했다. 플로렌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파천을 떠보기 시작했다.
“너는 참으로 담대하구나. 우리가 어떤 종류의 영자인지 잘 알고 있는 듯한데도 전혀 두려움이 없어 보이는구나. 어떠냐, 네 용기를 시험해 볼 생각이 없느냐? 우리를 따라 가서 우리가 지닌 이상의 실체를 직접 겪어 볼 용기는 없느냐?”
플로렌서의 말 역시나 파천이 생각하기로는 조금 뜻밖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파천은 고개를 저었다.
“난 마음이 급하오. 지금 선발대가 그대들 때문에 발이 묶여 있는 것만 해도 참을 수 없건만 그런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는 않소.”
“왜 그렇다고 단언하지?”
“때론 겪어 보지 않고도 얼마간 알 수 있는 유형도 있기 때문이오. 그대들이 천시하는 인간계에 얼마 전 마계가 침범해 왔었소.
그들은 자신들의 일관된 주장이 흠잡을 데 없는 이상인 것처럼 포장하고 있었지만 난 곧 바로 알 수 있었소. 다른 견해나 입장을 인정치 않고 파괴시킴으로 성취하려는 자들은 그것이 아무리 그럴 듯해도 결국엔 치워 버려야 할 쓰레기들임을 말이요.
안타깝게도 내 눈엔 그대들도 그렇게 보이니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대들과 동행할 일이 없을 것 같구려.“
모욕을 받고도, 그것도 정면에서 비난하는 자에게, 미소를 보낼 자들은 흔치 않다. 상대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그만큼 스스로에게 당당하지 않고서는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런 점에서 플로렌서의 반응은 파천에게 경이로운 것이었다.
“반대의 입장을 본다는 건 무척 어려운 거지. 네 생각이 옳다고 여겨진다고 해서 반드시 상대의 뜻이 잘못됐으리란 건 편견이며 오만이다.
너는 양 갈래 길을 모두 가보지 않았기에 그리 쉽사리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야. 마지막 순간가지도 네 결정은 뒤로 미뤄져야 해. 단지 너는 너의 신념대로, 나는 나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것만이 유일한 진실이고 설득일 따름이지.“
파천은 플로렌서의 눈을 다시 쳐다보았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파천도 진지하게 대해 갔다.
“좋은 말이로군. 네 말이 맞다. 그렇지만 넌 모르는 게 있어. 나는 난, 너는 너. 우리 사이의 평행선은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다. 나는 나로 세계 앞에 서고 너는 네 모습으로 세계의 일부분을 이룬다. 네가 날 이해하지 못하듯이 나 또한 너를 이해하지 못한다.
네 신념을 강요하기보다는 네 행동을 보고 겪고 감동하게 하라. 혹여 네 뜻에 따르는 자들이 많다 하여도 네 신념이 무조건 옳을 것이라 여기지 마라. 다수가 저지르는 잘못을 단 하나의 반대자가 지적하지 못하란 법은 없는 것이다.
네가 만약 그 하나마저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나 또한 널 인정하겠다. 그 하나의 소중함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면 말이다. 그건 불가능하겠지. 너는 행동함으로 존중받기를 원하기 때문이지. 네 방식은 그래서 모든 이들을 괴로움에 불행 가운데 빠트리는…… 네 말대로 편견이며 오만인 것을.“
“그럴지도 모르지. 좋아, 결론만 간단하게 말하마. 난 내가 지닌 이상이 확고한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걸 이뤄야만 모든 영혼들이 자유를 누릴 것이라 믿는다. 이 신념에 따라 나는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 지금 내가 선발대를 내버려 두는 건 좀더 다양한 시선들이 집중되길 기다리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 때가 무르익었다 싶을 때 난 다시 네 앞에 설 것이다. 그때 너희들이 가진 모든 것을 난 정죄하고 심판하겠다.”
“무서운 독선이로군. 좋아, 그렇게 해. 나 또한 한 가지만 말해 두지.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돌이키는 순간 용서받을 조건은 충족된다. 네 지닌 신념이 허상이었음을 느끼게 되는 날이 온다면 속히 돌이켜 더 이상 과오를 저지르지 말길 바란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한다면 한 번쯤은 시작점으로 돌이켜 네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볼 필요는 있을 거야. 만약 선발대의 여정이 너희들로 인해 멈추게 된다 해도 난 실망하지 않는다. 힘없는 정의는 당장 미약하다 하지만 내일을 기약할 수 있으나 정의 없는 힘은 포악일 뿐이므로 내일 정죄됨을 믿기 때문이지.
이기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바른 것이 이기게 되는 건 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으면 불변하는 진리인 셈이야.“
파천은 속으로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확신을 주었다.
‘신의 존재가 현실이 아닐 때는 몰랐으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건 변치 않는 진리가 되는 거야.’
“그런가? 그렇지만 때로 힘이 모든 걸 지배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불완전자들에게 내려진 천형과 같은 한계야. 이것처럼 말야.”
플로렌서의 한 손이 활짝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파천의 뒤쪽에 앉아 있던 영자들 중 하나가 허공으로 빠르게 떠오르며 온몸이 찢어지고 분리되는가 했더니 급기야 작게 뭉쳐져 갔다.
우두두두둑
“으아아악.”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걸 본 파천은 플로렌서의 눈이 한점 동요도 없음을 알았다.
‘이 년은 어쩌면…… 정말 악마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전혀 흔들림이 없을 수가 있단 말이냐?’
“자, 네 정의는 어디 간 거냐?”
플로렌서는 그것만으로는 양에 차지 않았는지 또 한 영자를 끌어 들였다. 손아귀까지 딸려 온 영자는 어찌 된 연유인지 꼼짝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발악이라도 해보는 게 당연할 터인데 무기력하게 두려움에 사로잡혀만 있었다.
“자 보아라, 이놈의 얼굴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살려달라고 내게 애원하고 있다. 자 말해 보라. 저놈과 나 중 누구의 말이 옳으냐?”
“당신……의 뜻이……옳습……니다.”
띄엄띄엄 간신히 뱉어내고는 숨이 찬지 헉헉거렸다.
“보아라, 이처럼 간단하게 신념을 버릴 수도 있음을. 무엇 때문일까? 바로 존재에 대한 집착 때문이다. 소멸되지 않으려는 욕망이 평소 지니고 있던 신념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것이다. 네가 말하고 있는 정의란.
신의 절대성은 힘의 우위일 뿐. 다른 무엇도 아님을 우리가 증명해 보이겠다. 그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우리에게 진정 자유가 없음을, 우리는 노예일 따름이었음을 알게 해주겠단 거다.
너희 용기 없는 자들을 대신해서 우리가 해내겠다는 거다. 알겠느냐, 인간이야. 그러니 잠자코 우리가 하는 일을 지켜보아라. 그 입을 닥치고 말야.“
플로렌서의 손가락이 영자의 얼굴을 파고들었다.
“꺼, 꺼억. 크억.”
영자의 몸은 허공중에서 얼어붙은 듯 빳빳하게 섰다. 플로렌서가 손을 슬쩍 흔들자 영체가 가루가 되어 공간 중으로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잔인한…….”
“파천, 한 가지 비밀을 알려 줄까! 우리 처음의 의도는 모든 영자들을 소멸시키고자 함이 아니었다. 전 영자들을 죽여 그들이 다시 영체를 회복하면 다스릴 계획이었지. 그러던 것이 급격하게 노선을 변경하게 된 이유를 말해 줄까!
그건 바로 다른 차원계와 수련자들의 견제 때문이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루지 못했던 위대한 일을 이뤄냈지. 전 영자의 숙원이었던 영체소멸을 극복해 냈다.“
이어진 말은 파천을 잠시 동안 충격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했다.
“영체복제와 영혼전이에 성공한 것이다. 더 이상 소멸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신이 영자들에게 내린 천형을 벗어버렸다는 의미. 그건 영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지.
각 천상계를 이끄는 수장들은 그 비밀을 알고자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거부했다. 그 결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 것은 영자들의 무리 중에서 이단으로 정죄된 것이었어.
그러나 그들 역시 막상 그렇게 하고 나니 부담이 됐겠지. 함부로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만만하지 않았거든. 술녀자들이 선발되고 천상계와 선계의 신장과 선장이 나서서 우리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 중에 배신자만 나오지 않았어도 이런 참혹한 결과는 없었을 거야.
지금 우리가 먼저 들어선 건 무한계 어딘가에 숨어 있는 배신자 놈을 가려내 처단하기 위해서다. 연후에 전 차원계를 향한 우리의 원대한 계획은 실행될 것이다.
사실 선발대 따위가 광명을 가져오든 말든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 너희가 지목된 건 영계의 시선이 너희에게로 주목되어 있다는 사실, 그것 한 가지 때문이야. 한마디로 운이 없는 거지. 자, 첫 만남은 이것으로 끝내자.
아난다, 수련자들에게 내 말을 전해. 너희들은 가장 비참한 취호를 맞게 될 거야. 너희들과 우리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천적으로 운명지어졌거든, 호호호호.“
플로렌서가 일어서자 두 영자도 함께 일어섰다. 그들이 주점 밖으로 걸어 나가는 동안 그 누구도 감히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파천이 길게 숨을 들이켰다.
“혜능, 모두 사실인가?”
“네.”
“이건……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거로군. 선발대가 조직되고 출행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자들이라니. 그 동안 곪고 썩었던 부위들이 터져 마구 흘러나오는 것 같잖은가. 선발대의 임무는 혹시 이것일지도 모르겠군. 광명을 가져 오는 것이 아니라…….”
아난다도, 아레나도, 앙샹뜨도 착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세월 속에 묻혀진 수많은 강자들가지 출몰하고, 갖가지 이해관계마저 대두되니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아 가는 것 같았다.
아난다는 선발대를 더 이상 이곳에 머물게 하는 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서는 곧장 일으켜 전진하게끔 한다. 그들은 루하스를 떠났다. 선발대의 구성은 여전했다. 권터가 동행하고 아그립바가 파천에게 들러붙은 걸 제외하고는 변화가 없었다.
앙샹뜨는 많이 고민하다가 결국 합류를 거절하며 매우 미안해했다. 부상당한 발락과 가린차는 선발대보다 먼저 떠났고 바이롬과 슈트레 역시나 어딘가로 떠났다. 슈트레는 떠나면서까지 호기를 부렸다.
“내가 다시 나타날 대는 그 누구도 날 무시하지 못하게 될 것이야.”
파천은 그가 다른 조력자를 찾아 떠난 것으로 생각했다.
매소 루하스를 떠나는 선발대의 분위기는 처음 뜰을 출발할 때와는 달리 상당히 가라앉아 있었다. 힘차게 연호하며 배웅하는 무리들도 없었고, 선발대원들이 지니고 있던 막연하나마 근거 없는 자신감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단지 그들 뒤에 몇 개의 시선만이 따르고 있을 따름이었다.
“모두, 모두 물려 나오거라. 이제 잔치는 시작되었다. 영계 사상 가장 참혹한 죽음의 행렬이 이어질 것이다.”
라치오는 어딘가 모르게 들떠 있었다. 평소의 차분하던 모습은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전혀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자 밴살렛이 걱정스런 얼굴러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이것……너무 빨리……진행……되는 것 아냐?”
쿤사는 루하스에 나타났던 대적자들을 생각하고 있는 중이었다.
“저주받은 대적자들까지 나타날 줄은 솔직히 예상 밖이었어. 플로렌서라면 대적자들 중에서도 상위권에 드는 강자가 아닌가?”
라치오는 호쾌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하, 이제 잠자는 대지만 깨어나면 무대는 마련되는 셈인가? 아난다가 쿠사누스였음이 밝혀진 것도 무척 재미있는 일이로군.”
로이는 한 손으로 반짝반짝 윤이 나는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계면쩍은 표정을 했다.
“이것 당최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겠군. 라치오, 우리 너무 큰 판에 끼어든 건 아니냐? 물론 우리가 준비를 철저히 했고 네 능력을 알기에 그리 큰 걱정은 되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한데.”
“너는 그냥 라치오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괜히 모자라는 용량으로 머리 굴리려고 하다간 더 복잡하게 엉키니까 잠자코 따르기나 해라.”
밴살렛이 면박을 주자 로이는 두 눈을 치켜드며 대들었다.
“너, 말 다 했어? 내가 어디가 모자란단 거냐?”
“솔직히……모자라기는 하지.”
그렌달이 로이를 무시하는 발언으로 동조하고 나서자 로이는 방방 뛰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이제 보니 날 아예 바보로 여기고 있었던 거야? 허 참, 어이가 없네. 이런 것들을 친구라고 믿고 생명을 맡겨야 하다니. 내 신세도 참 처량하구나.”
“쓸데없는 소리들 말고 우리도 길을 서두르자. 이제부터는 조금 긴장해야 할 거다. 베붓과 로이, 너희들 박진감 넘치는 전투가 그립다고 했던가? 이제부터는 꽤나 다양한 놈들을 만나게 될테니 그 소원 풀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 가자.”
라치오가 앞장서자 그 뒤를 쿤사를 비롯한 일행이 따른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길에서 자취를 감추고야 말았다.
너울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바다를 가리켰다.
“이 호수를 가로지르는 건 좋지 않을 듯싶군요. 이 호수 바닥에는 메콘이라는 아주 지독한 놈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놈들은 누군가가 호수 위를 가로질러 가는 걸 극히 싫어하지요. 괜히 그들과 부딪칠 이유는 없습니다.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귀찮은 게 사실이거든요.”
너울이 가리킨 것은 바다가 아니라 호수였다. 워낙에 넓어 바다처럼 보인 것뿐이다. 파천은 오랜만에 호수를 대하니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동정호나 파양호에서의 추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제 생각도 너울과 같습니다. 메콘은 떼로 덤벼드는데다 억지를 부리는데 아주 유명합니다.”
아레나의 동의에 모두들 찬성하는 것 같았다. 파천의 머리에 꼭 달라붙어 있던 아그립바가 코를 킁킁거린다. 아그립바는 파천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새끼 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 이것 이상한 냄새가 나는데. 뭔가를 태우는 냄새인데……. 아주 지독하군, 지독해. 내 코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아. 더 이상은 못참겠어.”
스스스스스
아그립바가 이제 제 집이 된 천마환 안으로 쏙 들어가는 걸 보며 파천은 머리를 까닥거렸다.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지? 억!”
그제야 바람결을 타고 흘러들어온 냄새를 맡은 파천은 코를 쥐고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이게 무슨 냄새야?”
파천은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아난다는 공중으로 몸을 띄워 하늘 높이 솟구쳤다. 그의 모습이 까마득한 높이로 올라간 걸 보며 모두는 그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아난다가 다시 일행 곁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좀 전과는 달리 상당히 어두운 것이었다. 그 이유를 파천은 물었다. 대체 무엇을 보았길래 저런 표정인가 싶었다.
“누군가 메콘의 시체더미에다 불을 질러 놨습니다. 족히 수백여구는 되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인지를 모르겠군요.”
“가보지 않았어?”
“가봤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느 쪽이야?”
“정반대의 호수 변 언덕 위입니다.”
아레나는 뭔가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 아난다에게 물었다.
“무슨 표식 같은 건 없던가요?”
“전혀.”
“이 호수를 우회하다 오른쪽으로 곧바로 가면 전사총이 있습니다. 혹시 전사총과 관련 있는 일이 아닐까요?”
“그냥 지나쳐 가죠. 괜히 쓸데없는 일에 희말려 곤란을 겪을 이유는 없을 것 같군요.”
호기심이 왕성한 너울이었지만 근래는 상당히 조심스러워하는 게 엿보였다. 자신감 결여에서 비롯된 변화로 볼 수 있었다. 각시가 단호하게 반대했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서도 모른 척하고 우리 갈 길만 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조사해 봐야죠, 당연히1”
“그러지.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그곳으로 우리 모두 함께 가보자고.”
파천의 제안에 모두가 흔쾌히 동의했다. 너울은 영 내키지 않았으나 모두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쌓아 둔 시체더미의 크기가 점차로 작아지며 형체가 뭉개지는 걸 파천은 단연코 본적이 없다. 어떻게 불길이 저렇게 셀 수 있는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난다는 그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걸 보며 파천이 기겁을 했다.
“대체 어쩔 셈이야?”
맹렬한 불길도 그의 옷자락이나 터럭 하나 상하게 하지 못했다.
아난다는 그 안에서도 전혀 열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시체더미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다시 일행에게로 다가오자 불길은 점차 사그라들었고 끝내는 꺼져 버렸다. 아난다의 손에 들린 건 작은 돌 세 개였다.
“마호석이로군요.”
“누가 왜 이런 짓을 저질렀을 까요?”
아레나의 의문은 모두가 지닌 것이기도 했다.
아난다는 불길이 잦아든 시체더미 속에서 작은 단서나마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뒤적이고 다녔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지 그는 멀찍이 떨어져서 시체들을 허공중으로 모조리 띄워 올렸다. 그는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때다. 파천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아레나에게 물었다.
“저 시체에 삐죽 튀어나와 있는 건 뭐지? 검의 손잡이 같은데?”
파천이 발견한 걸 아난다도 보았다. 그의 손에 그 물건이 쥐어진 뒤에야 그것이 파천의 말처럼 단검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한자 가량 되는 검신의 옆면에는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파천은 보아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너울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전사총까지 가봐야 알 것 같은데……. 정말 가실 겁니까?”
그 말은 단검이 전사총의 것이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너울은 이번에야말로 제 의견을 관철시키고자 했다.
“전사총의 묘지기들은 괜한 시비를 걸어올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성격이 괴팍하고 엉뚱한 것을 잘 아시잖습니까?”
결론은 전사총까지 가는 것만은 반대라는 의미였다.
아레나 또한 그다지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녀가 피하자고 했던 곳 중의 한 곳이 바로 전사총이었음을 파천은 기억해냈다.
“궁금해서라도 가보고 싶은데, 다들 생각이 어때?”
파천이 또다시 그렇게 말하고 나서자 이번엔 너울도 양보하지 않고 맞선다.
“괜한 호기심이라면 제발 참아 줘라. 웬만하면 나도 이러지 않겠는데…… 이번엔 왠지 기분이 그리 썩 좋지 않아.”
자신의 직감을 믿어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너울과는 달리 다른 이들은 별로 반대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아난다 님, 정말 전사총에 가볼 생각입니까?”
“아무래도……그래야 할 것 같네요.”
결론은 났다. 너울은 결정된 것에 대해서는 단념이 빨랐다. 그는 신형을 돌려 먼저 움직여 갔다. 그걸 보며 아레나가 머리를 짚었다.
“삐쳤군.”
각시가 아레나의 옆에서 피식 웃었다.
“그럴 만하지. 예전에 너울이 전사총에서 봉변을 당한 적이 있었으니. 그때 망신당한 것 때문에 한동안 많이 놀림을 받았으니 그 심정은 알만하다만……. 그래도 어쩌겠어? 양보하는 수 밖에.”
너울의 뒤를 선발대가 바짝 따라붙었다.